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비캉드의 광기 스퀴텐 & 페테르스 어둠의 도시들 3
프랑수아 스퀴텐.보누아 페테르스 지음, 양영란 옮김 / 세미콜론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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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르비캉드의 도시를 완벽한 대칭으로 설계하고 싶은 도시 설계가이자 건축가인 유겐 로빅. 그는 자신이 설계하고 밑그림을 그린 도시의 구조물들이 어느 순간 균형을 잃은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계획했던 공사가 중단되었고, 그 바람에 짓다가 만 건축물들은 조심 전체와 구별되어 볼썽사납게 변해버렸다.

 

 

 

이 비대칭이 우르비캉드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거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유겐 로빅. 그는 도시의 위원회에 장문의 편지를 올려 도시 정비 사업을 제안하지만 생각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지를 않았다. 그게 6월 18일의 일이었고, 며칠이 지난 6월 24일. 위원회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유겐은 책상 위에서 모서리만 있는 정체불명의 육면체를 발견한다. 클라우스와 프리드리히가 폰 하르덴베르크 작업장에서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 물체는 너무나 단단해서 표본 추출기의 날을 부러뜨렸다. 한 변의 길이가 15cm를 넘지 않는 속이 빈 단순 육면체 구조물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위원회로부터 퇴짜를 맞고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육면체의 길이가 자라 있었다. 마치 싹이 돋아나듯이. 육면체는 점점 자라났다. 게다가 책상에 뿌리를 내려버렸는데 그렇다고 책상을 망가뜨리지도 않았다. 그냥 통과하듯이 깊이 박혔을 뿐이다. 육면체가 궁금했지만 로빅은 자신의 도시 계획을 관철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관련자들을 만나고 설득하느라 자리를 비웠더니 그 사이 육면체는 더더더 자라서 정글짐 모양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틀 뒤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구조물의 한 기둥이 자신의 팔을 통과하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아프지는 않았다. 구조물은 계속 자라고 있었으므로 잠시 후 팔을 뚫었던 구조물은 옆으로 비켜갔고 유겐은 그제서야 겨우겨우 방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성장한 육면체는 유겐의 사무실을 뚫고, 건물을 뚫고 우르비캉드 전체를 점령하듯이 퍼져나갔다. 도시 주민들이 놀라고 당황해하고, 게다가 신기해한 것은 당연한 일! 구조물은 도시를 갈라놓은 양 편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지체 없이 경계를 넘어 건너갔고, 이 신기한 구조물은 누군가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고, 누군가에겐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이 와중에도 유겐은 처음 육면체가 책상에 비스듬히 놓여있었던 게 마음에 안 든다. 처음에 반듯하게 세워졌더라면 이만큼 자란 구조물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었을 텐데, 그가 못견뎌하는 비대칭의 비대칭을 아주 제대로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놀랍게도 빠르게 적응했다. 그 구조물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고 농사도 짓고 자신만의 영역을 설정했다. 스스로 자란 이 구조물은 신기하게도 계절을 탄다. 겨우 내내 성장을 멈추더니 날이 풀리자 다시금 활동을 개시했다. 마치 살아 숨쉬는 것처럼!

 

 

 

구조물 사이사이를 연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도 설치하고 모노레일도 세웠다. 더 빨리, 더 쉽게 이동하기 위한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구조물을 이용하던 어느 날, 지진이 나듯이 구조물이 무너져버렸다. 마치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이 세웠던 바벨탑이 무너지는 것처럼.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을 떨궈낸 구조물은 전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더니 마침내는 우르비캉드를 벗어나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 도시의 정치가들은 사라진 구조물을 대신한 인공 구조물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어마어마한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아류작은 오리지널의 위엄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건축가이자 설계자인 유겐은 자신의 힘으로 육면체를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쓴다. 과연 그의 작업은 성공할 수 있을까. 끈기와 자부심은 하늘을 찌르지만, 그것이 생명력 있던 자가 생성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를 무척 궁금해 했는데, 지인의 사무실에 두권이 있길래 빌려왔다. 다시 돌려주기 전에 먼저 집은 게 이 책인데 시리즈 중 세번째 책이다. 같이 빌려온 책 중에 두번째가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뒷권을 먼저 읽어버렸다. 굳이 순서가 아주 중요할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읽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각별한 세계관을 가진 독특한 그래픽 노블로 보인다. 가상의 도시지만 우리 사는 문명 도시와 그렇게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은 어디든 그러해 보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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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 22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양여명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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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노 선생님이 처음으로 표지에 등장했다. 젊었을 적, 한참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릴 때의 모습이다. 수채화 느낌의 컬러 그림이 벚꽃도 떠오르게 하고, 따스한 봄빛도 느끼게 한다.

