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의 연재 때문에 수요일엔 한국일보를 사보게 된다. 하지만 오전 강의도 준비해야 하는 터여서 연재기사 '도시의 기억'은 가방에 넣어두기만 하고, 미처 챙겨읽지 못했다. 대신에 훑어본 기사들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건 '이과수 폭포 보며 혁신 배우겠다는 감사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설이었다. 공직자들의 '세미나 관광'(사실 국회나 지자체 의원들에겐 남 얘기가 아니겠다)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아직도 이런 일이!'라고 놀라기엔 좀 식상하고 멋쩍다. 다만 이 '평범한 사회악'이 이렇듯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거의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가, 란 생각도 든다(그렇다면 '모럴 해저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구아수(이과수)'를 검색해보니 시원한 폭포수 대신에 뜨는 게 몽땅 이 '세미나' 관련기사들이다. 미디어오늘의 '아침신문 솎아보기'에서 관련 대목만 옮겨놓는다.  

미디어오늘(07. 05. 16) 공기업 감사는 공공의 적?

16일자 아침신문의 사설들은 일제히 남미로 '외유 세미나'를 떠난 공공기관·공기업 감사들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힐난했다. <공기업 감사들, 이과수 폭포 옆에서 '혁신 세미나'>(조선일보), <이구아수폭포 '혁신 세미나'와 미주리 골프 연수>(동아일보), <단체 외유에 나선 공공기관 감사들>(경향신문), <이과수 폭포로 '혁신' 세미나 간 혁신정부>(중앙일보), <이과수 폭포 보며 혁신 배우겠다는 감사들>(한국일보), <이구아수 폭포에서 공기업 혁신 논하나>(서울신문), <공기업 감사 '외유 세미나' 이래도 되나>(세계일보) 등 사설 제목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공기업 감사들이 '혁신을 배우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남미의 유명한 관광지인 '이과수 폭포'에 굳이 간 걸로 봐서 놀러간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A2면 머리기사 <외유논란 공기업 감사들 중도 귀국할 듯>에서 "국민연금관리공단, 한국석유공사, 예금보험공사 등 21곳 공공기관, 공기업 감사들은 '공공기관 혁신포럼'을 연다는 명분으로 남미의 유명 관광지인 칠레 산티아고, 브라질 이과수 폭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을 들르는 10박11일 출장을 떠나 외유 논란을 빚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특히 이번 여행에 참여한 감사들 상당수가 청와대 비서진, 과거 여당인 열린우리당 당직자, 노 대통령 후보 당시의 특보 출신들이라 '낙하산 인사'들이 해외관광을 떠났다는 비판도 제기됐다"고 보도했다. "1인당 800만원 정도 드는 여행경비는 이들이 속한 공기업, 공공기관이 전액 댔다"고 덧붙였다. 한편 출장을 준비한 여행사 관계자를 인용해 "이들은 향후 일정을 중단하고 중도 귀국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고도 전했다.

▲ 중앙일보 5월16일자 6면.
중앙일보는 어제에 이어 이틀째 1면에 공기업·공공기관 감사의 '이과수 폭포 세미나' 관련 보도를 내보냈다. 정부 차원에서 기획예산처가 진상조사에 착수했다는 소식이다. 예산처는 공기업·공공기관에 대한 1차 감독부서다. "감사들의 남미 출장 보도가 나가면서 거센 비판 여론이 일고 있다"는 지적은 조선과 마찬가지다. 방만 운영, 낙하산 인사 등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본지 확인 결과 감사 21명은 예정대로 출장 일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부분은 조선과 정반대 얘기다. 왜 사실관계가 다른지 알 수 없다.

조선 "중도 귀국" vs 중앙 "예정대로 일정 진행"

중앙은 6면에서도 <"혁신포럼 빙자한 관광 문책하라">는 제목으로 정치권의 비판을 기사화했다. 여야 할 것 없이 진상 파악과 관련자들의 처벌을 요구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기획예산처가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다"며 "파악해서 문제점이 있다면 (기획예산처 차원에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중앙은 △공공기관 감사 21인의 출장 일정 △공기업 낙하산 인사 관련 노 대통령, 청와대 인사수석 발언 등도 관련 그래픽으로 만들어 기사와 함께 배치했다.

중앙은 같은 면에서 <신이 내린 직장, 신이 내린 자리>라는 제목의 '취재일기'를 통해서도 외국으로 세미나를 하러 간 공기업 감사들을 비판했다. 이 기사를 쓴 윤창희 기자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뭔가 근사한 곳에 가야 산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모양일까"라고 비꼬는 한편 "그들이 귀국 보따리에 획기적인 감사혁신 방안을 담아 온다면 사실 아무 문제가 될 게 없다. 그러나 우리보다 공기업 경영이 별로 나아보이지 않는 남미에서 기막힌 공기업 혁신방안을 배워올 수 있을까"라고 기막혀 했다. 윤 기자는 이어 "공기업 27개 중 80%가 넘는 22개사 사장이 공무원과 정치인 출신이다. 공기업 감사들이 줄지어 남미로 단체 출장을 떠난 것은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라며 공기업 감사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원인으로 짚었다.

