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타계한 러시아의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수제자로 잘 알려진 첼리스트 장한나의 '책과 인생'을 옮겨온다(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06912 참조). 12살때 스승의 부인 갈리나의 권유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그런 권유를 건넨 사람이나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사람이나 아무튼 놀랍다. 초등학교 5-6학년 때가 아닌가(아마도 그맘때라면 나는 <삼국지> 같은 걸 읽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다. 영어도 마스터하고 통찰력과 표현력도 길렀다지 않는가. <죄와 벌>도 읽기 힘들어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좀 각성할 일이다.

경향신문(07. 06. 16) 12살때 읽은 영문판 '백치'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으면 너의 마음이 열릴 것이다." 지난 4월 타계하신 나의 스승 로스트로포비치 선생님의 부인 갈리나가 해준 말이다. 그때 난 열두살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인가. 세계 동화 전집 등을 통해 독서를 너무나도 좋아하게 됐다. 등장 인물들의 다양한 성격,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들의 흥미진진한 삶, 그리고 정의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동화 속 세상에 푹 빠졌다.

재미있는 책을 잡으면 밥 먹을 때는 물론, 첼로 연습 시간에도 읽기를 중단하기 힘들어 발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기도 했다. 처음 읽는 책에서 긴장과 스릴을 느꼈다면, 다시 읽는 책에서는 이야기 속 의미들을 찾고 즐기는 맛을 알게 됐다. 뉴욕으로 건너갔을 때 열 살이었던 나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공립학교의 ESL 프로그램은 체계적인 영어 공부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12세부터 다닌 사립학교에는 그나마도 없었다.

11세 때 파리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만난 갈리나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영어판 <백치>를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12세 소녀에게 <백치>를 권한 갈리나도, 그 말 한마디에 바로 <백치>를 읽은 나도 참 순수했던 것 같다. 인생을 바꾸는 힘이 책 안에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 게 아닐까 싶다.

만일 지금 내가 12세 어린이에게 책을 권해야 한다면 <백치> <안나 카레니나> <파우스트> 같은 명작을 권하기 전에 여러 번 생각할 것 같다.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작품의 위대함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도 내가 느낄 수 있는 만큼만 느끼고 이해하듯이, 어린이도 나름대로 어떤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런 명작들은 독자의 그릇 크기에 관계없이 어떤 충격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런 충격을 통해 나의 그릇이 성장하고, 그 책을 다시 읽거나 다른 책을 읽었을 때 더 큰 감동을 받는 것이다.

서툰 영어로 <백치>를 읽은 후 과연 내 마음이 열렸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 때부터 거대하고 복잡한 사연들이 많은 러시아 문학에 반해서 톨스토이,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순수문학, 그리고 소설이란 장르에 빠져 영국, 프랑스, 독일 문학으로 폭을 넓혔다. 내용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단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문장의 형태부터 표현력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영어의 비밀을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고등학교 무렵에는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으며 에세이를 제출할 만큼 영어 실력이 늘었다.

독서를 통해 영어를 쉽고 즐겁게 마스터했을 뿐 아니라 통찰력과 표현력을 기르는 데도 더 없이 좋은 훈련이 됐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와 표현은 언어 자체의 폭에 비해 너무나도 좁다. 표현력이 좁은 만큼 우리의 생각도 단순해지는 건 아닐까. 책을 통해 언어의 풍요로움을 접한다면 우리의 시각이 더욱 넓어지고 성장하리라 믿는다. 또 이런 과정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지름길을 찾게 되리라 믿는다.(장한나)

07.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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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인간 2007-06-16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을 '만국의 언어'라고 정의한 속설에 따르자면, 음악의 신동인 장한나는 결국 어학의 신동이 되는 것이겠지요. ^^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거의 25년이 되어 가도 영어 소설 하나 읽기가 버거운 저로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위로가 됩니다. 쿨럭~ ^^

로쟈 2007-06-1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영어를 잘 하려면 먼저 첼로를 배워야겠습니다...

수유 2007-06-16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영특한 이미지가 어려서부터의 독서에서 왔군요. 저도 요즘 조카에게 다소 두꺼운 책들을 사주고 있는데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하더라도 격려를 해주렵니다. :)

작은앵초꽃 2007-06-1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또 어떻게 성장할까 늘 기대되는 첼리스트에요.
그나저나 저 너무나도 많은 영어의 비밀이라는 것, 저도 몇 개 알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네요 ^^
 

러시아의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 오페라단이 내한 공연을 갖는다. 기간은 이달말부터 내달 7일까지이고 장소는 고양 아람누리 아람극장이다. 공연 소식은 이달초에 접했는데, 자세한 일정은 오늘자 기사를 보고서 알았다. 변수들이 있긴 하지만 한편 정도는 관람하면 좋겠다.

