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책읽기'가 무료해서 잠시 아침신문들을 훑어보니 외신면 톱기사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발언에 관한 것이다. 국제회의석상에서 작심하고 미국에 한방 먹였다는 것이고, 다시금 신냉전체제로 들어서는 것 아니냐는 성급한 전망도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테러시대에서 신냉전시대로?). 미국 단일패권주의에 그간에 환멸스러웠다면 미-러 양극체제는 그보다 나을까. 이런 거 분석/전망해주는 책도 조만간 나왔으면 싶다. 기사는 참고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7. 02. 12) 푸틴 ‘미 일극체제 더는 못 참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0일 작심한듯, 탈냉전 이후 ‘미국의 일극적 세계질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신냉전 선언’을 방불케 하는 고강도의 대미 비판연설이다. 다음날 연설에서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은 “냉전은 한번으로 족하다”며 정면 반박에 나섰다.

푸틴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과 러시아, 이란 정상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독일 뮌헨에서 열린 국제안보정책회의에서 “국제회의이기에 논쟁적 발언을 하겠다”고 말문을 연 뒤 32분 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을 조목조목 비난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보도했다. 단상 앞줄에 앉은 소련 연구자 출신의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과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서방 쪽 참석자들은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지배하는 단극체제는 권력과 힘, 의사결정의 중심이 하나이고, 지배자와 주권도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내부로부터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미국의 군사행동을 두고 “일국적”, “불법적”이란 말을 쓰면서 “전세계 전쟁을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느 나라도 국제법 뒤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없으므로 어느 나라도 더는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며 “이로 말미암아 군비경쟁이 촉진되고 핵무기를 가지려는 생각이 들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나토 확장은 동맹 현대화나 유럽 안보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상호 신뢰를 잠식하는 심각한 요인”이라고 말해 러시아의 불만을 드러냈다. 또 미국은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가르치려 하면서 스스로는 민주주의를 배우려 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공박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이 반대하지만 이란에 무기 판매를 계속할 것이며, 세르비아가 반대하는 코소보의 독립을 저지하겠다는 점도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의 연설은 ‘옛소련의 영광 재현’을 목표로 삼은 자신의 정책이 완결단계에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로 보인다. 또 그가 후견인이 될 ‘포스트 푸틴 러시아’가 녹록지 않은 상대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어 연설에 나선 메르켈 총리는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러시아는 신뢰할 만하고 예측 가능한 상대라는 느낌을 받아왔다. 서로 솔직하게 대화할 필요가 있고, 문제를 카펫 밑으로 쓸어넣을 필요는 없다”며 푸틴 대통령의 대립적 정세관을 넌지시 비판했다.

11일 연설에 나선 게이츠 장관은 “냉전은 한번으로 족하다”며 “에너지 자원을 정치적 압력 수단으로 쓰려는 시도 등, 러시아의 일부 정책들은 국제사회 안정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반박했다.(류재훈 기자) 

경향신문(07. 02. 12) 푸틴 “美 MD가 군비경쟁 조장” 직격탄

탈 냉전 이후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지켜오던 군사력 균형이 흔들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이 최근 노후 인공위성을 미사일로 저격하는 실험을 통해 ‘스타워스’ 우려를 상기시킨 데 이어 에너지 수출로 경화를 여퉈둔 ‘푸틴의 러시아’가 미국 주도 단극화 세계질서에 공개 도전장을 냈다. 냉전식 군비경쟁시대가 재도래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에서 개막한 43차 국제안보회의 연설에서 미국의 군사전략을 ‘일방적이고 불법적인’ 것이라면서 미국이 새로운 군비경쟁을 촉발시키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미국의 대 러시아 견제의 증거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진과 미사일방어(MD) 시스템을 거론하면서 “러시아 국경 인근에 군사시설을 설치할 필요가 왜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미국의 MD 시스템이 냉전시절 상호확증파괴의 공포에서 이뤄진 냉전시절 군사력의 균형을 완벽하게 뒤집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토폴 M’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신형 탄도미사일은 미국의 MD에 맞서기 위한 것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라크전에서처럼 미국의 초대군사력 행사가 또 다른 분쟁을 유발하는 불안정과 위험만 증폭시킬 뿐이라며 미국의 아픈 부분에 소금을 뿌렸다. 구소련 국가들의 선거에 감시단을 파견하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한 나라의 외교적 이해를 보장하기 위한 ‘야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은 또 러시아내 반정부 단체를 은밀히 지원, 체제붕괴를 노리고 있다면서 집권 7년 동안 진행된 미국의 교묘한 대러 포위전략을 공개 비난했다. “베를린 장벽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새로운 분할 선과 규칙들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도 미국의 MD시스템 구축을 공개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이날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나토 국방장관 회담 뒤 회견에서 “체코와 폴란드의 MD시설이 북한과 이란 미사일 위협 때문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면서 “당장 학생들이 보는 지구본을 보라”고 지적했다. 이란은 고작 최대사거니 1700㎞의 중거리 미사일을 갖고 있을 뿐인데 이를 빌미로 동유럽에 MD를 확장하는 것은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체코·폴란드와 북한의 지리적인 위치를 지적하기도 했다. 또 “누군가 러시아와 다시 군비경쟁을 벌이자고 해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바노프 장관은 새로운 세대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과 핵잠수함, 항공모함, 조기경보 레이더 시스템 등이 포함된 야심찬 군비 현대화 계획을 공표했다. 구소련 군대의 전투대응력을 능가하는 것을 목표로 향후 8년간 1890억달러를 투입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바노프 장관은 최근 러시아 두마(하원) 연설에서 최근 매년 4기씩만 늘리던 탄도미사일을 올해는 17기 확보하고 34기의 신형 토폴 M 미사일도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까지 토폴 M 미사일을 추가로 50기 배치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러시아의 군사예산은 올해 310억달러로 2001년에 비해 4배가 늘었다.

물론 러시아가 미국과 본격 군비경쟁에 나서겠다는 선언으로 보기는 힘들다. 올해 미국의 국방예산은 전쟁비용을 포함해 6246억달러로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다. 하지만 최소한 미국의 MD 확충만큼은 더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군사전문지 에어포스타임스 10일 보도에 따르면 미 국방부는 북한 미사일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올해 알래스카 포트 그릴리에 3번째 MD 발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이다. 내년 말까지 포트 그릴리와 캘리포니아 반데버그 공군기지에 모두 30기의 MD용 요격미사일을 배치한다. 미국은 또 지난 7일 체코 정부와 MD용 레이더기지 건설에 합의하는 한편 폴란드 군기지에 10기의 요격미사일을 배치키로 했다.

국제안보회의에 참석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과 유럽 지도자들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다고 외신은 전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고든 존드로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의 발언에 실망했다”면서 “그의 지적은 잘못된 것”이라고 응수했다.(워싱턴|김진호특파원)

07.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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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2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러한 변화가. 안 그래도 체코 갔을 때, 체코신문(물론 영문;;;; )보니까 1면이 미국 레이다 기지를 체코에 건설하는 것에 대한 반대여서, '흡족'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러시아 친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고 하면서 미국을 비판하는 것이 변화이기는 하군요. MD에 대해서 러시아가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미국에게 받는 것이 꽤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세계 정세변화에 따라서 안티-미국을 결집시키려는 행동일런지, 그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된 것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것인지 흥미롭습니다. 그래도 다시 '양극'이라 하기에는 많이 힘든 것은 사실일터인데, 다윗 수십명이 돌 던지면 골리앗도 난감하기는 하겠지요;; 퍼갑니다. ^^

나비80 2007-02-1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 수십명이 돌을 던지는 것 보다 자기 편 몇이 돌아서는 게 더 큰 타격일텐데 아직 그런 징후까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블레어나 메르켈, 하워드 같은 총리들이 나서서 힘을 실은 연설이었다면 파장이 더 컸겠지요.
그리고 러시아의 자신감 운운하는데 정말 그만한 수준인지도 의문이고요. 중국 쪽과 모종의 의사교환이 있었을 것 같은 추정이 들기도 합니다. 미국의 단일패권은 눈꼴십니다. 그러나 얕은 생각이지만 현실적으로 수년 내에 주목할만한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2-1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사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다 계산된 외교적 언사일 테고, 한번쯤 과시/경고하는 것이죠. '나 물로 보지 마!'라구요...
 

어제 2월 10일은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1799-1837)의 서거 170주기가 되는 날이다. 러시아신문을 뒤져보니까 추모기사들이 떠 있는데, 올해는 날짜가 2월 9일인 모양이다. 구력으로 푸슈킨이 사망한 것은 1837년 1월 29일의 일이다. 이걸 신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2월 10일쯤인데, 하루 정도는 왔다갔다 하는 듯하다(이 계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나는 모른다). 지난달 말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틀이 지나서야 몇 마디 적게 된다(날짜가 지나서 제사를 지내는 것 같군).

