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만화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걸작!!!
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은유와 상징의 힘이고, 생략과 단순화의 힘이다. 단순히 말이나 글을 통한 묘사로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사실이나 감정을 만화는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바로 "만화의 힘" 때문이다. 한 가지 문제는 그런 "만화의 힘"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걸작이 흔치는 않다는 것이다. 내가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될까? 지금 나오는 만화의 90퍼센트는 하나같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시오도어 스터전의 다음과 같은 일리 있는 주장에서 따온 것이다. "SF의 90퍼센트는 정말 쓰레기다. 하지만 세상 어떤 것이나 그중 90퍼센트는 쓰레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10퍼센트는 무엇일까? 일단 쓰레기는 아니므로, 나름대로의 존재 의의를 획득한 작품들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진정한 걸작"은 분명 훨씬 더 적을 것이다. 물론 어떤 작품을 "걸작"과 "졸작," 혹은 "쓰레기"로 판정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내 경우에는 어떨까? 특별히 기준으로 삼는 것은 없다. 다만 "마음에 드는 작품"과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 있으며, 전자의 경우에서도 "특별히 마음에 드는 작품"은 굳이 소장하게 되고, 거듭해서 읽어보며 그 진가를 발견할 뿐이다. 물론 만화를 읽긴 하지만 굳이 도서대여점이나 만화방을 들락이진 않은 나로선 이 세상에 읽은 만화보다 읽지 않은 만화가 더 많으므로, 내 기준이 항상 어디에나 통용될 것이라 자신하진 않는다. 다만 때로는 정말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만화가 있다. 그림이 멋져서일 수도 있고, 스토리가 흥미진진해서일 수도 있고, 등장인물의 매력이 강렬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만화보다도 더 오래 내 기억에 남고, 또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굳이 소장하고 또 가끔 들춰보는 만화는 한결같이 어떤 "강렬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나는 감히 "만화의 힘"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결코 많은 작품을 읽은 것도 아니고, 자칭 "만화에서 철학을 본다"던 어느 교수마냥 깊이 읽은 것도 아닌 나로선 과연 내가 어떤 만화를 읽음으로써 느끼게 되는 감동과 흥분과 매력을 딱히 무엇이라 정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냥 뭉뚱그려서 "만화의 힘"을 느꼈다고 하자. 내가 느낀 "만화의 힘"이란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처럼 정교한 그림과 탄탄한 스토리이며, 다카하시 루미코의 "인어 연작"처럼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충격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고찰이기도 하다. 내가 느낀 "만화의 힘"이란 장 자크 상페의 삽화집에 나온 것처럼 일상적인 것 속에 존재하는 파격이며, 레제르의 <붉은 귀>에서 비뚤거리는 선이 빚어낸 파격 속에 존재하는 익숙함이다. 내가 느낀 "만화의 힘"이란 밀로 마나라의 <걸리베라>에서 아름다운 여성의 몸을 통해 드러나는 에로틱한 아름다움이며, 박수동의 <고인돌>이 노골적으로 암시하는 성의 환희와 역설이다. 내가 느낀 "만화의 힘"이란 조 사코가 방문하고 기억하는 팔레스타인과 보스니아의 총소리와 신음소리이며, E. O. 플라우엔의 아버지와 아들이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판토마임으로 그려내는 인생의 희노애락이다. 내가 느낀 "만화의 힘"이란 아트 슈피겔만이 고양이와 쥐의 이야기로 의인화한 20세기의 비극이며, 데츠카 오사무가 신성을 배제하고 철저히 인간과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로 변형시킨 붓다의 일대기이다. 내가 느낀 "만화의 힘"이란 박재동의 시사만평 한 컷 안에서 번뜩이는 촌철살인의 기지이며, 이희재의 단편 속에 고스란히 담겨진 냄새나는 현실의 쓰라림이다. 내가 느낀 "만화의 힘"이란 <이나중 탁구부>가 그려내는 인간의 치졸함과 유치함이며, 스콧 맥클루드가 정색을 하고 하나하나 따져보는 만화라는 장르 그 자체의 놀라움이다. 이런 갖가지, 그야말로 말도 안 될 만큼 제각각인 감동과 흥분과 매력을 과연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하겠는가? 나는 그냥 "만화의 힘"이라고만 하련다.

