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 - 사진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사진 이야기
다니엘 지라르댕.크리스티앙 피르케르 지음, 정진국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4월
품절


논쟁에 싸여 있던 무수한 사진들을 열람했더니 머리가 핑핑 돈다.
논쟁의 종류는 여러가지였는데 법정 공방이 가장 많았다.
저작권 소송도 있었고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들도 있었다.
때로 도덕적 비난을 받더라도 찍는 것이 사진 작가의 도리일 때도 있지만, 그 경계를 정하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일 것이다.

첫번째 사진은 비스마르크의 임종 사진이다. 그의 사망 소식을 알아차린 사진가 둘이 가택에 무단 침입해 시신을 살짝 옮겨 놓고 사진을 찍었다 한다.
늙고 초췌한 모습을 한 비스마르크에게선 철혈 재상의 면모는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근엄하던 인물에게서 꽤 인간적인 면모를 찾아주었다고 한다. 비스마르크는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못 궁금하다.
두번째 사진은 베르겐벨젠 나치 포로 수용소의 무더기 시신과 911 테러 당시 찍힌 잘린 손의 사진이다. 세번째 사진은 어린이라고 하기엔 좀 더 성숙한 십대 소녀들의 누드 사진이고 네번째는 히틀러로 추정되는 시신의 사진이다.
모두 9장의 사진을 붙여놓은 것인데 자극적으로 보일까 봐 작게 만드느라 그렇게 되었다.
잘린 팔목은 무수한 시체 더미보다 더 적나라하고 끔찍했다. 모두 무수한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고 그건 모두 인간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생각하니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소녀들의 사진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한동안 저런 사진 찍는 것이 꽤 성행했다는 것이고, 뒤늦게 아동학대에 대한 개념으로 논란이 번져 법정 공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놀랍게도 사진을 찍은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저 사진을 찍을 때 성적 수치감을 느끼지 못했고 그런 의도로 찍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말도 맞을 것이다.
다만 두번째 여자 아이는 14세 때의 브룩쉴즈인데 가장 유명했던 그녀는 훗날 저 사진이 더 이상 유포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재판에서 지고 말았다. 성장했을 때의 얼굴보다 훨씬 매혹적으로 느껴져서 저 사진만 크게 넣고 싶은 유혹이 일었지만 참았다.
히틀러의 죽음에 대해서는 워낙 소문이 분분하여서 저 사진도 진짜일지 확신할 수가 없다. 남극에 기지를 만들어 놓고 소년대원들을 키운다는 전설(!)을 고등학교 시절에 들었더랬다. 가슴의 사진은 그가 죽기 이틀 전에 결혼했던 에바 브라운이다.

이 사진들은 조작되었거나 혹은 조작되었다고 의심을 받은 사진이다.
1920년에 열일곱 소녀는 열한 살 사촌에 의해 요정과 함께 사진에 찍혔다.
이 사진은 셜록 홈즈의 작가 코난 도일을 자극시켜 이 사진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보려고 무척 애를 썼다고 한다. 심지어 이 문제를 다룬 책도 펴냈다고 한다.
이 사진을 찍었던 열한 살 소녀는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정말 요정이 찍힌 것이라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사진의 주인공인 17세 소녀는 83세가 되었을 때 직접 요정을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책의 삽화를 베껴서 잘라 낸 판지에 붙이고 그 요정들을 모자 핀으로 나뭇잎에 걸었다는 것이다. 셜록 홈즈가... 안타깝다....

오른쪽은 유명한 달 착륙 사진이다. 성조기가 대기가 없는 무중력 공간에서 펄럭이고 있는 것을 들어 조작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나도 그 소문에 무척 솔깃하고 말았다. 69년에 달에 착륙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은 달 왕복 우주선을 운행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 선생님께 그런 얘기를 했더니 엄청 비웃음을 샀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음모론은 무척 설득력이 있다는 게 문제다.
아래 사진은 좀 충격적이었다.
시체더미 속에 갓 태어난 것 같은 아주 작은 아기가 있고 그 앞에서 한 남자가 오열하고 있다. 당연히 그가 저 아이의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사진은 1989년 12월에 찍힌 것으로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을 전 세계의 공적으로 들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독재자가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이 사진은 조작된 것이다.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 열아홉 구의 시신을 공동묘지 밖으로 파냈단다. 그러니까 저 남자와 아기, 그 옆의 여자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단다. 여자는 몇 주 전에 간경화로 사망했고, 아기는 식중독으로 돌연사했다고...
여론은 충분히 환시키겼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잖아...

장 폴 사르트르의 사진이다. 두 사진의 차이점이 보이는가?
힌트는 손에 있다.
그러니까 왼쪽 사진은 담배를 쥐고 있고, 오른쪽 사진에는 담배가 지워져 있다.
왼쪽 사진은 1946년에 찍힌 것인데, 그 사진이 2005년 국립 프랑스 도서관 카탈로그에 실리면서 흡연을 부추길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사진에 손을 댄 것이다.
의도는 알겠지만, 그래도 이건 지나친 오버로 보인다.

1950년에 파리 시청 앞의 찐한 키스신으로 유명한 이 사진.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간 이 사진의 주인공이라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라베르뉴 부부는 약혼 시절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찍힌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사실은 프랑수아즈 보르네가 당시 자신의 남자 친구 자크 카르토와 찍은 사진이다. 게다가 이 사진은 사진을 찍은 로베르 두아노의 요청을 받고 포즈를 연출했다는 것이다.
양쪽으로 법정 싸움을 진행시킨 두아노는 이 사진이 연출했다는 것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재판에서 이길 수 있었다.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진의 주인공 프랑수아즈 보르네는 '그 순간은 가짜였지만, 키스는 정말 뜨거웠다'라고 회상했다는데, 그 말에 동의한다. 정말 멋있는 키스였다.

아래 사진은 1960년에 찍힌 체 게바라의 사진이다. 공산주의 이념을 신봉하던 사진가는 이 사진이 혁명적 대의에 사용되는 것에 행복해 했지만 실상 체의 사진은 상업적 목적으로 더 많이 이용되었다. 더 이상 그러한 관행을 묵과할 수 없었던 사진가 알베르토 코르다는 소송을 걸었고, 배상금으로 7만 달러를 받는다. 그는 이 돈을 모두 쿠바 어린이 복지 기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민간 단체에 기증했다.
멋지다! 그렇지만 지금도 영웅적 게릴라의 사진은 지극히 상업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 역시 아이러니 그 자체!