 

겉표지를 벗겨 내니 안에 살구색 빛깔을 가진 숲이 보인다. 카이가 늘 마음의 안정을 찾곤 하던 피아노의 숲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언론들은 재빠르게 카이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숲의 가장자리 인사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카이를 보호했지만 누군가는 극적인 장면을 영상으로 옮겼다. 그리고 곧 유튜브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아직 후폭풍은 들어차지 않았지만 카이의 연주 순서가 되었을 때엔 그것들이 영향을 줄지 모르겠다. 팡 웨이의 스캔들과 함께 카이의 스캔들 역시 맞장을 뜨지 않을까.

 

 

파이널 셋째날 등장한 연주자들이나. 왼쪽의 여성은 아르헨티나에서 왔다. 흑백 그림인데도 정열의 남미 느낌이 물씬 풍긴다. 오른쪽은 미국의 연주자인데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오케스트라는 물론 청중까지도 잔뜩 경직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주 독특한 연주 세계를 갖고 있어서 골수 팬도 갖고 있는 인사다. 쇠라의 점묘화와 르누아르의 유화같은 연주란 대체 어떤 느낌일까? 독자는 그저 그림을 통해서 그의 기이한 음악 세계를 상상해 볼 뿐이다.

 

앞서서 슈우헤이와 무척 긴장감을 높여놓았지만 오랜 라이벌은 오랜 우정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제 슈우헤이는 카이의 가장 든든한 원군이다. 카이를 통해서 슈우헤이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조금은 독립할 기미가 보인다. 그리고 슈우헤이의 아버지 역시 아지노 선생님을 통해 더 넓은 무대를, 더 큰 세계를, 더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눈앞의 경쟁자만 볼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음악의 세계로 풍덩 빠지기를...

 

 

슈우헤이가 알려줬다. '폴란드'라는 이름의 유래가 '평지의 백성'이라는 것. 쇼팽은 평지의 사람이었다고. 섬나라에서 온 카이에게 이 말은 꽤 충격이었나보다. 그 땅의 생김새와 성격이 그 땅에 살았던 사람의 음악에도 분명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드넓은 평지를 떠올리며 자신이 늘 평안을 추구했던 피아노의 숲을 더 크게 확장시켜서 느껴보는 카이의 모습이다. 끝없이 뻗어나가는 느낌이 그림에서 지면을 뚫고 나갈 것만 같다. 이런 그림들이 매번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이시키 마코토의 그림은 내가 좋아하는 성격의 그림이 결코 아니건만, 그가 그려내는 작품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고, 그거면 독자는 충분히 고마운 일!

 

드디어 파이널 무대. 카이가 출전하고 팡웨이도 출전하는 날이다. 어느 정도 심술궂은 팡 웨이를 상대로 카이는 어떤 무대를 펼쳐낼지 무척 궁금하다. 자신의 피아노만이 아지노 선생님을 계승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 팡 웨이다. 그가 아지노를 맞닥뜨렸을 때 받았을 심장의 충격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도 눈앞의 경쟁 상대뿐 아니라 더 넓은 무대를 품었으면 한다. 그것이 아지노의 음악을 계승하는 더 온전한 길이라는 것을 부디 깨닫기를...

 

콩쿠르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점점 더 긴장과 기대감이 고조된다. 다음 편도 부탁한다, 이찌노세 카이!

 

덧글) 15쪽에 오타가 있다. 클래식이랑는 >>> 클래식이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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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신화편 세트 - 전3권 신과 함께 시리즈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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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저승편을 엄청 감동 깊게 읽은 탓에, 이승편은 웹툰으로 다 보았고, 신화 편도 웹툰 연재 당시 열심히 챙겨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계속 밀리다가 완결되면 봐야지... 하고 미루게 되었는데, 다시 책을 보니 상편은 다 읽었고, 중편 중간 정도까지는 연재분을 보았더랬다. 다시 읽어도 역시 재밌는 작품이다.

 

저승편과 이승편에 이어 '신화편'이 마지막으로 나왔는데, 내용은 사실상 앞의 작품의 '프리퀼'에 해당한다. 저승의 신들과 차사, 가택신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입장이 되었는가를 하나하나 풀어내고 있다. 당연히 한국의 신화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때로 작가의 창작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 약간의 편곡(?)도 가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 작업들은 모두 조화롭게 구색을 맞추었고 통일성도 이루고 있다. 작가님이 '작가느님'이 되어가고 있나 보다.

