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수의 탄생 일공일삼 91
유은실 지음, 서현 그림 / 비룡소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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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 할 때 '일', 수재할 때 '수', 그리하여 백.일.수.라는 특별한 이름을 가진 일수. 무려 7월 7일에 태어나서 더더더 행운이 겹칠 것만 같았던 일수는, 그러나 엄마의 바람과 달리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성적도 딱 중간이었고, 특별한 장기나 재주가 보이질 않았다. 


"일수야, 학교에 가서는 그러면 안 돼. 선생님이 뭘 물으면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네 생각을 정확하게! 그냥 '몰라요' 하면 바본 줄 알아."
어머니가 신신당부했어요. 일수는 어머니 말씀을 깊이 새겼어요. 선생님이 뭘 물으면 정확한 생각을 담아,
"모르는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어요. 아는지 모르는지 정확하게 모르는데, 정확하게 모른다고 대답하면 안 되니까요. 일수는 정직한 아이였어요.- 26쪽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했는데,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엄마는 아이가 지나치게 정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이 들었다. 그 결과 아이는 모든 걸 '~같아요.'라고 말해 버렸고,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어하는지 도무지 모르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말은 주술적 힘을 갖고 있어서 늘 말하곤 하는대로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고, 그리고 곧 그대로 되어버리는 순환이 이뤄진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일수가 꼭 그래보였다.


"무슨 부로 갈지 정했니?"
"못 정한 것 같아요."
"휴...... 그놈의 같아요...... 일수는 그럼 서예부로 가라. 지원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
담임선생님이 말했어요.
"네."
일수는 드디어, '같아요'를 빼고 대답할 수 있었어요. 선생님이 꼬치꼬치 묻지 않아 천만다행이었죠. 특별한 게 없는 일수는 그렇게 특별활동부에 들어갔어요. -40쪽


그렇게, 아무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가게 된 서예부에서 일수는 모처럼 생기 있게 변했다. 일수를 잘 모르는 서예부 선생님은 지나치게 날뛰고 시끄러운 아이들 틈에서 얌전하고 침착한 일수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서예와 궁합이 잘 맞아 보였을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늘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채 중간만 차지하던 일수가 모처럼 칭찬을 듣게 되었다. 일수는 서예반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비록 실력은 달마다 좋아지진 않았지만 계절이 바뀌면서는 조금씩 나아졌다. 일수가 아주아주 특별한 아이여서 언제고 돈방석에 앉혀줄 거라고 굳게 믿고 계신 엄마는 일수를 명필 학원에 보내버린다. 일수네 문방구 이름이 '새마을 문고'이고, 명필 학원 원장님이 말한마디 잘못했다가 크게 고생한 것을 보면 시대적 배경이 짐작 가능했다. 


명필은 어느 날 '태극기가 촌스럽다'고 말했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었어요. 누가 간첩이라고 신고를 한 탓이었죠.

명필 서예학원 원장을 간첩으로 신고합니다. 원장은 산신령 같은 차림으로 밤에 산에 올라갑니다. 신분을 속이려고 위장하는 것 같습니다. 쓰레기장에는 그가 쓴 '붓글씨 암호'가 버려져 있습니다. 태극기가 촌스럽다는 말로, 신성한 국기를 모독했습니다. -54쪽


그런데 저거 우리가 알던 그 시절 맞나? 요즘이라고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 같은 섬뜩한 분위기!!


일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백수가 되었다. 사회성이 많이 부족하고 기계 공포증마저 있는 아이가 공고를 졸업했으니 자격증 하나 변변한 게 없다. 이발병으로 갔지만 가위 들고서 사고를 쳤고, 취사병으로 가서는 미각이 둔해서 조리사 자격증을 따지 못했다. 엄마의 한산한 문방구에서 파리를 쫓는 게 일수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문방구 벽에 걸린 저 액자 밑에서 일수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엄마는 저 문구 그대로 '하면 된다'고 여전히 믿고 계시다. 일수가 자신을 돈방석에 앉혀줄만큼 성공할 그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유은실 작가님은 특유의 유머와 넉살을 이용해서 슬플 법한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능청스럽게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뜻밖의 반전이 시작된다. 



어른이 쓴 글자로 보이지 않는, 좀처럼 '명필' 소리 듣기 힘든 일수의 글씨체가 도리어 빛을 볼 사건이 생겼다. 


일수 씨는 그 후로도 가훈을 써서 돈을 벌었어요.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운동본부' 회장이 교육구청장이 된 덕분이었죠. 학교에선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우리 집 가훈은 내 손으로' 캠페인을 앞 다투어 벌였어요. 이 학교가 끝나면 저 학교가, 6학년이 졸업하면 새로 들어오는 1학년이 가훈을 필요로 했어요. -99쪽


학부모들은 아이가 쓴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 가훈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일수의 대단하지 않은 글자는 바로 그렇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도저히 어른이 썼다고 믿어지지 않는, 아이가 쓴 것 같은 느낌의 글씨는 학부모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일수 엄마가 정말로 돈을 넣은 방석에 앉게 되는 순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돈방석이란 게 별거 있나. 방석 안에 돈 넣었으면 돈방석이지...


