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집을 사기로 마음 먹고, 사 놓았던 '무진기행'을 드디어 펼쳤다.

오늘 기차타고 천안에 가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 나니, 나머지 세권 사는 것이 주저된다.

|작가의 말 |

 

나와 소설 쓰기

제 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관사가 붙어다니는 [서울의 달빛 0장]을 쓰고 난 이후로 나는 소설을 거의 쓰지 않고 지냈다. [서울의 달빛 0장]을 쓴 해가 1977년이니까 그 이후 십팔 년동안 나는 소설가이기를 그만둔 꼴로 지내온 것이다.

1980년에 동아일보에 장편 연재를 시작했으나 광주사태의 참극으로 인한 충격과 분노는 펜을 잡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손을 떨리게 했다. 연재 십여 회 만에 소설 쓰기를 중단해버렸다. 그 후 몇 군데 사보에 콩트 몇 편을 썼을 뿐, 나는 친구들의 말마따나 '前소설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1980년대 초의 한국이 피비린내 나는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고 할지라도, 1981년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내 다시 펜을 잡고 소설 쓰기에 매달렸을 것이다. 소설 쓰기란 나에게는 항상 직업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나는 오히려 생계수단으로 다른 일을 하곤했었다. 소설 쓰기는 나에게는 신성한 것이었다. 소설을 구상하고 파지를 내가며 지금 쓰고 있는 장면의 의미를 정리하는 동안은 인생의 혼란과 무의미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 이 세계가 제법 조리 있어 보이고 의미 있어 보이는 구원의 시간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내 영안靈眼이 열리고, 하나님의 크고 하얀 손을 보게 되고 그 손에 의해서 어루만짐을 받게 되고 "누구냐?"라는 내 질문에 "하나님이다"라는 음성의 대답을 듣게 되고, 또 이후 1982년엔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인도에 가서 전도하라!"는 음성의 대답을 듣게 되고, 다음해인 1983년엔 예수 그리스도의 발현으로, 그 하얀 내리닫이 옷을 입으신 하얀 몸-하얀 머리칼, 하얀 수염, 하얀 피부의 얼굴 등. 하얀 모습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눈으로 보게 되는 등, 극치의 구원이 나에게 임하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기만 한 신비의 연속적인 체험이 나에게는 광주사태 이상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후 여러 해 동안 나는 오직 성경과 그 주석서를 읽고 기도 생활에 몰두하며 나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교정하는 일밖에 다른 겨를이 없이 지내왔다. 소설 쓰기는 이 시각 교정 이후에나 고려해볼 문제였다. 인도에 가서 전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서 그 준비와 관련되지 않는 일은 내 일상생활에서 배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쓰기의 문제는 해가 갈수록 더욱 새로운 필요성에 따르는 강한 욕구가 되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구원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만난 이상 소설 쓰기가 더이상 나의 구원 수단은 아니게 됐지만 소설이라는 언언행위가 하나님의 진리와 진실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수단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소설을 쓰기에 따라서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갚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공산주의자들의 선전문학처럼 상투적인 기독교 전도용 소설로 단순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실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소설은 오히려 보다 철저한 독창성과 보다 생동적인 형상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죄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접근과 관찰과 숨김이 없는 기록. 그리고 리얼리티를 오히려 돋우어주는 은유- 그것이 앞으로 내가 써야 할 소설이라는 비전이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빛이 밝을수록 인간들의 어둠은 더욱 고통스러워보였다.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였던 시절에는 인간들의 어둠이 때로는 귀엽기도 하고 아름다워 보인 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십수 년 동안 중단했던 소설 쓰기를 새로 시작하려고 보니 기왕에 써냈던 작품세계를 새삼스럽게 검토해보고 싶어졌다. 십수년의 간격이 이전에 썼던 작품들을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집결시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60년대 작가'라는 별칭이 붙어다니는데, 아닌게 아니라 이제 보니 이 카테고리야말로 1960년대 상황 인식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1960년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내가 써낸 소설들은 한낱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기괴한 독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60년대라는 조명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소설들은 일상적인 모습으로 동작하는 것이다. 내가 '60년대 작가' 임을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자리를 확인해보려고 고개를 돌려대며 두리번거리는 어린아이처럼 자기 시대의 현상과 징조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상력의 빛을 여기저기 들이대보고 있는 젊은 작가의 모습이 다소 그립게 회상된다. '하나님을 모르고도 잘도 견뎌왔군!' 작품 한 편 한 편을 들춰볼 때마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입술이 바싹 말라붙은 젊은 날의 내 모습이 눈에 선해지며 저절로 연민 섞인 감탄사가 중얼거려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무신론의 불타는 가슴을 후벼대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다 더 많다고 하면 이 작품들은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사람들의 것이 되리라. 하나님의 위로가 없는 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들의 상황은 항상 1960년대인 것이다. 이 깨우침이야말로 이 '김승옥 소설전집'을 출판하는 데 동의한 나의 이유이다. 만약 이 소설들이 바로 내가 하나님의 한없이 자애로운 손길에 닿기 이전까지 걸어온 그 궤적의 일부라고 하면 이 작품들이야말로 지금도 1960년대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미로에서 하나님께 이르는 골목으로 들어서게 하는 입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나의 뻔뻔스러운 희망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이 소설들이 지금 이대로도 바로 그들의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할 것이다. 되풀이하지만, 인간의 고통의 궤적을 쫓아서만 하나님의 사랑 깊은 손길이 다가온다는 사실도 분명한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해설한다는 것은 ...(후략)