이번에 내한 공연을 갖는 극단은 '스타니슬라프스키'(혹은 스타니슬랍스키)란 이름을 갖고 있는데 군말이 필요없는 러시아의 저명한 연극 연출가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라프스키(1863-1938)를 가리킨다. 그는 지난 19세기말과 20세기초 러시아 최고의 연출가였으며 안톤 체호프의 여러 작품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린 바 있다. 그의 연출론은 이미 국내에 다수 번역/소개돼 있으며(소위 '메소드 연기론'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자서전 <나의 예술인생>(이론과실천, 2000) 또한 나온 지 오래이다. 겸사겸사 러시아 공연문화의 정수를 감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한겨레(07. 06. 15) 나이트가운 입은 금발의 ‘카르멘’이 왔다

치렁치렁한 긴 검은 머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정열적인 집시 여인이 금발 단발머리에 아슬아슬한 은색 나이트가운 차림의 도발적인 신세대 여성으로 파격적인 변신을 한다. 볼쇼이극장과 마린스키극장과 더불어 러시아 공연예술의 중심축으로 꼽히는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 오페라단이 오페라 <카르멘>을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으로 해석해 1999년 초연한 작품의 여주인공 모습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 오페라단이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오페라하우스)에서 ‘고양아람누리 개관 예술제’ 하이라이트를 꾸민다. 스타니슬라프스키 극장은 20세기 사실주의 연극 이론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 러시아의 배우 겸 연출가, 제작자인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라프스키(1863~1938)의 의지를 60년 넘게 지켜오며 혁신적인 무대작품을 꾸준히 올리는 공연예술센터다. 이번에 방한하는 공연단은 오페라단을 비롯해 합창단, 발레단, 오케스트라, 무용단 등 210여명에 이른다.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이 선보이는 오페라는 비제의 <카르멘>(6월28~30일)과 차이코프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7월5~7일) 등 두 작품이다. <카르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의 걸작으로 국내에서도 한해 최소 2~3차례는 무대에 오르는 인기 작품이지만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은 ‘이제까지의 <카르멘>은 잊어라’고 요구한다. 집시 여인 카르멘이 신세대 여성으로 변신하는 등 배역 해석부터 파격적이다. 또한 대부분 기존 오페라들이 화려한 세트와 의상의 시각적인 부분, 그리고 가창력과 연관되는 청각적인 부분에 집중하는 데 견줘 스타니슬라프스키식 카르멘은 배우(성악가)들이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섬세한 내면 연기가 도드라진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지난 2000년 볼쇼이극장이 국내에 첫선을 보였으나 자주 접할 수 있는 오페라는 아니다. 차이코프스키는 1890년 동생 모데스트가 푸시킨의 소설을 토대로 쓴 오페라 대본을 읽고 44일 만에 3막짜리 <스페이드의 여왕>을 완성했다. 부귀와 명예를 찾아 도박에 빠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허망한 인생의 최후를 다룬다.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의 <스페이드의 여왕>은 지난 20여년간 극장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레프 미하일로프가 성악가들에게 심리적인 연기 부분을 강조해 해석한 버전으로 1976년 초연됐다. 이번 공연에서는 현 예술감독인 알렉산드르 티텔이 연출을 맡아 레프 미하일로프의 해석에 자신의 새로운 스타일을 더해 <카르멘>과 함께 첫 외국나들이에 나선다. 알렉산드르 티텔은 함께 내한하는 노지휘자 볼프 고렐리크(74)와 함께 러시아 정부로부터 인민예술가 지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볼쇼이극장 오페라단 주역 가수로 활동했던 손성래(39) 서울종합예술원 외래 교수는 “모스크바에서 스타니슬라프스키극장이 공연한 <카르멘>과 <스페이드의 여왕>을 자주 봤는데 작품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많아 독특한 공연 경험을 맛볼 것이다”라며 “앞으로 한-러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져 수준 높은 공연이 꾸준히 소개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연단은 특별공연으로 1일에는 노루목 야외극장에서 ‘러시아 음악의 밤’(전석 무료), 2일에는 아람음악당에서 ‘오페라 갈라 콘서트’도 연다.(정상영 기자)

07. 06. 15.