 

시작은 천지 창조부터 잡았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는데 그 혼돈의 작은 틈을 찢고 거신이 나타났다. 거신이 둘로 찢은 혼돈이 하늘과 땅이 되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거신이 땅에서 솟아나 다투게 되었다. 처음 나온 거신이 눈이 무려 네개나 있는 두번째 거신을 제압했고, 그의 눈을 뽑아 하늘에 던지니 두 개의 해와 두 개의 달이 되었다. 두번째 거신은 흩어지고 세상에는 오색구름이 피어나 산과 강과 들이 생겨났다. 훗날 사람들은 첫번째 거신을 가리켜 하늘 문을 지키는 신 '도수문장' 또는 '미륵'이라 불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이 하늘에서 나타났으니 사람들은 그를 '옥황상제' 또는 하늘과 땅의 왕 '천지왕'이라 불렀다.작품은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의 테스트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낸다.

 

인간세상에 힘세고 영악하고 재주 기발한 놈이 나타나 사람들을 장악했으니 그의 이름은 수명장자. 그는 짐승을 길들이는 법을 알았다. 성격 드세고 잔인한 면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짐승을 길들이는 법을 알려주어서 어느 정도 공도 있다. 그런 그가 인간 세상을 장악하고는 지나치게 허세를 부리다가 옥황상제의 눈길을 끈 것이다. 천지왕은 두 아들을 시험해 보려고 수명장자를 제압해 오라고 했다. 덕이 있고 재주도 좋은 큰 아들 대별과, 시기심 많고 성격 나쁘고 못되기까지 한 둘째 아들 소별. 공은 큰아들이 세웠지만 잡아챈 것은 소별이. 이어지는 시험에서도 사기를 친 소별이 이승을 맡고, 착하디 착한 큰형 대별은 저승을 관장하게 된다. 하지만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해와 달 때문에 이승 꼴이 말이 아니다. 제 힘으로 안 되자 결국 형님 손을 빌리게 되고, 대별왕 덕분에 하늘에는 하나의 해와 달만 남게 되었다. 신화에서는 그가 혼자 힘으로 해냈다고 나오는데, 주호민 작가는 여기에 민중의 힘을 보탠다. 모두의 간절한 열망이, 십시일반 돕고자 하는 마음 가닥가닥이 모여서 거대한 힘을 끌어낸다고... 그렇게 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멋있는 임금 대별왕.

 

 

이 부분이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 표현된다면 무척 감동적일 것 같다. 보이지 않는 활이 생겨나고 보이지 않는 화살이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그 열망들이 모아져 세상에 평화가 찾아온다. 작가는 '참정권'을 떠올리며 이 부분을 썼다고 한다. 뭉클하다.

 

 

달에서 떨어져나간 파편들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저 파편들을 대별왕의 이름을 따서 '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저승의 임금이 된 대별왕. 그러나 일손은 부족하고 할 일은 지나치게 많다. 한마디로 도우미가 필요한 것이다. 한편 저승에 맨 처음  도착한 사람이 있다. 혼자 힘으로 찾아온 이 사내에게 대별왕은 '염마라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줄여서 염라. 이때부터 저승의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열 개의 지옥은 열 명의 시왕이 다스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우두머리가 바로 염라대왕. 저승 편에서 시크하게 나왔던 그 염라대왕의 시작이 이랬구나.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처럼 반가웠다.^^

 

저승이 처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일단 찾아오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 그래서 저승으로 인도할 안내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등장하는 게 바로 저승차사. 전작들에서 저승차사 셋이 나왔다는 건 이미 확인했다. 이제 차례대로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저승차사가 되었는지를 알아볼 수 있겠다. 두근두근, 읽으면서 점점 더 기대가 된다.

 

역시 시크하기로는 결코 밀리지 않는 해원맥. 이 원칙주의자 사내가 추운 북방에서 외롭게 싸우는 이야기는 꽤 슬펐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오랑캐 소녀 덕춘이까지. 조상의 조상의 조상들부터 그 자리에서 살았는데, 힘있는 자들이 멋대로 경계를 정하고는 '오랑캐'라고 명명했다. 부당한 일이다. 질문이 많은 아이들의 해맑은 눈을 마주하기엔 해원맥이는 입이 짧은 사내다. 이 둘 사이의 은원이 자연스레 정리되면서 동시에 저승차사가 되며 이야기는 훈훈하게 마무리 된다.

