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이야기 2 - 영웅의 탄생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2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구판절판


라틴어의 ‘영웅(vir)'은 수컷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어의 ’영웅(Hero)'에는 신의 힘을 가진 자라는 뜻이 있다. 영웅이라는 말은 그래서 남성의 감성을 물씬 풍긴다. 그러니 누구를 영웅이라 하는가? 영웅은 반드시 수컷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수컷의 자질 중에는 지략(英)과 용맹(雄)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서 영웅은 힘을 뿜어내는 존재로 묘사된다.

-10쪽

영웅이 어떻게 권력을 버릴 수 있는가? 독수리가 어떻게 먹이를 측은하게 여길 수 있는가? 권력은 바로 힘이다. 영웅은 힘을 가진 사람이다. 영웅은 권력을 버릴 수 없지만, 성인은 버릴 수 있다. 또 영웅이 어떻게 뭇 사람들의 칭송을 거부할 수 있는가? 영웅은 힘을 뿜어내고 뭇 사람들의 시선을 즐긴다. 그러나 성인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는다.

-11쪽

성인의 개성은 독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의 개성은 남성보다는 여성에 가깝다. 성인은 커다란 어머니다. 성인은 오직 부계사회가 고착화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은 모계사회의 잔영이 남아 있는 곳에서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웅은 다르다. 권력을 어떻게 남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영웅은 다만 사람을 모으고 적절히 쓸 뿐이다. 수컷들이 역사를 차지한 이후 ‘성인’들은 사라졌다. 그렇지 않다면 공자가 기린이 잡혔다고 한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관중과 환공은 영웅과 성인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12쪽

공자는 제 환공이 비록 힘을 쓰는 패자였지만 바른 이라고 평한다. 또 비록 흠결이 있지만 무력을 쓰지 않고 천하를 다스린 관중을 착한 이라고 단정한다. 영웅이 바른 이인가? 영웅이 착한 이인가? 영웅은 바르게 보이는 사람이며 착하게 보이는 사람이지만, 꼭 착하고 바른 이는 아니다. 영웅을 만들어내는 상황이 그를 바르게도 만들고 굽게도 만든다. 『삼국지』의 영웅 조조를 보라. 동양에서는 영웅 하면 조조, 조조 하면 영웅이다. 그가 바로 ‘치세에는 능신이요, 난세에는 간웅’이라는 평을 받은 사람이다. 시대가 그의 도덕적인 능력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고, 또 시대가 그의 ‘부도덕한’ 야망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
-13쪽

『군주론』에서 "덕을 지키라. 그러나 권력을 잃을 정도로 지키지는 말라."(15장) "잔인하라. 그러나 관대하다는 평판은 들으라."(19장) 이런 이야기가 바로 마키아벨리가 그의 영웅인 군주에게 보내는 조언이다.
공자는 문공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이면을 그대로 파악했다. 문공 속에는 마키아벨리가 들어 있다. 물론 문공은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처럼 천박하지는 않다. 그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군주’가 아니라, 수많은 국가가 난립한 춘추의 질서를 잡은 ‘패자’였기 때문이다.
-13쪽

환공과 관중의 이야기는 왠지 보통 사람이 모방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다. 단번에 인재를 알아본 후 끝까지 중용하고, 도덕과 원칙을 이익보다 앞에 두고, 우두머리들은 직접 대결을 피하고 내공으로 힘을 겨룬다. 그러나 문공은 다르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패업을 이룬 사람으로 현실 정치의 쓴맛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14쪽

문공의 처절하면서도 굴곡진 인생은 관중 사후 춘추시대 중원의 확고부동한 패자로 부상하는 진(晉)나라의 운명과도 비슷하다. 진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서로는 태생이 무사인 진(秦)나라 사람들을 맞아야 하고, 북으로는 이름 자체에 ‘싸움을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융(戎)과 적(狄)을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시작부터 이들과의 난타전을 통해 성장했고, 때로는 비굴함도 감수할 만큼 정치적이었다. 이렇게 주변의 강인한 족속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한 진은 강골이었다. 그들에게 관중의 인(仁)한 정치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껍데기를 버리고 서서히 군국주의적인 본색을 드러냈다. 관중은 적이 비도덕적일 때 쳤지만 이들은 적이 약해지면 쳤다.
-15쪽

딱히 다른 나라들보다 인구가 많지도 않았던 진이 강해진 것은 변화하는 정세를 재빨리 간파하고 다른 나라들보다 먼저 준비했기 때문이다. 진은 군제, 전제, 행정체제 면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꾀했다. 관중이 일관되게 외교관계를 통해 국제체제의 현상을 유지하려고 했다면, 진 문공과 그의 후계자들은 자국을 실질적으로 강하게 하는 현실적인 체제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들은 자국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국시대에도 삼진(진이 분열되어 만들어진 한, 위, 조)의 인사들은 흔히 권모술수에 능하다고 평가받았는데, 그 선배 격이 바로 문공의 총신들이다.

-15쪽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고대에도 큰 강과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이 골짜기 분지보다 부유했고, 평원이 산지보다 물산이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춘추시기의 절대 권력은 골짜기에 집중되었다. 춘추시기 초강대국인 진(晉)은 분하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고, 전국시기 초강대국인 진(秦)은 관중의 분지에 자리를 잡았다. 초나 제는 이들보다 훨씬 부유했고 항상 강국의 반열에 들었지만, 이들 국가들만큼 응집력이 없었다. 평원에서는 인민들이 흩어질 수도 있고 모일 수도 있다.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인민들이 흩어지고 모인다. 그래서 이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골짜기는 완전히 다르다. 진과 진은 공히 융과 적이라고 부르는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다.
골짜기에 있는 국가들은 나쁘게 말하면 백성들에 대한 강도 높은 착취가 가능했고, 좋게 말하면 토지를 집약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전국시대의 변법은 사실 백성들의 힘을 최대한 뽑아내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 변법이 삼진에서 시작되어 진(秦)에서 완성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변법 하면 떠오르는 상앙은 위나라에서 태어나 진(秦)나라에서 공업을 이루었다.
-27쪽

당이 멸망한 후에야 중국사의 중심은 동쪽으로 이동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분하와 위수의 두 골짜기가 중국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골짜기의 전략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평원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지평이 훨씬 넓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평원이 중국사의 중심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정적으로 북방의 몽골족이 북경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역사 무대의 동진은 훨씬 더디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황량한 모래바람이 부는 황토 언덕 사이의 골짜기에 불과하지만 고대에는 그곳이 황금이 땅이었다. 최소한 서기 1000년까지 이들 골짜기의 지위는 확고했다.

-30쪽

진은 명목상으로는 하나의 제후국에 불과했지만 처음부터 왕권을 지향한 국가였다. 헌공이 밝혔듯이 왕권은 무력에 기반을 둔 것이고, 자식이라 할지라도 쉽사리 이양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헌공은 과거 경쟁자들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첩을 취해서 낳은 아들 신생은 항상 껄끄럽다. 또 그에게는 제나라의 그림자가 있다. 중이와 이오는 적(狄)족 여인에게서 난 자식들이다. 둘은 모두 총명하고 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진이 앞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과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다. 적과의 싸움을 앞두고 적의 혈통을 받은 능력 있는 두 아들들도 미덥지 않다. 헌공은 진(晉)의 정체성을 만들고 싶어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작은 부족의 여인이 낳은 아들을 더 사랑했다.
-54쪽

1대나 2대 창업형 군주들이 장성한 아들들의 능력을 시샘한 경우는 흔하다. 당 태종의 아들 중에 남아난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태자 이승건은 일찌감치 폐위되었다. 역사서에는 이승건이 패악한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그 원인 중 하나는 이승건이 전쟁을 상당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쟁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유목민의 전술을 배우려 했다. 그다음에 세울 사람은 당연히 황후의 둘째 아들인 이태였다. 문제는 이태가 너무 재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신들이 이태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그는 개국공신이자 황후의 오빠인 장손무기의 견제를 받았다. 그도 역모의 죄를 쓰고 죽었다. 그의 죄는 아버지의 명성에 도전한 것이었다. 황후의 아들 중 막내인 이치는 별 특징이 없고 유약했다. 결국 그가 제위를 이으니 당 고종이다. 고종은 자신의 무능을 십분 발휘하여 무측천에게 나라를 넘겨주게 된다.

