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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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미국 사람이 썼는데, 그 안에 정치적인 시각이 전혀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바로 믿겨질까.  믿을 수 없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그때 그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9살 소년으로, 아버지의 유품에서 발견한 열쇠 찾아 삼만 리가 이 책의 커다란 줄기이며, 그 안에 소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드레스덴에서 가족을 잃은 상실감에 소통하지 못하는 슬픔이 또 하나의 큰 줄기를 이룬다.

아홉살 어린이의 시각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또 사랑하는 가족을 버려둔 채,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쓰며 한 마디 말을 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 또 그런 할아버지를 평생을 사랑하고 평생을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얽혀서, 이야기의 줄기를 놓치지 않게 잘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페이지도 많고 줄간도 좁고, 어지러운 쉼표 속에 마침표도 별로 없는 이 긴 문장들을, 페이지들을 잠시도 쉴 수 없게 만들며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이 책에는 있다.  그것은 편집과 기발한 발상의 승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속에 녹아 있는 감동의 정체 때문이기도 했다.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열망과, 위로받고 싶은 마음의 갈망이 독자를 애태우며 그 속에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네가 있는 곳에 왜 나는 없는가"라는 소제목 속에선 할아버지의 마음이 전개되고, "나의 감정들"에선 할머니의 마음이 전달되고, 나머지는 주인공 소년 오스카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각적으로도 독특하지만, 전달에 있어서도 한층 더 효과를 주는 표현들로 이미 써놓은 글을 줄로 그어 버리고 다시 쓴 문구들, 여러 다양한 색깔들의 글씨, 여러 사진들, 안 들리는 글자를 지워버리고 빈 여백으로 놓아버리는 효과 등등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아이는 아버지의 열쇠가 무엇의 열쇠인지 찾기 위해 유일한 단서인 "블랙"이란 이름을 가지고 무려 8개월이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헤맨다.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이 가지치기 하듯이 또 다시 연결되고 모두가 안고 있는 외로움과 소통하지 못하는 서러움 등이 지면을 통해 독자에게 전해진다.  끝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 들때 쯤, 사건의 실마리는 풀리고 얽혔던 관계들도 제 자리를 찾아간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마지막 씬이었는데, 시간을 돌려 과거로 만들어 가는 아이의 결정적인 한 마디,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에서 왈칵, 뜨거운 게 솟구친다.  이어서 빌딩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사진을 거꾸로 돌리는 느낌의 연속 사진들...

달라지지 않는다.  바뀌어 지지도 않는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상처는 치유되어야 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긍정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생을 이어간다.  그 까닭을, 그 과정을, 작품은 엄청나게 시끄러운 방법으로,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시도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너무 아프고, 너무 서럽지만, 그 이상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원래 소설을 두 번 읽는 편이 아닌데, 이 책은 좀 더 지나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오래오래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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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쏘시개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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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상황. 혹한의 겨울. 집이 폭격을 받아 돌아갈 곳이 없는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50대의 교수와 30대의 조교와 그리고 그의 연인까지 단 셋.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불을 피워야 했고, 불을 피울 재료란 이제 책밖에 남지 않은 순간.

그때, 그 책들을 어떻게 태울 것인가.  과연 태워야 하는가. 태운다면 무엇부터 태워야 하는가...

등장인물 세명뿐인 이 책은 희곡이다.  1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글.

생각해 보니, 아멜리 노통브의 글은 언제나 짧은 편이었고, 대사가 줄기차게 이어지고 지문에 해당하는 서술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매번 글의 스타일이 '희곡'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그녀가 발표한 희곡은 이 책 뿐이다.  오히려 그게 놀랍다. ^^

영화 "투모로우"에서 도서관에 갇힌 채 구조를 바라던 학생들이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책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인류의 지성이 고스란히 간직된 곳에서, 인류의 가장 고귀한 자산 중의 하나인 책이 한낱 불쏘시개 정도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며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사실, 책을 좋아하고, 책이 얼마나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이견을 갖진 않지만,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책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것을(목숨이나 목숨에 준하는) 포기할 마음이 내게는 없다.  작가는 어떤 책이 가치있는가, 어떤 책이 형편없는가 등등을 김수현식 말싸움으로 다다다다 털어놓지만, 일종의 언어유희에 가까웠고, 내게는 크게 마음에 와 닿지를 않았다.

