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전설적인 첼리스트이면서 국내에는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제 바람구두님의 페이퍼를 읽고 처음 알게 됐는데, 관련 부고기사들을 옮겨놓는다. 클래식에 특별한 취향이 없는 탓에 그의 죽음에 별다른 감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정도를 갖고 있나 보다). 다만, 과거 절친했던 한 친구가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첼리스트 정도로 기억이 날 따름(그녀는 로스트로포비치의 내한 공연을 빼놓지 않았다).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된 건 지휘자로서의 데뷔작이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것. 1968년이었고 볼쇼이에서였다...

한국일보(07. 04. 28) '천상의 선율' 러 첼로 거장 로스트로포비치 '천상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러시아 출신 첼리스트 겸 지휘자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로스트로포비치는 간장 질환으로 입원 치료 중이었다. 1927년 구소련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음악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첫 첼로 공개 연주를 했다. 16세 때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배운 피아노와 첼로 외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지휘도 공부했다.



23세 때 소비에트 시절 최고의 영예인 스탈린상을 받으며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서방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반체제 인사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글을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보냈다가 요주의 인물로 찍혀 국내 활동과 해외 연주여행을 제한 받자 7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파리에 머물던 78년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나 90년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에 의해 복권돼 모스크바로 금의환향했다.

냉전시절 구소련의 예술적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도 잘 알려진 그는 91년 민주화에 저항하는 구소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에 맞서는 시위대에 합류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그 앞에서 즉흥 연주를 했고, 99년 다시 그 자리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기념공연을 했다.

첼리스트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테크닉과 깊이를 보였을 뿐 아니라 첼로의 레퍼토리를 넓히는 데 누구보다 힘써 수많은 곡의 작곡을 위촉하고 직접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브리튼, 루토슬라브스키, 펜데레츠키, 뒤티외 등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첼로 곡을 썼다. 한국 첼리스트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수많은 어린 첼리스트들의 정신적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1968년, 볼쇼이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지휘하면서부터다. 망명 후 첼로 연주와 지휘를 병행한 그는 77년 워싱턴의 내셔널심포니 음악 감독이 되어 17년간 이끌면서 지휘했고, 세계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객원지휘했다. 프랑스의 레종도뇌르 훈장 등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최근에는 아내인 소프라노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와 함께 아제르바이잔 어린이를 위한 건강 재단을 만들어 운영해왔다.(오미환 기자)

동아일보(07. 04. 28) "거장, 천상의 현을 울리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별세"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첼리스트 겸 지휘자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은 지난해 말 간 질환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나 이날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그는 지난달 27일 80세 생일을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렘린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이달 들어 건강이 악화됐다.



1927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태어났으며 모스크바 국립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뒤 1945년 소련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황금상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를 사사했으며 리히테르(피아노)의 반주로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에밀 길렐스(피아노)와 레오니트 코간(바이올린)과 트리오로도 활동했다.

1974년에는 반체제 인사인 솔제니친과 사하로프를 공개 지지했다가 추방당했다. 공민권을 박탈당한 뒤 서방에서 자신의 역사를 다시 만들었다. 첼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 연주를 선보인 그를 위해 작곡가들은 앞 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생전에 세계 초연한 작품은 240곡이 넘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벽돌 더미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다. 1990년 소련 체제 붕괴 후 복권된 로스트로포비치 부부는 1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첫 무대에서 지휘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비창’은 세기의 명연으로 손꼽힌다.

러시아인들은 그를 ‘슬라바’(영광)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므스티슬라프’를 짧게 줄인 이 애칭은 최고 연주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도 4, 5차례 공연을 가졌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의 김치와 갈비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에서 나를 부르면 언제든지 가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전승훈 기자)



■ 애제자 장한나의 추모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24·사진) 씨는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그의 애제자가 됐다. 장 씨는 27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린 느낌”이라며 스승에 대한 애도의 뜻을 밝혔다. 이를 정리했다.

선생님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첼리스트였다. 처음 만난 것은 11세 때였다. 선생님 앞에서 연주하고 싶어 선생님이 파리에서 여는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나갔다. 선생님은 “처음에 첼로가 혼자 걸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아 놀랐는데 뒤에 조그만 여자애가 있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연주를 마친 뒤 선생님은 나를 번쩍 안아 주셨다.

이후 15세 때까지 워싱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선생님을 찾아가 레슨을 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지막 레슨을 받던 날 선생님은 “네게 음악의 열쇠를 주었다. 이제 그 문을 열고 나가 너만의 음악을 만들어라”고 말씀하셨다.



1996년 첫 음반을 녹음할 때 선생님께서 지휘를 해 주셨다. 선생님은 “첼리스트 음반의 녹음을 지휘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나이 들면 그 뜻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첼리스트로서의 대물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음반은 선생님께서 지휘한 유일한 첼리스트의 음반이 됐다.(전승훈 기자)

07.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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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04-29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스트로보피치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들어봤는데, 로스트로포비치가
매우 공들인 연주라고는 하지만 (요요마가 20대에 한 녹음한 곡을 60대에 했으니깐요..)
저한테는 별로 안 땡기더군요. 안너 빌스마나 피에르 푸르니에의 연주를 더 좋아한다는...

(p.s)그나저나 이 분 녹음도 30년만 지나면 모두 저작인접권이 풀리겠군요.흐흐흐...ㅡㅡ;; (돌아가신 분에게 이 무슨 망발..ㅡㅡ)

필라멘트 2007-04-2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이 관심분야가 아님에도 음악관련 기사를 소개해주신 로쟈님에게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60대에 와서야 바흐전곡을 녹음했는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거장의 겸손함과 신중함을 느끼게 합니다. 미샤 마이스키, 요요마.. 푸르니에.. 다들 훌륭한 첼리스트들이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완벽한 경지에 이르기엔 아직.. 이번 3월에 푸틴 대통령이 크렘린궁에 초청해 팔순을 기념했는데.. 최고의 거장에 대한 입증이랄까요 예우랄까요. 아무튼 20~21세기 최고의 음악가를 잃어서 많이 아쉽습니다.

