며칠전 경향신문의 연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첫회를 옮겨놓았었는데 그 두번째 이야기가 연달아 게재되었다. 따로 옮겨놓을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S님이 상기시켜주는 바람에 부랴부랴 퍼놓고 며칠 뜸들이다가 몇 자 적는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가 기사의 타이틀이지만 잠시 유행하던 제목을 본떠서 '그 많던 지식인들은 어디로 갔을까?'라고 새로 제목을 붙여서. 사실 유사 타이틀을 단 책이 나오긴 했었다. 프랭크 퓨레디의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청어람미디어, 2005)가 그 책이다.

 

나는 생각난 김에 어제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했고, 또 덩달아 생각난 김에 파스칼 오리 등의 <지식인의 탄생>(당대, 2005)의 몇 대목도 복사했다. 죽음은 언제나 탄생의 장면에 대한 회고를 불가피하게 불러일으키기 때문인데, <지식인의 탄생>은 사실 지식인의 그 쇠잔해져 가는 운명을 끄트머리에서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한 책에서는 "정치적 인간의 상황에 처한 창조자 또는 매개자로서의 문화인, 이데올로기 생산자 또는 소비자"로 다소 번잡하게 정의내리고 있지만, 사르트르의 정의가 훨씬 간편하고 유용하다. 그건, "지식인이란 자기와 상관도 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더 간단히 말하자면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 바로 지식인이다.

고종석은 그 사르트르의 말을 이렇게 풀었다. "지식인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다. 그 말을 바꾸면 지식인은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사르트르는 더 나아가 지식인은 자신의 지적 영역에서 쌓은 명성을 "남용"-사르트르에게 이 "남용"이라는 말은 당연히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다-하여 기존의 사회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바로 이 "남용"이야말로 지식인의 본질적 부분이고, 어떤 체제, 어떤 시대에도 지식인이 처할 수밖에 없는 불편함을 설명해주는 개념이다."(<코드 훔치기>)

경향신문의 연재에서 지식인이란 말은 좀더 두루뭉술하게 사용되는 듯하다. 가방끈 긴 이들 가운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내세우면서 행세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는 게 아닌가란 인상이다. 그러니까 거기엔 (러시아식 계보의) 인텔리겐치아와 (영미식 계보의) 인텔렉츄얼이 혼합돼 있는 듯싶은데(다양한 분포는 그래서 나오는 것 아닐까?), 그건 좀 비생산적이다. '지식인이 처할 수밖에 없는 불편함'을 거론되고 있는 인사들이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기도 하고. 해서 '지식인 생태학'에 관한 참고자료로서나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지식인의 죽음과 지식인 지도가 양립가능한가?).   

경향신문(07. 04. 25)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2.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지식인 사회가 분명한 ‘민주 대 반민주’ 전선으로 양분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지식인 사회는 ‘사상해방’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게 분화됐다. 반공주의자는 냉전적 사회인식이 힘을 잃어가면서 세가 줄었다(*'반민주적 지식인'이 가능한 포지션인가?). 특히 2000년 6·15공동선언 등 남북한 화해무드가 지식사회 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파 지식인들도 반공주의를 배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민족주의자의 경우 위세는 여전하지만, 인권·시민사회· 탈민족주의자의 부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너도 나도 자유주의를 자처할 만큼 자유주의자가 증가하고 있다. 노동, 성, 환경 등 다양한 주제가 등장하면서 지식인의 분포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부상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동아시아론’ 등 대안 담론의 도전을 받고 있다. 좌파 지식인들의 우파 전향 및 ‘중도선언’이라는 새 경향도 나타났다. 80년대 중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포기한 좌파 경제학자 안병직(뉴라이트재단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을 비롯해 90년대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김영환(시대정신 편집위원), 신지호(자유주의연대 대표) 등 ‘주체사상파 운동권’들이 전향했다. 최근 홍윤기(동국대 교수), 황석영(소설가) 등은 ‘급진적인 좌파나 경직된 우파가 아닌 통합적 대안으로서의 중도’를 천명했다.

경향신문은 최근 이들의 사상 궤적을 토대로 ‘2007년 한국사회 지식인 지도’를 작성했다. 정치·경제·사회 이념의 좌우 성향(가로축), 민족주의 성향 여부(세로축)로 한 2차원 공간에 주요 지식인을 배열했다(*표 자체는 옮겨오지 못했다). 두 축의 교차점에서 멀수록 이념적 특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강정구(동국대 교수)와 강만길(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좌파 성향에 차이가 있지만 민족주의적 특성이 강하다. 강정구는 좌파 민족주의자,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는 좌파 탈민족주의자, 복거일(문화미래포럼 대표·소설가)은 우파 탈민족주의자를 각각 대표한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우리의 지식인 이념 분포 양상은 서구 사회와 다르다. 서구적 틀로는 좌파가 탈민족주의, 우파가 민족주의 중심으로 분포하지만 우리는 좌파민족주의 지식인들이 많다”며 “이는 김구 등 우파 민족주의 그룹이 몰락하고 나서 수십년간 반공체제가 공고해진 탓”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자
좌우 이념 성향에 따라 북한체제의 포용 및 통일 방식의 개방성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좌파 민족주의자는 ‘분단 국가의 일부’로서 남한이 가진 정체성의 한계를 강조한다. 70년대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써 통일지향의 필요성과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 강만길, 남북한 모두의 내부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통일(분단체제론)을 주장한 백낙청(‘창작과 비평’ 편집인·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진보적 민족주의자다. 급진적 좌파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북한도 우리의 일부’란 시각에서 반외세 자주 통일을 지향한다. ‘민중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는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강정구, 송두율(독일 뮌스터대 교수)이 있다. 우파 쪽의 대표적 인사로 신용하(독도학회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서길수(고구려연구회 이사장·서경대 교수) 등이 있다. 남한 체제 우위의 통일을 추구하거나, 통일보다는 대외 영토·역사 문제에 천착한다. 중도적 민족주의자로는 ‘전통 문화·정신’을 강조하는 김지하(시인·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를 들 수 있다. 북한을 타도 대상으로 보는 통일지향 세력으로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인사로는 97년 월남한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들 수 있다.



#좌파·진보주의자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결함을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 진보적 시민사회론, 근대비판주의 등으로 분화해 있다.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사회 구성과 발전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을 강조한다. 특히 불평등 문제를 주시한다.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장상환(경상대 교수)은 현실 참여를 통한 사회 개선을 추구한다. 오세철(연세대 명예교수)은 좌파 학자들 위주로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인 진보적 사회과학대학원의 설립을 추진중이다. 손호철(서강대 교수)은 계급·민중적 시각의 사회평론에 적극적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그룹으로는 문화주의, 트로츠키주의, 자율주의자가 있다. 문화주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는 한편 자본주의 체제 내 문화가 계급 및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본다. 강내희(중앙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민단체 ‘문화연대’를 통해 음악 저작권 강화 반대, 18세 선거권 낮추기 운동, 외국인 노동자 문화축제 등을 펼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 정성진(경상대 교수)은 국가 단위의 자본주의 극복이 아닌 세계 수준의 혁명을 추구한다. ‘노동계급의 국제연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같은 노선에는 국제사회주의 단체 ‘다함께’가 있다. 자율주의자 조정환(갈무리출판 대표)은 스탈린식의 일당(전위당) 독재를 거부하고 노동자 자율에 의한 혁명과 발전을 추구한다.

진보적 시민사회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사회변화의 주체를 ‘억압 당하는 노동계급’이 아닌 ‘시민’으로 본다. “민중이 자신의 다양한 이익을 체제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주의 담론이 이와 연계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김상조(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운영위원 조국(서울대 교수)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근대비판주의 지식인의 스펙트럼은 넓다. 페미니즘, 생태주의, 탈근대론 등 체제 비판 이론이 다양하게 분포해 있다. 국가주의, 개발론, 민족주의 등 근대적·권위주의적 담론을 거부한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사회체제가 가지는 폭압적 구조를 반대한다. 여성운동의 대가 이효재(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시작된 페미니즘은 ‘여성의 신체’(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에서 ‘여성노동자’(조순경 이화여대 교수)까지 논의의 폭을 넓혔다.

생태주의는 ‘대안적’ 삶·사회를 꿈꾸는 급진적 개발반대론이다. ‘지속가능한 발전’(환경주의)을 넘어 ‘인간의 탐욕’이란 문제 의식에 기초해 “생태 문제를 최우선시하고 생태가치를 생활의 전반에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종철(녹색평론 대표), 장회익(녹색대학 석좌교수)이 있다. 탈근대론자들은 ‘민족주의 비판’(임지현 한양대 교수), ‘냉전적 국가론 비판’(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소수자 소외 비판’(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을 통해 가부장적 획일주의, 순혈주의를 비판한다.

#우파·보수주의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반대, 자본주의 지향을 유지한다. 반공주의, 반공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뉴라이트, 시장자유주의 등이 분포하지만 각각 명백히 구분되지 않은 채 혼재된 양상이다. 반공주의 지식인들은 ‘정통 보수’를 자칭하며 ‘대한민국의 법통’을 강조한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대한민국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한·미동맹과 보안법을 최우선시한다. 조갑제(전 월간조선 대표)가 이 그룹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산업화 세력’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폄훼 시도를 적극 방어하는 이들은 “뉴라이트는 위장 전향한 빨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뉴라이트는 신지호 및 홍진표, 최홍재(각각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조직위원장) 등 ‘전향 386’들이 주도하는 ‘신우파’ 그룹이다. 자유주의, 북한인권 중시, 대외개방 및 시장주도 경제, 기간산업 민영화 등을 주장한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에서 드러나듯 “자폐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애국적 세계주의를 지향”한다. 대외 개방을 중시하는 탈민족주의자들이다.

“전통적 반공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사회 담론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지호의 지적처럼 뉴라이트 그룹은 최근 보수진영의 사회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의 창달을 통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추구하는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박세일(서울대 교수), “자본주의의 참담한 모순만 다룬, 잘못된 역사쓰기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박효종(서울대 교수)이 같은 노선이다. 시장자유주의는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는 복거일, 자유시장 경제 지상론을 펴는 민경국(강원대 교수), 좌승희(경기개발연구원장) 등이 있다. 경제·통상 이슈에 집중하며, 정부의 시장개입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작은 정부론’을 주창한다.

#자유주의자
국내 자유주의 개념은 포괄적이며 모호하다. 사회복지를 내세우는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와 시장자유주의(libertarianism) 모두 자유주의로 해석된다. 최장집과 신지호 등 좌우파 지식인들이 모두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 상대적으로 이념 성향이 강하지 않은 지식인 그룹을 자유주의로 분류된다. 좌파와 우파를 넘나드는 총체적 시각으로 현상을 비판한다. 사회주의나 군부 독재 하에서의 ‘동원체제’ 등 억압적 권위를 거부한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은 자유주의자를 “열려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 연대하면서도 패거리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며 “사회의 여러 이념들 간의 괴리를 메울 수 있는 지식인”이라고 정의했다. 최근 ‘중도’를 선언한 홍윤기(동국대 교수)가 자유주의자 가운데 상대적 좌파, 유럽적 우파로 통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출신의 이근식(서울시립대 교수)이 상대적 우파로 분류된다.(장관순·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25)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87년 이후 지식인상의 변화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지식인상은 저항적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가 역설한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은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는 명제는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은 80년대 대학 신입생의 필독도서였고, 그들을 새로운 현실로 인도하는 안내서였다(*나도 대학 1학년때 읽은 기억이 있다).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자각하는 것이 사회와 현실로 나아가는 초대장이었던 셈이다.



-탈근대화, 천대받는 ‘진실’-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강연회에서 종종 지식인과 민중의 관계를 칼날과 칼등의 관계로 비유하곤 했는데,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지식인들은 비유 그대로 ‘민중의 칼날’이었다. 당시의 현실에서 지식인은 근대적 합리성과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많이 교육받은 존재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담지자로 기능했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이들에 의해 만질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 실재로 감지됐다. 민중의 계몽가이자 선구자로서 지식인은 사회의 각 영역에 큰 자취를 남겼다.