1955년 파리에서 찍힌 이 사진은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야회복이 주인공이다.
거대한 두 마리 코끼리 사이에 있는 우아한 실루엣의 모델은 강렬한 대비를 보여주면서 눈을 잔뜩 사로잡는다.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도 이미지를 더 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순간 디오르를 향해 찬사를 보내야 할지, 사진가를 향해 보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아래 사진은 베네통의 광고에 쓰여진 것으로 신부님과 수녀님의 키스 장면이다.
독신을 지키는 두 종교인에 대입시킨 세속적 사랑은 여러 곳에서 비난을 받으며 금지 처분을 받게 했다.
이슈의 측면에서 볼 때 사진가는 거의 천재다.
어떻게 보면 몹시 도발적인데, 또 어떻게 보면 지극히 순수하게도 보인다.
어떤 수녀님은 이 사진에 무척 감동을 받아서 사진가에게 사진을 보내줄 수 있겠냐고 편지를 썼다고 인터넷에서 읽었다.
수녀님을 움직일 정도라면 이 작가 정말 천재가 맞겠지...

왼쪽은 마르크 가랑제가 1960년에 찍은 세리드 바르카운의 초상이다.
뭔가 항변하는 느낌의 눈빛은 지극히 우울해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진은 알제리 인들에게 통행증을 발급하기 위해서 강제로 사진을 찍게 한 것인데, 그 바람에 히잡도 걷어내고 이방인 앞에 서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 표정은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지만 속으로 삭이는 것도 힘겨웠던 감정이었을 터...
오른쪽 사진은 2004년에 동일인물을 다시 촬영한 것이다. 손자들에 둘러싸여서 전통의 복장을 고수한 그녀의 표정은 앞서의 사진보다 차분해 보인다. 그녀 대신 손주들이 더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가는 어떤 설명으로 그녀의 허락을 얻어냈을까...

기 부르댕이 찍은 1972년 프렌치 보그 사진이다.
까다로운 각도의 거울 배치가 모델의 관능미를 한껏 끌어냈다.
이 사진이 논쟁이 된 것은 마돈나의 뮤직비디오 때문이었다.
2003년에 발표한 '할리우드'라는 노래에서 비슷한 설정을 갖다 쓴 것이다.
뮤비를 보니 아이디어를 차용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첫번째 사진은 콜롬비아에서 화산이 폭발해서 오마이라 산체스라는 어린 아이가 부상을 입고 갇힌 사진이다. 3일 동안이나 구조 대원들이 소녀를 구출하려고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했다고 한다. 소녀를 구할 기중기와 배수 펌프가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소녀는 쇠막대에 허리를 다쳐 다리를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진가 프랑크 푸르니에는 고민했다. 사그러드는 생명을 생중계하는 것이 그녀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 될까봐... 푸르니에는 희생자의 위엄을 증언하는 쪽을 선택했다. 소녀는 결국 심장 발작으로 숨을 거두었다.

두번째 사진은 워낙 유명한데, 굶주려 죽어가는 소녀를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를 함께 찍어서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화제작이다. 사진을 찍은 케빈 카터는 유명세만큼이나 비난을 받았고,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두 달 뒤에 자살을 했다. 퓰리처전에서 들은 설명으로는 당시 보도 지침으로 인해 아이 곁으로 근접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고 했다. 할 수 있는 조치는 취했지만, 그것이 아이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고, 섬세하고 예민했던 사진가는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다.
보도 사진가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드는 예다.
그는 죽었지만, 분명히 이 사진이 수단의 기근과 내전의 참상에 대해서 확실한 고발이 되었다. 그는 충분히 소명을 다했다고 본다.

2000년, 이브 생 로랑 향수 광고를 위해 포즈를 취한 소피 달이다.
똑같은 사진인데 90도 회전했더니 느낌이 확 달라진다.
짙푸른 광택있는 천 위에 새하얀 피부의 나신이 대조적이어서 더 눈부시고, 붉은 머리카락과 귀금속 등이 또 그녀를 관능적으로 보이게 한다.
어떤 향수인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흥미를 돋운다.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세상에 키가 182다.
그것보다 더 나를 놀래킨 것은 로알드 달의 손녀다. 어머나!!!

마지막 사진은 정말 감탄사를 연발케 한 안젤리나 졸리의 사진이다.
2004년에 찍었다.
'여자와 말'이라는 주제의 특집호라고 하는데, 이 이미지가 동물과의 성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고 우려한 스위스 배급사는 이 특집호를 판매하지 않기로 하고 정기 독자에게도 발송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의혹을 받을 거라는 것을 알고서 찍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너무 아름다워서 표현의 자유라는 전가의 보도를 내밀고 싶다.
졸리는 언제나 아름답고 그래서 늘 옳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어휴, 편애라는 걸 알지만 도리가 없다.

무수한 논쟁거리가 담겨 있는데, 글 읽는 재미는 아주 크지는 않았고 사진 보는 재미가 훨씬 컸다. 번역은 좀 정교하지 않은 편이다. 문장이 자연스럽지 않고 가끔은 부적절한 어휘 선택에 아쉬움을 느꼈다.
도서관에 신청해서 첫번째로 빌려온 책인데 내 뒤로 대기자가 이미 두 명이다.
인기가 많아서 신청한 사람으로서 기분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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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5-2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마지막 사진은 정말!!

마노아 2011-05-27 14:26   좋아요 0 | URL
마지막은 다락방님이 저장해야 할 사진이에요.
이 사진은 사이즈 줄이면서 무지 아까웠어요. 더 고해상도로 갖고 싶어요.(>_ㅡ)

다락방 2011-05-27 23:23   좋아요 0 | URL
정말 엄청나게 야해요, 마노아님. 야하다는 표현 말고 다른 거 없을까? 야하다는 거 보다 좀 더 근엄한 표현 없나요? 암튼 엄청나요.

마노아 2011-05-28 00:12   좋아요 0 | URL
굉장히 자극적이고 야한데, 그런데 또 우리의 졸리 여사는 절대로 값싸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대단한 포스예요. 그리고 졸리가 저렇게 가슴이 큰 줄 몰랐어요. 도대체 부족한 게 뭘까요!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우리 집 (CD 2장 + 손악보책 1권) - 권정생 노래상자
권정생 시, 백창우 곡 / 보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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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다정한 책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시에 백창우 아저씨가 노래를 붙였다. 그러니까 이 선물 상자에는 선생님의 예쁜 시와, 아저씨네 고운 노래 시디 2장과 악보까지 함께 담겨 있다. 그야말로 종합 선물이다. 

 

선생님이 쓰신 글은 소설이 되고 동화가 되고 이렇게 시가 되고 또 노래가 되었다.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겐 귀담아 들을 메시지가 되었다.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이런 힘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당신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가고 싶은 곳도 맘껏 못 가보고, 굶주리는 아이들 눈에 밟혀서 먹고 싶은 것 양껏 먹지도 못하고 사셨는데, 그런 당신이 남기고 간 것은 너무 크고 따뜻해서 참 송구하기 짝이 없다.   

소1  

보릿짚 깔고
보릿짚 덮고
보리처럼 잠을 잔다. 

눈 꼭 감고 귀 오그리고
코로 숨 쉬고 

엄마 꿈 꾼다.
아버지 꿈 꾼다. 