* 볼드체는 내가 한 것임. -_-v

난 소속은 천주교 . 나름 유아세례 받았었고, 어렸을적부터( 아니 어렸을적에는) 성당에 매주 나갔었고, 대학교 들어간 후 2-3년에 한 두 번 갈까 말까 하다가 회사 들어와서는 맨날 지나만 다닌다. 성당신자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긴 뭐하지만, 종교는? 카톨릭이요. 라는 대답이 스스럼없이 나올정도는 된다. 가끔은 이번 주에는 가서 고백성사도 하고 미사도 참가하고 영성체도 모셔야지. ( 영성체를 한다고 하거나 성체를 모신다고 해야지, 영성체를 모신다고 하는건 번역자가 기본적 소양도 없고 어쩌고 해 놓은 리뷰를 봤었는데, 리뷰 보면서 뜨끔했다. 뭐, 우리 세계에선 영성체 모신다고도 했는데? -_-a 암튼) 라는 생각도 해보고 그러는 정도. 세상에 신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계셔.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내 마음 속에, 혹은 컴퓨터 자판 속에, 혹은 알라딘 속에, 혹은 책 속에 있을꺼야라는 생각은 하고 있다. ( 그렇다고 다신론자냐? 묻는 바보는 없겠지)

그런 정도의 '나' 가 싫어하는 것은 좀 과하다 싶은 사람. 그리고 종교로 돈 벌어먹는 사람. 그리고 종교를 빌미로 햇소리 하는 사람 등등등.  예를 들면 쓰나미 재앙은 주님의 심판이셨소! 혹은 스님들이 엔터프라이즈 타고 다니면서 패싸움 하는거.( 진짜 싸움. 말싸움 말고) . 그런것보다는 덜 싫지만,  개인적으로 '주 예수 믿으시오' 하면서 따라다니는 사람도 싫다.  누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시오. 그러면서 책들고 따라다녀준다면 냉큼 ' 네! 아멘!' 할텐데. 아,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우상숭배 아니야? 천주교에선 고백성사를 왜해? 하며 눈썹 치켜뜨고 묻는 사람들도 싫다. ( 눈썹 안 치켜뜨면 괜찮다.)