한겨레는 6면에서 <공기업 감사 '집단 외유성 출장'>이라는 제목으로 해당 기사를 실었다. "공기업과 공공기관 감사 20여명이 외국 공기업의 감사 업무를 벤치마킹하고 세미나를 연다며 남미로 출장을 떠나자 '낭비성 외유'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는 말로 시작되는 기사는 "무엇보다 이들이 출장에 나선 남미 나라의 공공기관 경영방식에서 우리가 배울 게 많지 않고, 관광지 등에서 적잖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기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다)"고 사안을 정리했다.

 한편 "이들은 모두 '공공기관 감사포럼' 회원들이며,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캠프에서 활약했거나 열린우리당에서 일한 사람들이 많다"고 이 기사는 지적하며 "출장 일정 등을 보면 '감사 업무 혁신 방안 마련'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고도 보도했다. 공공기관 감사포럼 의장인 곽진업 한국전력 감사의 "남미의 공공기관을 방문해 한국과의 차이점을 확인하는 것도 공부에 해당하는 만큼 외유성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지만 사안에 대한 언론들의 판단이 일관적인 만큼 다소 궁색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 경향신문 5월16일자 1면.
경향신문은 이 사안을 1면에서 <1인 800만원짜리 남미 '관광 세미나' 물의/"신도 탐내는 공공기관 감사">라는 제목으로 다뤘다. 경향은 "공공기관들이 '신이 내린 직장'이란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남미로 외유성 세미나를 떠난 것도 이런 역학적 관계 때문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라고 기사는 풀이했다. '남미로 출장간 공공기관 감사 경력 및 연봉'과 '정치권·관료 출신 공공기관 감사'를 표로 만들어 정리하기도 했다.(권경선 기자)

07. 05. 16.

P.S. '구조적인 문제'란 것은 어제 읽은 김훈과 홍세화의 대담에서 나온 김훈의 발언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아마 우리가 밥을 먹는 과정에서 벌어진 구조적인 악들에 도전했다가 참패하신 것 같아요. 그분이 참패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을 개조하고 거기에 도전하는 일은 차기 정권의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계승해 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박정희, 이승만 이후로 깔려버린 구조화된 악과 억압이라는 것은 정말로 만만치가 않은 것이죠."

얄궂게도 이번 외유성 세미나에 나선 이들은 모두 청와대 비서진을 비롯한 '노무현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적'은, '구조적인 악'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닌 것(그러니까 그는 도전하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것이 아닐까). 이 '평범한 악'이 '혁신'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게 또한 아이러니컬하다. 오늘이 5.16 쿠데타가 일어났던 날이란 것까지 고려하면 비장하게 코믹하고, 이과수 폭포가 나오는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의 첫장면을 떠올리면 애잔하기까지 하다(감사들끼리의 '해피 투게더' 아닌가?). 신이여, 제발 우리를 구원하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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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민주항쟁20주년사업추진위원회'에서 진행중인 민주화20년 ‘상상변주곡’ 대토론회 중 네번째 꼭지로 임상수 영화감독의 발제 ‘6월항쟁 이후 한국사회 내면풍경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지난주인가 두번째 꼭지인 진중권의 '신체의 지질학'을 옮겨놓은 바 있다). 출처는 컬처뉴스이다.   

6월항쟁 20주년 기념 대토론회 '상상변주곡' 네번째 장이 5월 14일 열렸다.

컬처뉴스(07. 05. 15) "고백 통한 자기복원이 필요하다"