-54쪽

또 청나라의 강희제는 태자 윤잉을 폐했다. 역시 도덕적인 자질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진나라 헌공처럼 너무 오래 자리를 유지한 아버지의 의심이 문제였다. 그 다음은 만주족의 풍습상 무공을 세운 14자 윤제가 유력했다. 윤제는 몽골 초원과 티베트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윤제의 공이 너무 크고 노회한 장수들이 그를 지지하자 강희제는 결단을 보류했다. 그래서 결국 가장 무난하고 무력과는 거리가 먼 옹정제가 즉위하게 된다.
당 태종은 돌궐의 지지를 받아서 초원을 평정했지만 아들이 돌궐인을 닮는 것에는 기겁을 했고, 자신은 무력으로 왕권을 차지했지만 무력을 갖춘 아들은 멀리했다. 강희제도 마찬가지다. 그도 너무 오래 집권한 나머지 아들들과 경쟁했다. 나이가 들자 의심이 많아졌다.
헌공은 당 태종이나 강희제와 같은 인품은 없었지만 마키아벨리적인 정치감각은 오히려 그들보다 나았다. 그러니 장성한 데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아버지의 위신을 위협하는 아들, 혹은 어머니의 배경이 강한 데다 개성이 뚜렷한 아들들이 기꺼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55쪽

동방의 노나라와 제나라가 종주국인 주의 예법을 가져갔다면 진(秦)은 주의 생존과 발전 전략을 고스란히 가져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몸종으로 있으면서 정치를 배웠다. 몸종은 예절을 가지고 있지만 예절을 내면화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절의 이면에 들어 있는 권력의 속성들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요토미는 주인의 뒤를 이어 전국의 패자가 되지만 주인과는 확연히 다른 품격을 가지게 된다. 도요토미는 오다의 대범함 속에 숨어 있는 속임수들을 배워 확연힌 실리주의자로 성장한다. 진나라가 바로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진은 주의 허식이 아니라 실리를 철저하게 모방했다.

-83쪽

바퀴의 발견은 인류사적 관점에서 거의 불의 발견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바퀴가 생김으로써 인간은 동물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게 되었다. 현대문명은 사실상 바퀴문명이다. 회전력을 빼면 기계문명이 존재할 수 없다. 심지어 날아가는 비행기도 엔진의 회전운동으로 움직인다. (...) 여러 정황으로 봐서 전차는 초원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중국은 최초의 발명자는 아니더라도 받아들인 것을 최대한 발전시켜 활용한다. 춘추시대가 되면 전차는 여러 국가의 주력 전쟁 무기로 진화한다.

-104쪽

춘추시대 전기는 전차전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전투에서 양편이 회전하는 장소는 대체로 양편의 전차가 움직일 수 있는 장소였다. 전쟁의 목적이 적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곳에 모여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또 국가는 기본적으로 몇 개의 성읍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투할 장소도 거의 정해져 있었다. 요새 점령이 목적이라면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쉽게 주둔하고 방어망을 펼치는 보병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숫자가 제한된 전문적인 군인들이 전투를 했으므로 야전에서 상대방 주둔군에게서 불의의 습격을 받을 염려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무기의 관통력이 아직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114쪽

춘추시대의 전쟁은 비유하자면 무리의 대표들끼리 정해진 장소에서 1대1 대결을 벌이는 것과 유사하다. 이들 전사들은 직업군이었고 그 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야인’들은 이들을 부양할 의무는 있었지만 싸움에 끼어들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되면 싸움은 점점 더 전면전으로 바뀐다. 한 무리 전체가 다른 무리 전체와 싸움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싸움의 기본은 숫자를 우위로 한 포위나 지형을 이용한 장기전이다. 전차가 들어설 공간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최수한 춘추중기까지 전차는 전술의 기본이었다.

-115쪽

전차에는 세 명이 탄다. 전차의 주장은 왼쪽에 타고 활을 잡는다. 그래서 차의 왼쪽에 탄다고 하여 거좌라고 한다. 가운데는 전차를 모는 거어가 탄다. 그 오른쪽에는 거우가 타는데 그는 방패를 잡고 극이나 창을 휘두른다. 사서에 ‘누구의 전차’라고 하면, 그 전차의 왼쪽에 탄 사람이 바로 주인이다. 군주나 중군의 수장의 전차를 모는 사람은 알려진 무장이어야 하고, 오른쪽에 타는 무사는 용력이 가장 뛰어난 무사여야 한다. 그래서 전투에 앞서서는 대개 점을 쳐서 거어와 거우를 결정한다. 거어와 거우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평시에는 국사에 참여하는 거물들이다.

-116쪽

전차전에서 양측의 중군은 가장 강하며, 아군의 좌우군이 상대방 좌우군 중 하나를 밀어낼 때까지 버티는 것이 주요 임무다. 중군이 좌우군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상대방 좌우군에게 측면이 노출된다. 그래서 매우 주도면밀한 지휘관들은 좌우군과 중군의 위치를 바꾸어 일부러 중군이 밀리도록 만든다. 실전에서 군대는 승기를 잡으면 무조건 밀고 들어가는 습성이 있으므로 상대가 등을 돌리면 밀고 들어간다. 상대의 중군이 깊이 들어오면 사실상 주력부대인 좌우군이 중군을 포위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이 쓴 반달진 전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쓴 학익진 등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작전을 펼치려면 각 부대는 매우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118쪽

전쟁이란 참혹한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 지배계층의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춘추시대의 농민들은 직접적인 위협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당시의 농민들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보고서야 아는 경우도 많았다.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세금을 내는 대신 전쟁터에서 죽을 확률은 적었다. 그러나 앞으로 상황은 바뀌게 된다. 농민들도 전쟁에 참여하는 시절이 점차 열리고 있었다.
전쟁의 유일한 순작용은 전쟁에 대한 공포다. 중국을 예로 들면, 기원전 1500년경에 한 부족이 전쟁에서 패했다면 그들은 노예 신분을 감수해야 한다. 춘추시대에 이르면 상황이 좀 좋아지지만, 여전히 전쟁에 패하면 주종관계를 맺고 정책주권을 포기해야 한다. 군대에 차출당할 수도 있고, 노동력을 차출당할 수도 있다. 해마다 바쳐야 하는 공납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138쪽

전쟁의 공포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승리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노력이 종종 사회의 잠재력을 이끌어낸다. 재원을 집중하고, 때로는 구시대의 폐단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세계사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니발이 몰고 온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를 극복하는 와중에 로마는 기병대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기술을 배우는 단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의 신분제를 뒤흔들어놓았다. 양반들이 적군 앞에서 무능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노비라도 전공을 세운 사람은 신분 해방의 길이 열렸다. 비록 본격적인 개혁은 실패했지만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기회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개항도 마찬가지다. 객관적인 열세 속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다가 서양화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미국의 독립전쟁에 동원된 민병대, 남북전쟁의 노예해방 등은 모두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 나타난 개혁이다.
-138쪽

춘추시대의 기록들은 기본적으로 귀족의 기록이다. 귀족들은 특권층이다. 그런 귀족의 특권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이 자해와 자살이다. 잘못이 있을 경우 남이 자신을 해치기 전에 스스로를 해치고, 죽음을 당해야 할 상황이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이 특권은 춘추의 귀족들이 매우 귀중하게 생각한 불문율이었다. 한나라가 만들어진 후 가의(賈誼) 등의 유학자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이 바로 대부의 자결권이다.

-144쪽

군주의 첫 번째 자질은 바로 인재등용과 신상필벌이다. 사회가 급격한 기술의 진보다 집단적인 토론에 의해 지탱되지 않던 고대에는 인재집단이 바로 국가였다.

-190쪽

문공의 논공행상은 앞으로도 이어지지만 그 원칙은 깨어지지 않았다. 인의를 밝힌 사람과 나라를 지킨 사람을 앞에 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란 자신을 위해 고생한 사람을 먼저 챙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공은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일정한 공을 돌리고, 패자의 기본 자질을 세워준 사람들을 우대했다. 19년의 망명생활이 허무한 것은 아니었다.

-193쪽

당시 농민 한 명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맹자는 100무로 보았다. 100무를 경작하면 5~9명을 부양할 수 있다고 한다. 농부 한 사람이 수입으로 부양할 수 있는 인구를 평균 7명이라고 하자. 그렇게 보면 군주는 대략 2,240명, 경운 224명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 그러나 춘추 중기 진(晉)나라는 사방 100리가 아니라 사방 500리의 대국이었다. 그 군주는 주나라 천자보다 부유했으니 그 나라의 경의 지위를 알 만하다. 물론 맹자가 말한 수치는 모두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지배층이 과다하게 착취하는 전국시대의 현실을 강력히 비판하는 입장이므로, 춘추 이후에는 지배층이 받는 녹이 그가 말한 것보다 더 늘어났음은 분명하다. 그러니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경이나 대부의 지위에 오른 사람은 최소 수백 명에 달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재산가였음은 분명하다.