내가 보기에 <페르세폴리스>는 지금껏 내가 읽은 어떤 다른 작품보다도 그런 "만화의 힘"을 강력하게 발휘하고 있는 "걸작"이다. 그림이 정교하거나 현란하기 때문은 아니다. 흑과 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두 색깔이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것이야말로 이 만화의 대단한 매력이지만, 인물이나 묘사는 무척이나 단순화되고 상징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스토리가 기발하거나 대단한 반전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저자의 회고는 몇 가지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조각조각 파편화된 에피소드 형식을 지니고 있다. 심오한 주제나 철학이나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도 아니다. 물론 저자의 체험인 "진실"에 바탕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경험을 섣불리 일반화시킴으로써 억지로 독자의 감동을 쥐어짜려 한 흔적은 없다. 오히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절제"다. 저자가 보고 듣고 겪은 체험의 강도는 아트 슈피겔만의 <쥐>나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가 묘사하는 생존자들의 이야기에 못지 않은 비극과 혼란과 공포이지만, 결코 그것이 작품 전체에 노골적으로 표출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끊임없이 순진한 어린아이였던 자신의 과거 시점과, 뒤늦게야 그런 과거를 돌이켜보며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자신의 현재 시점을 오간다. 폭군에 의해 감옥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증언하는 끔찍한 고문에 대한 회고 뒤에는, 어떻게 간수들이 "가전제품"인 다리미를 가지고 죄수들을 고문할 수 있었을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어린아이의 얼굴 표정이 이어진다. 이런 절제의 흔적이야말로 저자가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승화"시켰다는 증거는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해 본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이 비로소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감동"도 배가된 것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만화 박정희>라는 야심찬 국내 작품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만화의 힘"이었다. 이전에 리뷰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그 만화는 "박정희'라는 우상을 최대한 "흠집내기"를 지상과제로 삼은 프로퍼갠더인지 몰라도, 정작 만화로서는 "빵점짜리"라 할 만했다. 물론 박정희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박정희를 예찬하는 만화가 되었건, 비판하는 만화가 되었건 간에, 노골적인 프로퍼갠더에만 기울어진 까닭에 정작 "만화의 힘"을 보여주지 못한 작품이라면, 솔직히 무슨 선거철마다 뻑하면 등장하는 각 정당의 총선 및 대선후보 "홍보만화"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즉 정치적 목적을 지닌 "유인물"인지는 몰라도, 결코 "예술"은 아닌 것이다. 아마 <만화 박정희>를 읽고 나서 <페르세폴리스>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앞의 작품이 어째서 "프로퍼갠더"이긴 할 망정 결코 "만화"라고 할 수는 없는지를, 그리고 뒤의 작품이 어째서 같은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한 수 위의 "걸작"인지를 말이다.