미안하게도, 내가 갖고 있는 책 중에서 불쏘시개로 먼저 버려야 할 책을 고른다면, 나는 아멜리의 책을 그나마 먼저 태울 것 같다.  재미를 넘어선 감동, 혹은 그 이상의 무엇을 내게 주지를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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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1-16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마노아 2007-01-17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옙, 산타님^^ 감사해요~
 
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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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캐비닛'에 대해 굉장한 상상을 할 필요는 없다.
혹시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볼 생각이라면
'13호 캐비닛'에 대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찌감치 집어치우기를 권한다.
그런 상상을 한다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프롤로그 부분의 이 내용이, 나를 처음부터 깔깔대고 웃게 만든 부분이다.  이 작가, 신선한데? 라는 마음으로.

처음엔 어리둥절하게 시작한다.  "루저 실바리스는 왜?"라는 소제목에서 화산 폭발로 온 마을이 몰살당했음에도 높은 곳에 갇혀있던 루저 실바리스만 살아남았다는 데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루저 실바리스의 엉뚱한 행적을 얘기하며 짧은 에피소드가 끝난다.  아니 왜??

이어 이 작품에서 계속 등장하는 '심토머'에 대해서 짧게 설명한다.  아니 그들은 누구?

다음, 작품 속 주인공의 평이한 일상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의 일상이다. 아니 대체 왜?

이유는 간단했다. 지나치게 심심했으므로. 힘들게 공무원 시험을 패스했지만, 도무지 하루 온종일 하는 일이 없다.  기껏 있는 일거리도 오전 중 10분이면 다 끝난다.  오전의 일거리 중에서가 아니라, 하루 온종일 일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다.  창 밖 너머 붕어빵 장사가 붕어빵을 몇 봉지를 파느냐를 하루 종일 세어본 적도 있다.  그의 무료함이 느껴지는가.  그래서, 사건은 시작된다.

금지구역으로 분류된 4층의, 삐걱거리는 13호 캐비닛, 그 캐비닛 안에 들어있는 서류. 심심한 나머지 1부터 9999까지 다 열쇠를 돌려가며 번호를 맞춘 주인공.  다행히 7863번째로 숫자가 맞아 떨어졌다.  그 안에 있는 서류들에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있다고 상상하지도 못한 온갖 기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들이 심토머이다.

이를 테면, 새끼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 잠을 자다가 시간을 뛰어넘는 사람, 고양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 유리를 먹는 사람, 자신의 도플갱어를 보는 사람, 기억을 멋대로 이어붙이는 사람 등등등.

이 캐비닛을 40년 동안이나 관리하던 권박사는, 주인공을 조수로 삼는다. 반강제적으로.  주인공 공대리는 얼떨결에, 어처구니 없이 13호 캐비닛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온갖 다양한 심토머들을 만나고 그들의 상담을 들어주고, 때로 뭔가 도움이 되려고 애쓰기도 하면서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이제 권박사는 간암으로 사망 직전이고, 그는 정체 모를 검은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돈을 제시 받으며 기밀 문서의 유출을 요구받는데...

소설은 줄기차게 온갖 특이하고 특별한 심토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갑자기 첩보 스릴러로 변신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고문씬은 엽기적이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작가는 무슨 얘기들을 하고 싶었던 것일가?  자본주의의 폐해?  현대인의 외로움과 강박 관념?  시간에 쫓기는 우리의 불안정한 생활?  그 모든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건 단지 작가의 주장처럼 흔하디 흔한 '캐비닛'에 관한 이야기니까.

주인공 공대리가 캐비닛의 관리인인 줄 알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그 자신이 서류의 보관용으로 캐비닛이 되어가더라! 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맨 처음에 등장한 루저 실바리스가 자신의 고향 마을을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데 그리 엉뚱하게 기술해 놓았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는데, 공대리가 곧 루저 실바리스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누구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사실, 매우 재밌게 시작했는데, 너무 많은 심토머들을 다루는 바람에 책이 지나치게 길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헤매기 시작했다.  작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라는 궁금증.

끝까지 궁금해!를 외치며 책을 마칠 수도 있었는데, 작가의 인터뷰를 보면서 많은 부분 시원해졌다.  비밀 이야기를 엿들은 기분으로.  작가는 힘주어 얘기한다.  이 저열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고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올리라고.  자신은 귀싸대기 맞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 잔뜩 힘들어간 모습을 떠올려 보며, 빙그레 미소 짓는다. 귀싸대기 대신 붕어빵을 사주고 싶네.  작가의 씩씩한 출발에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등당한 작품.  한 번 읽어보시랏. 재밌다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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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이 2007-01-09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마노아님도 이 책 읽으셨구나!!
저도 읽고 싶었는데...
리뷰를 보니 재미있겠어요!!

