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이야기 3 - 남방의 웅략가 초 장왕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3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12월
구판절판


중국 문화는 여러 개의 발을 가진 솥과 같다. 그 솥발들을 다 없애고 세 개만 남겨놓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단연 초를 남겨둘 것이다. 나머지 둘은 중원, 그리고 진(秦)을 포함한 융적(戎狄)이다. 진이 중원과 다르듯이 초도 중원과 확연히 다르다. 물론 초는 진과도 다르다. 진이 실용성을 강조했다면 초는 거기에 미를 더했다.

-15쪽

초는 왜 자꾸 동쪽으로 나가려고 했을까? 물론 동쪽에 넓은 미개척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구리다. 초 장왕이 초나라의 창의 날만 모아도 주나라의 구정 따위는 만들 수 있다고 한 것은 허풍이 아니었다.

-48쪽

고대에 구리는 실로 금보다 귀중한 자원이었다. 금은 장신구나 만들 수 있었지만 구리로는 병기, 수레, 농기구까지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구리는 고대에 ‘미금(美金)’이라고 불렀다.

-50쪽

애초에 중원보다 물질이나 문화 모든 방면에서 뒤졌던 초나라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초나라 특유의 진취성과 흡수력 때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縣이라는 제도는 초나라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다. 주나라의 봉건제도에 의하면 주나라를 제외한 국가의 수장들이 公이 된다. 그런데 초는 ‘참람히도’ 일개 현의 수장을 공이라고 불렀다. 초는 약한 나라들을 합병한 후 곧장 현을 설치했다. 초는 점령한 영토를 현으로 만들고, 거기에 군사거점을 두면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영토가 크고 또 강을 따라 전차가 이동하는 길들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초나라의 특성상 지방에 군사거점을 두는 것이 편리한 면이 있었다.

-82쪽

초는 중원보다 먼저 현을 만들어 지방거점으로 활용하면서 빠른 속도로 영토를 늘릴 수 있었다. 이것은 제나라를 비롯한 동방의 나라들이 중앙의 도성에 주로 의지하고 확장이나 전진방어를 위한 대책이 거의 없었던 것에 비하면 매우 발전된 행정제도였다. 그리고 북방의 晉과 같이 새로 편입된 지역의 인민들을 압박하고, 공신들에게 실질적인 봉지로 내리는 가혹한 체제에 비해서도 안정성이 있었다. 진이 한.조.위 세 나라로 갈라진 것은 지역에 봉지를 둔 가문들이 중앙권력을 좌지우지하다가 결국은 나라를 분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의 公들은 지방을 진수하는 지방관의 성격에 가깝다. 초는 서방 秦과 같이 강력한 중앙과 그에 예속된 행정구역으로서의 현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지방행정 면에서 초의 제도는 秦과 중원국가들의 절충점에 해당했다.

-83쪽

고대의 구리합금 청동은 글자 그대로 金이었다. 청동은 썩지 않기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언제든지 다시 녹여도 낭비가 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도 철기가 있었지만 철의 탄소성분을 조절하고 물성을 개량하기 위해서는 아직 한참 동안 기술의 진보를 기다려야 했다. 또 철은 자연상태에서 쉽게 부패한다. 그러나 청동은 다르다. 청동 솥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이동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청동 솥을 들고 다니면 장거리 군사작전도 가능했다. 청동으로 만든 무기의 중요성은 물론 말할 것도 없다. 묵자는 청동으로 악기를 만드는 것도 반대했고, 그런 보물을 무덤에 묻는 것도 반대했다. 묵자가 활동하던 전국시대 초기에 구리는 금과 같이 귀했다.

-123쪽

초나라의 팽창정책은 매우 실용적이었다. 초나라는 중원의 예법에 크게 구속되지 않았다. 초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 움직였다. 초나라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는 사람이다. 그 다음은 경작지다. 마지막으로 구리광산이다. 특히 구리는 국가만이 관리할 수 있는 품목이다. 국가가 이 독점 품목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국세가 바뀌었다. 특히 초나라는 전통적으로 공업을 관장하는 공윤의 힘이 강했다. 이들은 군수품을 관리했지만, 전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25쪽

손숙오는 중국사에서 또 하나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바로 무결한 관료다. 관중은 재상 역할을 했지만 그를 관료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조력자라기보다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며 기획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역사적인 추세로 왕권이 점점 강화되자 진정한 조력자들이 필요해졌다. 어쩌면 조력자가 되기는 기획자가 되기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권력은 왕에게 있기 때문에 조력자는 왕의 권위를 해쳐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그는 왕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권력은 줄어들고 할 일은 더 많아진 상황에서 조력자는 어떻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바로 청렴이다. 청렴하지 못하면 권력을 이행할 수 없다.

-134쪽

관료 체제가 확립된 후 수많은 뛰어난 재상들이 부패 문제에 걸려 넘어졌다. 명나라를 중흥시킨 명재상 장거정을 보자. 장거정은 옛 초나라의 수도 강릉에서 태어난 명신이다. 그러나 그는 매우 사소한 비리로 죽어서도 오명을 남겼다.

-135쪽

손숙오는 남을 위해 몰래 일하는 사람이다. 손숙오는 무력을 통한 다스림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생산력 증대와 민심의 지지를 통해 초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규율을 강요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방법들을 원용해서 점진적으로 바꾸는 것을 촉구했다.

-137쪽

장왕이 뛰어난 것은 뛰어난 귀족을 등용해서가 아니라 뛰어난 ‘촌뜨기’를 기용했기 때문이다. 제 환공이 뛰어난 것은 귀족이 아니라 처사였던 관중을 기용했기 때문이고, 秦 목공이 뛰어난 것은 노예였던 백리해를 기용했기 때문이고, 晉 문공이 뛰어난 것은 환관에 도둑까지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손숙오는 비인(鄙人)으로서 國人이 아니었다. 비인이란 국도 밖에 사는 농민이나 지방의 소읍민을 가리킨다. 춘추전국 시대는 귀족사회다. 그러니 비인을 중앙정계에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장왕은 비인을 과감하게 등용한 것이다.

-141쪽

손숙오는 원래 제방을 쌓는 토목 기술자였다. 그는 경제적으로 식민지 경영을 시도한 정치가였다. 춘추시기에 하천에 제방을 쌓아 물을 댔다는 기록을 남긴 사람은 손숙오가 첫 번째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재방을 만들고 물을 활용했다. 그러나 당시 손숙오가 한 일은 그저 흐르는 물을 가둔 것이 아니라 물길을 돌리는 거대 공정이었다. 그런 대규모 공사는 기록상으로는 손숙오의 기사피라는 인공호수가 최초다. 이 기사피는 초나라의 동방 진출 교두보가 되었다. 전국시대 중기까지 영토를 가장 크게 넓힌 나라는 초다.