로쟈 2007-04-29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ravinsky님/ 거장의 경우에도 호오는 갈리더군요...
juin님/ 그렇군요.^^
ysp988님/ 음악은 관심분야가 아니지만 '러시아' 음악가라서요.^^
 

알다시피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 후보자 두 사람이 작년에 선발되어 현재는 러시아의 가가린우주인훈련센터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발사는 내년 4월로 예정돼 있으며 올 8월에 최종 후보자 한 사람이 가려질 것이라고 한다. 관련기사를 예전부터 모아놓으려고 했으나 시간을 내지 못했었는데 마침 잘 정리된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영어공용어론에 관한 대담을 어제 옮겨놓았지만, 우주인이 되기 위해선 (현재로선) 러시아어를 배워야 한다(영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언젠가 모스크바의 문화공원에서 최초의 우주왕복선을 본 기억이 떠오른다(모형이 아니라 실물이다). 정비중이어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었던 게 약간의 아쉬움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내년 이맘때쯤엔 '한국 우주인' 이야기로 좀 들썩거리겠군... 

교수신문(07. 04. 23) 소련·미국의 우주인 선발과 한국인의 활약

해마다 4월 12일이 되면 러시아에는 국경일처럼 여겨지는 하나의 중요한 기념일이 찾아온다. 길에는 이 날을 축하하는 많은 게시물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신문에는 특집기사가 실리고, 텔레비전에는 이 날에 대한 각종 다큐멘터리들이 주요시간대에 방영된다. 이 날은 ‘우주인의 날’, 바로 인류가 최초로 우주를 나간 날이다. 유리 알렉세이비치 가가린(1934-1968). 1961년 4월 12일 지구인으로는 처음으로 그는 우주로 나감으로써 가가린은 지구를 벗어난 최초의 인류, 즉 우주인 1호를 기록하게 된다.



누가 먼저 우주에 로켓을 보낼 것인가. 누가 먼저 인공위성을 쏠 것인가. 누가 먼저 생명체를 우주로 보낼 것인가. 누가 먼저 사람을 우주에 보낼 것인가. 누가 먼저 여성을 우주로 보낼 것인가. 누가 먼저 우주선의 문을 열고 우주유영을 할 것인가. 누가 먼저 달에 갈 것인가. 50~70년대를 걸쳐 미국과 구소련간 진행된 당시의 이러한 일련의 우주개발 경쟁과정은 과학적, 공학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냉전이라는 시기에 상대진영에 비해 보다 우월한 과학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과시하고자 하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서 탄생하게 된다. 또한 우주발사체와 인공위성 기술은 대륙 간 타격능력, 우주로부터의 첩보능력 등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단순한 기술적 과시를 넘어 군사적 우월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초기 우주인 선발은 기본적으로 군에서 후보자들이 선발되었다. 혹독한 훈련을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체력, 임무에 대한 보안, 그리고 그 임무가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임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당시 군에서의 선발은 어쩌면 당연한 조치로 여겨진다. 사실상 최초로 인류를 우주로 보내기 위해 노력하던 시점에서는 인간에게 무슨 훈련을 시켜야 하는지도 몰랐고, 인류가 우주에 나가면 어떤 신체변화가 올지 그저 추측만 할 뿐이었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고난도 훈련을 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과 소련에서의 최초의 탑승에서 살 수 있는 기대확률은 양측 모두 반반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총성 없는 미소간의 우주개발전쟁은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우주라는 전선으로 우주비행사를 보내게 된다.

소련은 공군조종사 중 20명을 후보로 선발하였다. 선발은 워낙 극비로 진행되었던 일이라 후보들은 당시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선발되고 있었는지 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훈련과정 중 가장 유력한 후보는 게르만 티토프(1935-2000)였다. 그러나 그는 소위 말하는 집안 좋은, 부르주아에 가까운 출신이었다. 이에 비하여 가가린은 스몰렌스크의 가난한 농노 가정에서 태어났으므로 진정한 인민의 자식이라 말할 수 있었다. 재정러시아, 소련의 시기에는 대부분의 국민이 농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소련 우주개발의 최고 수장이었던 까랄료프와 마찬가지로 그는 직업학교(우리나라로 말하면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점은 까랄료프에게 상당히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다른 가장 중요한 최종선발 원인 중 하나는 그의 외모와 성격이었다. 대중을 향해 어필할 수 있는 잘생긴 얼굴,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그의 쾌활한 언변은 결국 그를 최초의 우주인으로 선발되도록 한다.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귀환한 가가린은 대중 앞에 서게 되었고, 소련은 “소련의 위대한 과학기술로 우리의 아들이 우주를 다녀왔노라”라고 대대적인 선전을 하였으며, 국민은 그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게 된다. 티토프는 같은 해 8월 6일 우주에 다녀옴으로써 결국 세계에서는 4번째, 러시인으로는 두 번째 우주인이 되었다. 티토프는 우주비행사로 활동하던 당시에는 말하지 못하였으나 훗날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성적이 좋았음에도 최초의 우주인으로 선발되지 못한 불만을 토로하곤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은 공군 시험비행사 중에서 7명을 선발했다. 알랜 셰퍼드(1923-1988)가 1961년 5월 5일에 준궤도비행에 성공함으로써 세계에서는 두 번째, 미국인으로는 최초의 우주인으로 기록된다. 실제로 준비상황은 소련에 비해 미국이 좀 더 빨랐으나, 유인발사 전 시행한 무인발사의 실패로 인하여, 이를 검토하기 위해 발사가 연기되면서 최초 우주인의 영광은 러시아인 가가린에게 돌아가게 된다. 또한 러시아가 성공한 비행은 우주선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아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귀환한 비행이었으나 미국은 완벽한 궤도진입을 하지 않고 우주를 잠시 나갔다 오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우리나라도 고산, 이소연 두 명의 우주인 후보가 현재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의 가가린우주인훈련센터(www.gctc.ru)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이곳은 ‘별의 도시’라고도 불리며, 모든 러시아우주비행사와 러시아발사체에 탑승하는 우주비행사는 이곳을 거쳐 가게 된다. 과학기술부는 2008년 4월로 예정된 발사를 위해, 금년 8월에 두 명의 후보 중 최종 1명을 선발할 계획이라 한다. 노보스찌 코스모나브티끼(우주비행뉴스)에 따르면 현재 두 후보는 러시아어수업, 이론수업, 가속도 및 무중력 훈련을 받고 있으며, 우주발사체인 소유즈 및 우주정거장 조정훈련 역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주단위로 그들의 생활모습을 한국으로 보내오고 있으며, 한국우주인배출사업 홈페이지(www.woojuro.or.kr) 등을 통해 공개되고 있다. 둘 중 선발된 최종 후보는 소유즈 발사체에 몸을 싣고 우주정거장에서 약 8일간 머물게 된다.