말의 힘이 크다고 앞서 말했다. 일수 엄마도 그 효과를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하면 된다'라는 각오 아래 아들의 성공을 굳게 믿었던 엄마! 그 엄마의 바람대로 일수는 성공적인 가훈업자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른 집의 가훈을 '대신' 써주는 것으로 일수의 인생을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일수가 생각하는 자기집 가훈은 무엇인지, 마음에 담고 싶은 가르침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차례다. 바로 그 기회가 일수에게도 찾아왔다. 자신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본인을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 순간 말이다. 


120쪽이 조금 넘는 짧은 이야기이다. 일공일삼 눈높이에 맞게 쉽게 쓰여졌지만 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가볍지만은 않다. 유은실 작가의 전작들에 비하면 독자의 연령대를 낮추어서인지 묵직한 메시지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함께 잡고 있다. 


~했어요 라는 어투가 무척 자연스럽게 자리해서 구연동화 듣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이 말투 그대로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충동도 갖게 했다. 늘 '특별'한 것만 강요당하고 집착하는 우리들을 한번 돌아보게도 한다. 일수 씨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일, 바로 나를 찾아보는 일이 아닐까. 


그나저나 우리집 가훈도 오랜만에 떠올려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아부지가 알려주신 우리집 가훈은 '화목'이었다. 간단하지만 참으로 쉽지 않은, 그리고 엄청 소중한 두글자라는 것을, 크리스마스 아침 날 깊게 새겼다. 정말, 화목해서 마음이 부자인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렇게 살아야지. 그래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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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6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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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6 2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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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7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8 0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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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의 탄생 일공일삼 91
유은실 지음, 서현 그림 / 비룡소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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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에 젊은 부부가 살았어요.
부부가 사는 마을은 예로부터 물 맑고 인심이 좋았다는 얘기가, 구청 홍보 자료에만 있었죠. 마을 개천은 공장 폐수로 오염이 되었고, 인심은 개천 물만큼이나 더러웠어요.-9쪽

"일수야, 학교에 가서는 그러면 안 돼. 선생님이 뭘 물으면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네 생각을 정확하게! 그냥 '몰라요' 하면 바본 줄 알아."
어머니가 신신당부했어요. 일수는 어머니 말씀을 깊이 새겼어요. 선생님이 뭘 물으면 정확한 생각을 담아,
"모르는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어요. 아는지 모르는지 정확하게 모르는데, 정확하게 모른다고 대답하면 안 되니까요. 일수는 정직한 아이였어요.-26쪽

선생님은 특별활동부를 계속 불렀어요.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정말 원하는 부를 골라라. 엄마 아빠가 원하는 걸 하지 말고. 그다음 원예부."
일수는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마음은 어떻게 들여다보는 거지?'
어려웠어요. 선생님이 마음을 들여다보는 방법도 알려 주면 좋을 것 같았어요.-38쪽

"무슨 부로 갈지 정했니?"
"못 정한 것 같아요."
"휴...... 그놈의 같아요...... 일수는 그럼 서예부로 가라. 지원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
담임선생님이 말했어요.
"네."
일수는 드디어, '같아요'를 빼고 대답할 수 있었어요. 선생님이 꼬치꼬치 묻지 않아 천만다행이었죠. 특별한 게 없는 일수는 그렇게 특별활동부에 들어갔어요.-40쪽

명필은 어느 날 '태극기가 촌스럽다'고 말했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었어요. 누가 간첩이라고 신고를 한 탓이었죠.

명필 서예학원 원장을 간첩으로 신고합니다. 원장은 산신령 같은 차림으로 밤에 산에 올라갑니다. 신분을 속이려고 위장하는 것 같습니다. 쓰레기장에는 그가 쓴 '붓글씨 암호'가 버려져 있습니다. 태극기가 촌스럽다는 말로, 신성한 국기를 모독했습니다. -54쪽

명필은 동네 경찰서에 가서 다섯 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어요. '붓글씨 암호'는 중국 상형문자였고, 산에는 '정기를 받으러 올라간다.'는 게 밝혀졌어요. 명필은 '다시 한 번 국기를 모독하면 처벌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풀려났어요.
명필은 세상이 무서웠어요. 산에 갈 때는 꼭 평범한 운동복을 입었죠. 처벌 받는 게 무서워 학원에 태극기를 걸었어요. 그리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써서 태극기 옆에 붙여 놓았죠.-55쪽

일수 씨는 그 후로도 가훈을 써서 돈을 벌었어요.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운동본부' 회장이 교육구청장이 된 덕분이었죠. 학교에선 '한 가정 한 가훈 갖기', '우리 집 가훈은 내 손으로' 캠페인을 앞 다투어 벌였어요. 이 학교가 끝나면 저 학교가, 6학년이 졸업하면 새로 들어오는 1학년이 가훈을 필요로 했어요.-99쪽

보증서지 말자
믿을 건 우리 식구뿐

이런 가훈을 적어 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런 가훈을 적어가는 사람들은 대개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돌았어요.