-148쪽

손숙오는 초나라 동쪽 변경에 쌀의 시대를 연 것이다 .회하 일대 사람들이 먹는 것은 "쌀밥에 물고기 국"이라는 『사기』의 기록은 당시 초나라 사람들의 식생활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원래 있는 것이지만 쌀밥은 선조들이 제방을 쌓고 땅을 개간해서 얻은 결과물이다. 손숙오는 들판에 물을 대어 논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초나라의 관할지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백성은 곡식을 하늘로 안다고 했는데, 손숙오가 농경사회에서 추앙받는 것도 당연했다. 그 곡식 중에 단연 중요한 것은 살이다.

-150쪽

오늘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쌀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쌀은 밀보다 두 배 중요한 작물이다. 중국은 전 세계 쌀 생산과 소비의 1/3을 담당한다. 이 위대한 살의 시대의 초석을 초인들, 그중 손숙오라는 사람이 놓았다. 쌀이 없었다면 중국은 그토록 많은 인구를 부양하지 못했을 것이다.
점령지를 부유한 곳으로 바꾸면 반란이 적게 일어난다. 장왕 시대가 되면 초는 급속히 동쪽으로 팽창했지만 새로 점령한 지역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초의 일부가 되었다.
-152쪽

유비는 제갈량을 얻고 물고기가 물을 만났다고 표현했다. 장왕이 손숙오를 얻은 것은 대붕이 날개를 얻은 격이었다.

-154쪽

보통 원정군이 나설 때는 농민들은 잡역을 맡고, 공인들이 따라와 물품을 만들며, 상인들은 사전에 전투 물자를 유통시킨다. 그러나 초나라 원정군은 달랐다. 졸들이 스스로 수레를 끌고, 풀을 베어 잘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이 군대가 장기전을 위한 자급자족형 군대임을 의미한다. 당시 초나라 군대는 장기전을 수행하는 매우 훈련된 군대임을 알 수 있다.

-178쪽

전투 대형은 사냥 대형과 같기 때문에 양군이 마주칠 때 중간에 짐승들이 갇히는 것은 당연했다.

-191쪽

"응당 승리의 군영을 만들고 적의 시체를 모아 경관을 만드시지요. 듣건대 적을 물리치고는 반드시 자손에게 고해 무공을 잊지 않게 한다고 하더이다."
그러나 장왕의 생각은 달랐다.
"이는 그대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대저 武라는 글자는 ‘창을 멈춘다(止+戈)는 뜻이다."
이것이 유명한 창을 멈추는 무, 곧 ‘止戈之武’라는 고사의 기원이다. 후대에 지과지무는 무인들의 이상이 되었는데 우리나라 충무공 이순신의 칼에도 ‘지과’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203쪽

‘해는 일식이 있고 달은 월식이 있다(日月之食)’는 말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은 의미로 이용된다.

-206쪽

손숙오는 장기전이 가능한 군대의 편제를 만들었는데, 신숙시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둔전을 만들어 초가 장기전으로 적을 지치게 하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니 최소한 기록상으로 전쟁과 경작을 결합한 것은 초나라가 처음이다. 송나라 사람들은 아예 집을 짓고 씨를 뿌리는 초나라 군인들의 행동에 버틸 의지를 잃어버렸다.

-224쪽

결과적으로 초 장왕의 북벌은 중국사의 지평을 크게 확장시켰다. ‘오랑캐 군주’가 중원의 군주보다 낫다? 오랑캐의 우월을 인정해야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즉각 화하인 특유의 민첩성이 발휘되었다. 물론 중원이 오랑캐보다 못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초의 오랑캐라는 꼬리표를 떼면 될 것 아닌가? 장왕 이래 초는 중국사에서 더 이상 오랑캐 나라가 아니었다. 그리고 전국시대가 되면 초는 대국이자 문명국으로서 위상을 떨친다. 이후 북방에서 유가와 법가 철학이 무르익고 있을 때 남방에서는 기술학과 노장 철학이 만개하게 된다. 남북의 우열 시대는 끝난 것이다.

-227쪽

믿음의 군주 환공을 ‘유가적 군주’, 엄격한 상벌을 중시한 문공을 ‘법가적 군주’라고 한다면, 무모한 듯하면서도 멈추고 하는 일이 없는 듯하면서도 성취하는 장왕은 분명 도가적이다. 특히 장왕이 도가적인 것은 그가 어떤 때 멈춰야 하는지 갈파했기 때문이다.

-230쪽

결론부터 말하면 ‘노자’는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책 이름으로 보는 것이 옳다. 사마천이 『사기』의 열전을 쓸 당시에 ‘노자’는 이미 대중적인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실존인물로 여겨졌고 그의 책인 『노자』나 『도덕경』은 지식인이라면 거의 아는 책이었다. 사마천이 열전을 쓸 당시에도 노자가 누구인지는 정설이 없었다. 그래서 용의주도한 사마천은 자신이 여러 사서를 참조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231쪽

춘추시대 미증유의 대승을 거두고 슬퍼한 사람은 이제껏 장왕밖에 없다. 진나라 문공은 항상 싸움에서 이기면 승리를 과시했다. 그러나 장왕은 무력을 미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상례로 전쟁을 마무리했다. 물론 장왕이 평화를 사랑한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중원을 대신하여 동쪽으로 무자비하게 국토를 확장했다. 그는 현실의 군주일 뿐 ‘노자’와 같은 심오한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북쪽으로는 명성을 얻으면서 사실은 동쪽에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그가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잔혹한 방법만 썼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비록 침략자지만 그는 자신의 사람과 남의 사람을 최대한 살린다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그래서 장왕은 武라는 이름을 가진 형이며, 노자는 文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다.

-242쪽

남방에서 한바탕 광풍을 몰고 온 장왕은 패업을 이루자마자 죽었다.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초가 잠시 주춤한 틈을 타서 晉은 다시 군사력을 키웠다. 둘째, 제나라가 진나라의 패자 지위에 의문을 품고 도전했다. 그 배후에는 물론 초가 있었다. 그래서 진-제 양국은 규모로는 필의 싸움에 버금가는 대군이 동원되는 국제전을 벌인다. 셋째, 서방의 秦은 晉-초, 晉-제 간의 알력이 있을 때마다 晉의 후방을 노렸다. 급기야 晉-秦은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된다. 마지막으로 동쪽에서 신흥 강호 吳가 등장한다. 초의 동진은 오에게 위협이었다. 그러자 晉은 오를 이용해 초를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하게 횐다. 이리하여 초는 오와의 기나긴 싸움에 돌입하게 되고 북방에 힘을 쓸 겨를이 없었다.

-256쪽

대저 전쟁이란 국가의 존망을 건 대사이기에 이기고도 불안하다. 역사상 전쟁에 이기고 나라를 잃은 군주도 수없이 많다. 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등 패자라고 불린 사람들은 한결같이 전쟁을 신중하게 했다. 전쟁은 감정으로 할 수 없고, 전쟁은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기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군주는 승산이 없으면 절대로 나서지 않는다.

-290쪽

군대가 진을 칠 때는 일반적으로 그믐날을 꺼린다. 원래는 어두워서 진을 치다가 야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일 테지만 점차 관습으로 굳어졌다.