시대의 선생으로 불린 함석헌과 리영희의 저작들, 장준하(*사진)의 선구적 활동, 백낙청과 김현이 주도한 비평의식의 고도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탈춤과 같은 민중 문화의 재발견 등은 그러한 현상의 몇몇 예에 불과하다. 70, 80년대에 걸쳐 지식인은 민주화 투쟁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린 교사였으며, 특정한 의미에서 ‘민족’과 ‘문화’의 창안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일들은 추억 속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굳이 푸코나 리오타르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이 현저하게 추락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다양하게 설명돼야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같은 세계사적 전환이 바탕을 이루며 거기에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천이 조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밑바닥에 탈근대적 현실이 있다.

근대 극복을 목표로 출발한 탈근대주의는 근대가 창출한 각종 제도, 가치, 개념, 역사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데 일조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근대에 이르러 ‘만들어진 전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현실과 진실의 관계가 흔들렸다. 과거에는 현실을 깊게 파고들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진실’이라는 단어가 천대받은 적이 있었던가? 총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현·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탈근대주의가 가르친 진실이다.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여전히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이거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인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됐다.

여기에 사회주의의 붕괴로 대표되는 이념의 붕괴는 한국 지식인상의 변화에서 기억할만한 사건이다. 박노해나 조정환, 이진경처럼 이 무렵 새로 등장한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채 선배 세대인 4·19세대, 유신세대와 자신들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시작되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러한 구분법의 의미도 모호해졌다. 이념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사상의 해방을 몰고 왔다. 분수처럼 사상이 흩어졌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급진좌파에서 뉴라이트로, 헤겔에서 들뢰즈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오늘날 한국 지식인 사회는 사상의 백가쟁명 시대를 새롭게 관통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상의 대변인으로서, 혹은 안내자로서 지식인의 사회적 입지는 현저하게 약화됐다.

아마도 지식인을 날것의 현실로 끌어내린 직접적인 계기는 외환위기일 것이다. 자살이 속출하고 노숙자로 넘쳐나는 거리가 매일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신지식인’이다. 현재까지 3316명이 선정된 것으로 알려진 신지식인은 외환위기 속에서 경제적 가치창출이라는 일반적 목표에 국민을 동원하려는 상징조작이었다. 신지식인은 한편으로는 기존 지식인의 권위에 기대면서도 수량화, 물질화, 공유화라는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지식인의 ‘유용성’에 강력한 의문부호를 새겨놓았다(*사실 '기회주의'는 지식인의 근본조건이다. 지식인의 '결단'은 기회주의적 조건에서 파생되는 것이기에).



-IMF뒤 평등에서 양극화로-
외환위기의 극복이 신자유주의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귀결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강화되었다. 신지식인은 이제 하나의 해프닝이 되고 말았지만, ‘인문학의 위기’는 필연이었다.
자본의 거칠 것 없는 자유와 제국으로의 수렴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담론의 중추를 민주주의로부터 돈으로, 평등과 인권으로부터 양극화와 개방으로 옮겨놓았다. 황우석이 찬양되던 시절, 각종 뉴스는 앞으로 벌어들일 로열티를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곳에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지식인, 아니 환산되어서는 안 되는 지식인이 설 자리는 없다. 또한 황우석 사태는 지식인의 보루였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마지막 옷고름을 풀어헤쳤다. 연이어 고위공직자나 총장 등의 표절사건이 불거지면서 ‘지식인의 종언’은 엉뚱한 방식으로 현실화됐다. 이것을 ‘관행’이라 하던데, 그렇다면 그러한 관행으로 지탱돼 온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을 누가 존경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그의 자산인 ‘지식’은 인터넷이 대신하며, 그의 도구인 ‘글쓰기’는 댓글보다 읽히지 않는다. 그의 언어인 보편성은 의심의 대상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뢰성을 썩 잃었다. 시대의 양심이란 칭호는 역사책에나 둥지를 틀었다.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무한대로 상승했지만 지식인의 가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추락했다. 교양과 지적 유희를 제공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의 효용성은 거듭 강조되지만, 이를 종합하고 비판할 지식인의 필요성을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실 민주화라는 지상과제와 총체성을 강조하는 거대담론의 존재는 사상과 이론의 성찰을 억압해왔다. 이로부터 해방된 지식인들은 낡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근본을 파고들었다. 근대성, 젠더, 민족주의, 기억, 일상권력 등이 비판목록에 오르면서 전선(戰線)은 갈라졌고 심화됐다. 문제는 ‘부분’에 대한 비판이 ‘전체’로서 존재하는 권력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하는가이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지식인의 기능화 양상은 지식인 자신이 부분성에 매달려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최근에 지식인과 관계된 논의가 여전히 하나로 존재하는 ‘국가’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황우석 사태가 애국주의의 광풍을 등에 업고 등장·확산됐던 상황, 현재 진보진영이나 보수진영 모두 ‘선진(화)’ 담론을 둘러싸고 경쟁적으로 국가정책 마련에 부심하는 경향, ‘인문학의 위기’론이 국가의 지원 요구로 귀결되는 풍경, 학술진흥재단이라는 국가기관이 학문의 기반을 좌우하는 현실 등은 지식인의 국가종속성 내지는 국가지향성을 강하게 예시한다.

이런 상황은 지식인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권력의 민주성 문제만이 초점일 수 없다. 많은 논의들이 국가로 수렴될 때 그로 인해 가려지는 부분들이 상당하며 그런 부분들이 오히려 지식인의 질문과 대답을 기다리는 곳일 수 있다. 따라서 질문은 지식인들이 ‘민주화 이후’의 국가에 대해 얼마나 지혜롭게 대응하고 있는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권력은 민주화되었을지언정 지식인의 국가론이 지혜로워졌다는 증거는 많지 않다. 국가와 지식인의 관계 설정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그간 일어난 지식인상의 변화 중 ‘독립적 지식인’의 확산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강준만, 박노자, 고미숙, 이정우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탈근대적 사유에 기반을 두면서 탈권위주의, 다원화 그리고 ‘대중’과의 직접소통을 지향한다. 여러 방면에서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과 다른 차원을 선보이는 이들의 활동은 향후 지식인상의 갱신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과 다른 궤도에 속하지만 공병호나 이덕일처럼 직접 대중을 상대로 한 자유저술가의 확산도 현 단계 지식인상의 또 다른 변모 양상을 보여준다.

-새로 떠오르는 ‘대중지성’-
최근에 ‘대중지성’ 개념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도 지식인의 몰락과 대중의 등장이라는 현상과 연관이 깊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자율주의에 기반한 ‘다중네트워크’가 주도적으로 제창하고 있는 이 개념은 지식인의 위계적, 엘리트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대중을 근원에 두는 새로운 지식 창출·향유 방식을 겨냥한다. ‘대중지성’은 계몽주의적 지식인의 역할이 한계에 봉착하고,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이자 창조자로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과 변별되는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지식의 창출과 향유가 지식인의 일이었던가?).

한국 사회의 물질적, 구조적 변화를 빠트리고 지식인상의 변화를 말할 수 없다. 서울대 입학생 중 상류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가는 현실을 덮어둔 채, 소득격차가 학력격차로 이어지고 학력격차가 신분고착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말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박사가 최고고 학연과 인맥이 우선시되는 문제를 괄호치고 지식인상을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가 아닌가. 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지식인’은 되새겨져야 할 화두이다. 과거에도 지식인은 학력과 신분으로서 규정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할 길을 묻는' 같은 문구는 상투형이다).(박헌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

07. 04. 25-27.

P.S. 지식인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란 말은 절반만 옳다. 자본가/노동자는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라는 주장과 견주어서 그렇다. 지식인은 중간자적, 어중간한 존재이기에 '존재'만으로 자신을 입증할 수 없다. 거기엔 필연적으로 '행위'가 개입되어야 한다.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할 때 '비판적'이란 어사가 가리키는 게 바로 그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이란 말은 언제나 '비판적 지식인'을 가리키며 스스로의 존재를 담보로 내걸었기에 언제나 '위기에 처한 지식인'을 지시한다. '지식인'은 레떼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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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4-25 17:48   좋아요 0 | URL
^^ 윤건차 교수의 책에다 구 맑시스트들과 YS,DJ에 적극 참여했던 멤버들을 좀 가려내고 정리한 듯 합니다..ㅍㅍㅍ 스스로 좌파가 아닐까 고민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겠네요.(나 보다 왼쪽이면 좌파..주변 친구들보다 진보적이면 좌파)...^^ 저 좀 분석해주세요.전 좌파 민족주의자 1컵, 문화주의자 1컵,트로츠키주의자 1컵, 진보적 시민운동 1컵,근대비판론 1컵,생태주의 1컵,사회적 자유주의 1컵 ... 으로 섞여있는데...일단 '뉴라이트'는 아닌 것 같긴해요..정답을 찾자 끙끙..

정답은 '폭탄주'....아님 ..'맹물' ^^ (..2번이네)

...제가 어떤 님 페이퍼에 남긴 글이 생각나네요.스스로 '좌파' 라고 의심하셔서(제가 보기엔 별로 '좌파'같지 않던데.)'좌파'가 무얼까요? 라고 말이죠...
저는 평생 '폭탄주'나 '맹물'로 살 듯 합니다.ㅜㅜ 에잇.

로쟈 2007-04-27 20:13   좋아요 0 | URL
저로선 지식인의 죽음을 진단하면서 지식인 지도를 작성하는 일이 코믹하게 여겨집니다. 포스트모던한 현상이거나...
 

금요일(한겨레)과 수요일(한국일보)를 제외하면 내가 주로 가판에서 조간으로 집어드는 건 경향신문이다. 아마도 작년 하반기에 연재된 '진보개혁의 위기'란 '특집기사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기획력과 기동력이 있는 신문으로 새롭게 각인된 것이다. 이 연재는 올봄에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후마니타스, 2007)으로 묶여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읽히는데,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기획기사가 오늘 아침신문의 특집으로 실렸다(한동안 연재될 듯하다). 민주화 이후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감소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라 '유예돼 왔던' 죽음이라 고 해야 할 텐데, '한국의 사례'로 읽어두고 옮겨놓는다(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분기점은 김대중 정부에서의 '신지식인론'이었다. '항소'나 올리는 전통적 지식인상에 '사약'을 내린 격이 아니었을까?).   

경향신문(07. 04. 23) 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

서울대 경제학부 김수행 교수는 1989년 3월부터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마르크스 강의였다.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300명 규모의 강의실은 매번 만원이었다. 비좁은 계단을 파고들어 앉아 기어코 강의를 들었다. 91년에 이 강의를 수강했던 신모씨(36)는 “중간·기말 고사 때 1000여명이 모여 시험을 치르느라 건물 한 동을 다 빌릴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지난달 30일 오후 1시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김교수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가르치고 있었다. “케인스는 상당히 훌륭한 경제학자예요. 자기가 살던 시대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현대마르크스 경제학’ 과목. 이날 수업은 케인스의 유효 수요 이론과 장기 정체설에 관한 것이다. 210명 규모의 강의실에 40여명의 학생만 앉아 있다.