1986년 군대를 갔다 온 후 복한한 한 대학생은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이한열의 시신을 지키는 사수조에 참여하라는 전화를 무시했다. 또 신촌에서 시청까지 인파로 뒤덮인 이한열의 장례식 날에도 개미 한 마리 없는 도서관에 혼자 있었다. 하지만 매일 낮 12시에 울리는 택시들의 경적소리와 그에 호응하는 넥타이족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울분과 떨림을 느꼈다. 그 복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영화감독이 된다. <눈물>, <바람난 가족>, <오래된 정원> 등 한국 사회의 문화적 격변과 내면 풍경의 변화를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모험적인 카메라 워크로 잡아낸 임상수 감독이다. ‘상상변주곡’ 네 번째 시간(14일)의 발제를 맡은 임 감독은 ‘고백을 통한 자기 복원 없이 그저 달려 나가가만 하는 사회’라는 주제로 “과연 민주화 진영이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임 감독은 “<그때 그사람들>은 1987년 6월민주항쟁이 없었더라면 찍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물론 박정희 시대였던 그 18년을 다 담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지만 그 보다도 먼저 명령과 복종만 있었던, 해서 명령에 대해 회의하거나 사고하는 사람은 존재가 불가능했던 ‘그때 그 사람들’의 인간관계에 주목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 감독은 우리가, 한국 사회가, 민주화 운동세력이 극복하지 못한 것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했는데 바로 ‘골목대장 문화’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 그것이다. 먼저 ‘골목대장 문화’에 대해 임 감독은 “유치한 위계질서가 지금 얼마나 극복됐을까”라고 반문하면서 “한화 김승현 회장 사건만 보더라도 촌스럽기 그지없는 위계질서를 여전히 목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치졸하고 쓰레기 같은 짓을 하면서도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살고 있다는, 살아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하늘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거짓말이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뻔뻔스러움이 전염되어 내면화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수구와 보수세력을 비판하기에 앞서 그렇게 치열하게 민주항쟁을 주도했던 민주진영 세력들이 도대체 이루어 낸 것이 시스템적인 민주주의 외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비판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누구도 세련된 민주주의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임 감독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정의주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굴절된 풍토를 청산하고자 했지만 사실 이러한 것은 5년동안 할 수 있는 일이, 정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바로 그 때의 6월 거리에 나왔던 사람들이 자기 고백을 통해 과거를 복원하고 그 복원을 통해 그 피의 값은 충분히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이를 이루지 못한다면 소위 6월항쟁이란 허위의식에 가득 찬 난리굿이라 할 2002년 월드컵 열기와 다를 바 없다”고 전했다.

 

 

 

 

 

 

 

 

  

이날 토론자로는 강유정 영화평론가와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가 참여했다. 먼저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모든 사람들은 우연하게 만나고 우연하게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그러한 우연한 시기에 박종철이 죽었고, 이한열이 죽었고, 그들의 죽음을 우연히 같은 시기에 목격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바로 6월항쟁이 아닐까”라고 자문했다. 이어 그는 “막스(*맑스)가 사람을 통해 ‘학’을 구성했듯 이제야 우리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던 그들을 통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기”이며 “좀 더 지독한 타자의 윤리가 임상수 감독의 영화 속에 등장하기를 기대하겠다”고 전했다. 더불어 지독하게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자였던 임상수 감독의 위치와 영화 속에서 고백이라는 제의를 재현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임상수 감독은 “80년대 나는 물론 현장에 있었고 모든 것을 관찰하려는 노력을 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바깥에 있었는가”라고 반문하며 “<오래된 정원>을 보고 1980년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차 있었다, 이야기한 한 평론가의 평이 나는 가장 마음에 든다”고 전했다. 또한 “과거의 자기복원이 어려운 이유는 앞으로 빠르게 나가야 하는 현재의 상황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인데 나는 <바람난 가족>에서 정말 나의 내밀한 고백을 시도했고, 그렇기에 나는 거리낄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봉석 평론가는 “창작자들이 그 때의 이야기를, 6월민주항쟁의 이야기를 쓰지 않는 것이 불만이다”라며, “임상수 감독이 <오래된 정원>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타자’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민주화 운동세력이 철저한 자기고백을 하지 않았다는 임상수 감독의 발언에 동의하며 “386세대들은 분명 특수한 세대이고 그들 또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결국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정권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구권 또한 무너지면서 이상에 대한 환멸을 느꼈을 것”이라며, “그러한 열등감에 무용담 이상의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강유정 평론가는 “386세대라는 호명 자체가 386세대의 호명에 대한 욕망”이라면서 “자기윤리를 세속적인 기준으로 맞추는 세대론 자체는 어쩜 유효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태윤미 기자) 

07. 05. 15.

P.S. 마침 6월에는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임상수의 <오래된 정원>에 대해서 몇 마디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임감독의 발제문은 참고자료가 될 만하겠다(감독과 변성찬 평론가의 대담을 링크해놓으려고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내가 할 얘기는 6월로 미뤄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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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5-16 03:53   좋아요 0 | URL
이 글과는 전혀 관계없는 횡설수설이지만 악셀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빌리에 드 릴라당(Villiers de l'Isle-Adam)이라는 19세기 프랑스 작가의 희곡이래요. 원작은 우리나라에 아직 옮겨 나오지 않았고 에드먼드 윌슨이란 평론가가 쓴 '악셀의 성'이란 책을 통해 이 작품이 있다는 게 우리나라에 알려졌다내요.

로쟈 2007-05-16 21:44   좋아요 0 | URL
저도 생각난 건 <악셀의 성>밖에 없었는데(번역돼 있는 비평집이고 저도 갖고 있습니다), 번역된 작품의 주인공을 찾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네요...
 