-303쪽

‘영(靈)’이란 공업을 이루기 위해 힘쓰지 않은 군주를 칭하고, 포학한 군주에게는 ‘여(厲)’라는 시호를 붙인다. 공왕이 언릉의 패배 이후 얼마나 뼈저리게 반성하고 살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일화다.

-310쪽

싸움의 이면을 이론적으로 살펴볼 때가 왔다. 두 가지 관점, 곧 국가의 ‘팽창 관성’과 토지와 권력을 둘러싼 ‘군주와 경대부들의 구조적인 갈등’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자. 먼저 초나라의 입장을 보자. 장왕 대의 팽창은 일종의 관성을 만들어냈다. 마치 후대의 한족들이 만리장성을 심리적인 경계로 삼았듯이 초나라는 황하를 잠재적인 국경으로 만들고 싶었다. 황하 이남에 적대국들을 두는 것은 불안했다. 진나라 입장에서 보면 전쟁은 내정의 연장이었다. 군주도 욕심이 있었고 경대부들도 욕심이 있었다. 전쟁은 그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되었다. 전쟁에서 지면 누가 책임질 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고, 이기면 누구의 공인지를 두고 알력이 생겼다.

-314쪽

중원과 오랑캐의 제도 중에 무엇이 더 야만적인가? 중국에 속하지 않는 나라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그 사람들을 노예로 쓰는 사회가 야만적인가, 아니면 자신과 다른 종족들을 포용하고 장점을 흡수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사회가 야만적인가? 낡은 중원의 사상으로는 팽창하는 세계를 담지할 수 없었다. 아마도 초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팽창은 거기에서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생산의 주체로 인간을 대하는 관념 면에서 초는 제하 국가들보다 선진적이었다. 동방의 수많은 나라들이 초나라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초나라로 흡수되었다. 그래서 초는 급격히 영토를 늘려나갈 수 있었다.

-331쪽

가장 많은 ‘오랑캐’ 민족들을 가장 빠른 시간에 아우른 이들 역시 ‘오랑캐’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초는 오랑캐의 힘을 보여주었다. 이후 이 오랑캐들은 문화적인 면에서도 중원을 앞지른다. 이제 우리는 오랑캐의 정의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노자』에 "골짜기는 낮은 곳에 처하기에 물을 받아들인다"고 했는데, 초는 화하가 아닌 2류 민족이었기에 그 많은 민족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초가 없었으면 화하는 황하를 벗어나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332쪽

현재의 중국은 한때 중원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종족으로 여긴 초인들이 살던 땅까지 차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춘추시대에는 정체도 알지 못하던 곳들까지 버젓이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히말라야 북쪽의 고원지대, 타림 분지 일대의 사막지대도 모두 ‘중국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땅들은 모두 처음에는 중국인들이 적대시하던 민족들이 살던 곳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에서는 어떤 민족의 근원을 따지는 일은 늘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다. 56개의 민족이 ‘화합하여’ 중국을 만들었기 때문에, 민족의 근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은 항상 경계의 눈초리를 받는다.
-336쪽

오직 현재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사라진 사람들은 "후손들의 무지막지한 저평가"에 시달리기도 한다. 중국의 고대 중원인들이 한자로 남긴 기록의 위력을 목도하고 나면, "현재"와 "후손"을 '기록’으로 바꾸어 말해도 좋을 것이다. 최소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는 ‘기록과 사실의 대결’이며, ‘기록은 사실을 무자비하게 저평가한다.’ 기록에 의하면 북쪽에 사는 사람은 북쪽 오랑캐(북적), 동쪽에 사는 사람은 동쪽 오랑캐(동이)다. 기록의 힘은 거침이 없다. 언젠가 중원이 초를 압도한 이후부터 중원인들 중심의 기록에 의해 초는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초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저평가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민족들의 연원에 대한 고대의 한자 기록들은 최소한 5할은 허구다.
-336쪽

오늘날에는 ‘성’과 ‘씨’가 구별 없이 사용되지만 고대 중국에서 성과 씨의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원래 한자로 姓은 여자(女)가 낳은(生) 자녀들이라는 듯으로 모계 씨족사회에서 동일한 모계 혈족을 구분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래서 ‘姬’, ‘姜’, ‘영瀛’ 등 초기의 성들에는 계집 녀 자가 포함된 것이 많다. 그런데 사회가 점차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성이 부계 혈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어 사회가 발달하면서 종족의 인구가 늘고 거주 지역이 확산되자, 하나의 성에서 갈라진 지파가 생겨나고, 이들은 새로운 거주지나 조상의 이름 등을 따서 자신들을 구별할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나의 성에서 갈라진 계통을 구별하기 위해 氏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이다. 예를 들어 초나라 왕들은 대대로 웅씨熊氏가 계승했지만, 성은 미羋였다.
-341쪽

이러한 성과 씨의 구별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당시 귀족들이 분봉받은 채읍의 지명이나 관직, 조상의 字나 시호, 작위, 거처 등을 씨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부자 사이에도 성은 같지만 씨가 다른 경우가 생겼고, 성은 다른데 씨가 같은 경우도 나타났다. 이러한 성과 씨의 구별은 종법질서가 무너진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진한 대에 이르러 점차 그 차이를 잃고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341쪽

상나라와 주나라 시조설화는 비슷한 시기에 생겼다. 주인들은 상인들을 극복했기 때문에 상인들보다 우월한 조상을 원했다. 그래서 주나라 시조의 어머니(제곡의 첫째 부인)는 상나라 시조의 어머니(제곡의 둘째 부인)보다 순위가 앞서고, 성을 받은 사람도 순임금보다 한 대 위인 요임금이다. 진나라 시조 설화는 상나라와 주나라 시조설화보다 늦게 만들어졌다. 진인들도 주인들보다 우월한 조상을 만들기 위해 제곡보다 순위가 앞서는 전욱을 끌어들였다.

-342쪽

유비의 삼고초려, 제갈량에게 "유선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재능이 없으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라"는 유언도 모두 정사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관우가 조조의 막하에 기식할 때 장요가 넌지시 투항을 권유했을 때, "나는 유장군께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했으니 남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것도 기록에 있고, 손권에게 포위당해서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투항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제갈량과 유비는 좋은 친구였고, 관우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리란 의리는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삼국지』와 『자치통감』은 모두 관우가 죽자 유비는 오직 ‘관우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오나라를 정벌했다고 적었다. 이런 무모한 결정은 정상적인 군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조조가 단지 형제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일으킨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나.
-36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칼로리 음식 당긴다면 OO 부족 의심!  

제 1371 호/2011-06-20

햄버거, 초콜릿, 케이크 등 고칼로리 음식이 특히 당기는 날이 있다. 이런 날은 간밤에 수면시간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의심해보자.

졸리고 피곤할수록 칼로리가 높은 음식이 더 생각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하버드대 윌리엄 킬고어 교수는 19~45세의 건강한 성인 12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이들에게는 기억력 테스트를 한다고 공지하고 3, 4초마다 음식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들은 치즈케이크, 감자튀김, 치즈버거와 같은 고칼로리 정크푸드와 샐러드, 과일 등 저칼로리 건강식으로 구성됐다.