-196쪽

한자로 ‘정치’는 정(政)과 치(治)의 결합이다. 정이란 바르다(正)는 듯과 명령(文)이라는 말의 결합이다. 그러니 정이란 군주의 정령을 뜻한다. 치는 다스림이다. 다스림의 주체는 지식을 가진 자이며, 그 꼭대기에는 군주가 있다. 이것이 대체로 통일제국 이전의 정치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념이다. 정치의 주체는 명백히 군주다. 군주는 하루도 없을 수가 없으며, 군주의 존재는 문명의 조건이다. 정치의 주체는 누구인가?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주권자인 인민이다. 그러나 군주에게 그 권리가 양도된 상태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군주’가 ‘법’을 통해 ‘국가’를 장악하고 통치한다. 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을 쓰는’ 것이다.

-206쪽

관중이 만들고자 한 제나라는 부유한 나라였고, 문공이 만들고자 한 진나라는 근검절약하는 나라였다. 부채탕감과 부세경감은 구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신진세력들이 흔히 쓰는 방식이다. 제 환공의 팽창정책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지만 진 문공의 팽창정책은 땅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다. 진-진이 황하를 사이에 두고 강력한 영토분쟁을 벌인 것도 모두 이름을 다투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문공은 서방 진(秦)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서방으로 진출하기는 어려웠으니, 앞으로 동방으로 진출할 것이 명백했다.

-210쪽

공성은 심리전이다. 그래서 성을 공격할 때는 완전히 포위하지 않고 항상 한 면을 열어둔다. 상대의 전투 의지를 꺾기 위한 것이다. 양번과 원을 공략하면서 문공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원을 점령한 후 조최를 두어 다스리게 했고, 온 땅은 호진이 다스리게 했다. 이렇게 문공은 주나라 왕실의 땅을 차지하면서도 신의를 지켰다는 명성을 얻었다. 남방의 초나라로서는 이제 제나라보다 훨씬 호전적인 상대를 만난 것이다.

-225쪽

대규모 전쟁은 심리전이다. 쌍방의 실력이 비등할 때, 명분을 가진 군대가 이기는 것은 별로 예외가 없는 규칙이다.

-244쪽

고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의 절반은 사실 전쟁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행위의 이면을 들추다 보면 고대사를 결정하는 요인, 심지어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힘까지 볼 수 있다. 중국은 전쟁사의 보고다. 전쟁의 강렬한 유혹과 그 참혹한 결과를 목도한 많은 철학자들은 전쟁이라는 무서운 괴물을 통제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마련해왔다. 춘추 말기의 위대한 사상들은 모두 전쟁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적극적으로 전쟁을 없애기 위한 이론도 있었고, 침략전만 배제하자는 이론도 있었으며,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극복하자는 이론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론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쟁의 목적, 수단, 정의 등 모든 방면에서 서양의 어떤 이론도 중국의 이론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249쪽

고대 마야 문명을 구성하던 부족들은 거의 수백 년 동안 대규모 전쟁 없이 공존해왔다. 체계적인 약탈의 필요성이 매우 적은 지리적인 조건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체계적인 약탈을 위한 전쟁기술들이 계속 발달했다. 중국이나 중근동이나 지중해 세계는 거의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근래 서양 국가들이 자행한 식민지 쟁탈전은 체계적인 약탈전쟁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체계적인 약탈전의 시대에 들어오자 전쟁 행위를 전쟁 수행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생겨났다. 또 전쟁에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계급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바로 지배계급이다. 이제 전쟁에서 이기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의 성과를 분배하는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251쪽

지도자란 전쟁의 의미를 설명하는 사람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와 전쟁을 수행할 때 그가 끌어들인 이유들을 보라. 본질적으로는 상나라의 지배를 주나라의 지배로 바꾸기 위해서지만, 그는 이때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적은 무도하고, 인민들을 착취한다. 우리는 그 착취를 끝내기 위해 전쟁을 한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부족들을 끌어들여 상나라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이때부터 전쟁은 급격히 이념적인 것이 되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국가를 만들고 여론을 형성했다. 이제 전쟁은 여론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여론을 끌어들이는 명분이 없이는 전쟁은 불가능했다. 이 명분을 세우는 일이 바로 고대의 정치였다.
-251쪽

오기는 전쟁의 발발 원인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는 명분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이익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셋째는 증오심이 쌓였기 때문이다.
넷째는 내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기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255쪽

문공의 원칙은 명백했다. 벌줄 자는 단호하게 벌주고, 상을 줄 자는 확실하게 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과 전투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았다. 또 전쟁을 통치에 연결하는 방식도 알고 있었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은 하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중이요, 정치에서 이기는 것이 상이라는 것이다.

-261쪽

융은 서쪽에 있는 민족이고(서융), 적은 북쪽에 있는 민족(북적)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융이나 적은 범칭이며 특정한 민족을 지칭하지도 않았다. 대체로 태행산맥 동단과 북부의 사람들을 적이라고 고정적으로 불렀지만, 태행산맥 남단의 사람들은 융이나 적으로 뒤섞어서 불렀다. 어떤 때는 융, 어떤 때는 적이라 부르고, 융적이라고 붙여서 부르기도 했다.

-297쪽

전국시대가 시작되면 중원의 여러 세력들은 기존의 이민족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대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수레를 타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달렸다. 더 무서운 것은 말 위에서 활을 쏘아댔다. 이들은 전차와 보병을 무력화시키는 무서운 적이었다. 전국시대 말기에 진, 조, 연 등 북방에 위치한 나라들은 ‘흉노’라는 기마궁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이들은 전국칠웅으로 대표되는 중원국들의 대척점에 있었다. 그래서 많은 오해가 생겨났다. 문헌 근거에 의해 전근대 시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흉노를 융족의 계승자로 보았다. 그들은 원래 중원에서 기인했으나 북방으로 옮겨가서 기마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304쪽

융과 호(흉노)는 다르다. 호는 완전한 유목민이며 기본적으로 기마궁수들이었다. 중국 북방의 여러 민족들(융적)이 역학관계에 따라 호에 속하게 되거나 화하에 속하게 되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기원전 4세기 오르도스와 산서성 북부에 출현한 흉노라는 집단은 문화적으로는 기존의 융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기존의 융족들은 이들의 문화를 매우 빠르게 배워갔다. (...) 여러 융적들은 화하나 흉노의 문화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니 흉노는 하나의 집합적인 정치체제였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진 목공이 평정한 융은 아직 흉노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308쪽

관중은 인간적으로는 훌륭하나 욕망을 통제하는 능력이 부족한 환공을 변함없이 보좌한다. 이런 관계는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관중 사후에 제나라의 패권이 급격히 무너진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반면 진(晉)의 체제는 달랐다. 문공이 죽었으나 패권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는 문공이 좀 더 현실적인 체제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많은 인재들을 남겨 뒤를 받치게 하는 점에서는 진문공이 제 환공이나 관중보다 나았다. 다시 말해 진 문공이 더 현실적이었다.

-321쪽

진 문공은 고생이 몸에 밴 인물이다. 보통 사람은 고생이 끝나면 방탕해지기 쉽다. 그러나 그는 그 고생을 간직했다. 그래서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했고, 이는 진나라의 기풍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 아마도 그가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영유하던 적족의 풍속을 간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족인 호언은 문공에게 항상 가장 실질적인 길을 가르쳐주었다. 사치하고 화려한 제나라의 방식으로 물자가 부족한 진을 다스릴 수는 없었다. 문공은 스스로의 핏줄 속에서 중원과 북방의 장점을 받아들인 것이다.

-324쪽

춘추전국은 서북방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춘추무대에서는 가장 북방에 있는 진(晉)이 줄곧 맹주 자리를 유지했고, 전국시대를 통일한 이는 가장 서쪽의 진(秦)이다. 그러나 현재 이들 지역은 동남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낙후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웅장한 유적들도 방치된다. 그러나 동남방의 풍부함, 유려함만 보면 전체 중국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 청나라 말기의 극도로 화려한 궁정 문화는 서방의 침략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무굴 제국의 화려한 궁정에 비하면 영국의 왕궁은 장난감 수준이지만, 그 무굴 제국의 화려함도 영국인들의 화력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화려함과 섬세함, 혹은 풍부함은 문명의 한 일면이지 전체가 아니다. 문명이 간결한 원시성을 상실할수록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비어간다.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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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는 친구와 만나서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기 위해서 별다방으로 이동했다. 한약 먹고 있는 중이라서 카페인이 안 든 차를 고른답시고 얼 그레이를 시켰는데, 왠지 여기에도 카페인이 있을 것 같아 물어보니 들었다고 한다. 에잇! 카페인 없는 음료는 바나나 어쩌구 하는 것 밖에 없다고 하던데 이미 시켰으니 별 수 있나. 원래 차맛을 잘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이 한약이 식욕을 억제하고 있는 중이라 지나치게 맛이 없었다. 목 말라서 한 네 모금 정도 마신 것 같고 결국 다 버려야 했다. 아까비... 그러고 보니 별다방 쿠폰이 말일까지인 줄 알았는데 20일 마감이다. 친구한테 두장 뺏은 것 포함해서 7장인가 9장인가 모았는데 12장 모아야 음료를 준다. 진즉에 다른 친구에게 넘겼어야 했는데 아쉽다. 쩝... 