미디어오늘에 연재되고 있는 '강유원의 Book소리'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옮겨놓는다.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1>(리젬, 2007)이 부분 번역되었고, 믿을 만한 번역서인가 궁금했었는데 우연히 이 번역서의 고유명사 표기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관행'과 '상식'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학문적 소통을 위해서는 존중될 필요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그렇다고 '오디세이아'를 '오뒷세이아'로만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에까지 내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오늘(07. 05. 11)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들으면 서양 학문에 끼친 플라톤의 영향이 엄청나리라 짐작할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영향이 아리스토텔레스만은 못할 것이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다고는 하나 아테네는 작은 폴리스였고, 플라톤은 그곳의 철학자였다. 반면,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기는 했어도 사실상 제국의 철학자였던 만큼 학문의 범위도 플라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은 서양의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학문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는 단테의 서사시 <신곡>이다.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로 넘어오는 시기에 쓰여진 이 서사시에는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요소들이 녹아들어 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서사시 전통,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의 전통이 들어가 있는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중세 신학의 결정판을 만들어낸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신곡>을 읽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하며, 이쯤 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전공자의 기본 지식이 아니라 서양학문을 하는 모든 이의 기본이라는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2007년 현재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신곡> 번역본은 여러 판이 있다. 대구가톨릭대의 김운찬 교수는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한형곤 번역의 <신곡>이 권장할 만하지만 더욱 충실한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사실 <신곡> 번역은 역자인 한형곤 교수도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본문은 물론이고 “주석이 본문의 70% 이상”이나 되는 지난한 작업이다. 그런데 그 주석 중에 너무나 당연한 것에 대한 실수가 있으면 다른 주석까지도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신곡> 지옥편 제11곡에 이런 구절이 있다. “또한 네가 물리학을 잘 관찰한다면.”이 구절에는 주석이 달려있는데, 그것은 이러하다.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Physica> 제2권.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

최근 불어판을 중역해서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도서출판 리젬) 번역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그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몇몇의 명칭이 다음과 같이 쓰였다. ‘대도덕론’이 ‘위대한 도덕론’으로, ‘자연학’이 ‘물리학’으로, ‘소피스트적 논박’이 ‘궤변적 반론’으로, ‘분석론 전서’가 ‘제1분석법’으로, ‘분석론 후서’가 ‘제2분석법’으로 표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전문적으로 읽을 필요도 없이, 철학관련 기본 도서를 읽어보기만 해도 ‘물리학’이 아니라 ‘자연학’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철학의 상식이 아니라 서양학문의 상식인 것이다.



강대진은 최근 저작 <고전은 서사시다>(안티쿠스)에서 헤시오도스의 ‘일들과 날들’에 관한 황당한 번역어들을 발견한 사례를 적어두고 있기도 하다. “ ‘일들과 날들’이라는 제목은… 희랍어 제목 ‘Erga kai Hemerai’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우리식 제목을 잡자면 ‘농사법과 택일법’ 정도라고나 할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쓰여온 제목은 ‘노동과 나날’인데… 좀더 놀라운 제목들로는 ‘사업과 시대’, ‘작품과 생애’ 따위가 발견된다.”



이런 상황을 놓고 인문학의 영역에서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을 대상으로 서양학의 기본 저작들, 이를테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저작 명칭에 관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라도 실시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학자여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니 참여할 수 없다고 버틴다면, 출판사 편집자들에게라도 그러한 교육을 좀 할 수는 없을까. ‘한국출판인회의’나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한번쯤 이런 기회를 마련했으면 싶다. 독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물리학’이 있었다고 우길 수는 없지 않은가.

07. 05. 13.

P.S. 역자 나름의 변이 없지는 않으나 '피지카(Physica)'를 '물리학'이라고 옮기는 수준이면 독자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 아닌가 싶다. 고유명사 표기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에 두어 차례 페이퍼를 띄운 적이 있다. 최근에 읽은 못마땅한 책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을 내어 다시 다룰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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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13 08:35   좋아요 0 | URL
안내 감사합니다. 살 계획은 없었으니 다행이지만, 사게 되더라도 피해야겠군요. 기본적인 학문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지요. 번역자가 누구인가 봤더니 전공자는 아니군요. 이런 전문서 같은 경우에는 이쪽 관련 서적들을 두루 접한 전문가들이 번역하는게 훨씬 낫지 싶습니다. 한국어로 얼마나 자연스럽게 옮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기존에 쌓아왔던 것들을 염두에 두고서 번역을 하느냐죠. 기본적 명칭조차 어긋나버린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로쟈 2007-05-13 10:31   좋아요 0 | URL
국내에 나온 관련서들을 한권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번역은 많은 부분 '한국어'의 문제라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영어/불어/희랍어 등에 능통한 이들은 적지 않음에도 오역은 줄지 않는 것으로 보아...

