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 조간에 실리는 칼럼을 미리 읽어보았다. 경향신문의 기획연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에 기고된 김우창 교수의 글이다. 김교수는 같은 지면에 고정칼럼을 연재하고 있는지라 '지식인 현실참여'의 의미를 짚어보고 있는 기고문을 이 기획기사와 관련하여 읽을 수 있는 건 낯설지 않다. 돌이켜보면, 지난 30여년간 한국사회에서 문학평론가로선 아마도 백낙청 교수 다음으로 영향력을 발휘해온 분이지 않나 싶다. 그는 아래의 글에서 지식인의 현실참여, 지식과 정치의 결합이 갖는 본질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되새겨보고 있다.

경향신문(07. 05. 07)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Ⅱ-1. 지식인 현실참여, 그 복합적 의미

플라톤의 이상국은 지식인들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근대 서구의 정치 변화에서 지식인은 중요한 선동자 또는 매개자가 되었고, 공산주의 정권에서는-정권의 관점에서 저울질하여-바른 지식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이 통치자 그리고 정치의 수임자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특히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에서, 바른 도덕의 정치는 정치의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이상의 수호는 학문하는 자의 주요 사명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정치에 참여하는 지식인의 위치는 이러한 유학 전통의 학자, 서구의 정치 변화에서의 참여 지식인, 그리고 현대사의 민족의 수난에 대처한 애국지사들의 모델로서 정의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플라톤이나 공자가 생각한 것이면서 거기에 저항적이고 비판적 기능이 첨가된 것이다. 현대국가는 이외에도 성격을 조금 달리하는 전문지식의 보유자-정책과 행정 연구자, 전문 관료, 그리고 기업 경영인, 근래에 와서 첨단과학기술의 전문가들을 필요로 한다. 전문적 지식인의 필요는 날로 더 절실한 것이 되어 간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하는 지식인을 말할 때, 그것은 대체로 이러한 전문적 지식인이 아니라 그 필요의 테두리에 영향을 미치는 더욱 전통적인 의미의 참여 지식인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참여 지식인의 역할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적 지식에서 온다. 이들 지식인은 자신의 역할을 어떤 전문지식에 의해서라기보다 특별한 정치 이상과의 관계에 의하여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정치에 일정한 방향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상을 분명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또 어떤 이상이 하필이면 특별한 지적 노력의 소산인가? 정치이상은 정치적 삶 일체를 하나로 통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사회의 현대적 발전의 한 의미는 바로 사회공간에서 삶의 통괄을 위한 이상이나 목적의 영역을 줄이고 삶의 수단의 신장을 위한 활동의 폭을 넓힌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목적 부재의 사회에서 이러한 일반적 지식인의 기능은 모호하다. 목적의 부재는 사회적 아노미 그리고 사회의 불균형 발전의 원인이 된다. 이것이 지식인을 사회참여로 끌어낸다. 또 많은 사회에서, 수단-주로 경제적인 관점에서 파악되는 삶의 수단을 에워싼 갈등은 분배의 정의를 강력한 사회적 쟁점이 되게 한다. 정의는 전통 사회에서도 그 자체로 목적의 성격을 가졌었지만,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사람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상에 이끌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을 정치로 끌어들이는 동기의 하나는 억제할 수 없게 솟구쳐 나오는 원천적 정열로 보인다. 이 정열은 정치질서의 구성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한다. 모든 에너지는 명암을 가지고 있다. 정열의 인간은 강한 성격의 인간이다. 정치적 정열은 외고집, 독선, 그리고 전체주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 정열에서 나오는 정치 참여욕이 가장 세속적으로 표현된 것이 정치적 야망이다.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할 것인가”하는 남이(南怡)의 시 구절은 정치적 야망으로 인생을 규정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것이다.

조선조에서 도덕적 이상은 정치참여의 명분이었지만, 벼슬은 그 자체로 많은 학자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목표였다. “동문에 출세한 사람도 많은데, /나 홀로 춥고 가난한 가운데 떨어져 /나이 서른에 관직도 없는 나그네로, /동서를 헤매는 사람”-이규보(李奎報)는 유교가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기 전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관직 없는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쓴 일이 있다. 이러한 정치적 야망은 조선에서 벼슬 욕심으로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크고 작은 야망은 너무나 인간적이면서도 간과할 수 없는 정치참여의 위험 요소를 나타낸다. 물론 이 위험은 다른 긍정적 업적을 위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대가라 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야망을 떠나서도, 현실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불투명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을 말한다. 현실 참여는 현실의 논리에 가담하고 그것을 이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정복하기 위해서 복종한다”는 말로 간략하게 설명한 일이 있지만, 이것은 사회를 정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현실을 개조하려는 이상은 알게 모르게 현실에 휘말린다.

역사에서 우리는 가장 이상주의적인 정치가 가장 권모술수의 활용을 서슴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권화가 되는 것을 본다.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상은 현실과 대결하면서 그 스스로 이상 실현을 가장 천박하고 야만적인 전술을 위한 구실로 삼을 수 있다. 현실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정치에 의한 간섭이 될 가능성이 많다. 중국의 유학과 정치의 역사에서 “정치를 인간화하려 한 유학자들의 의도”는 “도덕적 상징들을 정치화하여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편리하게 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어떤 연구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이상주의적 전통의 경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경계한다고 하여도, 지식과 정치의 결합에는 본질적인 어려움이 있다. 사회 현실에 작용하려면, 그것에 대한 이해와 분석 그리고 개입의 전략이 필요하다. 이것을 체계화하는 데 능한 것이 지식인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들의 힘을 넘어가는 독자적인 힘과 무게를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는 현실의 진상으로부터 괴리된 아이디어의 체계를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자신의 사회이론은 삶의 현실에 기초한 과학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만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면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나아가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도 이데올로기일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해결 없는 패러독스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진실 허무주의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대하여 힘을 발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체계적 이데올로기는 기존질서의 옹호로서 또 정치혁명의 수단으로서 효과를 발휘한다. 근대 세계사에서나, 우리 역사에서나 정치혁명은 늘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이데올로기는 사회구조 전체를 한 관점에서 설명하려 한다. 그런데 부정의 관점은 긍정의 관점보다도 더 쉽게 전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구조의 긍정적 효과들은 작은 것들이 총계로서만 파악되는 데 대하여 부정적 측면은 쉽게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연결된다.

사회의 복합성은 부정에 의하여 단순화된다. 이것은 삶이 끝없는 세말사인 데 대하여 죽음은 하나의 사건인 점에 유사하다. 혁명적 전복의 시기에 사람이 필요로 하는 도덕도 정의(正義) 하나로 단순화된다. (정의는 다른 덕성에 비하여, 가령 인(仁)에 비하여 부정의 덕성이다.) 부정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역사적 과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 어떤 역사적 순간에만 그리고 파괴의 작업에만 현실적 의의를 갖는다.

노무현 정부의 문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정부를 움직여 온 것은 일정한 진보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전의 민주혁명의 이념들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욱 추상화된, 그러니까 더욱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해진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도 혁명적 전복의 대상으로서의 현실이 약화됨에 따라 그만큼 현실 충격의 힘이 줄어들게 된 결과일 것이다.

