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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13호 캐비닛'에 대해 굉장한 상상을 할 필요는 없다.
혹시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볼 생각이라면
'13호 캐비닛'에 대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찌감치 집어치우기를 권한다.
그런 상상을 한다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프롤로그 부분의 이 내용이, 나를 처음부터 깔깔대고 웃게 만든 부분이다. 이 작가, 신선한데? 라는 마음으로.
처음엔 어리둥절하게 시작한다. "루저 실바리스는 왜?"라는 소제목에서 화산 폭발로 온 마을이 몰살당했음에도 높은 곳에 갇혀있던 루저 실바리스만 살아남았다는 데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루저 실바리스의 엉뚱한 행적을 얘기하며 짧은 에피소드가 끝난다. 아니 왜??
이어 이 작품에서 계속 등장하는 '심토머'에 대해서 짧게 설명한다. 아니 그들은 누구?
다음, 작품 속 주인공의 평이한 일상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의 일상이다. 아니 대체 왜?
이유는 간단했다. 지나치게 심심했으므로. 힘들게 공무원 시험을 패스했지만, 도무지 하루 온종일 하는 일이 없다. 기껏 있는 일거리도 오전 중 10분이면 다 끝난다. 오전의 일거리 중에서가 아니라, 하루 온종일 일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다. 창 밖 너머 붕어빵 장사가 붕어빵을 몇 봉지를 파느냐를 하루 종일 세어본 적도 있다. 그의 무료함이 느껴지는가. 그래서, 사건은 시작된다.
금지구역으로 분류된 4층의, 삐걱거리는 13호 캐비닛, 그 캐비닛 안에 들어있는 서류. 심심한 나머지 1부터 9999까지 다 열쇠를 돌려가며 번호를 맞춘 주인공. 다행히 7863번째로 숫자가 맞아 떨어졌다. 그 안에 있는 서류들에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있다고 상상하지도 못한 온갖 기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들이 심토머이다.
이를 테면, 새끼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 잠을 자다가 시간을 뛰어넘는 사람, 고양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 유리를 먹는 사람, 자신의 도플갱어를 보는 사람, 기억을 멋대로 이어붙이는 사람 등등등.
이 캐비닛을 40년 동안이나 관리하던 권박사는, 주인공을 조수로 삼는다. 반강제적으로. 주인공 공대리는 얼떨결에, 어처구니 없이 13호 캐비닛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온갖 다양한 심토머들을 만나고 그들의 상담을 들어주고, 때로 뭔가 도움이 되려고 애쓰기도 하면서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이제 권박사는 간암으로 사망 직전이고, 그는 정체 모를 검은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제시 받으며 기밀 문서의 유출을 요구받는데...
소설은 줄기차게 온갖 특이하고 특별한 심토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갑자기 첩보 스릴러로 변신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고문씬은 엽기적이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작가는 무슨 얘기들을 하고 싶었던 것일가? 자본주의의 폐해? 현대인의 외로움과 강박 관념? 시간에 쫓기는 우리의 불안정한 생활? 그 모든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건 단지 작가의 주장처럼 흔하디 흔한 '캐비닛'에 관한 이야기니까.
주인공 공대리가 캐비닛의 관리인인 줄 알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그 자신이 서류의 보관용으로 캐비닛이 되어가더라! 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맨 처음에 등장한 루저 실바리스가 자신의 고향 마을을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데 그리 엉뚱하게 기술해 놓았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는데, 공대리가 곧 루저 실바리스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누구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사실, 매우 재밌게 시작했는데, 너무 많은 심토머들을 다루는 바람에 책이 지나치게 길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헤매기 시작했다. 작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라는 궁금증.
끝까지 궁금해!를 외치며 책을 마칠 수도 있었는데,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서 많은 부분 시원해졌다. 비밀 이야기를 엿들은 기분으로. 작가는 힘주어 얘기한다. 이 저열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고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올리라고. 자신은 귀싸대기 맞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 잔뜩 힘들어간 모습을 떠올려 보며, 빙그레 미소 짓는다. 귀싸대기 대신 붕어빵을 사주고 싶네. 작가의 씩씩한 출발에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등당한 작품. 한 번 읽어보시랏. 재밌다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