조교 정상준씨(32)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업에는 안 들어와도 시험 때 들어와서 밖에서 토론하고 ‘학습’한 가락으로 일필휘지 답을 적고 나가던 ‘고수’들이 있었다. 지금은 강의를 열심히 듣지만 판에 박힌 답안만 제출한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요즘 학생들을 보면 다들 취업에 너무 매달려. 신입생 때부터 그래. 이해는 돼. 대한상공회의소 이런 데서는 성적표에 마르크스 경제학 표시가 돼 있으면 ‘이런 수업을 왜 들었느냐’고 물어본다지”라고 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김교수는 요즘 후임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경제학부 교수가 34명인데 미국 박사가 31명이야. 비주류 경제학은 나 하나뿐이야. 올해 내가 정년퇴직하면 비주류 경제학이 없어질지 몰라. 요즘 새로 들어온 경제학과 교수들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 마르크스 경제학을 둘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가진 젊은 교수들이 많아.” 이 문제는 비주류 경제학자를 뽑을 것인가라는 단순한 임용 문제가 아니라 한국 지식 사회에 비판적 지식인의 재생산 구조가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학부 시절 김교수의 ‘마르크스’ 수업에 열광했던 인문학자 고병권씨는 ‘지식인의 비극적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김교수 같은 분들의 글이 잡지에 실리면 논쟁에 불이 붙고, 대자보도 붙이고 했는데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제는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고 말하는 이도 드문 세상이 됐다. 실용과 부가가치 창출은 대학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일부 대학의 국문학과는 ‘시나리오 학과’로 명칭을 바꿨다. 대학가 인문과학서점은 하나 둘 줄더니 요즘 대부분 문을 닫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걸쳐 전개된 ‘지식기반사회’ ‘지식기반경제’는 우리 사회가 지식을 비판이성의 관점이 아닌, 산업으로 수용하도록 주입시켰다.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시민’의 육성이 아닌, ‘시장반응형 인간’ 양성으로 변했다. 기업은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경제교과서를 만들어 노동을 모욕하고 재벌을 찬양하는 세상이 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지식인’이란 명사를 동사로 만들었다. 지식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지식iN’ 네트워크와 검색툴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식은 붕어빵처럼 대량생산되는 복제품이 된 것이다. 한때 시대 정신을 선도했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저술활동은 쓴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들만 읽는, 틀에 얽매인 지루한 논문들로 대체되고 있다. 학자는 ‘논문 작성 노동자’로 변모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풍경이다.(김종목·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23) 2007년 한국 지식인의 풍경

“지식인의 몰락 또는 위기 담론에 동의하는가.” 특별취재팀이 지식인들에게 던진 물음이다. 한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위기’니 ‘몰락’이니 하는 건 그 이전 지식인이 큰 힘을 쓰던 시절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건데, 과연 그랬던 적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김진애(도시건축가)는 “‘합리적 대안 생산자’ ‘대승적 소통자’로서의 지식인 역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진애는 “‘지식인의 ‘위기’니 ‘몰락’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고 말했다.

87년 이후 민주화 20년을 맞아 등장하고 있는 지식인의 죽음 논쟁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관 주도로 전 국민을 직업과 지위에 관계없이 신지식인으로 만들겠다는 김대중 정부의 발상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의 개편과 교체를 예고한 서막이었다”고 말한다.

98년 12월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12차 경제대책조정회의. 김태동 정책기획수석이 학력 위주의 지식인 개념을 독창성·능동성 위주로 확장시킨 ‘신지식인상’을 보고했다. 이듬해 초 신지식인 찾기 운동이 ‘제2의 건국’ 캠페인과 맞물려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용가리’로 272만달러 수출 계약을 성사시킨 심형래씨가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었다. 그는 신지식인 광고에 나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당신도 신지식인입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부가가치 창출의 다른 말이었다. 졸지에 ‘구지식인’으로 몰린 지식인들이 반발했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우리 사회가 지식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엄격한 비판정신과 사회적 책임감에 있을 것이다. 신지식인은 이러한 지식인의 근본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한다(경향신문 99년 4월29일자 칼럼)”고 했다.



지식인은 이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자’가 되었다. 지식인은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고 있다. 권력에 위험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키워지고 있다. 교육부 정식 명칭은 교육‘인적자원부’이다. 사람을 어떻게 효율적인 생산 수단으로 만드는가를 고민한다는 뜻이다. 교육부가 2005년 대통령 보고에서 “다양화·특성화된 ‘시장반응형’ 인력을 양성”하고 “지식기반 경제의 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산학연 협력 활성화’를 통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시장반응형 인적 자원? 이들이 바로 새 세대의 지식인이 될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학자들이 있는데 우리 사회가 쉽게 이런 새 세대 지식인들에게 압도당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의심스러워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학자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한 교수가 말한다. “대학 교수에게 중요한 게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연구 업적이고 또 하나는 연구비를 따오는 거예요.” 그는 자기 학교에서 우수 교수 평가 기준은 ‘연구비 수령 건수와 액수’라고 전했다. 이런 현상은 학계의 ‘빅브라더’ 한국학술진흥재단과 관련이 있다.

이른바 ‘학진’이란 약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연구 지원 기관은 학계의 거대한 지배자다. 학진의 힘은 연간 1조원 가량을 쓴다는 사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관의 연구비 지원을 받으려 경쟁하는 체제, 이것이 한국 학술의 레짐(regime·체제)이다.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온 김모씨. “전 에세이식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학진 체제 아래서는 빛을 볼 수 없어요. 학진은 정형화된 논문식 글쓰기밖에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어진 김씨의 말. “이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 마감 맞추는 걸 가리키는 말이에요. 좋은 평가로 연구비 지원을 받아 먹고 사는 ‘논문 작성 노동자’만 수없이 양상되는 거죠.” 그는 “학진 체제 아래 지식인들이 신음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계간지 편집장은 “학술지 또는 계간지에서 그야말로 ‘재미있는’ 글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담론 논쟁을 주도하는 경우도 거의 없어졌다. 모두 학진 등재지에 딱딱하고 재미없는, 심지어는 같은 전공자들도 안 읽어줄 글을 쓰느라 밤 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틀에 박힌 지식을 재생산하는 데는 학진 체제가 유용할지 몰라도, 한 시대를 뛰어 넘는 창의적인 저술, 그 저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라는 지식사회의 풍경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느 대학 교수는 “예전에는 권력이 정부에 반대되는 글쓰기를 통제하는 정도였다면 지금 학진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식인들의 글쓰기를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문 성과? 최근 한 문화재단에서는 학술상 심사를 벌였다. 심사위원 5명 중 2명이 추천대상을 내놓지 않았다. ‘사회개혁·발전과 학문업적을 연결시키는 저작’이 수상 요건이었지만 적격자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다수 학술상 주최측이 수상 요건 미흡 때문에 수상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논문의 양은 갈수록 늘지만 ‘성과’라 할만한 결과물은 갈수록 줄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교수들은 이런 체제에서 행복할까? 요즘 교수들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사귀는 데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어느 방송 진행자는 “최근 모 대선 주자 캠프 소속의 지식인이 참여한 정치 관련 토론을 진행하다, 그 지식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걸 봤다”고 말했다. 이런 살기어린 토론은 교수와 정치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잘 나가는 대선 주자 캠프에 지식인 수백명이 줄서 있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니다. 어느 대학 교수는 지식인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3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①정·관계에 진출하려면 대학에 사표를 내야 한다. ②대학에 있으면서 특정 정치 집단의 브레인이 되면 그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 ③각종 위원회에 참여한 경우 그 활동을 통해 얻은 금전적 수입과 활동내역을 대학에 보고해야 한다.

부수입 올리고 영향력 행사하며 재미는 다 보고, 학생 가르치기는 소홀히 하는데도 ‘업적평가’ 점수를 덤으로 받는 이들이 오늘날 대표적인 지식인의 한 모습이다. 이렇게 정치권력에 종속되거나, 아니면 저항하거나 양 극단 사이에 방황해 온 것이 한국 지식인 사회이다.



기성 지식인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 메카니즘이 고장난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더 이상 지식인은 막걸리 집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강의실에서의 논쟁을 통해, 감옥의 사색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다. 지식인은 미국이라는 거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은 지난달 말 미국을 제외하고 올해 가장 많은 학부 합격생을 배출한 국가는 한국이라고 밝혔다. 35명이다. 불과 두자릿수라서 적다고 여겨진다면, 미국 이민세관국(ICE)의 최근 발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ICE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미국 내 외국인 학생 중 한국 출신이 9만3728명으로 전체(63만998명)의 14.9%를 차지, 국가별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미국 고등교육전문 주간신문 ‘고등교육 연감(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에 따르면 99년에서 2003년 사이 미국 박사 학위 취득자의 학부를 조사한 결과, 서울대가 1655명으로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의 주권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지식인은 ‘경제권력’과도 잘 어울린다.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지 못해 안달이고, 산학협동은 ‘산학일체’로 진화중이며 대기업 연구 용역비를 받는 상당수 교수들은 재벌개혁 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경향신문(07. 04. 23) 지금 왜 지식인이 문제인가

지식인은 신분적 특권이나 재산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힘을 행사한다. 지식인과 그 출신 배경이 반드시 직접적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지식인의 지식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지식인의 자유로움에 대한 주장은 이런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지식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독학으로 유명 지식인이 된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식을 통해 힘을 행사하는 정도의 지식인이 되려면 권위 있는 교육기관에 소속되어 오랫동안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동안 지식의 습득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학(同學) 끼리 유대 관계도 맺어진다. 이른바 학벌(學閥)이라는 것은 이런 친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지식인은 한편으로 신분과 계급으로부터의 상대적인 자유로움과 독립적인 사고를 자랑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집단의 이익을 위해 결속을 하며 문화적인 동질성을 도모한다.



집단으로서의 지식인은 두 가지 다른 집단을 상대한다. 하나는 지배 엘리트로서 정치적, 경제적 지배 집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피지배 집단인 일반 대중이다. 지식인은 지배 엘리트와 결탁하기도 하고, 피지배 집단에 봉사하기도 한다(*그러한 지식인상의 원조가 러시아 인텔리겐차이다).

전자의 경우 지식인은 기존 체제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며 지배집단의 헤게모니를 정착시킨다. 후자의 경우에 지식인은 현 지배체제의 착취구조를 폭로하며 대중의 혁명의식을 고취시켜 새로운 지배체제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체제 고착이든 체제 전복이든 지식인은 자신의 무기인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어느 경우에나 지식인의 힘은 자신의 이해 타산을 숨기면서 공정하고 보편적인 수사학을 동원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지금의 체제가 강고하게 버티건, 아니면 뒤집어져서 새로운 체제가 되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 지식인이 지닌 관점을 보편성의 준거로 삼으면서 그의 상징적 권력을 인정해주는 상황이라면 지식인은 어느 쪽이라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어떠한가? 그럴 경우라면 지식인의 위기를 논하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으로서의 지식인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위기에 처한 한말과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던 일제시대이다. 기존 신분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권력 기반이 형성되는 상황에서 지식인은 당시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질곡에서 벗어날 방향을 일반 대중에게 알려주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했다. 망국의 울분을 토로하고, 독립의 희망을 간절하게 표현하면서 지식인은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구자로서 인정받았다. 더구나 위기상황 돌파의 유력한 방법으로 교육을 통한 체제 갱생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지식인은 자신의 재생산 기반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그동안 민족독립의 공통분모 아래 억눌려있던 지식인 집단의 다양한 노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의 냉전 상황에 따라 좌우의 극단적 대립을 보이면서 지식인은 양극화되었다. 이런 대립은 결국 한국전쟁으로 나타났고, 휴전과 더불어 남쪽과 북쪽의 체제는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섬기면서 서로 이질적 이데올로기의 배제와 탄압에 골몰했다. 우파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게 된 남쪽의 경우 지식인 집단은 민족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북쪽과의 경쟁에 적극 참여했다.

좌우의 민족통합 이데올로기가 억압된 상태에서, 1970년대의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경제성장을 위한 개발독재의 옹호,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인권과 민주화 지향 노선으로 나뉘어 복무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하여 대부분의 지식인은 우리 사회의 인권과 민주화 노선의 역사적 타당성에 동의하게 되었다.