사실 그의 결투와 죽음에 관해서 내가 할 얘기는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페이퍼에 적어놓았기 때문에 특별히 덧붙일 말은 없다. 그래서 국내에 관련기사가 있는지 검색해봤는데, 오래전 세계일보에 실린 것이 눈에 띈다. '철의 실크로드' 기행연재물의 한 꼭지가 '시인 푸슈킨의 고향 모스크바'를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옮겨놓으면서 몇 가지 이미지를 덧붙여둔다(*아래는 푸슈킨의 결투 장소).  

세계일보(01. 08. 20) 詩人 푸슈킨의 고향 모스크바

"굳이 문학도가 아니라도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푸슈킨의 시 한 두 편쯤은 암송할 수 있습니다. '예브게니 오네긴'이나 '스페이드의 여왕' 같은 장-단편소설의 줄거리와 등장인물까지도 훤히 들 압니다. 그만큼 푸슈킨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작가입니다."

통역을 겸해 취재진을 안내한 조현용(25)씨는 러시아에서 8년간 살면서 느낀 점들을 기자에게 들려주었다. 이곳에서 고교를 다니고 모스크바 국립대의 러시아 어문학 석사학위까지 받은 그지만 러시아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문화적 소양에 깜짝깜짝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문학을 즐기고 오페라와 연극 발레를 많이 보아서인지 여기선 웬만한 일반 시민도 한국의 학식 있는 문화예술인이나 문학 교수 못지않게 해박하다는 것이다.

특히 알렉산드르 S. 푸슈킨(1799∼1837)의 작품은 러시아인들에게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그는 시와 소설 등 각 장르에 걸쳐 새로운 전범이 될 작품을 많이 남김으로써 '러시아 근대문학의 스승'으로 추앙받는다. 그를 기리는 기념관만도 러시아 전역에 20군데가 넘는다. 붉은 광장에서 가까운 아르바트 거리에는 푸슈킨이 신혼시절 살았던 집이 기념관으로 남아 있다.

취재진은 이곳을 잠시 둘러본 뒤 다시 프레치스첸크 거리에 있는 푸슈킨 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건물은 웅장하고 현대적인데다 전시물도 다양하다. 푸슈킨이 태어나기 전후의 시대상과 풍물, 당시 모스크바 시가지의 모습에서부터 작가의 육필원고와 스케치화, 저작물, 오리깃털 펜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개인용품과 주변인물, 관련자료 등으로 그 삶의 궤적을 두루 보여준다.

  

"푸슈킨은 모스크바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 셀로(황제의 마을사회주의 혁명 이후 이 지명은 푸슈킨을 기념해 '푸슈킨고로트'로 바뀌었다)의 귀족학습원의 학생시절부터 빼어난 시작(詩作)으로 주목받았다. 졸업후 그는 시를 쓰면서도 의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적인 애국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자유' '차다예프에게' 등의 정치시를 쓴 것이 화근이 돼 그는 남러시아로 추방된다. 하지만 유형지의 외로운 생활 속에서도 개성의 자유를 노래하며 '보리스 고두노프' 같은 사실주의적인 드라마 작품을 많이 썼다. 근위병들이 황제에 반기를 든 데카브리스트 사건이 터진 뒤 그들과 무관함이 밝혀진 1826년에야 그는 유형에서 풀려나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푸슈킨 박물관의 안내인은 작가의 아내 나탈리야와 단테스의 그림 앞에 이르자 취재진에게 시간을 할애해 젊은 작가의 장렬한 최후를 들려주었다. 작가의 삶은 그 자체로도 소설처럼 극적이고 열정적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모든 것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일은 사랑스러우리라"고 했던 시는 그의 삶 속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는 32세 되던 1831년 13세 연하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했다. 일찍이 그가 "현기증을 느꼈다"고 했을 만큼 빼어난 미모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결혼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른다. 궁핍한 장모에게는 빚까지 내가며 거액의 혼수금을 쥐어줘야 했다. 게다가 유행을 좋아하고 사교계의 여왕으로 각광받게 된 아내 때문에 갈수록 큰 돈이 들었다. 늘어가는 빚과 사교계의 번잡함 속에서 그는 정서불안에 시달렸다. 숨지기 3년 전인 1935년 무렵 그는 황제에게 매수당했다는 비난을 각오하고 니콜라우스 1세로부터 3만루블을 빌리게 된다. 그만큼 그로서는 경제적으로 힘든 처지였다.

이 와중에 프랑스 출신 청년 근위병 조르주 단테스와 그의 아내 나탈리야의 염문이 불거졌다. '간통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익명의 편지에 분개한 그는 '연적'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1837년 1월 27일 오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검은 강가에서 둘은 결투를 벌였다. 열 발짝 떨어져서 서로 권총을 쏘되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냉혹한 조건으로. 푸슈킨은 상대가 쏜 첫 발에 이미 복부에 치명상을 입고 눈밭에 쓰러졌으나 그의 총탄은 단테스의 팔목에 상처를 입혔을 뿐이었다. 이틀 뒤 그는 숨을 거두었다. 아직 37세의 젊은 나이였다.

당국은 사전에 이 결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탈리야를 좋아했던 황제 니콜라우스 1세는 이를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푸슈킨을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세도가들도 단테스와 나탈리야의 염문으로 그가 타격을 입는 것을 즐기는 입장이었다. 푸슈킨의 시신은 당국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미하일로프스코예의 한 수도원에 보내져 새벽에 매장됐다. 그의 대중적 인기 때문에 혹시 불상사가 벌어질까 우려한 당국은 일반인의 장례 참가를 금했고 '과격한' 추도사를 쓰지 못하도록 엄명했다. 작가의 데드 마스크는 눈을 감은 채 두툼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이승을 떠난 무심한 표정이었다.

"나탈리야요? 그녀는 한동안 언니 알렉산드라와 아이들과 함께 칼루가 현에 있는 양친의 영지에서 살다가 후일 황제의 권유로 다시 궁정에 복귀하지요. 1844년 그녀는 표트르 란스코이와 재혼했습니다. 황제는 가족의 빚을 갚아주고 푸슈킨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졌습니다. 푸슈킨을 죽인 단테스는 그 뒤 러시아인들에게 짐승처럼 손가락질당하며 그늘진 삶을 살았습니다."

짧지만 열정적으로 살다 간 그는 자신의 삶에 긍지를 갖고 있었다. '나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기념비를 세웠다'며 푸슈킨은 자신의 미래를 이렇게 써 놓았다(*'기념비'란 시이다). "나는 완전히 죽지 않으리라친숙한 시 속에 깃들인 영혼은/ 나의 재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며, 부패되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는 찬양받으리라, 지구상에/ 단 한 명의 시인이라도 살아 있는 한."(차준영 문화전문위원)

07. 02. 11.

P.S. 푸슈킨의 결투와 죽음에 관한 기사의 소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나 아직 확증적인 것은 아니며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수수께끼들은 아직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황제 니콜라이의 '음모설'을 나는 더 지지하는 편이다). 아래는 1880년에 모스크바에 세워진 푸슈킨의 동상. 러시아 전역에 200여개가 넘는 그의 동상들 가운데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동상이다. 배경으로는 과거 모스크바영화제가 개최되던 '러시아극장'이 보인다. 자주 가보던 곳인데, 벌써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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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21 23:50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작년 4월에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두레, 1997)를 몇 페이지 들춰보면서 '도스토예프스키와 타르코프스키'란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이후에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자료들을 나는 더 긁어모았고(그에 관한 논문이나 책을 쓰는 것이 나의 목표이자 핑계이다), 어제는 <순교일기>의 영역본 <시간 속의 시간(Time within time)>(1994)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도서관에 주문한 책을 얼마전에 대출해서 복사한 것이다.  

집에까지 들고 온 김에 몇 페이지만 다시 읽어보았다. 영역본은 국역본과 마찬가지로 지난 1989년에 나온 독어판 <순교일기(Martyrolog)>를 대본으로 한 것인데,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짐작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듯하다. 좀더 검색을 해보니 출간은 이미 기획돼 있고 원래는 작년말 정도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적어도 올해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독어본 일기는 1권(1970-1986), 2권(1981-1986) 두 권으로 돼 있는데, '편집자의 말'에 보면 "1권이 출간되고 난 뒤 그의 부인조차도 몰랐던 많은 양의 일기와 방대한 자료가 새롭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기적으론 1권과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2권이 다시 출간되었던 것. 아래가 그 2권이다.
 