혹시나 우리나라에서도 훗날 일제치하라든지, 한국전쟁이라든지, 독재정권이라든지,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중요한 사건을 가지고 "만화"를 시도하는 작가가 있다면 제발 "고발"(<만화 박정희>)이나 "설명"(<먼나라 이웃나라>나 <십자군 이야기>처럼)에만 너무 연연하지는 말고, "절제"와 예술적 "승화"라는 미덕을 성취하기를 바란다. 물론 단순히 "외국엔 이런 만화가 있는데, 왜 우리는 못하느냐?"고 단순비교에서 우러난 타박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마르잔 사트라피에게 <페르세폴리스>를 낳게 한 방아쇠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를 읽고 그 감동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예술"로 승화시킬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해볼 뿐이다. 이런 식의 "예술"에 도전하는 작가가 감히 없다는 현실은, 한국만화가 아무리 "성장"하고 "발전"했다 하더라도 정작 아직까지는 충분히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나는 이 만화가 출간되기 훨씬 전에 미국 Pantheon Books 에서 출간된 영역본을 통해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특히 마르지가 신앙을 잃어버리는 장면과, 뒷부분에서 마르지의 엄마가 딸을 부여잡고 "어떤 놈이든지 널 건드리기만 하면 내가 가서 죽여버릴 테야!" 하고 절규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나라의 어느 출판사를 통해 한국어판 출간을 제의하기도 했지만, 애석하게도 이미 다른 출판사에 판권이 넘어간 뒤였다. 이후에도 소식이 없기에 그야말로 "걸작" 하나가 공중분해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발을 동동 구르던 차에 반갑게도 1권이 출간되었다.(개인적으로는 아깝지만, 출판사의 탁월한 선택에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계속 이 시리즈를 펴내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2권까지 출간되어서 나중에 또 읽어보았다. 그림은 점차 세련미가 더해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내겐 1권이 훨씬 더 감동적이고 또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페르세폴리스>라고 하면 으레 1권의 새빨간 표지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내 기억에 2권은 표지가 파란색인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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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dai2000 2006-03-08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관심가네요.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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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한 여자가 목숨을 걸 만큼 그렇게 대단한 작가인가. 나가하라 씨는 다자이의 무엇에 그렇게 끌렸을까. 다자이의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까지 치닫게 했을까.
"우선은 [광대의 꽃] 부터 읽어볼까?"
일부러 소리를 내서 말하고는 "뭐, 읽어보죠"하고 혼자 대답하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빠졌다.
완전히 푹 빠지고 말았다.
일주일 동안, 집에 틀어박혀 오로지 다자이 오사무를 읽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온몸과 영혼을 파고들었다. 다자이가 짊어진 슬픔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내 자신의 슬픔이기도 했다.
'마이 코메디언'-. [사양]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맴돈다. '나는 내가 왜 살아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같은 구절도.
'아, 인생은 너무도 단순하다'는 [정의와 미소]에 나온 말.
'어쨌든 나는 지긋지긋하다. 이것도 저것도 하나같이 글러먹었다. 아무런 가망도 없다'는 [꽃보라].
그리고 '이것으로 이별이에요'는 [귀뚜라미]이고, [인간실격]의 클라이맥스는 '죽고 싶다. 차라리 죽고 싶다.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도 허사일 뿐이다. 부끄러운 얼굴에 덧칠을 할 뿐이다' ......
그래, 정말로 그렇지. 어쩔 수 없이 그렇지.
만약 다자이가 살아 있다면 달려가 어깨를 끌어안고 싶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술이라도 마시면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얇고 미지근하고 판판하고 느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는 그래서 더더욱 이렇게 깊은 슬픔을 짊어지고, 광대짓으로 그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다자이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나도 다자이 당신 마음을 누구보다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은 오해를 받아왔어, 살아 있을 때도 지금도.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느낄 수 없는 녀석들이 아는 체하며 장황하게 늘어놓았을 뿐이다. 아니, 그런 것조차도 당신은 계산에 넣고 있었는지 모르지. 내가 남들에게 일부러 바보처럼 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 돼! 안 돼! 안 돼!
당황하며 책을 덮고 망상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찬물로 샤워를 한 게 몇 번인지 모른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또다시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다시 책을 펼쳐 드는 것이다. '후지산에는 달맞이꽃이 어울린다' 고 다자이가 말하면 나까지 '맞아 맞아. 그밖에 뭐가 어울리겠나!" 하면서 머리를 세차게 끄덕이고, '아침 식탁에서 수프를 한 수저 떠넣은 어머니가 "아!" 하고 가느다란 소리로 외쳤다' 란 구절을 읽으면, 나도 "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만다.
록 콘서트의 콜 앤드 리스폰스 같다.
'아이보다 부모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 - 아무렴, 그렇고말고.
'저 남자와 그리고 여기 있는 내가 다른 점이 한 가지라도 있단 말인가.' -없지, 없어. 없고말고.
'아침이란 심술맞다.' - 아, 심술맞은 것 같으니.
'모든 것은 단지 스쳐지나가는 것입니다.' - 간다, 간다, 간다.
'너 착각하면 안 돼.' -미안합니다, 그랬었지요.
'절망하지마. 그럼 이만 실례.' - 실례!
겨우 일주일 사이에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포로가 되었다. 완전히 마인드 컨트롤당하고 말았다.
두려워할지이다, 다자이. 그리고 한심한 나 - 라는 반성도 열흘 정도가 지날 무렵에는 마음에서 사라졌다.
6월이 되고 얼마 안 있어 나는 나가하라 씨에게 새로 바꾼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었다.
" 여행 가는 거 그만뒀어요."