커다란 몸뚱이
굵다란 네 다리 

-아버지, 내 어깨가 이만치 튼튼해요.
가슴 쪼가 펴고 자랑하고 싶은데
그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는 보릿짚 속에서 잠이 깨면
눈에 눈물이 쪼르르 흐른다.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소를 주제로 네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소에 감정을 이입하였지만 정작 부모님 보고 싶은 것은 선생님 마음일 테지... 월요일에는 아마도 가요무대라고 짐작되는데, '어버이 특집'이었단다. 엄마는 가요 무대를 보다가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나서 서둘러 드라마로 채널을 돌리셨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자식들에 손주까지 보더라도 부모님 그리운 마음은 가시지 않을 테지. 5월에만 부모님 생각할 게 아니라 일년 내내 부모님 생각 많이 해야지. 아무리 많이 해도 나중에는 결국 부족하다고 느낄 테니까, 지금 미리 많이 적금 들어놔야지.... 

소3 

소야, 몇 살이니?
그런 것 모른다.
고향은 어디니? 
그것도 모른다.
그럼, 아버지 성은?
그런 것 그런 것도 모른다.
니를 낳을 때 어머니는 무슨 꿈 꿨니?
모른다 모른다.
형제는 몇이었니?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 

소는 사람처럼 번거롭기가 싫다.
소는 사람처럼 따지는 게 싫다.
소는 사람처럼 등지는 게 싫다. 

소는 들판이 사랑스럽고,
소는 하늘이 아름다웁고,
소는 모든 게 평화로웁고.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고 묻지 않았더라면 평이하게 읽고 넘어갔을 것이다. 저 단어가 나오는 순간 덜컥! 마음이 울렁거렸다. 내 전공은 역사인데 때 난데 없이 도덕을 가르치게 된 요즘, 그리하여 맡게 된 범위는 통일과 북한 사회다.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북녘 땅 이야기에 이 시가 내 마음을 한 번 더 건드리고 말았다.  

 

대부분은 선생님의 시를 그대로 가져왔지만 노래로 만들면서 약간의 개사가 이루어지고 때로 제목도 조금 달라지기도 한다. 원제는 고무신2였지만 새 제목은 '달수 고무신'이다. 게다가 노래가 끝나고 나래이션으로 대사가 더 나오는데 그 부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고무신이 얼만지 난 몰라 운동화가 얼만지도 난 몰라
내가 아는 건 그저 세상에서 고무신이 제일 싸다는 것
운동화도 고무신도 학교 가긴 마찬가지지만 그렇지만
모래 장난할 때는 고무신이 최고 송사리를 잡을 때도 고무신이 최고
운동화가 고무신보다 비싸다고 더 오래 신는 것도 아니지
운동화가 고무신보다 멋있다고 냄새가 덜 나는 것도 아니지      

          

우리 집 

고향 집 우리 집
초가삼간 집 

돌탱자나무가
담 넘겨다보고 있는 집 

꿀밤나무 뒷산이
버티고 지켜 주는 집 

얘기 잘하는
종구네 할아버지네랑
나란히 동무한 집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집 

소나무 같은 집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오늘 퇴근하는 길에 아파트 사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냥 빌라라고 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고 하신다. 자신도 빌라에서 내내 살았는데 나에게선 빌라 사는 사람 느낌이 난다는 거였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는데, 어쩐지 나쁜 의미로 말한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내가 꿈보다 해몽을 좋게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시를 읽다가 오늘 받았던 질문이 생각났더랬다.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우리집'이라니, 이렇게 착한 제목도 나올 수가 있구나. 우리집에 대해 그런 이름 붙여본 적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어쩐지 미안해지는 느낌이다. 표지의 그림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바로 이렇게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집을 표현한 것이다. 마음이 따뜻하게 적셔온다. 

 

소낙비 

하필이면
새 옷 입은 순이 잔등에
물 엎지른다. 

하필이면
엄마 없는 날
다 말려 놓은
보리 멍석 위에
백 미터 선수처럼 내린다. 

하필이면
소풀 뜯어 놓고
풀밭에 누워 막 잠들려는데
심술쟁이 기태처럼 놀래케 한다. 

하필이면
땅따먹기 편 갈라 놓고
시작하려는데
훼방놓는다.                                    

다 저질러 놓고
실컷 바쁘게 해 놓고
시침데기처럼
멀리 가 버리고
아롱아롱 무지개 뜬다. 

모두 모두 속았어도
웃는다.
무지개처럼 웃는다.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지금은 갑작스럽게 우산도 없이 소나기를 만난다면 옷 젖는 것 가방 젖는 것, 짐 많은 것, 차가 막히는 것, 방사능 비와 황사 비, 산성비 등을 걱정하지만, 적어도 중학교 때까지는 여름날 소낙비기 시원하니 반가워서 하교 길 우산 없이도 행복해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자라나는 아이들은 내가 느꼈던 비 맞는 행복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이 순간, 몹시 미안해지고 말았다.
 

통일이 언제 되니? 

우리 나라 한가운데
가시울타리로 갈라 놓았어요. 

어떻게 하면 통일이 되니?
가시울타리 이쪽저쪽 총 멘 사람이
총을 놓으면 되지.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지식산업사  

 

그러게 말이다. 그렇게 간단한 것을 60여 년 동안 못하고 있구나. 참으로 죄가 많다.  

 

도모꼬-인간성에 대한 반성문2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2학년인 도모꼬가
1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가 나중에 정생이한데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반세기가 지나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구나. 선생님의 저 착한 얼굴에서도 이런 토라짐이 읽혀지다니, 웃음이 나서 미안타.

 

선생님께 보내는 마지막 인사들이 예쁘게 달려 있다. 선생님의 생가에 붙어 있는 게 아닐까. 먼 하늘에서도 저 작은 글씨 다 들여다보며 조그마하게 웃으셨을 것 같다. 여전히 따뜻하게, 사랑스럽게...... 

개인적인 선호도를 묻는다면 먼저 접한 '강아지똥' 쪽이 노래가 더 좋았다. 더 좋았지만, 이 책의 노래들도 예쁜 노랫말들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이런 시에는, 이런 노래가 어울리지. 예쁘다. 참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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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5-26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창우 선생님 노래니까 못 들어봤어도 느낌을 알 거 같아요.
재작년에 우리 지역 행사에서 노래 부르고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았더랬죠.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 만들고 참 멋지게 사는 사람!