P.S. 참고로, 오페라 <카르멘>보다는 덜 알려진 <스페이드의 여왕>의 공연 시놉시스를 옮겨놓는다(나는 예전에 영국에서 공연된 작품을 DVD로 본 적이 있다). 아래에는 주인공이 '헤르만'이라고 표기돼 있는데 영어식 표기이며 러시아 이름은 '게르만'이다. 그리고 결말은 주인공의 자살로 돼 있지만 푸슈킨의 원작에서는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오페라 외에 이 작품은 러시아와 영어권에서 여러 차례 영화화된 바 있다.   

 

제1막
1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정원
여름철의 정원, 태양은 빛나고 유모가 어린아이를 재우고 있다. 꼬마들은 군대놀이를 하고 있다. 헤르만은 그의 친구인 톰스키 백작(바리톤)에게 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때 헤르만이 사랑하는 바로 그 여자 리자(소프라노)의 약혼자인 에레츠키 공을 만나 2중창으로 감정의 평행선을 긋고 뒤이어 정원에 리자와 그녀의 조모 백작부인(메조소프라노)이 나타난다. 톰스키는 헤르만에게 백작부인이 젊었을 때 대단한 도박꾼이었고 미녀여서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매혹되었다고 이야기해준다. 그 남자들 중 한 명이 백작부인에게 도박에서 반드시 등장할 수 있는 ‘3장의 카드의 비밀'을 가르쳐 주었고 그 후 그녀는 그 비밀을 다른 두 명의 남자에게 전했다. 그러나 꿈속에서 만약 그 비밀을 제3의 사나이에게 전하려고 하면자신이 죽게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헤르만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암울한 운명을 느끼며 리자에 대한 사랑의 의지를 다진다.

2장: 리자의 방
조용한 저녁. 백작부인의 저택 리자의 방. 리자는 친구들과 함께 쓸쓸한 자신의 심정과 애수를 노래한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즐거운 러시아 민속무용을 노래하며 춤추다 가정교사에게 들켜 일단 소동은 가라앉는다. 쫓겨 나간 친구들을 뒤로하고 혼자 남은 리자는 는 집요하게 다가오는 헤르만의 형상에 안타까워한다. 그때 갑자기 나무 그늘에서 나타난 헤르만. 발코니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의 아리아를 부르며 서로의 애틋한 사랑을 확인한다.

제2막
제1장 : 화려한 무도회장
어느 귀족의 가면무도회장. 헤르만과 리자는 무도회에서 만나고 그녀는 헤르만에게 백작부인의 방 열쇠를 건네준다. 3장의 승리의 카드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다짐하는 헤르만.



제2장 : 백작 부인의 침실, 늦은 밤
백작부인의 침실. 헤르만은 백작부인의 방에 몰래 들어가 3장의 카드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간청한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권총으로 그녀를 협박하고 그녀는 공포에 질려 숨을 거둔다. 리자가 그 자리에 들어와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카드의 비밀이었군요” 라고 말하며 절망적으로 외친다.

제3막
제1장 : 막사의 헤르만의 방
헤르만은 테이블에 앉아 리자의 편지를 읽고 있다. 죄책감과 아쉬움에 어쩔 줄 모르는 헤르만 앞에 백작부인의 망령이 음산한 음악과 함께 나타난다. (3, 7, 에이스) 라는 카드의 비밀을 가르쳐주고 리자와의 결혼을 요구하며 떠나는 망령. 게르만은 넋을 잃고 망령의 말을 반복한다.

제2장 : 한방의 강둑
짐니 운하의 기슭. 리자는 슬픈 아리아를 부르며 게르만을 기다린다. 뒤이어 나타난 헤르만과 함께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만 헤르만은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 3장의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도박장에 가겠다고 하는 헤르만. 그에게 밀쳐진 리자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제3장 : 도박장
시끄러운 소음과 노래들. 헤르만이 나타나 테이블에 앉는다. 3장의 카드의 비밀을 사용해 2번을 내리 이기는 헤르만. 마지막 큰 승부의 상대는 연적 에레츠키 공. 마지막 카드 에이스로 승부를 내려는 게르만에게 주어진 카드는 에이스가 아니라 스페이드 퀸. 게르만은 그 스페이드 퀸에서 백작부인의 망령을 보고 그 자리에서 자살하며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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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7-06-15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싸서 다 보지는 못하겠고, <스페이드의 여왕> 정도는 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6-1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빙고입니다.^^

수유 2007-06-1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은 아주아주 멀군요. 외삼촌댁이 있긴 하지만.. 놀토도 아니고. 그나저나 저 이파리는 깻잎? 아님 수국 이파리일까요? 열 때마다 녹색의 하늘과 이파리가 시원합니다.