 
짐작할 수 있지만 독어본 두 권은 71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본문 370쪽이 되지 않는 국역본은 당연히 발췌본이고 이에 대해서는 역자가 해명해 놓았었다. "이 일기를 모두 우리말로 옮겨 출판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그것은 너무 벅찬 일이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만을 골라서 책을 엮게 되었다. 일기의 선택기준은 타르코프스키의 인생관, 세계관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 그가 어떤 사람인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의 영화예술론, 작품의 구상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그의 예술이 소련의 이데올로기 및 영화당국, 관졔예술과 어떤 충돌을 빚어내고 그래서 어떻게 박해받았는가를 보여주는 것, 그가 즐겨 읽었던 작가, 예술가, 사상가는 누구이며, 가장 많은 감명을 받은 글은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주는 것 등을 중심으로 하여 글을 골랐다."(400쪽)
 
<봉인된 시간(Sculpting in Time)>과 마찬가지로 키티 헌터-블레어(Kitty Hunter-Blair)가 옮긴 영역본은 색인까지 포함해서 407쪽 분량이니까 국역본과 큰 차이는 나지 않으며 짐작에는 독어본의 제1권(만)을 번역한 듯하다. 부제가 '일기 1970-1986'라고만 붙어 있는 것도 그런 심증을 갖게 한다. 하지만 조금 읽어보니까 국역본에 누락된 대목들도 군데군데 포함하고 있다. 국역본보다는 조금 자세한 게 아닐까란 짐작을 해보게 된다. 겸사겸사 국역본에 몇 가지 교정사항(의문사항)이 있어서 적어둔다. 현재 품절되었다고 하니까 혹 재출간시(완역본이 나오면 더 좋겠고) 교정사항이 반영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지난번에도 인용한 바 있지만, <순교일기>의 첫문장은 1970년 4월 30일 일기의 것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우리는 다시 한번 <도스토예프스키>를 영화화하는 작업에 관해 사샤 마사린과 이야기했다."이다. 여기에 나는 "역주에도 있지만, 마사린은 영화 <거울>의 시나리오 작업을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했었다"라고 덧붙였었는데, 영역본을 보니까 '사샤 마샤린'이 아니라 '사샤 미슈린(Sasha Mishurin)'이다. 사샤가 '알렉산드르'의 애칭이므로 공식 이름은 '알렉산드르 미슈린'이다. 국역본의 '등장인물해설'에는 또 '알렉세이 미샤린(Aleksei Mischarin)'이라고 표기돼 있다(374쪽). 이게 왜 이리 왔다갔다 하는 건지.
 
 
나타샤 시네씨오스가 쓴 작품해설 <거울>(2001)을 보니까 각본은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Alexander Misharin'이 맡은 것으로 기재돼 있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알렉산드르 미샤린'(사샤 미샤린)이라 해둔다('미샤린'이 '미슈린'으로도 불릴 수 있나?). 국역본의 '알렉세이 미슈린(1912-1982)'은 다른 러시아 영화감독의 이름이다.
 
'편집자의 말'에 보면 "등장인물의 표기는 독어판과 영어판을 대조해가면서 정확을 기하려 했으나 러시아어판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곳이 적지 않을 것이다."(403쪽)라고 했는데, 첫문장에서부터 그런 사례가 나오고 있는 것. 재판이 나온다면 <봉인된 시간>처럼 그냥 다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류들을 정정하여 보다 정확한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어지는 대목. 타르코프스키는 어쨌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아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에 관한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적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성격, 그의 신, 그의 악령들, 그가 이룩한 일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톨야 솔로니친은 도스토예프스키 역할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지적한 대로 '톨야 솔로니친'은 '톨랴 솔로니친'라고 표기하는 게 맞다. '톨랴'는 '아나톨리'의 애칭이며 아나톨리 솔로니친(1934-1982)은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주역을 맡았던 그 배우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솔로니친을 도스토예프스키의 배역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 아래 사진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솔로니친과 도스토예프스키. 타르코프스키는 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배역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것.  

"이제 나는 우선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쓴 글을 모조리 읽어야만 하겠다. 그리고 그에 관해 쓴 모든 글들 그리고 러시아 종교철학자들인 솔로비요프, 베르쟈예프, 레온체프의 글들도 모두 읽어야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영화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 모든 것들의 총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25쪽)

여기서도 표기 하나. 레온체프는 영어로 'Leontiev'이며 러시아 철학자 콘스탄틴 레온티예프(1831-1891)를 가리킨다(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경제학자는 바실리 레온티예프이다). 발음대로 하면 '레온찌예프'가 되지만, 관행에 따라 '레온티예프'라고 해둔다. 여기까지가 4월 30일의 일기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5월 10일자 일기. "1970년 4월 24일 우리는 므야스노예에 집 한 채를 구입했다"(26쪽)고 나오는데, '므야스노예(Myasnoye)'의 바른 표기는 '먀스노예'이고 타르코프스키 가족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아들 안드레이가 찍은 먀스노예의 사진들이며 영어본 폴라로이드 사진첩 <순간의 빛(Instant Light)>(2004)에 들어 있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분위기가 사진들에서도 묻어난다. 아래사진에 나오는 여인이 타르코프스키의 아내이자 안드레이의 어머니 라리사이다.  

아들 안드레이는 1970년 8월 15일 일기에 보면 "라리사가 8월 7일 6시 25분 아들을 낳았다. 안드류슈카(안드레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라는 구절에서 처음 이름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이름도 안드레이여서, 이 부자는 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유작 <희생>에서 자신의 영화를 아들 '안드류슈카에게 바친다'라고 나중에 적게 될 것이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러시아 고유명사의 표기는 거의 매 페이지마다 문제가 된다. 가령 5월25일 일기에서는 "바스카코프 집에 갔었다."라고 시작하지만, 영역본을 보면 "바자노프 집에 갔었다"고 돼 있다. 둘다 일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이서 오타 문제도 아니다(러시아본이 빨리 출간됐으면 싶다!). 한 가지 덧붙이지면, 같은 날짜 일기에서 "점차 일이 진행되고 있다"로 시작되는 문단은 영역본에 6월 4일 일기로 돼 있다. 국역본이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만 타르코프스키의 독자로서 '정독'하려고 하면 아쉬운 부분들이 많다...

07.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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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부터 프레드릭 제임슨과 씨름하려니까 지겨기도 한데, 잠시 짬을 내 '러시아 이야기' 하나를 올려놓는다. 러시아 관련 뉴스라야 '테러 아니면 에너지'가 주종이었고, 최근에는 단연 에너지 관련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한 행보에 대해서 '에너지 파시즘'으로 경계하는 한 칼럼이며 프레시안에 번역 전재된 걸 스크랩해놓는다. 내용 자체는 새로운 게 없지만(푸틴의 박사학위논문 제목은 처음 알게 됐다), '에너지 파시즘'이란 선정적인 용어가 일단 눈길을 끌고 관련정보들을 정리해놓은 의의가 있다. 아래 편집자의 말에 이어지는 것이 그 칼럼이다.  

다음은 미 뉴햄프셔대 마이클 클레어 교수의 '석유 패권과 핵 르네상스기': 에너지 파시즘의 두 얼굴(Petro-Power and the Nuclear Renaissance: Two Faces of an Emerging Energo-facism)'을 완역한 것이다. 에너지정치학의 국제적 권위자인 클레어 교수는 석유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석유 확보를 명분으로 한 파시즘이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한 앞의 글('우리의 미래는 에너지 파시즘인가?')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에너지 초강대국으로 급부상 중인 러시아를 모델로 에너지 파시즘의 단면을 제시하고 있다. 개인의 소유하고 있는 에너지 재산을 비합법적 방법으로 국유화 한다든지, 에너지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도구로 활용한다든지 하는 등 러시아가 에너지 패권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몇 가지 모습들이 에너지 파시즘의 어두운 얼굴이라는 것이다. 
  
석유나 천연가스가 고갈된 자리를 원자력이 메우게 되면서 그 시설을 방어하고 그 부산물의 유출을 감시하기 위한 정부 통제권이 강화되라라는 전망 역시 파시즘의 도래를 우려케 한다. 이에 클레어 교수는 "대다수의 정부 지도자들은 이 문제들의 초점을 정부 통제력을 증가시키거나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데 두려 한다"며 '지각 있는 시민'이 이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당부한다. 원문은 미국 진보성향 인터넷 매체인 <톰디스패치닷컴>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프레시안(07. 02. 07) 러시아, '에너지 파시즘'의 정점에 서다

전편에서 말한 것처럼 앞으로 수십년간 세상사를 지배하고 일반 사람들의 삶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이슬람 파시즘'이 아니라 '에너지 파시즘'이다. 즉 갈수록 줄어드는 에너지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지구적 군사투쟁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전 세계의 정부 관료들이 국가 에너지 수요를 시장의 힘에 맡겨두기보다는 에너지의 확보, 수송, 할당 등을 정부가 직접 책임지고자 하기 때문이다. 강대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에너지 확보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면 무력 사용도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돼 있다.
  
이러한 에너지자원 확보의 절박성은 미국의 경우, 미군의 업무를 '세계 석유 보호기관'으로 전환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밖에 에너지 파시즘의 도래를 알리는 또 다른 징후로는 러시아의 '에너지 초강대국'으로의 급부상,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안전 등을 이유로 한 국가권력의 감시 및 통제가 강화될 것이란 점을 들 수 있겠다.