사진을 보여준 후 어떤 사진을 더 많이 기억하는지 조사한 결과 수면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정크 푸드를 기억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수면전문가협회는 “졸리고 피곤할수록 절제를 담당하는 뇌 영역의 활동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칼로리 음식에 대한 절제 능력도 떨어져 칼로리 과잉 섭취로 인한 비만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현상은 평소보다 한 두 시간 더 자는 것으로 예방할 수 있다. 이 연구결과는 미국 수면전문가협회(APSS)가 2011년 6월 13일 발표했다. 
 

잠잘 때 화장실 가고 싶지 않은 이유  

제 1370 호/2011-06-20

우리는 깨어있는 동안 수분을 섭취하고 이를 배출하기 위해 화장실을 찾는다. 소변으로 수분을 배출하면 또 갈증을 일으켜 체내의 수분을 일정량 유지한다. 그런데 깨어있을 때는 3~4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을 찾지만 잠잘 때는 화장실을 거의 찾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소변이 마려운 것을 못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아예 소변이 마렵지 않은 것일까. 이는 우리 몸의 생체리듬과 관계가 있다. 우리 몸은 체내 수분을 유지하기 위해 땀이나 소변 등으로 수분이 배출된 만큼 수분을 보충하도록 갈증을 유발한다. 그런데 잠을 잘 때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 몸은 체내 수분을 유지하기 위해 수분의 배출을 최소화한다. 따라서 인체가 스스로 소변이 마렵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캐나다 맥길대학병원 신경생리학연구소의 에릭 트루델 박사 연구팀은 24시간 생체리듬에 따라 인체 내 호르몬이 수분 손실을 통제한다고 2010년 발표한 바 있다. 연구팀은 뇌하수체 후엽에서 분비되는 바소프레신이 수면 중 체내 수분량을 감지해 몸에서 수분을 저장하도록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바소프레신은 항이뇨호르몬으로 불린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1-06-21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리고 피곤할수록 절제를 담당하는 뇌 영역의 활동이 줄어들기 때문'
--> 와, 이거 중요한 말인데요!

마노아 2011-06-22 01:13   좋아요 0 | URL
다이어트의 계명에도 적절한 수면 시간이 있던데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ㅎㅎㅎ

꿈꾸는섬 2011-06-21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저 오늘 무지 피곤했는데 달달한게 먹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사탕하나 물고 댄스스포츠 다녀왔어요.ㅎㅎ

마노아 2011-06-22 01:13   좋아요 0 | URL
피곤할 때는 절로 달달한 것을 찾게 되지요. 댄스스포츠 잘 다녀오셨어요. 재밌어 보여요.^^

자하(紫霞) 2011-06-22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본능에 충실한지 밤 새면 음식을 엄청나게 먹더라고요.
저녁에 일찍 자는 것이 다이어트의 지름길이어요~^^

마노아 2011-06-23 00:31   좋아요 0 | URL
밤을 새면 꼭 라면이 땡기잖아요.
늦게 잘수록 더 많이 먹게 되는 것 같아요.
미인이 괜히 잠꾸러기가 아닌가봐요.^^

다락방 2011-06-22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갈비 먹고 싶어요, 마노아님. ㅜㅜ

마노아 2011-06-23 00:32   좋아요 0 | URL
아아, 우리 갈비 먹읍시다. 곧 먹어요!
 


제 1373 호/2011-06-20


비단벌레 날개를 보호하라! 문화재 보존과학
1973년 경주 황남대총 남분 무덤 발굴 조사가 한창인 어느 날, 고고학자는 금동의 맞새김판 아래에 영롱한 빛을 드러내는 하나의 유물에 매료돼 그 손길을 멈추고 말았다. 이 유물은 신라왕의 부장품인 말안장 가리개로 1,600년 만에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영롱한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비단벌레의 날개였다.

비단벌레 날개는 신라시대 왕릉급 무덤인 황남대총, 금관총과 같은 큰 무덤에서 출토된 말안장 가리개, 발걸이, 허리띠꾸미개 등의 유물에서도 발견됐다. 이러한 유물들은 신라시대 최상위의 계층만이 사용한 장식품이다. 왕실은 왜 이토록 비단벌레를 사랑했을까? 그 이유는 황금빛의 금동판과 비단벌레 특유의 색이 화려하게 서로 어울리는 최상의 공예품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단벌레는 왕실의 곤충으로 불렸다.



[그림 1]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말안장 가리개(좌)와 발걸이(우). 사진 제공 : 국립경주박물관
비단벌레는 딱정벌레목 비단벌레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우리나라에는 해남, 완도 등 남부 해안에서 일부 서식하고 있다. 개체수가 적어 멸종위기 곤충으로 분류되며 역사적, 문화재적으로도 가치가 높아 문화재청에서 2008년에 천연기념물 제496호로 지정했다.



[그림 2] 비단벌레 박제품. 사진 제공 : 국립경주박물관비단벌레 날개는 초록빛으로 화려한 광택이 난다. 어떻게 이런 빛깔이 가능한 것일까? 비단벌레 날개의 성분은 키틴(chitin)과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다. 키틴은 아미노당으로 이루어진 다당류로 딱정벌레, 새우, 게 등 절지동물의 딱딱한 피부나 껍데기의 골격을 만드는 성분이다.

비단벌레 날개는 15~30개 사슬의 키틴 구조체를 중심축으로 6개의 단백질분자가 나선 공유결합을 형성해 박막을 이루고 있다. 이 박막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유지하면서 층층이 쌓여있는 적층구조를 형성한다. 이와 같이 키틴과 단백질이 이루는 키틴나선 적층 구조가 비단벌레 날개 특유의 탄력과 강인함을 갖게 한다.

비단벌레 표피층에는 구리, 철, 마그네슘 등의 금속성분이 포함돼 있다. 이 성분들은 적층구조와 잘 어울려 빛을 받으면 반사각도에 따라 다양한 빛깔을 낸다. 대총에서 출토된 비단벌레 날개의 색깔은 녹색의 금속성 광택을 띠며 중간 부분에 붉은색 줄무늬가 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빛이 없고 습도가 높은 무덤 안에서 금속은 산화되고 유기물은 미생물에 의한 분해로 열화가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그러나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와 발걸이, 말띠꾸미개는 색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림 3]키틴의 분자구조와 키틴-단백질 결합구조 개념도
벌레 날개는 표면층의 금속이온이 산소와 만나고 빛에 오랫동안 노출되거나 건조한 상태가 되면 검게 변한다. 때문에 발굴 후 바로 고순도의 글리세린(glycerin) 용액에 넣어 빛을 차단시키고 항온항습(온도 섭씨 10도 이하, 습도 50%) 보관장에 보관, 관리 있다. 글리세린은 공기를 차단하고 비단벌레 표면에 밀착해 보습을 유지시켜 주어 건조함이나 미생물에 의한 분해를 막아준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2010년 12월 ‘황남대총-신라왕, 왕비와 함께 잠들다’ 특별전을 개최할 때는 까다로운 비단벌레의 보존 특성 상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유물 보호를 위해 36년 만에 처음으로 글리세린 용액에 담겨 있는 상태 그대로 선보였으며 강한 빛을 피하기 위해 조도를 80럭스 이하로 낮추고 단 3일 동안만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80럭스 이하의 조도는 국제박물관협회에서 정한 국제 규격으로, 전시 품목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참고로 일반적인 실내조명은 500~700럭스 정도다.