  지난 일요일 시작한 시게마츠키요시의 단편집이다. 그래. 일요일의 석간이라 일요일에 시작한거 맞다. 무튼, '꼼꼼남과 털털녀' 를 읽으면서는 '귀엽네' 생각했고, '카네이션' 읽으면서는 ' 뭐야, 우리나라 소설같잖아' 하다가 '오우토키의 연인' - 위에 써 놓은 부분이 이 단편에서 따온거다.- 뒤집어진다.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에 대해 열광하는 국문과 대학생의 이야기. 
 첫부분과 전개, 클라이막스, 그리고 결말까지, 아주우우- 깔끔하고 재미있는 단편이다.
열개 남은 단편이 억수로 기대된다.


무튼, 살짝 집에 있는 '인간실격'을 꺼내들고, 볼만한 다자이 오사무 번역본들을 장바구니에 담아 본다.

제1부 - 중단편소설
여자의 결투
걸식 학생
고전풍
광대의 절규

제2부 - 장편소설
쓰가루

제3부 - 다자이 문학을 찾아서
내 취재노트 속의 다자이 오사무 / 한수산
영원한 청춘의 문학 / 김성수

 제1장 옛이야기
1. 서문
2. 혹부리 영감
3. 우라시마 이야기
4. 카치카치산
5. 혀 잘린 참새

제2장 청빈담

제3장 지쿠세이

- 옮긴이의 말
- 작가 연보

추천사
머리말
비잔 ㅣ 다자이 오사무
완전한 유희 ㅣ 이시하라 신타로
후퇴청년 연구소 ㅣ 오에 겐자부로
사가라 유전 ㅣ 오가와 쿠니오
버스 정거장 ㅣ 마루야마 켄지
이리에를 넘어 ㅣ 나카자와 케이
옛날처럼 ㅣ 타나카 야스오
무더운 길 ㅣ 미야모토 테루
카미코우치 ㅣ 키타 모리오
물색 ㅣ 카나이 미에코

작품해설
작가소개
역자후기

 
친구교환
탕탕
추억
눈 내리는 밤
뷔용의 아내
오상
가정의 행복
앵두

* 아, 내가 사려다 말았다... 는 페이퍼가 있다. 대밋!


 

 

 

 

 

 

 

 

1. 나생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2. 두자춘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3. 바둑이 이야기 - 다자이 오사무
4. 고소합니다 - 다자이 오사무
5. 나쁜 친구들 - 야스오카 쇼타로
6. 유리 구두 - 야스오카 쇼타로
7. 마지막 선물 - 요코미쓰 리이치
8. 붉은 고치 - 아베 기미후사
9. 죽은 자의 사치 - 오에 겐자부로
10. 사랑하는 내 아이들에게 - 아리시마 다케오
11. 제비뽑기 - 다케다 린타로

 

 

 

 

귀향
동경 팔경
유다의 고백
후지 산 백경
여학생
달려라 메로스
소원
고향


그리고 시게마츠 키요시

 

 

 

 

'일요일의 석간' 과 '오디세이 웨건, 인생을 달리다' 그리고 '소년 세상을 만나다'는
나의 사랑하는 ㅍ님의 선물이었다. 이제야 시작합니다. 시게마츠 키요시.  ^^ 새삼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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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브라운 2006-03-06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를 시작하는 방법으로 멋진 것 같네요 ^^ 또 저에게도 유혹이 허걱... ^^;;;

페일레스 2006-03-0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소화에서 나온 유숙자씨 번역이 괜찮습니다.
[사양]은 헌책방에서 산 원서를 읽다 말았는데, 첫 부분부터 아름다운 문장이 눈을 확 잡아끌더군요.
요즘 하이드님께서도 일본어 공부를 하시니, 원문을 약간만 옮겨봅니다.