로쟈 2007-06-1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겐 더 멀지요.--; 그리고 이파리는 깻잎이란 설이 있지만 깻잎은 아니고 비슷한 종류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모스크바대학 산책로에 널려 있었는데 깻잎인 줄 알고 따먹으려고 했지만 먹는 건 아니라더군요...

sophie 2009-12-07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나 하고 검색해봤는데 스페이드의 여왕이 있네요. 저번에 <보리스 고두노프>는 짤즈부르그에서 상연된 비디오 클립으로 봤는데 무대며 코러스 신에서 나오는 러시아 전통민요, 주인공 보리스 고두노프, 사제 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주에도 역시 푸쉬킨의 작품이네요. 선생님이 푸쉬킨을 무척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이번 주엔 빠질까 했는데 아무래도 가게 될 것 같아요. 공연 시놉시스 고맙습니다. ^^
 

레디앙에서 이샤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애플북스, 2007)에 대한 리뷰 하나를 옮겨놓는다. 나는 책이 나오자 마자 원서와 함께 대조해 가면 절반쯤 읽었더랬다. 그 이상은 다른 일들에 치어 잠시 미뤄졌는데, 번역돼 나온 것이 반갑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좀 무성의한 대목들이 자주 눈에 띄는 번역서이다. 항상 사정권 안에 있던 책이 당장 눈에 띄지 않아서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지적하기로 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하여'란 부제대로 책은 일단 톨스토이와 그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고급스런 에세이로 읽혀야 한다. 무슨 경영서나 처세서로 포장한 출판사측의 '기획'에 대해서는 거듭 유감을 표하고 싶다(그런다고 책이 더 팔리지도 않는다). 아래 리뷰 또한 그런 지적을 포함하고 있다.    

레디앙(07. 06. 09) "톨스토이, 고슴도치라 생각한 여우"

인간은 크게 보면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핵심적인 비전, 즉 명료하고 일관된 하나의 시스템에 관련시키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이런 시스템은 모든 것을 조직시키는 하나의 보편 원리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시스템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느낀다. 다른 한 부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 목표들은 흔히 서로 관계가 없으며 때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물론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이유에서 사실적인 관계를 갖지만 도덕적이고 미학적 원리에 근거한 관계는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고 행동지향적이며, 생각의 방향을 좁혀가기보다는 확산시키는 경향을 띤다.”(p.7~8)

이사야 벌린, 우리에게는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로 잘 알려진 저자는 전자를 고슴도치형 인간, 후자를 여우형 인간이라고 명명한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 단테, 파스칼, 헤겔,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입센, 프루스트가 고슴도치형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몽테뉴, 에라스무스, 몰리에르, 괴테, 푸슈킨, 발자크, 조이스는 여우형이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이사야 벌린은 이 질문으로 『고슴도치와 여우』를 시작한다. 곧 “톨스토이가 일원론자인지 다원론자인지, 결국 톨스토이가 하나의 비전을 추구했는지 다양한 비전을 추구했는지”(p.11)를 묻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의 작품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과 평화』를 텍스트로 삼는다. 『전쟁과 평화』는 문학적 작품성은 높지만 작가의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언설이 결정적인 흠으로 지적되는 작품이다. 곧 톨스토이의 장점과 단점이 다 담겨져 있는 셈이다. “젊은 지식인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특징답게 설익은 지식으로 가르치려는 (그 결과로 예술적 가치를 손상시키는) 톨스토이의 성향 탓…중략…일탈의 전형적인 예” “톨스토이가 훌륭한 사상가라기보다 훌륭한 작가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이다” 등등.(p.19) 하지만 이사야 벌린은 접근을 조금 달리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왜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전쟁과 평화』를 톨스토이의 진정한 작품으로 말하고자 한다. 결론을 줄여 말한다면, 톨스토이는 스스로를 고슴도치라고 믿었던 여우다. 근원적인 질문에 근원적인 대답을 원했지만 그 질문과 대답은 늘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인 것들 속에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톨스토이의 모습을 한낱 한계라는 짧은 단어로 규정해 버리면 안 된다. 그것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작가의 정직함이자 성실함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자아와 세계를 묻지 않는 작가가 그 얼마나 많은가?