 

한의원에 약 지으러 갔을 때 비염 얘기를 했더니 여기저기 자꾸 저 테이프(?)를 붙여주면서 이제 시원하냐고 묻는다. 아무리 위치를 바꿔도 전혀 차이가 없는데 자꾸 물으니까, 나중엔 그냥 시원한 것 같다고 말해줬다. 그랬더니 붙이고 있다가 너무 울렁거리거나 기운이 착 가라앉으면 떼어버리라고 한다. 저 테이프는 그 날 수영하다가 저절로 사라졌다. 효과는 별로...;;;;; 

그건 그렇고... 토요일에 친구와 헤어지기 전에 못된 고양이에 들러서 친구는 귀걸이를 고르고 나는 반지를 골랐다. 여기서 반지도 파는 줄 몰랐다. 올 여름부터 생겼나, 진즉에 생겼는데 내가 몰랐나? 내가 고른 반지는 두개다. 

 

사이즈 조절이 가능해서 골랐다. 탐나는 게 더 있었는데 너무 화려하다고 친구가 뜯어말렸다. 어제는 나혼자서 아이라인도 그려보았다가 팬더가 되어서 돌아온 날이고, 뭔가 좀 더 화려한 것을 시도해야 마땅하다고 자꾸 내 속에서 부추기던 날이었다.  주렁주렁 반지는 5,900원, 고양이 반지는 3,900원!

 

까만 고양이 반지를 자세히 보니 눈이 짝짝이다...;;;; 

새끼에 끼우기엔 좀 크고 약지에 끼우기엔 약간 작다. 혹시 내가 살이 빠져서 손가락도 조금 가늘어지면 다시 도전해 봐야지. 나란히 끼기엔 안 이쁘다.  

사실, 사고 싶은 반지는 검지와 중지에 끼우는 반지였다. 요런 것 말이다. 

 

최고의 사랑에서 공효진이 끼우고 나오는 반지들이 너무 예뻤다. 공효진은 자타 공인 빼빼 마른 체형의 여자 사람. 손가락도 가늘고 길다. 저런 손에 끼워서 빛이 나지 않을 반지가 어디 있겠는가. 저 골무처럼 생긴 은반지가 66,000원이던가? 뭐 암튼 그 정도 가격대로 파는 것 같다. 예쁘다. 침 질질....  

오늘 저녁을 밖에서 먹고 언니랑 돌아오는 길에 미니 골드에 들렀다. 언니가 우울하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반지를 지르는 것이다. 295,000원. 전날 내가 지른 9800원 반지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집 처자들이 모두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인지라 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반지는 좀처럼 맞지를 않다. 어째 진열된 반지의 호수는 모두 12호란 말인가. 커플링의 남자 반지는 17호가 진열되어 있다. 우리의 사이즈는 16호. 슬프다.... 언니가 자매 반지 맞출까? 하고 묻는다. 그게 더 우울하다고 거절했다. 더 슬프다.... 

손가락 굵은 사람은 두꺼운 반지가 이쁜가요, 가느다란 반지가 이쁜가요? 하고 물으니, 짤없이 얇은 반지 끼워야 한다고 말해준다. 공효진 반지는... 힘들겠구나... 아, 정말 슬프네! 

토요일엔 늦게 들어와서 '반짝반짝 빛나는'을 보지 못했다. 일요일 자를 보니 송편집장이 한정원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구내식당에서 한쪽 무릎 꿇고 반지를 내밀었다. 그곳이 구내식당이란 건 중요하지 않다. 송편 같은 멋진 남자가 무릎까지 꿇고 결혼하자고 하는데 당장 합시다!라고 그 손을 덥석 잡고 싶었다. 게다가 송편은 나의 첫사랑과 얼굴까지 똑같지 않은가. 드라마 볼 때마다 생각나서 참 곤란하다. 여직 아픈 건 아니지만 궁금은 하다. 킁! 

한정원은 이제 온라인 서점을 준비하는 찰나인데 서점 이름을 직원들에게 공모시켰다. 상금 50만원을 걸고. 

알라딘에서도 어떤 이름이 좋으냐고 묻고 있는 중인데 후보는 이렇다.  

 

알라딘이 협찬하기도 하고, 저 중에서는 아무래도 5번 요술램프가 가장 끌린다. 지니가 짠!하고 나타나서 요술을 부려 내게 속독하는 법을 알려주면 좋겠다.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 책을 후다닥 다 읽어버릴 수 있게 말이다. 

 

춘추전국이야기 1편은 미출간 도서로 사진 없는 상태에서 원고를 먼저 읽었더랬다. 그게 2년 전이었나? 그래서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진도가 팍팍 나갈 줄 알았는데 어찌나 새롭던지! 그새 홀랑 다 잊어버린 것이다. 관중이 무척 매력적인 인물이었다는 것과, 책 시작하고 주인공 관중이 무려 160 페이지나 지나서야 등장한다는 사소한 것만 기억이 나지 뭔가. 이럴 때 내가 속독을 할 줄 안다면 파바바바 읽고는 깔끔하게 정리를 해둘 텐데 말이다. 지니가 나타나서 내게 책을 와장창 안겨주면 좋겠다~라고 말할까 했지만, 그러기엔 못 읽은 책이 너무 많아서 양심상....;;;; 

암튼, 춘추전국이야기는 현재 2편까지 읽었고 이제 3편을 시작할 차례다. 날은 덥고 엉덩이에서 땀띠 날 것 같다. 흑...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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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6-20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주렁주렁반지 너무 예뻐요. ㅠㅠ
저도 반지 끼면서 생각하는건데 역시 손가락은 얇고 긴게 장땡인것 같아요. 저도 아무 반지나 끼면 예쁠줄 알았는데 껴보니까 제 손에 들어가면 반지가 다 빛을 잃더라구요. 하하하하하하하하 ㅠㅠ
그리고 언니분이 구입하신 반지 대박 비싸네요. 제가 산 반지는(그것도 할부로!)그 반지의 절반가격도 안해요!!

전 반짝반짝 빛나는에서 송편의 프로포즈도 프로포즈지만, 어제, 잠깐동안만이라도 당신이 내가 되고 내가 당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완전 기절했어요. 그래야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거라니. 아 대박. 어떻게 그런 남자가.. 전 이제 임지규를 버립니다. 송편이에요. 송편이 진짜 남잡니다.

마노아 2011-06-20 11:21   좋아요 0 | URL
가늘고 가벼운 실루엣은 평생의 꿈으로 끝날 것 같아요. 크흑....;;;
울언니 반지는 왜 그리 비싼지 모르겠어요. 별로 이쁘지도 않더만...;;;;

어제 반짝반짝에서 송편의 그 대사는 대박이었어요. 브레이킹던도 살짝 생각났지만 암튼 송편 최고예요.
반지 얘기하던 중이라서 쓰진 못했지만 여심을 완전히 흔드는 대사였어요. 송편 짱이에요.

... 2011-06-20 15:26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반빛의 그 대사, 대박이라고 생각하는 1인. 바로 송편라인으로...
그러나 이 라인은 경쟁률이 쎄군요. 하하하하하하

마노아 2011-06-20 15:35   좋아요 0 | URL
방금 반빛 생각하고 있었어요. 금란이가 친아버지께 쫓겨나나?? 뭐 이런 예고편으로 상상을...ㅎㅎㅎ
송편 라인이 대세입니다. 송편, 끝내줘요! ^^

마녀고양이 2011-06-20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이쁜 반지 사셨네요.
저두 저렇게 이쁜 방울(?) 달린 반지 너무 좋아하는데... ^^
저는 공효진 반지보다 차승원 반지가 더 이쁘던데요. 독특한 반지들이라 눈길이 가더라구요.
공효진에게서 귀걸이만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귀 옆으로 두개 뚫은 것을 보고
오른쪽 귀 마저 뚫을까 고민 중인데, 날이 너무 더워서 곪을까봐 참습니다.

