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뉴스'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기획연재는 지난주에 끝난 '디아스포라의 문학'이다. 곧 책으로 묶여도 좋을 만한 분량이 다루어져 있기에 은근히 출간을 기대하고 있다. 그 중 문학평론가 정은경씨가 러시아의 한인 작가 아나톨리 김을 다룬 꼭지를 옮겨놓는다. 아나톨리 김에 대해서는 재작년인가 (삼성이 후원하는) 톨스토이문학상 수상자여서 한 차례 소개했던 기억이 있다. 아나톨리 김은 국내에도 주요 작품들이 번역되고 또 서너 명의 전공자가 있을 정도로 많이 연구되고 있는 작가이다.
컬처뉴스(06. 02. 11) 러시아적 영혼의 한인작가
한 사람의 영혼과 기질, 나아가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세계 문화사의 편의적 가름이 아니더라도 민족성 또는 각국의 문학적 특성을 상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기원하는 것일까? 이러한 어리석은 질문으로 이 글을 시작하는 것은 아나톨리 김의 문학에서 지극히 러시아적인 영혼을 보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적 영혼, 딱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익숙한 몇몇 예술가의 이름들에서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아우라를 통해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다. 위대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에서부터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화가 샤갈, 칸딘스키, 그리고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예술은 그들이 나고 자란 유라시아 대륙만큼이나 광활하고, 백야만큼 신비로우며, 긴긴 겨울밤과 혹한 만큼이나 심오하고 종교적이다(*이 주제와 관련하여 내가 가장 최근에 복사한 책은 데일 페즈맨의 <러시아와 영혼>(코넬대출판부, 2000)이다).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한번 ‘지형과 풍광, 그리고 날씨가 문학작품에 미치는 영향’이라 제목으로, 과학적(?) 세계문학의 지형도를 그려보겠다는 맹랑한 생각도 품고 있지만, 나는 개개인의 기질과 영혼, 나아가 공동체의 심성을 형성하는데 자연조건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한 개인의 심성은 그가 매일 마주하는 풍광과 기후를 닮는다. 이를테면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같은 서해와 동해 출신 작가는 같은 바닷가일지라도 기질과 작품 성향에 있어 그 물빛만큼이나 다르다는 것이 나의 얼치기 ‘문학지리지’이다.
아나톨리 김. 정확히는 아나톨리 안드리에비치 김(Anatoli Andreevich Kim). 이 기다린 러시아식 명명법에 따르면, 아나톨리는 안드리에비치의 아들이자 ‘김’의 후손이다(*약간의 착오인데, '안드레에비치'의 아들이 아니라 '안드레이'의 아들이다). 이름에도 나타나있듯 그는 한국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한인 3세이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김’이라는 유전적, 문화적 형질보다는 러시아로부터 더 많은 자양분을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러시아적 영혼의 탄생의 연혁은 그의 할아버지 대로 올라간다.
빈농이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땅을 잃고 벌이를 위해 1906년경 국경을 넘어 만주를 거쳐 러시아 땅에 당도한다. 한국에 이미 가족을 두었으나, 그는 그곳에서 새 아내를 맞아 아들 삼형제를 두고 살게 되는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18년, 그는 뜻밖의 손님을 맞는다. 고향에서 가난과 슬픔에 찌들린 형수와 조카들을 보다 못해 한반도를 가로질러 형을 찾아온 동생. 그의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동생의 설득과 러시아의 가족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덜컥 병에 걸려 죽고, 할아버지의 동생은 얼결에 조카 셋을 맡아 키우게 된다.
어린 조카들이 장성하여 정작 고향의 자신의 가족을 찾아가려했을 때는, 이미 험악한 국제정세로 인해 월경이 불가능하게 되어 영영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는 그의 가족사는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김’으로 상징되는 이 한민족의 수난사는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버지 대로 이어지는데, 극동에서 살았던 그의 아버지는 1937년 당시 일본인들이 한인을 스파이로 이용할 가능성을 두려워한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야 했던 것. 그리하여 1939년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또 한 명의 ‘김’이 아나톨리였던 것이다.