“톨스토이 식으로 말하면 삶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구성 요소인 ‘생각, 지식, 시, 음악, 사랑, 우정, 증오, 열정’을 기록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할까?”(p.45)

그렇다면 톨스토이를 “여우냐 고슴도치냐”라고 묻는 이사야 벌린 자신은 여우일까 고슴도치일까? 책을 번역한 강주헌은 “전통적인 자유주의 지지자였으며, 다원주의를 신봉했다. 사회를 조직하는 문제에 단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라는 벌린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며 “여우형에 가깝다”라고 평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 책 『고슴도치와 여우』는 어떤 유형의 책일까? 책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색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방어형의 고슴도치 경영과 공격형인 여우 경영이 적절히 조화되어야 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말씀이시다. 이건희의 멘트가 등장하니 경제경영서? 띠지 뒤쪽에는 “당신은 여우로 살 것인가 아니면, 고슴도치로 살 것인가? 이 책은 톨스토이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당신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쯤이면 자기계발서가 될 노릇이다.

한마디로 『고슴도치와 여우』는 겉과 속이 다르게 포장된 책이다. 카피문구나 책의 장정과 편집 스타일은 경제경영이나 자기계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지만 그 속 내용은 톨스토이라는 대작가의 역사관과 내면을 짧지만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는 인문서이기 때문이다. 상술이 본질을 압도하고 있음이다. 형식이 내용을 앞지른다. 그것이 책을 읽는 내내 가시가 되어 찌른다. 자본주의라는 고슴도치가 여우를 찌른다.(김용필/ 텍스트)

07.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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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인연'을 갖고 있고 강의에서도 자주 다루게 된다. 이번 학기에는 특히나 오랫동안 자세히 읽기를 시도했는데, 그렇다고 아직 연구서 한권 낼 만한 형편은 안되기에(석달 정도의 자유시간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읽을 거리들을 참고자료로 제시하곤 한다. 가장 최근 자료로 참고할 만한 것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저자 김용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통해서 본 ‘죄’와 ‘벌’의 의미'로 얼마전 한겨레에 2회 걸쳐서 분재됐다. 아마도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의 속편에 포함될 듯하다.

 

한겨레(07. 05. 19) 인간의 경계 뛰어넘은 ‘자만의 죄’ 고발

1849년 12월 22일, 러시아 세묘노프스키 광장에서는 사형이 집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의 특사가 내려 사형 직전의 한 청년이 살아났다. 그는 시베리아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져 4년간 혹독한 강제노동을 했다. 간질발작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날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청년이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의 신념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히기 전, 청년은 무신론적 사회주의자과 어울렸다. 그들과 함께 황제를 모독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왠지 사회개혁을 위해 무릎을 세우고 일어서는 혁명가들보다 쓰러진 자들을 일으키려고 허리를 굽히는 사람들이 더 선하게 여겨졌다. 이성과 과학을 숭배하는 합리적 지식인들보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바보 같은 민중들이 더 지혜롭게 생각되었다. 그는 그 이유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청년은 소설가였다. 그래서 남은 생애동안 바로 이 문제, 오직 이 문제와 싸우며 글을 썼다. 그 결과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청년의 이름이 도스토예프스키이고, 바로 그 문제를 다룬 첫 장편소설이 <죄와 벌>이다.

이제부터 ‘죄’와 ‘벌’ 둘로 나누어 살펴볼 이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사는 법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우연히 알게 된 창녀 소냐의 권고를 받아 자수하게 된다는 게 전부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불후의 명작이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심리학자들마저 격찬할 만큼 뛰어나게 인간의 심리를 그려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죄와 벌이 과연 무엇인가를 신학자들마저 경탄할 만큼 심오하게 파헤쳐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우선 죄를 보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인이다. 이견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왜 죄인인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고 이 다른 생각이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 이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인가 보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리적 억압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인 모출스키의 주장처럼,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무더운 날씨,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돌보지 못하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분명 그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을까? 아니다. 더 중요한 동기가 따로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가 나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자신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끔 학비로 사용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와 같이 <비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솔로몬과 마호메트, 그리고 나폴레옹을 예로 들어 자기를 정당화했다. 이들이 그랬듯이 새로운 사회와 법률을 위해서는 낡은 것들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이 당연히 허용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점 죄의식조차 없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했다. ‘초인사상’으로 일컬어지는 이런 생각을 도스토예프스키는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이 이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범죄 이전의 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사실인즉 <죄와 벌>을 썼다.