에너지 부국이 곧 강대국이 되는 시대
  
에너지 수요는 증가하는 데 반해 공급은 줄어드는 상황에서(최소한 공급 증가가 수요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 세계는 크게 에너지 부국과 에너지 빈국으로 나뉘게 됐다.
에너지 부국들은 에너지(석유, 가스, 석탄, 수소에너지, 우라늄, 대체에너 자원 등) 자체 보유량이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아 다른 나라에 수출까지 한다. 반면, 에너지 빈국들은 부족한 에너지자원을 수입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쓰거나 아니면 에너지 부족의 뼈아픈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지난 50년간(1950~2000년)은 에너지가 풍부하고 값이 쌌기 때문에 에너지 부국과 빈국 간의 차이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일본처럼 어마어마한 부자거나 영국, 프랑스처럼 핵무기를 갖고 있거나, 하다못해 나토 동맹국이나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국들처럼 '힘센 우방국'이 있다면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문제가 없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도저도 없는 국가들은 고생을 해야 했다. 아직도 이들 국가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는 외채위기는 사실 에너지부족에 기인한 바 크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돈이 많다거나 핵무기가 있다든가, 또는 강력한 우방국을 갖고 있다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됐다. 오히려 에너지 부국이냐, 빈국이냐의 차이가 더 중요해졌다. 돈 많고 힘 있는 미국과 일본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에너지 부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의외로 적다. 호주, 캐나다, 카자흐스탄, 쿠웨이트, 나이지리아, 카타르,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이란, 이라크(현재의 혼란이 극복된다면) 정도다. 그 외에 몇 나라 더 있을까. 이들 나라는 선망의 대상이다. 일단 엄청난 가격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고, 이들 나라의 지도층들은 충분한 에너지 확보를 원하는 다른 나라 지도층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혜택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에너지 소비국들을 싸움 붙여 이득을 챙길 수도 있다. 워싱턴과 베이징으로부터 경쟁적으로 초대받고 있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이런 게임에 아주 능숙한 지도자다.
  
심지어 단순한 경제적 혜택을 보장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에너지 소비국에 대해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에너지 소비국은 국가운영에 필수적인 석유와 천연가스의 안정적인 판매를 보장받기 위해 에너지 공급국의 정치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전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나라는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다.

러시아의 가스는 '패권의 방향'으로 흐른다 
  
냉전이 끝난 후 러시아는 희망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초강대국'은 이미 과거의 얘기였고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그리고 영향력 면에서도 한물 간 것처럼 보였다.
수 년 간 미국 관리들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미국이 이끄는 나토가 동유럽의 러시아 위성국가에까지 확장됐고, 요격미사일금지협정(ABM)은 일방적으로 폐기됐다. 미국 정부의 수많은 관료들이 러시아를 역사적 유물 이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세계사에서 러시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최후의 미소를 짓는 자'는 워싱턴이 아니라 모스크바인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양의 석유와 우라늄은 물론 유라시아 최대의 천연가스와 석탄 보유량을 자랑하는 러시아는 이제 새로운 '승자'가 됐다.
군사 초강대국이 아닌 에너지 초강대국이 된 것이다. 어찌됐건 초강대국은 초강대국인 셈이다.
  
먼저 큰 그림을 보자. 러시아는 천연가스 생산에 있어 '절대강자'다. 영국의 BP 석유그룹에 따르면 러시아의 천연가스 보유량은 측정된 것만 1700조 입방피트에 이른다고 한다. 전 세계 천연가스 공급량의 27%를 차지하는 양이다. 이 사실은 보기보다 갖고 있는 의미가 더 크다. (러시아 에너지 자원의 주요 고객인) 유럽과 옛 소련국가들의 천연가스 의존 비율이 34%로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 높기 때문이다. (석유를 주 연료로 하는 미국의 경우 천연가스 의존도는 25% 정도다.) 유라시아 가스 공급원을 주도한 덕에 러시아는 다른 에너지 공급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배적 공급자의 위치를 누리고 있다.

물론 석유 공급에서도 러시아는 강력한 우위를 갖고 있다. 세계 1위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하루 1100만 배럴을 생산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고작 140만 배럴 뒤져 있을 뿐이다(2006년 초 기준) . 게다가 러시아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석탄이 매장돼 있는 나라이자 현재 31개의 원자로가 가동 중인 주요 원자력 소비국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1999년, 집권 직후부터 이 넘쳐나는 에너지를 러시아 패권 부활을 도모할 만한 정치적 무기로 바꾸는 계획을 추진했다. 러시아는 러시아에서 수출되는 에너지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에서 러시아 송유관을 통해 유럽에 공급되는 에너지까지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에 푸틴 대통령은 냉전 시대에 누렸던 소련의 정치적 영향력의 일부나마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1990년 소련 붕괴 이후 민영화됐던 가스 산업을 다시 국유화하고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다른 에너지 산업도 모두 국가의 지배 아래 둬야만 했다. 공산주의 법체계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이 같은 국유화를 합법화할 길이 없었기에 푸틴은 불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으로 이 귀중한 자산들을 모두 국유화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에너지파시즘의 도래를 관찰할 수 있다.
  
러시아의 에너지 자원을 국가가 집중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푸틴의 오랜 지론이었다. 푸틴은 1999년 '러시아 경제 발전을 위한 전략상의 광물자원'이란 제목의 박사학위논문 요약본에서 러시아 정부는 국가의 광물자원 활용을 감독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국민들의 이익의 위해서라면 이미 개인사업자 손에 들어간 석유 부분도 예외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천연자원, 특히 광물자원에 대한 획득과 사용 과정을 제어할 권리가 있다. 그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 문제에 관해서 정부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에너지파시즘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정의를 상상하기는 힘들 것 같다.

석유 재벌 체포하고 석유 기업은 정부 품에
  
이 같은 푸틴의 속셈을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사건은 이른바 '호도르코프스키 사건'이다. 지난 2003년 러시아 최대 석유재벌이던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회장이 사기 및 세금포탈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미국) 엑손모빌과의 합작회사 설립 등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난 온갖 에너지 판매를 추진해고, 러시아 내 반(反)푸틴 정치세력을 지원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으로도 크렘린의 격노를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푸틴이 이 사건을 기획한 최종 목표는 유코스의 주요 자산인 유간스크네프트가스를 빼앗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유간스크네프트가스는 러시아 석유 생산의 11% 가량을 담당하고 있었다. 호도르코프스키와 그의 측근들이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정부는 유간스크네프트가스를 경매에 부쳐 명의뿐인 유령회사에 넘긴 다음 곧 국영기업인 로스네프트에 시장가 이하의 가격으로 되팔았다. 푸틴은 순식간에 민간기업인 유코스를 분할해 러시아 최대의 국영석유생산업체 로스네프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푸틴은 석유 및 가스의 수출, 공급도 국가가 장악하려 했다. 민간 기업의 송유관 건설을 원천봉쇄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국영기업 가스프롬의 천연가스 독점과 역시 국영기업인 트랜스네프트의 송유관 독점은 확고해졌다. 미국과 다른 에너지 소비국들은 민간 기업의 송유관 건설을 오랜 기간 압박해 왔다. 유럽과 다른 해외 시장에 공급되는 에너지의 양을 늘리는 동시에 가스프롬과 트랜스네프트의 권한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렘린은 제도적으로 이 같은 노력을 배제시켜버렸다.
  
에너지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합법성 여부가 의심되는 방법으로 정부가 장악해버린 것이 러시아가 보여준 에너지파시즘의 한 단면이라면, 러시아가 자원을 이용해 자원 빈국들을 러시아 주변에 묶어두는 데에서 또 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악명 높은 사례로는 2006년 1월 1일 우크라이나로 공급되던 천연가스를 끊어버렸던 것을 들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가스 가격을 두고 분쟁을 벌이던 가스프롬이 가스 공급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태를 지켜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유센코 대통령의 친서방 정책에 대한 러시아의 경고로 믿고 있다.

이 사건이 한 겨울에 일어났음을 유념하라. 구소련 국가들과 동유럽 국가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천연가스는 우크라이나의 주 난방 연료였다. 결국 가스프롬은 막판까지 가격 협상을 하다가 서유럽의 요란한 불만에 못 이겨 가스 공급을 재개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공급하던 가스를 내수로 돌려버리자 공급받던 가스에 결손이 생긴 서유럽이 큰 소리를 낸 것이다. 이제껏 러시아 정부가 해 온 모든 일이 결국 에너지를 공급하는 '수도꼭지'를 외교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였음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러시아 정부는 '근린국가(Near Abroad)'라고 부르는 이웃 국가들을 협박하기 위해 종종 이 전술을 사용해 왔다. 2006년 7월 29일에는 트랜스네프트가 누출 위험을 이유로 리투아니아 최대 정유소인 마제이큐에 대한 원유 공급을 중단했다. 마제이큐의 회장이 이 정유소를 러시아가 아닌 폴란드에 매각키로 했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였다. 이 같은 움직임을 지켜본 사람들은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 회사가 정유회사를 인수하는 데까지 힘을 쓰고 있다고 풀이했다.
  