민주화 노선이 대세를 점하기 시작한 1987년부터 지금에 이르는 20년 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인권과 민주화의 명제를 확산시키는 작업에 주도적으로 가담했고, 그 명제의 안정적인 정착과 함께 그동안 상대적으로 억압되었던 민족 통합의 이데올로기도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의 차이를 넘어서서 민족 통합을 이루려는 이와 같은 남쪽의 시도는 동유럽과 소련의 해체, 중국의 급속한 개혁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던 북한의 모험주의를 견제하고, 새로운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요청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처럼 민주화와 민족 통합을 동시에 이루고자 노력했고, 지식인의 담론도 대체로 이런 방향에 호응했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시기에는 인권 보장과 민주화의 장치가 제도적으로 마련되고 정착되었다. 언론에 대한 권력의 직접적 통제도 사라졌고, 그동안 금기 영역이었던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비판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공적인 자리에서 대통령이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였다. 그동안 지식인 현실 참여의 주요 통로였던 민주화 명제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고, 민족 통합에 대한 전망도 남북 교류의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부시 정권의 북한 퇴출 압박에 북한이 핵개발로 맞서면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계기로 하여 남쪽과 북쪽의 대결을 주장하며, 민족 통합의 지향을 견제하는 담론이 부각되었고, 이른바 ‘신우파’라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민주화의 실현과 정착에 따라 지식인의 민주화 명제는 구호의 단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취를 위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민족 통합의 명제는 정부의 주도 아래 검토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신우파’의 미미한 견제만 보일 뿐이다. 민주화의 명제가 현실화되고, 민족 통합의 노력이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이를 맹렬하게 요구하던 지식인은 담론의 초점을 잃고 새로운 열정을 찾아 헤매고 있다. 더구나 공산주의가 몰락한 국제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한국 사회가 강제로 포섭된 사건은 지식인의 위기의식을 첨예하게 만들고 있다.

여러 이데올로기가 각축하는 가운데 스스로 보편성을 구현한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한 지식인이 이제 신자유주의의 나팔수로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세계적인 ‘투명’ 경쟁 체제의 효율성을 당연하게 선전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역사의 종말을 외치며 자신이 절대 지존임을 자랑한다. 그 헤게모니 체제에 대항하는 지식인은 대안 없이 허풍만 떠들어대는 자이고, 현실성이 없는 자로 취급 받는다. 지식인의 상상력은 대항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공장 체제 안에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써야 한다고 선전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식인의 전통적 권력도구였던 글쓰기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바야흐로 문자시대가 가고, 새로운 구술시대와 영상시대가 오고 있는 마당에서 지식인은 자꾸 낯선 곳으로 몰리고 있다. 이전에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었던 자들이 지식인의 독점 영역에 침입하여 ‘신지식인’임을 주장한다. 그에 따라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구지식인’으로 치부되는 형편이 된다. 보편적 지식인의 요새였던 대학의 변신도 현저하다. 대학도 수요와 공급 법칙의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대학의 지식인은 상인(商人)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제 지식인은 시대의 방향을 이끄는 선구자가 아니라, 문화상품을 만들어 파는 샐러리맨의 처지가 된 것이다.



지식인은 더 이상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를 자랑하지 못한다. 그들의 지식은 문화 콘텐츠 개발에 연관될 경우에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적 동질성도 더 이상 확보될 수 없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기반인 글쓰기의 위상 변화에 보이는 그들의 당혹감일 뿐이다. 그들의 옛 열정은 사그라졌고, 그들의 상징권력은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기 때문에 바야흐로 지식인의 위기가 설왕설래되고 있다.(장석만 충간문화연구소 소장)

07. 04. 23.

P.S. 러시아 인텔리겐챠를 영국의 젠틀맨, 일본의 사무라이에 비교하기도 한다(우리라면 '선비'에 해당할까?). '지식인의 죽음'은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마지막 사무라이' 시대에 견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분명 한때는 그들의 시대였다. 하지만, 시대는 변한다. 해서 지식인의 죽음은 애도할 만한 것이지만 비통한 일은 아니다. 차라리 지식인을 '가장'하는 치들이 더 문제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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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4-23 09:37   좋아요 0 | URL
지난 두어주 정신없이 보내며 감성이-분노에 가까운- 이성을 지배하는 시간을 보냈는데 이번 주부터는 좀 가라앉히고 지내기로 했습니다.^^ 건드리지 말아야될텐데.

안그래도..출근해서 새로운 기획 기사를 읽고...옮겨야지 했는데...이미 로쟈님이 선수를 치셨습니다.^^

"지식인은 이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자’가 되었다. 지식인은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고 있다. 권력에 위험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키워지고 있다."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시민’의 육성이 아닌, ‘시장반응형 인간’ 양성으로 변했다. 기업은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신문을 못볼경우 로쟈님의 페이퍼로 읽어야겠어요.

로쟈 2007-04-23 09:43   좋아요 0 | URL
'지식인의 죽음'은 서구나 일본에선 이미 뉴스거리가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의 경우 잠시 유예됐을 뿐이겠죠. 87년 때문에. 그 후 20년이니까 '약발'이 다 돼 갈 만한 시기이긴 합니다...

자꾸때리다 2007-04-23 12:17   좋아요 0 | URL
암울하네요. 퍼갑니다.

클리오 2007-04-23 14:40   좋아요 0 | URL
휴.. 여러가지 생각들이 왔다갔다 합니다. 제 자신의 입장과 미래를 포함해서요...

yoonta 2007-04-23 14:53   좋아요 0 | URL
"지식인의 죽음"...심각하죠. 그런데 지금의 한국의 상태가 일본혹은 특히 서구(유럽)보다 더 심각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로쟈님은 유예되었을 뿐 서구나 일본이 더 심각하다고 하셨는데..전 잘 모르겠네요. 오히려 국내가 더 심한 것이 아닐지..

로쟈 2007-04-23 16:10   좋아요 0 | URL
yoonta님/ 그쪽이 더 심각하고 자시고 할 건 없는 것 같고요, 그쪽에서 먼저 그런 일이 일어났고 우리도 자연스레 그런 추이를 따르는 거라 생각합니다. 지식인의 발생 자체가 역사적 조건에 따른 것이라면 그 소멸/종말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yoonta 2007-04-23 21:00   좋아요 0 | URL
네..어느쪽이 더 심각한지 따지는것은 큰 의미는 없는데요. 바로 위의 글에서 좀 구분없이 서술된 부분이 뭐냐면 "바야흐로 문자시대가 가고, 새로운 구술시대와 영상시대가 오고 있는 마당에서 지식인은 자꾸 낯선 곳으로 몰리고 있다. "와 같은 것은 사실 20세기 이후의 서구의 역사와 맞물려있는 보편적 현상을 설명하는 대목인 반면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역사의 종말을 외치며 자신이 절대 지존임을 자랑한다. 그 헤게모니 체제에 대항하는 지식인은 대안 없이 허풍만 떠들어대는 자이고, 현실성이 없는 자로 취급 받는다. 지식인의 상상력은 대항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공장 체제 안에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써야 한다고 선전된다. "와 같은 대목은 다른 나라보다 유독 신자유주의의 이식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적 특수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위의 글에는 이것을 구분없이 마치 모든 세계의 지식인들의 보편적 현상인것 마냥 서술하고 있으니 좀 문제라는 것이지요..기왕 "지식인의 상품화"를 이야기하려면 위에서처럼 허술한 얼개로 서술할게 아니라 보다 엄밀하게 서술될 필요가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좀 남네요..

로쟈 2007-04-23 22:47   좋아요 0 | URL
마지막 외부 필자의 기사의 논점엔 저도 유보적입니다. 보다 정치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안인데 너무 많은 내용을 짧은 지면에 포개넣으려고 한 탓이 아닌가 싶어요...

pax 2007-04-24 02:36   좋아요 0 | URL
지식인이 죽는 건 상관 없는 데 반지성주의의 득세는 사양??ㄳ

자꾸때리다 2007-04-24 12:02   좋아요 0 | URL
고구려사에 대해 평생을 연구한 학자의 연구 작업보다. 드라마 출연한 연예인들의 말 한마디가 훨씬 영향력을 가진 세상.

웅아 2007-04-24 21:08   좋아요 0 | URL
강의실 좋구만

sb 2007-04-26 01:22   좋아요 0 | URL
로쟈님, 저도 퍼갑니다. ^^

정익원 2007-06-24 21:3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경재권력에 매수된 지식인은 부끄러운줄 모르고 당연시하고 있읍니다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만능사회 고착화 굳히기 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출을 기대합니다
 

막간에 잠시 읽어본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버지니아대 총기난사 사건의 의미를 일본만화 <몬스터>의 내용과 연관지어 좇고 있다. 기사가 눈에 띈 건 이 만화 때문. 그렇다고 내가 읽은 건 아니고(나는 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강풀 만화조차도 읽은 적이 없다), 다만 이 만화를 좋아하는 한 후배가 한동안 만날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적이 있어서 친숙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조승희는 '몬스터'인가?... 

오마이뉴스(07. 04. 20) 우리 안에 똬리 튼 '버지니아 몬스터'

일본 만화 가운데 <몬스터>라는 작품이 있다. <마스터 키튼> 등으로 우리나라에도 상당수의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浦澤直樹)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일본에서만 2000만부 이상 팔렸으며,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을 뒤지면 몬스터 마니아 클럽을 꽤 찾아볼 수 있다(*관련기사는 http://payopen.scout.co.kr/bookclub/review/SN056/default.asp?action=view&id=2222&page=1&field=1&keyword=).

<몬스터>는 만화 제목 그대로 '절대 악'의 화신과 같은 '요한'이라는 몬스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스릴러물이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양부와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의료진들을 살해한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의 심리와 약점을 꿰뚫어 보고 이를 이용해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특별한 능력을 유감없이 활용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이 만화는 그러나 몬스터의 '연쇄 살인'이나 '대량 학살'이 주된 줄거리가 아니다.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줄곧 쫓고 있는 것은 냉혈한 살인마 요한, 즉 몬스터의 뿌리와 그 본성에 관한 탐사다. 그 추적을 통해 놀라운 사실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몬스터의 살인 권능은 '상처'에서 싹튼다

구동독 시절 특별한 능력이 있어 보이는 고아들을 모아놓고 실시한 '인간병기' 프로젝트에서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본인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몬스터가 돼 버린 요한. 쌍둥이 자매 가운데 한 명의 아이만 남기도록 강요당한 어머니한테서 결국 버림받은 요한.

자신의 쌍둥이 남매인 '안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는 절대 고독한 존재로서의 요한. 결국 안나에게 자신을 쏘도록 해 죽음을 선택한 요한, 그러나 만화 '몬스터'의 또 다른 주인공인 '닥터 덴마'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나 청년 몬스터가 된 요한….

유럽 전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짜임새 있는 긴박한 이야기 전개와 독특하고 다양한 캐릭터 이외에도 만화 <몬스터>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내 안의 몬스터'에 대한 깊이있는 천착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이 살려놓은 몬스터를 없애기 위해 요한을 쫓는 닥터 덴마,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쌍둥이 오빠 요한을 죽이기 위해 역시 그를 쫓는 안나를 통해서 작가는 몬스터가 이 세상과는 물론 바로 이들 추적자들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요한이라는 몬스터의 탄생도 그렇지만 그가 초인적인 '살인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들 내면의 '깊은 상처'나 '공포' 혹은 '끝없는 욕망'의 뇌관을 적시에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임을 장면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선과 악이 교차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말한다.

"몬스터는 바로 당신, 그리고 우리 안에 있다."

만화 <몬스터>의 가장 큰 미덕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쇄 살인마 요한을 쫓아가면서 닥터 덴마나 그의 쌍둥이 누이 안나는 몬스터 요한에 대한 연민을 버리지 못한다. 몬스터의 뿌리와 그의 실체에 접근할수록 이 두 사람의 연민은 더욱 커진다. 끝내는 치명상을 입은 몬스터를 닥터 덴마가 살리기 위해 다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몬스터에 대한 공포와 증오, 적대는 연민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용서까지는 아닐지언정, 어느 정도는 화해하는 것으로 이 만화는 대미를 장식한다.