자나깨나 불조심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

따위를 적어 달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걱정에 가득 찬 표정을 갖고 있었죠.

안전제일이라든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같은 가훈을 써 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런 글은 잠시 숙제로 제출되었다가 부모님의 공장이나 분식집 벽에 붙게 될 것이었죠.-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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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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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
-28쪽

아버지는 코앞에 대령하지 않으면 양말조차 못 찾아 신는 ‘광산 노씨 만호공파’ 남자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없는 동안 드실 끼니거리는 준비해놓아야 했다. 어쨌거나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밥상 뒤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진경이 그걸 너무 서운해하지 말았으면 했다. 열 일 젖혀두고 달려가지 않는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않기 바랐다.
-183쪽

재형은 자리에 선 채 꼼짝하지 않았다. 난데없는 충동이 등을 찔러 온 탓이었다. 마리의 목줄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마리, 네 집으로 가’라고 소리 질러 내쫓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구급차를 몰아 멀어지는 차를 쫓아가고 싶었다. 앞을 가로막고 차를 세워서 마리를 돌려주고 싶었다. 이 개는 당신의 ‘마리’야. 마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책임진다는 거야. 편의에 따라 관계를 파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야.
-210쪽

재형은 머리를 들었다. 대문간에서 터지는 총소리가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등허리 밑을 흔들던 떨림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턱 밑에서 대동맥이 고함치듯 벌컥거렸다. 분노에서 비롯된 광기가 소리로 발화돼 잇새를 뚫고 나갔다.
"쏴, 나도 쏴봐. 개새끼들아."-219쪽

스타는 그의 품 안으로 한 발짝 다가들었다. 엉덩이를 바닥에 내리고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그의 가슴으로 온기가 물결치듯 번졌다. 사람을 싫어하는 이 예민한 아가씨가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재형에게만 보여주곤 하던 애정의 몸짓이었다. 그는 스타의 어깨를 쓰다듬고 등을 두들기고 귀밑을 어루만졌다.머리를 기대 오는 스타의 심장 소리를 온몸으로 느꼈다. 구원을 받는 기분이었다. 쿠키를 잃은 슬픔으로부터, 개들을 총구 앞으로 밀어냈다는 자책과 수치심으로부터, 개들을 모두 잃어버린 충격으로부터, 홀로 된 외로움으로부터.
"스타, 살아 있었구나."-222쪽

여론은 화양 봉쇄의 당위성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접촉한 지 하루면 눈이 빨갛게 되고, 빨간 눈이 나타난 지 이삼 일 내에 사망에 이른다는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전 국민을 종교적 수준의 공포와 공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각 언론사와 방송의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90%가 대통령의 결단을 지지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군을 동원해서라도 빨간 눈의 서울 상륙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화양시민 29만의 문제가 아니라 5천만의 생명이 걸린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국민들에겐 화양과 빨간 눈이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230쪽

링고는 아주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태어나 처음 눈을 보던 날, 잿빛 하늘을 나폴나폴 날아다니는 것이 흰 나비 떼인 줄로 알았던 시절, 나비를 잡겠다고 이리저리 날뛰고 짖어댔던 강아지 시절, 두 아이와 젊은 부부가 사는 집에 팔려갔던 겨울을. 그들이 링고의 첫 주인이었다. 개의 삶이 인간의 변덕에 좌지우지된다는 걸 알려준 이들이기도 했다. 인간의 아이들 손에서 고무공처럼 구르던 강아지는 봄이 되면서 사라져버렸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링고의 몸은 아비만큼이나 커버렸다. 머리를 들면 입이 주인의 가슴에 닿았다. 각목 정도는 우습게 씹어서 부러뜨릴 만큼 이빨이 크고 날카롭게 자랐다. 주인 여자는 링고가 너무나 많이 먹고, 너무나 힘이 세고, 너무나 늑대 같아서 이젠 귀엽지 않다고 말했다. 아이들 가까이에 가기만 하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아기의 목을 핥았다가 사흘 동안 묶여 창고에 갇히기도 했다. -245쪽