이어 11월에는 가스프롬이 그루지야에 공급하던 천연가스 가격을 1000입방미터 당 110달러에서 230달러로 두 배 이상 올리겠다고 협박했다. 가격을 올릴 수 없다면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이 역시 그루지야의 친서방 정부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러시아 정부에 반항해 왔던 점이 일정 부분 감안된 정치적 압력으로 여겨졌다. 가스프롬은 12월 벨로루시에도 같은 장난을 쳤다. 주변의 헐벗은 국가들이 조금이라도 독립의사를 보이면 여지없이 가격인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가 보여준 에너지파시즘의 다른 얼굴이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자원 빈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유라시아 그룹의 자문역인 클리프 쿱샨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에너지가 새로운 종류의 핵무기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러시아는 석유권력을 공격적이고 영리하게 사용해 자국의 외교적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원자력과 함께 르네상스를 맞을 '빅 브라더'
  
에너지파시즘의 마지막 얼굴은 원자력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차원의 억압과 감시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가스와 석유 매장량이 줄어들수록 정부와 산업계 지도자들은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 추가 에너지를 공급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높은 우려도 이 계획을 부추길 것 같다.
  
석유, 가스, 석탄 등을 태울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가겠다는 계획을 거듭 말해 왔고 2005년 정부가 마련한 '2005 에너지 정책법'에도 미국에서 새로이 원전을 짓는 전기 사업들에 대한 다양한 인센티브를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 등 다른 나라에서도 원자력 의존도를 높여 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고, 이는 원전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소위 '원자력의 르네상스기'라고 말하는 길에는 몇 가지 문제가 버티고 있다. 엄청난 부대비용이나 핵 쓰레기를 장기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이 상당부분 개선됐음에도 1979년 '쓰리 마일 아일랜드' 사건이나 1986년 체르노빌 사건 같은 핵사고 위험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원자력 산업이 성장할 미래에 대해 우려되는 점 두 가지만 들어보겠다. 원전 부지의 결정권이 연방정부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과 테러리스트, 범죄자, '불량 국가' 등에 대한 핵무기 이전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개인에 대한 국가권력의 억압이 강화될 것이라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원자력 시설을 세우려면 (연방정부가 아닌) 시, 카운티, 주 정부 등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뒷마당에 원전이 설치되는 것을 반대할 권한을 갖는 것이다. 이는 지난 수 십 년간 미국 내 새 원자력 시설을 건설하는 데 주요한 장애물이 됐다. 법이 정한 대로 주 의회와 카운티 의회, 그리고 환경단체들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비용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규칙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진정한 '원자력 르네상스기'를 절대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시민들의 저항이 거의 없는 가난한 촌 동네에 원자로 몇 개가 세워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원자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허가권을 연방정부가 장악해서 지역단체를 따돌리고 연방정부 관료들에게 새 원자로를 건설할 수 있는 허가서를 발부할 수 있는 무한한 권한을 허락하는 것이다.
  
불가능할 것 같다고? 다음 정황들을 잘 살펴보라. '2005 에너지 정책법'은 지역 관료들로부터 '천연가스 재기화(再氣化) 플랜트' 설치를 허가할 수 있는 권한을 빼앗아 연방정부의 권한으로 만드는 의미심장한 전례를 만들어 놓았다. 이 거대한 시설은 해외 공급자로부터 배로 수송된 액화천연가스를 미국 전역의 파이프를 통해 배달할 수 있도록 다시 가스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몇몇의 동서부 해안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 항구에 이 플랜트가 세워지는 것에 반대해 왔다. 폭발할 위험이 있고(완전 억지 주장은 아니다)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저항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잃었다. 아, 지방자치여 안녕.
  
내 걱정은 여기서 출발한다. 미래의 정부는 '천연가스 재기화 플랜트'의 전례를 따라 원자로 설치에 관한 권한도 연방정부에 넘기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법' 수정을 추진할 것이다. 그리고선 보스턴,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덴버 등 대도시 인근에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원자로 신설 계획을 발표할 것이다. 추가 에너지 필요량의 긴급성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시민들은 궐기할 것이고 이들의 저항에 공감하는 지방정부는 시위대에 대한 집단 연행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주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명령에 대한 반발과는 경우가 다르다. 엄연한 연방정부에 대한 반발인 것이다. 고로 시위대를 제압하고 원자로 주변을 방어하기 위해 주 방위군이나 정규군이 소집될 수 있다. 에너지파시즘의 발동이다.
  
마지막으로 원자력 확산이 낳을 또 다른 위험은 원자력과 연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먼 관계더라도 정부의 조직적 감시 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우라늄 농축시설, 원자로, 핵 폐기장 등 모든 핵 관련 시설과 거기서 나오는 부산물들은 테러리스트나 암시장 불법거래상인, 그리고 이란과 북한 같은 '불량국가'의 손에서는 핵 무기화 될 수 있는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물론 이 같은 시설에 종사하고 있는 개인과 하청업자, 그리고 재하청업자와 그들의 가족들까지 항시적으로 불법 가능성을 조사받을 수 있으며 24시간 엄격한 감시 하에 처하게 된다는 얘기다. 더 많은 원자로와 더 많은 핵 시설이 생길수록 일종의 감시 대상이 될 관여자들의 수도 늘어나고, 이들을 감시하는 보안 관계자들 역시 정부 정보국 차원의 더 높은 단계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매우 광범위한 '빅 브라더' 공식이다.
  
그런가 하면 '증식형 원자로'에 대한 문제도 있다. 증식형 원자로는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핵분물질들을 만들어 낸다. 플루토늄의 형태로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플루토늄은 원자로에서 태우면 전기를 생산해 내기도 하지만 핵무기원료로 이용되기도 한다. 비록 미국에서는 증식형 원자로의 건설이 금지돼 있지만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화석 연료와 그 역시 한정 자원인 천연 우라늄에 대한 의존도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건설 중에 있다. 원자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나라들이 증식형 원자로를 짓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여기엔 미국도 포함될 수 있다. 이는 폭탄에 가까운 플루토늄의 세계적 공급을 광범위하게 증가시킬 것이고 모든 면에서 원자력 산업에 대한 정부의 더 강한 감시를 요구할 것이다.
  
지각있는 시민의 힘으로 에너지 파시즘의 도래 막아야
  
2회에 걸쳐 논의된 모든 현상- 석유보호 서비스로 미군의 주요 업무 전환, 군비 경쟁에 비견할 만한 강대국간 에너지 확보 경쟁의 격화, 러시아의 에너지 초강대국 부상, 원자력 산업에 관한 감시감독 필요성의 증가-은 모두 에너지의 생산, 획득, 이전, 분배 등에 관한 통제력을 확대하려는 정부의 경향성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이는 전 세계적 자원 고갈의 대가인 동시에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에너지 생산의 거점이 이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같은 흐름은 얼마 전부터 진행돼 온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 몇 년간 더 큰 모멘텀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아폴로 얼라이언스, 로키 마운틴 인스티튜트, 월드워치 인스티튜트 등 많은 지각있는 시민들과 단체들이 에너지 고갈과 에너지 생산지의 불안정성, 그리고 지구온난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이성적이고 민주적인 해법을 개발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정부 지도자들은 이 문제들의 초점을 정부 통제력을 증가시키거나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데 두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만약 이러한 경향을 막지 못한다면 에너지 파시즘은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번역 이지윤 기자)

02.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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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2-0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또 엉뚱한 생각이 드네요.그래서 석유재벌이 첼시구단을 인수해서 축구선수들을 사모으는건가?? ^^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원자력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무결점사고방식' 위에 구축되었다는 것이라더군요...

로쟈 2007-02-07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이 좀 남아도니까요.^^ '에너지 파시즘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석유시대의 종언 같은 게 얘기되고 있으니까 뾰족한 수를 찾긴 찾아야 하겠습니다...
 

올해는 1917년의 러시아혁명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월 혁명'이라 불리지만 지금의 달력으론 11월이고 그때쯤이면 러시아 내외에서 이 역사적 사건(이자 소위 '과거의 사건')에 대한 활발한 조명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국내에서도 대학가에서는 이미 이러한 조명이 기획되고 있는 듯하다. 마침 최근에 러시아계 한국인이면서 노르웨이 대학의 교수로 있는 박노자의 글방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짤막한 글이 올라왔다. 예전부터 '당신들의 러시아'를 읽고 싶던 차에 흥미롭게 읽었다. 여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list.html?blog_board=4).

박노자 글방(07. 01. 29) 1917년 러시아 혁명, 배울 것 배우고 미화하지 말기를

지금은 사회 전체가 비판 의식이 좀 강화해서 덜하지만, 제가 1991년에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만 해도 소위 "운동"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레닌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성경 무오류설"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소련이 몰락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레닌을 따라 배우자"는 사람을 제가 살았던 안암골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어요.

