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아래 모든 것들이 형태를 드러냈다. 파괴된것은 더 파괴되었고 척박한 것은 더 척박해졌다. 큰비가 시골 사람들을 도처에매몰시켜 버렸다. 쓰러진 쓰레기더미는 물에 깨끗이 씻겼다. 무수한 물고기들이 양어장에서 도망쳐 나왔다가 전부 베틀후추밭에서 죽고 말았다. 추풍나무는 잎의 절반을 잃었고, 삼합원의 천장에서는 줄곧 물이 샜지. 우리 집은 완공된 지 몇 년 되지 않은 타운 하우스였는데도 벽에서 물이 새고 하얀 칠이 벗겨졌다. 나는햇볕 아래 서서 손가락으로 귀를 팠다. 빗소리는 이미 내 청각 속에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귓속에서 그 빗소리를 파내고 싶었다.
그 우박이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비가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비 때문에 아찬이 보고 말았다.
천씨네 작은아들과 왕씨네 작은아들을 보게 된 것이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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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탁자 가득 제물을 차리면서 귀신들과 외로운 혼귀들을 먹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제물은 인간의 사욕일뿐이다. 사람들은 안전함이 부족할수록 죽음을 더 두려워하게 되고, 귀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제사상 위의 제물도 갈수록 풍성해진다.
사실 제물이 풍성할수록 귀신들은 더 고독하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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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쉬면 되는거지, 무슨 계획이 필요할까...싶지만.

연말부터 계속 바쁜 업무의 연속이라 하루하루 하루살이처럼 지내다가, 막상 여유가 생기니 시간을 마구 흘리고 다니는 기분이다. 서평을 쓰기로 하고 받은 책들을 숙제처럼 읽고 있다가 이제 그도 짬이 생겨서 평소 읽으려고 야금야금 구입한 책들이 쌓여있는 책탑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마저도 지나쳐버리고 있으니.

이제 오전 열시인데 오늘의 업무는 오후로 미뤄도 되는 것이라 시간이 남는 느낌이다. 아, 이럴때 책을 읽어야하는데.

슬슬 노안이 시작되고 있고 책을 읽을 때는 안경을 벗는 것이 훨씬 좋은데 사무실에서 안경벗고 책을 읽을수는 없고. 열심히 모니터를 보는 듯 전자책을 읽으면 되겠는데 어째 여전히 전자책은 또 적응이 안되고 있고.

머잖아 다가올 정년 이후의 삶은 이럴때 걱정을 하게 된다. 그때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갈까.

머, 잠깐 걱정을 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을뿐이고.

하루 삼시세끼 차려 먹고 운동하고... 그러면 하루가 지나가지 않으려나 싶을뿐이고.

아, 그래서 어르신들이 늘 먹으러 다니고 운동다니고 놀러다니고....


요즘 점심시간에 좀 핫하다는 곳을 찾아 가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을 느낀다. 주택가이든 상가이든 관광지이든 상관없이. 가끔은. - 물론 우리를 보는 남들도 그런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 평일 점심시간에 이 비싼 음식을 먹으러 일상적으로 다니는 사람들처럼 여유롭게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정말 부러운 삶,인가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는 특별한 날 점심시간을 한시간 더 받고 밥 먹고 차마시고 그러는데 저들은 직장에서 그런 시간을 주지는 않을 것 같고. 젊은이들은 학생이라 시간이 많은가 싶은 생각이 들고 늙은이들은 있는게 시간과 돈이라 여유로워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고 엄마들은 육아스트레스를 푸느라 시간을 쪼개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이유없는 일은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이될뿐이고.












최근 최진영 작가의 단 한 사람을 재독했다. 한 권 읽기도 힘든판에 재독이라니...라는 생각을 했지만 꽤 좋았다. 아니, 그냥 좋았다. 재독까지의 기간이 짧아서 느낌이 아주 많이 다르지는 않았지만 처음 읽을 때 내용에 더 집중을 했던 것과 달리 두번째는 문장과 문장의 행간에 더 관심을 갖게 되어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번 신간도 기대중이다. 

그나저나.

책을 구입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책을 언제 읽을 것인가가 문제라니.

근데. 오로라를 읽은 다음. 언젠가 오로라를 보러 북유럽을 가는 날이 오려나....?

머리가 멍..한 오후. 급한 일을 해결하니 묘하게 긴장감 풀린 오후의 멍때리는 시간이라니. 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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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차근차근 연필 드로잉 - QR코드로 60초 만에 배우는 마카쌤의 쉽고 빠른 이지 드로잉
마카쌤 지음 / 예문아카이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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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여행을 떠나서 여행일지를 그림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채색화는 엄두를 내지 못하더라도 드로잉은 작은 노트와 연필 하나만 있어도 가능한 것이니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생각날 때마다 드로잉 연습을 하곤 했다. 물론 꾸준히 했다면 지금쯤은 어설프게라도 주위 사물을 드로잉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여전히 드로잉 초보다. 많은 드로잉 책을 보면서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연습만이 드로잉 실력을 높이는 길이다,라는 것을 체감한 이후 책이 아닌 연습에 매진을 하기로 했건만 역시 생초보에게는 길잡이 책이 필요한 것인가보다.