거대 계획 중심의 정책 발상, 파당성을 강조하는 언어와 인사 정책, 움직이는 현재보다도 과거에 주의를 응고시킨 과거사 바로잡기 등-이 정부의 정책 발상들은 그 사고의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에 깊이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의 문제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합리적 사고력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다. 빈부격차나 부동산 문제에 있어서 계속되는 자가당착적인 정책들은 현실에 즉하여 그리고 긴 숨결로 끈질기게 사고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긴 하나, 현실참여의 과실에는 궁극적 불확실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사회현실은 간단한 이념의 도면에 따라 또는 몇 개의 손잡이로 움직여지는 기계가 아니라 무수한 자유변수들의 종합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그것은 근년의 과학에서 말하는 바, 단선적 사고로 포착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이성적 연산(演算)을 넘어가는 것은 아닌, 복합체계에 비슷하다.

필요한 것은 하나로 있으면서 현실의 복합성에 조응하여 변화하는 유연한 이성에 이르려는 노력이다. 그에 이어진 도덕적 이상도 좁은 투쟁적 목표를 넘어 넓은 인간성 실현을 위한 윤리적 질서를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도덕적 이상은 종종 우리의 원한(ressentiment)의 한 표현일 수 있다. 이성의 사실적, 도덕적 명증성은 끊임없는 자기정화의 과정을 통하여서-야망으로부터, 사적인 정열로부터, 마키아벨리즘의 유혹으로부터, 또 독선과 오만으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함으로써만 근접된다. 이 명증성을 위한 노력은 지식인의 제1차적인 의무이지만, 지식인의 국가와 사회를 위한 봉사의 본령도 여기에 있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7. 0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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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에 맞추어 노동자에 관한 칼럼을 하나 옮겨온다. 보다 구체적으론 '연구직 노동자'에 관한 것이다('고학력 전문직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마도 내가 들어갈 만한 분류항일 텐데, 이들에 대한 처우 문제를 다루고 있다(그러니 남의 얘기가 아니다!). 거기에 '학문의 미래'가 걸려 있어서 좀 거창하긴 한데, '학문의 미래'를 염려하게 된다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교수신문의 관련기사는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3495).

한겨레(07. 05. 01) 연구직 노동자와 학문의 미래

지난 19일 비정규직 관련법 시행령에 있는 고학력의 전문직 노동자에 대한 예외조항, 즉 의사, 변호사, 변리사, 회계사 등과 함께 박사학위를 받고 해당 분야에서 일하는 자는 2년 이상 근무해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조항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불안한 고용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연구직들에게는 정규직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한 문제이겠지만, 연구의 질을 생각할 때에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것이 부적절한 종류의 연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교적 표준화된 매뉴얼을 가지고 연구를 할 수 있는 종류는 정규직이거나 혹은 장기간 고용해도 되는 경우이다. 연구자 개개인의 창의성이 상대적으로 덜 요구되며 매일 같은 장소에 출근을 해야 할 정도로 집단적 작업이 필요한 일이다. 이런 일들을 주로 맡는 연구소들은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경험 있는 연구자들을 장기적으로 고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해마다 그런 비슷한 일들이 계속 주어질 것이며, 비슷한 일을 하는 인력은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 경우 임금을 아끼기 위해 하급직 연구원들은 비정규직으로 채운다.

그에 비해 표준화된 매뉴얼에 따라 수행하는 방식이 아닌, 개인의 창의력이 많이 요구되는 연구는 좀 다르다. 이 경우는 그 연구와 정확하게 짝이 맞는 능력 있는 연구자를 찾아 일을 맡겨야 한다. 이런 연구를 하는 연구소라면 연구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것은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다. 한 연구에 능한 연구자가 다른 연구에도 능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 직장에 고용되어 있다는 이유로 연구에 참여하는 경우 연구를 추동할 연구자의 자발성이 생기지 않고 연구의 질은 현격하게 떨어지게 되어 있다.

사실 자신의 영혼의 무게를 실어 머리를 짜내는 창의성 있는 연구에선 한 연구자가 일생 동안 그렇게 많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영혼의 무게' 같은 표현은 과장이 아닐까? 연구는 '영혼'이 아니라 '정신' 가지고 하는 거 아닌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잘 안다고 다른 주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니, 한 연구자가 능력을 발휘하는 영역은 아주 협소하고 특수한 영역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영역, 그 주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고, 이 작지만 중요한 성과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연구는 정규직화가 힘든 대신, 연구에 대한 값을 매우 높게 쳐주어야 한다. 일생의 성과를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어차피 정규직화가 힘드니 마음 편하게 사안별로 일을 맡기고, 정규 고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매우 싼 가격으로 처리해 버린다. 우리 사회에서 전문적 지식에 대한 가격은 지나치게 싸다. 원고료는 25년 전에 비해 고작 20배 올랐고, 파트타임으로 일을 맡으면 일의 전문성과 무관하게 그저 일용잡급직으로 처리될 뿐이다.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알아낸 지식에 대해서도 공짜로 인터뷰하는 것이 상식이다.

돈과 일자리를 쥐고 있는 것은 연구자가 아닌 고용주와 관리자이니, 이를 개선하기란 매우 힘들다. 일의 속성상 개별화된 연구자들은 단결로 힘을 모으기도 힘들다. 가장 열악한 조건의 피고용자이며 도급제 노동자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리 전문가라도 피고용자가 되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영악한 요즘 젊은이들은, 스스로 고용주가 될 수 있는 의사, 약사, 변호사만 되려고 한다. 똑같이 일하여 똑같이 소중한 전문적 지식을 얻고서도 여전히 불안한 피고용자나 도급제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공 분야나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가 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 이래저래 대한민국의 학문의 미래는 암울하다.(이영미/대중예술 평론가)

07. 05. 01-02.

P.S. 암울한 '학문의 미래' 대신에 전도유망한 '의사, 약사, 변호사'들을 한국사회는 양성하게 될 것이니 딴은 그걸로 만족할 일이다. 어차피 주로 수입에 의존해온 학문이니 학문 바이어들이나 약간 명 키우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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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5-02 20:01   좋아요 0 | URL
이 글과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인데요 악셀이 어느 유명한 소설 주인공인가요? 제가 읽은 문장은 '사랑이 세상에 더럽혀지는 걸 보느니 죽음을 택한 악셀' 뭐 이랬거든요. 어느 소설이죠? 아, 그리고 늦었지만 안정효-복거일 기사에 나왔던 캐주얼한 관계에 대한 로쟈님 번역을 오늘 봤는데 로쟈님 번역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로쟈 2007-05-02 23:31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주인공은 아닌데요.^^;

심술 2007-05-03 19:39   좋아요 0 | URL
로쟈님도 모르신다니 안도가 됩니다.^^

로쟈 2007-05-05 20:26   좋아요 0 | URL
제가 모르는 게 한두 가지겠습니까? '안도'로는 부족하고 '안락사' 수준입니다...
 