링고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이전의 사랑을 되찾을 수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들이 화내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바보짓을 거듭했다. 강아지 시절에나 하던 애교를 피웠다. 몸을 비비고, 올라타고, 다리를 벌리고 나자빠졌다. 잡은 즉시 먹어치우던 토끼나 다람쥐, 새를 선물로 가져다 바쳤다. 쓰레기통에서 찾아낸 주인의 실내화를 현관 앞에 물어다두기도 했다. 사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남자가 트럭을 몰고 찾아왔다. 주인은 털과 이빨을 세우고 침입자를 처단하려는 링고에게 재갈을 물리고 목줄을 걸었다. 낯선 남자는 링고를 커다란 철장에 가두고 트럭에 실었다. 트럭이 멈춘 곳은 한적한 교외에 있는 가족 레스토랑 사설 동물원이었다.
이후 링고는 철장을 벗어나 살아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근육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무대는 챔프투견장 링 안이었다. -246쪽

"걸을 수 있겠소?"
남자의 두 번째 발길질에서 자신을 구해준 노인이었다. ‘백 기사’라 불리는 화물차 경력 40년 차 구급차 기사. "네." 하는 순간, 왈칵 흐느낌이 샜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현진에게 면회를 가고 싶었다. 그럴 수 있는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좀 전에 일어난 일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꿈 깨라고. 불과 열흘 전만 해도 저들은 선량한 시민이었다고. 너희들이 살아서 이 도시를 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266쪽

대장은 가방을 철장 문 앞으로 끌고 왔다. 링고는 스타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철장 쇠살 틈으로 주둥이를 내밀고 스타의 냄새를 맡았다. 스타의 차가운 입술을 핥았다. 코를 맞댔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콧등은 말라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잿빛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링고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고개를 돌려 간절한 심정으로 대장을 올려다봤다.
스타를 산막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예전처럼, 쉼터에서 산막으로 스타를 데려왔던 첫 밤처럼, 상처를 핥고, 코를 맞대고, 몸을 붙인 채 잠들고 싶었다. 그러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둠이 지나고 해가 뜨면, 스타가 고개를 뒤로 돌려 친밀하고 편안한 시선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대장이라면 그렇게하도록 해줄지도 몰랐다.
"링고, 안 돼."-305쪽

수술 후 링고의 몸은 빠르고 순조롭게 회복됐다. 별문제 없이 마취에서 깨어났고 하루가 다르게 상처가 아물었다. 다만 정신적인 쇼크가 문제였다. 재형은 제 짝의 죽음을 그토록 슬퍼하는 개를 본 적이 없었다. 스타의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스타의 얼굴에 코를 문지르고, 낑낑대며 입술을 핥고, 스타의 몸을 주둥이로 밀어댔다. 스타를 살려내라는 눈으로 재형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마다 재형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녀석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나도 너만큼 그걸 원한다고. 그럴 수가 없어 고통스럽다고.
-323쪽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345쪽

마야. 부르면 눈을 떴을 때, 진짜 마야의 눈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긴 다갈색 눈이 그에게 물어왔다고 했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
사흘 후, 마야는 죽음을 맞았다. 대장이 부르는 소리를 찾아 눈보라 속을 내달린 대가였다. 마야의 노구는 폐렴을 얻었고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그는 몸이 회복되기 시작하던 석 달 후에야 마야의 죽음을 알았다고 했다. 마야는 재형의 썰매에 실려 설원에 묻혔다. 재형이 알래스카를 떠난 이유였다.-346쪽

그들은 노상 천막 안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병으로 죽었다. 기존 환자는 경기장에서 링크로, 하루에도 수백 명씩 거처를 옮겨 가는 중이었다. 빨간 눈은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았다. 체육관을 통제하는 군인도 날마다 줄어들었다. 의료팀처럼, 충원 없이 차근차근 소모되고 있는 모양새였다. 보급 헬기는 이틀째 오지 않았다. 기름이 없어 난방도 끊겼다. 작동되는 건 전기와 수도뿐이었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얘기 같았다. 죽든가, 살든가.
-354쪽

그들이 떠난 후 더 충격적인 깨달음이 왔다. 자신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찾으려 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녀는 아버지와 현진이 죽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데도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알고 있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유의 일이었다.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과 직면하는 게 겁이 났다.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건강진단을 받지 않으려는 심리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모르는 게 나았다. 모르는 동안은 절망과 맞닥뜨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확인과 함께 찾아들 무서운 고통을 그녀는 몸서리나게 잘 알고 있었다. 난파당할까 봐 두려워서 차마 울 수조차 없는 고통이었다.
-355쪽

아버지. 손 씻고 식사하세요. 이제 밖에 나가시지 마시고요.