그는 ‘범죄 이전의 죄’라는 개념을 기독교 종파인 러시아 정교에서 얻었다. <구약 성서>에 서 아담은 뱀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따먹었다. 그리고 죄인이 되어 낙원에서 쫓겨났다. 원인은 “하나님같이 되리라”였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자만’이라고 부른다. 자만이 곧 ‘범죄 이전의 죄’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진 죄가 바로 이것이다.

<죄와 벌>에서 ‘죄’라는 의미로 사용된 러시아어 ‘prestuplenie’는 본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단어를 ‘법률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경우 그의 죄에는 죄의식이 없다. 그의 이성이 모든 것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이 무참한 죄를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고발하고 또 경고했다. 그런데 돌아보자. 우리가 그로부터 과연 무엇인가 배웠는가를. 20세기 들어 수백만 명을 학살한 독일 나치나 러시아 공산당이 어땠는가를. 그리고 생각해보자. 21세기인 오늘날에는 이처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를.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 없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한겨레(07. 06. 02) 죽음보다 끔찍한 벌 벗는 길은 희생

<죄와 벌>은 죄보다 벌에 관한 작품이다. 분량만 보아도 그렇다.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모두 7부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죄는 1부에 다 드러난다. 나머지는 모두 지옥 같은 벌에 대한 설명이다. “단테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지옥의 모든 단계를 통과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모출스키의 말이다. 돌아보자. 죄가 무엇이었는지. 그래야 벌을 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는 자만이었다. 그것은 원초적 죄로서 모든 악행과 범죄가 여기에서 나온다. 기독교적 사변이다. 그럼 벌은 무엇인가? <구약성서>에서 신은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벌로 “정녕 죽으리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막상 선악과를 따먹자 죽이지 않았다. 추방했다. 그럼 성서는 처음부터 신의 거짓말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생명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죽음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빛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어둠에 속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진리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거짓에 서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선함이다. 따라서 그로부터의 추방은 곧 악함에 머무는 것이다. 신은 이러한 벌들로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켰다. 이것이 성서에 나오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던 벌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에서 총 6부에 걸쳐 고발한 그 벌이다. 모출스키가 <신곡>의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는 그 지옥 체험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받은 바로 그 벌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벌을 살인이라는 범죄로, 그 범죄에서 오는 심리적 어둠으로, 그 범죄를 숨기려는 거짓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악행을 차례로 체험함으로써 받았다. 그것이 얼마나 무겁고 괴로운지를,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지옥 체험인지를, 오직 그것만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백 쪽에 걸쳐 묘사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수를 한 것은 결코 양심의 가책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괴로워한 것은 단지 악을 체험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 때문이었다.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 때문이었다. 이 벌의 성격을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도망가면 어쩌죠?”라고 묻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넨 도망가지 않을 거야. (…) 자네가 도망간다 해도 아마 스스로 되돌아올걸? 자넨 우리 없이 지낼 수 없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단지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차라리 자수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에는 같은 벌을 받는 인물이 하나 더 등장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다른 악의 짝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사회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지었다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유주의 이상을 내세워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죄를 짓는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기 부인을 살해하고, 하인을 학대하여 자살하게 하고, 14살 어린 소녀를 능욕하여 자살하게 했다. 그의 범죄는 개인적인 정욕과 쾌락에서 나왔다. 범죄 동기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르지만, 원인은 같다. 그에게도 욕망과 쾌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있었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개인적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든, 사회적 이익과 개혁을 위해서든,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자만이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지옥에 갇힌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라스콜리니코프는 차라리 수용소에 가려고 자수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쏘았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미국에 가기 위해서야”였다.

그렇다면 이 죄와 그 벌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가? 있다. 의외로 간단하다. 자만이 원인이면 겸손이 해법이다. 날 세운 이성이 원인이면 바보 같은 신앙이 해법이다. 타인 희생이 원인이면 자기 희생이 해법이다. 창녀 소냐가 그 일을 맡았다. 그녀는 비참하게 살아가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며 자기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인간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를 ‘유로지비’라고 불렀다. 러시아 정교에서 ‘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죽은 나무에 수년 동안 물을 길어다 부어 마침내 어느 날 푸른 잎을 피워낸 어떤 수도사를 일컬은 말이다. 눈뜬 이기주의와 눈 먼 합리주의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성스러운 자유를 가졌던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소냐가 바로 그다. 소냐는 이 방법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구했다.

그럼 생각해보자. 오늘을 사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누군가를. 그리고 우리가 속한 시대와 사회를 구할 진정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자.(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07. 06. 09.