다시 김승옥 전집으로 돌아가서. 찝찌름한 기분의 작가의 말을 읽고 소설을 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재미있었다.'

그래서 다시 고민.

나머지 세권은....

혹은 생각의 방향을 바꿔서 왜 작가들이 글 쓸때 신내렸다고 하잖아? 그래. 그 '신 ' 아닐까? 붓 끝에 영감을 주는 신! 이라고 하기엔 그리스도 전도. 그러니깐. 그의 그리스도는 영감을 주는... 이라고 우기기엔 너무 비약에 오역인거겠지.

'강변부인' 만 한 권 더 사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저기.. 후략된 작가의 말에 나오는 해설 보고 산다고는 절대 말 못해.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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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02-21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단편 작가중에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가에요, 저에게 김승옥씨는..고등학교때 처음으로'무진기행'을 접한후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문장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던 섬세함..그의 감각적 문체에 반해서 엄청나게 밑줄 그어가면서 읽었던 책이었지요. 그 후 몇몇 단편들을 읽어봤는데, 언제나 경탄을 금치 못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김승옥 전집은 꼭 소장하고 싶은 전집이에요. (근데 언제가 될련지, 휴..)고등학교 이후로도 1~2년에 한번씩 꼭 무진기행을 읽고 있답니다.^^

하이드 2005-02-21 0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책은 재미가 있더란말이죠. 근데, 위처럼 작가의 말에서 '하나님' '하나님' 하면 왠지 거부감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라서 말이지요. 일단 지금 1권 읽고 있는 중이니깐, 다 읽고 나서 사거나 말거나로 대충 생각하고 있는데, 귀가 파닥거리는 저는 게다가 perky님의 '최고'라는 말에 내심 다 사기로 굳히기 들어가고 있습니다. ^^
 

1. 이벤트 상품들 ^^

발마스님을 위하여

 

 

 

 

깍두기님을 위하여

 

 

 

 

 

연보라빛 우주님을 위하여

 

 

 

 

로렌초의 시종님을 위하여

 

 

 

 

 

2. 시리즈 상품 채우기

 

 

 

 

 

 

 

 

 

 나머지는 다음에;;;

 근대와 현대는 아무래도 안 땡긴다.

 

 

 나머지는 다음에;;;

어쨌든 난 이제 막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니;;

 

 

 

3. 쿠폰북

 아, 과학책은 정말 안 읽는데,,

 

 

 

 

 그리고 사실 이것도 안 읽은 상태이긴 하지만, 음. 쿠폰에 약한 모습 보이는 나다.

 

 

 

 

4. 존 버거

 

 

 

 

 

5. 마이리스트 떨어진 기념!

 

 

 

 

음. 내일까지 계속 추가. 혹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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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卵 2005-02-19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이리스트 떨어진 기념으로 주문한 게 한 권 있어요. ^^

▶◀소굼 2005-02-1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코스모스...ㅠㅠ 이제 돈 쓰면 안되는데;;

하이드 2005-02-19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27007

^^ 코스모스는 왠지 꼭 사고 싶어요. 그죠?

그넘의 마이리스트는 여러사람 맘 아프게 했네요. 흐흐


panda78 2005-02-1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ㅡ^ 몽테뉴! 요것 제가 보내드려도 될까요?
저도 갈대님께 받은 책이긴 합니다만.. 긁적..
 

 

 

 

 

그 해의 마지막 눈 ' 황경신 ' 초콜릿 우체국中

눈이 내렸다. 그들은 이 눈이 이 해의 마지막 눈일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곧 봄이 온다는 겁니까, 내가 묻자 그들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은 그러니까 나를 이곳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두 사람은, 단정한 카키색 수트 안에 베이지색 와이셔츠를 받쳐입고, 와이셔츠보다 약간 진한 베이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넥타이 매는 법' 이라는 책자에 나오는 사진처럼 완벽한 넥타이였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넥타이를 제대로 맬 수 있죠?"