식탁 가장자리를 빙 둘러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은 내용의 쪽지들이 여섯 개나 붙어 있었다. 이 무슨 멍청한 짓일까. 손 씻고 식사하라니. 밖에 나가지 말라니. 아버지는 오지도 않았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이 무슨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 짓일까.
대상도 없는 노여움이, 진창 같은 절망이, 핏속을 줄달음쳤다.
그녀는 빈 공기에 밥을 담았다. 밥 한 술을 퍼서 흐느낌이 흐르는 입으로 허겁지겁 밀어 넣었다. -359쪽

링고는 끝내지 않을 터였다. 한기준의 숨통을 끊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터였다. 자신이 링고라 해도 지금의 링고처럼 행동할 게 분명했다. 지난 밤 박남철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 그 증거였다. 박남철을 들이받은 건 실수도, 판단 착오도 아니었다. 명백한 선택이었다. 동해를 죽이고 싶어했던 자신의 선택. 기준의 말이 옳았다. 그들 부자를 죽인 건 자신이었다. 그는 목 안의 불덩이를 꾹 눌러 삼켰다. 블로우 건을 내리고, 비닐막을 놓고, 산막에서 물러났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개한테 강요할 수는 없었다.
-395쪽

윤주는 종종 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가만있지 않는지. 안전한 자기 집을 두고 감염의 위험과 무장 군인, 추위와 허기가 기다리는 광장에 모이는 진짜 이유가 뭔지. 이 방에 홀로 남은 지금에야 그녀는 답을 알 것도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를 향해 모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줄 누군가, 시선을 맞대고 앉아 함께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뭔가를 나눠 먹을 수 있는 누군가, 시시각각 조여드는 죽음의 손을 잊게 해줄 누군가를 만나고자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윤주에게 그곳은 재형이었다. 그에게로 가고 싶었다. 그가 그리웠다. 밤은 미치도록 길었다.-404쪽

화양은 고립된 도시가 아니다. 버림받은 곳이다. 며칠 전부터, 군인들이 거리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군인들도 감염돼 쓰러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고, 정부가 화양 안의 병력을 소모시킨다는 의미기도 하다. 도시를 통제하는 군대를 버린다는 건 도시를 버리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도시를 통제하는 군대를 버린다는 건 도시를 버리겠다는 것과 같으며 이는 화양을 무정부 상태로 놓아두겠다는 얘기나 다를 바 없다. 두 번째 증거는 외곽 병력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봉쇄선은 물론이고 산골짜기까지 중화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철옹성을 쌓고 있다. 세 번째는 시민들에게 약속한 보호 장비나 생필품이 지금껏 보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황이 악화될 경우, ‘버린다’에서 ‘고사시킨다’로 갈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때에는 전기와 가스, 수도까지 끊을 것이다.
-410쪽

"노수진 씨."
수진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문턱에서 발을 떼고 안으로 들어섰다. 선혈과 정액으로 뒤범벅이 된 허벅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가슴에 이빨 자국이 수도 없이 나 있고 목에는 피멍 자국이 둥글게 맺혀 있었다. 새하얀 이불 위에는 한 움큼씩 뽑힌 머리채가 굴러다녔다. 기준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폭행 현장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세계가 파괴된 현장이었다. -417쪽

문득 기준이 떠올랐다. 해 질 무렵이면 찾아와 현진이와 아버지를 찾지 못했다고 전해주는 남자. 그녀는 그의 말을 ‘시신을 찾지 못했다’로 들었다. 하루 온종일 베란다를 서성이며 그가 오는 해 질 녘을 기다리며서도 그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찾았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 찾고 나면 그가 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에게 한기준은 세상에 남은 유일한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마지막 한 사람, 그녀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그녀가 만날 수 있는 살아 있는 한 사람.-421쪽

수만은 될 법한 인파가 광장과 광장 앞 사거리를 꽉 채우고 화양천 다리까지 늘어섰다. 인파만큼이나 많은 횃불들이 활활 타오르며 밤을 밝혔다. 사람들의 함성과 구호는 상공을 맴도는 헬기 소리마저 삼켜버렸다.
"우리는 살아 있다."
"우리는 살고 싶다."
"우리를 살게 하라."
죽은 도시의 심장에서 삶이 맥박치고 있었다. 재형의 귓가에선 생매장된 개들의 울부짖음이 메아리쳤다.
-446쪽

화양에서 일상을 앗아간 세상은 화양을 잊은 것 같았다. 죽은 자를 땅에 묻듯, 시간과 망각 속에 화양을 매장해버린 후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화양에 대한 뉴스는 점점 줄어들었다. 곧 시작될 브라질월드컵 얘기에 밀려 어느 날엔 아예 언급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날 새벽’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날 새벽, ‘700미터 구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상이 밝혀지려면 기나긴 세월이 지나야 할 터였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 일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테니까.-473쪽

