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0:7-8 결혼의 사계절-여름

자격증/공무원 전문 교육기업 에듀윌(eduwill.net)은 4월 13일부터 22일까지 10일간 문화공연 이벤트에 참여한 회원 614명을 대상으로 '좋은 아빠-엄마일 것 같은 연예인'이 누군지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 좋은 아빠일 것 같은 연예인에 가수 지누션의 션(노승환)이 44.0%(270명)를 얻어 1위를 차지했고, 좋은 엄마일 것 같은 연예인에 탤런트이자 션의 아내인 정혜영이 63.7%(391명)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습니다. 부부가 좋은 아빠 엄마일 것 같은 연예인으로 선정됐습니다. 션과 정혜영 부부는 크리스천으로 대표적인 잉꼬부부이자 기부천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션과 정혜영 부부는 지금 넷째를 임신 중인데 결혼생활의 여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혼의 여름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때가 아니라 결혼생활이 안락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입니다.

오늘은 결혼의 사계절 중에서 세 번째 시간으로 여름입니다. 여름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계절입니다. 아이들은 뜨거운 햇살 아래서 공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산으로 바다로 피서를 떠납니다. 여름에는 과일이 으뜸입니다. 토마토는 식욕을 돋아주고, 참외는 속을 뚫어주고, 복숭아는 숙취를 해소해주고, 수박은 갈증을 해결하고, 포도는 피로를 풀어줍니다. 결혼생활이 여름인 부부의 감정은 과일처럼 달콤하고 행복감과 만족감과 성취감과 유대감을 느낍니다. 결혼한 지 20년 된 남편의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일과 자녀양육과 건강 등을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니 지금은 더욱 강해졌어요. 우리 부부의 관계는 매우 편안하죠. 지난 날의 고통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아내의 말입니다. “어려울 때 포기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에요. 지금의 행복을 생각하니 참 잘했다 싶어요.” 이처럼 여름인 부부는 한 겨울의 칼바람을 이겨냈기에 한 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여름인 부부의 태도는 배우자를 편안하게 대합니다. 편안하게 대한다는 것은 예의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남편이 양치하는데 아내가 소변을 봐도 되는 게 아닙니다. 며칠 전 이마트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는데 40대 아주머니가 남편 엉덩이를 자꾸 만지는 건지 때리는 건지 하더라고요. 제가 뒤따라가려다가 민망해서 내려왔습니다. 다시 올라가려는데 아직도 그러더라고요. 이런 건 편안한 게 아니라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겁니다. 편안한 것은 자연스러운 거지 다른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게 아닙니다. 결혼한 지 12년 남편의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편안함을 느끼죠.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노력 없이 지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아내의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기쁘게 생각해요. 설혹 갈등이 있더라도 신혼 초에 비해 훨씬 더 빨리 해소돼요. 서로를 더 사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답니다.” 이처럼 여름인 부부는 오래된 신발이 편안하듯이 배우자와 함께 있으면 편안합니다.