마노아 2011-05-26 09:18   좋아요 0 | URL
이런 세상에도 이렇게 맑은 노래를 꾸준히 만들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고마웠어요.
멋진 분들이 많아서 좋아요.^^

잘잘라 2011-05-2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꼬모-인간성에 대한 반성문2」제목 때문에 여러가지 생각이 드네요.
이가 갈릴 망정
오십년이 지나서도
도꼬모 생각이 날만큼
그렇게 도꼬모를 좋아하셨다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구요.^^;

마노아 2011-05-26 19:01   좋아요 0 | URL
애증의 관계였을까요?
정말 좋아했던 만큼 상처가 컸던 것일 수도 있겠어요.^^;;;;
 
왕의 투쟁 - 조선의 왕, 그 고독한 정치투쟁의 권력자
함규진 지음 / 페이퍼로드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법학으로 대학 공부를 시작했던 저자는 다시 대학을 바꾸어 행정학과로 입학했고, 대학원은 정외과로 갔다. 그랬던 인물이 한국정치사상에 중점을 두기 시작해서 결국 박사학위까지 받고 말았다. 그의 관심은 끊임없이 정치였고, 그 정치를 해냈던 사람들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이 책에는 조선의 유명한 네 군주를 꼭 집어서 비교 분석해 주고 있다. 등장 인물은 세종, 연산군, 광해군, 정조다. 

꽤 극적인 인물들을 고른 셈이다. 앞 뒤로는 조선 시대 내내 훌륭한 군주로 평가받은 인물이고, 가운데 두 임금은 조선 시대 내내 임금 취급을 받지 못한 이들이다. 광해군이야 현대에 와서 재조명 받고 있지만 연산군은 여전히 폭군의 대명사로 불린다. 이렇게 서로 다른 행적을 갖고 또 다른 대접을 받아온 인물들이지만 그들은 모두 극적인 왕의 투쟁을 거친 인물들이었다. 우리가 사극에서 지켜보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또 때로는 모순적이기까지 했던 투쟁사를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1부에서는 그들이 거쳤던 지난한 정치 투쟁의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주인공들은 한 문장으로 그 치세를 설명하고 시작한다. 세종은 이렇다.  

세종, 권력의 위임과 프로젝트형 업무관리로 대업을 완성하다 

다른 세 임금과 달리 버릴 것이 없는 찬사다. 뒤에 가면 여기에 살을 붙인 문장도 나온다. 

세종은 조선의 정점이었다. 세종 다음에 다시는 세종이 없었다.
이 책에 소개한 다른 세 사람의 왕을 포함하여, 세종 이후 23명의 왕 중
어느 누구도 제4대 왕 세종을 능가하지 못했다.
동의한다. 학창시절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로 세종을 꼽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라며, 조광조 정도는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 초등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멋진 임금으로 꼽는 임금 세종이기에 지나치게 평이한 답변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세종의 위대함을 깎아내리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로 역사의 거인이었다. 물론 그가 꿈꾸고 펼쳐 나간 세계는 유교적 이상주의 국가였지만 그가 살았던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600년 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시대 사람들이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세종은 그려보았고, 그 설계도에 따라 조선을 만들어갔다. 그는 조선의 네 번째 임금이었지만 조선이라는 왕조의 기틀을 또렷이 세운 첫 인물이었다.  

세종이 유독 마음에 드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였다. 그는 일을 맡기는 CEO 스타일이었다. 해당 업무에 최적의 인사를 고르고, 그가 능력을 맘껏 펼쳐보일 수 있게끔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맡긴 결과 조선은 문화 대국으로 성장했다. 과학과 역법, 음악과 역사의 서술까지 전방위에서 눈부신 업적을 쌓아냈다. 신분제 사회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인사들이 자신들의 힘을 맘껏 펼칠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군주를 어찌 존경을 갖고 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국방 분야에서 다소 미진함 감이 있었고, 종친들이 횡포를 부림에도 너무 감싸주기만 한 것은 무척 아쉬운 부분이지만, 등극하면서 그가 안았던 상처를 떠올린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책에는 세종의 큰 형님이자 원래 왕이 되었어야 했던 양녕대군의 '난행사'를 표로 정리해 주고 있다. 재위 기간 내내 그가 친 사고와 그의 아들이 친 사고를 보니 아찔하다. 이런 인물이 임금이 되었더라면 조선은 어떠했을지... 태종이 참으로 현명한 결단을 내려주어서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세종은 조선이라는 크고 아늑한 집을 지었다. 그 집이 지나치게 편안해서 그의 후대 왕들은 그 집을 능가하는 더 좋고 큰 집을 짓고자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세종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 후손들에게는 '한글'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남긴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헌신과 그의 업적은 능히 '대왕'이라는 칭호를 아낌없이 바칠 만하다.  

두번째 인물 연산군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연산군, 절대권력을 행사하다 측근에게마저 버림받다 

연산군의 실패에 대해서는 파트너십이 참 아쉽다. 왕과 신하가 모두 상대를 제압하려 들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보좌하고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애를 썼어야 했는데 그들은 파워 게임을 했고, 상대를 압제하다가 판을 뒤엎어버렸다. 언론을 맡은 대간들은 꼬투리 잡기 식으로 왕을 물고 늘어졌고, 거기에 대처하는 연산군의 화법은 미숙하고 유치했다.  

 

때는 평화로웠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신하들이 짜증이 났겠지만, 그래도 임금이니까 거기서 포기하면 안 되었다. 저자는 얘기한다. 그가 실패한 것은 그가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에 있다고...... 세간의 추측과 달리 무오사화 이후 갑자사회 이전까지의 연산군 시대는 왕과 신하의 사이가 조화롭게 유지된 좋은 때였다. 왕은 참석해야 할 공식 행사에 대부분 참석했고, 핵심 의사결정은 자신이 하고 나머지는 적당히 위임했다. 한편 신하들은 꼭 필요한 비판은 하되, 전처럼 왕의 사생활까지 시시콜콜 따지고 들지 않았다. 왕권과 신권이 나름의 균형을 맞추었던 시기인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기점으로 폭주하기 시작했고, 그가 해 나가야 할 개혁의 과제 대신 향락과 독재를 선택했다. 그의 그릇이 거기까지였다고 생각하지만 무척 아쉬운 일이다.  

책에 따라 중종반정의 씨앗을 연산군이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한 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거나, 혹은 그녀와의 나이 차이가 지나치게 큰 것을 들어서 다른 이유가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는 그보다는 무인집단의 위기감으로 파악했다. 공포 정치로 왕권을 높이고 신하들을 제압해 오던 연산군의 다음 먹이가 무인이라고 파악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껏 보았던 설명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었다.  

저자는 종종 '세계적 기준'으로 볼 때를 언급하는데, 중국이나 기타 전제 군주가 있던 나라들의 역사와 비교하면 연산군의 폭정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물론,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겠지만. 어찌 됐건 그가 왕노릇 했던 곳은 조선이었고, 그를 인정할 수 없는 유자들로 가득한 곳도 그곳 조선이었으니 그 역시 그의 운이 거기까지였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세번째 주자는 광해군이다.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광해군, 안전을 최우선하다 나락에 떨어지다 

그랬다. 임진왜란의 후유증 속에서 즉위한 그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었고 해야할 일도 무척 많았다. 세자로 있었던 16년의 시간은 고난길이었고 가시밭길이었다. 선조와 명나라 사이에서 마음 고생을 하고, 영창대군의 출생으로 인해 또 위축되었던 그의 가여운 영혼을 생각하면 전쟁의 도가니 속에서 육신이 고달펐던 때가 차라리 덜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할 정도다. 그 역시 연산군처럼 파트너 복이 없었다. 그의 지지 세력 대북은 타협할 줄도 몰랐고 상대를 품어 안지도 못했다. 인진왜란 당시 누구보다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켰던 그 기개가 정치판에서는 쓸모있는 리더십으로 구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적절하게 배치하지 못하고 끌려다닌 광해군 역시 리더십이 아쉬운 것은 물론이다.  