  朝、食堂でスウプを一さじ、すっと吸ってお母様が、
  아침, 식당에서 스프를 한 숟가락, 훌쩍하고 마신 어머님이,
  「あ」
  "아"
  と幽かな叫び声をおあげになった。
  하고 희미한 외마디 소리를 내셨다.
  「髪の毛?」
  "머리카락?"
  スウプに何か、イヤなものでも入っていたのかしら、と思った。
  스프에 무언가, 안 좋은 거라도 들어갔던 걸까 하고 생각했다.
「いいえ」
  "아니다"
  お母様は何事もなかったように、またひらりと一さじ、スウプをお口に流し込み、すましてお顔を横に向け、お勝手の窓の、満開の山桜に視線を送り、そうしてお顔を横に向けたまま、またひらりと一さじ、スウプを小さなお唇のあいだに滑り込ませた。ヒラリ、という形容は、お母様の場合、決して誇張ではない。
  어머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훌쩍하고 한 숟가락, 스프를 입에 흘려넣고, 가만히 얼굴을 옆으로 돌려, 부엌 창문의 만개한 산벚나무에 시선을 보내고, 그리고 나서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다시 훌쩍하고 한 숟가락, 스프를 작은 입술 사이에 흘려넣었다. 훌쩍, 이라는 형용은, 어머님의 경우 결코 과장은 아니다.

- 뭔가 번역이 좀 더럽네요;; 아무튼 이런 느낌입니다. 음음.


하루(春) 2006-03-06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의 석간,은 우연히 아무 생각없이 노란색이 예뻐 보여서 주문한 건데 가볍게 읽기 좋더군요. 아직 몇 편만 읽은 상태지만...

panda78 2006-03-07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 ^▼^ 마지막 줄에 뿌듯뿌듯뿌듯-
페일레스님이 번역하신 부분은 워낙 유명하잖아요. 저는 예전에 어디에선가 (만화책인가 소설책인가) 그 우아하게 수프를 드시는 장면을 언급한 것을 읽고
[사양]을 사서 읽었는데, 그 당시엔 다자이 오사무의 감성에 푹 젖지는 못하겠던데
다시 읽으면 다르려나요.
아, [못말리는 간호사]에도 다자이 오사무 얘기가 나와요. ^^
 

책에 바치는 글

백추(白秋)의 여인이 옷장을 뒤지며 그녀 앞에 다가선 새 계절을 단장하듯, 나는 책장을 뒤지면서 봄을 맞을 채비를 한다. 겨울은 참으로 권태로웠다. 봄이 산과 들에서, 그리고 나무 사이로 숙연히 숨쉬고 미풍에 실리어 도시의 아스팔트 위로 스며들 때, 나는 거리를 방황하는 유혹에 빠진다. 산책은 나에게 책방을 찾아가는 즐거움으로 이어진다. 책방을 찾는 즐거움에 계절의 구별이나 정해진 시간이 따로 있을 리 없다.
나는 집을 나서면 으레 한 군데 책방을 찾는다. 사람을 만나는 장소가 어느덧 자주 들르는 책방이 되어버린 지도 오래다. 광화문에서 약속할 경우에는 K문고가 머리에 떠오르고, 이전에 명동에서 사람을 만날 때는 그 부근의 독일어 전문 책방인 S서점에, 그리고 강남에서는 S문고에 들를 심산이다. 그러나 약속이 없이 처음부터 책방을 찾아갈 작정으로 외출하는 경우도 한 주에 한 번 꼴은 되는 성싶다.
'신간 대량 입하'의 안내서가 날아들면 설레는 가슴을 안고 뛰어간다. 음악회에 간다고 집을 나서는 순간, 마음 속에서 벌써 연주가 시작되는 것과 같다고 할까. 책방을 찾아가는 길은 여행길과도 같이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해방되는, 참으로 자유인의 길이다. 이렇듯 책방에 들어서기에 앞서서 청한(淸閑)의 여유가 나의 마음에 자리한다.