경향신문의 기획기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을 그만 옮겨올 생각이었지만 내일자 조간에 실리는 내용은 그런 생각을 접어두게 한다. 무엇보다도 설문조사에 근거한 데이터이기에 '한국을 바꾼 지식인'이란 타이틀만큼이나 흥미를 끌고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저술들의 목록도 일별해 볼 만하다. 지난 2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군...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3. 한국을 바꾼 지식인

지식인들 사이에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 지식인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세 사람이다.

경향신문이 최근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특집을 위해 각계 지식인 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복수응답) 조사 결과, 24명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백교수를 뽑았다. 이어 21명이 리전교수, 17명이 최교수, 10명이 강준만 전북대 교수를 꼽았다. 여기에 ‘대중적 글쓰기’로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깨는 도전적 작업을 해온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90년대 이후 등장한 지식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77)는 지난해 9월 “지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사상의 은사’로 기억되고 있음이 확인됐다. “시대의 흐름을 이끈 70~80년대 학번들의 이념적·사상적 출발점”(강맑실 사계절 출판사 대표)이나 “한국사회에 보기 드문 보편주의, 국제주의자로 ‘지적 거인과 같은 존재’”(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왜 아직도 리영희인가.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는 “87년 민주화의 분수령 이후 한국사회는 새 변화를 추동할 세력을 창출하지 못했다”며 “이것이 리영희 선생의 주 활동기가 87년 이전인데도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리영희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지방 말단직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때 혼자 서울의 공업학교로 유학했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해방된 사회에서 동창생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삶에 있어서 만사에 불편하였다”고 되뇌곤 했던 그는 평생 누구와 무리지어 세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강준만(전북대 교수)은 리영희 서재에 걸려 있는 백범의 휘호로 리영희의 꼿꼿함을 설명한다.

“踏雪夜中去 / 不須胡亂行 / 今日我行跡 / 遂作後人程 (눈길을 걸을 때 /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 / 내가 걷는 발자국이 /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중국전문가로서의 리영희는 외신부 기자생활을 하며 단련됐다. 합동통신·조선일보에서 해·복직을 거듭하면서도 굵직한 특종들을 남겼다. 특히 그는 베트남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함과 중국 사회주의의 인본주의적 모습을 서구 지식인들의 입을 빌려 소개하는 방식으로 반공주의에 맞섰다. 리영희는 기자직과 교수직에 있는 동안 다섯 차례 구속되고 모두 1012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독재의 시대에 그의 글들은 “아무리 작게 잡아도 몽롱한 의식에 끼얹는 찬물 한 바가지”(강준만)였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는 힘은 사회적 발언의 중단을 선언할 만큼 스스로 자신의 육체적, 지적 한계를 인정할 때까지 그가 의미있는 비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한국사회를 ‘시장맹(盲)’ ‘북한맹(盲)’으로 만들었다”고 리영희를 본격 비판한 것은 불과 4개월 전인 지난해 12월 계간 ‘비평’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윤평중은 이번 경향신문 설문에서 영향을 미친 지식인으로 리영희를 꼽았다. 그는 말했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화운동 시기의 젊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대적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그 여파는 87년 체제 이후에도 지속됨으로써 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보수진영이나 우파에서는 그 특유의 이론적 빈곤이나 도덕적 결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만한 인물이 전혀 부재하다.”

리영희는 민주화 이후 자신의 책들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계속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왜일까. 그 대답은 백낙청, 최장집 등 후배지식인들의 왕성한 지적, 실천적 활동이 요구되는 현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말해준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69)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지식인 1위로 꼽힌 것은 40년 창비 역사와 함께 해온 그의 실천적 글쓰기 덕분이다. 차병직(법무법인 한결 변호사)은 “한반도 특유의 정치 상황에 대해 민족 문제를 고려하면서 지속적으로 분석해 왔으며 현재와 미래의 대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모색한 지식인”이라고 했고, 박명림(연세대 교수)은 “언제나 시대정신에 맞는 화두를 잘 던지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맛깔나는 문체로 풀어내는 데 탁월하다”고 말했다.



백낙청은 55년 경기고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인제대 백병원을 세운 백인제·백붕제가 각각 그의 백부·친부이고, 현 인제대 이사장인 백낙환이 형이다. 스스로 ‘변칙적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말한 바 있는 백낙청은 28세 때인 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을 창간하며 한국 사회의 분단현실을 실천적으로 극복하는 데 투신했다. 창비는 정간, 폐간, 판금 처분을 반복하면서도 “지난 40년간 비판적 연구자-문인-저술가 그룹을 한데 묶은 ‘비판지성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유지해오며”(조효제) 백낙청의 실천적 지성 활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백낙청의 담론 주도력 뒤에는 “유일하게 시장에서 성공한 비판적 지식인 미디어인 창비”(류준필 성균관대 연구교수)가 있었던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에 문학이 기여해야 한다는 ‘민족문학론’을 펴온 백낙청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최근 그 이름에서 ‘민족’을 떼느냐 마느냐 문제로 논란을 벌일 때 민족의 삭제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뿌리는 여전히 민족과 통일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최근 이명원(문학평론가)과의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2825).


“상당수의 진보적 학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보수 논객이나 학자보다 분단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 학자들은 마치 이 사회가 분단과는 기본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없고, 분단이라는 것이 하나의 부수적인 사실로 있는 것처럼 전제를 깔고, 분단 안된 사회의 척도로 진보 보수를 따지는 경향이 많아요. 최장집 교수도 그런 예의 하나이고, 손호철 교수도 그런 경향이 강하고, 그런 분들이 많아요.”



일관되게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학문적, 실천적 역량을 쏟았다는 점에서 최장집(고려대 교수·63)은 백낙청에 비견된다. 최장집은 강릉의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고려대 재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투쟁을 주도한 4·19 세대다. 그는 고려대 정외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후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실 행정관으로 1년여 일하기도 했으며 잡지 ‘세대’에서 기자생활을 거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만개했던 각종 변혁이론들이 91년 소련 붕괴로 몇 년 못가 시들해졌을 때 최장집은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1983년 40세 늦깎이 박사를 받고 돌아온 최장집은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80년대 초 대학을 다녔던 이른바 ‘제3세대 학자군’을 이끌며 그람시류의 네오마르크시즘을 비롯한 비판이론을 소개했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서구의 눈을 빌려오되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왔던 흐름을 꿰뚫어보고 현실 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최교수 정치학의 근간”이라고 말했다.

최장집은 외형적 자유화가 아닌 실질적 민주화를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국 민주주의 이론’(1993) 때부터 피력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하다 조선일보의 사상검증에 휘말려 1년 만에 학교로 돌아온 뒤로 그의 공부는 더욱 깊어졌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이 책 제목이 하나의 관용어로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학문적 천착보다는 사회적 활동으로 유명해진 학자도 아니고, 순수한 학문의 세계에 갇혀 있는 교수도 아닌, 이 둘을 아우르는 이론적 실천가라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 리영희

1929년 12월 평북 운산 출신. ‘삭주 대관국민학교 개교 이래 몇 천재 중 하나’였다. 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학비면제, 숙식·제복 국가부담’에 이끌려 한국해양대를 다녔다. 외신부 기자생활을 거쳐 72년부터 한양대 신방과 교수를 지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최근 저작 활동을 접었다.