여름에는 꽃이 피는데 물을 줘야 싱싱하듯이 여름인 부부의 행동은 행복해지기 위해 서로 노력합니다. 여름인 부부는 의사소통이 원활합니다. 자기주장을 내세우면 찬바람이 불고 배우자의 의견을 귀담아 들으면 봄바람이 붑니다. 여름인 부부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너무나 다릅니다.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고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다릅니다. 남편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바르셀로나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손꼽아 기다리고 아내는 웃어라 동해야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합니다. 여름인 부부는 책을 읽고 세미나를 참석합니다. 부부는 출생과정과 성장과정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간격을 좁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름인 부부는 신앙적으로 성장할 때 결혼생활도 행복해집니다. 신앙은 결혼생활을 개선합니다. 결혼한 지 9년 된 아내의 말입니다. “지금까지 결혼생활이 항상 여름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복을 기대할 때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곤 했어요.” 결혼한 지 14년 된 남편의 말입니다. “우리 부부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신앙 덕분에 행복을 누리죠. 교회 생활은 유대감을 더욱 공고히 해줍니다. 기독교인과의 교제는 긍정적 행동의 자극제가 되고 교회 활동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여름인 부부는 꽃에 물을 주듯이 행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결혼생활의 여름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배우자를 존중해야 합니다. 배우자를 존중하기 위해서 사람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27절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을 닮은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인 사람은 하나님처럼 거룩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존재인데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모욕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됩니다.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존중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보존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많이 하는 욕이 있는데 그것은 “멍청이”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너무 답답해서 미련하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는데 아내는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고려해 줍니다. 남편은 앞만 보는데 아내는 전후좌우를 살핍니다. 남편은 아내의 의견을 들으면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집어쳐!”라고 묵살하기도 합니다. 아내들이여, 여러분의 말과 행동이 남편에게는 답답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남편이 핀잔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에게 미련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겁니다. 남편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이 너무나 터무니없게 보이더라도 화를 참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라고 말하면 따스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많이 하는 욕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서 속았다고 느낍니다. 남편은 쉽게 대답하는데 아내는 생각해보고 대답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말과 행동이 다르면 “만날 말뿐이라니까!”라고 불평하게 됩니다. 남편들이여, 여러분이 말한 것을 지키는 지 아내와 아이들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아내가 토라지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겁니다. 남편이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아이들에게 “아빠가 시간을 내서 약속을 지킬 거야.”라고 다독여야지 따스한 햇살이 비쳐옵니다. 사람은 잘 낫든 못 낫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해야 나도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존중하기 위해서 결혼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 18절을 통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 아담의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으시고 2장 24절을 통해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말씀은 서로를 보완하고 완성하라는 말씀이고 한 몸이 되라는 말씀은 서로를 섬기고 헌신하라는 말씀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든 사회제도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결혼이 깨지면 사회도 깨지게 됩니다. 사회문제는 가정문제에서 비롯됩니다. 가정이 살면 사회도 살게 됩니다. 성경적으로 결혼은 계약이 아니라 언약입니다. 계약은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작성하지만 언약은 상대방을 믿기 때문에 맺는 겁니다. 계약은 제한된 책임을 지지만 언약은 무제한의 책임을 집니다. 계약은 힘들면 깨도 되지만 언약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남편과 아내가 맺은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배우자와 맺은 언약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기도 합니다. 성경도 언약의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약속입니다. 구약은 옛 약속이고 신약은 새 약속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깨지지 않듯이 사람과의 약속도 깨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고 서로 헌신하라고 결혼제도를 만드셨습니다. 부부가 서로를 존중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보존되고 부부가 서로 헌신한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제도가 부합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멀리서 찾으려고 돌아다니다 보니 목마른 겁니다. 나다나엘 호돈이 쓴 [큰 바위 얼굴]을 보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은 돈 많은 사업가도 아니고, 뛰어난 장군도 아니고, 유명한 정치가도 아니고, 천재 시인도 아니고 그 마을에서 자라고 늙은 어니스트이었습니다. 어니스트의 흰 머리가 흰 구름에 휩싸인 큰 바위 얼굴이 똑같았습니다. 메에테루 링크가 쓴 희곡 [파랑새]를 보면 크리스마스 전날 밤 요술쟁이 할머니가 나무꾼의 어린 남매 '찌루찌루와 미찌루'의 꿈속에 나타나서 파랑새를 찾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찌루찌루와 미찌루 남매는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먼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행복의 파랑새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매달린 새장 안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은 최수종도 아니고 하희라도 아니고 션도 아니고 정혜영도 아니고 여러분의 배우자입니다. 자녀입니다. 가족입니다. 누군가가 노력한다면 결혼생활은 개선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그런 가정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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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5 결혼의 사계절-봄

4월 29일 오전 11시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성공회 성당에서 윌리엄 왕세손이 평민인 케이트 미들턴 양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윌리엄 왕세손은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아들로 영국 왕위계승서열 2위인데 영국 국민들은 아버지 찰스 왕세자대신 윌리엄 왕세손이 왕위를 계승하길 바란다고 합니다. 윌리엄 왕세손은 어머니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빼닮은 데다 대학교 동기와 10년간이나 교제하고 신중하게 결혼하기 때문에 영국 국민들이 좋아한다고 합니다.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양은 결혼생활의 봄을 맞이했습니다. 결혼의 봄은 신혼시절이 아니라 결혼생활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과 가능성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자연계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계절이 결정되지만 결혼생활은 부부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 하느냐에 따라 계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아니 한 사람만이라도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계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결혼의 사계절 중에서 두 번째 시간으로 봄입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입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농부들은 땅을 갈아엎고 씨앗을 뿌리며 한해 농사를 시작하고 주부들은 두꺼운 옷을 드라이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을 합니다. 결혼생활이 봄인 부부의 감정은 기쁨과 희망과 행복이 넘쳐납니다. 결혼한 지 1년 된 아내의 말입니다. “너무 즐거워요. 10년 동안 데이트를 했지만 막상 결혼하고 보니 서로의 관계가 더욱 새로워지고 있어요.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요. 남편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건 전혀 새로운 느낌이에요. 남편을 다른 각도에게 보게 되었답니다. 앞으로 우리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무척 기대돼요.” 결혼한 지 26년 된 남편의 말입니다. “결혼 1주년 바로 다음 날 첫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항상 집에 아이들이 있었죠. 지금은 모두 둥지를 떠났고 우리 부부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과 염려와 관심을 나누며 여러 가지 활동을 함께 즐기고 있어요. 아이들(자녀들)은 자기들도 이런 결혼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하죠.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이처럼 봄인 부부는 사랑의 에너지가 넘쳐나 집안도 예쁘게 꾸미고 집안 구석구석도 청소하고 저녁 반찬도 신경 쓰고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삽니다.