아나톨리 김은 작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비롯하여 러시아의 각종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노벨 문학상에도 거론되었을 정도로 러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하였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는 그의 가족 수난사만큼이나 굴곡 많은 여정을 거쳐야 했다. 초등학교 노어교사인 그의 아버지를 따라 ‘극동의 캄차카에서 우수리 강 지역, 사할린 등지’로 러시아 각지를 전전하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목격한 그는 모스크바 미술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자퇴한다. 그 뒤 군생활과 크레인 기사, 보일러 공에서 선전 포스터 제작 미술 감독관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 틈틈이 습작을 하고, 5년제 고리키 문학창작 대학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창작 수업을 받지만 작가의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의 글쓰기는 대학 시절 때부터 스승이었던 단편소설의 대가 블라지미르 리진으로부터도 인정받은 수준이었지만, ‘8년간 단편을 들고 편집부 문턱을 드나들었다’라는 회고에서 볼 수 있듯, 기나긴 절망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그것은 물론, 당시 여전히 공식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옹호하는데 충실했던 소련의 문학적 상황과 밀접히 관련 있는 것으로, 이러한 풍토 속에서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색하며 환상과 신비주의적 색채를 보여주었던 그의 단편들은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 경직된 사실주의적 경향과 엄격한 검열의 빗장을 서서히 열기 시작한 러시아 문단의 변화와 함께 아나톨리 김의 문학 또한 차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1973년『오로라』에 「수채화」와 「묘코의 들장미」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아나톨리 김은 그때까지 축적된 원고와 글쓰기의 저력을 봇물처럼 터뜨렸고, 그의 독특한 미학의 단편들은 독자들과 비평계로부터 큰 호응을 얻는다. 7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발표된 그의 작품은 대략 90여편의 단편과 9편의 중편, 4편의 장편에 이른다고 하니, 이 방대한 분량만 보더라도 그간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 문학 전공들은 아나톨리 김의 대표작으로 흔히 장편『다람쥐』이나『아버지 숲』혹은 중편 「연꽃」, 「꾀꼬리의 울음소리」 등을 꼽는다. 아마도 러시아의 현대적 환상문학의 대가로 인정받게 된 그의 독특한 서사기법 - 다성악적 화법, 서정성과 환상성, 변신과 변형의 모티브, 비선형적 시간의 병렬구조 등등-과 철학적 사유들이 이들 작품에 중요한 의미망으로, 혹은 총체적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본들만을 피상적으로 접한 필자의 일천한 독서 경험으로는, 다소 난해한 이 북구적 환상 서사들보다는 초기 대표 단편들을 모은 단편선집『사할린의 방랑자들』이 가장 흥미로웠다.
한국어 번역본『사할린의 방랑자들』은 1983년 러시아에서 출판된 중편집『사할린의 사람들』과는 다른 책이다. 첫 번째 단편집인『푸른섬』(모스크바: 소비에트 작가, 1976)과 두 번째 단편집『동틀녘의 자두맛』(모스크바: 청년근위대, 1985)에 수록된 작품들을 선별하여 번역 출간한 이 단편선집은 문제작『다람쥐』를 내기 이전까지 주로 단편 장르에 천착했던 아나톨리 김의 단편 미학의 진수를 보여줄 뿐 아니라, 중장편 전반에 흐르는 그의 철학적 사유와 환상적 서사 기법의 단초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가령, 러시아 문단에 비평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작가적 명성을 확고히 했던 장편『다람쥐』의 문제의식-인간 세계와 다람쥐로 상징되는 동물 세계의 대립과 이들의 변형을 통해 보여주는 예술정신의 파탄과 영혼의 구원 문제-이나『아버지 숲』에서 전달하고 있는 ‘자연’을 통한 신화적 시간의 희구와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켄타우로스의 마을』의 문명 비판, 그리고『신의 플루트』의 불멸과 초월에 대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이 매혹적인 단편모음은 다성악적으로 흘러넘치는 슬라브적 휴머니즘의 시원을 담고 있다.
아나톨리 김의 사회문화 평론적 성격이 강한 장편들이 궁극적으로 ‘동양적 신비주의와 자연을 바탕으로 한 ‘전 인류의 합창’이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지향하고 있다면, 단편들은 보다 소박한 차원에서 이뤄지는 삶의 비애와 영혼의 고통, 그리고 그들의 ‘세심한 인정과 극진한 사랑’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아나톨리 김의 단편에 대해 러시아 비평가 안드레이 바씰리예프스끼는 “예술가의 사명은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삶에 애착을 지니게 해주는 것”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을 빌어 고평하고 있는데, 필자 또한 이 작품집의 감동을 매우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총 13편의 단편(혹은 엽편)이 수록된 이 단편집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사할린’의 한인들의 삶의 애환과 수난사를 그린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그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강도손’ ‘덕수’ ‘봉기 아범’ 등의 한인들은 사실주의 창작방법론에 의해 형상화된 작품들의 주인공들이 아니라, 한인 공동체가 공유하는 설화, 민담, 신화, 또는 심지어 귀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자 화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단지 이야기 자체의 흥미만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삶의 비애와 비의, 그리고 어떤 진실된 삶의 국면을 환기시키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할린의 방랑자들」은 사할린의 한 공동묘지 근처의 고갯마루에 출몰하는 유령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남자 혹은 여자, 일본인 혹은 조선 여자로 둔갑하는 괴기담을 통해 이 땅 위에서 벌어졌던 전쟁과 비극적 역사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이밖에도 이 작품에 실린 작품들은 대개 단일한 서사로 요약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인데, 가령 보쌈해간 남자와 벌이는 묘한 애증(「아가씨」), 형제간의 경쟁(「형제」), 친구의 아내를 욕했다가 새벽에 그 여자를 연상시키는 ‘불여우’를 만난다는 이야기 (「불여우의 미소」), 시골로 내려간 작가가 느끼는 평화로움(「동틀녘의 자두맛」) 등 파편적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플롯들은 아나톨리 김의 단편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은 아니다.