(작품해설 정여울)
그는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썰매개들을 회색 늑대 무리에게 희생양으로 내주고 자신의 가난한 목숨을 지켰다. 그 엄청난 죄책감이 그의 삶을 평생 짓누른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결국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적대적 존재들조차 구원하는 상생의 무기로 되살아난다. 《28》은 대재앙의 잔혹한 리얼리티 속에 가녀린 구원의 상징을 숨겨놓은, 거대한 서사의 미로다.-482쪽

유기동물 문제는 단지 반려동물의 생존권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 맺기 자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은 자연을 보호한답시고 자연을 ‘자원’으로 대상화하고, 자연을 등산로나 휴양지로 이용한다는 명목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한다. 개발의 이면은 파괴와 살상일 수밖에 없다. 《28》은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상징적 매개로 인간과 자연의 원초적인 ‘불평등 계약’의 의미를 성찰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483쪽

인간에게 방해가 된다면 마음껏 ‘살처분’해도 되는 유기견들, 구제역 파동이 올 때마다 생매장당하는 소와 돼지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점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그것’으로 대상화시키는 잔혹한 합리성이다. 서재형은 동물을 ‘그것’이 아니라 ‘그대’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동물들이 고통받는 세상에서는 인간들도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동물과 인간의 경계지대에서 동물의 흐느낌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대들의 운명과 우리들의 운명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공감의 네트워크. 그것만이 이 무간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열쇠가 아닐까. 그것이 아니면 어떤 대단한 과학도 어떤 화려한 정치도 이 재앙의 도시 화양을 구할 수 없었다.
-488쪽

작가의 말 정유정
인간은 반려동물에게도 가축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할까. 내 대답은 ‘그렇다’였다. 육식하는 자로서, 생태계 최고 포식자로서, 저들의 삶을 지배하고 운명을 결정하는 변덕쟁이 폭군으로서 내린 결론이었다. 어떻든지 인간이 먼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저 반대편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인간을 넘어 ‘생명’을 지키고자 헌신하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희망을 놓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거기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에 대한 희망’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이기심으로 참혹하게 죽어간 동물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이야기기도 하다. -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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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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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인근 도시 화양. 불볕이란 이름을 가진 이 인구 29만의 도시에 원인모를 전염병이 발생했다. 최초 발병자는 개 번식사업을 하던 남자였는데, 병에 걸린 개에 물린 이후 눈이 빨갛게 변하고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증상을 보이다가 죽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조대원에게 전염병이 퍼지고, 응급실의 의사와 간호사가 '빨간눈'에 감염되었다. 발병 후 고열에 시달리다가 폐출혈을 일으키고 길어야 사흘이면 죽게 되는 이 치명적인 전염병은 삽시간에 퍼져버렸고, 정부는 도시 전체를 고립시킨 채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게 통제를 해버렸다. 당연히 이 도시 안에서는 예상할 수 있는 모든 흉악하고 추한 범죄가 일어난다. 약탈과 방화, 강간과 살인이 예사로 일어난다. 공권력은 이 사태를 막지도 못하고 시민을 안전하게 지켜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이 바이러스가 외부로 번져나갈까 전전긍긍할 뿐이다. 살든지 죽든지, 그 모든 것은 이 안에 갇힌 사람들의  복불복이었다. 


작품은 여섯 명의 화자를 앞에 내세웠다. 그들 각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글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맥락은 3인칭이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물의 내면까지도 드나드는 아주 영리한 시점이다. 첫번째 인물은 알래스카 출신 수의사 서재형이다. 알래스카에서 한국인 최초로 참여했던 개썰매 레이스에서 화이트 아웃에 빠져버린 재형은 굶주린 늑대의 공격을 받는다. 살아남기 위해 썰매와 자신을 묶었던 끈을 끊어버린 재형은 골절상을 입은 채 조난 당하고, 가족과도 같은 개들은 늑대의 희생양으로 사라진다. 그 아이들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썰매개 마야의 아이들이었다. 재형을 구해내기 위해 사흘길을 달려온 마야는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에게 물어왔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


재형이 가졌을 죄의식과 트라우마가 무엇이었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결국 재형은 알래스카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와서 유기견들을 보호하는 수의사로서 '드림랜드'를 운영한다. 그러나 사이코 패스 박동해에게 매맞을 죽을 뻔하던 쿠키를 구해준 것이 도리어 악연이 되어서 언론에 의해 온통 난자당한다. 그 악연의 한 고리에 윤주가 있다.