◇ 백낙청
1938년 1월 대구 출신. 남들보다 2년 일찍 학교에 다녔다.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가 브라운대에서 영문학 학사,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고 귀국했다. 66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뒤 72년 미국작가 DH 로렌스 연구로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았다.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 최장집

1943년 5월 강릉에서 태어나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청와대 공보비서실과 잡지사 ‘세대’에 잠시 몸 담았으며 이후 미국 시카고대에 유학했다. DJ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가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때문에 물러났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90년대 강준만 등장

전통적 지식인이랄 수 있는 세 지식인의 틈새에서 90년대에 등장한 전북대 교수 강준만(51)의 약진은 변화된 지식인 지형의 일면을 보여준다. 10명의 응답자가 그를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꼽았으며 그가 글을 쓰는 잡지 ‘인물과 사상’은 6명이 영향력 있는 저술로 꼽았다.



강준만은 ‘지역주의 비판’ ‘서울대 망국론’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등의 민감 이슈를 도발적인 문체로 제기한 ‘게릴라 지식인’이었다. 모든 ‘금기와 성역에 도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인물과 사상’은 강준만 1인이 글을 쓰고 출판하는 독특한 체제도 관심을 끌었지만, 거침없이 실명을 거론하는 전방위적 비판으로 이른바 ‘강준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박상훈(후마니타스 주간)은 “다작의 교양도서 작가로서의 현재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차치하고라도 민주화 이후 기성체제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날카로운 시각과 직설적 논쟁화법으로 비판해 ‘강준만식 글쓰기’ 양식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강교수가 남긴 사회문화적 영향은 매우 컸다”고 강조했다.

강준만은 “진의가 왜곡되기 쉽다”며 기자들의 전화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팩스 또는 e메일로만 외부와 소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회적 개입은 책 쓰고 신문에 기고하는 것으로만 한정된다. 강준만은 언젠가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하는 등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만큼 스스로의 행동에 조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강준만의 칼날 화법은 어느 순간 많이 순화된 것이 사실이다. 1인 출판으로서의 인물과 사상은 지난 2005년 막을 내리고 지금은 다수 필자가 참여하는 잡지로 성격이 바뀌었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강준만으로 대표되는 게릴라 지식인들은 몇 년 못가서 초기의 기개와 전의를 크게 상실했는데 이는 기존 제도권 지식인 사회의 무응답과 외면에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보수 지식인으로는 송복(연세대 명예교수)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 박세일(서울대 교수) 김대중(조선일보 고문) 복거일(소설가) 이문열(소설가) 등이 이름을 올렸다. 자연과학자로는 임지순(서울대 교수)과 황우석(전 서울대 교수)이 거명됐으며 김대중(전 대통령), 기업인 황창규(삼성전자 사장)를 선택한 이도 있었다. 영향을 준 지식인을 국내·외 구분 없이 물었기 때문에 해외 지식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카를 마르크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새뮤얼 헌팅턴,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 꼽혔다.(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30)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한국의 지성 ‘금서’가 키웠다

◇ 국내서적

지식인들이 뽑은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외 저술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른바 ‘금서목록’에 올랐던 책들이 주류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23명)과 ‘자본론’(18명), ‘전환시대의 논리’(15명)는 대표적인 금서였으며 ‘태백산맥’(10명)은 불과 2년 전까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계류돼 있었다. 79년 10·26 사태를 열흘 앞두고 한길사에서 출간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은 70~80년대 대학생들에게 한국현대사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선물해준 교과서였다.

송건호·오익환·백기완·진덕규 등이 참여해 ▲해방의 민족사적 의미 ▲분단의 배경과 과정 ▲친일파 문제를 다뤘다. 대다수 응답자들이 “대학시절 지하 이념서클의 의식화 교재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이 책 내용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발간 당시는 상식이 불온하던 시절이었다.

김언호(한길사 사장)는 “애초 송건호 선생과 책을 기획할 때는 ‘한 5000권 나가려나’ 예상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40여만권이 나간 초특급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책에 실린 생각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였어요. 진덕규, 임종국 같은 필자들도 대부분 이데올로기와 관계 없는 분들이었죠. 그런 책인데도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1차적으로 독자들이, 즉 시대가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땐 정말 대단했어요. 10·26이 터져 책이 판금될 때까지 열흘 만에 4000권이 나갔으니…. 판금됐다고 그 책을 안 읽었겠어요. 판금시키면 오히려 복사본이 더 많이 나돌던 때였죠.”



해전사가 한국현대사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줬다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깨우쳐 준 책이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으로 드러난 미국 대외정책의 추악한 본질을 폭로하고, 중국사회주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렸다. 냉전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았던 대학생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으로 하여금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줬으며 김세균(서울대 교수)이 “밤 새워 읽었고, 그 후에도 읽고 또 읽었던” 그 책이다.

이 책은 리영희(한양대 전 교수)의 ‘우상과 이성’(2명)과 함께 “사회과학도로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 고마운 책”(신광영 중앙대 교수)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광영은 “이 저술로 인해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이 가능함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조정래(소설가)의 ‘태백산맥’에 대해 이광일(성공회대 교수)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준 책은 태백산맥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냉전의 족쇄를 깨는 데 일조했다”고 평했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소련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항한 우파-전통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 보편성을 획득한 솔제니친이 있다면, 한국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항한 좌파-민족주의적 휴머니스트 반체제 작가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한 조정래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복거일(소설가·미래문화포럼 대표)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태백산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는 2000년대에 나온 책으로는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임지현(한양대 교수)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3명), 임지현·권혁범·박노자·임은실 등이 함께 쓴 ‘우리 안의 파시즘’(2명)은 민족주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 해외서적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해외 저술로 가장 많은 지식인들이 꼽은 ‘자본론’(18명)은 1980년대 후반 과학적인 변혁이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 첫 한글 번역본이 나온 87~89년 이전에도 일본어 번역본 등의 형태로 은밀하게 유통됐지만 본격적으로 학생들 손에 쥐어진 것은 87년과 89년 강신준(동아대 교수)과 김수행(서울대 교수)이 잇달아 번역본을 내면서부터이다. 고병권(수유+너머 대표)은 “87년 이후 첫 10년간이 지식사회가 마르크스주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그 후 10년간은 마르크스주의에 회의하거나 그것을 전환시키려 시도했던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화 직후 서울대 교수 김수행을 통해 자본론 1~3권을 번역해낸 박기봉(비봉출판사 대표)은 “자본론은 지금도 해마다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라며 “다만 책의 결론에만 줄 치는 운동권식 독법보다는 그런 결론이 도출되는 논리를 따라가는 자본론 읽기가 더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81년 미국에서 출간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16명)은 번역도 되기 전에 널리 읽히며 냉전체제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 현대사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 중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종문(한신대 교수)은 “우리를 옥죄어 온 냉전체제를 뒤집어보게 해 준 의미를 높이 살만하다”고 했다. 김원(서강대 연구교수)은 “냉전적 시각, 빈약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한국현대사 해석을 하던 한국학계에 ‘지적인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8명)은 98년 서울대 교수인 한상진·박찬욱에 의해 번역돼 한국 사회에 ‘실용주의’와 ‘중도론’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됐다. 조효제(성공회대 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얘기되며 대안적 진보이념을 갈구하던 시점에 소개돼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진영은 공개적으로는 기든스를 비판하면서, 자기 방에서는 몰래 정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책이 소개된 90년대 후반을 거쳐 최근 와서 대안적 진보이념으로 사회국가, 사회투자 국가, 사회서비스 국가, 사회연대 국가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거의 모두 기든스식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일종의 ‘거명되지 않는 영향력, ‘스텔스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조효제는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저술은 권력과 담론에 관한 인식 전환의 계기를 줬다”면서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한국적 문제의식의 지형에 맞지 않았음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설적”이라고 지적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대중 서적들이다. 김만흠(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대중사회 수준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소설, 성공학 번역서들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전영평(대구대 교수)은 “지식인 집단보다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측면으로 파악한다면 해리포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일 것”이라고 말했다.(손제민·김종목·장관순기자)