 

상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연재 때는 보지 못한 외전의 등장이다. 여기 성불하지 않고 남아 있는 지장 보살이 계신데, 망자의 손을 잡아주며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불에서 구해내려고 하는 분이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역시 역부족. 수행 동자가 도우미가 필요하다며 이름을 추천한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망자를 돕는 어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변호사'

 

 

하하핫, 저승 편에서 가장 인기 좋았던 변호사님을 떠올리시라.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고 이어진다. 인과 관계가 자연스럽고 뚜렷하다.

 

상편에서 소별왕이 대별왕을 속일 때 그것을 방관하고 도왔던 이가 있다. 바로 서천꽃밭의 사라도령이다. 그가 왜 이승 세계에 원한을 품고 있는지를 설명한 게 중편의 시작이다. 중국의 신화에서는 신이 되면 인간적인 감정은 모두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욕망에 눈을 뜬 신들이 인간과 사랑에 빠져 일을 만들기도 하고 여러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원래 사람이란 희노애락이 있어야 행복도 불행도 모두 느낄 수 있는 존재. 우리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은 무척 인간미가 있다. 이쪽이 더 좋다.

 

사라도령이 마음을 고쳐 먹어서 다행이고, 그의 아들 할락궁이가 아버지보다 더 서천꽃밭을 잘 지키는 것도 좋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훌륭한 재주를 선한 일에 쓴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재주는 그렇게 써야 하는 법!

 

사라도령과 원강아미, 그리고 할랑궁이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건 천상에서 쫓겨난 색마 천년장자다. 아비 닮아 악독하기가 결코 부족하지 않은 막내딸의 업은 하편에서 마저 정리시킨다. 그 과정에서 강림도령이 자연스럽게 저승차사로 합류한다. 긴 이야기이고 등장인물도 많은데 이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엮어낸 작가님 솜씨에 일단 감탄! 신화라는 모티브가 있어도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승을 다스리는 소별왕의 그릇은 이미 이야기 했고, 점점 망가지는 이승을 보다 못해 저승의 대별왕이 나서기로 했다. 인간들이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을 지키기 위한 가택 신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고, 그래서 필요한 인물들을 지정해서 집을 수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이승편의 주역인 성주신과 조왕신, 측간신과 철융신, 그리고 문왕신이 만들어진다. 세상이 평화로워지기 위해선 일단 집부터 화목해야 한다는 것, 집안이 평안해야 마음도 평안해지고 두루두루 모든 게 좋아진다고, 역시 격하게 동의한다.

 

이 집의 위기는 '이승'편에서 제대로 다뤄주었다. 그것도 '철거민'을 소재로. 용산 참사가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연재 당시에도 용산 생각이 많이 나서 보기 참 힘들었다. 작가님도 작업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고... 왜 아니었겠는가. 그러고 보니 용산 참사 벌써 4주기다. 마음이 무겁다...

 

 

분위기 전환하자. 원래 유머가 가득한 주호민 작가! 적절하게 유머 보따리 풀어주셨다. 녹두생이가 엄마를 찾기 위해서 천상으로 갈 수 있는 두루미를 탔는데, 이 용한 두루미가 말도 한다. 자기는 십장생이라며. 먹이는 '잉어'를 쓰는데, 그 바람에 십장생 욕도 비스무리 듣고, 잉여 소리도 듣고... 심각할 뻔했는데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웃음 반갑다.

 

세권의 책이지만 다 읽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글씨가 많지 않고 그림도 큼직하고, 무엇보다 재밌어서일 것이다. 이제 프리퀼을 읽었으니 저승편, 이승편 정주행 한번 더 해주면 더더 맛깔나고 의미있게, 감동적으로 마무리가 될 것 같다. 작품이 끝나서 아쉽지만, 영화로 제작된다고 하니 기쁘게 기다리겠다. 작가님의 다음 작품은 또 어떤 것이 나올지 몹시 기대가 된다.

 

덧글)오타 몇 개 발견했다.

중권 275쪽에 철융은 독에 갖히고>>> 갇히고

하권 90쪽 짚신이 다 헤졌네 >>>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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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14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신과함께서를 보고싶어서 네이버 웹툰으로 갔는데... 돈 내고 보라더군요...
아니 오백워....ㄴ을 휴대폰으로 긁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500원 쓰겠다고 문상 긁기고 그렇고 신용카드도 없고!!!!
책 사서 읽으란 말 아닙니까... 흑흑 아쉬운대로 집에 고이 모셔둔 [짬]이나 읽으렵니다. 벌써... 7번째 ㅋㅋㅋㅋ

마노아 2013-01-14 21:24   좋아요 0 | URL
어이쿠! 해 넘기면서 유료로 전환됐어요. 며칠만 일찍 갔어도 되었는데 안타까워요.ㅜ.ㅜ
근대 500원 휴대폰 결제될 텐데요. 아, 대신 세금이 붙으려나?
아무튼 안습이에용.... 짬 한참 전에 재밌게 봤어요. 저는 이제 무한동력 볼 차례예요.^^ㅎㅎㅎ

이진 2013-01-15 00:16   좋아요 0 | URL
제 마음대로 휴대폰 못 긁는 학생입니다... 헤헤
무한동력은 앞에 조금 봤는데 별로더라구요. 재밌으려나...

