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평점 :
"통찰과 공감이 어우러진 이야기"
평론가의 추천글은 도무지 내가 글을 읽어내는 것과는 같을수가 없어서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는데, 책을 다 읽고 도서정보를 훑어보려고 하는 순간 이 문장이 훅 치고 들어왔다. 아, 정말 이 짧은 한마디로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구나! 라는 감탄과 백만번의 끄덕임을 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인데 내게 더 이상 이 책에 대한 무슨 이야기를 꺼내라고?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선고의 날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로 하고 자신을 도와 줄 친구를 찾고 두 친구는 삶을 끝내기 좋은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는 이 소설이 그렇게 시작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친구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예상이 되듯 친구의 우정이라거나 삶의 의미라거나 하다못해(?) 심지어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우리의 삶,이라고 하면 너무 대책없는 말이 될까? 시그리드 누네즈라는 작가가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을 이번에는 이런 방식으로 잘라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이야기해주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또 나 나름대로 나의 입장과 생각을 끄집어 내면서 온갖 생각에 사로잡혀있게 되고.
내 생각이 맞으니 내 생각의 흐름으로 들어와, 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이런 것이야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세상을 이야기로 읽으며 공감하게 되는 것이 먼저였다.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책을 펼치면 온통 공감투성이인데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보게 되는 깊이가 있어서 정말 쉽게 읽히다가 어느 순간 멈칫하고 읽고 또 읽게 되곤했다.
모험? 모험이라면, 우리는 서로 다른 두 모험에 나선 것이었다. 친구의 모험은 나의 모험과 완전히 달랐고, 앞으로 아무리 함께 생활을 한다 해도 우리는 다분히 혼자일 터였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적어도 둘이 있지만, 떠날 때는 오로지 혼자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모든 인간 경험을 통틀어 가장 고독한 경험으로, 우리를 결속하기보다는 떼어놓는다.
타자화되다. 죽어가는 사람보다 더 그런 사람이 누가 있을까?(149)
이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은 이 내용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친구의 죽음과는 다른 이야기겠지만 내 평생을 같이 산 어머니의 노쇠함은 선뜻 자연의 법칙이라며, 순리를 따르듯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아니, 그냥 단순한 노쇠함이 아니라 내가 언젠가 죽음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때와도 또 다른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 조금 더 가까운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인 이유로 안락사는 반대!를 외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지도 않고 나와 친하지 않은 그 누군가의 죽음이 또한 나와 완전히 별개의 것이 되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뭐라 설명하기 힘들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위로 아닌 위로의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수도 있지만 이건 '나도 너와 다르지 않다'라는 안도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애를 썼다.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 실패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그 누구도 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나 역시 그 누군가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오롯이 나 혼자만이 견뎌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님을 알겠다.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다한들 무슨 상관인가. 견뎌낼 힘은 받지 않겠는가.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헨리 제임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