[그림 4]비단벌레 장식 말안장 가리개 전시 모습. 사진 제공 : 국립경주박물관
황남대총 비단벌레 날개 장식은 현재까지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문화재다. 지난 특별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 후 다시 보관장으로 옮겨졌다. 대신 국립경주박물관은 복원품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은 화학약품처리법과 진공동결건조처리방법 등 다양한 처리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화학약품처리법은 폴리에틸렌글리콜 등 보존처리에 많이 사용하는 화학약품을 유물에 침투시켜 보존처리하는 방법이다. 진공동결건조처리방법은 고체에서 기체가 되는 승화원리를 이용해 진공상태에서 유물을 섭씨 영하 40도로 냉동하고 건조시켜 유물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보존방법도 비단벌레 날개를 완벽하게 보호하지는 못 한다. 비단벌레 날개의 변색 원인은 복합적이라 아직까지 확실한 보존기술이 개발되지 않았다. 필자를 비롯한 국립경주박물관 보존과학팀은 정확한 변색 원인을 밝히고 확실한 보존법을 개발하기 위해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품을 다시 선보이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그림 5]왼쪽부터 순서대로 비단벌레 장식 말안장 가리개, 발걸이, 말띠 꾸미개 복원품. 사진 제공 : 국립경주박물관

글 : 신용비 국립경주박물관 보존과학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녀고양이 2011-06-2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봄에 일산 호수공원의 꽃 축제에서
비단 벌레로 만든 첨성대가 전시되었는데, 색깔이 너무 고왔어요.
그렇군요. 신라 시대에는 비단 벌레 날개로 많이 만들었군요.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나 했는데.

아, 경주 놀러가고 싶어요. 하기사 머 경주 뿐이겠어요. 엉덩이만 들썩이고 할 일은 계속 생기고. ^^

마노아 2011-06-23 00:31   좋아요 0 | URL
작년에 국립중앙 박물관에서 황남대총 재현해 놓았을 때 비단벌레로 말안장 만들어 놓은 것을 보았어요. 우리나라에 개체수가 부족해서 일본에서 공수해 왔더라구요.
경주, 정말 좋은 곳이죠.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에요.^^
 
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브리엘라. 너는 누구보다도 나무를 잘 타는 소녀였어. 나무에 오르면 하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었더랬지. 네가 열 살이 되었을 땐 어떤 나무라도 못 올라갈 곳이 없었어. 가지가 몇 개 없는 나무라도 문제 없었지. 네가 열 네살이 되었을 때 너의 마을 사람들은 너를 가리켜 '라 알리 레 하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너희 키체 어(과테말라의 중서 고지대에 사는 마야 인, 키체족이 사용하는 언어)로 '나무소녀(Tree Girl)'라는 뜻이었지. 네게 꼭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었단다.

너는 곧 다가올 킨세아녜라에 입을 특별한 위필(마야 전통 의상인 여성용 블라우스)을 짜고 있었어. 네가 열다섯 살이 되는 성인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너는 참 똑똑한 아이였지.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형제 중 혼자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호르헤 오빠는 몹시 속상해 했지만 동생 앞에서는 의연하게 굴 줄 아는 멋진 사나이였지.

너의 생일날 치러진 성인식은 네게 축복된 날이어야 마땅했단다. 하지만 그날의 축제는 군인들의 출연으로 완전히 망쳐지고 말았어. 군인들은 너를 모욕했고, 거기에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호르헤 오빠를 잡아가고 말았던 거야. 식구들 중에서 가장 게으르던 열세 살 레스테르마저도 분노에 떨며 반군에 들어가겠다고 말을 했지. 반군은 너희 인디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으니까.

오빠가 잡혀간 뒤에도 가브리엘라 너는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어. 너는 두 달 전부터 마누엘 선생님의 조교가 되어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이 막중했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오빠를 찾지는 못했어. 마을에는 전쟁이 일어날 거란 소문이 파다했고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 갔어. 12월이 되자 군인들이 나타나서 마을에서 떠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지. 이 땅이 너희 땅이라는 권리증을 제시하라면서 말이야. 너의 아버지는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왔다가 가는 방문객일 뿐이라고 설명했지만 처음부터 인디오들을 몰아내려고 작정을 한 군인들이 그 지혜로운 말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어. 30일의 유예 기간을 주었고, 너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똘똘 뭉쳐서 그 땅을 떠나지 않기로 결의를 했지. 군인들은 반군이 나타났을 때 알려주는 조건으로 그곳에 남으라고 했어. 군인들은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강제로 입대시키곤 했고 파다한 소문과 불신이 마을을 더 흉흉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그 와중에 네 어머니는 병에 걸려 돌아가시고 말았지.

엄마가 돌아가시고 1년이 채 되지도 않은 때에 전쟁 소식이 들려왔어. 너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관심도 없어 하는데 군인들은 반군들이 공산주의자라며, 반군을 돕는 사람도 공산주의자라며 너희를 자꾸 몰아붙이고 있었어. 마침내 군인들은 야외 수업 중이던 마누엘 선생님을 어린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때려죽이기까지 했지. 너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도망쳤지만 여섯 명의 아이들은 군인들의 총에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했어. 마지막까지 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네가 그 중 가장 큰 여자 아이였기 때문일 거야. 너를 살려두려던 게 아니라 다른 볼 일이 더 있었던 거였겠지. 네가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네가 나무 소녀인 까닭이었어. 숲으로 도망친 네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숨은 것을 군인들은 발견하지 못했던 거야.

너는 살아남았지만 긴장과 초조로 범벅된 시간을 살아야 했어. 아빠를 제외하곤 집에서 네가 가장 큰 어른이 되고 말았으니까. 너는 하루 종일 동생들을 돌봐야 했어. 막내 알리시아는 너를 엄마라 부르며 따랐지만 너는 그것을 굳이 수정해주지 않았어. 모든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너는 아빠가 거두어들인 옥수수와 커피를 읍내 장에 가져가서 팔곤 했어. 동이 트기 두 시간 전에 일어나 세 시간 동안이나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던 시장에서 커피를 판돈으로 생필품을 사왔지. 고되었어도 커피를 판 날은 견딜 만 했어. 커피를 팔지 못하고 다시 들고 돌아오는 길은 짐이 더 무거워서 발걸음도 천근만근이었기 때문이야.

날이 갈수록 마을 전체가 불에 타고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소문이 번졌지만 정부군과 반군은 서로 상대 짓이라고 발뺌을 하고 있었어. 하지만 너는 그렇게 잔인한 이들은 군인일 거라고 믿고 있었지. 너의 두 눈으로 그들의 잔인함을 똑똑히 목격했으니까 말이야.