누구를 우주인이라 부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으나 공통적으로 크게 두 부류를 말하곤 한다. 첫 번째는 우주비행을 위해 훈련받은 자를 말한다. 훈련받은 모든 사람이 우주를 나갈 기회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주인 후보로 선발되어 훈련을 받는 것 역시 대단히 어려운 일이므로 이들 모두를 우주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번째 기준이 보다 보편적인데 우주를 나갔다 온 모든 사람을 우주인이라 칭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통상 FAI(www.fai.org)의 기록을 따르는데, 여기서는 지구로 부터 100km 이상 벗어난 모든 사람을 우주인, 즉 우주를 다녀온 자로 인정한다. 미국의 경우 자국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50마일(80km)을 그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2006년 9월까지의 집계를 보면 미국기준으로는 454명이, FAI기준으로는 448명이 우주를 다녀온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한국계로는 미국국적의 폴란스키(50)가 이미 두 차례나 우주를 다녀온 바 있다. 그의 어머니가 한국인 2세로 하와이출생이며, 어머니의 부모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다른 한국계와 같은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폴란스키의 경우 비록 한국계라고는 하나 사실상 미국인이므로 최초 한국우주인이라는 타이틀이 부여되기에는 적합지 않다. 그러나 고산, 이소연 후보 외에도 또 다른 한국인인 허재민 씨(25) 역시, 현재 러시아에서 훈련 중인 두 우주인 후보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의 우주비행을 앞두고 있다. 그는 지난 2006년 1월 컴퓨터업체인 오라클에서 진행된 프로그램에 당첨되어, 준괘도우주비행을 올해 말 예정하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우주에 먼저 나가는 사람은 허재민 씨가 될 예정이다.

아직까지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우주로 나가는 한국인이 나올지 러시아에서 나올지는 미지수이다. 일정대로라면 허재민 씨가 앞서있지만, 민간우주프로그램이라는 특성상 예정대로 진행될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미국에서의 프로그램이 단순히 며칠간의 훈련으로 수 분간 우주를 다녀오는 프로그램이므로, 허재민 씨가 먼저 우주를 나가더라도 우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이미 스페이스쉽원(SpaceshipOne)을 타고 허재민 씨가 예정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민간우주비행을 한 마이크 멜빌(Mike Melvill)은 전 세계적으로 433번째 우주인으로 인정되고 있고, 우주인 명단에 등재되어 있다.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 역시 이와 유사한 비행이었다. 만일 허재민 씨가 예정대로 고산 혹은 이소연 후보보다 먼저 우주비행을 할 경우,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사람보다 위쪽에, 전 세계가 인정하는 또 다른 한국 국적의 한국우주인이 등재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최초’라는 단어는 언제나 매력적인 단어이다. 아직 누가 ‘최초’의 한국우주인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과거와 다른 점은 예전에는 단순히 우리나라에도 우주인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였다면 현재는 곧 출산을 앞둔 어머니와 같은, 잠시 후를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최초’라는 것은 그 이후 지속적인 노력과 발전이 있을 때 그 의미가 더욱 존중되고 기억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제 첫걸음을 떼다시피 한 한국의 우주개발에 한국인 우주인의 배출이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기를 바란다.(하성업/ 러시아통신원· 모스크바국립항공대 박사과정)

07. 04. 27.

P.S. 가가린훈련센터를 다른 책도 재작년에 출간된 것이 눈에 띈다. 국내에서 출간된 우주인 관련서는 의외로 드문데 다치바나 다카시의 <우주로부터의 귀환>(청어람미디어, 2002) 정도가 아닌가 싶다.

