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말 좀 들어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쥴앤짐 (1961)
글루미 선데이(1999)
그가 있고, 그녀가 있다. 그리고 그가 있다. 그리고 당신이 있다.
스튜어트와 올리버는 확연히 다른 성격의 오랜 친구다.
질리언은 스튜어트의 연인이고, 아내가 된다.
여기, 스튜어트, 올리버, 질리언이 있다.
어떻게 괄호를 묶을지는 읽기전에는 당신맘이다. (스튜어트+질리언) 부부와 올리버.
혹은 (스튜어트+올리버) 친구와 질리언, 혹은 (질리언+올리버)불륜과 스튜어트, 조금 더 나아가면
(스튜어트+올리버)연인과 (스튜어트+질리언)부부... 아, 그리고 있지말아야 할 것은 이 책을 읽는 당.신.
내가 아는 가장 수다스러운 영국남자는 이때까지 알랭 드 보통이었다. 그런 나의 생각을 가차없이 깬 뺀질뺀질한 줄리언 반스라는 느끼한 남정네가 있었으니.
책에는 이것보다 훨씬훨씬 느끼한 사진이 있다.
줄리언 반스의 시리즈가 열린책들에서 예쁘게 옷입고 새로 나오기 시작한게 벌써 작년 여름이고, 책꽂이 구석에 '10과 2분의 1장으로 쓴 세계역사' 라는 책이 기억도 안나는 예전부터 먼지 뒤집어 쓰고 있었고, 난 사실, 아주 얼마전까지 이 사람 여자인줄 알았고, 워낙에 많이들 알고, 많이들 읽은 작가에 대해 새삼스럽게 열광하는것이 뒷북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덧붙여서, 나는 아직 열광할까 말까 맘이 갈팡질팡하고 있긴 하지만서도. ( 여기까지의 횡설수설을 한숨에 읽어내렸다면, 이 책을 읽어도 좋다.라고 할 정도로 심하게 수다스러운 책임을 다시 한번 강조)
스토리는 신파다.
뭐, 여자 하나에 남자 둘. 그리고 그 남자 둘이 오랜 친구라는데, 안 봐도 비디오. 아니겠어.
근데, 그 뻔한 스토리에 이 책은 뭐가 다른데? 묻는다면,
목차를 보라.
1장 그의, 그 또는 그녀의, 그들의
2장 1파운드만 빌려 줘
3장 그해 여름, 난 찬란했다
6장 치매를 예방하라
7장 그런데 웃기는 일이 있다.
9장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17장 영국 사람들, 다 미쳤지.
어수선한 목차를 책을 다 읽고 있는 지금, 그 어수선한 수다들이 새삼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돈다.
음. 그래. 목차 제목 잘 지었네.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줄리언 반스가 풀어가는 방식은 '수다' 다.
그리고, 그 '수다' 에 독자를 끌어들인다. 연극무대에서 배우들이 관객에게 말걸듯, 등장인물들은 책을 읽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건다. 오죽 제목도 '내 말좀 들어봐' 겠는가 ( 원제는 talking it over) 난 극히 평범한 사람이야. 난 말할 게 없어. 그런데 요새는 어딜 봐도 자기 삶을 고백하며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뿐이야. ...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걸까? 어째서 <날 좀 봐. 내 말 좀 들어 봐>하고 외치는 걸까? 왜 사람들은 가만히 못 있지? 어째서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서 안달일까?(19pg)
스튜어트와 올리버가 친한 친구라는 이야기는 했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각으로(연애만큼 주관적인 것이 있을까?!) 스튜어트는 여자인 내가 보기에 건실한 은행원.이고, 정확하며, 풍채가 있고, 여자를 무조건 배려해주는 자상한 남자다. 스튜어트는 올리버가 보기에 구두쇠이고 지루하며 농담도 못하고(알아듣지도 못하고) 썰렁한, 자신이 구제해주지 않으면 쑥맥인 재미없는 은행원이다. 스튜어트 : '세상 사람 중 반은 자신감이 있는 것 같지만, 나머지 반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이쪽 반에서 저쪽 반으로 건너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자신감이 있으려면 먼저 자신만만해야 한다. 그건 악순환이다.'(35pg)
올리버는 잘생겼고, 매력적이고, 입을 다물줄 모르는 콩깍지 씌웠을때는 그 현란한 비유,농담,불어,독어,이탈리아어에 홀딱 반할 수도 있는 영어가르치는 백수.다.콩깍지 벗겨지면, 스튜어트에 빌붙는 백수. 배신자. 나쁜놈. 한심한놈. (다시 말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올리버 :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않을>생각이다. 기억은 하나의 의지 행위이고, 망각 역시 그렇다. 나는 내 생애의 초창기 18년을 기억에서 거의 다 지워 버리고, 그것을 퓌레 같은 유아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 과거를 너무 잘 기억하고 있으면 당신은 그 때문에 현재를 탓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과거 때문이야,... 그런 사고방식을 고쳐주겠다. 그것은 십중팔구 당신 탓이다. 거기에 대해 나에게 자세한 설명까지 요구하지는 마라' (28pg)
질리언? 나쁘지만, 이해안가는거 아니지만, 어쨌든 나쁘다. 현실적인것 하나는 맘에 든다.
아, 이 책은 그래서 무슨 내용이냐면. 연애이야기다. 연애이야기. 그것도 몹시 징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스튜어트가 되었다가, 올리버가 되었다가, 질리언이 되었다가, 그들 모두가 아닌 '나' 가 되었다가. 공감하고, 타박하고, 한심해하고, 공감하고... 공감하는 글이 나오면 책 모서리를 접곤 한다.
이 책, 보통의 책 못지 않게 접힌 모서리들로 너덜너덜해져버렸다.
연애소설 그만 읽고, 연애나 하시지? 하면 노코멘트.
'사람들은 화가 나고 슬픈 것은, 슬프고 슬픈 상태가 호전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난 잘 모르겠다. 만약 당신이 슬프고 슬프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친절하다. 그러나 만약 화나고 슬픈 상태라면 당신은 그저 트래펄가 광장 한복판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소리지르고 싶어한다. 그건 내 잘못이 아냐. 그들이 나한테 저지른 일을 보라고.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나? 이건 너무하잖아. 화나고 슬픈 사람들은 사실상 아무것도 해결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미친 사람들이다. '(319pg)
*책의 후유증으로, 멈추고 싶지 않은 수다가 계속 사족을 달게 한다: 대부분 멋지지만, 그 중에서도10장이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