넥타이를 맬 때마다 몇 번씩 풀었다 맸다를 되풀이하는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나의 오른쪽에서 걷던 넥타이가 대답했다.

 " ……별로 연습을 한 건 아닙니다만."

음음, 하고 나의 왼쪽에서 걷던 넥타이가 헛기침을 했다. 눈은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조금씩 빠질 정도였다. 하지만 날씨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포근했다.

 "이제 곧 도착합니다." 왼쪽 넥타이가 말했다. "아주 늦은 것은 아닌 것 같군요.다행히." 오른쪽 넥타이가 말했다.

 "도시에서는 이런 눈을 좀처럼 볼 수가 없었는데."내가 말했다.

"그렇죠." 왼쪽 넥타이가 말했다."이곳의 눈은 폭신폭신하고, 보들보들하고, 아주 신선합니다."

"도시의 눈은 아무래도 거칠고, 퍽퍽하죠." 오른쪽 넥타이가 말했다. 해가 천천히 저물 때까지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저곳 입니다." 오른쪽 넥타이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작은 집 하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목적지인 '겨울'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그곳의 마지막 손님이었다. 나는 이 곳에 오기 위해 지난 며칠 동안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는데, 중간에 뭔가 착오가 생겨 정해진 날짜에 출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깔끔하게 넥타이를 맬 줄 아는 그들이 나를 이 곳까지 안내해준 것이다.

문을 열자 이미 도착해 있던 세 사람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남자 두 명, 그리고 소년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그들은 모두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는데, 어디에선가 식욕을 자극하는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손님이지요?"그녀가 말했다. 넥타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 다음 그녀 또는 나를 향해"서두르지 않으면 밤이 되어버리니까요."라고 말하고 곧바로 되돌아갔다.

 "저는 이곳의 가이드입니다.좋은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말했다.

곧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가짓수는 많지 않았지만, 어쩐지 입맛에 꼭 맞는 음식들이었다.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은 별로 이야기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밖은 완전하게 어두워졌고, 세상은 완벽하게 고요했다.

침묵을 깬 것은 감색 카디건 차림의 남자였다. 그는 가지고 온 가방 속에서 보드카 한 병을 꺼냈고, 작은 병에 그걸 따라서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우리는 싫다, 좋다는 말도 없이 잔을 비웠고, 감색 카디건은 다시 잔을 채웠다. 투명하고 작은 유리잔에 술이 채워지는 소리, 그 술이 누군가의 목젖으로 넘어가는 소리, 벽난로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에 빈 잔을 내려놓는 소리들이 완벽한 고요함 위에 작은 스크래치를 남겼다.

 

그날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집 뒤에 있는 작은 언덕에 올라갔다. 바싹 마른 나무들 몇 그루만 서 있는, 쓸쓸한 언덕이었다. 오후가 되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와 구운 감자로 저심을 대신한 후, 가이드가 말했다.

 "저는 잠깐 외출을 해야 해요. 저녁식사 전까지는 돌아올 거예요. 여러분들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세요."

 감색 카디건은 소파를 차지하고 금방 잠이 들었다. 다른쪽 남자, 그러니까 회색 터틀네크 스웨터를 입은 남자는 식탁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잠도 오지 않고 책도 가져오지 않았던 나는 멍청하게 벽난로 앞에 앉아,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날도 전날과 비슷했다. 저녁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감색 카디건이 가져온 보드카를 마셨다. 다음날도 전날과 비슷했다. 아침을 먹고, 언덕에 오르고, 돌아와 구운 감자를 먹고, 가이드는 외출하고, 감색 카디건은 자고, 회색 스웨터는 책을 읽고, 나는 불꽃을 보았다. 전날과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날은 언덕을 두 개 올랐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에는 세 개 올랐고, 그 다음날에는 네 개 올랐다. 다섯 개의 언덕을 오르는 날부터 점심은 밖에서 먹게 되었다. 역시 구운 감자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가이드의 외출 시간과 저녁식사 이후의 시간도 점점 짧아졌다. 아홉 개의 언덕을 오른 날, 우리는 보드카 한 병을 다 비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감색 카디건의 가방 안에는, 도대체 몇 병의 보드카가 들어 있는걸까.