P.S. '유로지비'는 '성스러운 바보'를 뜻하지만 작품에서는 문맥상 '광신도', 곧 '신에 미친 여자'란 뜻도 내포한다.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를 대립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형식논리적이며 이 작품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이 있다. '날 세운 이성'뿐만 아니라 '바보 같은 신앙' 또한 인류사에서 많은 죄의 근원이지 않았던가. 이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물론 '새로운 이야기'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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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 2007-06-1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처럼 주 독자층을 청소년으로 생각하고 쓴 글이라 구도가 좀 더 단순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자"도 같은 맥락일 것 같고요.^^

로쟈 2007-06-11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층에 대한 고려도 있겠도 분량 제한도 있겠지요. 한데, 모든 해설이 갖는 함정이지만 작품읽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어서요...
 
왕가위와 레르몬토프

러시아 시인 레르몬토프의 시에 곡을 붙인 '나 홀로 길을 나선다'를 그냥 흥얼거리다가 문득 예전 모스크바 통신에서 '레르몬토프의 고독'이란 페이퍼만 유독 정리해놓지 않은 걸 알게 됐다(이것도 그의 고독에 대한 배려였을까?). 바쁠 때일수록 이렇게 딴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의 고독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놓는다(모스크바통신에서는 푸슈킨 시와의 비교도 다루었었는데 그건 생략하도록 한다). 참고로,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는 링크해놓은 '왕가위와 레르몬토프'를 참조하실 수 있다. 러시아 가수 올렉 포구진이 부르는 노래는 http://www.youtube.com/watch?v=DcNMQIT-FCo 에서 들어보실 수 있고(예전에 국내 드라마에서는 여자가수가 부른 버전이 주제가로 쓰였었다).

 

지난번 통신문에서 레르몬토프의 마지막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대해서 몇 마디 언급했는데, 나는 이 50번째 통신문에서도 그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유리 미하일로비치 레르몬토프(1814-1841)에 대해서 말이다. 푸슈킨에게서는 기념비란 테마가 시인 자신에게서조차 주제화되며, 그의 예언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탄생 100주년(1899), 사망 100주년(1937), 탄생 200주년(1999) 등이 매번 성대하게 치러진 반면에, 고독의 시인 레르몬토프는 그의 문학적 유언(<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걸맞게 언제나 혼자였다(*이 시마저도 종종 푸슈킨의 시로 오해받는다고 한다!)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던 1914년에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사망 100주년이 되던 1941년엔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2차대전은 1939년에 발발하지만,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던 독일의 공격을 받고 나서야 뒤늦게 비로소 참전한다). 해서, 러시아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시인/작가이자 러시아 낭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국 러시아에서 한번도 제대로 기념되지 못했다(그의 지명도에 비추어보면, 거의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리고 올해(*2004년)는 그의 탄생 19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역시나 그와 관련된 행사들은 (내가 아는 한) 치러지지 않았다(체홉 사망 100주년에 묻혀서). 그저 문학신문의 기념 기사 한 자락 정도.

하다못해 2주전 일요일에는 그의 탄생 190주년을 기념하여 대표작인 <우리시대의 영웅>(1964) 등이 문화채널에서 영화로 방송됐지만, 그날 따라 나는 저녁 늦게야 TV프로그램을 확인했다(그의 탄생일은 1814 10 3일이다. 2일 밤인데, 보통 3일로 기록한다. 이게 구력일 것이기 때문에, 지난 17일이 신력에 따른 생일이었을 것이다. 결투로 인한 사망은 1841 7 15.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개죽음이로군!이라고 간단히 언급했다. 한편 최초의 레르몬토프 전기는 파벨 비스코바트이의 것이며 1891년에 나왔다. 이 책은 올해 재출간됐다). 나는 레르몬토프를 전공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쳐버린 일이 한동안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사실 그에 대한 본의 아닌 홀대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의 조국 한국에서는 레르몬토프를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지난 1999년에 전집이 간행된 푸슈킨과 다르게 그나마 우리말로 번역/출간된 레르몬토프의 시집과 소설 <우리시대의 영웅>(한길사, 조선대출판부)은 진작에 품절되었다(<우리시대의 영웅>은 영어 중역본도 나와 있었지만 역시 품절. 참고로 영역본 <우리시대의 영웅>은 나보코프가 그의 아들과 함께 옮긴 것이다). 그의 드라마 <가면무도회> <러시아희곡1>(열린책들)에 들어가 있지만, 이 책 또한 품절인 걸로 안다(그의 <가면무도회>는 지금도 모스크바의 무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이번 시즌에 포킨이 연출한 고골의 <외투>와 함께 내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레퍼토리이다).