다치바나는 이렇게 적었다. "우주비행사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우주 체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그때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그것이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우주 비행사들이 오랫동안 가슴 속에 감추어 두었던 본심에서 우러난 메시지를 세계 최초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된다. 우주 비행사들의 전언은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놀랄 만큼 깊고 큰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그것이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마음 속 깊은 곳을 자극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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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7-04-2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로부터의 귀환]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 아저씨는 논픽션을 쓰는 데에 일가견이 있어 보여요.
그나저나 오랜만입니다 로쟈님. 어제 중간고사가 끝난 페일레스였습니다. :)

로쟈 2007-04-2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치바나의 장기겠죠. 저는 중간고사 기간이어서 그나마 지난주에 한주 쉬는 과목도 있었는데.--;
 

명품극단의 고골 3부작에 대해서 몇 달 전에 소개한 바 있는데(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1909487&paperId=1049610) 이번에 국립극장에서 재공연된다고 한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의 연출자와 배우들이 중심이 되어 새롭게 해석한 고골을 무대에 올린 작품들이고 그간에 호평을 받아왔다.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한 작품이라도 구경을 좀 해봐야겠다. 

한겨레(07. 04. 07) 국립극장서 만나는 러시아 대문호

러시아 대문호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연극 ‘고골 3부작’이 4일부터 잇달아 관객을 찾아간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으로 구성된 명품극단은 고골의 우크라이나를 다룬 소설 가운데 <비이(4~7일)>,  <광인일기(18~22일)>,  <행복한 죽음(13~17일)>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라는 부제 속에 녹였다. 올 1월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공연 당시 평단과 관객의 호평에 힘입어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서 재공연하는 것인데,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고골의 대표적 단편소설을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부작의 서막인 <비이(4~7일)>는 키예프신학교에 재학 중인 어린 신학생 호마부르뜨의 하루 일과를 그렸다. ‘봄’이라는 부재처럼 호마부르뜨의 일과는 참을 수 없도록 졸리운 봄날의 꿈처럼 장난스럽기도 하고 괴기스럽기도 하다. 세트의 구성보다는 배우의 신체행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소도구를 통한 다양한 공간변화, 러시아 전통 민속음악과 한국의 전통악기 가야금의 조화를 엿볼 수 있다.

<행복한 죽음(13~17일)>은 노부부의 삶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하고 따뜻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노부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와 쁠리헤리야 이바노브나는 한적한 시골에서 살고 있지만, 일상에서 전원의 목가적인 무료함이나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이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배우자의 죽음이나 자신의 죽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광인일기(18~22일)>는 페테르부르크의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인간의 고독한 삶을 표현했다. ‘여름’이라는 부제처럼 작품 속 주인공 뽀쁘리신의 일기는 한 여름의 열정이 만들어 낸 사랑과 그것에서 비롯된 절망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조하석의 간결한 마임연기와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로미오와 줄리엣>이 시대적 분위기를 한껏 살린다.

기치스 모스크바 연극예술 아카데미에서 유학한 뒤 현재 명품극단 상임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원석씨가 세 작품의 연출을 맡았고, 그가 상임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베르니사쥐 극장의 러시아 스태프와 배우가 결합했다.(김미영 기자)

07. 04.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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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과두재벌'로도 불리는 러시아의 신흥 부유층이자 경제권력인 '올리가르히'에 대해서 이전에 두어 번 페이퍼를 띄운 적이 있다. 가령, '러시아의 부자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836891)이나 '러시아 백만장자들의 사치'(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1909487&paperId=989306) 같은 페이퍼들이 그렇다. 해마다 봄이 오면, '포브스'지는 전세계 억만장자들의 리스트와 랭킹을 발표하곤 하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레시안에서 이에 관한 비판적인 분석기사를 기획기사로 소개하고 있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억만장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전체 타이틀이므로 러시아 편은 '러시아 억만장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되겠다. '올리가르흐' 혹은 '올리가르히'(복수형)는 소비에트 이후,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키워드 중 하나이다(같은 제목의 영화도 만들어졌었다. 감독은 <택시 블루스>를 만들었던 파벨 룬긴).

프레시안(07. 04. 02) '억만장자 1000명 시대'의 그림자

미국의 경제 주간 <포브스>는 지난달 초 전 세계 억만장자(billionaire)의 분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며 "2007년은 인류역사상 가장 부유한 해"라고 선포했다. 재산이 10억 달러(9500억 원 상당) 이상인 억만장자가 작년 대비 153명이 증가한 946명으로 집계된 데다 이들 억만장자들이 보유한 재산의 총액도 작년 대비 35%가 늘어난 3조5000억 달러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세계 60억 인구 중 소득 수준 하위 55%의 재산은 줄어들었거나 그대로인 형편을 감안한다면 억만장자가 많아졌다고 해서, 혹은 갑부들이 소유한 재산이 급증했다고 해서 2007년이 "가장 부유한 해"가 된다는 <포브스>의 시각은 다분히 '부자 중심적'이다(*물론 이건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모두가 부유하다면 아무도 자신이 부유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진보 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제임스 페트라스 빙햄튼대 교수(사회학)는 억만장자의 급증 자체에 감격해 하는 <포브스>의 태도를 비판하며 이들이 전 세계 인구 중 1억 분의 1만 누린다는 '집중된 부'를 향유하게 된 과정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억만장자들의 대부분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혁신을 통해 기업을 키워 나가거나 또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대신 주식, 부동산 등을 통해 있는 재산을 불리거나 천연자원을 내다 팔아 돈을 버는데 골몰해 왔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비생산적 경로를 통해 '그들만의 부'가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나머지 인류는 '역사상 가장 가난한 해'를 맞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억만장자들에게 부를 축적할 '기회'를 제공한 쪽은 '권력'이다. 지배계급과 결탁한 억만장자들은 재산 증식을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경우에 따라선 범죄도 서슴지 않는다. 
이에 페트라스 교수는 신흥재벌들의 급성장세가 두드러진 러시아와 '검은 돈'이 넘치는 남미의 경우를 예로 들며 억만장자들과 그들의 부가 늘어나는 현상은 오히려 전 세계가 경계해야 할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프레시안>은 페트라스 교수가 이같은 주장을 담아 지난달 21일 미국의 진보성향 매체 <카운터펀치>에 기고한 <억만장자와 세계 지배 계급의 결탁 과정: The Billionaires and How They Made It Meet the Global Ruling Class>을 '러시아편', '남미편', '억만장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등 3부로 나누어 요약, 게재한다. 그 첫 회 '러시아편'은 서방언론들에 의해 '자수성가형'으로 미화된 러시아 신흥재벌, 올리가르히의 실상과 그들이 억만장자 반열에 오르기까지 러시아 정부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옐친 민영화 정책의 최대 수혜자, 올리가르히