07.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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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30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30 00:35   좋아요 0 | URL
바람구두님/ 이런 건 먼저 날라주셔도 됩니다!..
**님/ '오랜만에'는 저도 '?'입니다...

마늘빵 2007-04-30 00:47   좋아요 0 | URL
저도 가져갑니다. :)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7-04-30 01:06   좋아요 0 | URL
저두요!(오랜만에 인사드려요.^^;;)

드팀전 2007-04-30 07:50   좋아요 0 | URL

 예전에 봤던 이 책이 생각납니다.^^...

생활하는 지식인이 많아지면 좋을텐데,,,


향기로운 2007-04-30 12:14   좋아요 0 | URL
저도 갖고 갈게요^^

yoonta 2007-04-30 15:59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강준만씨나 진중권씨같은 도발적인 "게릴라 지식인"이 좀더 많이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서로 치고 받고 해야 좀더 생산적인 논의도 활발해지고 지식인 사회의 담론들도 대중화될 수 있겠지요.
 

경향신문의 주말판에는 '서양사상의 뿌리를 찾아서'가 연재되는데, 서양고전학 전공자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집필하고 있다. 한 면의 2/3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나름 파격적인 지면구성이라고 할 만하다. 얼마전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관한 연재를 옮겨온 바 있는데, "'삶에 대한 앎'은 삶의 강제다"라는 주장을 내건 이번 주 꼭지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4. 28) 지식의 궁극적 쓸모

지식의 쓸모는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을까? 권력 획득의 도구에, 재산 증식에, 박학다식함의 자랑에 있을까? 지식이 자본인, 지식-자본(scientia-capitalismus)의 시대에 쓸모없는 물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쓸모없는 물음과 잠시 씨름하고자 한다. 우리는 도대체 왜 뭔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가?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원하기”(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80 a 21) 때문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에 따르면, 지식은 “어떤 쓸모”가 있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모르는 것과 부딪혔을 때 자신이 모른다는 자각과 함께 그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생겨나고, 이는 생활의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앎 자체의 욕구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이 ‘앎 자체’에 대한 욕구는, 그것이 욕구인 한, 욕구의 주체인 인간에 속하지만, 이 욕구는 좀 특이해서, 욕구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무엇’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한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대체로 지식의 습득 여부가 학력을 결정하고, 학력이 삶의 수준(?)을 결정하는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좀 이상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좀더 읽어 보자.

“가장 보편적인 것이 사람들에 있어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다. 감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기에. 지식 중에서 일차적인 것에 가장 가까운 지식이 가장 정확하다. 더 적은 수의 원리로 구성된 지식이 추가적인 원리를 필요로 하는 지식보다 더 정확한 지식이기에 그렇다. 예를 들면 산술학이 기하학보다 더 정확하듯이 말이다. 원인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또한 가르침을 더 준다. 각각의 것에 있어서 원인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많은 가르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를 목표로 하는 앎과 지식은 지식을 대상으로 삼는 지식에 속한다. 그 자체로의 지식을 선택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체로’ 지식인 것을 선택할 것이다. 이 지식은 무엇보다도 대상에 대한 지식의 지식이다.” (‘형이상학’ 982b 21-982b10)



읽다보니 어느 사이에, “사물들의 일차적인 원인들과 원리들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세계에 도달해 버렸다. 여기가 형이상학의 세계다(Ecce! hic est metaphysica). 지식이 지식을 대상으로 놓고 따지는 세계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을 묻고 싶다. 형이상학의 세계에 온 소감을! 어렵고, 무슨 소린지 감을 못 잡겠고, 철학하는 사람들 정말 쓸모없는 짓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한 가지만 확인하고 이론(理論)의 세계에서 현실(現實)의 세계, 삶의 세계로 돌아가자.

어떤 이가 무엇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다 해서, 그 정보가 완전한 지식일까?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서 그것이 단편적 정보는 될지언정, 진정한 앎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에 대한 지식이 앎으로 성립하려면, 그 지식에 대한 앎의 체계(학문)가 성립해 있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앎이 앎으로 설 수 있도록, 앎에 대한 앎의 세계에 대한 기초를 마련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어떤 쓸모” 없는 앎, “앎 자체”의 욕구가 펼쳐낸 이론의 세계가 “학문(scientia)”의 세계다. 학문은 ‘쓸모없음’이 만들어낸 세계인 셈이다. 하지만 ‘진리(veritas)’가 상주하는 공간이 또한 학문의 세계다.

이렇게 앎의 세계에서 위엄과 권리를 자랑하던 진리를 삶의 세계로 끌어 내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다. “철학(지혜의 사랑, 학문)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피타고라스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물에 실제 지식을 넓혀준 현인(賢人)이기도 한다. (중략) 그러나 학문이 처음 생겨났던 고대로부터 소크라테스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학문은 수(數)와 운동(運動)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만물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어디로 되돌아가는지 그리고 별자리의 크기와 별자리 사이의 거리와 ‘별들의’ 운행 행로 등 온통 천문(天文)에만 정성을 기울였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자연학자’ 아낙사고라스의 제자인 아르케라오스의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첫 번째다. 처음으로 학문을 하늘의 세계에서 도시(국가)로 끌어 내렸고 또한 집안으로 끌고 들어왔던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삶(vita)에 대해서, 사람 사는 법(mores)에 대해서, 선과 악에 대해서 따지고 캐물었다. 다양한 관점에서 따지고 캐묻는 방식과 다루었던 주제들의 폭넓음과 그가 보여주었던 지성의 크기는, 이는 플라톤의 기억과 기록을 통해서 신적 경지의 반열에 올랐다.”(‘투스쿨라눔의 대화’ 제5권 10~11장).