버지니아 몬스터는 결말이 달랐다

어디까지나 만화 이야기다. 버지니아 공대의 '몬스터'는 결코 그런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없었다. 피의 살육이라는 끔찍한 최후를 선택한 버지니아 몬스터는 숨가쁜 언어와 공격적인 포즈, 혹은 절망적인 제스처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지만 그것은 제정신이 아닌 외톨이의 '광기어린 독백'이 되고 말았다.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미국 사회에 있어서 그는 진즉 격리됐어야 했을 '미친 놈(mad man)'에 불과할 뿐이다.

그를 미치도록 외롭게 하거나 혹은 좌절케 했을지 모를 '한국인'이라는 핏줄과 국적마저 몬스터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무늬만 '한국인'일 뿐이다. 미국에서 자라 '사실상 미국인'인 그는 '미국판 몬스터'일 수는 있어도,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게들 믿고 싶어한다. 그가 한국 핏줄이어서, 한국인이어서, 동양인이어서, 백인이 아니어서 미국 사회에서 겪었을 갈등과 좌절, 혹은 분노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아니, 그런 몬스터가 '내 안'에, 혹은 '우리 안'에 똬리 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니까.(백병규 기자)

07. 04. 20.

P.S. "그가 한국 핏줄이어서, 한국인이어서, 동양인이어서, 백인이 아니어서 미국 사회에서 겪었을 갈등과 좌절, 혹은 분노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란 대목은 이해되지 않는다(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의 '순교자'들은 백인 학생들이었다). 버지니아 공대에는 수백 명의 한국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한국인이어서, 동양인이어서, 백인이 아니어서 미국 사회에서 겪었을 갈등과 좌절, 혹은 분노"로 인하여 제2, 제3의 '버지니아 몬스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인가? 아무래도 '만화적인'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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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0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20 21:04   좋아요 0 | URL
**님/ 음주시에만 댓글을 다시는 건 아니구요?^^

소경 2007-04-21 13:55   좋아요 0 | URL
두건의 페이퍼 잘 참고했어요..^^. 반면 에드게인이나 찰스맨슨과 같은 이들과 함께 두는 '한국인'이라 기분이 묘하군요. 결코 이 반도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라고는 생각했는데.....그리고 이 나라에 따를 총기허용시 반향에 대해서 숙고하신 점은 서득력있게 들리네요. 그러한 사람(살인자)들은 결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 생각한다면 생각은 달라지겠지만요.

딸기 2007-04-21 22:13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조승희는 정신분열 같습니다. 우울증 같은 거랑은 전혀 다르지요;;
문제는 그것이 치료가 되지 않고 방치됐다는 점, 그리고 총을 손에 넣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로쟈 2007-04-22 10:08   좋아요 0 | URL
소경님/ 다른 선택은 없다고 스스로를 몰아가는 '성향'과 '과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이죠...
딸기님/ 경계성 장애니, 자기애 장애니 하는 진단들도 나오더군요. 우울증보다는 증상이 더 악화된 경우겠지요...

딸기 2007-04-23 16:41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조승희 같은 경우에 대해 진단을 잘 내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우울증이라고 해버리면-- '우리 모두 다 죄인' '이민 1.5세대의 비극'이 되어버려요. 그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이 문제는 '정신병자가 총을 살 수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미국 사회의 병리라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고요. 누군가가 옆에서 좀 잘 다독여줬더라면? 그렇다면 약물을 투입해 폭력성을 좀 억누를 수 있었겠지요.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거기까지... 암튼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로쟈 2007-04-23 16:53   좋아요 0 | URL
가해자-피해자를 전치시키는 논리에 대해서는 저도 반대합니다. 범행동기에 대해서는 그쪽 경찰에서 실마리를 잡았다고 하니까 곧 발표될 수도 있겠지요. 총기는 보도에 따르면 2억 5천만정이 퍼져 있다고 하니까 '근절'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고, 자체적으로 '제한' 정도가 시도될 수 있지 않을까(그것도 잘해야) 싶네요...
 

그제부터 단연 화제가 되고 있는 뉴스는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사건이다. 볌인이 재미교포 한국인 학생이어서 특히나 충격을 주는데, 그가 언론사에 보낸 '선언문'과 사진, 동영상 등이 오늘(19일) 공개됨으로써 사건의 윤곽이 얼마간 밝혀졌다. 관련기사 두어 가지를 옮겨놓는다.

재작년 6월 전방 GP에서의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소감을 적으면서 '엘리펀트에 대하여'란 제목을 단 적이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696609). 물론 그때의 '엘리펀트'란 말은 지난 1999년 미국 콜럼바인고교의 총기 난사사건을 다룬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2003)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같은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과 이 영화를 함께 묶어서 이번 사건의 의미를 조명하고 있는 프레시안의 기사를 먼저 옮겨놓았는데, (그 기사보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실제 범인 조승희의 '선언문'에서 콜럼바인 사건의 두 주모자 에릭과 딜란이 '순교자'처럼 언급되고 있다(그 자신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했다). 그러니 이 두 사건은 동일한 맥락 속에 있는 것이다. 

예단이긴 했지만 그래서 '버지니아 엘리펀트'이다. 이미 너무 많은 말들과 분석들이 이 사건과 관련하에 제시된지라 따로 덧붙일 말은 없다(한가지, 이번 사건을 두고 "9.11 이후의 가장 통쾌한 사건'이라며 오버하는 반응은 한국인으로서 사죄해야 한다는 반응과 마찬가지로 꼴사납고 역겹다. 나 자신 '네티즌'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인터넷과 지적/인격적 성숙은 무관하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 내가 존경하는 이들이 대부분 인터넷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프레시안(07. 04. 18) 콜럼바인, 버지니아텍을 미리 보여주다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사건이 일어난지 8년만에, 이번에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교내 총기사건이라 불릴만한 사건이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났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 수만 33명. 게다가 범인은 한국계로 밝혀졌다. 도대체 이러한 비극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총기를 난사해 그 많은 사람을 죽일 행동을 한 것인가? 왜 다른 나라 총기 소유 허가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선 그토록 빈번한 것일까? 혹은, 20세 이상의 남자 성인이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 사격술을 훈련 받아야 하고 비공식적인 밀수 총기가 퍼져있다고 하는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미국에서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100% 만족할 만한 답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답변을 주는 영화 두 편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고, 또 하나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이다. 두 영화 모두 둘 다 1999년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는 영화들로, 다큐멘터리인 <볼링 포 콜럼바인>은 콜럼바인고교 총기난사 사건을 계기로 총기난사 사건을 '부추기는' 미국의 사회 시스템을 분석하고, 극영화인 <엘리펀트>는 외롭고 상처입은 두 10대 소년의 일상을 건조하게 응시한다.

<엘리펀트>에서 구스 반 산트 감독은 분노와 외로움, 상처로 가득찬 두 소년의 황량한 내면과, 표면적으로는 남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이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우리는 여전히, <엘리펀트>에서 그 평화롭고 따사롭던 오후에 두 주인공이 친구들을 향해 총질을 시작하는 명시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상처입은 사람들이 모두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대지는 않는다.
  
마이클 무어가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듯, 미국은 개인의 총기 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면서도 이에 대한 관리와 규제에는 매우 허술하며 총기 소지가 매우 쉽다. 물론 마이클 무어가 조롱했던 것처럼 은행에 계좌만 개설하면 사은품으로 총기를 주는 수준은 아니지만(이것은 총기 구입이 그만큼 쉽다는 마이클 무어식 비아냥일 뿐, 사실은 아니다.), 버지니아공대 사건의 범인 역시 학교 근처 총기상에서 신분증 세 개를 보이는 것만으로 아주 쉽게 범행 무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사용 용도가 무엇인지 설명하거나 신고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단순히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해서 그만큼 총기 난사 사건도 빈번히 일어나는 것일까? 역시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보장된 캐나다에서 연간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미국에 비하면 훨씬 적다. 마이클 무어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면서 공격이 최선의 방어임을 설파하는 시스템이라고 분석한다. 빈부의 격차가 크고 양극화된 사회 현상과 이로 인한 사회적 불만과 불안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약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복지와 이로 인한 최소한의 생활 안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국 외부의 적을 규정하고 적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재생산함으로써 사회적 불만을 무마하는 것, 그리하여 미국이라는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 자체를 공포와 분노에 두고 있다는 것, 이른바 '공포로 통치하는 사회'라는 사실이 이러한 비극을 계속 발생케 한다는 것이다(*'공포로 통치하는 사회'가 미국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
분열되고 파편화된 세상이 문제

만약 이번 사건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우리는 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심리적 개연성이 없다며 비판할 것이고, 혹자들은 하필 범인을 한국인으로 상정한 것에 대해 감독이 혹시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이것은 영화에 불과하다"며, 더욱이 "바다 건너 먼 나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며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이란 이성과 논리에 근거에 행동하려 하고,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우리와는 다른 매우 특수한 사람,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 믿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의지가 아니라 악마가 들려서, 혹은 귀신이 씌여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라는 등등 수많은 바깥의 이유들을 찾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일지 모르며 내 자신조차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불신과 공포, 불안에 휩싸이기 때문이다(*기자는 '우리 모두가 조승희이다'라는 결론을 암시하려는 듯한데,  그건 과잉 일반화이며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를 그저 우연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조승희도 인간이다'에 나는 동의하지만 '모든 인간/한국인은 조승희다'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좀더 공포를 느끼지만 그것이 '총기 난사' 사건인 경우, 총기 소지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남의 나라 현실이라 믿으며 애써 무관심한 척할 수도 있다. 사실 총기가 엄격히 금지된 한국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미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총기난사 사건은 낯설고 두려운,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범인이 한국계로 밝혀지고 범행동기가 (누구나 평생 무수히 겪는) 여자친구와의 불화 때문인 듯하다는 잠정 수사결과가 전해지면서, 우리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총기난사 사고'에 무관심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두 번씩은 자신이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탈의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죄책감 한두 가지씩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일탈이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범죄'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들은 분명히 있다. 이런 비극은 분명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고, 그 사람은 그가 속한 사회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우리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러한 풍요는 모두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며, 물질의 풍요로움이 마음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고 힘든, 분절되고 파편화된 세상, 각종 통신수단은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여전히 (혹은 오히려 더욱 심화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세상을 견디어나가고 있다.
  
이 고통을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 탓으로 돌릴 때, 그리고 타인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사물'로 여겨질 때, 그 사회는 위험 수위로 가까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건에 정말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한국사회를 포함해 전세계 거의 모든 사회가 이미 이런 위험 수위에 다달은 현대사회라는 점을 우리가 알고있기 때문이다(*이번 사건의 경우에 범인은 '외톨이'로서 갖는 사회적 적개심을 여러 차례 징후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만사지탄이지만 주변에서 그러한 '신호들'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유사한 '신호들'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친구의 자살을 막지 못했던 기억이 겹쳐진다).

그런 상황에서 오로지 생명을 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주변에 널려 있어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런 비극은 몇번이고 반복해서 발생할 수 있다(*짐작에 한국에서 총기 소지가 허영된다면 미국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총기난사사건'과 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비극을 보며 지나치게 범인을 동정할 필요도, 그럼에도 그저 정신나간 특정인의 소행으로만 돌리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건으로 치부하고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먼 나라에서 벌어진 일일지라도 우리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김숙현 기자) 

경향신문(07. 04. 20) 고립된 자아·폭력문화가 빚은 ‘저주의 복수극’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새로운 각도에서 주목 받고 있다. 조승희씨(23)가 NBC에 보낸 우편물에서 ‘콜롬바인 총기난사’ 등 과거 참사들과의 유사성이나 영화·게임 등 대중문화의 폭력적 요소들이 곳곳에서 감지되면서다. 미국 언론들은 조씨가 동영상·사진·텍스트 등 다양한 미디어를 동원한 점에서 ‘multimedia manifesto(복합미디어 선언문)’로 이름짓기도 했다. 고립된 자아와 폭력문화가 결합한 ‘병리(病理)적’ 모방범죄일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조씨의 ‘선언문’과 행적에서 드러난 4가지 모방성을 살펴봤다.