봄인 부부의 태도는 서로를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미운 것은 보이지 않고 예쁜 것만 보입니다. 잘못한 것은 이해하며 넘기고 잘한 것은 칭찬 해줍니다. 컵에 물이 반 밖에 없어도 ‘반이나 남았네.’라고 낙관적으로 말하고 비가 오더라도 ‘비가 오면 날이 맑아질 거야.’라고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결혼한 지 22년 된 아내의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미래를 희망하고 있어요. 현재의 상황만으로도 감사해요. 우리 부부의 관계가 더욱 깊어졌으면 좋겠어요. 다른 부부들이 결혼에 실패하는 것을 보면 남편과 내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며 관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해요.” 남편의 말입니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잘하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에 의견이 일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때로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를 사랑하죠. 그것이 우리의 구심점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봄인 부부는 현재를 감사하며 미래를 기대합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합니다.

봄이 되면 얼음이 녹아 시냇물이 흐르듯이 봄인 부부는 의사소통이 원활합니다. 자기주장을 내세우면 겨울이 되지만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 봄이 됩니다. 봄인 부부의 행동은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해주며 서로가 행복해지기 위해 책도 읽고 세미나도 참석합니다. 결혼한 지 7년 된 아내의 말입니다. “우리는 데이트 시간을 정해 대화도 나누고 서로 원하는 일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결혼한 지 21년 된 남편의 말입니다. “우리 부부의 결혼생활이 행복하고 나날이 발전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어떻게든지 함께 보낼 시간을 마련하는 데 있죠. 우리는 그동안 몇 차례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혼생활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봄인 부부는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행복은 그냥 찾아오지 않고 노력해서 얻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이 중심이지만 서양 사람들은 부부 중심입니다. 아이를 우선시하면 부부가 소원해지지만 부부를 우선시하면 아이도 안심합니다. 그러나 봄이라고 만사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부작용도 있습니다. 봄이 되면 꽃가루가 날려 재채기를 하고 새로 돋아난 풀을 만지다 풀독이 들듯이 자칫하면 꽃샘추위가 찾아와 여름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가을로 건너 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사랑의 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배우자를 사랑하는 기간은 평균 2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2년이 지나면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 탱크가 있습니다. 차도 주유 탱크에 기름을 넣어야 움직이듯이 사람도 사랑 탱크가 차야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랑의 저수지라고 말합니다. 울진에서 목회하는 동안 차를 몰고 후포 장을 가는데 저수지가 가득 차니 수로를 따라 물이 아래로 흘러서 논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며 우리도 사랑의 저수지가 채워지면 아래로 흐르는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수지가 채워지지 않으면 물이 흐를 수 없듯이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게리 채프먼 박사는 5가지 사랑의 언어를 발견했습니다. 5가지 사랑의 언어가 있다는 말은 사람마다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2012년 12월 31일부터 아날로그 방송이 디지털방송으로 전환된다고 합니다.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으면 디지털 전파를 수신할 수 없듯이 사람마다 사랑의 전파를 수신할 수 없으면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언어를 알아야 사랑의 전파를 수신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랑의 언어는 인정하는 말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잠언 12장 25절을 통해 “선한 말은 그것을(마음을) 즐겁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은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도구입니다. 그런데 가장 쉬운 방법을 경상도 사람들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다쟁이도 문제지만 벙어리도 문제입니다. 말로 사랑을 표현해 보십시오. “당신이 만든 음식이 최고로 맛있어.” “당신은 너무 자상한 남편이에요.” 이렇게 상대방을 칭찬하고 감사하는 말을 하면 사랑의 저수지가 채워집니다. 두 번째 사랑의 언어는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남편들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내와 이야기를 합니다. 남자들은 한꺼번에 두 가지를 할 수 있지만 여자들은 한 가지밖에 못합니다. 남편이 리모컨을 돌리며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 아내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껴집니다. 함께하는 시간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텔레비전을 끄고 얼굴을 보고 대화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상관 말고 배우자에게 신경 쓰십시오. 함께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면 함께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두 사람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면 사랑의 저수지가 채워집니다. 세 번째 사랑의 언어는 선물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면 무언가를 주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노인들이 음식을 싸주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고 아이들에게 용돈을 쥐어주는 것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선물을 사랑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생일 선물과 결혼기념일 선물을 받아야 사랑받는 다고 느낀답니다. 선물을 주고받을 때 돈으로 환산하지 말고 마음으로 환산해야 합니다. “어머니, 이거 싸주지 마세요. 남아서 버리게 돼요.” 했다간 사랑의 둑이 무너집니다. “어머니, 이거 준비하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잘 먹을게요.” 이렇게 말하고 저를 주십시오. 그래야 사랑의 저수지가 채워집니다. 나만 채워달라고 하지 말고 남도 채워줘야 합니다. 네 번째 사랑의 언어는 봉사입니다.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봉사를 사랑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여보, 사랑해.”라는 말보다 청소기를 돌려주는 것을 좋아하고 “옷 사줄까?”라는 제안보다 쓰레기봉투를 분리수거해서 버려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때워주는 것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날 연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헌금을 연보라는 했는데 헌금할 돈이 없으니 몸으로 봉사했습니다. 그것을 날 연보라고 합니다. 몸으로 일해 주는 것도 사랑의 저수지를 채워줍니다. 다섯 번째 사랑의 언어는 스킨십입니다. 신체적인 접촉은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안아줬을 때 스트레스지수가 낮아지고 심장박동수가 정상을 찾는다고 합니다. 자꾸 달라붙는 아이는 사랑이 목마른 아이입니다. “너는 만날 달라붙니? 저리 좀 가라.”고 엄마가 핀잔하면 아이는 사랑의 타이어가 펑크가 납니다. 부부도 스킨십(포옹과 애무와 성관계)을 해야 사랑의 저수지가 채워집니다. 이처럼 사람은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데 상대방이 어떤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제1과 제2의 사랑의 언어로 사랑을 표현한다면 배우자는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져 결혼생활은 봄에서 여름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정하는 말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사랑한다, 아들아. 사랑한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함께하는 시간으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하늘보좌를 떠나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선물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봉사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스킨십으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계시며 나와 교제하십니다. 예수님이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셨듯이 우리도 상대방에게 맞는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여 사랑의 저수지가 가득 차고도 넘쳐 사랑을 나눠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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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24 결혼의 사계절-겨울

