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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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제목은 신경숙씨의 '스무살에 만난 빛' 을 패러디한거다.

굉장히 멋져 보이는 연회색( 어쩌면 살때는 하얀색이었을지도 모르는) 하드커버의 김승옥 소설전집이다.오프라인에서 사려들었기에,( 사람 손을 너무 타서 꼬질꼬질한 것이 1,2권이 있었다.)  벼르고 벼르다 읽기 시작했다. 착실하게 표지, 책날개, 작가의말, 목차 본문, 뒷책날개, 뒷표지 읽어내는 편인데, ' 작가의 말' 에서 고민이 몰려왔다. 아무튼 목차를 보니 단편이 하나, 둘, 셋,,, ,무려 열다섯개나 실려 있다.

김승옥에 대한 진짜인줄 알았던 허구: 박통때 있지, 김승옥이 글을 너무 잘써서 박통이 호텔에다 잡아 놓고 글 쓰라 그랬대. 왜 호텔방에 가둬놓고 글좀 써라 하고 싶은 작가 있잖아? 근데, 박통이 그랬댄다. 그런데, 요절해서 작품이 몇작품 없대지, 아마?

누구랑 누구를 헷갈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2004년도에 책까지 내시고 펄펄하니 계시다. 호텔방 이야기는 사실. 박통때.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서린 호텔에 방 잡아 놓고 ( 그렇다고 안기부 직원들을 막 문 앞에 세워놓고 그런거 아니고,그런거 상상했었다.) 옆방에 편집자 데려다 놓고 감시 아닌 감시를 시켰다는 것이다. 그의 경험은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단편 '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에 잘 나와 있다. (어디서부터가 논픽션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알 수 없지만, 순간 작가의 말이 뒤에 또 나온줄 알았다. )

어렴풋이 생각해보는 것이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 교과서에 나왔었고, 수능 문제에도 자주 나왔었고, 뭐, 그런거. 문화부 장관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작가여서 그 빽도 있었던걸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도 해본다.

교과서에 나오면 무조건 싫었던 '나' 에게 열아홉, 수능기출문제단편소설로만 여겨졌던 '무진기행' 이( 근데, 이 책 청소년이 읽어도 되나? 이런말 하는거 보면 나 좀 많이 나이가 들어버린것 같기도 하고 ) 스물 아홉 내 손에 다시 들어왔다. 무진기행은 중간에 나오고, 정말 신이라도 내린듯한 김승옥의 글빨( 표현이 경박하지만,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의 버라이어티인 이 책의 열다섯개나 되는 단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단연 '무진기행'이다. 이런 내용이였던가? 내 머리 속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것은  무진의 안개.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 오는 여귀가 뿜어서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

누구나 마음 속에 '무진'을 가지고 있다. 그곳으로 도피하거나, 그곳에서 치유당하거나, 그곳에서 위안과 안심을 얻거나간에. 그 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장소일 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고 각자의 관념속에만 존재하는 곳일 수도 있겠다.

그 밖의 단편들 중 '싸게 사들이기' 에서는 헌책을 싸게 사는 방법이 나온다. 곰보 영감의 헌책방에서 갖고 싶은 책에 침을 발라서 찢어내어 ( 인디안지일경우는 빙고다) 챙겨놓고, 나중에 책이 이렇게 많이 찢어졌는데 누가 사가겠소 하면서 싸게 책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 와서 찢어놓은 부분을 테이프로 붙혀서 승리감에 빠져 재미있게 보는거다.

''역사' 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하숙방에서 막노동꾼, 창녀, 술에 쩔은 절름발이 사내와 그 딸 등을 이웃하고 살다가 '규칙적'이라는 이름의 집에 ' 규칙적' 이라는 사람들에 둘러쌓여 살게 되면서, 그 극과 극 사이에서 갈등하는 백수의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그 비슷한 백수가 '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에도 나와서 모든 건물과 그 건물의 직선은 몬드리안에서 그쳐버렸다는 고정관념, 일본 카드에 나와 있는 빨간 해와 그 옆에 금빛으로 찍혀있는 글씨를 보고 일본 사람들은 금빛을 좋아하나보다는 고정관념등등을 주저리는 것도 볼 수 있다.

폭력과 희생자 ( 사람이기도 혹은 동물이기도 ) 에 대한 불쾌감을 자극하면서도 뭐라 욕하고 싶은 맘이 가득하면서도,  꼭 집어서 명쾌하게 '이런 죽일놈' 할 수 없는 찝찝한 감정들이 생기게 하는 '건' ,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 등과 같은 단편도 있다.

본인의 경험이 십분 반영되었을듯한 ' 차나 한잔' 과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와 같은 작품들도 있다.

어느것 하나 버리고 싶지 않고, 되새겨서 읽어도 또 좋을 것 같은 우리 작가의 단편을 만난다니 반가운 일이다.

벌써부터 두번째 전집 ' 환상수첩'을 읽을 생각에 기대감에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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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02-24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승옥 소설하면, '아련함' '우수' 뭐 이런 단어들이 떠올라요. 왠지 로맹가리랑 느낌이 비슷한 작가인거 같아요.