 

열두 개의 언덕에 올라갔던 날, 밤 열 시가 넘어서야 거우 집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외출을 하지 못했고, 저녁식사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감자를 구워 보드카와 함께 먹었다. 커피는 생략되었다.

 "이게 마지막 병입니다." 감색 카디건이 말했다. 가이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어떠세요. 이렇게 겨울을 보니까."하고 물었다.

"좋군요. 이런 건 아주 옛날 기억 속에나 있는 건 줄 알았는데."회색 스웨터가 말했다.

 "그리 먼 옛날도 아니지만." 감색 카디건이 말했다.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내가 왜 겨울을 보고 싶어했던 건지." 나는 십이일 동안 내내 품고 있던 의문을 털어놓았다.

"그리웠겠죠." 감색 카디건이 말했다. "나도 그랬거든요."

 "우리는 겨울 한 철만 손님을 받고 있어요. 그분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몰라요. 저는 단지 그분들이 여기 묵는 동안, 겨울의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는 일을 맡았을 뿐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번 겨울의 마지막 손님들이죠. 예년에 비해 겨울이 빨리 지나가버릴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오늘까지는 괜찮네요." 가이드가 말했다.

 " 다들 봤어요? 우리가 첫 날 올랐던 첫 번째 언덕에 서 있는 나무들. 파란 순이 돋았던데." 회색 스웨터가 말했다.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넥타이들이었다." 마중 왔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죠. 근데 아세요? 밖에 눈이 오고 있어요. 이 해의 마지막 눈일 겁니다." 그들이 말했다.

"아마, 아니 틀림없이." 감색 카디건이 마지막 보드카를 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초록색 티는 보드카가 무지하게 땡겼다. 구운 감자도, 커피도, 새벽 3시 에디뜨 삐아프의 노래를 듣고, 한 번에 읽어내리지 못하는 커피테이블 책을 뒤적이며, 베란다 창문에 맞대어 있어 집에서 가장 추운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서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시린 발가락을 꼼지락 대가며 열심히 글을 옮기고 있다. 젠장. 보드카. 마지막 남았던 한 병을 동생 스키장 가는데 들려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보드카. 레몬 쥬스. 그리고 구운 감자. 양고기 몇점도 웰컴인데...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3시의 그 시간이 아니면, 땡기지 않을 그 보드카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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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2-1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에.. 이 글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특히 새벽의 하이드님께는 더더욱 보드카가 떙겼겠군요..^^
 

하도 배송이 안 되어서 메일 보내 보았더니,, 배송과정에서 뭔가 실수가 있었던게야. -_-+

이번이 겨우 두번째 주문이였는데,  음...

하필이면 재수없게, 백만번의 한 번 실수에 나같이 까다롭다면 까다로운 고객이 걸린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마존 닷컴에서는 오년 넘게 한달에 한 번 혹은 두번( 많을때는 세네번도!) 주문하면서 한 번도 이런 에러가 없었다.

바꾸어 말하면,

yes24의 오랜 고객이었던 내가, 지금 알라딘에서 무지하게 구입하는 것은 정말 yes24에서 샀던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딱지인데, 파본 두번! 다른 책 배송 두 번!, 메일 없이 상품 누락 한번! ( 난 다 기억한다.)이라면, 꽤나 타율이 높은 거 아냐?