마노아 2007-01-09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송이님, 이 책 재밌어요. 작가의 상상력이 발칙해요^^

짱꿀라 2007-01-10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다들 캐비닛 아주 재미 있게 읽으신 분들이 많이 있네요. 여우님의 리뷰는 아주 환상적이고 마노아님도 아주 재미 있게 읽으시고 리뷰 써 주시고 그라면 나도 한번 읽어볼까나. 바로 주문합니다.

마노아 2007-01-10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산타님도 재밌게 읽으실 거예요. 신선했답니다. ^^

씩씩하니 2007-01-10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님의 리뷰가 참 환상적여요~~~

마노아 2007-01-10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하니님 별 말씀을요~ 고맙습니다. ^^

비로그인 2007-01-10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멋진 리뷰에요~^^;;

마노아 2007-01-10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엣, 감사해요, 정군님^^
 
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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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한 탓에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작품들을 전혀 접해보지 못했다.  어느날 선물로 도착한 이 책은 그야말로 내게 신선한 작가에 신선한 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 신선하다 못해 엽기적인 가족들아 '까칠한' 이름으로 책 속에 모여 있다.

아빠, 엄마에 오누이 둘인 네 가족은 전형적인 이탈리아의 평범한 가족일 법도 했지만, 각각의 독특한 개성으로 인하여 절대 평범하지 않은 가족이 되어버렸다.

글을 쓰는 아버지가 그 중에선 가장 평범하고 상식적인 인물이랄 수 있겠지만, 보다 보면 아버지 역시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엄마 마르게리타는 상상력이 아주 좋아서 망상에 이른 인물이랄 수 있다.  중요한 마감을 앞둔 월요일만은 소화를 못 시키는 튀김만은 결코 만들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남편에게 극구 튀김 요리를 '선사'하는 그녀는, 그럼에도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가 가득하다.  '변명'이 아닌 이유 말이다.

아들 알베르티노는 그 중 비중이 조금 작은 편이다.  언제나 사건을 진행시키는 것은 동생 파시오나리아니까.  그래도 그 둘이 뭉치면 막강하다.  둘밖에 없어도 '조직'이라 불리고 또 그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니까.

가장 재밌었던 캐릭터가 막내 파시오나리아다.  어리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한 그녀가 이 까칠한 가족의 대표 명사가 될 수 있겠다.  착한 행동을 한 대가로 뭐든 들어주겠다는 아빠에게 우리 집이 아닌 남의 집 담벼락에 꼭 낙서를 하겠다고 고집하는 딸래미. 게다가 아빠도 해보라며 대신 망도 봐 준다.  첫 영성체 축하 선물을 거들떠도 안 보더니 잘못 배달온 코르크 마개 막는 기계에 열광한 것도 그녀다. 

뿐이던가.  부모님의 직업 조서 설문지에 글쓰는 아버지를 백수 취급하는 것도 이 당돌한 막내딸이다.  신문에 글을 쓰고 책을 쓰지 않냐고 항변하는 아버지에게 '그건 목수나 의사, 기술자, 변호사 같은 직업이 아니에요'라고 딱 잘라 말한다.  아버지는 이제 화를 내지만, 딸은 여전히 냉정하다. 그녀의 답변을 좀 더 들어보자.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할 때 직업이라고 말해요.  옷이 필요할 때는 재봉사를 부르고, 약이 필요할 때는 의사를 부르고, 식탁을 만들어야 할 때는 목수를 불러요.  하지만 슬프거나 웃기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작가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아가 이제라도 학교를 졸업하거나 아니면 장사를 하는 게 어떠냐고 충고까지 아끼지 않는다.  누구도 이 당돌하고 까칠한 대꾸에 아버지 편을 들지 않는다.  결국 그날 파시오나리아는 설문지를 고쳐 쓴다.  아버지의 직업은 어느새 트럭 운전사로 둔갑해 있다.  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이 '승진'한 것에 감사해야 할 판.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들 가족의 이야기는 매번 상식을 약간 비켜나가지만 언제나 유쾌함만은 동반하고 있다.  8시 등교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는 이들 부부는 문단속을 위해서 묘안을 짜내니, 문열고 나간 다음에 문을 잠그고 키를 우편함에 집어넣는 묘수를 낸다.  시험을 해보기 위해서 온 가족이 다 나왔는데, 어머나! 모두 나오고 키는 우편함에 들어가 있네.  이제 식구들은 일제히 담장을 넘기 시작한다.  다음 날은 누가 마지막에 남겨져 있는지 확인하지 않는 바람에 또 다시 담장을 넘어야 했고, 이제 그들은 새로운 대안으로 '창문'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들로서는 가장 명쾌한 해법이랄 수 있다.