하이드 2005-02-24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멩가리. 아직 아껴두고 있답니다. perky님 리뷰 읽고, 너무 읽고 싶어서 냉큼 샀는데, 막상 사니깐, 아껴두게 되요. ( 미뤄두는거 아니고요~~~!) 이렇게 아껴두고 있는 책은 로멩가리랑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메뚜기요. 그리고 코넬 울리치의 상복의 랑데부, 등등. 몇개 있네요. 김승옥 전집은 아직도 네권이나 남아서 좋아요. >.<
 
숲을 지나가는 길 - An Inspector Morse Mystery 2
콜린 덱스터 지음, 이정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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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 드디어 읽어버렸다. '숲을 지나가는 길'. 이제 3. 사라진 보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건가. 근데, The jewel that was ours(사라진 보석)1991 이 먼저 나왔는데, 왜 숲을 지나가는 길1992 를 먼저 내 놓은 걸까?

처음으로 우리의 모스경감을 접했던 건 '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 그리고 ' 우드스톡을 향한 마지막 버스'.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에서 너무 즐거웠던것에 비해 '우드스톡...'은 좀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 숲을 지나가는 길' 다시 한 번 즐거워졌다. 원제는 The Way Through The Woods. 눈에 쏙 들어오는 제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제목으로 바꾸어 내지 않는 출판사에 감사한다.

몇가지 거슬리는 점부터 얘기하고 책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왜?왜? 알라딘에 책 소개가 전혀 없는 것인지. 줄거리나, 작가나 번역가에 대한것. 그리고 번역가 정보는 책 날개와 앞 뒤를 뒤져봐도 나와있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일인지. 혹시 찾으신 분 알려주세요. 딱히 멋지거나 거슬리지 않으면 번역가 찾아보지 않는데, 이 경우는 안타깝게도 후자. 뭐, 계속 거슬리는 건 아니고, 페이지를 얼마 안 넘긴 30페이지에

[왼쪽으로 돌아 모스는 브릿지 거리( 원서에는 Broad Street 라고 되어 있으나, 라임리지스에는 Broad Street 라는 지명은 없다. 대신 Bridge Street 가 묘사하는 위치에 들어맞는다. Broad Street 는 옥스퍼드 대학 근처 거리 이름, 작가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의 경사진 길을 올라가느라 애를 썼다. ]

아니, 무슨 이런 친절한 번역이 다 있는지. 콜린 덱스터의 팬으로서 이 친절한 역주는 정말이지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이 책에는 역주가 아래에 달려있지 않고 문장 사이 괄호 안에 달려있다. '역주'를 보지 않을 권리를 보장해달라! 보장해달라!

1년여전의 스웨덴 여대생 실종사건. 그 후 범인에게서 보내진듯한 익명의 편지 한 통이 경찰서로 배달되고, 실종사건은 살인사건이 된다. 휴가지에서 만난 신비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 모스 경감이 사건을 맡아 와이탐 숲을 수색하게 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두가지 소설은 ' 위철리 여자' 와 ' 폭스 이블' . 사건과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도 모두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나 더 모스 경감의 매력이 돋보인다. 그의 유머. 머리 좋은 티 내는 점, 뒤로 갈수록 꽤나 놀랍다. 여자만 보면 반해버리는 점 등등 낭만적이고 직관적이며, 술을 좋아하고( 숨쉬는 것과 같다고 하니..)현학적이다. ( 고전음악과 책을 좋아한다) 매 장 앞머리에 인용문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같이 있게 되었는가? 그것이 궁금하다!

                   T.S. 엘리엇( 1888~1965 : 영국 시인, 극작가, 평론가<눈물 흘리는 소녀>)

이런식으로 그 장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인용문들. 간혹 인용문을 찾을 수 없을때는 디오게네스 스몰이란 지어낸 이름으로 인용문을 적기도 한다. 원서에서는 작은 텍스트박스 안에 인용문들이 들어가 있다. 콜린 덱스터스럽고, 모스경감스러운 장치인듯하다.

모스경감 시리즈에서 '여자' 는 범인이거나, 희생자거나 대상화되어 나온다는 점은 좀 맘에 안 들지만 ( 어떤 추리 소설이 안그러랴? 손 꼽을 정도일 것이다) 모스경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경감님이다! ( 음.. 시므농의 메글레 경감 시리즈는 좀 더 안나와주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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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5-02-19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월에나 봐야겠네요. ^^ 요즘엔 바빠서 단편소설 하나 읽는데 며칠 걸린답니다.

하이드 2005-02-1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책 꽤나 두껍고 큰 편이에요. 생각보단 시간 많이 걸렸는데, 재밌었어요 >.<
아예 3 사라진 보석 나오면 먼저 보고 이 책은 그 담에 보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Fithele 2005-02-2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보았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인용하신 각주를 보고 불쾌하게 느끼신 이유를 조금 더 자세히 여쭤 보아도 될까요?