키케로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삶의 문제를 걸어서 앎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한 첫 번째 사람인 셈이다. 앎의 세계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이전의 학문 세계와는 다른 종류의 앎의 세계를 열고 있다. 삶의 입장에서 앎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기존 앎 중심의 지식 세계가 삶의 통제를 받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를 통해서 앎의 세계와 삶의 세계 사이에는 서로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겨나는데, 이 통로가 “철학”이라는 길(via)이다.

키케로가 말하듯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피타고라스의 철학(앎)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삶과 앎을 연결해준다는 점에서, 앎을 일차 대상으로 추구하는 분과 학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삶의 요구를 앎의 세계에 요구하고 전달한다는 점에 삶의 지킴이로서, 앎의 세계의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학문인, 철학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인 셈이다. 앎 일반을 지칭하는 의미로서의 철학이 아닌, 비판적 기능의 수행자로서의 철학이 말이다.

비판적 의미에서 “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던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그는 이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삶에 실천한 철인(哲人)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안다는 것과 철학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름을 일깨워 준 이가 소크라테스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앎과 삶의 관계에 대해서 좀더 따져보면 어떨는지? 곧 삶과 앎은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앎은 삶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삶이 앎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아마도 가능하다면 앎이 삶을 통제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다. 앎은 예측 가능하고, 항상성(constantia)을 보장하기에. 하지만 앎이 삶의 영역을 얼마나 포괄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안다는 것의 경계는 어딜까?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은 아닐까? 결국 앎의 구경(究竟)은 결국 미지(未知)의 바다가 아닐까? 그런데 삶은 이 미지의 바다에 던져진 것이라면, 앎은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삶은 앎의 통제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인간조건(conditio humana)의 근본적인 제약에 부딪히고 만다. 그러니까 앎이 삶의 전 영역을 모두 포섭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예컨대 아름다움에 대해서, 과연 보편의 앎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정확한 계산이 가능하지 않은 그리고 일률적인 척도와 기준을 허용해선 안 되는 영역이기에 그렇다. 곧 앎의 보편 세계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고 마구잡이로 개입해선 안 되는 공간이 삶의 공간엔 있고, 실은 그것이 ‘사람살이’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삶은 앎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은 분명하다. 아는 것이 힘(Knowledge is power)인 시대를 넘어, 모르면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기에 그렇다. 어찌 되었든 배워야 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을 믿는다.

그러면 앎은 삶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따져보자. 앎이 앎의 세계 안에서만 머무르고, 삶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선 이미 소크라테스가 비판했다. 그는 앎의 세계만을 중시하는 학문(Wissenschaft)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접근해, 삶의 영역에서의 앎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곧 철학(Philosophie)을 정초했다. ‘삶 안에서의 앎’의 문제에 대한 길잡이가 철학이라는 점에 대해선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동조한다. “철학에 의해서 삶 전체는 교정 받고 지도되어야 한다. (중략) 삶의 지도자인 철학이여, 덕의 탐구자요 악덕의 방어자여, 철학 없이 우리 자신을, 우리의 삶을 도대체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고 (미략)” (‘투스쿨라눔의 대화’ 제5권 5장).



삶의 입장에서 탐구 결과에 대한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은 채, 지식만을 생산하는 앎의 지식생산 공장으로서의 학문이 아닌, 삶의 길잡이로서 철학을 찬양한다는 점에서, 키케로는 소크라테스 철학의 계승자로 보인다. 곧 앎은 삶의 조정과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앎이 없는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삶이 없는 앎’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매일 저녁 뉴스를 통해 접하는 현대적 비극의 배경에는 아마도 ‘삶 없는 앎’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삶에 대한 앎’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절실하게 여기지 않는 풍토가 한 원인일 것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앎’을 배우는 일, 곧 인문 교양은 삶의 장식이 아니라 삶의 강제이다. 그것이 장식이 아니라 강제인 것은 삶의 어느 중요한 순간에 삶을 결정짓는 지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행운이 지배하는 삶의 세계에서 말이다.

특히 삶의 지배자가 행운이 아니라 지혜임을 배우는 일은, 어느 순간 삶의 강제가 아니라 삶의 지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삶에 대한 앎’에 대해선 최소한의 “삶의 강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듣기 싫고 거북해도 말이다. 물론 그러다가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어야만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더불어 살아야 하는 한, 삶의 강제는 필요하다.(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07.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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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경향신문의 기사 가운데 최근에 이슈가 되었던 '토플 대란'을 주제로한 두 소설가의 대담을 옮겨온다. 문단에서 '영어의 달인'으로 한 손가락에 꼽을 만한 이 두 사람은 안정효, 복거일 제씨이다. 대담을 일독해본바, 나는 따로 의견을 제시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안정효의 입장에 동의하는 편이다.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 1998)를 통해서 한때 '영어 공용어론'의 불을 지폈던 복거일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일독해보시길 권한다.

경향신문(07. 04. 25) ‘토플 대란’으로 본 영어 열풍

글로벌 시대에 영어는 필수라지만 한국의 영어 열풍은 광적인 수준이다. 영아에게 영어 비디오를 틀어주고 조금 자라면 영어 유치원에 보내며 중·고생과 대학생들은 영어 관련 인증시험에 골몰한다. 직장인들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출퇴근한다. 이게 다 영어 잘하면 출세하고 잘 못하면 뒤처진다는 인식 때문이다. 최근의 ‘토플대란’도 여기에 배경을 두고 있다. 영어공용화 주창론자인 소설가 복거일씨와 ‘영어 잘하는 소설가’이면서도 한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소설가 안정효씨의 토론을 통해 우리 사회의 영어열풍 문제를 짚어봤다. 두 사람은 23일 경향신문에서 만났다.

안정효=토플이 각종 입시에 반영된다는 것을 이번에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사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점수를 필요로 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이 시험은 이른바 영어 실력 측정 기준일 뿐이잖습니까(*나는 한번도 토플 시험을 본 적이 없어서 현재의 '열풍'에 대해 실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복거일=토플은 영어 측정시험으로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편리한 시험입니다. 공신력도 있고 접근도 쉽고 보편성도 확보됐습니다. 수요가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 과정에서 해프닝이 우연히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에 영어 실력 측정 수요가 많다는 건데, 사회 본질적인 데에 이유가 있습니다. 경제의 해외의존도가 높다보니 지식인 근로자들이 영어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기업에서는 영어 실력이 좋은 사람을 뽑고 싶어 하는 거고 기업이 원하니 자연스레 대학, 고등학교도 원합니다. 막연히 반미 감정 같은 민족주의적인 감정에서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단견일 뿐입니다.



안정효=영어라는 언어에 대한 반발이 과연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시작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민족주의라기보다는 영어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과잉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봅니다. 외국과 무역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을 하는 바이지만 사회활동에서 필요한 수요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해야 되는 사회입니다. 국력의 낭비입니다.