성별된 수태의 공간
책과의 첫 만남은 유년시절, 만화와 그림동화에서 시작해서 위인들의 전기, 세계의 풍물지들로 이어졌다. 정기구독하는 잡지가 선보이는 날은 팡파르라도 울릴 신나는 날이었다. 그림 두루마리처럼 그 책들이 펼쳐준 장면들은 할머니가 자장가처럼 들려준 호랑이나 귀신 이야기와는 또 다르게 가슴 두근거리는 유혹의 숲이었다. 책을 품에 끼고 잠 못 이룬 그 감흥의 밤들, 나는 한강이나 대동강에 앞서서 센 강이나 템스 강의 이름을 먼저 알게 되었다. 이렇게 이국의 풍물들을 마음 속에 그리움 가득 담았다. 현실에 눈을 뜨기에 앞서 책이 들려준 저편의 세계에 나 자신을 길들인 그 꿈 많았던 순수무구의 나날들.
고대 이집트인들이 '책의 집'을 '영혼의 치유장'으로 표현했듯이, 현실보다도 공상의 세계에 기대어 하루하루 나 자신을 길들인 유년시절부터 책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나를 정화하는 마력을 지닌 감성과 지성의 연금장(鍊金場)이었다.
책방은 극장이나 미술관, 박물관처럼 현실세계로부터 차단되고 구별된, 그리고 그만큼 자기완결적인 정신의 공간이다. 고대 오리엔트의 어느 현자(賢者)는 책을 '태어나면서부터 성숙하다' 라고 하였던가. 우리는 극장이나 화랑에 가서 간혹 실망하는 일은 있어도 책방에서 실망하는 일은 없다.
사람들은 근대소설을 통해 '사랑'을 발견하고 '사랑'을 배웠다고 어느 작가는 말하였지만, 나는 책이라는 오묘한 지(知)의존재양식을 통해 나의 삶에 눈을 뜨고 세계와 처음으로 만났다. 나에게 언어의 이미지가 쌓이고 뿜어져나오는 그 공간은 나의 정념과 세계인식의 타작(打作)의 장이다. 어디 그뿐일까. 어린 시절 책 읽는 시간 속에서 나는 '일탈'을 음모하고 꿈의 놀이를 즐겼다. 그것은 분명 '수태'(受胎)의 성별(聖別)된 시간이요 공간이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의 슈바르츠발트 산기슭 하이데거의 저택 서재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상과 [성서]가 단 한 권 놓여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책에 의해 지식을 얻는 자를 탐구자의 최상위에 놓지 않고, 체험을 강조한 유럽 중세의 사상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무지의 지'(docta ignorantia)의 깊은 의미를 나는 때때로 반추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무지의 지'의 진실은 쿠자누스 자신이 방대한 장서의 치밀한 독자였다는 사실로 하여 비로소 진실성을 획득함을 또한 되새겨보기도 한다.