하이드 2005-02-21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린 덱스터와 셰익스피어를 비교하면 돌 맞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셰익스피어의 글에 스펠링이 틀린 것이나 틀린 지명이 있었는데, 번역자가 친절하게 수정을 해서 적고, ' 셰익스피어가 착각한 것 같다' 라고 한다면, 뭐, 이런?! 하지 않겠습니까?제게는 콜린 덱스터가 셰익스피어입니다. 물론, 위의 지명에 대해 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 '사실'을 알려주고자 하는 의도는 이해 안가는 바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작을 수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각주가 아래에 달려 있지 않고, 문장 중간에 달려 있는 것은 '각주를 읽고 싶어하지 않는 ( 특히나 역자가 달은 경우에는 ) 독자의 권리를 무시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책의 흐름을 끊는 각주는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이거든요. 반다인의 '그린 살인사건' 같은 경우에는 아예 각주와 역주가 매 장 끝에 달려 있더군요. 전 차라리 궁금하면 뒷장을 넘겨볼 지언정 그와 같은 각주를 선호할 정도이니, 문장 중간중간의 각주가 얼마나 거슬렸는지 아시겠지요? 물론 각주가 중간에 들어간 것을 선호하는 독자도 있겠으나, 일단 번역이라는 한 번의 큰 변화를 겪는 책에서 가능한 원본과 비슷하게 보고 싶은 맘이라고 한다면 너무 큰 바람일런지요. 각주의 위치 빼고는 번역상 거슬리는 부분이 30페이지에 나와있는 지명정도밖에 없는데에 비해 강하게 지적한 것이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이 책에 대한 애정은 이 책 아래에 링크되어 있는 제 페이퍼에서 볼 수 있듯이 의심하시면 안되구요. 책 제목을 눈에 안들어오는 ' 숲에 가는 길' 로 원제에 충실하게 하신 것도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all that remains 를 하트잭이라는 별로 좋지도 않은 제목으로 바꾸어 놓는 걸 보고, 아, 진짜 다행이다. 생각했거든요. 제 지식이 미천하여 예라고 드는 것들이 제가 아는 것에 한계지어져서요, 다른 생각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

Fithele 2005-02-21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다른 생각이 있어서 말씀드린 것은 아니고 리뷰에 쓰신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되어서 그냥 여쭤본 것 뿐이랍니다. ^^ 원작 수정은 어떤 글이든 간에 안될 일이라는데 십분 동감합니다.

각주에 대해서는 개인 취향의 문제입니다만 저의 경우엔 뒷장을 넘겨 찾다가 그만 중요한 단어를 보거나 하는 일을 몇 번 당했더니 ^^; 뒷장에 몰아놓은 각주보다는 같은 페이지의 맨 아래줄에 달거나, 그 자리에 다는 형식을 선호하게 되더군요. 그게 서너줄씩 되면 좀 많이 짜증이 나지만요...

하이드 2005-02-2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는 순간 혹시 번역하신 분인가 해서 뜨끔했었어요. 전 각주 안 읽고 넘어가는편이라서요, 없는 것을 선호하구요. 보르헤스 선집을 보면 페이지의 반 이상이 각주이지요 . 런던 " 영국의 수도 이런식이구요. ^^ 완전 짜증에 패스하고 넘어갔는데요, 닥터 노렐과 미스터 스트레인지의 경우에도 무지하게 각주 많던데, 환타지이니만큼 다 읽어줘야할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 책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결정적으로 번역자가 원본 수정한점에서 짜증이 나면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개인적인 선호부분을 짚은거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poirot 2005-02-2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딴지는 아니고 저도 역주에 관해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역주는 참 맘에 들었습니다. 참 성실하게도 조사했다는 것과 그만큼의 성의를 보인 것에 내심 기분이 좋더군요. 세익스피어에 비유하신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역주가 없었더라면 디오게네스 스몰이란 가상의 인물도 모른채 지나갔을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나봅니다.