◇ 유나보머 테러…범죄 합리화 ‘우편물 발송’유사
조씨의 범행수법이 ‘유나보머(Unabomber) 테러’로 불리는 연쇄 편지폭탄 테러범 시어더 카진스키와 흡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버드대 출신의 수학 천재로 버클리대 교수였던 카진스키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6차례에 걸친 소포폭탄 테러로 3명을 숨지게 하고 23명에게 부상을 입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문명혐오주의자인 그는 ‘유나보머 선언문’으로 명명된 ‘산업 사회와 미래’라는 제목의 편지로 자신의 범행이 현대기술 문명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로 과학기술과 관련 있는 대학(University)과 항공사(Airline)에 폭탄을 보내 ‘유나보머’란 별명이 붙었다(*국내에는 '유나바머'라고 소개됐다).

조씨가 ‘선언문’에서 현대사회의 ‘물질만능’과 ‘탐욕’, ‘쾌락주의’에 대한 징벌을 범행의 명분으로 삼았다. 조씨는 “너는 벤츠로도 부족했지. 속물 덩어리 너는 금목걸이로도 만족하지 못했어. 보드카, 코냑도 충분하지 않았고 그 모든 향락에도 너는 만족하지 않았어. 이 모든 것이 너의 쾌락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거야”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너(You)’는 미국 사회를 지칭한 것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조씨가 범행 전 언론 매체에 범행의 명분을 주장하는 ‘선언문’ 형태의 우편물을 보낸 수법도 유사하다. 그 점에서 전문가들은 “조씨가 오랫동안 고립된 채로 생활하면서 세상을 자신만의 좁은 시각에서 보는 편집증이 있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김광호기자)



◇ 영화 ‘올드보이’…증오찬 표정·망치 사진 흡사
‘복수’를 모티브로 한 한국영화 ‘올드 보이’ 장면들과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18일 ‘조씨가 NBC에 보낸 사진 중 가장 불가해한 사진의 영감은 칸영화제 대상을 받은 한국영화에서 온 것 같다’고 전했다. 바로 조씨가 ‘망치’를 들고 위협하는 사진이다. 실제 조씨의 사진과 영화 속 주인공 대수(영화배우 최민식)의 사진은 망치를 치켜든 손의 위치와 방향, 팔의 각도, 증오가 가득 찬 표정 등이 놀랍도록 닮았다. 뉴욕타임스는 “두 사진의 포즈는 유사하고, 영화의 구성(plot)은 더 살펴볼 가치가 있을 만큼 음울하다”고 평가했다.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 대수가 납치를 당해 15년간 감금당한 뒤 풀려나, 감금 당한 이유를 더듬어가면서 복수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조씨가 권총 자살을 암시한 사진처럼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 머리 관자놀이 부분에 권총을 쏘아 자살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뉴욕타임스는 평론가 마놀라 다기스의 말을 인용, “영화의 사망자 수와 가학적 폭력은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의 차이를 분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컬트 영화광들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NBC는 조씨가 총을 겨누는 장면이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니로를 연상시킨다고 보도하는 등 미국 언론들은 조씨의 사진들이 대부분 각종 영화 장면을 모방한 것으로 분석했다. ‘택시 드라이버’는 외롭고 소외된 주인공이 결국 분노를 폭발시킨다는 내용이다(*조승희는 범행 몇 주 전부터 머리를 짧게 깎고 근육을 단련했다고 한다). 버지니아 공대 폴 해릴 교수는 두 장면의 유사성을 통해 조씨가 32명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도록 한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기를 바랐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김광호기자)



◇ 콜롬바인 총기사건…범행 당일 행동 태연
조씨는 ‘선언문’에서 1999년 4월 발생한 콜롬바인 고교 총기사건의 주범인 에릭 해리스와 딜란 클레볼드를 ‘순교자(martyr)’로 표현했다. 바로 오는 21일이 이 사건의 8주기 추모일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조씨의 범행은 계획적인 것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 콜로라도주 콜롬바인 고교에서 일어난 사건 당시 평범한 고교생이던 에릭과 딜란은 도서관에서 900여 발의 총알을 난사,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특별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조씨가 사건 당일 아침 평소처럼 평온한 일상을 시작한 것처럼 에릭과 딜란도 사건 당일 오전 태연하게 볼링 수업을 듣기도 했다.

영화 ‘화씨 9·11’의 감독 마이클 무어는 2002년 이 점에 착안, 다큐멘터리 영화 ‘볼링 포 콜롬바인’을 만들었다. 사건의 뿌리가 미국 정부의 느슨한 총기 규제에 있다는 점을 정면 비판하면서, 공포를 조장해 권력을 유지하는 미국 정치의 폭력성을 고발했다. 동영상 곳곳에서 조씨가 “너는 내 가슴을 짓밟고 영혼을 능욕했으며, 양심을 불로 지졌다”고 알 수 없는 폭력과 모욕, 고통을 호소한 대목과 묘하게 중첩된다. 따라서 조씨는 에릭과 딜란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이들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영화의 프리즘을 통해 걸러진 관점에서다. 실제 조씨는 ‘선언문’에서 “나는 약자들과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는다”고 스스로를 순교자로 묘사했다.(김광호기자)



◇ 비디어 FPS게임…가상공간의 사격게임 하듯이 몰입

권총 두 자루를 휴대하고 눈에 띄는 대로 상대방을 살해한 조승희씨의 범행 방식은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FPS게임(First Point Shooting, 1인칭 사격 게임)과 유사하다. FPS게임이란 게이머가 주인공이 되어 화면에 나타나는 적을 제거하는 사격 게임의 일종으로 1인칭 시점으로 게임이 진행되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가상공간 안에서 직접 전투를 벌이는 듯한 몰입감이 특징이다.

미 경찰은 16일 오전 7시15분쯤 기숙사에서 두 사람을 살해한 조씨가 600여m 떨어진 노리스 홀(공학부 건물)에서 2차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오전 9시46분쯤 노리스 홀에 들어선 조씨는 206호 강의실을 시작으로 복도와 강의실을 휘저으며 30여분동안 동안 엄청난 양의 탄약을 쏟아부으며 기계적으로 발포했다. 목격자들은 조씨가 “탄창이 주렁주렁 매달린 조끼를 입고 있었으며 시종일관 침착하게 범행을 저질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번 사건이 미로처럼 굽어진 복도와 복잡한 방들을 지나 상대방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인 FPS게임과 닮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장갑을 끼고 쉴 새 없이 탄창을 갈아끼워가며 권총을 난사하는 이른바 ‘쌍권총 모드(mode)’다. 공교롭게도 조씨가 범행에 사용한 글록 9㎜ 권총은 FPS게임에서 소(小)화기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모델이기도 하다. 범행 당일 NBC사에 보내진 조씨의 영상과 사진이 공개된 뒤 인터넷에서는 ‘유명 FPS게임의 테러범 복장과 유사하다’는 네티즌들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이호준기자)

07. 04. 18-19.

P.S. 참고로, 조승희씨의 지도교수는 “그는 내게 너무 외롭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0704/h2007041918355222470.htm). 그리고 한 정신과 의사의 분석은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5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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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4-19 00:21   좋아요 0 | URL
좋은 인용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이 사건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로쟈 2007-04-19 08:21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아침뉴스를 보니까 또 NBC에 보냈다는 편지와 비디오테입 얘기가 나오네요. 사건 전모는 곧 밝혀지겠지만 더 두고봐야겠습니다...

비로그인 2007-04-19 09:16   좋아요 0 | URL
로쟈님, 잘 읽었습니다. 관련한 페이퍼도 더 올려주시길 기대합니다.

이네파벨 2007-04-19 12:00   좋아요 0 | URL
nature vs. nurture 논쟁이 생각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nature...범인이 기질적인 정신병질자(psychopath, sociopath)였다는데 한 표...입니다.
어릴때부터 자폐적인 성향이 있었다고 하고..환경이 아무리 힘들고 불우하다고 해서 정상적인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다고 믿어요.
사회구조적 문제..환경(크게 보아 nurture)의 문제도 물론 없지 않겠지요.
하지만 환경의 경우 "총기소유허용"이 단독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총기소유가 법적으로 허용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왜 미국에서 유독 이런 사건이 일어나느냐...?를 분석하려면 법적 허용여부뿐만 아니라 유통 상황, 접근의 용이성 여부 등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이 있어야 할 듯 하고요.
빈부격차, 불평등, 소외 등의 문제라면...솔직히 중국의 파렴치한 신흥부자들을 죄다 들고 일어나 처형하지 않는 중국의 가난한 인민들이 오히려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지요.(과장법인거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미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문제, 악덕 등을 모르는 것 아니지만...
지금 이 사건에 그걸 들이대서 마치 범인의 성명서의 주장에 동조하듯 빈부격차 등 "미국"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식으로 몰고가는 것은..
미국인들이 범인이 한국계라는걸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시각도 필요하겠지만 수십명이 무고하게 죽은 상황에서 말을 아껴야할 때가 아닌지................

pax 2007-04-19 13:43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위 기사가 방정맞게 범인의 성명에 동조하며, 무고하게 죽은 수십명의 고인들에게 누를 끼치는 말을 막 해대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분석의 정확성에는 언제나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겠지만 말입니다.......

로쟈 2007-04-19 23:51   좋아요 0 | URL
체셔고양2님/ 이미 심층분석기사들이 넘쳐나기에 제가 더 보탤 말은 없습니다...
이네파벨님/ 공감합니다. 자폐적 우울증자의 공격성이 밖으로 표출된 게 아닌가 싶어요...
paxwonik님/ 기사의 대체적인 논조에 저는 동의합니다. 다만, 우리의 책임을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죄의식/동류의식에서 찾는 건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부 2007-04-20 03:57   좋아요 0 | URL
음 선뜻 '동의한다' 고 말하기 망설여지는게 있는데요.. 이네파벨님 입장을 읽으니까 이건 마치 데칼코마니적인 난감함이 어지럽게 만드는 군요.
이네파벨님 생각을 반대로 대칭시켜도 똑같이 적용되고 말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기질적인 정신병자들이라고 해서 어느 곳에서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고는 못믿겠습니다.개인적 기질의 문제도 물론 없지 않겠지만, 우울증자가 공격적 성향이 무시무시한 폭력성으로 표출될 가능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사건에 정신병자의 병리적 행위라는 임상적 측면만을 강조해서 비 이성적 개인의 광기가 결정적 원인이라고 몰고가 버리는 것은
역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또한 수십명이 무고하게 죽은 상황에서 우리의 책임은 없고 단지 광기에 빠진 개인때문에 벌어진 비운의 사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 될테니 그런 주장 또한 말을 아껴야 하지 않을까요. 라는,

어부 2007-04-20 03:43   좋아요 0 | URL
이것도 저것도 결국 같은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까 한다는 거죠. 이런 일이 있을때마다 원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려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사후에 원인을 규명하려는 매체들의 법석들은 꼭 사건의 생명은 사라진 사체의 고깃점들을 하나씩 물어뜯으며 게걸스럽게 각자 뜯은 부위를 들이미는 까마귀떼들 같습니다. 이런 원인분석의 태도는 결국 말하고 있는 우리들을 괄호치기 위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정신병자의 비 이성적 광기의 결과라는 식의 결론. 결국 '타자'의 행위라는.. 이곳에 대한 알리바이 들이대기. 뭐, 그렇다고 마이클 무어식의 침튀기기가 뭔가 뾰족한 결론을 불러온다고도 생각 안합니다.