마노아 2013-01-15 23:25   좋아요 0 | URL
어제 네이버 마일리지를 사이버 머니로 쓸 수 있게 해주는 '정책 동의' 메일을 받았는데 혹시 마일리지 있으면 시도해 봐요.^^
무한동력은 아직 보기 전인데 기대를 낮추고 봐야겠어요. 그럼 좀 더 재밌어질지도 몰라요.^^

같은하늘 2013-01-17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노아님 서재에 오면 볼 수 있는 만화~~

마노아 2013-01-18 18:43   좋아요 0 | URL
만화가 빠지면 섭하지요.^^
 
미생 1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착수 미생 1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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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연재작을 인터넷으로 잘 보지 않는다. 기다리는 게 힘이 들어서라기보다, 책으로 읽는 게 더 좋았기 때문이다. 웹으로 먼저 읽고 책으로 다시 복습하기도 하지만, 근래에는 대체로 책 나온 다음에 보게 됐던 것 같다. 미생이 출간되고 나서 하나씩 모았는데 금세 4권까지 나왔다.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서 출간해서 그런 모양.

 

제목이 독특했다. 미생(未生)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뭔가 철학적인 제목이다. 어떤 소재를 다루고 있는지 어떤 내용인지도 전혀 모른 채, '이끼'의 그 느낌만으로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책 장을 펼쳤는데 오오옷! 전혀 예상 밖의 소재가 등장했다. 바둑이다!

 

 

작품은 특이하게도 '해설'부터 시작된다. 세기의 대국. 바로 1988년부터 89년에 걸쳐 치뤄진 응씨배가 출발점! 중국 본토 출신의 대만 재벌 잉창치가 전 세계의 고수 16명을 초대해 실력 대결을 펼쳤다. 상금 규모만 115만 달러이고, 우승 상금은 40만 달러. 당시 윔블던 테니스 우승 상금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고 한다. 일본은 막부 시대에 명인 자리를 놓고 가문의 흥망을 건 혈전을 전개할 정도로 국가적으로 바둑을 장려했다. 중국은 문화혁명 때 바둑을 핍박하기도 했지만 바둑 종주국의 자존심을 걸고 대회에 임했다. 이에 비해 바둑 변방에 해당했던 한국은 조훈현 9단 딱 한 사람만 초대되었다. 그런데 그 조훈현이 결승에 올랐다. 5판 3승제의 시합에서 조훈현은 1국을 이겼으나 2국과 3국에서 연패했다. 상대는 중국의 녜웨이핑. 결승전 4,5국은 몇 달 후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4국에서 눈앞의 승리를 앞두고 자신의 승리를 의심한 녜웨이핑이 지고 말았다. 이 패배는 네웨이핑을 혼돈에 빠져들게 했다. 중국 전역의 기대와 덩샤오핑의 총애, 40만 달러의 상금 등 그 모든 것이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밤새 자책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한 그와 달리 지옥 입구에서 살아 돌아온 조훈현은 부인과 함께 주최 측이 제공한 관광 일정을 태연히 소화했다. 이것이 제1회 응씨배 결승 최종국(5국)이 열리기 직전까지의 상황이다.

 

그리고 바로 등장인물 소개! 우와아, 이거 뭐지? 놀라웠다. 저 엄청난 결과를 앞두고서 작품이 갑자기 현실이 되어버렸다. 궁금한 독자는 재빨리 검색해 보았다. 결과는 조훈현의 승리!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으로 돌아왔다.

 

주인공 장그래. 어려서 신동 소리 들어가며 바둑 학원을 다니던 아이. 프로가 되기 위해서 십여년 세월을 보냈건만, 애석하게도 프로 입단에 실패했다. 그제야 비로소 주름진 아버지가 보였고, 총기 잃은 눈빛의 어머니가 보였다. 이제껏 바둑 외 다른 세상을 몰랐던 그에게 세상이 갑자기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감당 못할 규모와 강도로!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집을 줄여 변두리로 이사를 했다. 작은 식당을 차렸지만 실패했고, 검정고시를 치른 후 후견인의 제안으로 회사에 취직도 했다. 그러나 바둑 두던 사람이라는 사람들의 호기심은 그를 점점 압박해왔다. 결국 첫 회사는 그만둬야 했다. 그리고 다시 소개 받아 인턴으로 들어간 회사에서는 바둑의 그림자를 철저히 숨겼다. 그 덕분에 장그래의 이력서는 빈칸만 남아 있고, 대학졸업장과 특기사항 하나 없으니 뭇 사람들의 시선과 낙하산 의혹을 감당해야 했다.