오히려 아나톨리 김의 단편 미학의 핵심은 그의 서정적 문체가 창출하는 독특한 분위기와 어떤 계기들을 통해 보여주는 삶에 대한 통찰, 그리고 무엇보다 러시아적이라 할 수 있는 자기 희생적이며 순결한 영혼으로 가득찬 인물들이다. 예를 들어, 산술적 이익만을 생각하고 갓난 손녀딸을 5일제 탁아소로 보내는 집안 식구들에게 용감하게 맞서는 「사랑」의 주인공 빠벨 이바노비치, 그리고 그토록 마셔대던 술을 어느날 '그냥 마음먹고 끊어버렸다‘는 「동틀녘 자두맛」의 예고르 찌모훼예비치 등은 톨스토이가 그의 민담집에서 제시했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므이스킨’(『백치』)를 통해 보여주었던 숭고한 ‘백치’들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외투」(고골리)에서 나왔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백처럼 이들이야말로 ‘아까끼 아까기에위치’들의 진정한 후손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적 휴머니즘과 더불어 아나톨리 김 전작에 나타나는 중요한 철학적 사유의 하나인 자연 예찬과 코스모폴리탄적 세계관을 우리는 「쥐가 우유를 마시다」 「동틀녘의 자두맛」 「도시의 벼락」 「쯔나미」 등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파 공학 기사인 「쥐가 우유를 마시다」의 주인공 드미뜨리가 도시를 떠나 숲에서 느끼는 다음과 같은 마음의 평화.
“젊은 기사는 문득 이것이야말로 완전무결한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강, 황금빛 태양, 자작나무 숲, 버섯, 한없이 긴 여름의 하루, 처와의 재회에 대한 담담하고도 참기 힘든 때로는 부길처럼 타오르는 기대감, 또한 숨막힐 듯하면서도 차분한 기쁨, 잔잔한 행복감, 확신에 찬 희망의 감미로움...”(97쪽)
자연에서 느끼는 이러한 생의 기쁨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겪는 인간 영혼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나톨리 김이 삶과 인간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원천이며, 또한 인류애로 확장되는 고결한 예술혼의 고향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켄타우로스의 마을』로 대변되는 추악한 인간의 욕망과 문명 세계를 급진적으로 풍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급작스러운 비를 피해 키오스크 처마 밑에서 인도 시인과 러시아 노인이 본심과 달리 서로 데면데면해 있다가 벼락 맞은 나무를 보며, 기쁨과 감사의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도시의 벼락」 같은 작품도 결국은 이러한 대우주적 자연 속에서 하모니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의 공감과 생의 기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나톨리 김은 문학의 첫 번째 역할이 '인간의 삶의 가치 고양시키는 데 있으며’ 그것은 ‘전인류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인물들이 겪는 불행이 얼마나 고결하고, 그들의 인내가 얼마나 감탄할 만한 것인지 보여줄 수 없는 작품들’은 예술이 아니며, 자신의 고독감을 반영하기 위하여 거울을 세워놓는 작가들은 ‘면서기 같은 사람’(257쪽)들이라고 비판한다. ‘주위에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인간은 완전히 행복할 수 없다’(258)고 말하는 이 작가, ‘자신의 진정한 뜻에 대한 의지가 견고하며, 강한 신념 무엇보다 문학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작가를, 온갖 문학 위기의 담론과 혼탁한 회의의 소음 가운데 놓여있는 나는 불에 덴 듯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이 오래고 낯선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는 여러 지면과 대담을 통해 자신은 ‘영원한 한국인’임을 피력해왔지만, 그 말은 작가로서의 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가 거듭 강조했듯 그의 진정한 조국은 ‘지구’이며 그가 속한 민족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의 진정한 정체성은 ‘세계 시민’이기 때문이다. 흰 당나귀와 나타샤, 그리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난다면, 무엇보다 영혼을 적시는 한 권의 책을 갈급한다면, 이 신비와 환상, 사랑으로 가득 찬 아나톨리 김의 단편선을 펼쳐보길 권한다.
*아나톨리 김의 서지와 전기적 사실은 김현택의 글 (「우주를 방황하는 한 예술혼」,『재외한인작가연구』, 고려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2001)과 최건영의 글 (「아나톨리 김은 누구인가」,『사할린의 방랑자들』, 남명문화사, 1987), 그리고 그의 자전적 에세이(『문학사상』1996년 4월호부터 1998년 4월호까지 김현택에 의해 번역 연재)를 참고한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아나톨리 김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사할린의 방랑자들』(최건영, 손명곤 역, 남영문화사, 1987),『연꽃』(김대경 역, 한마당, 1988),『페자의 통나무꽃』(김현택 역, 동쪽나라, 1993),『다람쥐』(권철근 역, 문덕사, 1993),『아버지 숲』(김근식 역, 고려원, 1994),『켄타우로스의 마을』(심민자 역, 문학사상사, 2000),『신의 플루트』(이혜경 역, 문학사상사, 2000),『꾀꼬리의 울음소리』(심민자 역, 한국통신돔닷컴, 2004),『해초 따는 사람들』(심민자 역, 한국통신돔닷컴, 2004)
07. 04.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