복거일=평균적으로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저는 영어를 모두 배워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영어는 세계의 표준언어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정보들에 접근하려면 영어가 필요합니다. 정보 중 중요한 것은 모두 영어로 저장돼 있습니다. 사실 영어로 존재하지 않는 정보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영어가 안 되면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제약됩니다. 기업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못하면 당장 판단을 못 내리게 됩니다. 접근이 어려워지면 중요한 일로부터 스스로 배제되는 겁니다. 영어 못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사회적인 차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는 필수입니다.

안정효=모든 정보가 영어로 돼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으로 된 정보는 각처에 존재합니다. 다만 이른바 세계 공통어라는 영어로 돼 있는 정보가 많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영어를 그렇게 많이 배우고 가르치느냐. 사람들에게 ‘영어가 실생활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신 자식에게 영어를 가르칠 거냐’고 물어보면 거의 다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풍조가 문제입니다. 회사에서 영어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분야도 참 많습니다. 무역, 장사, 농사 종사자까지 왜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워야 합니까.



복거일=이왕 영어를 배우기로 결정했으면 하루라도 빨리 배우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조기교육에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나면 모국어에서 쓰이지 않는 음소들을 구별하는 능력이 사라집니다. 뒤늦게 이런 능력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영어 노래, 테이프를 들려줘서 조기교육하면 엄청나게 비용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영어를 왜 배우느냐고 의문을 갖고, 민족혼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교육을 가로막으면 사회에 도움이 안 됩니다.

안정효=아이들 영어교육은 정말 문제입니다. 결국 발음과 회화만 중시하는 교육입니다. 영어교육이 상업화돼 영어는 이제 산업입니다. 상업적으로 상품화해서 파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영어교육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조기교육도 반대입니다. 모국어 언어체계가 확실히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영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 ‘캐주얼한 관계’가 한국말로 뭔 줄 아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알면서도 십중팔구 우리말로 전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말 감각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해에도 한계가 생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단어가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그 제한된 체계를 위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큰 노력을 해야 하는지 부정적입니다. 모국어 체계를 확실히 세운 다음에 영어를 배우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입니다.

복거일=당사자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영어를 배우기로 했으면 이를 지지하는 효과적인 제도를 만들어주는 것이 자유주의 원칙입니다. 개개인의 형편에 맞춰서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원하는데 허리가 휘든 안 휘든 다른 사람들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덜 힘들게 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언론에서는 ‘영어광풍’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들이 합리적 판단을 하는 것에 어떻게 ‘미칠 광’자를 씁니까.

안정효=사람들이 과연 개인적으로 독창적인 판단을 하는 걸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눈치를 보다가 힘겹게 쫓아가는 겁니다. 중간 집단은 대개 남들이 어떻게 하느냐를 모델로 삼아 따라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바람에 휩쓸리는 것이고 그래서 ‘바람 풍’자를 쓰는 겁니다. 영어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도 자꾸 겁이 나니까 하게 되는 겁니다. 사회구조적인 우리 열등감이 영어열풍으로 표출된 것 같습니다. 세계와 경쟁을 하다보니 열등감이 생기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안 되는 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겁니다.



복거일=우리나라 기업환경이 나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영어가 결정적입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에게 영어가 필요합니다. 인도 후추 농사꾼들은 직접 시카고 현물 가격을 인터넷으로 읽고 거래하고 가격을 매깁니다. 우리 농민도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게 자유무역협정(FTA) 체제에서 살아남는 길입니다. 예술가도 영어가 필요합니다. 명성황후와 난타의 차이점이 뭔지 아십니까. 명성황후는 우리말이었고 난타는 언어가 없었습니다. 언어가 장애가 된다는 겁니다. 안선생님은 영어로도 글을 쓰니 어느 정도 명성이 있지만 나에 대해서는 해외에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안정효=나는 평생 영어로 먹고 살았지만 아직도 정관사 활용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영어는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영어는 매체일 뿐이라 영어를 잘 안다고 모든 것이 되지도 않습니다. 인도에서 후추 장사하는 사람이 영어만 잘해서는 안 됩니다. 후추생산법 같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체에 바치는 시간과 공이 너무 큽니다. 우리 얘기를 영어로 쓰자는 것은 알리자는 취지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를 알아야 합니다. 안 되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안 되는 것까지 하려고 하는 것이 낭비입니다. 모든 사람이 소 한두 마리 키우는데 미국 우시장 동향을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복거일=물론 영어만 잘한다고 해서 모두 다 잘하진 않습니다만 영어를 잘하면 조금 더 잘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필리핀도 영어를 못했으면 그나마 국가통합이 없었을 것이고, 외국에 나가서 벌어들이는 돈이 전체의 13%입니다. 영어가 없었으면 그런 소득을 창출하는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을 겁니다. 인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정효=영어는 배우기 어렵습니다. 인도는 식민지여서 영어를 잘하고 필리핀도 식민지였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같은 경우는 자기 나라 이름도 없습니다. 국민 전체가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대단한 국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영어실력자들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복거일=내 주장은 모국어와 영어를 같이 가르치면 된다는 겁니다. 영어공용화론은 영어만 쓰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한국어와 똑같이 법적으로 지위를 가지고 쓰자는 겁니다. 한 세대를 두고 준비해야 됩니다. 도로의 표지판이나 공문서 같은 것을 국영문 병용하자는 걸로 시작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계시민으로서도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그게 영어공용화의 첫걸음입니다. 또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영어를 친근하게 느낍니다.

안정효=영어공용화는 논쟁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필요한 곳에서는 저절로 그렇게 돼 가고 있습니다. 유명 관광지에서는 이미 표지판에 국영문 병기를 하고 있고 서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만 중시하는 상황에서 한국어 훼손 문제도 생각해야 합니다. 벌써 영어 같은 외래어가 한국어에 침투해 있습니다. 한국어가 100년 안에 없어진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닙니다. 서양 언어와 우리 언어는 구조부터가 다릅니다. 외국과의 경쟁과 같은 현실적인 필요성이 영어공용화를 지지하기도 하지만 실제 우리끼리 소통하는 데 있어서 한국어가 너무나 크고 견고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복거일=영어는 오히려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하기도 합니다. 언어는 문화의 기초가 됩니다. 요즘 어느 측면에서는 문화가 동질화되어가고 있습니다(*이건 무슨 논리인가?). 미국에서 솔이나 재즈가 나오면 그날로 전세계로 퍼집니다. 그렇다고 문화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도 시장이기 때문에 오히려 시장이 넓어진 겁니다. 다양성이 확산돼 문화의 발전에도 기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겁니다.

안정효=언어도 문화의 일부입니다. 별개로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워서 문화가 망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고방식이 망가지기 때문에 문화가 망가지는 겁니다. 영미권의 사고방식이 침투하면 문화도 망가집니다. 나 같은 경우 영어로 소설까지 썼지만 한국 문화를 지켜내고 있습니다. 사고방식을 어떻게 갖느냐에 달려 있습니다.(정리|김다슬기자)

07. 04. 26.

P.S. 아래는 '토플 대란'과 관련한 칼럼이다.