하이드 2005-02-22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말씀드렸듯이 각주부분은 개인적인 취향이겠지요.제 개인적인 취향을 리뷰에 쓴 것이고요, 단, 원본을 바꾸는 것은 월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정인 2005-02-22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역주 때문에 난리가 났군요. 사실 출판된 책은 제가 원래 단 역주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겁니다. 번역 작업이란게 번역자가 한 번에 해서 넘기는 게 아니라 번역을 해서 넘기면 출판사 편집자께서 감수 작업과 윤문을 하시고 또 제가 보고 수정을 하고 ... 이런 과정을 몇 번 씩 거치거든요. 다른 번역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 같은 경우 역주를 넣는다고 돈을 더 받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를 기준으로 해서 좀 생소하다 싶거나 독자들께서 알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주를 넣어주는 편입니다. 특히 거리나 건물 묘사같은 건 영어로만 보면 이미지가 안와서 지도나 사진을 직접 찾아보고 주를 넣어줍니다.
문제를 삼으신 부분도 지도를 찾아보다가 알게 된 거구요. 이런 건 거의 출판사에서 최종 수정을 할 때 거의 날아가긴 하지만 편집자 분이 윤문하실 때 글 흐름을 전반적으로 아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꼬박꼬박 넣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운하살인사건’도 역주를 꽤 넣었었는데 많이 날아간 거였습니다. 이번 책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출판사에서 제 정성이 갸륵했는지 주를 많이 살려 준 거구요. 그리고 주 위치는 제 소관이 아니라서.... 개인적으로는 저는 페이지 하단에 있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데 주가 너무 길지만 않으면 지금처럼 하는 것도 예쁘긴 하더라구요.
지적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제 생각엔 월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모토는 ‘독자로 하여금 모든 걸 알게하라’입니다. 그냥 고쳤다면 몰라도 작가의 실수가 확실하고 고쳤다는 걸 알렸다면 그걸 월권이라고 하기엔 좀... 아마 그대로 두고 주를 넣는 게 제일 옳았겠지요. 사실 저는 원문 그대로 번역은 좋은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문장 구조의 차이도 있지만 가장 큰 건 대상 독자의 문화와 정보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적하신 부분도 영국에 사는 (아마 그 중에서도 라임 리지스에 사는 사람이긴 하겠지만요) 사람이라면 틀린 걸 알텐데, 우리는 모를 수밖에 없는 사실이거든요. 이런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두 가지 방식이 있을 텐데 영국의 문화적 맥락을 완전히 우리의 문화적 맥락으로 옮겨놓거나(이러면 역주는 필요가 없겠지요, 예를 들어 A레벨 시험 같은 단어를 학력고사나 수능으로 옮기는 방법), 최대한 원문을 살리고 역주를 통해 동일한 정보를 주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영화 쪽에 뛰어난 번역가들은 대개 첫 번째 방식을 훌륭하게 사용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활자매체의 경우 궁극적으로는 두 번째 방식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다른 문화에서 생산된 텍스트에 대해 단순한 즐거움 뿐 아니라 문화적 이해를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배경 정보가 소설의 주제와 직결될 때도 있습니다. 불충분하게 주가 넣어졌기 때문에 아셨을지 모르겠지만 작품 속의 버밍엄 식스나 길포드 포 같은 사건들은 몰라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보를 가져야 하는 사건들입니다.
이 사건들은 둘 다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오심 사건들로 청소년에 대한 강압적인 수사와 가혹한 처벌이 몇 사람의 인생에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줬던 사건들입니다. 콜린 덱스터는 이 사건들을 언급함으로써 소설 속에 나오는 10대 폭주족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가혹한 태도를 은근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업 소설에서 무한정 주를 넣을 수 없기 때문에 저 같은 경우에는 두 번째에 중심을 두고 절충하는 편을 택하고 있습니다.
사실 번역이라는 게 크게 돈이 되는 직업은 아니기 때문에 날림 번역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걸 부추기는 출판사도 많다고 듣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독자로서 번역 때문에 짜증나는 경우도 많이 겪었습니다. 어쩌다가 원문을 비교해보고 오역을 발견하면 사기당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구요. 그래서 적어도 저만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한 번역에도 오역이 있겠지만 (실제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썩 잘하는 번역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실력이 부족해서지 노력이 부족해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지나쳐서 나타나는 일이니까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덧붙여 알려드리면 콜린 덱스트는 책에 꼭 한 두 가지 씩 실수를 하곤 합니다. 이 책에도 역주로 밝힌 부분 뿐 아니라 서장 제일 첫 부분 비트겐슈타인 인용문도 출처를 잘못 적어놓았더군요. ‘철학적 탐구’가 아니라 ‘논리철학논고’에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이것도 주를 넣었는데 그건 빠졌더군요.)

(미스 하이드님, 책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이번 책은 지난 책만큼 빨리 서평이 안올라와서 책이 재미없었나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이 작품이 ‘옥스퍼드 운하살인 사건’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독자들은 다를 수 있겠다 싶어 좀 불안했었어요)

(피델 님이 올리신 모스 경감 TV 시리즈는 저한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주가 맘에 드셨다니 기쁘군요. Poirot님. 처음 덱스터 책 번역을 맡았을 때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사이트들이 ‘하우미스테리’하고 님의 이글루 블로그였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이드 2005-02-22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주가 들어가는 것은 추가적인 노력이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번역자님이 직접, 그리고 고수분들이 다들 답글달아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 역주/각주의 위치는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얘기한건 보셨지요? 별로들 안 좋아하는 '그린 살인사건' 과 같은 각주.역주가 제 취향인 것이 대다수 독자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고 있구요, 그렇다고 마이리뷰에 제 취향을 적으면 안 된다는건 아니시죠? 그리고 다들 원본수정에 대해서는 공감하시는거라고 믿겠습니다. 원본은 그대로 놔두고, 역주에만 표기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책들에서도 그런 경우를 종종 봐왔구요. 콜린 덱스터는 (전 해문 시리즈로 처음 접했으니, 잘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이 처음 접한 작품이었고, 그 작품이 마음에 쏙 들었는데,해문에서 나온다니 너무 반가운 마음인거지요.) '라임리지스' 에 사는 사람들만 보는 작가는 아니지 않나요? 영국의 작가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스테리 작가이지 않나요? 라임리지스에 사는 사람 외에 그 책을 읽고, 여기 거리 이름 잘못썼네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도까지 찾아보시고 틀린걸 찾아내셨다니, '번역' 이란게 단순히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 아님에 감탄스럽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제가 역주, 각주 싫어 잘난체 아무리해도, 역주 없이 봤을때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된 것도 사실이구요. 다시 입장 바꿔서,위에 셰익스피어 얘기 나왔으니깐, 한마디 더요. ^^ 제가 요즘 재미있게 읽고 있는 김승옥의 단편이 영어로 번역될때, 번역자가 지명 틀린것을 발견하고 원글의 지명을 바꾸어서 적는다면, 잘못된거란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사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작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작가는 창작을 하는 '신' 과 같고, 아무리 작가가 틀렸어도, 작가의 동의 없이 수정하기를 바라지는 않지 않을까요? 간단하게 제 생각 말씀드릴 수도 있는데, 얘기가 주저리주저리 길어지네요 ^^ 답글 남겨주신 분들 얘기 듣다보니, 이게 맞나 저게 맞나 생각하다 보니 그랬습니다. 글남겨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번역자님께서 직접 글 남겨주시고 입장을 말씀해주시니 더 감사드립니다.