그날은 토요일이었어. 너는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너희 마을이 불타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지. 너는 열심히 뛰었어. 곳곳에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어. 네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너를 맞이했지. 네 가족들도 무사하지 못했어. 아빠와 어린 동생들도 모두 총에 맞고 말았어. 너는 공포와 충격으로 넋이 나갔지만 피범벅이 된 손으로 얕은 무덤을 팠지. 사랑하는 가족들을 엄마의 재를 묻은 신성한 땅에 묻어야 했기 때문이야. 폐허 속에서 네가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엄마의 유품인 빗 하나였어. 소중한 빗을 품안에 갈무리한 채 너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어. 또 다른 보병 정찰대가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으니 말이야. 너는 멕시코 국경을 향해 걷기로 결심했어. 기억 말고는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네가 장에 지고 간 어떤 짐보다도 더 무겁게 네 마음을 짓눌렀지. 너의 등 뒤에는 죽음의 재가 깔려 있었고, 네 앞길에는 부연 구름이 뒤덮여 있었어. 그토록 위험한 나라에 집도 미래도 없이 홀로 남은 어린 여자 아이, 그게 너를 설명하는 가장 객관적인 단어였던 거야.

하늘도 무심하지 않으셨는지 숲에서 너의 동생 알리시아와 안토니오를 만날 수 있었어. 하지만 안토니오는 이미 깊은 총상을 입은 터였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어. 이제 네 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은 충격으로 말을 잃은 어린 알리시아 뿐이었던 거야. 온통 망가진 발을 억지로 끌며 북으로, 북으로 향하기만 했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리고 그 여정에서 해산의 순간을 맞닥뜨린 산모를 만나고 말았지. 한 번도 아이 낳는 것을 본 적도 없는 네가 갓 태어난 아이의 탯줄을 끊고 아이를 거두고 말았지. 군인들이 오고 있었고 너는 산모를 남겨둔 채 서둘러 그 자리를 뜨고 말았어. 신의 가호가 있기를 원했지만, 아마도 그 산모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거야. 네가 아는 온 세상이 전쟁으로 물들어, 네 곁의 소중한 이들 대부분이 떠나간 그 시점에서도 새로운 생명은 그렇게 여지없이 태어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

침착하고 현명한 가브리엘라. 너는 아기에게 먹일 염소젖을 구하기 위해 장으로 달려갔어. 네가 알고 있는 에스파냐 어도 통하지 않고, 너의 부족어 키체 어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너는 간절한 몸짓과 눈빛으로 염소젖을 구해내고 말았어. 브라보 가브리엘라! 하지만 그 안도의 순간에 가장 극적인 비극이 닥치고 말았던 거야. 군인들이 장터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거든. 너는 본능처럼 나무 위로 올라갔고 그 위에서 꼬박 이틀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강간을 당하고 학살을 당하는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어. 그게 네 영혼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를 입히고 말았지. 너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너를 죄책감으로 덮고 말았지. 그때 너는 결심했던 거야. 두 번 다시 나무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네게 구원이 되어주던 나무가 너를 다시 죄책감에 싸이게 만드는 대상이 되어버리다니, 참으로 서럽고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어.

네가 표정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때였어. 알리시아가 아가를 데리고 기다리고 있던 장소에 가보았지만 알리시아는 거기에 없었지. 그 아이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서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너는 더 이상 받을 상처도 없을 만큼 충분히 망가져 있었어. 갈증과 굶주림, 그리고 피곤에 절어서 국경을 향해 걷던 너는 철저히 무심해지고 말았지.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을 때에도 너는 외면했어. 네가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벚나무의 버찌를 따달라는 노인들의 요구도 거절했고, 네가 저장해둔 음식을 향해 구걸의 손을 내밀기라도 하면 매섭게 거절하는 법도 익히고 말았지. 네가 나빴던 것은 아니야. 전쟁은 사람의 영혼을 그토록 메마르게 하고 몸과 마음을 모두 파괴해 버리는 힘을 지녔으니까. 그럼에도 지켜보면서 참 아팠단다. 가엾은 가브리엘라...

겨우 국경을 넘어 난민 수용소에 도착한 뒤에도 희망은 여전히 멀기만 했어. 햇볕 한줌과 한 모금의 비를 피할 한 뼘의 공간도 없었고, 물 한 방울 빵 한조각도 구하기 힘들었던 그곳 난민 수용소는 지옥을 방불케 했거든. 구호품을 실은 트럭이 나타나면 몸싸움도 불사해야 했어. 네가 밀친 노인 두 명과 어린 남자 아이를 보는 순간 너는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몰라 했지. 너의 부모님이 너의 그 모습을 보기라도 했다면 몹시 슬퍼하셨을 테니까. 결국 너는 너보다 더 방수막을 필요로 하는 할머니 두 분께 천막을 양보했고, 그 분들은 너와 함께 지내기를 원하셨지. 그렇게 세 사람이 한 공간에서 지내게 되었던 거야. 너는 기억이 너를 자극하지 않도록, 미래에 대한 불안이 너를 잠식하지 않도록 오로지 식량을 구하는 일에만 전념했어. 그 와중에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너는 극적으로 알리시아를 만날 수가 있었지. 네가 떠나갔던 그 장터 근처 숲에서 마리아 아줌마께 구조된 알리시아와 아기 모두 만날 수 있었던 거야. 함께 지내던 카르멘 할머니는 갑자기 군식구가 셋이나 늘어나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리셨지. 네가 이해해줬으면 해. 살아남는 일이 보통 힘겨운 일이 아님을 서로가 온 몸으로 알고 지냈던 때잖아.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생존을 향한 본능이 사람을 그렇게 팍팍하게 만들어버렸던 거지. 너도 경험했던 일이니 분명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네가 조금 더 기운을 차린 것은 참 다행이었어. 네게 남은 하나의 가족, 그리고 네가 밀라그로(기적이라는 뜻의 에스파냐 어)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기까지 보살피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했으니까.

네가 그곳 난민 수용소의 아이들을 위해서 공놀이를 제안한 것은 정말 멋진 생각이었어. 아이들이 다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선 놀 줄 알아야 한다는 네 말은 절대적으로 진리야. 요즘 대한민국의 초등학생들은 너무 바빠서 통 놀 시간이 없거든. 게다가 놀 때도 혼자서 게임을 하지 친구들과 더불어 노는 것을 잘 몰라서 여러모로 걱정이 된단다. 너는 구호 요원에게 공 구하는 것을 좀 더 신경 써달라고 재촉하기도 했지. 아이들은 오늘 행복해져야 한다고, 내일이면 늦는다고 말한 너의 애원은 내 마음까지도 뭉클하게 했단다. 바로 그 말이 정답이야. 내일이 아닌 오늘, 바로 지금 행복해져야 마땅해. 우리 모두 말이야.

너의 공놀이는 아이들과 어른을 대상으로 한 학교로까지 번져 갔어. 너와 뜻을 같이 한 마리오 아저씨는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갖는 환상을 깨고 똑바로 현실을 볼 것을 요구하신 분이기도 했지. 정부군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그들을 훈련시킨 게 바로 미국 정부였거든. 칠판도 책상도 없는 교실에서 무얼 배운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때 수용소의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버리는 것보다 더 무섭고 힘든 일은 없었거든.