사실, 제가 그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좀 어리둥절했었지요. 빛이 있는데에서 꼭 어두움도 따라 생기고 각종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따른다는 것은 이미 도교나 불교에서도 잘 알려진 변증법의 기본인데, 그 "자생적 볼세비키" 분들에게 그러한 이야기가 안통할 때가 많았어요. 그 분들께서 제게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사실, 저는 단순한 "호불호"를 갖다가 답을 못했었지요. 하도 진보와 퇴보, 문화의 대중적 보급과 야만적 잔혹성, 상당수의 신분상승과 일부의 몰락이 얼키고 설킨 것이 혁명이기에 말씀입니다.

글쎄, 1917혁명의 덕분이 아니라면 저부터 러시아에서 태어날 리도 없었을 걸요. 제 조상인 가난한 유대인들은, 제정 정권이 지속되거나 반동적 "백군"이 이겼을 때에 아마도 pogrom (유대인 학살)에 죽거나 미국으로 도망쳤을 것이고, 저도 러어를 모국으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혁명이 제게 개인적으로 '생명의 은인'에 가까운 것이지요(*박노자가 유대인 가계라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1905년 혁명 때에 행동대 일하다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제 조상의 친척 한 분은, 본인도 사회주의 혁명가이었음에도 1920년대 중분에 소련에 잠깐 왔다가 너무 실망이 커서 남미로 돌아갔답니다. 물질적 가난에만 경악한 것이 아니고 본인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경악한 것이지요.  본인이 목숨을 걸고 행동대에서 일했던 것은, 제정 정권과 같은 부자유, 탄압, 사상적 획일화의 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느냐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레닌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저로서 간단히 답하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그건 그렇고 1917년 혁명의 성격을 생각해봅시다. 이 혁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면으로 맞을 것입니다. 20만 명의 볼세비키 당원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지향적인" 대규모 공장의 숙련공과 중, 하급 지식인이었고 그 지도부 역시 주관적으로 사회주의를 위해 평생 투쟁하려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과연 "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이건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아주 길겠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그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사회주의"의 청사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거의 "임기응변"의 가까운 방식이었지요.

일단,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도 제대로 연습을 못한 후진국에서는 이 분들을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 (제헌의회 등등)를 다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으며, 권력을 잡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써 비밀 경찰 격의 "체카"를 만들어 사형제를 부활시켰지요. "체카" 자체의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18-20년간 사형집행된 "반동 분자"들은 12700 여명이었는데, 그들 중에서는 상당수는 "유산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마구 붙잡혀 "반동 분자 준동에 대한 집단적 응징"이라는 명목으로 총살된 "인질"들 이었지요. 레닌이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방 체카들은 고문과 부녀자, 아동의 학살 등 제정러시아 암흑의 통치하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반혁명 분자 근절 방법"들을 이용했어요.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가 구 제정러시아 군의 장교들을 혁명의 "적군" (Red Army)에다 다시 징병했을 때에 그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장교의 탈영/"반역 행위"시에 그 노모나 아이들을 수용소에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해놓기도 했어요.  그런데 부녀자와 아이들을 마구 죽이면서 저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요?

1917년의 10월 혁명을 앞두고 레닌이 "국가의 소멸", "직접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생산 과정의 전국적 관리" 등, 참 듣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국가가 진짜 언젠가 소멸됐으면 아주 좋았을 터인데, 레닌 등이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이 됐을 때에 그 말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어요. 1919년말-1920년초에, 레닌이 "전시 공산주의"의 "알곡 징발제도"와 배급제를 '사회주의의 맹아', '사회주의에의 이행 방법'이라 이야기하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란 전국의 전기 보급과 소비에트 권력 장악"과 같은, 자본주의적 개발주의를 그대로 방불케 하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았어요.

[Photograph of Lev Davidovich Trotskii]

 

 

 

 

 

 

 

 

 

  

 

국방부 장관 트로츠키는, 자기 부처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그런지 "전국 노동의 군사화"를 주장하여 "노동 군대"를 만들어서 생산 요충지에 배치시키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에의 첩경이라고 선전했어요. 이와 같은 "노동의 군사화"가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필요했는지 몰라도,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이를 "사회주의적 덕목"으로 취급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해방 지향성"을 의심케 합니다. 나중에 1921년초에 전국적 농민 반란과 크론스타드 수병 봉기 등 민중의 저항에 정신들 차려 "알곡 징발제"와 같은 반인륜적 폭력을 정지하고 어느 정도 민중의 숨통을 트이게 했지만, 권력의 독점을 또 끝까지 지키려 했었지요.

1921년까지만 해도 일부 소비에트에서 멘세비키 등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자 들이 계속 참여했지만 (사실, 인쇄노동자의 노조나 화학 노조 등이 1921년까지 거의 멘세비키들이 장악했었지요), "신경제 정책"을 발표하여 경제에서의 국가적 폭력을 줄임과 동시에 멘세비키, 에세르, 아나키스트 등의 "비 볼세비키" 혁명 세력들을 크게 박해하기 시작했어요(*박노자의 포지션은 비폭력, 민주주의 지향의 '선진형 사회주의'쯤에 해당하겠다). 

이미 1918년4-5월부터 간헐적으로 멘세비키 계통의 노조 활동가들을 총살하거나 체포하는 개별적인 소수의 경우들이 있었지만, 1921년에 그 탄압이 커져 1922년초에 전국에 체포된 멘세비키 활동가 (대다수 노조 간부들이지요)만 해도 무려 1500 명이었어요. 아니, 의견을 달리 하는 사회주의적 노동자 활동가들을 마구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무슨 놈의 "노동자 민주주의"입니까? 1920-1921년까지 노동자 민주주의의 일부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뒤에는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한 마디로, 과거 혁명들의 장점을 아는 동시에, 그 단점도 좀 배우도록 합시다.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도 알아야 하지만,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를 이 시대의 혁명가들은 제발 따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청년 레닌의 둘이 없는 지기로서 1890년대 중반에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을 이끌었다가 나중에 멘세비키의 길을 걷게 된 율리 마르토브(1873-1923, 사진) 선생의 1918년의 레닌 관련의 논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을, 난 이해 못한다". 글쎄, 제가 꼭 마르토브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역시 촌철살인의 평이었지요. 저도 낮에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놓고 밤에 편안히 자는 사람을 이해 못하지요.그러나, 레닌의 잠은 정말로 편안했을까요? 

1917년, 한 군 부대에서의 혁명적 집회의 모습. 그러나, 1918년5-6월에 일부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노조의 전국적 총회를 열려고 하자, 레닌 정권이 경찰 박해로 맞섰습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이미 그 때도 사실 빛좋은 개살구에 가까웠지요.

07. 02. 05.

 

 

 

 

P.S. 내가 갖는 의문은 "볼세비키들의 혁명적 열성과 같은 장점"과 "그 조급성, 그 인명 경시의 정신, 그 절차적 민주의 무시"가 과연 별개의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까 조급하지 않게 인명을 존중해가면서 그리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해가면서, 즉 어떠한 '과잉' 혹은 '광기'도 배제하면서 우리는 '혁명적 열성'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가? 박노자의 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주의란 것도 '참 듣기 좋은 이야기'에 속하는 건 아닌가? 해서 경청할 만하지만 내게 '리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낮에 총살 명령에 사인해놓고도 편안히 밤잠을 잘 수 있는 이 사람" 레닌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역시나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정리해놓을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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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프라하 다녀와서, 무엇보다도 밀란 쿤데라의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우울했는데, 다시 기운을 차려야 겠지요. 어쨌든 다시 레닌과 러시아 혁명을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

로쟈 2007-02-05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예 노문과로 오심은?^^

나비80 2007-02-05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런지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는 속절 없이 무너져 중심을 이탈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학원가로 투항해 누구보다 매몰차게 돈을 버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그렇다는군요.
그나저나 로쟈님의 영업은 언제 끝날른지...^^

로쟈 2007-02-0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영업은 '책선전' 말씀이신가요?^^ 저도 주변에 돈버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떼돈을 버는 사람들은 한 다리 건너가야 되구요. 해서 '혁명가=기업가'란 등식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나비80 2007-02-05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로쟈님의 인식 범위에서 말씀하신 '책선전'을 조금 재미있게 표현한 겁니다.
저도 로쟈님의 다단계에 얼른 편입되어야 할 텐데요. 아직 턱없이 부족한 역량때문에....
또 기인님은 아무래도 저와 전공이 비슷하신 것 같아서 노문과로 스카우트 해가려는 댓글에 장난삼아 드린 말씀입니다.^^
제가 위에 단 글이 속삭인 꼴로 되어 있네요. 잘못 클릭 했는 모양입니다.^^

yoonta 2007-02-0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론 박노자씨는 멘셰비키라기보다는 아나키스트적 포지션에 더욱 가까울겁니다..^^ 님 생각은 좀 다르신것 같은데 저는 박노자씨의 위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네요. 인명을 경시해야만 한다면 그런 방식의 혁명은 아예 할 필요가 없단거죠..박노자씨도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네요..근데 그 레닌의 "속사정"은 무엇인가요? 지젝의 책을 안봐서 잘 모르겠네요.