젊은 억만장자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로는 러시아를 따를 데가 없다. 러시아의 신흥과두재벌인 올리가르히는 권력을 이용해 부의 축적을 이룬 억만장자의 상징이다. 러시아 억만장자들의 3분의 2는 20대 중후반에 재산을 증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불명예스런 10여 년 간 보리스 옐친과 '미국의 지시를 받는' 그의 경제 보좌관 예고르 가이다르, 아나톨리 추바이스는 현실적인 가치보다 훨씬 낮은 '정치적인 가격'에 러시아의 국유재산들을 몽땅 팔아먹었다.
  
국가의 재산이 민간으로 이전되는 과정에는 예외 없이 암살, 대대적인 절도, 불법 주가 조작, 사재기 등 '깡패들의 전술'이 동원됐다. 미래의 억만장자가 될 재목들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공장, 교통시설, 석유, 가스, 철, 광물 등 1조 달러가 넘는 가치의 국가 재산들을 탈취해 갔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와 달리 러시아의 억만장자들 중에서는 전직 공산당 간부였던 인물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공산주의는 비효율적'이란 항간의 주장과는 달리 올리가르히들의 손에 넘어가기 전까지 국영기업들은 저마다 이윤을 창출하고 경쟁력을 평가받고 있었다는 것도 러시아만의 차별점이다.


  
이같은 사실은 올리가르히들이 이 막대한 재산을 넘겨받은 지 10년도 채 안 돼 명백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모든 억만장자들이 부를 축적하는 원천은 건설이나 혁신, 혹은 생산적인 기업 건립에 있지 않았기에 민영화된 기업들은 오히려 경쟁력이 떨어진 것이다. 민영화의 과실을 따먹은 것은 고위 공산당 간부들이 아닌 막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었다. 자본주의에 재빨리 적응한 이들은 정부 고위관료를 매수하거나 협박하고 필요할 경우 암살까지 해서 보리스 옐친 정권이 서방의 '시장개방' 조언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내놓은 민영화 정책의 혜택을 독식해 버렸다.
  
최근 억만장자들의 수를 집계해 발표한 <포브스>는 러시아 '올리가르히'들이 마치 자수성가로 성공한 청년 기업인들인 것인 양 소개했다. 70년 간 러시아 인들의 땀과 피로 지켜온 국영기업들을 강탈한 것이 마치 20대 젊은 '기업정신'의 산물인 것처럼 포장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최대 부호 8명은 모두 경쟁상대의 재산을 강압적으로 빼앗거나 '유령 은행'을 만들거나 알루미늄, 석유, 가스, 니켈, 철강제품 등 국가소유의 천연자원을 탈취하거나 보크사이트, 철 등 광물을 수출해서 부자가 된 경우다. 공산주의 시절 국가가 경영했던 산업 중 어느 한 부분도 이들 올리가르히에 탈취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건설, 텔레콤, 화학, 부동산, 농업, 보드카, 식료품, 경작지, 언론, 자동차, 항공 등이 모두 이들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올리가르히 성장, 러시아의 성장과는 무관
  
올리가르히들이 최대 부호로 성장한 바닥을 얘기하기 위해선 옐친의 민영화 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빠른 시일 내에 최고의 자리 혹은 최고에 가까운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구 소련 정부 관계자들이나 자기 사업의 경쟁자들을 협박하기도 하고 말 그대로 살인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약탈이나 탈취를 가능토록 한 '핵심 정책 기반'은 추바이스와 가이다르가 설계한 러시아 공기업의 광범위한 민영화 정책이었다. 이 '충격요법'은 크렘린의 경제 자문을 받았던 '하버드 팀'과 클린턴 미 대통령이 전격 지원 아래 추진됐다. 러시아의 자본주의 흐름을 돌이킬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민영화는 러시아 이 '기업 포식자'들 간의 전쟁을 촉발하는 동시에 러시아 경제의 관절을 꺾어버렸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생활경제 수준이 80% 이상 하락했고 루블의 가치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석유, 가스 등 그 가치를 따지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전략적 자원'이 약탈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온 억만장자들이나 미국·유럽 등의 석유·가스 다국적 기업에 헐값으로 매각됐다. 마피아와 결탁한 올리가르히들은 일 년에 1000억 달러 이상의 돈을 세탁해 뉴욕, 런던, 스위스, 이스라엘 등지의 제도권 은행으로 보냈다. 이 돈은 미국과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의 부동산을 사는 데 쓰이거나 영국 축구팀을 사거나(대표 올리가르히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영국 첼시 축구팀 구단주임) 이스라엘 은행이나 광물 자원 개발에 투자됐다.
  
옐친 정권 아래에서 이 전쟁의 승자들이 새로운 경제 섹터의 팽창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았다면 푸틴 정권에 이르러서는 이 깡패 같은 올리가르히가 조직을 병합해 몸집을 불리게 됐다. 백만장자 여럿이 뭉쳐 억만장자로 성장한 셈이다. 거들먹거리는 젊은 폭력배이거나 지방의 사기꾼이었던 이들은 급기야 서구의 홍보업체의 도움을 받아 존경할 만한 기업인들로 새로 태어났다. 신흥 올리가르히들은 금융 전문 언론들의 지원을 업어 세계 금융 시장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올리가르히와 푸틴 정권, 사이가 나쁘다고?