Fithele 2005-02-23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정인님, 좋은 번역 정말 고맙습니다. 아마도 이 책 서평이 빨리 안 올라오는 이유는 분량이 많아서 아직 저처럼 다 읽지 못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 사실 덱스터의 모스 시리즈를 좋아하면서도, 다 읽고 나서 항상 리뷰를 쓰기에는 항상 뭔가가 하나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 지금까지 단 한 편의 리뷰도 쓰지 못했던 것이 사실인데, 이번 [숲을 지나가는 길]은 정말이지 너무 재미있어서 마치고 나면 꼭 추천 내지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모스 경감 TV 시리즈가 도움이 되었다니 더욱 기쁩니다. 그리고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신 미스 하이드 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

그린브라운 2005-02-24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이 성의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번역하신 분께서 직접 글까지 올려주시니 더 반갑습니다 ^^ 계속 좋은 번역 부탁드립니다..그리고 이왕이면 서재에 미완의 역주를 올려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 저는 사실 각주, 역주.. 이런 것을 매우 좋아해서 차근차근 읽는 편이거든요...그리고 이런 걸 읽음으로써 작품에 좀더 가까와지는 기분이 들어서요...

하이드 2005-02-24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는 개떡같이 얘기해도 콩떡같이 알아듣고, 금떡같이 얘기해도 콩떡으로 알아듣기 때문에, 뭔말이냐? -_-a 아무튼, 책을 쑤욱 쑥 읽어나가는 편이라, 거슬리는거 잘 모르거든요. 근데, 가운데에 들어가 있으니, 저게 눈에 유독 뛰었었나봐요. 다들 성의있는 번역에 박수를 보내니 번역하신 분도 보람이 있으시겠습니다. ^^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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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해피앤딩.


식탁과 침대로의

단 한 번의 초대...


재료 :

부엌 식탁과 바닥을 흥건히 적실 정도의 눈물.

팔팔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잡아 넣었을 때의 도넛이 된듯한 느낌을 주는 그의 눈길.

식중독을 일으켜 다 게워내게 만들 정도의 겉잡을 수 없는 그리움.

손 닿지 않고도 순수한 소녀의 가슴에서 관능적인 여인의 가슴으로 바꾸어 놓는 또 그의 눈길. ( 딴 놈 아니고, 아까 ‘그’ )

몸의 병이건 마음의 병이건 다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 소꼬리 수프.

--------------------------------------------------------------------


이 이야기에는 양파 깔 때 나오는 눈물이 있고, 마녀같은 엄마가 있고, 사랑을 가로채는 언니가 있고, 티타를 배신하는 겁쟁이 ‘그’ 가 있다.


열의 화신으로 달리는 말 위에서 말의 움직임과 구별이 안 가게 사랑을 나누고 남자의 정력을 소진시켜버리는 여대장 헤르트루디스가 있고, 부엌신, 못된 엄마 말고 티타를 길러준 사랑하는 엄마, 현명한 엄마, 냄비가 끓는 수프를 알아주듯이 티타를 알아주는 나차가 있다.


책 속에 빠져들고, 티타의 눈물에 빠져들고, 보이기 위한 인생의 드라마 속의 눈물이 아니라 솔직하고 거리낌 없는 터져나오는 눈물이다. 티타의 사랑에 활활 타오르며, 멕시코 어느 곳 막내딸로 태어나서 사랑도 결혼도 허락되지 않은채 그녀의 심장의 불꽃에 찬물을 끼얹는 파괴주의자 마마 엘레나를 돌보며 살아가는 티타의 부엌에서 나는 헤매인다.


죽을만치 슬프다가 열받는다.

강렬하다.

원색적이다.

후련하다.

코가 시큰할 정도로 맵다.

다 타서 재가 되었다.

 

해피 앤딩.

  

내가 본 가장 섹시한 소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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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 2005-02-15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다! 나도 사야겠다;;

하이드 2005-02-1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근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술술 넘어가는 책임.

perky 2005-02-16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읽으셨군요.정말 장난 아니죠, 이 책!

미세스리 2005-02-1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다면 슬쩍 보관함! 캬-

Shaylor 2005-02-2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 이 책 읽어볼테야요 ^-^

하이드 2005-02-21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섹쉬한 소설~ 우우~

연우주 2005-02-24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덕에 저도 사서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었답니다. 감사!