로쟈 2007-02-05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명을 경시해야만 한다면 그런 방식의 혁명은 아예 할 필요가 없단거죠" yoonta님도 (짐작대로) '깨끗한 손'을 주장하시는군요(마치 카뮈처럼). 그렇다면, 테러리즘을 제거한 아나키즘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혹은 '아나키즘은 휴머니즘이다!'

yoonta 2007-02-05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즘적? 아나키즘이 아닌 아나키즘은 전 당연히 거부합니다..^^ 아나키즘이던 코뮤니즘이던 뭔 이즘이던간에 "인명을 경시"하는 모든 이즘은 거부하는 입장이라..^^ 그건 단순히 "손을 더럽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로쟈 2007-02-0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경우 인명에 대한 존중은 동물에 대한 존중도 함축하게 되나요? 혹은 더 나아가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도? 에코-아나키즘? 혹은 묵가의 겸애설?..

2007-02-06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eEe 2007-02-0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자 국가 창출을 위해 노동자 정당이 존재하고, 당은 진공상태가 아닌 계급투쟁이라는 엄혹한 조건에서 존재하는 바, 당의 일상적 존재양식은 투쟁일 것입니다. 그리고 투쟁에서의 승리와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가 양립할 수 없을 때 후자의 폐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은 이 가치들의 이상적 구현은 혁명의 완성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신념에 근거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의 진정한 담지자는 제도, 불문율 등의 형식이 아닌 주체라는 것, 노동자 당에서의 민주주의의 달성은 이러저러한 형식이 아닌 혁명적 주체의 재생산에 달려있다는 것,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되어야 한다는 것은 계급투쟁이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1903년 이래로 공식화된 합리적 결론일 것입니다. 우리가 열사에게서 삶을 뜨겁게 사랑하는 이유가 삶을 불살라버린 근거가 되어버린 모순을 발견하듯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진형 사회주의'란 결국 적당히 사회주의 교양을 공부한 자유주의자의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로쟈 2007-02-06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농반진반입니다.^^
울라님/ 정답입니다. 마치 모범답안 같습니다...

푸하 2007-02-06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부정적인 것의 담지자가 되고 싶은 개체가 있는가? 하는 것 같아요.

기인 2007-02-07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개체는 있을수도 있는데, 제가 문제삼고 있는 부분, 또는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다시 돌아온 주체"입니다. 과연 혁명적 주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용없는 당위가 아니라, 규정된 법률같은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담금질 되는 혁명적 주체라는 것. 그리고 그 실천과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사이의 역사적(현재 시점에서) 긴장.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된다는 것. 그런데 현재 당이 과연 있는가? 아니면 당 또한 만들어가야 하는가?
계속 회귀하는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 반성이 부재하다는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울라님이 말씀하시는 '합리적 결론'이 더 이상 모든 '사회주의자'가 흔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 또한 이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너무 쉽게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였어, 또는 그들은 맑스를 '곡해했어' 정도로 덥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 결국 그래서, 전망이 뚜렷하지 않고, 어떻게 가야하는지, 정말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으니, 답답한 것 아닐까요. '답답'하다라는 말은 너무 나이브하고, 오히려 '절망'과 '답답'의 중간에 가깝습니다.

eEe 2007-02-07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바른 전망 / 올바른 전망의 구체화로서의 혁명 / 구체화의 매개로서의 사회주의자 => 올바른 관념없이는 역사도 없다!?
의문)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 않는 데/존재한 적이 없는 데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올바른 전망/개념을 갖는 것은 가능한가?
'사회주의는 전망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운동으로서 자본주의와 함께 모순적 통일체을 구성한다. 우리는 모순적 통일체로서의 이 역사의 시기의 종착지를 사회주의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전망이 불투명해서 못한다 = 적정이윤이 보장이 되지 않아서 투자 안한다> 사회주의는 투기가 아닙니다.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리라 믿습니다.

기인 2007-02-07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동의. 그런데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 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는 판단은 역시 의심이 갑니다. 그렇다면 '전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또는 '전위'라는 주체는 불필요하고, pt가 역사적 운동과정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체의 역할(또는 주체효과)를 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제가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는 '당'이 있습니까?
현 시점이 '전망'이 불투명한 시점이라는 것은 바로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지 못한 시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한 의문을 던지신 것처럼,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도 않았고,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역사적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반성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실패에 대한 (이론적)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반성도 하나의 실천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날고, 철학의 임무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고, 주체는 실천을 통해 구성되지만, 이론 또한 물질화된다는 것. '전진하는 운동'에 따른 새로운 '이론'이 전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그 '이론'이 확고히 없어서 그것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울보님 지적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따로 제 페이퍼에 정리해 두겠습니다. ^^

yoonta 2007-02-07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길게만 쓰면 댓글이 잘 등록이 안되고 있습니다. -_- 짧게 쓰면 이렇게 올라가고..할말이 많은 내용의 글인데

로쟈 2007-02-0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디터로 쓰기'로 해보시죠... 그래도 그런가요?..

yoonta 2007-02-0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마찬가지라는...알라딘에 상담해봐도 원인불명이라는군뇨..ㅜ.ㅜ

푸하 2007-02-0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짧은 글의 무한연쇄를 시도해봐도 괜찮을 듯합니다.^^:

로쟈 2007-02-08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댓글이 아닌 페이퍼를 쓰시는 게 빠를 듯하네요.^^

yoonta 2007-02-0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페이퍼쓰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은 독백처럼 혼자 주절거리다보면 독선에 빠지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완성도의 차원에서는 페이퍼가 더 좋지만 말이죠. 어떤 분은 댓글이 주렁주렁달리는게 싫다고 하시는데 저는 진흙탕속에서 뒹굴게 되더라도 댓글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글이 더 좋더군요.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처 생각치 못했던 생각들도 발견하게 되구요.^^ 근데 문제는 페이퍼도 안올라가네요..-_- 아 근데 어느정도분량까지 올라가는지는 실험안해봤는데 이정도까지는 올라가나보네요.

eEe 2007-02-08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위는 전능하지 않습니다. 저 오래된 미래에 대한 초월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종지부를 찍어야 됩니다. 구시대의 전위는 노동자 국가 건설까지에만 가교를 놓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후의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은 신시대의 주인에게 과제로 남겨놓으면 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이 쉼없는 무한연쇄의 짐을 지고서 지금 이 땅에 '당'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안식일을 기원합니다.

기인 2007-02-08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위가 전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시대의 전위'라고 하신 것이 현시대의 전위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노동자 국가 건설' 자체가 반성되고 새롭게 이론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요? (pt의 정치권력 장악과 국가독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율주의가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떠한 길도 적확한 '전망'으로 제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전혀 상관없이 또 다시 '노동자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것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이론이 재구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현실적으로 실재적으로 '당'이라는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종의 '최종심급' 비슷한 의미에서의 '당' 건설이라고 하며, 또 이는 정세와 과제의 '무한'연쇄 속에서 투쟁-실천의 '무한' 연쇄 속에서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것 뿐이라면! 지구가 둥글고 유한하다는 확신 속에서만이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행위가 유의미하다면, 그 본질적 전제에 관한 반성이 과연 확고히 이루어졌느냐가 의문입니다.
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은 원칙적으로 전진하는 운동에 대한 이론적 반성으로서 이루어지겠는데, 그 '전진하는 운동'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도 포함되는 현정세라는 것입니다.

eEe 2007-02-08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스타일대로 말하겠습니다.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에서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X 같아서 운동하고, 무릅 꿇고 사는니 서사 싸우다 죽겠다는 뒤틀린 심정으로 운동하지, 해방/평등/우리의 아름다운 사회주의 여신을 추앙해서 운동할 수 있을 것 같냐"는 것입니다. 이념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아직도 가진 것이 많아서 못 하는것 아닙니까? 자기가 가진 알량한 것들이랑 죄다 버리고 낮은 곳에 임하소서~ 이 X같은 곳에서 팔뚝질 안하고 살 수 있나...
그리고 노동자국가 권설이란게 뭐 대단한 것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억압받는 자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억압을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강령이야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근데 이 강령이란게 골방에서 책만 파서는 나오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상아탑 안주인들의 ddr에 기대하느니...
아! 소련의 경험에 대한 반성이야 정말이지 중요하죠. 근데 전 91년 이전의 삶, 러시아어, 러시아인, 그들의 고통과 희망에 직접 맞닿아 있는 활동가가 쓴 글이 나오면 읽으렵니다. 2차문헌에서 짜집기한 논문들의 자기재생산을 바라보는 심정이란... 흐미~~

'이루어야 할 상태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미친 해악은 두 가지이다. 첫째 역사는 이 정당하기 그지없는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는 객관주의의 유포. 둘째 이 훌륭하기 그지없는 관념에 많게 세계를 끼어맞추어야 한다는 주관주의의 유포. 역사의 관조자 혹은 절대군주가 되려는 자 환상에서 깨어나소서.

yoonta 2007-02-08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라/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짜집기한 논문들"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쯤은 이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제가보기엔 아직도 님은 한국의 80년대식 맑스레닌주의라는 협소한 시야안에 갖혀계신듯 합니다. 제가 바로 그랬거든요..-_-

eEe 2007-02-08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 스탈린주의 밀수품과 1917년 레닌의 사유를 구분못하는 이가 지금도 있습니까? 전위/당/노동자국가 등 이런 단어들만 나오면 깍~깍~ 소리치며 저기 아직 시체가 걸어다닌다며 질색하는 분들. 한 번 세상 엎어보세요. 그러면 믿어줄게요.