마리오 아저씨의 아버지와 형은 라티노 농장에서 면화 따는 일을 했었는데 농장주가 한마디 경고도 없이 비행기로 밭에 농약을 뿌리고 말았대. 농약을 온통 뒤집어 쓴 형님은 고통에 시달리다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지. 마리오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셨어. 농장주가 자기 개들한테라면 그렇게 농약을 뿌렸겠냐고... 나는 문득 남의 나라 산하에 고엽제를 잔뜩 뿌리고 또 묻은 미군의 행태를 떠올렸지. 그렇게 자기만 소중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은 먼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 흥분해서 미안. 너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지.

가브리엘라. 너는 용감한 아이였지만 아직은 보호가 필요한 어린 소녀였어. 마리오가 반군에 지원하겠다며 떠났을 때 너도 알리시아의 손을 잡고 그곳 수용소를 벗어나려고 했어. 너에게서 힘을 얻고 희망을 찾아가던 사람들 따위는 모두 버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았겠지. 하지만 난 네가 가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어.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아이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네가 너 자신과 화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진심으로 고마웠어. 그리하여서 네가 다시 나무 소녀가 될 수 있게 된 것도 축복이라고 생각해. 네가 살아남은 것이 비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라도 깨달아 주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이제 너에게는 새로운 가족들이 생겼어. 지금 네가 희망을 심고 물을 주며 열심히 키워내고 있는 그 나무가 있는 곳이 바로 너의 집이란다. 거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기억나니? 나무에 오르는 것은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무 소녀 가브리엘라,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올라가던 용감한 소녀. 네가 태어난 아름다운 마을엔 오래도록 전쟁이 이어졌고 그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어. 너도 많은 상처를 입고 말았지. 너의 전쟁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어. 네가 살아가는 동안에 맞닥뜨릴 전쟁은 앞으로도 많이 있을 거야. 너는 여자이기 때문에 마주치는 부당함과도 싸워야 하고, 네가 인디오이기 때문에 당하는 멸시와도 싸워서 이겨야 해. 강하다는 것이 옳은 게 아님에도, 강하기 때문에 제 행동을 모두 정당화시키는 거대한 세상에 너는 작고도 작은 존재. 그렇지만 너와 같은 사람들의 작은 용기가 모여서 이 세상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 작은 불씨의 하나인 너를 끝까지 응원할게.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말이야.

그러니까 나무 소녀 가브리엘라. 우리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지 말자. 더 열심히 사모하고 더 열심히 꿈을 꾸자. 네가 꿈을 이루면, 너의 꿈은 곧 다른 사람의 꿈이 되고 말 거야. 그 꿈, 우리 함께 이뤄 나가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춘추전국 이야기 2 - 영웅의 탄생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2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춘추전국이야기 1편에서는 춘추의 질서를 설계한 최초의 경제학자 관중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관중을 등용한 제 환공이 어떻게 춘추의 첫번째 패자가 되었는지를 몹시 드라마틱하게 서술했다. 2편의 주인공은 두번째 패자 진 문공이다. 진 문공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앞서의 이야기가 성인과 영웅의 과도기적 인물이었다면, 이번 편에서는 본격적으로 '영웅'의 이야기가 등장한다고 서두에서 밝힌다. 그가 제시하는 성인과 영웅의 구분이 흥미롭다.

영웅이 어떻게 권력을 버릴 수 있는가? 독수리가 어떻게 먹이를 측은하게 여길 수 있는가? 권력은 바로 힘이다. 영웅은 힘을 가진 사람이다. 영웅은 권력을 버릴 수 없지만, 성인은 버릴 수 있다. 또 영웅이 어떻게 뭇 사람들의 칭송을 거부할 수 있는가? 영웅은 힘을 뿜어내고 뭇 사람들의 시선을 즐긴다. 그러나 성인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는다. – 11쪽

성인의 개성은 독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의 개성은 남성보다는 여성에 가깝다. 성인은 커다란 어머니다. 성인은 오직 부계사회가 고착화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은 모계사회의 잔영이 남아 있는 곳에서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웅은 다르다. 권력을 어떻게 남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영웅은 다만 사람을 모으고 적절히 쓸 뿐이다. 수컷들이 역사를 차지한 이후 ‘성인’들은 사라졌다. (...) 관중과 환공은 영웅과 성인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 12쪽

확실히 관중과 제 환공의 이야기는 무림 고수들이 내공을 다투는 이미지였다면, 영웅의 시대로 내려온 진 문공의 이야기는 좀 더 피튀기는 현실적인 느낌이 난다. 저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들의 나라가 위치해 있는 지정학적 위치로 설명하고 있다. 평원에 자리한 제나라와 초나라가 풍요롭고 화려하다면, 골짜기에 위치해 생산성이 떨어지고 강한 나라를 곁에 둔 진나라는 근검절약을 일단 피부로 재현해야 했다.  

문공의 처절하면서도 굴곡진 인생은 관중 사후 춘추시대 중원의 확고부동한 패자로 부상하는 진(晉)나라의 운명과도 비슷하다. 진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서로는 태생이 무사인 진(秦)나라 사람들을 맞아야 하고, 북으로는 이름 자체에 ‘싸움을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융(戎)과 적(狄)을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시작부터 이들과의 난타전을 통해 성장했고, 때로는 비굴함도 감수할 만큼 정치적이었다. 이렇게 주변의 강인한 족속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한 진은 강골이었다. 그들에게 관중의 인(仁)한 정치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껍데기를 버리고 서서히 군국주의적인 본색을 드러냈다. 관중은 적이 비도덕적일 때 쳤지만 이들은 적이 약해지면 쳤다. – 15쪽 

 

(동방의 제나라와 남방의 초나라, 그리고 북방의 晉나라와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서방의 秦나라 위치를 확인해 보자. 평원과 골짜기의 차이가 선명하다. 가운데 푸른 원은 이름뿐인 천자의 나라 주다.)

망명생활을 무려 19년이나 보내고서 환국한 진 문공의 치세 기간은 9년이었다. 군주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예순이 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사후는 제 환공이 떠난 뒤의 제나라보다 훨씬 더 튼튼했다. 보다 현실적인 체제를 만들어냈고, 든든한 인재로 둘러싸였던 진나라의 저력이었던 것이다.

진 문공은 아버지 진 헌공은 큰 아들 태자 신생을 제거하고 애첩의 아들을 후사로 삼는다. 그 바람에 문공(중이 공자)과 동생 이오는 각자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동생이 군주가 된 뒤에도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문공은 19년 뒤에서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 헌공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저자는 창업군주가 장성한 아들을 시샘하는 경우를 설명해 주었는데 무척 설득력 있게 들렸다. 진 헌공뿐 아니라 당 태종, 그리고 청나라의 강희제도 그에 해당하는 사례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로 넘어온다면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좀 다른, 그러나 무척 비슷한 전개다.