책과의 즐거운 놀이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책방에 들어서는 순간, 저마다의 소리와 표정을 지닌 책들이 일제히 뿜어내는 교향악에 몰아의 한때를 맛보게 될 것이다. 나는 지식의 사냥꾼들에 의해 북적거리는 큰 책방의 풍경을 좋아한다. 그러나 책방을 찾아갈 때 나는 대체로 혼자이다. 술은 대작이 좋고 극장에서는 동반자의 존재가 더욱 흥을 돋우지만, 책방은 혼자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고 우연히 책방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외면하는 것이 예의인 성싶다. 책과 만나는 그의 즐거운 '놀이'를 방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책방에서 나는 한 시간 이상 보낼 때도 있고, 2,3분만으로 총총히 걸음을 돌릴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즐거움과 충족감에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언젠가 하이델베르크 대학 광장 뒷골목의 어느 큰 고서점에서 아침 11시긔 개점을 기다리고 들어선 뒤 오후 5시의 폐점 때까지 하루종일을 보낸 적이 있다. 40대의 점원이 점심을 먹는다고 자취를 감춘 뒤에도, 텅 빈 넓은 홀에서 혼자 사다리를 여기저기 옮겨가며 한 권 한 권 뒤지곤 하였다. 책을 찾아내는 데 있어 나는 극히 부지런하고 인내심이 많다. 그러면서도 나는 또한 성급하고 민감한 사냥꾼이다. 군서(群書) 속에서 오랫동안 갈망하던 책을 찾아냈을 때, 온몸을 휩쓰는 짜릿한 엑스터시!
나는 책방에서만은 짐짓 부자 행세를 한다. 교사 신세에 희귀본, 진본에 대한 욕심이 있을 리 없고, 장서가도 못 된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생각되고, 갖고 싶은 책은 학생시절부터 어떻게든 내것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나는 비교적 여러 분야의 책을 찾는 편이다. 당분간 읽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는 경우도 많다. 많은 애서가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책은 읽는 것이기에 앞서 보는 것이요, 여기저기 어루만지는 것이다. 나는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지만 도서관의 장서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효용성을 위해 분류된 그 '책의 집' 에는 책을 둘러싼 놀이의 즐거움이 결여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학생시절 가을이면 책을 사들고 S대 부속병원 시계탑 앞 수령200년을 넘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다가 집으로 향하던 그 버릇, 책을 가슴에 품고 귀로를 재촉할 때의 기쁨과 보람, 이 모든 호사와 충족감을 어디에 또한 비길 것인가.

처음 만났던 축복받은 나날들
지나온 세월을 나와 함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숨쉬어 온 책들, 나는 이 책들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축복받은 나날들을 어제와 같이 선명히 기억한다.
지금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된 원남동 교차로의 독일어 전문 책방인 W 서점에서, 학생 신분에 걸맞지 않게 값비싼 플라톤 저작집 5권을 입수한 것은 바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열흘 전쯤이었다. 원래는 아름다운 장정의 멜리케 전집을 살 작정으로 찾아갔지만, 주인의 간곡한 권유에 반 외상으로 사들인 플라톤을 나는 6월 27일 안암동 대학 도서관에서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포성에 신경을 쓰면서 읽곤 하였다. 그리고 적 치하에서 주거를 전전하면서도 나의 분신처럼 그것을 들고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묵직한 가죽 장정과 한지와도 비슷한 종이에 인쇄도 선명치 못한 슐라이머마허 번역, 고딕체의 그 1804년판이 출판 문화사에 기록되는 귀중본임을 알게 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얼마 뒤였다.
또, 1.4후퇴 이후 대구의 대학 가교사 시절, 종강이 되고 여름방학으로 들어가는 날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 거닐다가 마주친 조그마한 고서점에서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의 원문 대형 호화본과 [노이에 브로크하우스] 5권 한 질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과 감동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을 예약하고 나서 학우들과 작별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부산의 집으로 돌아와서 부친을 졸라 책값을 타낸 뒤 곧바로 대구에 다시 돌아와서 부친을 졸라 책값을 타낸 뒤 곧바로 대구에 다시 되돌아와서 대금을 치루고 트럭에 편승하여 그 육중한 책들을 가슴에 꼭 품고 부산으로 발길을 달렸다. 또 환도 직후의 신문로, 은행나무 잎새들이 몹시도 눈부셨던 가을 날 어느 오후, 산책길에 들른 구 서울고교 맞은편 K 서점에서 오랫동안 일어역으로만 애독해 온, 독일의 인젤 출판사가 펴낸 릴케 시집 2권을 입수했던 일이 있었다. 그 릴케 시집이 박용철(朴龍喆)시인의 소장본이었음은 그날 밤으로 알게 되었다.
읽은 책의 내용은 잊은 지 오래지만 그 책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책방들과 그때의 일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간 뒤에도 생생히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70년대 초 독일행의 여권을 받은 날, 가벼운 흥분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며 나의 뇌리에 오간 것은 독일 여기저기의 고서점들과 소년 때부터 동경한 파리의 센 강변 노점 책방들의 풍경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다음날, 처음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자 길을 물어가며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고서점들이었다. 대학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하인리히 가이스트 성당의 전차 길에 면한 한쪽 벽에 꼭 판잣집같이 보이는 서너 곳 책방들의 초라한 모습이란 6백년 학도(學都)에 어울리지 않는 정말 상상 밖의 실망스러운 풍경이었다.
책의 나라 독일에서 좋은 고서들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를 그곳 사람들은 전 국토에 걸쳤던 격심한 전재(戰災)와 특히 신설 대학들이 고서점 조합을 통해 양서를 긁어모으다시피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보물섬(?) 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가 있으랴 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찾아다녀 오래전부터 바랐던 책들을 적잖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독일 고서점 편력의 제일 큰 수확은 저자인 마리안네 베버가 헌정 서명한 [막스 베버] 초판본(1926)의 발견이었다. 저자의 서명일자는 1929년 3월, 그리고 내가 그 책을 입수한 날짜는 1972년 4월 12일이다. 15권 한 질의 니체 전집 값과 맞먹어 오랜 망설임 끝에 사들인 [막스 베버]는 플라톤과 릴케와 더불어 지금도 나의 귀중본이요, 좌우의 서이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미술가들에 관한 바사리(G. Vasari)의 유명한 전기가 우리말로 완역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은지 오래된다. 그 뒤 여러 번 책방에 들러 찾아보기도 하고 문의도 해봤지만 출판사 이름을 모르니 전혀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책방의 점원이 되기 위해선 일정기간 연수를 받고 자격증을 따야 한다. 지금 서울에도 대형책방이 여기저기에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객을 배려하는 세심한 책방문화가 아쉽기만 하다.
책방문화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 문필가들이 대형책방의 운여에 참여하는 길을 생각할 수 없을까. 구텐베르크 이후 유럽에 있어 출판, 인쇄 공방은 대개 책방을 겸업하고 저명한 문필가들이나 혹은 애서가들이 그에 관여했다. 16세기 최대의 지식이었던 에라스무스도 그러한 학장(學匠)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정말로 부러운 일이다.
이쯤에서 말라르메의 시 한 구절을 되새기며 책에 대한 나의 신앙고백을 맺고자 한다. " 결국 세계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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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애
선쉬에 지음, 박영순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요즘 한참 알라딘 도서페이지 오른쪽 상단의 도서소개 카피다. ' 이 죽일놈의 사랑에 600만 아시아 독자들이 울었다.'