파시오나리아의 생일 케이크를 '굳이' 직접 만들겠다는 엄마의 '선언'에 식구들은 그 케이크를 '연옥'이라 부르고, 부드러워야 할 케이크가 잔뜩 굳자 이쑤시개로 잘 익었는지 확인 불가, 결국 드릴로 뚫는 '모험'까지 감행한다.  이들 가족에게 이 정도 실력 행사 쯤이야 아주 가벼운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나는, 소소한 일상에서의 유머러스한 일화보다도 충분히 당혹스럽고 황당할 수도 있는 일을 나름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가짐이 보기 좋았다.  아버지 조반니노는 독일군에 의해 포로 생활도 하였는데, 그때의 사실조차도 이들 가족들에게는 신랄한 말싸움의 한 소재로도 등장할 수 있다.  아프고 고통스러웠을 기억을 그들 식으로 소화하는 모습이랄까.  그래서 때로 블랙코미디처럼 보이는 이들 가족의 이야기가 씁쓸하게 웃게 만든다.  저자는 어디까지나 가볍게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독자로서는 무조건 가볍게 읽혀지지 않아서 말이다.

이제는 작가의 딸이 환갑 노인이 지났을 만큼이나 시간이 흘러버렸는데도, 이들 괴짜 가족의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공감과 웃음을 동시에 선사한다.  시대를 넘어서 즐거움을 주는 독서를 선물해 주었으니 작가 조반니노는 성공한 글쟁이다.

그나저나, 까칠한 파시오나리아의 그 당찬 구석, 굉장히 부러웠다.  만만하지 않은 녀석... 어리지만 할 말은 다 하고 산다.  그녀가 대표 주인공이 되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면 그 역시 대단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다음 기회에는 작가의 출세작 '돈 카밀로와 페포네' 시리즈에 도전해 보고 싶다. 좋은 책을 선물해 준 어느 님께 감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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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이 2006-12-21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재미났겠어요~^^
마이~ 까칠한던가요?
ㅋ ㅋ
저도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마노아 2006-12-2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종류의 까칠함이라면 가끔 권장해도 좋을 것 같아요. 나름 부러웠어요^^ㅎㅎㅎ

마노아 2006-12-22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님도 읽고 계시군요!(당연하지만^^;;;) 아아, 이들 가족의 마인드가 부러워요. 전 이렇게 대차게 살고 싶어요.(대차게 대들며 살고 싶어요>_<)헤헤헷, 참 좋아요. 감사해요^^

프레이야 2006-12-2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벌써 리뷰 올리셨네요^^ 아주 조금 읽었는데 무지 개성있고 재미있더군요.

마노아 2006-12-22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이 책 읽고 계신분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다 기쁘네요^^

마태우스 2007-01-03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마노아님도 읽으셨군요 알라딘에 이 책 선풍을 일으킨 분이 바로 마노아님...!!

마노아 2007-01-0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공교롭게 서평단 읽을 즈음 비슷하게 읽게 되었어요^^
 
체르노빌의 아이들 (반양장)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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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의 소설 카테고리의 제목은 '소설, 현실보다 리얼한'이라고 적혀 있다.  이 책을 보면서, 그 제목이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랬기에... 너무 끔찍하고 우울했다.

체르노빌... 20년 전의 악몽같은 전 인류의 끔찍한 재앙...  반전, 평화 운동가 히로세 다카시는 뭔자력 발전소의 위험성을 호소하던 중 이 끔찍한 사건을 접한다.  그리고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었지만 논픽션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써나갔다.  이 책이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사고가 일어났던 1986년, 바로 그 '경고의 해'였다.