 

해서, 아마도 당장에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레르몬토프는 내가 아는 한 없을 듯하다(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건대출판부에서 나온 작가론 <레르몬토프>를 소략한 대로 참조할 수 있다). 요컨대, 그는 우리말로 쉽게는 읽을 수 없는 시인/작가인 셈이다(참고로, 레르몬토프의 러시아어 전집은 2권짜리에서 10권짜리까지 다양하며, 보통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4권짜리 전집이다(*이미지는 단행본 <우리시대의 영웅>).

 

 

한편, 푸슈킨과 마찬가지로 그는 장교시절에 포르노그라피적인 시들도 썼는데, 그런 시들만을 따로 묶은 <성인을 위한 레르몬토프>도 올해 출간됐다. <성인을 위한 푸슈킨>과 함께. 두 책 모두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도색화보들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한국에서라면 도색잡지로 분류돼 판금될 만한 책들이다).

 

해서, 생전에나 사후에나 고독한 그의 운명과는 비록 다소 걸맞지 않아 보일지라도, 약소하지만 이 50회 통신문은 (무심코 지나친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뒤늦게) 그에게 바치고자 한다(이런 걸 뒷북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뒷북이라도 치는 것이다). 이건 며칠 전에 작정한 것인데, 좀 전에 혼자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해치우기로 했다. 그렇다고 새로 무슨 글을 쓰는 건 아니고(그럴 형편이 안되므로), 이전에 쓴 글을 약간 편집하는 정도이다(휴식시간 동안 그 일이 끝나기를 바란다).

 

글은 주로 레르몬토프의 연애시에 대한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푸슈킨과의 대비 속에서 레르몬토프를 이해하기 때문에, 푸슈킨의 연애시에 대해서도 언급될 것이다(*이번엔 생략한다). 사실 레르몬토프가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것은 1837년 푸슈킨을 죽음을 권력층의 음모로 비판한 시 <시인의 죽음>을 발표하면서이다. 푸슈킨의 죽음에 부친 시이면서도 정작 푸슈킨이란 이름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인이 죽었다! - 명예의 노예 -

헛소문과 비방으로 쓰러졌다,

가슴에 복수의 열망과 총알을 박은 채,

당당한 머리를 숙이고 쓰러졌다!

시인의 영혼은 사소한 모욕의

불명예를 참지 못하고,

그는 세상의 소문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혼자서, 예전처럼... 그리고 살해당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이 일로 유배당하며, 그에 대한 황제의 미움은 거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이후에 불과 4년을 더 살았을 뿐이다.

 

레르몬토프 전공자들이 흔히 하는 얘기지만, (레르몬토프와 마찬가지로) 27살에 죽었다면 역시나 총각으로 죽었을 시인 푸슈킨(1799-1837)의 문학적 명성이 레르몬토프를 크게 앞지르진 못했을 것이며, 고골(1809-1852) <검찰관>(1836) 공연의 스캔들로 아마 상심해서 죽었을 것인바 아주 재미있고 재능 있는 괴짜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고, 톨스토이(1828-1910)는 자전 3부작이나 끄적거리다가 문학사의 여백으로 사라져버렸을 것이며,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또한 페트라셰프스키 사건(1849)으로 말미암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을 것인바 고골의 아류 작가 정도로 기억됐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것도 다 팔자인 걸 어떡하랴   

 

04. 10. 26/ 07. 0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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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21 23:50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2. 레르몬토프와 페초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19 00:39 
    아트앤스터디에서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어제(라고는 하지만 몇 시간 전이다)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민음사, 2009)을 다루었다. 책이 절판되어서 한동안 다루지 못하다가 작년 가을에 새 번역판이 나온 덕분에 강의 커리에 포함시키고 있고, 어제는 두 번째 강의였다(아무래도 푸슈킨보다는 입에 덜 익었다).    사실 레르몬토프(1814-1841)는 내가 20대 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Joule 2007-06-09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기 위에 턱에 손 괴고 얼짱 각도로 나온 사진이 레르몬토프인가요?... 흠, 음...그러니까...이건...뭐랄까...다음에 만나면 손 각도가 틀렸다고 전해주세요. (후다닥)

로쟈 2007-06-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 <우리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 같습니다. 자전적인 부분도 있지만 레르몬토프는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