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고 잡다.

2권만 따로 사구, 여섯권 사구, 9,10 따루 사구

음.. 에드 멕베인 87분서 시리즈 사 놓은 것의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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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0-05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헉... 읽고 싶어... 읽고 싶어... 근데 원서라 못 읽는 자의 슬픔... 님은 아시나요...흑
 

Stephanie Plum Serise


One for the Money ( 1994) 

 

 


 Two for the Dough ( 1996 )

 

 


Three to get deadly ( 1997 )

 

 

 

 Four to score ( 1998 )

 

 


High Five ( 1999)

 

 



Hot Six ( 2000)

 

 


Seven Up ( 2001 )

 

 

Hard Eight ( 2002 )

 

 

 


To the Ninth ( 2003 )

 

 


Ten Big Ones (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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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콕 찍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는데,

뭔가가 바뀌었다.

맘에 안들게 -_-+

난 주로 책만 사는데, 보기가 불편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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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문화> '슬픔이여 안녕' 저자 사강 별세(종합)
[연합뉴스 2004-09-25 06:51]
(파리=연합뉴스) 이성섭 특파원 = '슬픔이여 안녕'으로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여류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24일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옹플 레르의 병원에서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심장과 폐 질환으로 수년간 투병하던 중 이번주 초 집 근처 병원에 입원 해 치료를 받다 끝내 숨을 거뒀다고 고인의 친구들이 전했다.

그는 1935년 6월 프랑스 남서부 로트 도(道)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뒤 2차 대전 이후 파리로 이주했으며 소설 40편 이상과 희곡들을 남겼다.

그가 소르본 대학 재학중이던 18세 되던 해인 1953년 6주만에 쓴 '슬픔이여 안 녕'은 18세 소녀가 홀아비 아버지의 결혼을 막기위해 음모를 꾸미며 시니컬한 눈으 로 어른의 세계를 바라보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독자에 다가가는 감정적인 친밀성과 전복적인 의미로 발표 즉시 프랑 스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22개 언어로 번역돼 200만권 이상이 팔렸다.

고인은 생전에 "나는 18세 때 188쪽의 작품으로 영광을 얻었다. 그것은 일종의 '폭발'과 같았다"고 '슬픔이여 안녕'이 거둔 성공에 대한 소회를 밝혔었다.

콰레가 본명인 고인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유명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장 인물의 이름인 사강을 필명으로 삼았다.

그는 자유분방한 생활에다 과속과 담배를 즐겼고 1995년엔 코카인 복용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도박에 빠지기도 했다. 또 2002년엔 탈세로 법정에 서는 등 우 울한 말년을 보냈다.

그는 두차례에 걸친 결혼과 이혼을 겪었고 두번째 남편인 미국인 봅 웨스토프와 사이에 아들 데니스를 남겼다.

한편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사강 별세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고인은 여 성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프랑스는 가장 훌륭하고 감수성이 강한 작가중 한 사람을 잃었다"며 조의를 표했다.

leess@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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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부터 참 좋아했던 작가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당신 유죄입니다. 라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에서 말하던 남자 주인공. 남자주인공과 헤어지고, 자신도 모르게 와이퍼를 돌리며, 눈물임을 깨닫는 여자주인공( 영화에선 잉그리드 버그만의 연기가 잊혀지지 않지요) 

잊고 있었던 그녀를 어느날 신문 한켠에서 보았지요. 마약으로 잡혔는데,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고 하더군요. 

오늘 단신으로 본 기사는 이런 저런 옛생각, 예민하고, 섬세했던, 지금처럼 무뎌지고 체념하기 전의 제 모습을 떠오르게 해서 울컥 눈물이 납니다.