2005-02-24 0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5-02-24 0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도 감사! 정말 재미있죠? 이런 책은 아무리 영화로 잘만든다고 하더라도, 책읽으면서 맘껏 상상하는걸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아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첫눈에 반했고, 사랑에 빠졌고, 권태기를 겪었고, 버림 받았고,좌절했고, 자살했고( 비록 털어넣은 약이 나중에 비타민제로 밝혀지긴 했지만) , 그리고 그 사람을 잊었다. ...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눈에 쏘옥- 들어와버리는 첫문장 : 1.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운명적인 만남이라, 소시적부터 '소개팅'이나 '미팅', 그리고 나이 먹을만치 먹어서는 '선' 이라는 이름하의 모든 만남을 다 어색해하고, 지루해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나가는 것은 처음 한 두번. 아무것도 모를때 대략. 대학교 1학년 1학기때. 그리고나면 점점 ' 역시나' 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고, 이제는 집에서 몰릴대로 몰려서, 옷 사러, 혹은 머리 하러, 혹은 백화점 상품권 따위의 떡고물을 기대하며 아주 가아끔 나간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혹은 점심 먹고 들어와서 나른하니 일이 손에 안 잡힐때 운명적 만남을 꿈꾼다. 그러나. 꿈꿀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운명적 만남인 것이니.

책 속의 ' 나' 와 클로이처럼 빠리발 런던행 비행기안에서 '우연히' 만나서 ' 첫눈에' 반하고 '사랑에 빠진다' 는 것은 참. 그야말로 책 속에 나오는 말이다.  책 끝까지 읽기 전에는 나름 이번 빠리 여행때 런던으로 유로스타 타고 가려고 했는데, 비행기로 바꿔봐? 궁리하긴 했지만서도,

과거의 몇번의 비행기 여행, 혹은 기차여행, 혹은 버스여행이라도 떠올려볼 때 내 옆에 남자가 앉을 확률, 나와 사랑에 빠질 남자가 앉을 확률( 나'와' 가 아니라 나'만'이라도!) 은 ... 없다고 봐야지. 음. 없다고 봐야지. 맘 편하게. ( 이 순간 나는 벌써 책의 마지막 장의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다가 극히 미미한 확률로 Mr./Ms. Perfect를 만나게 된다면, '금욕주의' 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더 빨리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사랑' 에 ' 빠져버리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출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대게는 무의식적인]요구, 사람의 출현에 선행하는 요구의 제 2단계에 불과하다.'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가고, 그 느낌에 놀라서 상대를 밀어내기도 하지만, 이미 서로간의 화학반응이 일어나버린 두 사람이 떨어지기란 불가능하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 앉은 것처럼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색한' 순간들마저 다 지나가게 되고, 그/그녀를 가지게 되면, 욕망이  한 순간사그러들게 될지도 모른다. 롤랑 바르트가 그랬댄다. '욕망은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 이라고.

그 단계를 잘 겪어낸다면,

이제 진정 그/그녀를 '*마시멜로'하게 될 것이다.

* '사랑'은 이미 너무나 많은 손을 거쳤다. '사랑'은 계속되는 사랑 이야기들의 무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켜 때문에 다 닳아버린 것들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언어가 독창적이고 개인적이고, 완전히 사적이기를 바라는 순간에 마음의 언어의 어쩔 수 없는 공적인 성격과 마주치게 된다. 20세기 말 어느 날 밤 서구의 중국 식당에서 생일을 축하하는 남자와 여자. 연인들의 모습을 하고, '사랑한다'는 닳고 닳은 말을 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그녀  팔꿈치 근처에 있던, 무료로 나오는 작은 마시멜로 접시를 본다. 의미론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갑자기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길래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겠지만,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은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가장 친한 친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가족보다도 더 친밀해진다.  꿈꾸던 사랑이 이루어졌음에 '너무' 행복해져버린다. 그토록 바라던 미래의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감. 을 느낄정도로.

'너무 ' 행복해진 다음에는?  무슨일이?

사랑을 과장하고, 의무감에 사랑하고, 사랑을 배신하고, 배신당한 사랑에 좌절하고, 괴로워서 죽을것 같고, 그러나 잊고,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왜 나는 이 책을 발렌타인데이에 다 읽어버린걸까?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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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2-14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다 읽고 역자후기 읽고 화나는거.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의 처녀작이란다. 스물다섯살!!!!!!!!!!!!!#$)!$%($^*@#에 이 책을 썼단다! 우씨

마늘빵 2005-02-1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물다섯살... ㅡㅡa 쩝. 나의 재주없음을 한탄해야지. 수많은 보통인이여 보통을 따라가지 못하는가. 이게 근데 소설인가요? 읽고 싶어지네. 안되겠다. 적립금 풀어서 이 책 사야겠다. 님 땡스투 드릴게요.

깍두기 2005-02-14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이렇게 멋진 리뷰를 어찌 쓰셨수? 이 멋진 사진들은 다 뭐요?^^

하이드 2005-02-1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발렌타인데이라는걸 뒤늦게 깨닫고 필받아서 막 옛날 사진 찾아 리뷰에 끼워넜어요. 에구에구. 잘 봐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ㅂ/// 아하하;;;

울보 2005-02-1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저도 왠지 이책을 읽어야지 하는 힘이 속구칩니다...