김윤주 기자는 자신이 얻은 제보에 따라서, 나름의 합리적 의심을 거친 채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나 그 기사는 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왜곡된 진실은 누군가를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다. 더구나 인수공통전염병이 돌고 있는 화양에 대한 그녀의 기사는 더 큰 해일을 몰고 와서 수많은 유기견들을 만들어낸 것도 모자라 살처분 과정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 살처분의 현장에서 개들의 살려달라는 절규를 듣고 온몸으로 울어낸 그녀가 이후 화양에서 겪은 고초는 어쩌면 참회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수진은 화양 의료원의 간호사다. '네수진'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도무지 거절이라고는 하지 못하는 이 착하고 순박한 아가씨는 무수한 직장동료와 환자들이 '빨간눈' 괴질에 걸려 죽음의 문으로 걸어가는 과정을 묵묵히 배웅해야 했다. 끔찍한 전염병과 학살이 난무하는 이 무서운 도시의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웃어갈 틈을 준 캐릭터가 있다면 그건 노수진이었다. 작가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군부대 방문기며, 나이팅게일 선서식에서의 꽈당 수진도 그랬다. '네'밖에 못하는 이 처자의 이름이 '노' 수진이라는 것에서 작가의 네이밍 센스가 돋보였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와 행방을 알지 못하는 군인 남동생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밥을 차린 그녀의 행보가 안타까웠다. 인정하기 싫어서 도피하고자 했던 처절한 쌀밥 한그릇이 아니던가.


문득 기준이 떠올랐다. 해 질 무렵이면 찾아와 현진이와 아버지를 찾지 못했다고 전해주는 남자. 그녀는 그의 말을 시신을 찾지 못했다로 들었다. 하루 온종일 베란다를 서성이며 그가 오는 해 질 녘을 기다리며서도 그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찾았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 찾고 나면 그가 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녀에게 한기준은 세상에 남은 유일한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마지막 한 사람, 그녀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그녀가 만날 수 있는 살아 있는 한 사람. -421쪽


한기준은 소방대원이다. 아내와 아이를 잃은 그의 불타는 복수심은 유일한 동물 화자 링고와 닮아 있다. 둘은 똑같이 외쳤다. 


"이 개새끼들이 내 아내를 죽였어."


링고는 살고 싶다는 열망보다 더 강하게 복수심을 불태웠다. 내 사랑을 죽인, 내 아내를 앗아간 자를 향한 무서운 집착은 생명을 돌보지 않은 채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리고 그 절절한 외침을 재형은 알아들었다. 자신 역시 자신의 사랑하는 개를 죽게 한 상대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내리지 못했다. 인간에게 요구하지 못하는 것을 개에게도 요구하지 못하는 그에게선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여기게 하는 허영도 없고, 짐승을 '그것'이 아닌 '그대'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희망'을 찾아냈다. 그는 성자가 아니고 절대자도 아니다. 그도 어린 시절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가족같은 개들을 늑대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돌이킬 수 없는, 그래서 지울 수도 없는 과거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가 어찌 보면 자신의 원수라고도 할 수 있는 상대를 구하기 위해 제 몸을 던졌을 때 모든 속죄가, 진정한 구원이 일어났다. 마치 영화 설국열차에서 주인공이 식량으로 내놓지 못했던 제 팔을 어린 소년을 구해내기 위해서 작동하는 엔진 속으로 밀어넣었던 것처럼!


인간의 힘과 지혜가 힘을 쏟지 못하는 버려진 도시 화양에서 죽은 자가 이유 없이 죽었듯이 살아남은 자도 마땅한 이유로 행운을 거머쥐지 못했다. 물론, 그것이 누군가에겐 더 큰 고통과 절망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이곳에선 가장 죄없는 자들이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가장 죽어 마땅한 자가 지나치게 오래 살아남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뜨겁게, 가장 인간적으로 보였던 이는 늑대개 링고였다.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던 서재형의 헌신 덮고도 남을 매력이었다. 


화양이 고립되었던 기간을 뜻하는 숫자 28. 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숫자는 참으로 속절없어 보인다. 28일은 바이러스의 원인을 규명하기에 턱도 없고, 대책을 마련하기에도 무리인 숫자였지만 29만의 인구를 무참히 학살되도록 방치할 수 있는 긴 숫자이기도 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고 억울하게 희생당했건만, 이 저주받고 버림 받은 도시 바깥의 사람들은 안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침묵했다. 약속이나 했듯이 일제히...


화양에서 일상을 앗아간 세상은 화양을 잊은 것 같았다. 죽은 자를 땅에 묻듯, 시간과 망각 속에 화양을 매장해버린 후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화양에 대한 뉴스는 점점 줄어들었다. 곧 시작될 브라질월드컵 얘기에 밀려 어느 날엔 아예 언급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날 새벽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날 새벽, ‘700미터 구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상이 밝혀지려면 기나긴 세월이 지나야 할 터였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 일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테니까. -473쪽


이런 비겁한 침묵이, 사악한 카르텔이 화양에서만 있었을까. 80년 광주에서,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니 지금까지 줄곧... 우린 얼마나 많은 '살려달라'는 외침에, '살고 싶다'는 절규에 등을 돌리고 살아왔을까. 그들의 화양이 언제라도 내가 사는 곳이 될 수도 있을 터인데...... 