인조반정 당시 내세운 광해군의 폐위 명분은 세가지였다. 폐모살제와 지나친 토목공사, 그리고 재조지은을 배신한 것 등등은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세계적 기준으로 보면 지나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이 파워게임이고 정권 쟁취라고 할지언정 광해군을 희생자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임금이었다. 불안하고 힘들고 답답해도, 그것을 궁궐을 계속 짓거나 연이은 옥사로 힘을 쏟을 것이 아니라 극복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십대 후반에 전장을 누비며 백성의 지독한 처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확인하던 그때의 초심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갔다. 

15년을 재위하고 폐위된 광해군은 그후 19년을 더 살다가 죽는다. 아들 내외와 부인까지 앞세우고도 2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남은 것이다. 넓은 궁에서 불안하게 지내던 그 시절보다, 오히려 갇혀 지내면서 더 심신의 안정을 찾았던 것일까? 그의 인생 여정이 참으로 안쓰럽고 아이러니하다.  

네번째 인물은 요즘 여러 매체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정조다. 저자는 이렇게 한 줄로 요약했다. 

정조, 개혁군주는 어떻게 전제군주가 되어 개혁에 실패하나 

그를 개혁군주라고 부르는 것에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천재적 두뇌를 자랑하던 그는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개혁 시도를 했고, 성과를 보인 부분도 꽤 있다. 하지만 그 개혁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 자신이 모든 걸 통제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완벽주의는 세종처럼 맡기는 정치를 해내지 못했고, 따라서 협력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는 지나친 당쟁의 폐해를 어려서부터 목격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잃었던 그는 신하들이 똘똘 뭉치기 전에 흩어놓는 정책을 펼쳐냈다. 그리하여 등장한 회전문 인사로 아침 벼슬과 저녁 벼슬이 달라질 만큼 많은 인사들이 계속 물갈이가 됐다. 연산군처럼 형벌을 남용하지 않았지만 유배를 자주 보냈고, 벼슬을 계속 갈아치우면서 신하들의 자율권을 많이 침해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계획하고 꿈꾸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따른 유교국가이기 때문에 시대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손으로는 개혁을 진행하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그 개혁의 문을 닫는 이중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자신의 손을 거쳐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이 완벽주의 군주는 쉽게 피로해졌다. 문무를 모두 겸비한 인물이었음에도 체력이 버텨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믿을 만한 남인들은 서학 문제로 튕겨나갔고, 신문학을 주도하던 박지원과 그 제자들은 문체반정으로 밀어내었다. 나름의 균형은 잡혔지만 여전히 그의 주변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정조는 미완의 과제를 남기고 일찍 쇠한 몸으로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고 말았다. 그 자신이 지양하고자 했던 측근 정치를 순조 곁에 박아둔 채로 말이다.

1부 사왕별곡이 네 임금을 종합적으로 보여주었다면, 2부에서는 객관적인 자료들 제시하며 각 임금들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조선의 왕이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 노릇으로 첫째, 성학에 힘쓰며 수신에 전념할 것, 둘째 개인적인 취미와 오락을 멀리하며 사치에 빠지지 말 것, 셋째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 넷째 언로를 열고 신하들의 간언을 용납할 것이라고 전한다. 명색이 임금이니 뭔가 남부럽지 않은 화통한 면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 노릇을 보다 보니 한숨부터 나온다. 이건 순전히 도덕군자로서 일만 하는 기계에 가깝지 않은가.  

그밖에 신하와의 경연을 분석해 주었는데 뜻밖의 결과에 당황했다. 

 

저 유명한 학자 군주 정조의 경연 개체 횟수가 연산군 만도 못했던 것이다.(재위 기간은 두 배이건만!) 이미 즉위 당시 더 이상 배울 게 없었던 천재군주 정조로서는 경연에서 무얼 배운다는 게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도리어 신하들을 앉혀 놓고 강연을 하는 전강을 베푸는 게 서로에게 생산적이긴 했다. 물론, 신하들은 못마땅 했겠지만. 그밖에 광해군은 거의 병적으로 경연을 빼먹었는데 이 정도 수준이면 대인 기피증을 의심할 만하다. 그래놓고는 친국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빼먹지 않고 참여했으니, 그의 불안이 얼마나 도가 지나쳤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그밖에 제왕의 취미생활과 왕의 여자, 왕과 언론, 왕의 인사권 행사, 왕의 형벌권 행사, 서책 간행, 시대와 호흡하는 왕의 평가가 뒤따라 온다.  

조선은 중국에 비해서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지나치게 강한 편이었다. 때문에 왕의 스트레스 지수는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꼭 중국의 전제 군주제가 더 우수했거나, 조선이 그만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양쪽 모두 갈등적 파트너십을 유지하면서 공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데 조선은 왕과 신하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또 서로 협력을 다지면서 더 나은 정치를 하기 위래 노력했었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낭만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어느 한쪽은 보수, 또 어느 한쪽은 진보라고 틀을 씌워서 단순히 이해하는 것도 지양해야겠다. 그들이 지나온 자취에는 무수한 고민과 치열한 투쟁이 묻어 있다. 역사의 평가는 냉정하지만 시대를 읽어나가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책을 무척 진지하고도 재밌게 읽었는데 옥의 티로 자리 잡은 오타 몇 개는 언급해야겠다. 

102쪽 홍문과 부제학 최진>>>홍문관
248쪽 남인과 소인이 퇴조하면서>>>남인과 소론이
331쪽 왕 자신이 개인적으로 의지할 수 없는 측근은>>>의지할 수 있는
339쪽 처형된 1인은 지신의 외종조부이자>>>자신의 

더불어 디자인 이야기. 내지의 금가루는 왜 칠했는지 모르겠다. 자꾸 때가 탄 것처럼 보여서 꽤 불편했다. 불필요한 덧칠로 보였다. 내 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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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5-2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세종과 연산군, 광해군, 정조를 비교했다니 흥미롭네요.