미세스리 2005-02-15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완젼 러블리! 바로 추천!! 저도 왠지 사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Phantomlady 2005-04-04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얼마전 화이트 데이 때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궁시렁거리며 이 책을 주문해 읽었는데 ^^

햇살가득눈부신날 2005-05-3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탱스투~
 
세상 끝의 풍경
쟝 모르.존 버거 지음, 박유안 옮김 / 바람구두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쟝모르의 새 책은 마치 토마스 만의 소설을 펴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의 산] 대신 제네바 사람들에게 '세상끝'이라 알려진 곳의 한 병원이 있고, 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토마스 만의 주인공 자리에는 암 투병 중인 늙은 사진가 쟝 모르가 있다. -<선데이 타임스>, 1999.10.24

라는 책 뒷면의 글은 이 책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표지의 그리스 정교회의 세 사제의 사진을 찍게 된 이야기.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리스로 신혼여행을 간다. 석양이 질 무렵 해변을 따라 긴긴 산책을 나선다. 해수욕 인파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광활한 바다, 석양이 이루어진 화려한 광경만이 눈을 가득 채운다. 조그마한 레스토랑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바닷가에 바싹 붙은 테이블에 세 명의 정교회 사제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서 참으로 맛갈스럽게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정교회 사제 세 명, 둥글고 검은 모자 세 개, 그 아래 뽀얀 백발 하나 둘 셋... 비어 있는 넷째 의자는 불청객을 기다리는 듯했다. 우리는 둘이었으니 그 빈 의자는 우리 차지가 될 수 없었다. 내가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내는 동안 아내는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 멀찌감치 물러났다. " 여보게 젊은이, 하느님의 사람 셋을 덤으로 앞에다 두고 지금 열심히 석양을 찍고 있는 게지?" 제일 나이 많은 사제가 내게 그리스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거의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고, 그렇기에 이 말은 내가 지어내는 말 혹은 상상하는 말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의 다 안다는 듯한 웃음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해석하도록 만들었던 것. '

책 소개에 쟝 모르/존버거 라고 되어 있는건 좀 반칙이다. 책의 시작은 ' 내 친구 쟝 모르를 스케치하다' 라는 제목으로 존 버거의 쟝 모르에 대한 이야기가 일곱장 정도 나와 있다. 35년이 넘는 그들의 우정. 존 버거는 쟝 모르의 모습에서 '소년'과 ' 개'를 본다고 한다. '관심 어린 무관심'의 사진을 찍고, 모든 것을 보았지만 여전히 모든 피사체에 놀라움을 가지고 사진으로 담는 사람. '세상끝' 에서 쟝 모르의 우정을 받아 누렸음을 감사해하는 존 버거의 짤막한 글이 끝나면, 이제, 드디어  at the Edge of the World 로 시작되는 쟝 모르의 여행기가 시작된다.

'세상 끝'의 쟝 모르는 아브르Avre강이 구비쳐 흐느는 시골 풍경을 한 눈에 내려다보는 언덕 위의 병원에서 종양제거수술을 받는다. 제네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곳을 '세상끝'이라고 알고 있다. 수술이 잘 끝나고 회복할즈음 병원 꼭대기층의 까페에 간다. 그곳의 까페는 '광활한 파노라마의 전망을 갖춰 목가적이고 아름다은 곳이었다. 바로 그 풍경이 내가 청소년 때부터 알고 지낸 유명한 세상끝이었다. ' 그는 제네바의 '세상끝'에서 확인한 거리감을 화두로, 머릿속 여행앨범을 펼쳐놓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길가에서 여러 ' 세상끝' 정거장을 다시 만난다.

제네바 세상끝에서의 사진들이 몇장을 차지하고 , 드디어 195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의 신혼여행으로 기억을 더듬어간다. 유네스코와 세계보건기구 국제적십자 등에서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약하며 '저널리스트 겸 여행자'로 전세계를 누볐던 그의 기억 속의 세상끝들은 예사롭지 않다.

폴란드의 유대공동체. 루마니아의 말라리아 사례지역에 몰래 들어가기. 그리고 몇 장 더 넘기다가 기대하지 않았던 갑작스런 낯익은 이름의 장소가 등장한다.  ' 난데없이 북한에 가다 - 북한, 1962' 검열 당한 필름 때문에 별 사진을 건지지 못했던 여행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에 매료된 상태였다고 한다. 다른 여행지보다 더도 덜도 아니였던 그 곳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는 그가 별 관심 없었던 남한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는 여러 여행기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곳 중 하나이다. 1962년. 북한. 쟝 모르.

때로는 사막으로 때로는 아프리카 오지로 세상 곳곳에 발자국을 남긴 쟝 모르. 인생의 황혼기에서 ' 세상끝'이라는 주제의 과거의 앨범을 펼치는 작업을 마치는 마지막 사진은 빈 방이다.  반 쯤 보이는 커튼 없는 창문 밖은 밝다.  매트리스가 없는 철제 침대가 놓여져 있고, 하얀 벽에는 나뭇잎이 고르게 달려 있는  나뭇가지 한 줄기가 천장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쟝모르는 다음의 말로 책을 맺는다.