작품은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30분.  우크라이나 밤하늘에 거대한 폭발음이 울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세상 그 누구도 이 사건의 심각성을 알지 못할 때에, 원자로 폭발 사고 인근에 살고 있던 15세 소년 이반은 무심코 폭발 광경을 목격한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이반의 아버지 안드레이는 발전소의 책임자였다.  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인 그는, 동시에 이 사고의 책임도 함께 짊어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안드레이와 아내 타냐, 아들 이반과 딸 이네사는 자가용으로 급히 대피하려고 하지만 이미 지역은 봉쇄되었고, 아버지 안드레이는 발전소로 돌아가 사고 수습 명령을 받는다.  가장 가까이에서 작업을 했던 안드레이가 일차로, 어렸던 이네사가 2차로 죽고, 핵폭발을 눈으로 목격한 이반은 눈을 잃고, 끝내 목숨도 잃게 된다.

마을 주민 2만 명이 한꺼번에 대피하려고 하지만 그 사이사이 아이들은 쓰러져 죽고 가축들도 죽어나가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이 스러져간다.

이 책은, 체르노빌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그리고 무기력하게, 또 억울하게 죽어나가고 있었던 지를 상세히 묘사하면서, 당국에서 얼마나 비인도적으로, 그리고 무책임하게 그들을 방치하고 또 이 사고를 은폐하려 했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실제 그 현장은 책에서 묘사되는 것보다 수만 배는 더 비참하고 끔찍했을 것이며, 소련 당국의 절망적인 행태도 이보다는 수천 배 더 잔인했을 것이다.

가혹하게도, 이런 사고가 발생했을 때 제일 먼저 희생되고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이들이다.  그들은 인생을 채 꽃 피워보지도 못한 채 죽음과 맞닥뜨려야 했고, 살아남은 자는 질병과 싸워야 했으며 미래마저도 저당잡혀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체르노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때 하늘을 덮었던 버섯 구름. 그때 날라간 방사능 먼지는 전 세계 곳곳에 퍼져 지금도 서식하고 있다.  체르노빌의 사고는 그때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형인 것이다.  전 세계에서 아직도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이고 건설 중인 이 시점에서 누구라도 안전하거나 자유로울 수는 없다.  더군다나 '핵 폐기물'도 반드시 남아 있으니.

이때의 사고로 정책을 바꾸어 원자력 에너지를 대폭 줄인 나라는 오스트리아밖에 없다고 한다.(세상을 바꾼 사진에서...)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배워오기를 안전하다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설이라고 강조하고 세뇌하였다.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을 반대하면 지역이기주의인양 몰아세웠다.  그래 그런가 했다.  진실은 그렇게 뒤바뀌어 감춰졌다.

이 책의 저자 히로세 다카시는 강조한다.  원자력 발전소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고.  원자력 발전소 추진책은 에너지 부족 문제가 아니라 독점 자본의 이익과 결부된 문제인 거라고.

소름 끼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무서운 재앙을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아무 교훈도 반성도 없었던 것일까.  우리가 그토록 공을 들여 이룬 것들, 인류가 쌓아온 많은 것들을, 그리고 가장 소중한 우리의 가족과 생명 모두를 빼앗길 수도 있는데 제 욕심을 채우고자 전 인류의 모든 것을 담보로 삼는 이 야만적 행위란...

결국, 움직여야 하는 것은 소중한 생명을 가진 각 개인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진실에 다가가며 우리의 안전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책을 읽었으면 한다.  아마도, 읽으며 마음이 많이 무거워질 것이다.  어느 순간에 먹먹해지면서 눈이 다 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픽션이 아니란 사실에 더 많이 절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달라져야 한다.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은 본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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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7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쓰셨어요.
지난 일은 결코 과거로 끝나지 않아요,현실에도 영향을 미치고 미래의 우리 삶의기본이 되니까요.
그 때의 충격이 되살아납니다.

마노아 2006-12-17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르노빌에서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고작 초딩 2년 때여서 그때에는 이런 일이 있었는 지도 몰랐어요. 나중에 문서상으로 접했을 때에도 충격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시미즈 레이코의 "달의 아이" 보면서, 그 후 또 다른 자료 보면서 정말 무서운 것을 알겠더라구요. 가슴이 아파요.

짱꿀라 2006-12-17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리뷰를 아주 좋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체로노빌에서 사고 정말 참담하고 기억에도 떠 올리기 싫었던 사고로 기억을 하고 있네요.

마노아 2006-12-17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감사해요^^
지금 지구본에서 체르노빌을 찾아보았는데 생각보다 작은 지역인지 지구본에서는 찾을 수가 없네요. 우크라이나 지역만 찾아보았어요. 따로 검색을 해보아야겠어요. 잊기 전에 더 각인시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