마노아 2011-05-26 09:18   좋아요 0 | URL
무척 재밌게 읽었어요. 동 저자의 다른 책도 더불어 샀답니다. 기대가 되어요.^^

pjy 2011-05-2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충분히 기대되는 책입니다~ 리뷰가 환상적입니다요^^

마노아 2011-05-26 19:02   좋아요 0 | URL
하핫, 함 읽어보셔요. 생각보다 흡인력이 높아서 금세 읽게 될 거예요.^^
 
써니 - Sunny
영화
평점 :
현재상영


고등학생 딸을 둔 나미의 하루는 새벽 6시에 시작된다. 남편과 아이를 위한 건강 음료를 준비하고, 부랴부랴 나가느라 아침을 거르기 일쑤인 딸에게 토스트 한쪽이라도 먹이려고 분주하다. 병원에 계신 할머니께 전화 한 통 넣어달라고 하지만 딸은 답이 없고, 남편은 정성을 보여주는 대신 명품 백이라도 사드리라고 현금으로 성의 표시를 한다. 생활은 풍요롭지만 나미의 일상은 꽤 기계적이고 건조하다. 그랬던 일상을 바꾸어 버린 것은 엄마를 찾아간 병원에서다. 영화는 병실의 환자들이 모두 막장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분노하는 장면에서부터 초반 웃음을 끌어낸다. 설마 이 진행은 아니겠지? 하는 식으로 여지 없이 진행되는 드라마를 모두들 욕하면서 열심히 시청한다. 출생의 비밀과 불치병은 빼놓을 수 없는 설정들이다. 대놓고 비웃지만, 대놓고 인정하는 드라마의 법칙들. 

나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옆 병실의 '하춘화'라는 이름이다. 누구라도 잊지 못할 법한 이름을 그녀는 알고 있다. 혹여 동명이인일까, 아님 내가 기억하는 그 친구가 맞을까 병실로 들어가보는데 딩동뎅~ 고등학교 때 그 친구가 맞다. 무려 25년 만의 재회이건만, 친구는 암 투병중이었다. 이제 두 달 정도 살까 말까인 친구가 옛 동창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들의 '써니'를...... 

옛 모교를 찾아가던 나미는 어느새 17세 소녀가 되어버렸다. 전라도 벌교에서 막 서울로 전학온 촌뜨기였던 그녀. 학교에서 이래저래 얽힌 친구들은 유명한 불량 써클의 아이들. 거기에 졸지에 끼어서 7공주가 되어버린 나미는 범생이에서 소박한 일탈들을 해보며 새 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을 쌓는다. 물론, 그 중에는 꽤 위험한 추억들도 있었지만... 

 

김영옥 씨가 나미의 할머니로 나오는 순간, 이미 사투리와 욕의 걸죽한 결합은 예상되어 있었다. 첫번째 욕잔치는 대사 외운 티가 나서 좀 어색해지만... 맞짱 뜨기로 된 장소에서 혼자 엉거주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나미는, 지나친 공포로 뜻밖의 효과를 내며 싸움을 승리로 끌어낸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쯤 되면 7공주의 멤버로 손색이 없다.  라디오에 자신들 친구들 모임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보낸 사연이 채택되었고, 디제이가 멋진 음색으로 골라준 이름은 '써니'였다. 햇빛 찬란한 반짝반짝 빛나는 이름이다. 마치 그 시절의 그 소녀들처럼.

재밌게도, 어린 시절 배역과 성인이 되었을 때의 배우 얼굴이 몹시 닮아 있다. 유호정과 심은경이 그랬고, 진희경과 강소라도 몹시 닮아 있다. 비장의 무기로 등장하는 수지의 성인 배우도 그 표정에서 닮아 있었다. 대체 누굴 먼저 캐스팅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배역을 맡긴 것인지 궁금할 정도다. 유호정을 골랐기에 심은경이 나온 것인지, 심은경을 택해서 유호정이 따라온 것인지 말이다.  

 

나미가 처음으로 찾아낸 친구는 장미였다. 모교에 갔다가 선생님께 두고 간 장미의 명함을 건네받은 덕분이었다. 보험왕을 노려보지만 한 달 내내 아무 성과도 없던 장미는 춘화의 병실에서도 보험은 들었냐는 확인부터 날린다. 과한 직업정신인지, 혹은 웃자고 넣은 설정인지, 아무튼 시종일관 참 무리수를 둔다.  

이어서 다른 친구들도 열심히 찾아보려고 애를 쓰나 했더니 너무 쉬운 패를 내민다. 흥신소를 찾아간 일. 물론, 시간이 빠듯하고 돈은 많으니 가능한 방법이긴 했지만 억지 웃음도 종종 쥐어짜서 다소 불편했다.  

'우연'을 가장한 채 진희와 금옥, 복희를 모두 찾아내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당연히 서로 다르다. 학창 시절 욕쟁이였던 진희는 교양있는 척하며 온갖 내숭을 떠는 엄살녀가 되어 있었고, 금옥은 시어머니의 구박 속에 어려운 형편을 끌어가고 있었다. 제일 기가 막혔던 것은 복희였다. 미스코리아가 꿈이었던 꿈많던 소녀가 어머니 사채 빚에 떠밀려 신세가 망가졌고 지금은 딸과도 떨어져 살며 알콜에 찌든 접대부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또 돈많은 싸모님 유호정이 돈으로 그 순간을 모면하는 장면은 참 불편했다. 자신의 딸을 괴롭히는 일진 아이들을 혼내주는 설정도 마찬가지였다. 어른이 떼로 몰려가 애들을 때린 것도 문제지만, 그네들이 합의금 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싸모님이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과감하게 학창 시절 껌 좀 씹던 언니 흉내를 낼 수 있었을까.  

제일 가관이었던 것은 마지막 엔딩이었다. 그렇게 돈을 뿌리며 한 순간에 인생 역전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그네들의 우정은 빛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네들은 옛 추억을 다시 행복하게 되새기며 자신에게도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일까?  

무려 자살기도까지 한 친구의 소식을 묻지도 듣지도 않은 채 25년이나 떨어져 지낼 수 있었을까? 누군가는 소식을 접해보려고 애를 썼어야 하지 않을까? 준호를 찾았다면 그를 통해서 수지의 소식까지 물어봐야 했던 것이 아닐까? 장면장면이 꽤 웃기고, 음악도 신나고, 추억을 흠씬 불러올 수 있는 좋은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몹시 불편했다. 전작 '과속 스캔들'의 유쾌한 감동과 캐릭터의 성장을 써니에서는 만나기 어려웠다. 캐릭터의 각성은 찾아볼 수 있지만, 여러모로 약했다. 돈으로 웬만한 것은 해결되고 마는 우리 사회이니 아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영화로까지 확인하는 것은 속상한 일이다.   

마무리는 상당히 아쉬웠지만 추억을 소환한 것에 대해서는 몹시 반가웠다. 80년대 교복자율화 세대와 데모 행렬,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교사의 등장 등은 적절히 코믹과 살벌함을 섞어서 표현했다. 한 세대 전의 이야기인데 우리는 거기서 얼마나 더 앞으로 나아갔는지, 혹은 제자리인지 잠시 생각하게도 만들었다.  