80년대 값싼 낭만으로 어쩌구저쩌구 주변에서 맴돌던 이들. 당신들이 반 푼어치의 값싼 입으로 '동지'라 불렀던 어떤 이들이 수인이 되어서도 꺾지 않았던, 그리고 지금도 키워나가고 있는 그 신념에 발언할 자격이 있습니까?

로자님의 서재를 별 시덥잖은 말들로 어지럽혀 미안합니다.

로쟈 2007-02-0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말씀을. 한데, 견적상 댓글로 카바될 수 있는 말씀들이 아닐 듯한데요.^^

기인 2007-02-0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말씀에 동의 ^^; 처음의 논점과는 다른 부분으로 많이 나아갔지만, 분명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제가 절박한 노동자의 상황에서 비정규직 투쟁이나 생존권 투쟁에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상황이라서 (꾿꾿하게 공익월급 받아가며 사교육으로 연명하며 자기변명하고 있는 학삐리!라는 상황) 전망이다 뭐다, 고민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저와같은 '계급'의 사람들이 한때나마 노동자 중심주의와 pt독재를 믿었던 사람들이 요즘 전반적으로 회의하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으로서 노동자 계급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속 되풀이되는 논점이지만,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pt독재, 공산주의, 꼬뮨,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 내용이 소련에 대한 반성으로 채워지거나, 적어도 어떤 길은 '아닌지'를 과거 잘못된 길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통해서 반성되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물론 확고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저술과 블루 프린트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닫힌 체계로서, 목적론적으로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것의 폭력성과 실패(즉 교조적 맑시즘)로부터 우리는 배운것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앞으로의 전진하는 운동을 통해서 이론이 조직화되는 것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계속 돌아오는 지점은,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아니라. 지금의 맑스와 레닌 말입니다. 제 의문점이 어느정도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도 레닌의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는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 '스탈린'이라는 지점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럼 스탈린은 사회주의 외부에서 나온 괴물입니까? 스탈린에 의해 조성된 그리고 그가 '발명한' 여러 것들은 비-사회주의라고 처단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탈린이라는 괴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레닌주의 안에 분명 있었고, 스탈린주의도 그렇게 쉽게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스탈린 이후, 지금 소련은 당연히 부정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실패를 말미암은 '원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일국-사회주의의 한계이든, 치졸하게는 서방넘들의 압박이든 간에. 그러기에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처럼 91년 이전 러시아 활동가의 글이 나오면 읽게다라고 하셨는데, 저도 읽고 싶습니다. 도대체 러시아는 무엇이었는지. 이것이 해결이 안 되면, '팔뚝질'은 하나의 상황에 대처하는, 또는 '조직'의 판단에 따르는 일 밖에 더 되겠습니까?

yoonta 2007-02-0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라/ 당시에도 스탈린은 취급도 안해줬습니다. 주 텍스트는 레닌저작집과 MEW같은 것들었죠. 모르긴 몰라도 님보다는 제가 접한 맑스레닌 저작들이 더 많을걸요? 그리고 위에처럼 말씀 격하게 하시는것보니 제가 무슨 코리아혁명의 배신자쯤으로 보이시나보네요.? 님같은 분들이 과거에도 있었죠. 그런 분들이 소위 혁명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동료사회주의자들을 학살하곤 했었죠..한마디만 더하면 세상은 "한번 엎"는 것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님에게 하려는 이야기는 결국 이겁니다.

eEe 2007-02-09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스트적 동질감... 자본주의 모순이 여전히 '그'의 문제이고 운동이 '그'의 고통에 공감해야 할 문제인가요. '그'의 해방없이는 '나'의 해방이 없다는 인식이 심장을 뛰게합니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나의 해방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기인님의 대안에 대한 사유가 올곧은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이라면 이 엄혹한 시기에 뜻있는 동지를 만난듯 기쁨니다. 그렇지만 그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열심히 하세요. 불편한 글에 인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yoonta/ 동료사회주의자를 학살하고 학살당했던 시대를 체험한 듯 말하네요... 몇마디 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낭만, ~주의, 학살자로 규정짓는 것 또한 학살의 인터넷버전이라고 생각되네요. 우리는 어쩌면 그토록 미워하며 깔보는 스탈린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요즘같이 칠흑같은 시기에 눈 막고 귀 막고서 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 반성과 성찰의 터널을 통과했으리라는 착각은 착각일 뿐이죠.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수많은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해지고 있는 '말'들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이 근거에 접속해 보시겠습니까?
(80년대 그것들을 읽으셨으니 일어는 정말 잘하시겠네요^^)

yoonta 2007-02-0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런사람(학살한사람) 없다...라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원래 그런겁니다. 소위 레닌주의란게. 줄줄이 읊어드릴 생각 없고 또 그러지도 못하니 역사책 좀 보세요. "짜집기 논문"이라고 비아냥거리기 이전에 기본 소양은 익히셔야죠. 그리고 기본 매너하고.."몇마디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주의"자로 규정한것은 누가먼저인지 위 댓글들을 다시한번 읽어보시길.

eEe 2007-02-10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 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을 정리해서 올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럼 거기에 제가 가능한 한 성심껏 답하겠습니다.
저도 학교라는 공간에 거주하고 있을 때에는 반-레닌주의자였습니다. 자율적인 활동가들의 동등한 관계맺기를 기획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몸에 쓰여지고 있는 세계는 점점 "강고한 규율의 당을 달라"는 목소리를 높여 가고 있습니다.
님은 협업에 의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을 칭송해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협업을 왜 거부합니까? 적의 압도적인 힘을 체험하고 있노라면 전 감히 이러한 거부에 대해 이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은 집단적 협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집단적 '노동'은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향유하는 공동노동이기도 합니다. 이 공동노동은 규율없이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동지들의 노동의 축적물/공동의 노동수단을 제 실책으로 소진시켜서는 안 된다는, 제한된 역량을 집중해서 돌파해야 된다는 최소의 조직적 책임을 규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평가받고 제 역량에 맞추어 알맞은 위치에서 활동하는 것. 전 이것을 규율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러한 규율에 대해 억압이라고 낙인찍을 것입니까?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제가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에 있기 위해서 전 이 억압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자유로운, 너무나 자유로운 그러나 무력한, 너무나 무력한 개인이기를 거부하겠습니다. 전 개인이기보다 '지도'받는 인자가 실상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쓰여지지 않은 세계가 너무나 광할합니다. 글로 세계를 인식하기에 앞서, 그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인 2007-02-10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라님/ 저도 그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이 아니라, 이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의 해방 속의 '나'의, '우리'의 해방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지점은 저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우리'의 해방의 궁극적 길이 아닌, 그 '매개'단계 내지는 방법론이 반성되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죠. 울라님과 대화하면서 내 고민이 '형이상학적' 이었는지 자문해보기도 합니다. 문제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라면, 이 지점부터 즉 '어떻게 변혁시킬 것이고' '변혁을 하려면 나의 세계관은 어때야 하는가' 부터 사유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천의 문제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실제 (어쨌든) 성공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역사적 반성과 '함께' 우리는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그것 자체가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씀처럼 이것이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지가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천적 고민이냐, 형이상학적 고민이냐, 변증법적 사유냐, (소부르주아적) 합리주의적 사유냐를 가르는 것이 그 지점이 되겠지요. 기본적으로 제 입장은, 제 고민 또한 나름의 '실천'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고민'후 '행동'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외 활동으로는 모 단체의 당비나 또 다른 모 단체의 후원금 정도로 자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고민이 하나의 '지도력'이 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인 2007-02-10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지만, 아직 80년 이후의 서구 맑시즘의 기본 문제틀 자체도 따라가기 벅찰지경이라서, 어떻게 하면 적어도 '내'가 확신을 갖고, '우리'로 확장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수준이죠;;

기인 2007-02-1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으로 제 생각을 정리하자면, 구조주의적으로 '주체' 물음을 주체를 발생시키는 호명하는 힘의 문제로 변신(?)시키더라도 그 '구조'가 '주체'의 자리를 대체할 뿐이 아닌가하는 문제로 나아가고, 여기서부터 탈구조주의자들에게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할터이지만, 저는 아직 어떠한 확신도 없습니다. 계속 고민을 하면서도 현정세와 '현재'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음은 물론이죠. 힘듭니다. 여기까지 페이퍼에 정리해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