실제로 세상끝에 이르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부단히 움직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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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anpark 2005-02-1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쟝 모르/존버거 라고 되어 있는건 좀 반칙이다"는 리뷰 말씀에 붙입니다: 존버거+쟝모르,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대개 이 순서로 저자 이름이 실립니다. 그런데 유독 이책만 쟝모르+존버거로 되어 있어, 영어판을 펴든 저도 번역하기 전에 갸웃했습니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처음부터 번역하다보니) 첫머리를 읽은 뒤, 아하, 존버거가 40년 지기 쟝모르의 작품집에 어떻게든 기여하고 싶었구나, 두 노인의 애틋한 우정이 여간 아니로군, 금세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더군요. 존버거를 애독하시는 많은 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미스하이드님과 엇비슷한 불만(?)이 있으실 듯한데, 저는 두 노인이 이 책에 함께 이름을 올릴 때의 맘을 헤아려보면, 그리고 그 바탕을 이룬 둘 사이의 - 마치 꼬임없는 왼발과 오른발의 협력처럼 - '이미지 메이커 + 텍스트 메이커' 공동작업, 그 일 속에서 더욱 다져진 그들의 우정을 헤아려보면 마땅히 '쟝모르+존버거'가 되었어야 했구나, 이해하시리라 여겨집니다.
사족 한마디: '쟝모르+존버거'가 '좀 반칙'이라고 쟝모르에게 얘기하면, 듣는 쟝모르 선수, 억수로 심정 상할 듯하군요 ("내가 뭐 존버거 시다바리가..." ...^^)

하이드 2005-02-1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번역자님이 직접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 존 버거의 팬 치고 쟝 모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죤 버거의 글이 여섯장 아니라 여섯줄만 있고 나머지는 다 쟝 모르의 글이라고 해도 불평하지 않을겁니다. 원서에도 그렇게 되어있었군요. 만약 이 책이 제가 벼르고 벼르다 산 존 버거의 책이었다면 좀 많이 억울했겠지만, 다행히 세번째 읽는 책이었기에 쟝 모르와 존 버거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어서 그러려니 생각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버거의 글은 이 책에서 서문 이상이지 않아보입니다. '행운아' 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미지+텍스트의 작업. 텍스트에 대한 보충으로서의 사진이나 이미지에 대한 설명으로서의 사진이 아닌 꼬임없는 왼발 오른발의 협력과는 거리가 멀어보이거든요. 심정적으로 큰 힘이 되어주었고, 30년 넘는 우정을 나누었다고 해도 공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 같아요. 원서 찾아보다보니, 표지가 북한 소녀의 그림자 사진이네요. 우와 - 그리스정교회 사제들의 사진도 좋지만, 원서의 표지를 따라갔어도 더 의미있었을 것 같아요.

balmas 2005-02-12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니까 사서 읽고 싶어지네요.^^ 읽어야 할 책 많은데 ... 힝.

하이드 2005-02-12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은 아직 안 읽으셨군요.

하이드 2005-02-14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ply to: RE: regarding ' At the edge of the World'

Dear Sunyoung Kim
I understand your point but we were merely complying with Jean Mohr's wishes. They are very close friends and it was perhaps a gesture of endorsement from John Berger, too.
I hope you enjoyed the book all the same?
With best wishes
Maria

Maria Kilcoyne
Publicity and Rights Director
Reaktion Books

하이드 2005-02-1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nderstood, but...

@euanpark 2005-02-1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ow! (the only word that I can say to Ms Hyde's splendid passion and inspiration!)

사실 그닥 결정적이지 않은 사족을 붙들고 불쑥 딴지 건 듯해 못내 켕겼는데, 이렇게 진지하고도 투철한 호기심을 발휘하여 쟝 모르 책에 대한 관심으로 승화시켜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제가 '사족' 운운한 것은, 미스 하이드 님의 리뷰 중 다른 빼어난 부분이 괜시리 이 논란 아닌 논란에 가려버리지나 않을까, 저으기 걱정마저 들 지경이었기 때문이랍니다. 가령 에필로그 페이지의 '빈 방' 사진을 읽어내신 부분은 저도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 혹은 눈여겨 보았을 뿐 가슴에 담아두지 못했던 - 점을 잘 지적하신 대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암튼, 호기심쟁이 미스 하이드 님을 알라딘에서 눈여겨보는 이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 아닐까....^^

하이드 2005-02-1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좀 그렇습니다. 저자의 뜻으로 올린 이름이라면, 더욱 의미 깊을진데, 저조차도 그 의미를 알고나면 더 짠한데, 이 책을 존버거의 책으로 가장 먼저 살지도 모르는 존 버거 입문자의 억울함을 괜히 쓸데없이 오버해서 투덜거렸네요. 그리고 하나 더 사족! 저는 Ms Hide 입니다. ^^ 책에 나오거든요. 지킬박사 친구가 ' if you are mr hide, i will be mr. searcher ' 뭐, 대충 이런 말. Mr. Hyde는 나쁜놈이지만, Hide숨는 사람은 왠지 미스테리하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