하늘에서도 쿨하게 잘 살꺼라고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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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문자화할 수 있는 모든 정보에서 나아가 디지털 콘텐츠로서의 eBook을 말하는 지금에는 문자뿐 아니라 디지털로 전환 가능한 모든 정보, 즉 음성, 소리, 영상 등 모든 정보를 편집하고 묶어서 출판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이라는 매체의 영역을 확장하고 재정의하기에 앞서 ‘책의 본령’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서 고집을 부린다. 책의 본령은 ‘문자 메시지의 편집과 전달’이다. 왜 여태 고집인가?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독서는 남의 생각을 수동적으로 따라 가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독서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사고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 진정한 철학자는 남의 생각을 많이 읽은 자가 아니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여기에 반만 동의한다. ‘독서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사고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독서를 ‘수동적인 행위’로 특징지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독서가 만일 수동적인 행위라면 독서는 한결 쉬워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독서는 쉽지 않다. 최소한 자신의 의식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저작을 읽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독자는 호흡이 길어야 하고 끈기가 있어야 하고 집중해야 한다. 저자의 생각을 계속적으로 축적, 종합, 정리, 기억하여, 자신의 사고로 그 그림을 그려 나가야 한다. 독자는 책의 외형적인 편집과는 별도로, 자신의 사고를 편집해야 한다. 독서는 선형적이다. 독서는 순차적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 독서는 독자의 의식적인 집중과 상상력을 요구하며, 따라서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독서는 독자의 관점에서 매우 능동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또 다른 창조이다.

독서를 창조이게끔 하는 데는 책이 ‘문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작용한다. 만일 문자가 묘사하는, 또는 설명하는 대상들이 직접 또는 즉물적으로 제공된다면 독자 편에서 메시지의 수용은 한결 쉬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시각, 청각, 후각, 또는 이들의 조합을 동원하여 메시지와 대상의 거리를 좁힐 경우,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그만큼 좁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과 독자가 실제로 이해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좁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정보 전달이 정확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독자의 능동적 참여가 개입할 여지가 줄어듦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해’는 없겠지만 동시에 집중과 상상도 없을 것이며, 독서 행위는 ‘창조’하는 것을 멈추고, 단순히 메시지를 ‘수용’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인간은 창조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창조에서 진정 자신이 인간임을 느끼고 희열한다. 무엇인가 없는 것을 만들어 내야만 꼭 창조가 아니다.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을 사고-편집력의 도움으로 정리하고 그것을 자신의 지식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다른 지식 및 경험들과 관계맺음을 시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사고 체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것. 그런 것도 지적인 창조 행위일 수 있다. 최소한 창조적인 수용이라고 불릴 충분한 근거는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독자는 창조를 해 나가느라 힘겨워하고 동시에 창조이기에 깊이 즐거워하는 것이다.

책이 인류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인 이유는 책이 촉발하는 ‘독서라는 창조 행위’ 때문인 듯싶다. 문자, 또는 사상이 문자로서 편집된 책은 디지털 매체와 비교해 볼 때 2차원적인 매체이다. 하지만 이 2차원적이라는 한계 덕분에 책은 독자에게 창조의 여지를 제공한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2차원적인 사고의 지도를 자신의 머릿속에서 3차원적인 현장으로 창조하는 사고 능력, 이것 때문에 인류의 지적인 발전이 이만큼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어려워야’ 하며, 항상 독자의 의식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힘겨운 과정이어야 한다. 아니, 바꿔 말해, 독자의 의식을 한 단계 끌어올리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독서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문자 메시지의 단순한 소비일 뿐이다.

함부로 ‘독서’라는 말을 하지 말자. 천박하거나 즉물적인 사고, 동시대인의 고정 관념, 판에 박은 상상을 담고 있는 사상의 문자화된 다발을 ‘책’이라고 부르지 말 것이며, 그것을 소비하는 행위를 감히 ‘독서’라고 일컫지 말지어다. 책이 그런 형태로 전락하고 독서가 이런 방식으로 안이해질 경우, 500년 간 인류와 함께 해 온 책이라는 물건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 다른 화려한 ‘매체’들에 비해 ‘책’은 너무나 초라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글ㅣ 배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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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4-12-0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는 쉽지 않다는 말에 적극 동의!! 기분이 좋을 때는 닥치는대로 읽게 되지만 우울하고 걱정있으면 책이 눈에 안 들어오죠 TV 시청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수동적 행위인데 비해, 독서는 사고를 요하는 능동적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독서를 위와 같이 정의한다면 베스트셀러나 자기계발류 책들은 다 사장되야 할 것 같네요

dkey01 2017-03-30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