그러나 푸틴 대통령의 최근 지적대로 이들 신흥재벌들 앞에는 광대한 선택지가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업 투자나 혁신에는 실패하고 있다. 원자재 생산을 제외하면 올리가르히가 외화를 벌어들이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들의 생산품들이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된 수익은 생산이 아닌 주식투자, 은행 예치, 광산 매점 등에서 나오기에 당연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서방 언론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옐친 시대에 성장한 올리가르히와 푸틴 정권 간의 불화, 그리고 푸틴 정권에 새로이 재산 불려가고 있는 억만장자들의 성장에 주목을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식 증명은 결국 옐친 아래에서 성장한 부호들과 푸틴 아래에서 결합한 부호들 간의 불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상호간 살인이 줄고 대신 정부 규제 아래 경쟁이 제도화되는 등 푸틴 대통령이 요구한 '새로운 게임의 룰'이 작동을 하자 기업들 간의 병합이 성사되는 '커다란 행운'도 잦아진 것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문학가 오노레 발자크는 프랑스 부르주아 그룹이 급성장한 미심쩍은 기원에 대해 "큰 운 뒤에는 큰 범죄가 있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대량 약탈과 출혈을 통해 억만장자가 된 21세기 러시아 부호들에게도 가능한 설명이 아닐까.(이지윤 기자) 

07.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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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뉴스'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기획연재는 지난주에 끝난 '디아스포라의 문학'이다. 곧 책으로 묶여도 좋을 만한 분량이 다루어져 있기에 은근히 출간을 기대하고 있다. 그 중 문학평론가 정은경씨가 러시아의 한인 작가 아나톨리 김을 다룬 꼭지를 옮겨놓는다. 아나톨리 김에 대해서는 재작년인가 (삼성이 후원하는)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자여서 한 차례 소개했던 기억이 있다. 아나톨리 김은 국내에도 주요 작품들이 번역되고 또 서너 명의 전공자가 있을 정도로 많이 연구되고 있는 작가이다.    

아니톨리 김은 '영원한 한국인'임을 피력해왔지만 그의 전작에서 드러나는 주요한 철학적 사유는 자연예찬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이다.

컬처뉴스(06. 02. 11) 러시아적 영혼의 한인작가

한 사람의 영혼과 기질, 나아가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세계 문화사의 편의적 가름이 아니더라도 민족성 또는 각국의 문학적 특성을 상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기원하는 것일까? 이러한 어리석은 질문으로 이 글을 시작하는 것은 아나톨리 김의 문학에서 지극히 러시아적인 영혼을 보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적 영혼, 딱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익숙한 몇몇 예술가의 이름들에서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아우라를 통해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다. 위대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에서부터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화가 샤갈, 칸딘스키, 그리고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예술은 그들이 나고 자란 유라시아 대륙만큼이나 광활하고, 백야만큼 신비로우며, 긴긴 겨울밤과 혹한 만큼이나 심오하고 종교적이다(*이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가장 최근에 복사한 책은 데일 페즈맨의 <러시아와 영혼>(코넬대출판부, 2000)이다).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한번 ‘지형과 풍광, 그리고 날씨가 문학작품에 미치는 영향’이라 제목으로, 과학적(?)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그려보겠다는 맹랑한 생각도 품고 있지만, 나는 개개인의 기질과 영혼, 나아가 공동체의 심성을 형성하는데 자연조건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한 개인의 심성은 그가 매일 마주하는 풍광과 기후를 닮는다. 이를테면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같은 서해와 동해 출신 작가는 같은 바닷가일지라도 기질과 작품 성향에 있어 그 물빛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이 나의 얼치기 ‘문학지리지’이다.

아나톨리 김. 정확히는 아나톨리 안드리에비치 김(Anatoli Andreevich Kim). 이 기다린 러시아식 명명법에 따르면, 아나톨리는 안드리에비치의 아들이자 ‘김’의 후손이다(*약간의 착오인데, '안드레에비치'의 아들이 아니라 '안드레이'의 아들이다). 이름에도 나타나있듯 그는 한국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한인 3세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김’이라는 유전적, 문화적 형질보다는 러시아로부터 더 많은 자양분을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러시아적 영혼의 탄생의 연혁은 그의 할아버지 대로 올라간다.

빈농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땅을 잃고 벌이를 위해 1906년경 국경을 넘어 만주를 거쳐 러시아 땅에 당도한다. 한국에 이미 가족을 두었으나, 그는 그곳에서 새 아내를 맞아 아들 삼형제를 두고 살게 되는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18년, 그는 뜻밖의 손님을 맞는다. 고향에서 가난과 슬픔에 찌들린 형수와 조카들을 보다 못해 한반도를 가로질러 형을 찾아온 동생. 그의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동생의 설득과 러시아의 가족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덜컥 병에 걸려 죽고, 할아버지의 동생은 얼결에 조카 셋을 맡아 키우게 된다.

어린 조카들이 장성하여 정작 고향의 자신의 가족을 찾아가려했을 때는, 이미 험악한 국제정세로 인해 월경이 불가능하게 되어 영영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는 그의 가족사는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김’으로 상징되는 이 한민족의 수난사는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버지 대로 이어지는데, 극동에서 살았던 그의 아버지는 1937년 당시 일본인들이 한인을 스파이로 이용할 가능성을 두려워한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야 했던 것. 그리하여 1939년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또 한 명의 ‘김’이 아나톨리였던 것이다.