표지의 파란 숫자는 사실 붉은 핏물이어야 마땅했지만, 차마 붉게 표시하지 못한 제목이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 서늘하게 파란 핏물이 선혈이 낭자했던 이곳의 참혹함을 더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느낌마저 일었다. 영화 판권이 이미 팔렸다고 알고 있는데, 여러모로 영상으로 만들기 좋은 요소를 가진 작품이다. '붉은 눈'과 설날 연휴를 낀 1월과 2월의 '하얀 눈' 풍경은 아주 대조적일 것이고 고도의 연기력을 요구하겠지만, 관객의 마음을 반드시 사로잡고 말 스타와 링고의 러브 스토리도 기대가 된다. 다분히 영화 '감기'와 겹쳐질 내용이지만 더 큰 울림과, 그리고 더 큰 관객몰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한기준 역에 하정우를, 서재형 역에 강동원을, 김윤주 역에 공효진을, 박동해 역에 류승범을 가상 캐스팅 대상으로 꼽았다. 상상만 해도 그야말로 드림팀이다.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정유정 작가의 책인데 첫만남이 지나칠만큼 격정적이었다. 잠시 숨좀 돌리고 작가의 다른 책들을 더 읽어야겠다. 2013년이 아직 며칠 더 남았지만, 내게는 올해의 베스트였다. 


덧글) 유일하게 발견한 오타가 있다.

459쪽

그 한복판로 들어가버렸고 >>>한복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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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견이 면역력 높여준다  

 

제 2028 호/2013-12-23

털 알레르기 때문에 애완견 키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애완견 털에 묻은 먼지가 오히려 어린이들의 알레르기와 천식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준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수전 린치 교수팀은 생쥐를 개의 먼지에 노출시킨 후 기도의 면역계 반응에 어떤 변화가 오는지 관찰했다. 그 결과 먼지에 노출된 생쥐들은 그렇지 않은 생쥐들에 비해 기도의 면역세포 숫자가 더 적었다. 이는 알레르기 물질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알레르기에 그만큼 덜 걸린다는 것이다.

린치 교수는 “개가 밖에서 집안으로 묻혀 들어온 미생물이 장내 미생물에 영향을 미치고 면역계 반응도 변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 연구결과는 최근 미국 ‘국립과학협회보’에 실렸으며 2013년 12월 16일 라이브사이언스에 보도됐다.

 

 

뇌를 위해, 멍 때리세요

제 2026 호 / 2013-12-23

현대인은 바쁘다. 한창 일에 치이다가 잠시 짬이 나면 스마트폰을 본다. 아무것도 안하고 쉬는 동안에는 음악이라도 듣는다. 그런데 뇌의 입장에서는 음악 감상조차 휴식이 아니라고 한다. 정보를 수용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균관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신동원 교수의 저서 ‘멍 때려라’에 의하면 사람의 뇌는 집중과 휴식이 번갈아가며 이루어져야 한다. 휴식 없이 집중 상태만 계속되면 뇌에 과부하가 걸려 전두엽의 기능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두엽은 충동을 억제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관장하는 부위로, 이 부분의 기능이 떨어지면 사회생활에 문제를 겪을 수 있다.

저자는 진정한 뇌의 ‘휴식’을 위해서는 ‘멍’ 때리라고 한다. 이 행동은 창의성에도 효과적이다. 뇌가 휴식 상태일 때 뇌의 디폴트 네트워크 영역(뇌의 바깥쪽 측두엽, 두정엽, 안쪽 전전두엽)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이 영역이 활성화되면 무의식 상태에서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지구에서 가장 추운 곳은?  

제 2027 호/2013-12-23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곳은 어디일까?

최근 미국 국립 빙설 데이터 센터의 과학자 테드 스캠보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지구물리학회에서 미우주항공국(NASA)이 위성으로 측정한 데이터를 인용해 최저기온을 보고했다.

위성을 통해 측정한 데이터에 따르면 1㎢의 평균 온도가 가장 낮은 곳은 남극대륙 동쪽으로, 2010년 8월에 최저 기온이 섭씨 영하 94.7도로 기록됐다. 이곳은 일본 남극 기지 돔 후지가 있는 산의 3,779m 지점이다. 영하 94.7도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온도다. 피부는 물론 폐까지 노출되자마자 순식간에 얼어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거주하는 곳 중 가장 추운 곳은 어디일까. 러시아 시베리아에 있는 오미야콘으로, 1926년에 영하 71.2도까지 기록된 바 있다.

 

출처 :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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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4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5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