어부 2007-04-20 03:58   좋아요 0 | URL
<엘리펀트>는 좀 다르게 생각해보려 했던것 같은데요. 진실은 알 수 없다, 뭐 그런 라쇼몽 스토리로 읽는다면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지 않을까 싶네요. 이 비극에 대해 윤리적으로 접근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를 붙들고 고민하려는.. 그건 어떤 '원인으로 사태의 전체를 환하게 만들기'를 지양하는게 아닐까 하는 건데요. 그거야말로 그 사건으로부터 우리, 혹은 나를 안전지대로 데리고 오려는 의도일 수도 있을테니까요. 인과논리 뒤에서 실은 그냥 안심하기.
저한테 아직도 정말 서늘하게 남아 있던건 인터넷 초기화면 주요 뉴스에 올라온 조씨의 증명사진 이미지였는데 그건 9.11 테러 무역센터 건물 이미지처럼 늘 본 이미지에 실재가 딱 침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곧바로 그를 드라마틱하게 비일상적 타자로 밝혀 내는 다른 이미지들에 그 구멍은 금방 메꿔지긴 했지만..
이 익숙한 낯섬을 다시 낯선 익숙함으로 되돌리는 태도가 필요한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윤리21>을 좀 다시 읽어 봐야 하겠네요. 중반 이후에 건성으로 읽고 넘어갔는데, 원인과 책임의 윤리에 대해 아주 좋은 지침을 줬던걸로 기억하거든요..-_-

이네파벨 2007-04-20 07:26   좋아요 0 | URL

좋은 논의, 반론 감사합니다.

같은 사건을 보아도...평소 알 던 대로..평소 관심사대로 해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분명 그런 쪽으로 치우쳤을 거구요....

거기에는 예전에 읽은 두 권의 책 (번역자가 지인이라 선물받아 읽은 책이죠.)도 무관치 않을거예요.

  요 두 권의 책을 보면......대량살인이나 연쇄살인 등을 저지른 범인들은 보통사람들과 절대로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행동에 들이대는 잣대를 들이대서 인과관계를 해석할 수 없다는 확신을 주지요.....

저 역시 예전에는 이런 현실에 대해 믿고싶지도 믿지도 않았는데...세상을 살면 살수록 심각한 정신적 불구로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는 "괴물"같은 사람들이 있다는데 공감하게 됩니다.  예전에 유영철 사건도 그렇구요...

꼭 살인자, 방화자 등 엄청난 파괴와 폭력을 가져오는 범인들뿐만 아니라 (이들은 어쩌면 자기파괴적이라는 면에서 일말의 동정심을 사기도 하지요.) 다른 이들을 교묘하게 착취와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정도는 다르지만 기질적 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쿠야마의 이 책을 보면 인간의 여러 특성 (키나 체중 등 신체적 특성, 운동능력, 지능 등등 정도를 따질 수 있는 속성들)을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이야기가 나왔던걸로 기억해요. (하도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예컨대 사람의 키를 보자면...성인을 기준으로 2m가 넘는 사람도 있고 140cm가 안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균적인 키의 수치에 분포하겠지요. 이걸 그래프로 나타내자면 종형곡선(벨커브)을 나타내게 될 거구요.

 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속성들도 통계적으로 이런 분포를 나타내겠지요...(벨커브 하니 우생학 논란을 연상시킬까봐 두렵네요. 그 주장의 모순과 무관하다는건 이해하시겠죠? 인종차가 문제의 핵심이었던 것이지요.)

아무튼...겉으로 드러나는 특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적 기질(성격)이나 특성에도 이런 통계적 분포를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감정이입 능력, 공감 능력, 타인에 대한 배려, 이타심 (또는 자기중심성, 폭력성, 이기심...) 등을 가설적으로 수치화해서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정도...벨 커브의 불룩한 산 아래 분포하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양끝에 위치할 겁니다. 한쪽 끝에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감정이입이 지나쳐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던 고타마 싯다르타, 시몬느 베이유, 테레사 수녀 등이 있을거고 다른쪽 끝에는 유명한 연쇄살인범들, 히틀러 폴포트 등이 있겠지요. (결국 도덕은 동기나 원인보다는 그 사람의 "행위"와 그 결과로 판단해야 한다는게 제 생각이구요. 그렇지 않다면 판단 자체가 불가능해질거구요...)

이런 통계적 상황은 어쩌면..........환경적인 측면만으로 개선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현대과학이 nature vs, nurture의 논쟁에서 nature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어진다는 느낌을 숨길 수 없고 설사 중간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기질적, 선천적 문제적 인간들은 존재할 겁니다. 또한 인간의 형성에 환경적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구요............(물론 노력은 해야되겠지요.)

이런 인식이 저만의 것은 아닐진대....저는 오히려 그에 대한 심각한 부작용...이를테면 반사회적 정신병질자(psychopath)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우리가 상상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 (감시의 강화 사생활의 축소 유전자 검사 및 라벨링 등등)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고민이 떠오릅니다.

제가 너무 앞서가나요? 그럴 수도 있죠. 가장 먼저 해야될, 할 수 있는 조치 (총기규제)도 안이루어지는 판에 말입니다.....^^

아무튼...제가 꼴통같은 얘기를 늘어놓았는지도 모르겠는데요....나이 드니까..애 키우니까..점점 보수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해가는걸 느낍니다. 이를테면 유괴범들 (이놈들도 양심과 감정이입이 결여된 괴물들이죠.) 어린이 성범죄자들 (ditto) 유영철 등등은 네거리에 잡아놓고 돌팔매질을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벨 커브의 중간쯤에 위치한 평범한 인간인 저로서는 범죄자들에게까지 감정이입이나 동정의 시선을 보낼만한 인격은 안되구요...그저 "tit for tat",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도덕률을 신봉하게 됩니다.


다락방 2007-04-21 23:33   좋아요 0 | URL
이 사건을 접하고 [엘리펀트]를 떠올렸던건 저 뿐만이 아니었군요. 흐음.

로쟈 2007-04-21 23:51   좋아요 0 | URL
사실 조승희 자신이 떠올린 것이니까요...
 

포털사이트에서 우연히 보게 된 기사를 옮겨놓는다. '기자 도올, 소설가 김훈 인터뷰'라고 돼 있다. 기자 도올? 문화일보 관둔 지가 언젠데 하며 검색해보니, 이 양반 어느새 중앙일보 기자가 돼 있다. 대우가 파격적인 것인지, 기자직의 '맛'이 끊기 어려운 것인지 여하튼 그는 다시 기자가 되어 전직 기자인 소설가 김훈을 인터뷰했다. 두 양반 다 로쟈의 페이퍼에는 자주 출연해온지라 모른 체하기도 어렵다. 두 사람 모두 1948년생이니 동갑내기이다. 더불어 고대 동창이고. 초면이더라도 할말이 많을 듯한데, 어지간한 구면이다. 이만한 분량으로 끝난 게 다행이지 싶다.

중앙일보(07. 04. 13) 기자 도올, 소설가 김훈 인터뷰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의별 희한한 일도 많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나를 가장 많이 인터뷰한 기자가 있다면 김훈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난 기자가 되었고, 김훈은 당대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엊그제 우연히 그가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또 하나의 소설, '남한산성'을 탈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의 말을 건네는 중에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다(*짐작에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 듯하다. 나는 어제 주문을 넣었다). 기자 도올이 소설가 김훈을 인터뷰해 보면 어떨까? 김훈과 나는 대학(고려대)을 같이 다녔다.그는 영문과에서 영시를 외우고 있었고 나는 한시에 탐닉하고 있었다. 1982년 귀국했을 때 우리 사회에서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도 한국일보 기자 김훈이었다.

"암울했지요. 6.25 전쟁의 찌꺼기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찢어지게 가난했고, 박정희 군사독재 권력이 태동했고, 베트남에 가서 우리 친구들이 죽어갔고, 더 거대한 지옥이 예비되어 있었던 그 시대에 난 밝은 희망만을 품고 워즈워스, 바이런, 셸리, 키츠를 암송하고 있었죠. 그들의 낭만주의 혁명성 속에는 인간의 희망, 번영, 평등,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어요."

-난 대학 시절에 이미 영문과 김치규 선생님과 한시를 주고받곤 했는데, 김 선생님은 대단한 영시의 시인이기도 하셨죠.

"김치규 선생님은 주로 고전을 가르치셨고 전 여석기.이호근 선생님께 더 많이 배웠어요. 운에 맞춰 암송하는 숙제가 많았는데 지금도 19세기 낭만주의 시를 대부분 정확히 암송해요. 전 주입식 교육의 위대성을 그때 깨달았어요. 도대체 주입식 교육이 왜 나쁘죠? 디시플린을 안 가르치는 교육을 과연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때부터 이미 소설 쓰기를 작심했나요?

"'옥스포드영어사전(OED)'을 많이 뒤져야 했기에 주로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난중일기'라는 책이 눈에 띄었죠. 이은상 선생이 번역한 책이었는데 영시에 비하면 참 딱딱하고 드라이한 한 군인의 단편적 진중일기에 불과한 책이었어요. 그런데 암울한 현실을 끝까지 암울하게 뚫어 나가더군요. 19세기 낭만주의 시들처럼 찬란한 희망에 의지하지 않고 절망을 끝까지 절망으로 버티어내더군요. 그때 난 낭만주의적 희망의 허구성을 깨달았어요. 동시에 모든 이념의 허구성을 같이 버렸어요. 그랬더니 삶이 더 절망스러워지더군요. 그리곤 대학도 졸업 못했죠. 소설을 쓸 엄두도 안 났고요."



-그런데 한 가닥의 빛도 안 보이는 그 절망감을 어떻게 버티어 냈습니까?

"기자생활로 이럭저럭 뒹굴다가 83년 봄 우연히 '세계의 문학'이라는 잡지에서 온몸이 감전되는 듯한 문장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을 말하는 매우 단순한 내용의 글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도올 선생님의 글이었어요. 저에게는 그것은 새로운 문체의 발견이었어요. 볼티지가 있는 글이었죠."

-기자로서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좀 쑥스럽군요. 그런데 볼티지라니?

"볼티지가 있어야 감전이 되잖아요. 사유의 깊이와 압축감, 과감한 절제, 그리고 거침없는 포효, 그리고 리듬감 있는 음악성, 그리고 생동하는 그림이 퍼뜩퍼뜩 스쳐 가는 영상미 이런 것들이 혼합되어 전압이 확보되는 것이죠. 왜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소설을 한번 써 보시라고 했잖아요. 전 그때부터 다시 문학에 희망을 걸기 시작했어요. 새로운 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죠."



-김훈과 같은 문호에게 나의 정신세계가 조금이라도 도움되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역시 '칼의 노래'에서 대중이 사랑한 것은 김훈의 절제된 문체일 거예요. 그리고 그 문체가 이순신이라는 한 군인이 치열한 전화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고독한 심리적 내면을 파고들었다는 데 여태까지의 소설이 건드리기 어려웠던 강렬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훈의 문체가 너무 까다롭고 유미론적이고 너무 체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은데?

"많은 사람이 내 문장을 수사학적 문장이라고 평하는데 전 오히려 형용사, 부사 없는 글을 쓰고 싶어해요. 주어, 동사의 뼈다귀만으로 된 동편제 같은 글, 서편제의 계면이 빠진 그런 진솔하고 우람찬 우조 같은 글 말이죠. 그런데 주어, 동사조차 수식이라고 까대면 난 죽어야죠. 아니면 선(禪)의 침묵으로 가야죠."

-역시 영문학도다운 얘기군요.

"영어를 잘해야 한국말도 잘해요. 국제적 감각이 있어야 한국말이 풍요로워지는 것이죠. 김 선생님도 그렇잖아요. 전 우리말의 조사가 싫어요. 우리말에서 토씨를 빼면 나머지를 메우는 개념어, 지시어, 행위어는 대부분 한문이에요. 영어는 '아이 러브 유'하면 토씨 없이도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말은 '가'니 '를'이니 이런 토씨를 쓰지 않으면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죠. 토씨 없으면 신택스가 성립 안 해요. 법전의 우리말을 보세요. '사기는 타인을 기만하여 재물을 편취한 죄'라고 하면 토씨 빼놓고는 다 한자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수백 년 동안 그것을 열심히 쓰지 않은 죄를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죠(*그런 언어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나는 법전을 읽지 않는다). 우리말은 아직 개념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토씨만 있는 언어! 참 걸리적거려요. 전 조사의 매개 없이 단어와 단어가 맞부닥쳐 전압을 발생시키는 그런 언어를 쓰고 싶어요."