한국일보(07. 04. 24) [지평선] '토플 대란'이 우습다

언론과 인터넷에서 '토플 대란'이라고 난리다. 유례없이 신속히 10일만에 정부가 나서고 고교 교장들이 뭉쳤다. 범국가적으로 '토플 불매운동'의 조짐이 보이자 미국 본사(ETS) 수석부사장이 황망히 내한해 서비스 개선(?)을 약속했다.

이번 혼란의 본질은 잘 알다시피 우리의 잘못된 영어교육의 단면으로, 초중등 학생들의 과수요 때문이다. 유행 상품의 수요ㆍ공급 부작용일 뿐이다. 학생의 '결식 대란'이나 '알바 대란'에는 그렇게도 무심하던 대한민국이 '토플 대란'으로 국제적 망신을 샀으니, 웃기는 나라가 돼버렸다.

주연은 단연 학생과 학부모들이다. 연간 10만여 명의 응시자 중 30~40%가 미국대학 입학과 무관한 초중등생이며, 이들의 목적은 외고 입시 때문이라 한다. 서울 지역 7개 외고에서 영어특기 형태로 선발하는 인원은 200명 이내며, 토플은 대부분 외고에서 토익 텝스와 함께 선택 사항이다. 굳이 ETS 토플로 점수를 따겠다면 밤을 새우든, 광클을 하든 스스로 감수해야 할 부담이다. ETS가 '한국을 우습게 여겨'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기적인 핑계에 불과하다. 응시료만 매년 100억원 넘게 내는 한국은 ETS의 제일 소중한 고객이다.

정부도 웃기는 데 동참하고 있다. 1964년 토플시험이 시작된 후 미국 유학생이 10만 명에 이를 때까지 한번도 문제를 검토하지 않다가, 수요 과잉이 일자 '외고에서 토플을 없애라'고 수요 차단을 종용했다. 일본이 1963년부터(STEP TEST), 중국은 1987년부터(CET) 국가시험을 개발해 연간 수백만 명의 수요를 해결하고 있다. 이번 문제를 외고 합격자 몇 백 명으로 해결하려 드니 교육부의 현실감이 우습지 않을 수 없다. 덩달아 공정위가 ETS의 부당거래를 조사한다는 것도 그렇다. 굳이 말한다면 '부당 수요' 정도가 아니겠는가.

외고 교장들이 2009학년도부터 입시에서 토플을 뺄 테니 초중등생들은 앞으로 시험에 응하지 말라고 유인하는 것도 코미디다. 고교등급제 논쟁의 원인이 될 정도로 괜찮은 학교의 교장들이 이러한 결정을 했다니 우습지 않을 수 없다. 심하게 비꼬면 미국 ETS회사의 컴퓨터가 다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수년간 유지해온 자신의 입시 전형제도를 변경하겠다는 게 아닌가. 학생들이 다시 토익과 텝스 등으로 몰려 그 인터넷이 다운되고 그 고사장이 터져나가면 또 어찌할 것인가. 대증처방에만 급급하지 말고 차분히 대책을 궁리하자.(정병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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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7-04-26 02:14   좋아요 0 | URL
이번 대란으로 많은 대학생들의 인생계획(?)이 달라진건 확실합니다. 저는 일단 교환학생이 반년 미뤄졌고...제 친구는 교환학생 반년 미뤄지는게 싫다며 (그럼 귀국하고 바로 취업준비거든요 ㅠㅠ) 북경대 1년 어학연수 떠나기로 했지요 허허

근데 궁금한게. 어릴때 영어를 배우면 영어도 잘하면서 한국어도 잘하는게 가능한가요? 제 주변을 보면..어릴 때 외국다녀온 애들은 영어는 정말 잘하는데 한국말 감각이 떨어지고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지만 글쓰기를 하면 확연히 드러나요) 한국 글솜씨가 뛰어난 애들은 영어실력에 한계가 있던데..어릴때 뛰어난 교육을 받으면 둘 다 잘할 수 있을까요? 어떤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3개국어 4개국어 당연하게 하곤 하잖아요. 그런거랑 한개의 언어만 구사하는 거랑 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요.

이네파벨 2007-04-26 09:42   좋아요 0 | URL
영어공용화, 대학의 영어 강의 문제 등등...흥미롭고 어렵고곤혹스러운 주제....
계속 환기시켜 주셔서...좋습니다.
저도 무척 흥미 느끼는 주제거든요.
로쟈님 생각도 궁금하고...암튼 글이 마무리 되길 기다려 봅니다.

jouissance 2007-04-26 09:49   좋아요 0 | URL
복선생! 그래도 유보적이었는데 이제는 자꾸 저어하게 되는군요. 딱하다는 생각뿐입니다..

로쟈 2007-04-27 00:05   좋아요 0 | URL
LAYLA님/ 이중언어 전문가에게 문의하실 내용 같은데(^^;) 제 생각엔 개인차가 있는 것 같고요, 평범한 아이들이라면 너무 이른 외국어 학습은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네파벨님/ 제 생각은 별다른 게 없고 서두에 적은 대로입니다...
jouissance님/ 저는 공용어론자들의 주장에 일리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민족주의적' 포지션을 내세울 때는 어리둥절합니다. 사실 제일 좋은 건 그냥 '미국'으로 (단체로!) 이민가는 거 아닐까요? '국제어 시대'에 굳이 한국어 배우랴, 영어 배우랴, 이중으로 고생할 필요가 없이...

나비80 2007-04-27 02:25   좋아요 0 | URL
이 날치 '경향'에 볼거리가 많더군요. ^^

싸이런스 2007-04-27 07:12   좋아요 0 | URL
푸하하 또라이 복거일의 일방향 의사소통 방식도 골때렸는데, 정병진 논설위원님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단수 해학을 구사하시네요!

싸이런스 2007-04-27 07:14   좋아요 0 | URL
하하 로쟈님 댓글도 만만치 않군요! 그냥 단체로 가버렷! 덕분이 한참 웃었어요!

도톰 2007-04-27 08:35   좋아요 0 | URL
‘캐주얼한 관계’ 는 짧게 말해 '흔한 관계' 정도로 말할 수 있을까요?

심술 2007-04-27 21:59   좋아요 0 | URL
kaosmapak님, 저도 '캐주얼한 관계'를 우리말로 바꾸면 뭘까 생각해 봤는데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건 없다가 10초쯤 지나니까 '심각하지 않은 관계'가 떠오르더군요. 그런데 맘에 들지는 않네요. '흔한 관계'가 '심각하지 않은 관계'보다 나은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아주 맘에 쏙 들지는 않는군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번역하시련지요?

로쟈 2007-04-27 22:33   좋아요 0 | URL
'캐주얼한 복장'이 간편하고 편한 복장이란 뜻이니까, '편한 관계'나 '부담없는 관계' 정도로 옮겨질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도톰 2007-04-28 21:30   좋아요 0 | URL
casual 의 용례를 볼 때, 곧잘 부정적으로 쓰이곤 하는 뉘앙스를 감안하다 보니 쉽게 옮겨 말하기 힘들었나 봅니다. 마치 kitch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