2007-05-14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5-14 23:11   좋아요 0 | URL
**님/ 기본적으론 한국에 능통해야 하겠죠. '능통'이란 게 물론 어학적인 차원에 국한되는 건 아니구요, 한국어의 번역 용례와 의미맥락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물론 많은 부분 노력으로 카바할 수 있습니다. 자문을 구할 수도 있구요). 한국어 자체의 핸디캡은 늘어놓아봐야 비생산적일 거 같구요. 물론 말씀대로 두루 능통하신 분이 번역하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능력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체득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번역자이지만 번역을 하지 않는 사람'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번역도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실천지'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2007-05-14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5-14 23:36   좋아요 0 | URL
'한국어 자체의 문제점'이라고 하는 건 어폐가 좀 있겠구요, 개념어들의 발달이 상대적으로 미흡하기 때문에 갖는 난점 정도라고 봐야겠지요. 한데, 실제 번역에서 애를 먹이는 건 반대로 한국어가 너무 조밀해서 발생합니다. 가령, 'truth'란 단어가 나오면, 문맥에 따라 '진실'이나 '진리'로 구별해주어야 하는데, 이런 게 번거로우면서도 실상은 더 어려운 일이죠. 번역학쪽 책들까지 챙기는 건 아니어서 '관련도서'까지는 모르겠습니다.^^;

2007-05-14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2월인가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 출간의 계기로 불거진 논란이 최근 공식적인 공개토론회로 귀결된 모양이다. 한겨레에 관련기사들이 올라와 있는데(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08785.html), 도올의 발제문만을 옮겨놓는다. 한동안 관련 기사들을 옮겨놓기도 했었기에 AS차원이다.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한겨레(07. 05. 12) 도올 발제문 “종교는 더이상 ‘이해없는 신앙’강요 말라”

‘성서’를 놓고 도올 김용옥 교수와 신학자들 사이에 공개 토론회가 11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신대 백주년기념관 중강당 3시간여에 걸쳐 열렸다. 조직신학회장 이정배 감신대 교수가 사회를 맡고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와 김광식 전 연세대 교수 등 두 원로와 함께 ‘역사적 예수’ 전문 번역가인 김준우 감신대 교수, 구약성서학자인 김은규 성공회대 교수 등 수준급 신학자들이 토론자로 나섰다. 다음은 토론회에 앞서 미리 나눠준 도올의 발제문 전문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독교 이해방식

1.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며 민주시민사회의 모든 원칙을 준수한다. 나는 민주사회의 한 시민이며 개인이다. 내가 말하는 기독교는 매우 단순한 이런 전제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기독교의 이해방식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이지만 사회적 가치도 거부 안해

2. 그렇다고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어떤 국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종교와 국가의 어떠한 유기적 관계도 거부한다. 종교는 오히려 그러한 국가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개체의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며, 제도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사회적 가치, 즉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한 시민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 대상일뿐

3.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는 매우 단순한 나의 실존적 사실, 즉 내가 민주시민사회의 한 시민이라는 원자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어떤 종족이나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속적인 제도가 될 수가 없으며 나 개인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의 대상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한 종교의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대한민국사람이 구원을 얻을 뿐이다. 그 사람은 개인이며 시민이다. 시민사회는 인간 개인(individual)의 존엄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다. 개인이 신이라는 존재자에게 복속되는 제도적?법적 권위는 전무하다.

기도는 집단적인 게 아니라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

4. 종교의 초기 제식행위는 대부분이 집단적인 것이었다. 부족집단의 춤(tribal dance) 같은 것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였다. 아프리카의 민속춤이나 우리나라의 영고(迎鼓)·무천(舞天)이 모두 그런 류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행위는 기도이다. 기도는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나의 내면 속에서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이다. 예수도 기도를 가르쳤다. 기독교는 이미 출발부터 개인적인 것이었다.

기독교가 구약적 율법주의 따른다면 유대교의 아류일뿐

5. 기독교는 민족종교가 아니다. 유대민족의 모든 제식(할례, 절기 준수 등)이나 혈통주의적 관습의 강요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으며, 이방선교를 통해 초대교회를 구축했다. 그것은 “예수”라는 신념을 선택한 개인들의 공동체운동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출발부터 유대민족의 율법주의를 거부했다. 어떠한 종교도 율법주의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종교가 될 수 없다. 공자도 기존의 의례(儀禮)의 권위를 거부한 사람이었고, 불타도 베다의 권위를 거부했다. 기독교가 이제 와서 구약적 율법주의를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아류일 뿐, 기독교가 아니다.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한국조직신학회 이정배 교수.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교회는 교리가 아닌 사랑 믿음 소망 생존의 공동체운동

6. 나는 교회를 공동체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체운동의 기본이념은 교리가 아니요, 사랑, 믿음, 소망, 생존과 같은 아주 보편적 정서(emotion)이다. 교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배타성(exclusiveness)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교리 이외의 어떠한 종교적 신념도 다 배제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리라는 것은 대부분 후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성서적 근거가 박약하다. 이것이 조직신학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독교의 배타성도 유대인의 다이애스포라와 유사한 피박해집단의 역사적 특수상황에서 비롯된 아폴로제틱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곧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다.