-김훈은 그런 언어에 집착한 나머지 사회의식이 박약한 자가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데.

"사회의식? 뭔 말라빠진 사회의식입니까? 그건 노무현이 자유무역협정(FTA)을 한다고 이념적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얘기예요. 진보인 줄 알았더니 보수네? 이따위 얘기들이 모두 개념 규정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개념 규정을 하는 데서 파생하는 오류일 뿐이죠. 진보니 중도니 보수니 이따위 말들이 다 엉터리고, 노무현에게는 애초부터 진보도 보수도 없었던 겁니다. 의미 없는 비연속에다가 일관성을 운운치 말자는 것이죠."

-도덕적 일관성(moral integrity)이 있으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한 국가의 목표가 도덕일 수는 없습니다. 이익이죠. 이익 추구에 실패하면 부도덕해질 뿐이죠."

-맹자는 국가의 목표가 도덕적이면 오히려 부강해진다고 말했는데?

"그건 까마득한 이상이죠. 그렇게 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럼 한.미 FTA는 잘한 짓이고 그로 인해 한국민이 잘살게 되리라고 전망하십니까?

"그런 걸 점칠 수 있는 능력은 저에게 없습니다. 단지 우리 사회에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념, 빈부, 교육, 의료, 재산, 기회,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어요. 정치적 리더십이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없으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어요. 돈 많은 사람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 주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더 뜯어내면 되죠."

-진부한 신자유주의 언어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한다면?

"글쎄요. 전 인간의 바탕은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적.공동체적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주장되고 있는 모든 가치가 개별적 존재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공허합니다. 전 사실 이런 철학을 도올 선생님의 방대한 저작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동의하시잖아요?"

-내 사상에도 분명 아나키스틱한 측면이 있지요.

"칸트가 말하는 양심이나 자유의지, 이런 것도 우리 존재의 근원이겠지만 저는 폭력과 악이야말로 세계의 근원적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

-약육강식에 우리 존재를 내맡기자는 것입니까?

"프랑스혁명, 동학혁명, 볼셰비키혁명이 모두 약육강식에 반대하고 일어났지만 결국 또다시 약육강식에 얽매이는 사회를 만들 뿐이죠. 악에 저항하고 승복하고 또 저항하고, 그런 모순된 꼬라지가 나 김훈의 꼴입니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은 도올의 명언입니다. "



-그래 소설가가 되어 행복해졌습니까?

"생각보다 책도 좀 팔렸고, 애들이 다 직장 구해 집을 나갔고, 아내는 여행 열심히 다니고, 대부분 집에 홀로 있습니다. 토굴을 지키는 스님같이, '혼자 있음'(Being alone)의 존엄을 즐기고 삽니다. 우리 사회 병리현상의 상당 부분이 혼자 있는 것을 즐기지 못해 생기는 것 같아요. 외롭다는 핑계로 파당을 만들고 추저분한 짓을 하는 것이죠."

-저런, 부럽소. 내가 해야 할 이야기를 하시는구료.

"안 그래요. 선생님은 항상 자신의 성취를 부숴 버리고 다시 시작하시잖아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통쾌감을 주는데."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내가 잘 불렀죠. '이제 다시 시작이다. '

"저도 그래요. 항상 초년병, 영원히 신인 작가로 살다 죽겠습니다. "

07. 0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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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4-13 15:21   좋아요 0 | URL
옮겨 가렵니다 어서 완성하시길.

로쟈 2007-04-14 21:48   좋아요 0 | URL
많이 늦지는 않았지요?^^;

수유 2007-04-14 23:06   좋아요 0 | URL
감사히 옮겨 갑니다. 그리고 <데리다>를 보러갈 마음은 있었습니다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로쟈님 강의를 엿볼 기회였는데요.^^

yoonta 2007-04-14 23:37   좋아요 0 | URL
"정치적 리더십이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없으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어요." 요말 결국은 권위주의에 의존하자는 이야기로 들리네요..-_-

로쟈 2007-04-14 23:44   좋아요 0 | URL
수유님/ 강의 자료들은 조만간 올려놓을 예정이므로 너무 '상심'하진 마시길...
yoonta님/ 물론 '무정부주의'쪽 얘기는 아니지요...

yoonta 2007-04-14 23:47   좋아요 0 | URL
무정부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김훈씨의 경우 좀 권위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 편집장시절 풍문도 그렇고.

로쟈 2007-04-14 23:53   좋아요 0 | URL
권위와 권위주의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식별해야겠지만, 김훈이 '권위주의'에 어필한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데, 그런 규정은 아무래도 일반론이고 그런 일반론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게 또한 김훈식이죠. 그러니까 '말'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권위주의'보다 우선적이라고 생각됩니다...

yoonta 2007-04-14 23:58   좋아요 0 | URL
흠..이전의 님과의 대화를 상기해보니 무슨 말씀이신지 대충 알긴 하겠는데.. 그렇다면 김훈식의 권위주의는 그럼 말이 아니라는 건가요? 권위주의가 작동하는 혹은 작동해야하는 현실이라는 건 말이 아닌 당면한 현실이라는 말씀?

로쟈 2007-04-15 00:06   좋아요 0 | URL
인터뷰에도 그런 표현이 있지만, 제가 이해하는 김훈은 '뼈다귀'주의자입니다. 어떤 액션에 대해서 권위적인가 아닌가를 평하는 것은 '살코기' 얘기거든요(살코기주의자들은 그걸로 밥먹거나 입닦고 살겠지만). 그에 대해서 '권위주의자'다, '마초주의자'다 하는 레테를 다 갖다 붙일 수 있고, 또 일견 다 말이 됩니다. 다만 뼈다귀가 빠져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yoonta 2007-04-15 00:13   좋아요 0 | URL
뼈다귀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 하는것은 결국 김훈이나 여타 사람들의 수다한 말들속에서가 아니라 당면한 현실속에서 어떻게 작동되느냐에 의해서 결국 검증되겠죠. 그런데 제가보기엔 김훈식 레토릭도 무지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뭐가 어쨋다는거야? 현실속에서 그 말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데?" 라고 묻는 다면 혹은 "그래서 그 김훈이 추구하는 정치가 뭐야? 한나라당지지야? 열우당지지야? 민노당지지야 뭐야? 아님 다 필요없구 철인 정치하자는 거야 뭐야? " 이런 식으로 되묻게 될수밖에 없다는 거죠.
"뼈다귀주의자"인지 아닌지는 결국 님말마따나 현실속에서 그의 레토릭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의해서 검증되겠죠.

로쟈 2007-04-15 00:20   좋아요 0 | URL
yoonta님과는 '뼈다귀'에 대한 이해가 다른 거 같습니다. 저는 이번에 나온 책 '남한산성' 같은 게 뼈다귀입니다. 글에서 메시지를 증발시키고 남은 문체가 뼈다귀고요. 그걸 저는 감각적으로 읽기 때문에 '무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제겐 '한나라당' '열우당'... 이 관념적이구요...

yoonta 2007-04-15 00:3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은 아직도 "문학의 힘"을 믿으시는가보군요..^^ 저는 일정정도 "근대문학은 죽었다"라는 고진의 명제에 동의하는 편이기 때문에 그런 소설이나 문체가 얼마나 현실적 힘으로 작동할수있는가 하는점에 있어서는 무척 회의적입니다. 아무리 뼈다귀를 환상적으로 나열한다고 한들 그것을 사람들이 도무지 읽지 않는게 오늘날의 현실이기 때문에..문체가 아무리 뼈다귀면 뭐합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소설로서만 볼뿐이지요. 올드보이같은 영화한편보다도 사회적 힘이 없는 그런 뼈다귀..

이처럼 실질적인 현실적 힘이 없는 뼈다귀에는 그 뼈다귀가 레떼르로서의 뼈다귀인지 아닌지 검증하는 장치가 결여되기때문에. 결국 아무도 무엇이 진짜 뼈다귀인지 알수없게 되는 그런 현실...

로쟈 2007-04-15 00:41   좋아요 0 | URL
오해가 있으신데, '문학'도 레떼르입니다. '직업'이 아닌 '밥벌이'에 상응하는 것으로서의 '글쓰기' 정도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런 특정한 글쓰기를 제가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올드보이'의 사회적 힘을 믿으신다는 건 좀 의외입니다...

yoonta 2007-04-15 01:08   좋아요 0 | URL
올드보이 이야기는 그냥 믿는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통계적인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김훈의 소설을 읽는 사람보다 박찬욱의 영화를 본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통계에 근거한 이야기지요..^^ 오늘날의 사회는 엄연히 '대중사회'입니다. 그래서 소설도 아무도 읽지 않는(읽어도 거의 이해되지 않는 -_-) 박상륭식 소설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더 사회적 힘을 갖게 된다는 거죠. 그런 차원의 이야기로 보시면 되구요.

문학도 레떼르다...이 표현 약간 의외의 말씀이신데요. 어쨋든 님은 그냥 "김훈의 문학이라기 보다는 그의 문체가 좋다..사회적 영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라는 정도의 말씀이신지?

로쟈 2007-04-15 01:25   좋아요 0 | URL
아마도 어떤 행위를 '사회적 영향력'이란 말로 푸신 것 같은데, 애초에 '뼈다귀' 얘기를 꺼낼 때 고려했던 것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체가 좋다'라는 식의 취향을 말씀드린 게 아니라 무엇이 진짜인가에 대한 '신뢰'를 피력한 것이구요. '남한산성'에 대해서 예전에 작가가 언급해놓은 구상을 옮겨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 높이의 고민을 제가 신뢰한다는 것이고, 그 형식은 문학이 아니어도 무방합니다(레떼르란 건 그래서 붙은 거구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어떤 행위라면 저에겐 김훈의 어떤 글쓰기도 그런 행위에 값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가 그런 것처럼...

virtuepeak 2007-04-15 23:25   좋아요 0 | URL
yoonta님 말씀처럼 김훈의 소설이 영화 올드보이보다 실질적인 힘이 없다면 그가 권위주의자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 로쟈님이 바로 위에 말씀하셨듯이 뼈다귀가 어떤 사회적 힘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뼈다귀는 이문열에게서 찾아야 하겠지요.

yoonta님은 김훈의 칼럼이나 소설을 읽어 보신 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로쟈님이 김훈에 대해 어떤 평을 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실 수 있을실텐데요. 김훈의 글은 문학이기 전에 '김훈의 글'로서 다가오는 게 있습니다. 추상과 관념을 걷어낸 언어로 구성된 글, 그러나 글이라는 것 자체가 추상적인 기호라는 어찌할 수 없는 본질적 조건.. '이 사람 역시 파시스트야!'라는 정치적 견해를 벗고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저도 작년까지는 아예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가 옛날 글까지 모두 찾아서 읽은 경험이 있거든요.

yoonta 2007-04-16 12:05   좋아요 0 | URL
永革님/ 읽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구요. 한두편의소설과 약간의 수필은 접해봤습니다. 그정도로 읽어봤다라고 말씀드릴수있을진 모르겠지만요.^^ 봤는데 저에게는 그다지 감흥이 오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로쟈님이 관심이 많으신것 같아 로쟈님에게 귀동냥좀 하고 있는 중입니다..^^

님 말씀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님이나 영혁님이 느끼시는 '김훈의 글'이라는 것의 실체를 제가 아직은 느낄수가 없으니 말이죠. 제가 보는 그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너무나 진부한 한 한국적 가부장의 모습만 보일뿐입니다. 길바닥에 채이고 채이는 그런..인간형..단지 그런데 글재주가 비상한 그런 사람..그정도로 밖에는 안보인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닥 새로울것도 없는 그런 생각과 심성을 가진 사람인데..로쟈님같이 공부많이 하신 분이 높이 평가하신다니 신기해하고 있는 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