마노아 2011-06-20 11:23   좋아요 0 | URL
오, 차승원 반지는 몰랐네요. 다시 검색해봐야겠어요.
공효진만 눈에 띄었는데 차승원도 궁금해요.
짐승 바디를 가진 차승원이 의외로 손톱이 짧고 뭉특해서 놀랐어요.
저는 소지섭 같은 손일 줄 알았거든요.
여름에 귀 뚫는 건 모험이니까 조금만 더 버텨봐요.^^

무스탕 2011-06-2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가락 굵고 짧은 저도 반지랑은 인연이 없는 인생이지요 -_-;

저 주렁주렁만지 어디서 봤는데 어디서 본건지 생각이 안나요. 아.. 답답해.. --a
울 동네에도 못된고양이 생겼는데 다음에 가면 반지도 구경'은' 해 봐야 겠어요. 지난번엔 생선가시+고양이 세트 귀걸이를 천원주고 사서 귀엽게 사용하고 있지요 ^^

마노아 2011-06-20 14:24   좋아요 0 | URL
오, 저 반지도 누군가가 하고 나와서 유명해진 디자인인가요? 전 그냥 예뻐서 골랐어요.
생선가시 고양이 세트 궁금해요. 제가 고양이가 자꾸 좋아지는 게 무스탕님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세실 2011-06-20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지 이뿌다. 저도 저런 방울 달린 반지끼고 싶어요. 여름엔 역시 화이트가 최고죠^*^

마노아 2011-06-20 14:24   좋아요 0 | URL
여름엔 역시 화이트에 실버죠. 금반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ㅎㅎㅎ

비로그인 2011-06-20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나도 저런 거 한 번 어울려 봤으면!
마노아 님은 뭔가 독특하고, 비비드한 톤의 반지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손이 무척 하얘서.

마노아 2011-06-20 22:29   좋아요 0 | URL
Jude님은 나의 로망인 공효진 반지를 소화할 수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주인공!
비비드한 톤이 어떤 것인가 검색해봤어요. 채도가 높은 색이군요.
저는 큼직큼직해서 마담 류의 반지가 어울릴 지도 몰라요.(>_<)

개인주의 2011-06-21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손가락 못 생겨서 반지 안끼지만-뭘 끼고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아쉬움은 없어요.
그런데 발..
신발 날렵한 운동화나 뭐 암튼 예쁜 신발-힐은 빼고.
신는 사람들 부러워요.
발등이 높아서(살이 많아서?)
발이 푹.. 퍼지기 때문에 ..어엉엉
칼발인 사람들이 젤 부럽고 질투의 대상입니다.

마노아 2011-06-22 01:12   좋아요 0 | URL
반지 사두고 지금 방치해 두고 있어요. 내일은 외출할 때 끼고 나갈까 봐요.
자꾸 해야 손에 익을 텐데요.^^;;;;
저도 엄청 마당발인지라 칼발인 사람 부러워 해요.
제 신발들은 하나같이 투박하답니다.
제 사이즈보다 크게 신어야 발이 들어가고요. 흑흑....ㅜ.ㅜ

꿈꾸는섬 2011-06-2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반지 예뻐요.^^

마노아 2011-06-22 01:12   좋아요 0 | URL
헤헷, 여름엔 블링블링 최고예요.^^

pjy 2011-06-22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반지사이즈 고민하지 않아요ㅋㅋㅋ 커플링으로 전시된 아이들중에 남자용 17호가 중지에 딱맞아요ㅠ.ㅠ
어제 명동나갔었는데 못된고양이는 들어갈까 하다가 저녁먹을라고 급 지나쳤어요~
반짝반짝 방울반지는 마노아님 손에 있어서 더 이쁜거 같아요^^

마노아 2011-06-23 00:32   좋아요 0 | URL
중지가 17호입니까? 저 22호예요. 슬퍼요...ㅜ.ㅜ
오늘은 고양이 반지 끼고 나갔는데 비오는데 걸리적거려서 중간에 뺐답니다...;;;;;

pjy 2011-06-23 14:49   좋아요 0 | URL
나중에 보니 내머리속에 지우개입니다~ 약지가 17호 딱이고요ㅋ 중지는 20호정도입니다^^
저도 더워서 최근에 반지 껴본 기억이 가물가물@ㅅ@

마노아 2011-06-23 15:22   좋아요 0 | URL
얼라, 그렇다면 저는 약지와 중지 차이가 꽤 큰거네요. 어이쿠...^^;;;;
검지와 중지에 나란히 반지를 껴보고 싶어요. 공효진처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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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left 2011-06-18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우리가 나눈 파전에 동동주는 최악의 식단이었군요 ㅠ_ㅠ

마노아 2011-06-18 16:16   좋아요 0 | URL
최악의 식사 예시에 든 것은 모두 내가 좋아하는 식단... 가슴이 마이 아파요...ㅜ.ㅜ

다락방 2011-06-1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기와 냉면....저는 언제나 최악의 식단을 먹고 있었군요!!!!! 역시 몸매에는 이유가 있어요. orz

마노아 2011-06-18 23:47   좋아요 0 | URL
우리가 알고 있는 환상의 궁합이 절망의 궁합이라니, 너무 속상해요..ㅜ.ㅜ

다락방 2011-06-18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고기 먹을때 밥을 먹지 말아야 겠어요. 아..그렇지만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슬퍼서 눈물이 앞을 가려요. ㅠㅠ

마노아 2011-06-18 23:48   좋아요 0 | URL
어릴 때부터 내 친구가 고기에 밥 먹는 나를 비웃었어요. 고기 먹을 줄 모른다면서요.
아, 녀석은 고기를 덜 먹게 되어서 반대한 거였지만 타당한 진리가 있었어요.
삼겹살에 청국장 곁들인 맛난 밥을 이제 먹을 수 없어요...ㅜ.ㅜ

웽스북스 2011-06-18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10kg이상을 더빼도 '무방'하다는 거군요 ㅋㅋㅋㅋㅋㅋㅋ

마노아 2011-06-18 23:48   좋아요 0 | URL
최대치로 20%의 체중을 감량해도 저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아요...;;;;;;;

마그 2011-06-18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병원에서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 중인 1인
위원과 동시에 바로 시작해보아야겠습니다!!

마노아 2011-06-18 23:48   좋아요 0 | URL
목표치 5kg까지 빼시면 인증샷 부탁해요.^^ㅎㅎㅎ

hnine 2011-06-18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이 맞는 말씀이네요. 조목조목 아주 분석을 잘 해놓으셨어요.

마노아 2011-06-18 23:49   좋아요 0 | URL
탄수화물이 저렇게 무서운 놈인 줄 몰랐어요.
내가 사랑하는 밥과 밀가루는 이제 어떡하나요..ㅜ.ㅜ

비연 2011-06-18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기와 냉면...지난 주에도 먹은ㅜ

마노아 2011-06-18 23:49   좋아요 0 | URL
저 오늘 이거 읽고서도 쌀국수 먹었는데 먹으면서 계속 생각났어요...;;;;

BRINY 2011-06-1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 차라리 통닭이 낫다는 건가요? 오늘 저녁도 면을 후루룩후루룩.

마노아 2011-06-18 23:49   좋아요 0 | URL
이제 통닭을 들이파야 할까봐요. 치맥도 최악의 궁합이라고 하던데...;;;;;

꿈꾸는섬 2011-06-20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전 살을 뺄 수가 없는 걸까요? 식단을 보니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고기 먹을때 밥을 먹어야하고, 고기 먹고 나서도 냉면 먹으면 너무 좋잖아요.ㅠㅠ
하루 세끼 밥을 꼭 챙겨 먹는 전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없겠네요.ㅜㅜ 이상하게 밥을 안 먹으면 먹은 것 같지가 않아요.ㅜㅜ

마노아 2011-06-20 00:55   좋아요 0 | URL
고기에 밥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치만 파스타는 참기 어려울 거예요..ㅜ.ㅜ
사랑하는 무수한 밀가루 음식들은 다 어떡하나요. 크흑....
저녁으로 닭갈비를 먹었는데 밥은 비벼먹지 않았어요.
하지만 쟁반국수를 시켰는데 조합도 안 맞지만 맛도 없었어요. 어려워요...(>_<)
 
춘추전국 이야기 1 - 최초의 경제학자 관중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1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구판절판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황하를 비롯한 큰 물줄기들 주위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들이 탄생했다. 또 노예를 대신하여 일반 백성들이 생산을 담당하는 농업국가의 틀과 왕조의 조세체계와 상비군이 만들어졌다. 전국시대 말기에 마침내 진이 경쟁자인 6국을 겸병하고 최초로 통일제국을 이루었고, 한이 이를 계승하여 오늘날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것의 몸체가 탄생했다. 그래서 춘추전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뼈대가 탄생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뼈대 위에 육체와 정신이 덧붙여져 오늘날의 중국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15쪽

중국 문명은 세계사적으로 보아서는 후발주자다. 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최초의 중국 왕조인 상(商)은 기원전 1600년 무렵에야 출현한다. 그러나 이 후발주자의 뒷심이 만만치 않았다. 춘추전국시대가 되면 중국은 오리엔트의 제국들과 버금이 되고, 급기야 기원전 3세기 무렵 진이 중국을 통일할 무렵이 되면 이미 세계의 서쪽에는 중국 제국과 비견할 제국이 없었다.
진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신흥 강국인 로마는 아직도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힘겹게 제2차 포에니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25쪽

중국의 상나라(기원전 17세기~기원전 11세기)시기, 서아시아에서는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히타이트 네 제국이 경합하고 있었다. 기원전 9세기경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차지하는 제국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진정한 제국은 아시리아를 이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기원전 691~기원전330)다. 이 제국은 그 영역과 인구의 방대함, 문화의 복합성, 통치제도의 정교함 등 모든 방면에서 최초의 세계 제국이라 할 만하다.