유교·불교·토속 무교 등 종교신념체계와 공존해야

7.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오늘 여기에서의 나의 실존을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는 기독교라는 교리집단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유교, 불교, 천도교, 원불교, 토속 서낭당 무교, 이슬람, 여타 다양한 종교신념체계와의 공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들 모두가 인간 내면의 고독(solitude)을 해결해가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가 이러한 공존을 배제하는 독존만을 고집한다면 나는 그러한 기독교에는 일순간도 나의 에너지를 할애할 수 없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 일 수 있다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8. 종교는 반드시 좋은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발상이나 강박관념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일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야만성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다. 종교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회일 수가 있다. 단지 우리가 이러한 사회를 꿈꿀 수 없는 이유는 종교를 통하여 형성되어온 인류문명사의 기나긴 관성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는 인간세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 그러한 거대한 추세 속에서 인간세는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고려사회를 장악하고 유교가 조선왕조를 장악하고 기독교가 20세기 우리민족의 식민지역사를 장악한 그러한 강력한 장악성을 21세기부터는 기대할 길이 없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 정본 존재하지 않아

9.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서서히 형성되어온 것이다. 이 말은 곧 어느 한 시점에서의 기독교의 모습이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형성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1세기의 기독교, 4세기의 기독교, 16세기의 기독교, 21세기의 기독교가 모두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기독교일 뿐이다.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의 정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세기말에나 모습을 드러낸 27서체제의 성서나 20세기 한글판개역성경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신약성서의 다른 판본일 뿐이다. 신학도들이 기준으로 삼는 희랍어성서도 19세기말에나 그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희랍어성서 자체가 2천 년 동안 진화해온 것이다. 현재의 27서체제의 성경이 기독교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도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가톨릭은 아직도 성서에 근거가 없는 많은 후대의 추가전승을 교리로 신봉하고 있다.

종교적 합리화의 재소통 거부하면 사기꾼의 횡포

10. 나는 기독교의 “이해”(Understanding)를 위하여 상기의 책 2권을 썼다.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믿음”은 간편하고 또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위태롭다. 그러한 믿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더 이상 핍박받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기독교를 발생시킨 그러한 절박한 상황의 강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제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반복적 제식은 특별한 감정을 수반하며, 그 감정은 신앙을 유발한다. 그리고 제식은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신화는 합리화된다. 이 합리화단계에서 우리가 말하는 조직적 종교가 발생한다. 그런데 모든 종교적 합리화(Rationalization)는 인간의 체험에 관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그 정보에 대하여 독특한 권위를 부여한다. 나는 이러한 합리화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자유로운 지식의 장 속에서 무전제적으로 다시 소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천박한 독단일 뿐이다. 현대시민사회에서 독단을 중세세기방식의 도그마틱스로서 유지하려는 것은 사기꾼들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 자부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11. 나의 “이해”의 노력은 한국의 기독교를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21세기의 종교가 “이해없는 신앙”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양아치적 권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시민사회의 논리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될 뿐이다. 나의 “이해”가 많이 대중에게 읽힐수록 21세기의 한국기독교는 희망이 있다. 성서는 이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이해 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만이 21세기를 버텨낼 수 있다.

교회가 신학자의 신념과 언어체계를 콘트롤하면 안돼

12. 나는 기독교에 기웃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기독교의 핵심 인사이더로 살아왔으며 기독교의 가치를 체화한 패밀리 전통 속에서 성장해왔다. 나는 나의 진리탐구가 이 사회의 많은 건강한 기독교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신학계가 자유로운 담론의 장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는 신학자들의 신념이나 언어체계를 콘트롤해서는 안된다.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 관심이 신학의 자유로운 개화(開花)를 질식시켜서는 아니된다. 모든 교회는 훌륭한 신학자를 양성하는 데 교육장학금으로서 최소한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 존립의 이유며 양식(良識)이며 의무다. 그리고 교육헌금에 대하여 일체 이념적 클레임을 해서는 아니된다. 한국교계의 생명력은 오직 자격있는 신학자와 수준높은 목회자의 양성에 있다고 나 도올은 굳게 믿는다.

도올 김용옥(2007년 5월 11일 밤 駱閒齋에서 탈고)

07. 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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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s3378 2007-05-28 12:01   좋아요 0 | URL
좋은 자료 빌려가겠습니다.
 

다 아는 바이지만, 지난 6일 프랑스 대선에서 집권 우파의 사르코지 후보가 당선됐다. 반대로 사회당 후보이자 첫여성 대통령을 꿈꾸었던 루아얄 후보가 패배했다. 좌파 이론의 지주 역할을 해온 프랑스인지라 '현지'의 정치 지형과 선거 뒷얘기도 흥미를 끄는데, 이와 관련하여 레디앙에서 '프랑스통'이라고 할 우석훈 교수의 '관전평'을 옮겨놓는다(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6250).