 

자, 여기가 시작점이다. 바둑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아이가, 바둑판을 떠나 세상에 발을 디밀었다. 첫발자국은 바로 미끌어졌지만 조심스레 두번째 발자국을 떼고 있다. 작품은 각 장과 장의 연결을 저렇게 조훈현과 녜웨이핑의 검은돌 흰돌을 따라가며 진행시킨다. 승부의 마지막까지 이 속도로 따라가면 엄청난 긴장감이 누적될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비루한 독자는 바둑을 둘 줄 모른다. 초딩 시절 친구한테 살짝 배웠는데 친구도 제대로 둘 줄 아는 게 아니어서 오목도 아닌 게 바둑도 아닌 게 이상한 잡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바둑의 'ㅂ'자도 모르는 게 맞다. 해설이 따라 붙지만 전혀 못 알아먹겠다. 바둑 용어도 내겐 너무 낯설다. 애석하다. 당장이라도 바둑 배우고 싶다. 바둑판이랑 바둑알은 집에 있는데....;;;;

 

 

인턴 직원들은 몇 주 후 있을 P.T를 위해 파트너를 정해야 했다. 어리숙하고 맥아리 없는 장그래는 모두가 노리는 파트너 감이었다. 한마디로 자신을 돋보이게 해줄 폭탄 취급 받은 것이다. 동료 인턴 안영이는 판 안의 사람만 모르고, 판 밖의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에 대한 언질을 주었다. 바둑판 입장에서 그린 구도가 '판 안'과 '판 밖'을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여기저기 치이고 이용당하는 것만 같아 상심한 찰나에 접근해 온 인턴 한석율. 이번 판은 본인이 선수를 치겠다고 멋있게 폼을 잡아봤지만 상대 역시 만만치 않은 고수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장그래. 이둘의 기싸움을 바둑에 기대어 표현한 게 무척 인상적이다. 아주 잘 어울렸달까. 초반에 엄청 끌려다녔던 장그래가 회심의 반격을 가할 때 무척 짜릿해졌다. 비록 입단에는 실패했지만, 그래서 패잔병으로 분류되어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는 승부사로 길러진 사람이다. '집중력'도 무시할 수 없고 승부욕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판을 보고 형세를 뒤집기 위해서 발톱을 감출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 그림 무척 멋있게 보이는데 누군지 모르겠다. 앞서 여러 프로 기사들의 이름이 나왔는데 이름 배열로 보면 이세돌로 짐작된다. 궁금해서 사진 검색해 봤는데 같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이 그림의 주인공 누군가요??

 

바둑만화로 보이지만 또 직장인 만화다. 그 둘을 결합시켰다. 바둑도 전장, 직장도 전쟁터.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더군다나 사회성 별로 없는 장그래라는 인물이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개척해가며 살아남을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된다. 회사의 부장님 과장님 대리님 그리고 인턴까지, 모두들 참 치열하게 살아간다. 제 인생의 무게를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작품 시작 전에 앞서 소개된 작가의 말이 묵직했다.

 

IMF는 이 땅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국가가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고, 은행이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고, 해고가 경영합리화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과거 아버지들이 정년퇴임 이후 가족을 위해 희생한 젊은 날을 회한 어린 시선으로 돌아보게 해주었던 평생직장이란 개념도 없애버렸습니다.

 

거대한 기업들이 쪼개지거나 사라졌습니다. 노숙자를 더 이상 거지라고 부르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일생을 지배할 것만 같았던 산업화의 논리는 가치의 시대로 빠르게 전환하고 사람들의 생각도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한국말을 떼기도 전에 영어를 배우게 하고 집은 집이 아니라 '부동산'이 되었습니다.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야근을 마다하지 않고, 쉬는 날이면 아이들 체험학습을 위해 무거운 몸을 밖으로 내쫓습니다. 보다 넓은 아파트를 궁리하고 더 나아 보이는 동네를 꿈꿉니다. TV에서는 꿈대로 살라고 외치는 미담자들이 득세합니다. 꿈대로 못 사는 이들은 위로받지 못하고 배려받지 못합니다. 그저 시민, 서민, 대중으로 퉁쳐서 평가받습니다. -5쪽