관중과 제 환공 시대의 싸움은 무척 우아했었다. 그들은 군사를 일으켜도 피비린내 나게 싸우지 않았다. 주나라의 종법질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싸움을 정리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진의 문공은 바로 육탄전으로 돌입했다. 전국시대의 살상전에 점점 더 가까워져 가는 것이다. 이 싸움을 재현해 내면서 인류사에서 바퀴가 차지한 역할과 전차 무기의 구체적인 사용법을 설명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중장보병들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웠다. 처절한 이 싸움들이 춘추 말기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낳았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중국은 전쟁사의 보고다. 전쟁의 강렬한 유혹과 그 참혹한 결과를 목도한 많은 철학자들은 전쟁이라는 무서운 괴물을 통제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마련해왔다. 춘추 말기의 위대한 사상들은 모두 전쟁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것이다. 적극적으로 전쟁을 없애기 위한 이론도 있었고, 침략전만 배제하자는 이론도 있었으며,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극복하자는 이론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론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쟁의 목적, 수단, 정의 등 모든 방면에서 서양의 어떤 이론도 중국의 이론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 249쪽


개인적인 호감으로는 관중의 매력을 문공이 따라잡지 못했다. 그렇지만 문공의 카리스마와 정치적 탁월함이 보이는 이 일화는 그의 패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중이(훗날의 진 문공) 일행은 한수를 건너 초나라로 향했다. 당시 초나라 군주는 제나라 환공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성왕이었다. 환공이 죽었으니 초나라는 바야흐로 더욱 성할 태세였다. 초 성왕은 중이를 아예 제후를 대하는 예로 환대했다.

"만약 공자께서 무사히 귀국하신다면 무엇으로 과인에게 보답하려하오?"

중이가 예를 올리며 짐짓 의뭉스럽게 대답한다.


"아름다운 여인과 옥, 비단은 이미 군주께서 갖추신 것이고, 깃털, 상아, 가죽은 모두 군주의 땅에서 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晉나라에까지 나돈다면 그야 군주의 나라에서 쓰고 남은 것들일 따름일진대, 제거 어떻게 보답하면 되겠습니까? 제가 군주의 은혜를 입어 진나라로 돌아간 뒤, 훗날 진나라와 초나라가 중원에서 만난다면 저는 군주의 군대를 피해서 30리씩 세번 총 90리를 물러나겠습니다. 그래도 군주께서 기어이 치고자 하시면 저는 활과 채찍을 들고 군주와 겨루겠습니다." -167쪽

쫓겨다니는 망명객 신세로서 승승장구하는 초나라 군주 앞에서도 기죽지 않은 중이 공자다. 성왕이 바란 대답은 '함께 제나라를 치겠습니다'나 '정나라 이남의 일은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등이었을 것인데 이때 이미 중이는 훗날 진나라가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그리고 즉위 후 4년 뒤, 중원에서 초나라와 마주친 진 문공은 장담한 대로 90리를 후퇴해주고 성복에서 초나라를 제압한 뒤 춘추의 패자가 된다. 가히 영웅의 면모를 과시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또 우리가 흔히 쓰는 융과 강, 호의 구분이 몹시 모호하고 섞여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역사 책에서조차 섞여 사용되는 용어들이니 어지러운 것이 당연하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흉노라고 부르는 이들이 곧 융은 아닌 것이다.

융과 호(흉노)는 다르다. 호는 완전한 유목민이며 기본적으로 기마궁수들이었다. 중국 북방의 여러 민족들(융적)이 역학관계에 따라 호에 속하게 되거나 화하에 속하게 되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기원전 4세기 오르도스와 산서성 북부에 출현한 흉노라는 집단은 문화적으로는 기존의 융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기존의 융족들은 이들의 문화를 매우 빠르게 배워갔다. (...) 여러 융적들은 화하나 흉노의 문화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니 흉노는 하나의 집합적인 정치체제였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진 목공이 평정한 융은 아직 흉노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 308쪽


1편에서도 주인공 관중이 등장하기까지는 무려 160쪽을 기다려야 했다. 2권에서도 진 문공이 등장하기까지 150여 쪽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 기다림 속에는 이들이 패자가 되기까지의 과정, 혹은 될 수밖에 없던 숙명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설명해주는 데에 무척 공을 들였다. 그래서 이 방대한 땅의 방대한 양의 역사가 손에 잡히듯 무척 자세하게 그려진다. 앞장의 마무리에서 뒷장의 주제를 질문하고 그것을 받아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서술 양식은 몰입도를 높여주고 극적 긴장감까지 선사했다.

1편 마무리에서는 저자가 직접 올랐던 오악 중 세 개의 산 등정기를 보탰고, 2편에서는 서북 지역 답사기를 보태며 그 황량한 땅에서 오히려 유구한 역사의 흔적을 읽은 감상을 이야기한다. 현재 중국의 경제 문화는 동쪽 지역에 훨씬 치우쳐 있지만, 그 화려한 번쩍거림 속에서는 오히려 역사의 숨결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는 것에 공감한다. 600년 고도의 서울에서 역사의 숨결이 잘 안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관중에 이어 영웅 문공, 그리고 3권의 주인공은 초 장왕이다. 남방의 웅략가를 맞이하기 전에 살짝 옥의 티도 얘기해 보자.

24쪽 심하계곡을 계발하고 >>'개발'이 맞지 않나 싶다.
84쪽 공공이 아들 환공이 즉위했다. >>공공의 아들
136쪽 여생이 하는 말을 이렇다. >>>말은 이렇다.
164쪽 일종을 보험을 들어두라는>> 일종의 보험
325쪽 패자와 왕자을 섞어서 쓴다. >>왕자를

앞쪽에는 인쇄 상태가 안 좋아서 글자가 퍼져보이는 현상이 있다. 내가 가진 책은 초판 2쇄인데 혹시 그 다음에는 수정이 됐는지 모르겠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11-06-20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락이 제멋대로 이동을 해서 몇 번을 수정했는지 모르겠다. 수정하다 지쳤어요, 땡벌!!

꼬마요정 2011-06-2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역사 중 아버지가 아들을 시샘한 가장 적나라한 예는 아마 고구려의 유리왕과 그 아들 해명태자일거에요. 뛰어난 아들에 대한 질투심으로 결국 유리왕은 해명에게 자결을 요구하잖아요. 덕분에 대무신왕 역시 아들들을 견제하게 돼서 호동과 낙랑이라는 비극적인 이야기도 나오게 되구요..

리뷰 재밌게 봤어요. 아무래도 이 시기의 이야기는 언제봐도 흥미진진해요... 그쵸??^^

마노아 2011-06-20 20:58   좋아요 0 | URL
유리왕과 해명태자! 아주 적절한 예를 말씀해 주셨어요.
댓글 보니까 뮤지컬 바람의 나라가 떠올라서 검색을 해 보았는데 올해는 하지 않나봐요. 공연 일정이 잡혀 있지가 않네요. 이 뮤지컬에서 2006년 버전에서는 대무신왕보다 해명태자가 더 주인공 같았거든요.
까마득한 옛 일이건만 이렇게 손에 잡히게 그려주는 연구자들이 참 고마워요. 그분들의 노고가 우리의 즐거움이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