아나톨리 김은 작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비롯하여 러시아의 각종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노벨 문학상에도 거론되었을 정도로 러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하였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는 그의 가족 수난사만큼이나 굴곡 많은 여정을 거쳐야 했다. 초등학교 노어교사인 그의 아버지를 따라 ‘극동의 캄차카에서 우수리 강 지역, 사할린 등지’로 러시아 각지를 전전하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목격한 그는 모스크바 미술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자퇴한다. 그 뒤 군생활과 크레인 기사, 보일러 공에서 선전 포스터 제작 미술 감독관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 틈틈이 습작을 하고, 5년제 고리키 문학창작 대학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창작 수업을 받지만 작가의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의 글쓰기는 대학 시절 때부터 스승이었던 단편소설의 대가 블라지미르 리진으로부터도 인정받은 수준이었지만, ‘8년간 단편을 들고 편집부 문턱을 드나들었다’라는 회고에서 볼 수 있듯, 기나긴 절망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그것은 물론, 당시 여전히 공식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옹호하는데 충실했던 소련의 문학적 상황과 밀접히 관련 있는 것으로, 이러한 풍토 속에서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색하며 환상과 신비주의적 색채를 보여주었던 그의 단편들은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 경직된 사실주의적 경향과 엄격한 검열의 빗장을 서서히 열기 시작한 러시아 문단의 변화와 함께 아나톨리 김의 문학 또한 차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1973년『오로라』에 「수채화」와 「묘코의 들장미」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아나톨리 김은 그때까지 축적된 원고와 글쓰기의 저력을 봇물처럼 터뜨렸고, 그의 독특한 미학의 단편들은 독자들과 비평계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다. 7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발표된 그의 작품은 대략 90여편의 단편과 9편의 중편, 4편의 장편에 이른다고 하니, 이 방대한 분량만 보더라도 그간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 문학 전공들은 아나톨리 김의 대표작으로 흔히 장편『다람쥐』이나『아버지 숲』혹은 중편 「연꽃」, 「꾀꼬리의 울음소리」 등을 꼽는다. 아마도 러시아의 현대적 환상문학의 대가로 인정받게 된 그의 독특한 서사기법 - 다성악적 화법, 서정성과 환상성, 변신과 변형의 모티브, 비선형적 시간의 병렬구조 등등-과 철학적 사유들이 이들 작품에 중요한 의미망으로, 혹은 총체적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본들만을 피상적으로 접한 필자의 일천한 독서 경험으로는, 다소 난해한 이 북구적 환상 서사들보다는 초기 대표 단편들을 모은 단편선집『사할린의 방랑자들』이 가장 흥미로웠다.

한국어 번역본『사할린의 방랑자들』은 1983년 러시아에서 출판된 중편집『사할린의 사람들』과는 다른 책이다. 첫 번째 단편집인『푸른섬』(모스크바: 소비에트 작가, 1976)과 두 번째 단편집『동틀녘의 자두맛』(모스크바: 청년근위대, 1985)에 수록된 작품들을 선별하여 번역 출간한 이 단편선집은 문제작『다람쥐』를 내기 이전까지 주로 단편 장르에 천착했던 아나톨리 김의 단편 미학의 진수를 보여줄 뿐 아니라, 중장편 전반에 흐르는 그의 철학적 사유와 환상적 서사 기법의 단초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가령, 러시아 문단에 비평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작가적 명성을 확고히 했던 장편『다람쥐』의 문제의식-인간 세계와 다람쥐로 상징되는 동물 세계의 대립과 이들의 변형을 통해 보여주는  예술정신의 파탄과 영혼의 구원 문제-이나『아버지 숲』에서 전달하고 있는 ‘자연’을 통한 신화적 시간의 희구와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켄타우로스의 마을』의 문명 비판, 그리고『신의 플루트』의 불멸과 초월에 대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이 매혹적인 단편모음은 다성악적으로 흘러넘치는 슬라브적 휴머니즘의 시원을 담고 있다.

아나톨리 김의 사회문화 평론적 성격이 강한 장편들이 궁극적으로 ‘동양적 신비주의와 자연을 바탕으로 한 ‘전 인류의 합창’이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지향하고 있다면, 단편들은 보다 소박한 차원에서 이뤄지는 삶의 비애와 영혼의 고통, 그리고 그들의 ‘세심한 인정과 극진한 사랑’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아나톨리 김의 단편에 대해 러시아 비평가 안드레이 바씰리예프스끼는 “예술가의 사명은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삶에 애착을 지니게 해주는 것”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을 빌어 고평하고 있는데, 필자 또한 이 작품집의 감동을 매우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총 13편의 단편(혹은 엽편)이 수록된 이 단편집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사할린’의 한인들의 삶의 애환과 수난사를 그린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그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강도손’ ‘덕수’ ‘봉기 아범’ 등의 한인들은 사실주의 창작방법론에 의해 형상화된 작품들의 주인공들이 아니라, 한인 공동체가 공유하는 설화, 민담, 신화, 또는 심지어 귀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자 화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단지 이야기 자체의 흥미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삶의 비애와 비의, 그리고 어떤 진실된 삶의 국면을 환기시키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할린의 방랑자들」은 사할린의 한 공동묘지 근처의 고갯마루에 출몰하는 유령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남자 혹은 여자, 일본인 혹은 조선 여자로 둔갑하는 괴기담을 통해 이 땅 위에서 벌어졌던 전쟁과 비극적 역사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이밖에도 이 작품에 실린 작품들은 대개 단일한 서사로 요약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인데, 가령 보쌈해간 남자와 벌이는 묘한 애증(「아가씨」), 형제간의 경쟁(「형제」), 친구의 아내를 욕했다가 새벽에 그 여자를 연상시키는 ‘불여우’를 만난다는 이야기 (「불여우의 미소」), 시골로 내려간 작가가 느끼는 평화로움(「동틀녘의 자두맛」) 등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플롯들은 아나톨리 김의 단편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은 아니다.