-26쪽

크기 면에서 현대 중국의 약 1/3에 해당하는 춘추전국의 무대는 페르시아 제국의 반 정도라고 볼 수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인구는 대체로 몇 세기 후 로마 제국이 인구와 맞먹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3,500만 명에서 7,000만 명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제국은 인구 면에서도 확실히 춘추전국의 두 배 정도는 되는 듯하다. 이처럼 거대한 세계 제국을 이룬 페르시아도 기원전 4세기 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어이없이 멸망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이 이루어놓은 성과를 잠시 약탈했을 뿐이고, 제국의 구성요소들은 이후에도 그대로 존속되었다. 나라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제국의 핵심은 그대로였다.

전국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비하면 페르시아 시대와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벌어진 서아시아의 전쟁은 낭만적일 정도다.
-29쪽

페르시아는 부유한 대제국이었지만 전국시대의 중국 각국들과 같은 무시무시한 군국주의 국가는 분명 아니었다. 또 몇 세기 후에 등장하는 로마 제국만큼의 철저한 호전성도 없었다. 제국에 속해 있는 민족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페르시아는 이들에게 세금을 낼 의무를 제외하고는 다른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충분한 금은 용병을 쓰기에 적절했고, 그 용병이 인도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그 민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특별히 건드리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그리스 세계는 큰 위협이 되지 못하는 듯했고, 유목민으로 바뀌고 있던 스키타이가 남하할 이유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 기원전 4세기 말 항상 하수로 보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의 중장보병이 서쪽에서 몰려와 불과 10년 만에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장악했다. 세계 최대 제국의 운명치고는 싱거웠다.

-31쪽

수도 페르세폴리스는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그때 왕궁에는 12만 탈렌트의 황금을 포함한 어마어마한 보물들이 있었는데, 이 금은 당시 5세기 아테네 제국의 300년 치 국민소득에 해당된다고 한다. 최소한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페르시아는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동시대 중국의 나라들과 같은 제국 내부의 극렬한 투쟁을 겪지 않았다. 춘추 말기와 전국시대의 무대는 페르시아의 무대보다 크기는 작지만 그 투쟁의 강도는 몇 배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33쪽

영토의 크기만으로 보면 로마를 거대 제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성기 로마가 지중해 전체를 다 장악했다고 하더라도, 지중해라는 바다는 황하와 장강 유역의 육지보다 작다. 그리고 그들은 고대의 아시리아나 페르시아 같은 고대 문명의 후계자라고 할 수도 없는 문화적인 변방인들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문명은 확실히 동방만큼 화려하지 못했고, 로마의 출발은 분명히 작았다. 그러나 이 후발주자는 페르시아 제국보다 훨씬 호전적이었다.

-36쪽

로마와 한나라의 규모는 정말 흡사하다. 이를 통해 추론해보면 전국시대 말기에도 중국의 인구는 3천만 명은 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216년 그 유명한 칸나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 군단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그때 한니발의 군단은 5만 명, 로마 군단은 8만 5천 명이었다. 이런 정도의 병력 규모는 전국시대의 한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숫자보다 적었다. 그러나 그 후 로마는 급격히 팽창한다. 기원후 2세기 안토니우스 황제 시절 로마는 약 45만 명의 훈련된 군인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로마의 전성기보다 훨씬 이전인 전국시대에는 국민 모두가 군인이었고, 전투에 동원된 규모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런 규모의 전쟁은 세계사에서 오직 중국 땅에서만 펼쳐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구나 면적 면에서 춘추전국의 규모를 넘는 페르시아가 있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중원 각 나라들처럼 그렇게 격렬하게 싸우던 세계는 없었다. 단 후대의 로마가 비슷한 수준에 접근했을 뿐이다.
-38쪽

역사의 중심이 북경이나 남경으로 가기 전에 낙양은 명실공히 중원의 중심이었다. 낙양은 유유한 곳이지만 기백이 있는 군주들은 낙양의 축축한 공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주나라가 힘이 약해지자 서안에서 낙양으로 옮겨왔고, 강대한 한 제국이 약해지자 다시 동쪽 낙양으로 옮겨왔다. 낙양의 역사도 서안만큼 강건하지는 못했다.

-46쪽

기원전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 나오는 장면들을 보면 그렇게 화려할 수 없다. 철제 갑옷에 멋진 안장, 등자를 딛고 말 위에 올라 달리며, 오늘은 여기에서 내일은 저기에서 싸우는 무사들, 들판을 수놓은 막사들과, 그 안에서 촛불을 켜고 전략회의를 하는 장군들. 그 멋진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고대에 대한 환상에 빠져들고, 전쟁을 무슨 게임처럼 생각한다. 알다시피 금속 등자는 기원후에 만들어졌다. 천으로 만든 병사들의 막사는? 그런 좋은 막사가 있었다면 동양 최초의 역사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경』에서 병사는 왜 그리 불평이 많았겠나? 새하얀 천으로 만든 천막이란 장군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귀한 것이다. 비나 눈을 만나면 병사들은 얼어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최소한 기원전에는 눈비 오는 날은 대체로 싸움을 멈췄다. 또 그런 계절에는 아예 싸움을 피했다. 『손자병법』에서 하늘의 때와 지리를 그토록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고대인들에게 하늘과 땅의 조건은 삶과 죽음의 조건이었다.

-61쪽

서유럽에서 ‘신의 채찍’이라 불리던 훈족의 대침공을 묘사할 때 로마 군단과 대적하는 그들의 강인한 말과 기동력을 열심히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로마와의 대비를 강조하다 보니 급기야는 로마의 적을 거의 완전한 야만인 수준으로 다룬다. 기동력과 야만성이 그들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헝가리 초원이 얼마나 넓기에 10만 이상의 훈족 기병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기병 한 명이 최소한 말 다섯 마리를 보유해야 한다면, 헝가리 초원의 풀은 키가 몇 미터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한의 반 정도 되는 헝가리 초원에 도착한 후 훈족은 실제로는 말 10만 마리 남짓에, 기병 만 몇천 명을 보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훈족은 최소한 다뉴브 강을 건넌 후부터는 ‘보병’이었다.
-62쪽

그렇다면 그들은 야만적인 유목민의 강인함으로 로마를 제압했을까? 로마군이 동맹군이듯 그들도 동맹군을 이끌고 싸웠다. 훈족의 수령 아틸라의 동맹에는 동고트족을 비롯한 온갖 민족들이 섞여 있었다. 남쪽의 로마나 북쪽의 훈족이나 모두 온갖 정치적인 힘을 다 동원하여 싸운 것이다. 훈족도 연맹, 조공, 협상, 압박, 전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상대와 대결했고, 이길 때는 용감하고 질 때는 비겁했다. 유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았고 유달리 초인적이지도 않았다. 이렇듯 전제에 편견이 생기면 사실을 왜곡하게 된다. 그것이 역사 해석의 함정이다.
그래서 역사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곧 팩트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팩트, 기록이나 유물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62쪽

1950년대 장사 오리패의 전국시대 무덤에서 뿔로 만든 활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그러니 최소한 전국시대에는 각궁을 사용한 셈이다. 왜 각궁을 말하는가? 각궁의 사정거리는 엄청나기 때문이다. 만약 「고공기」의 내용대로 활을 만든다면 최대 사거리가 거의 300m에 달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병사들이 이런 활을 갖지는 못했겠지만, 당시의 활도 사거리 몇십 미터에 불과한 기원전 유럽 등지의 활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했던 것이 틀림없다. 주로 타림 분지의 사막이나 초원에서 뿔 재질의 활이 많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이 각궁 제조기술은 변방에서 중국으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74쪽

『사기』는 주족이 동방에서 기원했다고 한 뒤 그 계보를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사기를 무조건 믿지 않을 필요도 없지만 다 믿을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족은 관중 일대의 융(戎)족과 결합한 연합세력으로 이들의 문화는 동쪽 중원의 문화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융’이라는 말은 갑옷과 창을 결합하여 만든 것으로 무기, 갑옷, 전차, 병력 등의 의미로 파생된다. 중원인들이 보기에 융은 군사적으로 강한 이민족이라는 의미가 있다. 주족은 이 융과 연합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원을 압도할 수 있었다. 후대의 진(秦)나라도 역시 융의 땅에서 흥성했고, 융을 모두 제압했다. 융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진은 강해진 것이다. 주나라도 마찬가지다.