레디앙(07. 05. 08) 우파의 승리가 아니라 '복수'

1.
프랑스 대선에서 사회당이 졌다. 정확히 말하면 루아얄 여사가 진 것인데, 어떻게 포장하든 좌파가 우파한테 졌다는 객관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회당을 지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래된 노조 간부출신이었던 뻬레고부아 총리가 권총자살한 이후로 사회당의 미셀 로까르니 하는 정치 엘리트들의 말장난이 싫기도 했지만, 동구의 몰락 이후로 몰락한 공산당에 간호부 출신의 노베르 위가 "코뮤날리즘(communalism. 공동체주의. 파리 코뮌을 상상해보자-편집자)은 인류에게 늘 필요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은 이후로 대체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막상 TV에서 토론하는 거 보면 공산당이든 아니면 녹색당이든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2.
루아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나는 루아얄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책이라는 눈으로만 보면 루아얄이 과연 좌파 후보인지 오락가락하기도 하는데,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고도 놀란다고, 선거 내내 나는 노무현을 연상했다. 사실 남자와 여자라는 점과 전문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는 점들 - 이런게 중요한가? - 을 빼고 나면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그들은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측으로 급회전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래도 정치인으로서의 루아얄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동거 가정 1세대로서 그녀의 사회적 진출 등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점이 많다.



그녀는 1차 결선투표도 사실 간당간당했고, 막판에 차이가 더 벌어졌지만, 대체적으로 출발시점에 비하면 선방한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선방이 사회당의 과실은 아니다. 프랑스 신문들은, 나머지 좌파들이 표를 몰아줬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진 사회당이 정치적 타격이 크게 받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당장 총선이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3.
사르코지의 승리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많다. 우파라고 다 같은 우파는 아닌데, 지스카르 데스탱 이후로 거의 30년만의 우파의 승리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기가 조금 복잡하다. 이 얘기는 4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드골이 집권하면서 자신은 좌파와 우파를 초월한다고 말을 했는데, 이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독특한 의미가 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드골은 제 3세계 동맹국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하면서 서방세계 내에서 독립노선을 걸었고, 이런 일련의 입장을 드골주의라고 한다. 공화국연합(RPR)의 지금 시락 대통령이 이런 드골주의를 계승한다. 시락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공한 드골주의자이다.

사르코지는 대중운동연합(UMP)라는 정당을 이끈다. 이게 진짜 프랑스의 우파 정당이다. 그냥 생각하면 시락이 자신의 후계자로 사르코지를 지명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둘 사이는 정적 관계이다. 노선도 다르고, 가는 길도 다르다. 우파도 연정하지 않으면 집권할 수 없는 이런 구도에서 시락이 밀렸고, 사르코지는 그야말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자기 힘으로 대선 후보에 오른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고, <르몽드>지의 편집진은 이것을 "우파의 복수"라고 부른다. 단순히 우파들이 좌파를 이긴 그런 의미만이 아니라 드골주의자들에게서 30년만에 권력을 찾아왔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첫 번째 한 얘기 중의 하나가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라는 것이다. 미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드골주의와의 결별이 사르코지의 당선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이다.

4.
미테랑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매력있는 사람이다. 가장 정확한 불어를 구사하고, 몇 분에 한 번 정도만 문법 실수가 나온다고 문법학자들의 연구 대상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로 프랑스를 상징했던 정치인 중의 한 명이다. 그 이후로 좌파가 대선에서 이긴 적은 없다. 프랑스에서는 언제나 좌파가 절대수치에서 부족하다. 우파와 시락주의자가 분열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틈을 타고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로 절대로 우파는 분열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좌파 대통령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국회의원 선거는 조금 다르다. 지방정치가 우리나라처럼 지역색으로 호화찬란하게 도배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연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당이 카드를 내어주면서 다른 정당과 손을 잡을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식 여당에 해당하는 총리 자리는 대통령 집권에 실패하더라도 어떻게 해볼 여지가 좀 열려 있다. 내 관찰에 의하면 프랑스는 대통령직보다도 총리가 누구인가가 진짜로 국정운영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5.
사르코지는 우파이면서 대표적인 강성이다. 이로 인해서 가장 타격을 받게 될 정치집단은 오히려 극우파들일 수 있다. 영역과 정책이 겹치기 때문이다. '68년의 종언'이라고 호기있게 사르코지가 치고 나가기는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총선까지 지켜봐야 알 수 있다. 하여간 현재로서는 독기가 단단히 올랐다. 전면적인 신자유주의 도입은 물론이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관리 강화 등 대체적으로 극우파 정책들이 도입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미테랑은 물론이고 시락도 극우파는 아주 싫어했다. 미테랑 시절에 우파들이 총리를 먹고 파스쿠아라는 아주 강성 정치인이 내무부장관을 했던 적이 있었다. 무섭던 시절이었는데, 이젠 대통령이 그렇게 하겠다니 사방에서 곡소리가 날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마냥 한 방향으로 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러가지 견제장치들이 작동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프랑스는 그 처절한 '민중'이라는 실체가 눈을 뜨고 버젓이 살아있다. 50%의 투표율을 기록할 수 없어서 투표에서는 지지만, 그래도 몸으로 정책을 막는 일 정도는 아직 할 정도의 정신과 기백은 남아있는 듯하다.