나미의 마음을 뒤흔든 첫사랑 그 놈은 배우 김시후였다. 친절한 금자씨에도 출연했지만, 내게 더 인상을 남긴 것은 이승환의 '심장병' 뮤직비디오에서였다.(그때는 드림팩토리 소속 배우였다.) 이 아이가 자란 다음에는 어떤 배우가 나올지 몹시 궁금했다. 인물로 본다면 김원준이 출연하면 딱 어울릴 것 같았는데 내 예상을 뒤엎고 다른 배우가 등장했다. 한때는 미중년의 대명사였건만, 어쩐지 망가진 옛 꽃미남이 된 것 같아서 좀 씁쓸했다. 오래 전에 전하지 못한 선물을 내밀고 그냥 사라져버린 나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대우를 받은 것 같아서 이 부분도 배려가 부족해 보여 아쉬웠다. 누구라도 침착하기는 힘들 상황일 테지만... 

요새 드라마 카이스트를 보고 있는데 거기서 서교수로 나온 배우가 유호정의 남편으로 등장했다. 공교롭다고 해야 할까, 재밌다고 해야 할까.   

영화 포스터에는 7공주가 모두 나오지 않는다. 김선경의 왼쪽에는 나름 비장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의 한쪽 팔만 나왔다. 그 사람, 참 분위기 있더라.  

엄마와 함께 보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혼자 보게 되었다. 엄마의 나이대보다는 80년대의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보면 더 관심이 갈 영화다. 이제 강형철 감독은 또 어떤 추억과 노래를 갖고서 관객을 웃게 만들까? 전작에 비해 만족도는 떨어졌지만 다음 작품은 여전히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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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5-2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를 보니 중학생역 배우들은 7명인데 성인 배우는 6명이네요?? 한명은 찾지 못한건가요^^

마노아 2011-05-24 23:20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이에요. 안 읽은 티가 팍팍 남..ㅎㅎㅎ
하핫, 마지막 한 명도 끝내 찾아냅니다. 나름 그게 영화의 별미였거든요.^^

카스피 2011-05-25 18:09   좋아요 0 | URL
ㅎㅎ 얼굴만 보면 중학생 같은데 고등학생이었네요^^

마노아 2011-05-26 00:06   좋아요 0 | URL
영화 속에도 중딩으로 오해받곤 해요.^^

웽스북스 2011-05-24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카이스트 어디서 구하셨어요? 저 두번이나 봤는데 또 보고싶어요. 써니는 진짜 많이 아쉽죠. 돈많고 명짧은 친구.... 텐아시아에 강명석이 쓴 글이 있는데, 완전 공감돋아요 ㅋㅋ

마노아 2011-05-24 23:47   좋아요 0 | URL
토렌트 파일이에요. asf라서 화질이 안 좋긴 한데 이동하면서 mp3로 보기 좋아요.
이거 관심 없었는데 웬디님 때문에 보게 되었어요.ㅎㅎㅎ
강명석 씨 글 봐야겠어요. 안 봤는데 벌써 공감이 돋고 있어요.ㅋㅋㅋ

hanalei 2011-05-25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보니 엠의 써니랑 연결이 있나요?

마노아 2011-05-25 06:51   좋아요 0 | URL
영화 중간에 노래가 몇 번 나와요. 엔딩에 멋진 춤에 쓰이고요~

프레이야 2011-06-10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리뷰 당선 축하해요~~~
공감해요. 결국 경제적가치로 위안 받는 해피엔딩이 과장되고 허무맹랑하면서도 씁쓸했어요.
욕설이 난무한 거도 그렇고 시위대 속에서의 난투도 너무 희화적이라 맘에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게 호감 여배우 유호정의 재발견이었어요. 그걸로도 좋았어요.
빗방울 떨어지는 저녁 집에 돌아오는 길 배캠에서 보니엠의 써니 나오대요.ㅎㅎ

마노아 2011-06-10 23:1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감사해요.^^
마무리까지 돈으로 도배를 하지 않았다면 적당히 웃고 감동도 받고 끝났을 것 같은데 끝까지 저리 가버리니, 영화를 만든 사람의 의도나 생각은 무엇일까 싶어 영 개운치가 않았어요.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훌륭했지요. 게다가 어쩜 그렇게 닮은 배우들을 고를 수 있었을까요. 신기했답니다.
영화 속 써니 노래 참 좋았어요.^^

루쉰P 2011-06-10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2관왕 당선 왕 축하드려용!! 대단하심!!

마노아 2011-06-10 23:19   좋아요 0 | URL
하핫, 감사합니다.^^;;;
 
노무현이, 없다 - 다시는 못 볼 아주 작은 추억 이야기
도종환 외 17인 지음,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엮음 / 학고재 / 2010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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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려고 찍어둔 책이 많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 책을 읽어야 될 것 같았다. 보수적인 직장 상사의 눈길이 신경 쓰여 북커버로 덮은 채 조심조심 읽어나갔다. 돌아가신 뒤에도 이런 대접을 해드리다니, 참 송구한 일이다.  

도종환 외 17인이 지었다고 적혀 있지만 도종환 시인은 책을 여는 역할만 했고, 추억을 본격적으로 쏟아낸 것은 다른 이들이었다. 그 중에는 정치인 노무현을 취재했던 기자, 그에게 '바보'라는 별명을 처음으로 붙여주었던 어느 네티즌, 그와 함께 동지로서 민주화 투쟁을 했던 신부님, 또 순수하게 인간 노무현을 사랑했던 노사모, 아버지가 입을 옷을 사러 왔다고 말하던 의상 코디, 대통령께 마지막 점심 식사를 대접해 드리기 위해 퇴임 직후 봉하 마을까지 동행했던 청와대 요리사에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렸던 인물 등등, 많은 이들의 생생한 육성이 담겨 있다.  

그들이 추억하고 공유하는 노무현의 공통점은 소탈하고 순박함이었다. 뚜렷한 목표와 원칙을 갖고 용감하게 불가능에 도전하던 뚜벅이였지만, 인간적인 부분에서의 그는 시골 농사꾼과 전혀 다르지 않은 자연스런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옷도 까탈스럽지 않았고 식성도 까다롭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불규칙해지면 직원들의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음식 준비도 힘들어지기 때문에 규칙적인 식사 시간을 되도록 지키려고 애를 썼고, 일주일 내내 고생했는데 일요일까지 고생시킬 수 없다며 고구마와 라면만 준비해놓고 늦게 출근하라고 요리사에게 말해 주는 대통령이었다. 그런 대통령을 닮은 선물도 등장한다. 비닐 봉지에 꿀떡 한 봉지 달랑 담아서 보내오기도 했다니, 임금님께 바쳐지는 진상품보다 더 값진 선물이 아닐까.  

2년 전 그때에, 참 많은 사람들이 울어버렸다. 그를 보내면서 보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열을 쏟아내었다. 영국에서는 다이애너비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애도를 하는 바람에 국민들의 스트레스 지수가 줄었다고 하던데, 우리도 그랬을까? 아니면 억울함과 분함에 오히려 스트레스 지수가 더 올라갔을까. 그의 빈소를 찾고서 돌아가는 승객들을 태우던 칠순에 가까운 택시 기사의 표현이 목구멍에 걸린다. 