-95쪽

필자는 두 가지로 상나라와 주나라가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서주시대부터 비로소 신의 세계를 벗어난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인간’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서주에 이르러 진정한 ‘정치’가 탄생한 것이다. 주나라는 전쟁에 더하여 소프트 파워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 정점은 봉건제다. 필자는 역사상 주가 이룩한 두 가지 업적을 ‘조용한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하나는 신과 인간을 분리시킨 인간 혁명, 또 하나는 무력과 이념을 본격적으로 결합시킨 정치혁명이다.

-102쪽

아마도 상나라 말기(기원전 13세기~기원전 11세기)와 비슷한 시기였을 트로이전쟁기. 땅 위에서는 사람들이 싸우고, 그 사람들 위에서는 신들이 대리전을 치른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라는 대서사시를 쓰던 기원전 8세기, 그때 서주시대는 막을 내리고 동주시대가 열렸다. (...)
승패는 목마로 결정되었다. 트로이 사람들은 목마를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그 안에 병사들을 숨겼다. 인식의 차이였다. 사람의 일은 결국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다. 신은 무심했고, 트로이는 멸망했다. 동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103쪽

신화의 세계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세계에는 인간 행위의 결과만 있을 뿐이다.

-104쪽

당시 상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의 인구를 1천만 명 정도로 보는데, 이는 오늘날 서울의 인구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사람이 한 사람 죽을 때 수백 명이 따라 죽고, 제사 한 번 지낼 때 많게는 무려 천 명을 함께 죽인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나 주대에 이르면 사람으로 제사 지내는 일은 거의 사라진다. 순장도 동주시대가 되면 급격히 줄어든다. 사람 희생을 거부하고 순장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주나라의 예를 언급한다.

-106쪽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주례』나 『의례』 따위는 「가정의례준칙」만큼 한심해 보이지만 그것도 역사 발전의 한 과정이었다. 상이나 주는 모두 노예제 국가였음이 분명하지만, 노예에 대한 대우는 질적으로 달랐다. 앞으로 노예가 점차 사람 축에 끼다가 결국은 국가의 재상이 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시대가 바로 춘추시대다.

-107쪽

힘으로 이길 수 없을 때 다른 수단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국제질서를 만드는 것은 국제정치의 기본이다. 『주례』의 복잡한 체제는 주나라 정치의 섬세함을 말해준다. 이제는 순수한 힘이 아니라 존왕양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외양을 쓴 힘이 등장한다. 오늘날 말하는 소프트 파워다. 주나라의 소프트 파워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했다. 동천으로 이미 유명무실해진 주나라 왕실은 그 후로 500년도 넘게 살아남는다. 주나라 사람들이 만든 제도, 법률, 관념 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깨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힘을 발휘했다. 반면 상나라에는 주에는 있는 ‘정치’가 없었다. 상의 정치 부재는 국내외적으로 전쟁과 폭압으로 드러났다.

-108쪽

상은 전쟁을 너무 많이 수행했다. 그리고 그 전쟁을 기본적으로 약탈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상나라가 계속 수도를 옮기는 이유도 잦은 약탈전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좌전』에는 상의 마지막 왕이 동이와의 싸움에서 힘을 다 빼서 나라를 망쳤다고 쓰여 있다. 사면에 강한 적을 두고 싸우면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서주시대와 춘추전국시대 전반에 걸쳐 모든 국제정치의 제1원칙은 절대로 한꺼번에 두 방면의 적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국시대의 강대한 진도 연횡이나 원교근공 등의 외교적인 수단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이익을 관철했다. 그러나 상은 그야말로 무모할 정도로 정면승부를 했다. 적이 약하면 잡아오고, 강하면 전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적을 많이 죽여서 겁을 주려는 정책은 역효과만 냈다.
-111쪽

주나라의 국토운영 전략은 힘의 부족을 인정하는 만큼 현실적이었다. 그러고는 그 현실적인 조치에다 그럴듯한 정치적인 수사를 씌웠다. 주는 상이 남긴 유산을 다 취했다. 그리고 이름만 바꾸어서 주나라의 것으로 했다. 주는 상이 남긴 역법을 건졌고, 제사를 취했다. 상나라의 제사는 주에서 ‘의례’로 더 정교하게 발전했다. 상나라의 중앙관제와 군제도 모두 주나라의 것이 되었다. 특히 왕이 삼군을 통솔하는 전통적인 군대의 편제는 상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중군, 좌군, 우군은 작전 시에는 적을 포위하는 대형으로, 평상시에는 그 수장들이 서로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122쪽

행동철학 방면에서 관중은 약 300년 후에 등장하는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하다. 관중은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관중은 더 나아가 실천하지 못할 일은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말과 행동을 부합하게 하는 것이 관중의 철학이었다. 그러나 관중에게는 플라톤의 이데아도 있었다. 다만 이데아가 형이상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164쪽

관중은 중국 최초로 경제학을 정립한 사람이며, 아마도 세계 최초로 재정학의 핵심을 이해한 사람일 것이다. 경제에 관한 한 공자나 맹자, 순자 모두 관중을 따르고 있다. 관중은 야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관중은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치의 핵심은 경제였다. 그것도 오늘날의 협소한 경제학이 아니라 방대한 스케일의 정치경제학이다.

-170쪽

큰물이 없으면 용은 개미떼도 이기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인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큰 인재는 반드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으로 나온다. 관중에게는 포숙이 있었다.

-208쪽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군주와 신하의 재능을 나눈다. 신하는 군주의 재능을 가질 수가 없으며, 또 군주는 신하의 재능을 다 가질 필요가 없다. 군주는 신하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으면 그만이다. 그 나머지 일들은 신하들이 한다. 군주는 신하들이 최선을 다해서 달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면 된다. 큰 인재와 작은 인재를 구분할 능력이 있으면 어떤 조직이든 다스릴 수 있다. 술을 좋아해도 술의 폐해를 알고 있으면 인재를 쓸 수 있다. 다혈질이라도 남이 제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자신은 허명을 쫓더라도 실속 있는 사람을 옆에 두면 된다. 제나라 환공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210쪽

후대의 법가 사상가들은 이들 농민들을 강력한 수탈체제의 대상으로만 삼았다. 변법을 통해 강력해진 진나라가 이런 수탈을 기반으로 전국을 통일했지만, 진나라는 성취와 동시에 몰락했다. 바로 관중의 방법은 있었지만 그의 철학이 없었던 것이다. 관중은 지배층의 욕망을 억누르자고 했고, 후대의 법가 사상가들은 피지배층의 욕망을 억누르자고 했다.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였다.

-240쪽

관중은 관료의 책임을 크게 두 가지로 보았다. 바로 사람농사와 곡식농사를 잘하는 것이다. 관중은 사람농사, 곧 인재 양성을 관리의 책임으로 보았다. 인재를 국가의 요체로 보았다는 점이 관중과 제 환공이 다른 주자들보다 먼저 출발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다.

-243쪽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백옥처럼 희기는 참 어렵다. 정치란 근본적으로 갈등을 조절하는 것인데, 백옥처럼 흰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러운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러면 갈등을 조절하기 어렵다. 그래서 관중이 임종 시에 후계자로 포숙은 안 된다고 한 것이다. 포숙은 악한 사람을 지나치게 미워하기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정치인은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에 약점이 있다. 그 약점을 가지고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바로 기(掎)라고 한다. 그 수단이 바로 법이다! 법이란 권력의 수단인지라 타락하기 시작하면 천하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다. 그러나 관중이 법으로 정치를 한다고 말할 때 법은 법을 이용하여 뒤통수를 친다는 말이 아니다. 관중은 법을 관문에 걸어둔다고 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둔다는 말이다. 관중이 보기에 그 법은 누구나 알아보기 쉬워야 한다. 법을 몰라서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는 법의 잘못이지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관중의 정치는 명명백백하다.

-262쪽

환공이 위험에 처하자 관중이 중간에 재빨리 끼어드는 모습을 보라. 관중은 뭔가 보여줘야 할 때 보여준다. 환공이 위협을 받아 맹서당하는 것을 관중은 ‘허락하는’ 모양새로 바꾸었다. 관중은 어그러진 일을 단숨에 정리할 줄 알았다.