알라딘에서 정말 정말 재수가 없어서, 백만번 천만번에 한 번 있는 실수가 나같이 시끄러운 고객에게 절대 안 잊는 고객에게 집중적으로 억만분의 1 확률로 일어났다고 봐야 되는거야? 그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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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2-19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무서워요, 하이드님.^^;;;
알라딘도 조심해야겠어요. 알라딘 배송이 자꾸 늦어서 저같이 무신경한 고객도 좀 짜증이 나는데 말예요.

하이드 2005-02-19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배송은 포기했어요. ( 정말? ^^;; 그래도 파본이나 다른 책 배송되는 것에 비하면) 제가 지금 장정일 책 못 찾아서 가만 있어서 그렇지 연휴 끝나고 온다더니, 안즉도 연락 없잖아요?

balmas 2005-02-19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존 닷컴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정말. 저도 아마존 닷컴에서는 한번도 배달사고를 겪은 적이 없으니 말예요. 반스앤노블이나 특히 프랑스 서점들에서는 종종 겪는 일인데 ...
물론 마켓 플레이스에서는 파본을 한 번 받아보긴 했지만 ...(-_-)a

perky 2005-02-19 0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알라딘에 화나는 점이 10권 중에 1~2권 정도는 꼭 더럽거나 찢어진 책들을 보내준다는 점이에요. 배송이 늦게 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는데, 새책 기대하고 있다가 헌책같이 생긴 것들이 오면 정말 짱나요. 아마존은 서비스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점에서 참 좋은 것 같아요.

마늘빵 2005-02-1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배송이 자꾸 늦어져서 좀 짜증이 나요. 전엔 '중국철학사'를 주문했는데 마치 헌책처럼 색이 바랜 걸 보내주잖아요. 쩝. 빳빳한 새책같은걸 기대했는데 말이죠.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만.

nemuko 2005-02-19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책일수록 상태가 별로인거 같애요. 얼마전에 과학책을 왕창 샀더니 죄다 어찌나 헌책 스럽던지 기분이 좀 상했거든요. 헌데 예스24랑 반반 주문했는데 거기서 온 것도 다 헌책 같아 그냥 혼자 화내고 말았어요. 빨리 안 빠지는 책들은 어쩔수 없나보다 싶어서요. 글구 어제 아마존 첨 들어가봤는데 무지 복잡해 보여서 금방 나와버렸어요. 역시 놀던 물에서 놀아야해~~암~~~
 

996906

 

산 책들.

 

 오오오- 품절되서 없는줄 알았는데, 있었다. 흐믓~

 

 

 

 사려다 만 책.

 알라딘에 있더라 , 없더라 -_-a 있었다. 머, 2004년 10월에 나온거긴 하네.

근데, 책은 디게 후졌더라.  다자이 오사무우우우우~~

 

 

음. 아직 알라딘에는 없네. W Korea 가 창간되었다.  역시나 커다란 잡지.

뭐, 창간호이고, 부록이 괜찮고, 발레리나 강수진, 폴 오스터?! 안도 타다오와의 인터뷰가 있다!!



* 이벤트 선물은 월요일에 주문하고 알려드릴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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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자 2005-02-1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6907

투데이 백~ ^^;;;;;;;;;;


로렌초의시종 2005-02-1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W Korea는 어떤 잡지인가요? 궁금해요~

하이드 2005-02-18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흔하디 흔한 여성패션지지요 뭐, 근데, 가끔 이슈를 만들어내고,( 잡지 표지를 각기 다른 패션 포토그래퍼의 각기 다른 모델로 9버전으로 만들어, 9권 내용 똑같더라도 다 사고 싶게 만든다거나 , 가끔 빅이벤트를 한다거나 ) 아, 그리고 다른 잡지에 비해, 책이 큽니다. 가뜩이나 박터지는 여성패션지 시장에서 부록으로 살아남는 잡지가 안 되기를 바래봅니다. 예전에 아더왕 책 포스터 두배만한 케이트 모스 사진 부록도 받아봤더랬지요.

하이드 2005-02-18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oday100은 안즉 이벤트의 여파가 남았다는 얘기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