   
 

 “살다 살다(군대도 가고 사우디에도 가보고 조기 축구회도 해보았지만) 그렇게 자발적인 사람들은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렇게 자발적인 사람들을 며칠씩 보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우리도 누군가를 굉장히 사랑하고 존경하고 싶어 했던 것 아닐까......”  -56쪽

 
   


퇴임한 전직 대통령이 고향으로 돌아간 예도 없었지만, 그렇게 고향에 돌아간 대통령을 한껏 반겨주던 국민들도 이전에 없었다. 그리고 고향 땅을 변화시키려 애쓰면서 그토록 행복해하던 대통령을 우리가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이 책 속에 등장한 17명의 필자들은 웬만큼 글 좀 쓰는 분들이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글 솜씨는 정혜윤 피디였다.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그녀의 책들이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퇴임 후 그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를 봉하마을 그의 집에 걸어두었다. 90살 먹은 우공 노인이 산을 옮기기로 결심한 이야기. 주변 사람 모두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하자 우공 노인은 나에게는 아들이, 그 아들에게도 아들이, 또 그 아들이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꿈 또는 의지는, 명사가 아니라 한없는 이름과 행위로 연결되는 동사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꿈을 꾸고, 내가 받아 다시 건네주는, 바로 그 행위 말이다. -59쪽 

그는 가고 없지만, 그가 남겨놓은 유산들이 있다. 정혜윤 피디의 말처럼, 그의 꿈 또는 의지가 하나의 단어로 머무르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의 꿈을 함께 꾸는 사람들이 있는 한 말이다.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의 꿈... 

희망을 말하는 것은 쉽다. 말은 언제나 간단하니까. 하지만 희망을 품고 사는 일은 만만치 않다. 때로 희망 그 자체가 고문일 때도 있으니. 하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재차 꿈꾸고, 염원하고, 열망하지 않고는 이 차갑고 서러운 세상을 살아갈 도리가 없다.   

이 무서운 세상에서 한때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던 한 사람을 추모해 본다. 그 자신이 희망의 상징이었으면서 다시 실패의 상징도 되었던 사람. 이제 그의 희망과 실패의 완성은 그가 아닌 우리 남겨진 자의 몫이 되었다. 다시, 우공이산의 꿈을 꾸도록 해보자. 오래 걸릴지언정 포기는 하지 말자.

정혜윤 피디의 글 한쪽으로 마무리를 지어 본다. 우리 앞에 어떤 미래를 둘 것인지,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그의 죽음을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를 지배했던 아메리칸 드림과 코리안 드림을 생각해 본다. 개인의 행동과 선택이 이 세상의 다른 존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숙고하는 사회,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주어진 권리처럼 배타적으로 행사하지 않는 사회, 집단적 희생양을 만들지 않는 사회, 타인의 불행에 어떻게든 나도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하는 사회, ‘무질서보다는 불의가 낫다’고 외치지 않는 사회, 언젠가 올 유토피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회. 이런 사회는 가능한가?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기력한 우리 앞에 미래는 없다. –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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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5-24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이 책 읽으며 참 많이 공감했어요.
그를 만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그분을 제대로 보여준다는 끄덕임까지.
택시 아저씨 말씀에 나도 울컥했는데...

마노아 2011-05-24 10:10   좋아요 0 | URL
작년에 순오기님 리뷰 보고서 사둔 책인데 이제사 읽었어요.
초반 임팩트가 약했는데 뒤로 갈수록 마음이 계속 떨렸어요.
그렇게 읽고 있는데 송지선 아나운서 투신 소식 듣고 또 얼마나 기가 막히던징...ㅜ.ㅜ

책가방 2011-05-24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가 항상 하는 말이 있는데요.. (니 때문에 우리나라가 요모양 요꼴인거는 아나..??) 이 말이거든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정치나 정치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잘하면 박수를, 잘못하면 쓴소리라도 해야하는데 저는 너무 무관심해서 그렇다네요.
대통령 선거때... 해가 될지도 모를 사람에게 투표하는 게 아예 투표를 안하는 것 보다 낫다고.. 최소한 관심은 보여야 한다고 나를 볼때마다 열변을 토하는데.. 전 왜 관심이 안 생길까요..??
먹고 살기 바빠서라는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그 친구의 입을 막곤 하지만.. 은근 죄책감 비슷한 감정도 생기더라구요.
어떻게하면 관심이 생길까요..??

그 분이 가신지 벌써 2년이나 되었군요.
그 날 그 충격이 아직도 생생한데... 세월은 너무도 조용히 그리고 빨리 흘러버리네요.

우공이산..
(이어령의 춤추는 생각학교) 제1권 <생각 깨우기>에서 처음 알게된 얘기랍니다.
생각만 하지말고 일단 실천하라는 그런 내용이더군요.
고 정주영님의 (해보기나 했어?)라는 말도 생각나네요...

문득 생각이 많아져서 글도 길어지네요..^^

마노아 2011-05-24 10:14   좋아요 0 | URL
저도 기본으로 투표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 뽑을 사람 없으면 가서 기권표를 만들지라도 권리는 행사해야 한다고요.
그것조차도 하지 않으면 정치인 나쁘다고 욕할 수 없다고요.

참 어려운 문제 같아요. 먹고 사는 일이 너무 바쁘고 버거운 사람은 투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이 투표를 통한 참여는 먹고 사는 일이 고단한 사람에게 더 필요한 일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지 못하게 더 막장으로 치닫곤 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긴 했지만요.

우리의 아이들도 살아갈 세상인데, 이보다 더 망가지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 권리에 이어 부채감을 갖고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노력해요.

시간이, 참 빨라요...

pjy 2011-05-24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쉽게 방치하거나 포기하지말고 희망을 가져야겠죠~
여름이 오기도 전 봄비에 둑이 무너지는 이런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에휴휴 -_-;

마노아 2011-05-24 20:55   좋아요 0 | URL
올 여름은 어떤 사단이 날지 몹시 두렵습니다.
최소한의 교훈은 모두가 얻었으면 해요. 자신의 욕망과 바꾼 결과가 낳은 참사에 대해서 말이지요.

귀를기울이면 2011-05-24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분 글 여럿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긋한 미소를 짓고 싶은데 '^^'이건 좀 경박해 보이는군요^^;)
떠오르는 생각은 책 한 권인데 아직도 2년전과 비슷한 기분이라 참...


마노아 2011-05-24 23:20   좋아요 0 | URL
하핫, :) 요렇게 하면 좀 지긋해 보일까요? 50보 100보 같아요. 그치만 경박까지는 아닙니다. 그냥 발랄한 거죠. ㅎㅎㅎ
떠오르는 책 한 권이 무엇일지 궁금해요. 여전히 참...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