-273쪽

누가 관중이 힘으로 천하를 제패했다고 말하는가? 관중은 정치로 제패했다. 관중은 어제 한 말을 오늘에 뒤집는 사람이 아니다. 관중이 오직 힘만 썼다면 제나라 혼자의 국력으로 강력한 초나라와 서방의 나라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관중은 국제관계를 이했고, 정치를 통해서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았다. 정치의 제1원칙은 신뢰다. 위협당했더라도 허락하지 않았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허락했다면 목숨 때문에 약속을 버린다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관중의 패업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땅이야 다시 얻을 수 있다.

-275쪽

관중의 선택은 언제나 차선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차선은 항상 현실성을 인정받았다. 관중은 포숙에게 미안해하면서도 그에게 기댔다. 그러자 사람들은 포숙을 높이 샀고, 관중은 포숙의 선행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다. 관중은 소홀에게는 미안하지만 따라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새 군주에게 최선을 다함으로써 소홀의 의를 빛내고 자신은 충성스럽다는 말을 들었다. 관중은 착하지만 당하며 사는 사람보다는 강하지만 덜 괴롭히는 사람을 목표로 삼았다. 국제관계에서 그는 민족 간의 평등이 아니라 존왕양이를 주창했다. 그러자 공자는 "관중이 없었으면 중국이 다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차선을 행하면서도 이렇게 칭찬받는 것이 관중의 특징이다.

-279쪽

17세기 청나라 강희제 시기에도 장거리 원정은 최대 100일이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보급 문제 때문이었다. 진이나 초를 공격하려면 전투병보다 더 많은 보급인력이 투입되어야 할 것이다. 불감당이다.
물리적인 한계는 사회경제적인 한계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전국시대에 공성전이 벌어진 것은 춘추시기에 ‘야인’으로서 전쟁에 동원되지 않던 농민들이 모두 무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국시대에는 곡식의 비축이 활발해져서 장기간의 원정을 지원할 수 있었다. 일단 성을 둘러싸면 성 내부의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자면 일군의 부대가 계절을 넘겨도 보급물자가 끊기면 안 되었다. 관중시기에 농민들을 무장시키려 했다가는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농사시기를 놓치면 처자가 굶주리게 된다. 철제 농기기구가 농사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전의 농업생산력으로는 대규모의 저장도 어려웠다. 또 도로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곡물을 운반하기도 어려웠다. 관중의 방법은 연합군을 결성해서 힘도 약하고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상대의 틈을 노리는 것이었다.
-287쪽

춘추시대 제후들 사이의 의리는 약간 낭만적인 면이 있었다. 관중이 설령 전국을 제패할 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관중의 법률은 제후국의 군주가 스스로 ‘윗사람을 범하지 않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국내의 백성들의 반란을 막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제후들끼리도 서로 일정한 한계를 넘지 않았다. 전투에서 상대편 군주를 잡는다 해도 죽이지는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또 전투에서 장수가 상대편 군주에게 예를 올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원수를 친다 해도 그 자손 한 명은 남겨두는 것이 춘추의 예법이었다. 종법질서에서 상대의 핏줄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가장 무서운 패륜이었다.

-291쪽

춘추시대는 일종의 과점체제에 비교할 수 있다. 국인(士)들과 귀족들은 싸움을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꼭 전쟁에서 목숨을 걸 의무는 없다. 국인들은 농민들이 생산하는 것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면 굳이 목숨을 걸고 겸병전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야인들의 입장에서 무도한 군주가 아니라면 나라 이름이 제나라든지 진나라든지 기본적으로 상관이 없었다. 당시 귀족들은 문제가 생기면 종종 망명했다. 다시 말해 나라와 상관없이 귀족은 귀족들끼리 연대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망명객은 이유를 불문하고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귀족들 간의 불문율이었다.

-292쪽

국인과 야인이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 이해를 같이할 때 살벌한 투지가 발생한다. 전국시대가 그런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국인, 야인의 구분이 없이 모두 군현의 백성이었고, 모두 군인이었다. 이기면 이익이 있고 지면 손해를 입었다. 또 마음대로 망명을 할 수도 없었다. 또 그때는 국가와 애국심이라는 관념이 자라나고 있었다.

-293쪽

실제로 제나라는 도덕적인 이유들을 들어 약소국들을 공격했고, 이것은 향후 중국사에서 국제적 문제에 개입하는 대원칙이 되었다. 당나라가 연개소문을 공격할 때도 왕을 시해했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들었다. 이런 전통의 원칙도 관중이 세웠다는 것을 알면 전율할 것이다.

-299쪽

관중과 환공은 먼저 동쪽을 제패하고, 남쪽으로 초나라를 눌렀으며, 북쪽 융적의 동남진을 막았다. 말년에는 중원과 서방의 문제까지 끼어들어 혜공을 세우고 융을 공격하여 진(晉)의 명맥을 이었고, 진(秦)의 동쪽을 두드려 겁을 주고 제나라의 패권을 인정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과연 동서남북에서 ‘일광천하’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관중이 환공을 보좌하여 한 일이다. 춘추시기의 환경에서 이 정도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관중과 환공의 조합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관중은 영걸이지만 세상을 모두 한 손에 놓고 주무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역사가 할 일이었다.

-337쪽

관중은 환공의 욕망을 긍정했다. 공적인 일만 잘하면 사적인 욕망들은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이 관중의 태도였다. 만약 관중이 활달한 환공의 모든 욕망을 다 막았다면 환공도 평범한 사람에 그치거나 다른 길로 빠졌을 것이다. 실력으로는 관중에 버금가는 명나라 시절의 대정치가 장거정. 그는 군주의 모든 욕망을 막았다. 그러나 자신은 은근히 욕망을 즐겼다. 막상 장거정이 죽자 세상에서 가장 탐욕적이며 가장 게으른 ‘괴물’ 황제가 탄생했다. 바로 신종 만력제다.

-367쪽

"과인은 사냥을 너무 좋아합니다. 밤낮으로 사냥을 하고 안 돌아오니, 백관과 일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돌아가지도 못할 지경입니다."
"나쁘긴 나쁩니다만, 당장 큰일 날 일은 아닙니다."
"과인은 밤낮으로 술을 마십니다."
"나쁘긴 하지만, 이도 당장 큰일 날 일은 아닙니다."
"과인은 음란한 버릇이 있어, 불행히 여색을 너무 좋아합니다."
"나쁘긴 하지만, 역시 당장 큰일 날 일은 아닙니다."
"이런 게 다 괜찮으면 도대체 나쁜 행동은 뭡니까?"
"군주는 결단력이 없고(優) 행동이 굼뜨면(不敏) 안 됩니다. 결단력이 없으면 백성을 망하게 하고, 행동이 굼뜨면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관자』「소광」
사생활이야 개인의 영역이니 군주도 사생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군주는 공적인 생활에서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관중의 생각이다. 군주는 따르는 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군주 본연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368쪽

사실 관중은 춘추시대의 경제체제, 행정, 군사, 법률, 외교 등 모든 방면의 질서를 세운 사람이다. 사농공상의 분업, 시장의 활성화, 국제무역, 농지개간, 세제개혁, 중앙과 지방 행정체제 확립, 삼군제도의 정비, 법령의 집행 방식 확립, 존왕양이와 회맹질서의 수립, 그 모든 것이 관중의 손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질서는 후대로 계속 이어졌다.

-369쪽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기는 하지만 모두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면 사회가 각박해지고 난폭해진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무한의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관중이 말하는 원칙이다. 지도자는 열심히 뛰어야 한다. 그러나 열심히 뛰지 않는 추종자들에게 채찍을 들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의 인간관이며, 또 관중의 인간관이다.

-371쪽

남들의 욕망을 긍정하라. 욕망이 심하게 억눌리면 ‘변태’로 바뀐다. 특히 먹는 욕망이 억눌리면 사람은 무엇이 되는가? 아무리 착한 사람도 폭도가 될 수 있다. 남들의 자기보존 욕구에서 나오는 건강한 욕망을 긍정하라. 이것이 바로 관중의 생각이다. ‘사람들을 법으로 다스리려 하지 말고 그들의 본성이 원하는 것을 주어라.’ 이것은 제나라의 창시자인 강태공이 만든 불문율이다.
-3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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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보면서 처음으로 인식한 상이 바로 '칼데콧' 상이었다.  

첫 정이 무거워서 칼데콧 수상작이라고 하면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 못 읽은 책들은 차차 추가해 보려 한다.  

아직도 많다. 좋은 건지, 부담스러운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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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부엌에서
모리스 샌닥 지음, 강무홍 옮김 / 시공주니어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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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린느와 쥬네비브
루드비히 베멀먼즈 지음, 이선아 옮김 / 시공주니어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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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마들린느
루드비히 베멀먼즈 글 그림, 이선아 옮김 / 시공주니어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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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
윌리엄 스타이그 글 그림, 이상경 옮김 / 다산기획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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