 

 

저렇게 살벌한 경쟁의 시간을 사는 우리네 현대인들의 삶과 달리 바둑은 매우 특별한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이 마주 앉아 왜 이기고 졌는지를 나눈다고. 그것도 빠르면 6,7세의 어린이부터 말이다. 그들에게 패배란 어떤 의미인지, 또 패배감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그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지는지... 그 아이가 세상에 나와서 한 수 한 수 걸음을 옮기는 이야기가 바로 '미생'이다.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그러나 분명 아직 죽은 것도 아닌 생. 장그래를 점점 더 응원하게 된다. 크게 역전을 시켜주어도 좋겠지만, 이대로 끝까지 가주기만 해도 위로가 될 것만 같은 기분. 미생, 끝까지 같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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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서구쪽 만화는 확실히 정서 차이를 많이 느끼게 한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그림보다 내용의 충격성에서 꽤 감명을 받았는데, 마찬가지로 내용 쪽이 충격적인 조 사코의 '안전지대 고라즈데'는 읽어내는 게 무척 힘들었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빽빽한 그림과 사전을 읽는 것 같은 피로감을 주는 과한 글자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중간쯤 되겠다. 간결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그림에 글밥도 아주 많지는 않다. 하지만 무척 조용한 서사로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만화와 일본만화에 익숙한 독자로서 다소 낯선 편이긴 했다.

 

이 책은 저자 세스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만화가이면서 오래된 만화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던 작가는 어느날 우연히 오래전 뉴요커 잡지에서 확 꽂히는 그림을 그린 작가를 발견해냈다. 그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 했지만 찾을 수 있는 작품은 무척 한정적이었다.

 

 

무언가에 꽂히면 올인하는 성격인가 보다, 세스는. 이후 출판사에 직접 연락을 해서 작가의 신상을 알아내고, 그가 자신이 어릴 적 살던 동네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래서 직접 그 동네로 가보기도 했다. 작가는 이미 죽은지 오래였고, 세스는 그의 흔적을 쉽게 찹지 못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파고드니 캘로의 딸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집으로 다시 찾아간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사진 몇 장을 얻고 어머니에 대한 추억 몇 가지만 들었을 뿐이다. 대신 아직도 살아계신 캘로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자기 아들 얘기 마다하는 어미 봤냐는 아흔 셋의 노모와 캘로의 옛 친구도 찾아가서 만난다. 이 모든 작업들이 무려 십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무척 집요한 면이 있는 작가 세스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도 집착하게 만든 것일까?

 

 

캘로가 그린 삽화들이다. 왼쪽 그림에는 "어머, 신기해라! 내가 당신 바로 전 해의 미스 오클라호마였다우!"라고 적혀 있다. 1947년 5월에 실린 그림이다. 오른쪽 그림에는 "아니, 혼자 있겠다는 게 아니야. 그냥 좀 내버려둬달라고."라고 적혀 있다. 1954년 10월에 실렸다. 왼쪽 그림에서 유머를 읽었다면 오른쪽 그림에서 어쩐지 좀 짠한 기분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는 청소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캘로는 미국에서 한동안 활동을 했지만 세스를 홀린 만큼 많이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내 캐나다로 돌아왔고, 그 다음에는 부동산을 운영하면서 지내다가 사망했다. 가족들조차 캘로가 남긴 그림을 소장하지 못했다. 본인이 직접 그림을 없앴을 수도 있고, 가족들이 못 찾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만화가로서 활동했던 경력에 비해 그 흔적이 많이 남지는 않은 편이다.

 

화려하게 불탄 것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사그라져간 그 예술 혼에 세스는 더 관심이 갔던 것은 아닐까 싶다. 세스는 무척 내성적인 성격이다. 아주 친한 친구가 있지만 그다지 사교적인 편은 아닌 것 같고, 꾸준히 여자 친구도 만들지만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다.

 

 

밤에 자다가 깨어보니 스케이트 타는 사람이 있었다. 다음 날 왕년의 솜씨를 떠올리며 스케이트를 타보지만 바로 엉덩방아 찧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릴 적에는 비가 오면 종이 배를 띄워놓고 혼자 놀기도 했다.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지만, 또 외로움도 많이 타는 사람으로 보인다. 캘로의 일로 낯선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난 뒤에 절친에게 전화를 걸어 익숙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을 더 잘 알아보는 법!