오히려 아나톨리 김의 단편 미학의 핵심은 그의 서정적 문체가 창출하는 독특한 분위기와 어떤 계기들을 통해 보여주는 삶에 대한 통찰, 그리고 무엇보다 러시아적이라 할 수 있는 자기 희생적이며 순결한 영혼으로 가득찬 인물들이다. 예를 들어, 산술적 이익만을 생각하고 갓난 손녀딸을 5일제 탁아소로 보내는 집안 식구들에게 용감하게 맞서는 「사랑」의 주인공 빠벨 이바노비치, 그리고 그토록 마셔대던 술을 어느날 '그냥 마음먹고 끊어버렸다‘는 「동틀녘 자두맛」의 예고르 찌모훼예비치 등은 톨스토이가 그의 민담집에서 제시했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므이스킨’(『백치』)를 통해 보여주었던 숭고한 ‘백치’들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외투」(고골리)에서 나왔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백처럼 이들이야말로 ‘아까끼 아까기에위치’들의 진정한 후손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적 휴머니즘과 더불어 아나톨리 김 전작에 나타나는 중요한 철학적 사유의 하나인 자연 예찬과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을 우리는 「쥐가 우유를 마시다」 「동틀녘의 자두맛」 「도시의 벼락」 「쯔나미」 등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파 공학 기사인 「쥐가 우유를 마시다」의 주인공 드미뜨리가 도시를 떠나 숲에서 느끼는 다음과 같은 마음의 평화.  

“젊은 기사는 문득 이것이야말로 완전무결한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강, 황금빛 태양, 자작나무 숲, 버섯, 한없이 긴 여름의 하루, 처와의 재회에 대한 담담하고도 참기 힘든 때로는 부길처럼 타오르는 기대감, 또한 숨막힐 듯하면서도 차분한 기쁨, 잔잔한 행복감, 확신에 찬 희망의 감미로움...”(97쪽) 

자연에서 느끼는 이러한 생의 기쁨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겪는 인간 영혼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나톨리 김이 삶과 인간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원천이며, 또한 인류애로 확장되는 고결한 예술혼의 고향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켄타우로스의 마을』로 대변되는 추악한 인간의 욕망과 문명 세계를 급진적으로 풍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급작스러운 비를 피해 키오스크 처마 밑에서 인도 시인과 러시아 노인이 본심과 달리 서로 데면데면해 있다가 벼락 맞은 나무를 보며, 기쁨과 감사의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도시의 벼락」 같은 작품도 결국은 이러한 대우주적 자연 속에서 하모니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의 공감과 생의 기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나톨리 김은 문학의 첫 번째 역할이 '인간의 삶의 가치 고양시키는 데 있으며’ 그것은 ‘전인류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인물들이 겪는 불행이 얼마나 고결하고, 그들의 인내가 얼마나 감탄할 만한 것인지 보여줄 수 없는 작품들’은 예술이 아니며, 자신의 고독감을 반영하기 위하여 거울을 세워놓는 작가들은 ‘면서기 같은 사람’(257쪽)들이라고 비판한다. ‘주위에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인간은 완전히 행복할 수 없다’(258)고 말하는 이 작가, ‘자신의 진정한 뜻에 대한 의지가 견고하며, 강한 신념 무엇보다 문학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작가를, 온갖 문학 위기의 담론과 혼탁한 회의의 소음 가운데 놓여있는 나는 불에 덴 듯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이 오래고 낯선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는 여러 지면과 대담을 통해 자신은 ‘영원한 한국인’임을 피력해왔지만, 그 말은 작가로서의 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가 거듭 강조했듯 그의 진정한 조국은 ‘지구’이며 그가 속한 민족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의 진정한 정체성은 ‘세계 시민’이기 때문이다. 흰 당나귀와 나타샤, 그리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난다면, 무엇보다 영혼을 적시는 한 권의 책을 갈급한다면, 이 신비와 환상, 사랑으로 가득 찬 아나톨리 김의 단편선을 펼쳐보길 권한다. 
 

*아나톨리 김의 서지와 전기적 사실은 김현택의 글 (「우주를 방황하는 한 예술혼」,『재외한인작가연구』, 고려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2001)과 최건영의 글 (「아나톨리 김은 누구인가」,『사할린의 방랑자들』, 남명문화사, 1987), 그리고 그의 자전적 에세이(『문학사상』1996년 4월호부터 1998년 4월호까지 김현택에 의해 번역 연재)를 참고한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아나톨리 김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사할린의 방랑자들』(최건영, 손명곤 역, 남영문화사, 1987),『연꽃』(김대경 역, 한마당, 1988),『페자의 통나무꽃』(김현택 역, 동쪽나라, 1993),『다람쥐』(권철근 역, 문덕사, 1993),『아버지 숲』(김근식 역, 고려원, 1994),『켄타우로스의 마을』(심민자 역, 문학사상사, 2000),『신의 플루트』(이혜경 역, 문학사상사, 2000),『꾀꼬리의 울음소리』(심민자 역, 한국통신돔닷컴, 2004),『해초 따는 사람들』(심민자 역, 한국통신돔닷컴, 2004)


07.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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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4-0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첨 댓글 남겨 봅니다.
로쟈님의 문학지리지 얘길 읽으니 다이아몬드 교수의 총,균,쇠가 생각나네요.
지리적 요인이 역사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해 주는 역작이었죠.

로쟈 2007-04-0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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