카피가 엄청날 수록 책이 재미없을 확률이 높다. 는건 아는데,

전당포... 때문이었다.
책소개에서 본 '전당포 8호' 라는 장소가 끌렸다.
'전당포 8호' 에서 욕심많은 자들, 파멸을 앞둔 자들은 자신이 가진걸 하나씩 맡겨, 물건에서, 신체 부위에서, 이성, 사랑, 영혼까지
'돈' 과 '성공'을 얻는다.

그 전당포의 주인인 한누어와 그의 동업자인 식탐녀 아징의 사랑 이야기.

'말이 절벽 앞에 멈추어 서더니, 하늘을 향해 히힝!하고 울었다.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니 주인의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정말 대단한데! 내가 못 당하겠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그녀는 여유 있고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자존심을 세웠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녀는 아름답게 웃었다'

이런 식의 문장을 326페이지나 읽어내야했다. 혹시나 하며 끝까지 읽은 내탓을 하자.
세상은 넓고, 책은 많다. 좋다는 책만 읽자.

* 196쪽 열일곱번째줄 ' 기부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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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5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6-03-06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아주 웬수같은 책이로군요. ^^;;;; 수고하셨어요. 토닥토닥. ㅠㅠ;;;

하이드 2006-03-0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기부이 썩 유쾌하지 않았어요 ㅜㅜ
속삭이신님, 음. 그렇군요. 근데, 왜 마케팅에 그리 돈을 쏟아붓는답니까.

2006-03-06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6-03-0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군요. 음. 그러고보니, 얼마전에 기사. 울며겨자먹기로 계속 신간 낸다는 기사 본 기억이 나네요. 마케팅에 '낚인' 제 탓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