6.
프랑스 대선을 보다가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면 심란하다. 프랑스에서는 우파가 대통령이 되고 좌파가 졌다고 대서특필하던 언론들이 갑자기 우리나라 얘기만 하면 진보와 보수라는 또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이거 우습다. 프랑스식으로 살펴보면, 한나라당의 일부는 극우파에 가깝고, 그 안에 시락주의자들이나 일부 분파들이 열린우리당에 가깝다. 순전히 우파들끼리 나와서 서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이 우리나라 모습이라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이미 권력에 깊이 물든 프랑스 사회당이 좌파 정당으로서는 민주노동당보다 더 선명할 정도이다. 좌우 대립의 구도로 간다면 민주노동당의 왼쪽에 또 다른 정당들이 '나래비'를 서 있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좀 다르다. 내 생각으로는 진보/보수라는 말장난하다가 이렇게 된 것 같기는 하다. 지금이라도 좌파들이 자신을 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이게 무슨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때로 우습고 때로 서글프다.

7.
패배를 자꾸 경험하거나 자꾸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먼 나라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당장 사르코지를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비교하거나 혹은 사르코지옹이라고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걸면서 깃발 들고 나선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보면 가슴이 안쓰럽다. 먼 나라의 일이 아니라 당장 우리나라의 민주노동당을 보면 한숨이 푹푹 난다. 솔직히 민주노동당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당장 나부터 그렇다. 그래도 나름대로 선방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셈인데, 그야말로 마음이 안 좋기는 정말 안 좋다.

8.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들은 너무 모범생 같아 보인다. 한 쪽에서는 사생결단을 내리고, 수틀리면 "당 뽀갠다"고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경선'을 다짐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범생 같아 보인다. 그렇다고 나라고 무슨 뾰족한 답이 있을 리 없으니 지켜보는 심정이 답답할 따름이다. 다당제가 제대로 정착해서 연정과 같은 고급스러운 메카니즘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좌파라면 경기들어서 손을 파르라니 떨 사람들이 당장 내 어머니, 내 아버지인데, 좌파의 깃발을 높이 들라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또 하고 있는 것도 우습다.

대선 시뮬레이션에서 한 번도 사르코지를 이기지 못했던 루아얄을 지켜보던 많은 프랑스 좌파들이 심정이 이와 비슷했을 것 같다. "뭐 좀 쌈박한 거 없어?" 그런데 그게 정책의 눈으로 보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정책에는 기술적인 검토와 대중적 지지라는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필요한데, 이게 거의 마케팅에 버금가는 예술의 영역이라서 골방에서 죽어라고 계산해봐야 '변방의 북소리'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9.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많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면 좋겠다. 민주노동당이 대한민국 대선에서 승리한다... 국제적인 세계화의 흐름이 멈칫하고, 전세계적인 지형도가 바뀔 일이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다다익선 FTA'를 멈춰 세우고, 민중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일이 더 있겠는가?

꿈도 머리가 아파서 잘 못꿔진다. 우리나라의 좌파가 지금 그렇다. 현재로서는 민주노동당 외에는 대안이 없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당장 내 주위의 동료들만 보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뭔가 엑기스 하나가 더 필요한 것 같은데, 대선주자들이 모범생 같이 움직여서는 그런 엑기스가 생겨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프랑스는 프랑스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다. 현실로 돌아오면 더 머리가 아프다.

"좌파가 돼도 나라 안 망한다"고 지금부터 편지를 쓰라고 하면, 나도 한 50통 정도는 못 쓰는 글씨지만 쓸 생각이 있다. 뭐든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래도 민주노동당이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누가 뭘 좀 제시해주면 좋겠다. 연말에 소주 마시면서 "우리나라는 안 된다"는 소리나 하고 있기 보다는 팔 아픈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 있다.

하여간 루아얄에게는 사람들이 바라던 "뭔가"가 마지막 TV 토론 때까지도 결국 안 나왔다.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들에게는 "뭐"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뭣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래서 말도 안되는 대 역전드라마가 종종 나오는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우석훈 / 성공회대 외래교수)

07. 05. 09.

P.S. 사르코지의 프랑스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의 기사 '2007 프랑스, 나는 소름이 돋았다'(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9012&ar_seq=7)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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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lousies 2007-05-09 04:42   좋아요 0 | URL
프랑스 대선과 관련되어서 이 기사와는 조금 관점이 다른 오마이뉴스 박영신 기자의 글(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09012&ar_seq=7)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로쟈 2007-05-09 07:52   좋아요 0 | URL
선거결과를 생각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기사이군요. 링크해놓았습니다...

전호인 2007-05-09 09:44   좋아요 0 | URL
조중동에서 우파쪽으로 몰아가는 느낌도 듭니다.

로쟈 2007-05-09 22:23   좋아요 0 | URL
우파신문이 우파를 지지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