 

 

캘로를 찾는 과정에서 하루 머물렀던 여관 이웃방에 장기 투숙 중이던 화가가 있었다. 동종 업종이긴 하지만 애니가 보여준 과도한 친밀감은 도리어 그녀의 외로움을 더 짙게 드러내고 말았다. 피곤하다고 그만 방으로 돌아가려는 세스를 그녀가 얼마나 간절히 붙잡았던가. 다음날 떠나기 전에 세스는 그녀의 방문에 쪽지를 하나 남긴다. 얼굴을 보면서까지 인사할 정도는 아니어도 훌쩍 떠남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다시 만들지 않으려는 소박한 배려가 돋보인다. 거창하진 않더라도 작고 따뜻한 마음씀이다.

 

 

작품은 아주 천천히 물 흐르듯이 잔잔하게 진행되는데, 세스의 동선과 시간을 고스란히 그 속도로 담아내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어린 시절에 읽었던 만화책의 한 대목을 떠올리는 부분이다. 에르제의 "땡땡의 모험"에서 땡땡이 기차 위를 달리다가 터널에 머리를 부딪칠 뻔하는 위기의 장면이라고. 출판사 편집자는 어린이들이 따라할지도 모르니 그 장면을 지우자고 했지만 에르제는 거절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터널만 보면 그 만화의 한대목을 떠올리는 애독자도 생겼다.

 

어떤 기분일지 나도 알 것 같다. 어릴 때 언니가 읽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몰래 가져다가 읽었더랬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2층집 창문에서 시체를 기차 위로 던졌고, 기차가 달리다가 커브 길에서 도는 바람에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살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엉뚱한 곳에서 사체가 발견된 것이다. 홈즈는 단번에 2층집 창문을 생각해 냈고, 기차를 타고서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2층집을 찾아낸다.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 꼭 그런 집을 연상시키는 2층 집이 있었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홈즈의 그 대목이 생각났고, 하얀 페인트 칠이 되어 있는 아주 깔끔한 그 집이 음산하게 보였다. 날도 환한데 괜히 무섭다고 뛰어서 돌아가기도 했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찾아보면 이런 식의 추억은 꽤 많을 것이다.

 

작품의 미덕은 이렇게 느린 속도의 전개가 독자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추억을 되새기게 하고 나도 그랬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는 것이다. 극적인 변화를 싫어하고 지금 이대로를 좋아하는 세스. 본인이 만났던 사람들 전부를 리스트로 만들어 보기도 했다는 세스. 이거 무척 재밌는 생각이다. 사람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 못하는 나는 과연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적을 수 있을까? 그들을 학연 지연 그밖에 취미, 업무 등등의 카테고리로 나누고 친밀도를 떠올려 본다면, 마치 핸드폰 속 전화번호부 카테고리가 구현될지도...

 

작품의 제목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더 강해진다면'이란 가정이 아니라 '약해지지만 않는다면'이라고 했다. 모두가 더 강하고 더 빠르게를 외치는 시대에서 약해지지만 않는 정도로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이라니, 그 느려보이지만 가볍지 않은 삶이 흐뭇하게 다가온다. 내가 참 좋아하는 가수 이승환이 그런 말을 했다. 불행하지만 않으면 행복한 거라고... 동의한다. 불행하지 않으면 그걸로도 행복한 거지. 마찬가지로,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그 정도면 괜찮은 인생이다.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루저 취급받는 세상에서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라고 말해주는 것, 정말 최고의 위로 아니던가.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자족하는 삶,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삶... 그런 삶을 지향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살고 싶다.

 

 

독특한 주석이다. 작품에 등장한 여러 만화책과 작가들을 맨 뒷장에 소개했는데, 저렇게 캐릭터들도 같이 실어주었다. 이런 스타일의 그림이구나... 감상하는 게 즐거웠다. 이렇게 재미난 주석이라면 귀찮다고 패쓰패쓰할 일이 없을 텐데...

 

오른쪽 붉은 바탕의 사진은 책의 앞뒤 날개를 펼치면 나오는 장면이다. 캘로의 아내 헬렌과 딸의 모습이다. 캘로를 찾아내면서 시작된 세스의 여정이 다시 캘로에서 끝난다. 기승전결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구나, 세스는!

 

 

19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로 추정되는 뉴욕 시절의 캘로 사진이다. 통 넓은 바지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나보다.

 

오른쪽의 제목은 내지 표지인데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다시 한번 강조하는 의미로 한컷 찍었다. 괜찮은 인생이라는 말이, 오늘 여러모로 나를 안심시킨다. 

 

덧글) 오타가 하나 있다. 37쪽 맨 위 두번째 컷 : 교정를 보다가 >>> 교정을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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