이번 드로잉 책을 펼치고 여지없이 선긋기로 시작하는 내용을 보는데 분명 그 전에도 한번쯤 봤을테지만 이번만큼은 실제로 선을 그어보며 느껴보고 있다. 직선을 긋는 연습을 할 때 손목을 움직이는 것과 팔목을 움직이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선을 몇번 그어보다가 기본 사물은 내 주위의 것으로 시작을 할까 하다가 책이 있으니 기본 형태를 잡는 것과 명암을 넣는 것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 그러니까 책 제목처럼 일상 속 차근차근 연필 드로잉,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적당한 노트와 적당한 연필을 집어들고 따라그리기부터 시작했다. 처음부터 잘 그린다는 생각없이 형태를 보면서 내가 그린 그림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있다면 그 다음 단계로 세밀하게 잘 표현할 수 있는 연습을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일상적으로 먹는 과일부터 시작해 사물, 동물, 사람의 신체 부분과 전신의 모습까지 구분하여 그림 그리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과정 단계를 그냥 뛰어넘기는 것이 아니라 큐알코드를 확인해 직접 마카쌤이 그리는 과정을 볼 수 있어서 따라하기가 쉬워진다. 어설픈 실력으로 따라그리기를 하면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그린 형체가 무엇인지 알수는 있어보여 계속 노력해봐야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카쌤의 드로잉 팁을 통해 명암을 표현하거나 사물의 형태를 어긋나지 않게 하는 방법 등 그림을 좀 더 정교하게 따라그릴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을 배울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이제야 사물그리기를 하면서 눈길은 자꾸만 마지막장에 있는 채색응용으로만 가고 있다. 아직 채색을 할 수 있는 실력이 되지는 않지만 가끔 드로잉에 색을 넣어보면 드로잉에 조금 더 재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내 드로잉 실력을 모두에게 선뜻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올까 싶지만 일단 오늘의 드로잉 연습은 했으니 그 날이 하루정도는 앞당겨졌으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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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신이다.
귀신인 내가 귀신에 대해 얘기하는 건 아주 적절한 일 아닐까?
나는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 한다. 여기서는 그저 혼자 중얼거릴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존재‘ 방식은 빛도 아니고 소리도아니다. 그림자다. 물리 현상이 아니라서 과학으로 실증할 수 없다. 나의 ‘존재‘는 계량화가 불가능하고 측량도 할 수 없다. 계산할 수 있는 단위도 없다.
기억은 나의 존재이자 순환의 매개다. 나의 기억과 타인들의기억을 통해 나는 존재한다. 이곳에 존재하고 현장에 존재하고여기에 존재하고 저기에 존재한다. 나는 기억에 의지하고 기억에 기생한다. 기억이 있는 곳, 말할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있는 현장이자 구전의 역사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과구강과 혀끝에 존재한다. 손으로 이야기를 쓸 때는 펜 끝에 존재하여 빠른 속도로 종이 위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종이를 태우거나 찢어 버리기 전에 나는 종이 위에 정착한다. 하지만 종이가 훼손된다 해도 사람들에겐 암기력이 있으므로 종이는 머릿속에 완전한 복사본으로 저장된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정착하게 된다. 비밀로 가득 찬 기억이 나의 따스한 침대가 되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고 익명으로 감춰진 더럽고 사악하고 부패한,
일생에 매장된 그 비밀들이 나의 부드러운 매개체가 된다.
나무와 물, 흙과 풀도 있다. 내가 자주 기어 올라갔던 그 반얀나무는 나를 기억한다. 내가 수없이 절을 했던 그 추풍나무도 나를 기억하고, 내가 베어 버린 대나무들도 나를 기억한다. 내가 숨었던 그 밭도 나를 기억한다. 이 작은 시골은 나를 기억하고 있다.
나의 삶과 죽음이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다. 때문에 나는 바로 이곳에서 귀신이 되었다.
하지만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식탁 위 솥에 담긴 죽을 일가족 아홉 식구가 다 먹고 나면, 먼저 아찬에게 방금 먹은 죽이 물었는지 진했는지 묻고, 이어서 내게 물었다. 이어서 다섯 딸에게 묻고 다시 두 아들에게 물었다. 제각기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고 대답도 둘 중 하나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수많은 ‘중간‘이 있었다. 한 가닥 줄로 이 ‘중간‘을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진함과 묶음 사이는 한 가닥 줄이다. 어떤 외부의 힘도 이 줄을 곧게 펼 수 없다. 줄은 왜곡되어 선회하면서 수많은 굴곡과 모퉁이를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매듭을 형성한다. 모든 굴곡에는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그 그림자가 보호처를 제공하므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죽이 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마음속으로는 진했다고 할 수 있고, 진했다고 말한 사람은 더진하기를 갈망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이‘가 있기에, 나는 수시로 그 사이의 매개체를 찾을 수 있었다. 비밀이 가득 쌓여 있는 곳이 가장 좋은 매개체가 된다. 그곳은 따스하고 축축하다. 때문에 나는 계속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저 타이완 중부 시골에서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농가의 아들로, 밭에 나가 수확을 하고 차를 몰고 화물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을 뿐인데 무슨 화려한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죽음은 일종의 기묘한 전환이라 귀신이 된 뒤로 모든 언어의 한계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전에 할 수 없었던 말들을이제는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귀화(鬼話), 귀신의 말이다. 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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