4월 17일에 경기도 평택에서 300억대 자산가가 자택에서 손과 발이 청 테이프로 묶인 채 머리에 피를 흘리며 숨져있었고 그의 아내는 목을 맨 채 발견됐습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조카사위를 동원해 남편을 납치 감금하여 둔기로 때려죽이고 자신은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평생의 반려자가 철천지원수가 되었습니다. 자연계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결혼생활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다. 결혼의 봄은 신혼시절이 아니라 결혼생활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과 가능성이 충만한 상태가 결혼생활의 봄입니다. 여름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때가 아니라 결혼생활이 안락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가 여름입니다. 가을은 자녀를 출가시키고 두 사람만 남는 때가 아니라 결혼생활이 불확실하고 우울하고 무질서한 상태가 가을입니다. 겨울은 인생의 말년이 아니라 결혼생활이 실망스럽고 외롭고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겨울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혼시절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30년을 살아도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여름일 수 있습니다. 자연계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계절이 결정되지만 결혼생활은 부부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 하느냐에 따라 계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아니 한 사람만이라도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계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게리 채프먼 박사의 [결혼생활의 사계절]을 참고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결혼의 사계절 중에서 겨울입니다. 왜 겨울부터 시작할까요? 달력을 보면 1월이 겨울이니까 겨울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가을이 돼야 결혼생활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해서 겨울이 돼야 상담자를 찾아온다고 합니다. 겨울은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시기입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소귀에 경 읽기잖아요? 결혼생활이 겨울인 부부의 감정은 어떤지 태도는 어떤지 행동은 어떤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겨울인 부부의 감정은 상처로 인해 분노하고 절망하며 배우자가 있으나 마다 해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낍니다. 부부는 서로 냉랭하게 대하고 대화가 없다보니 집안은 적막하며 마음에는 증오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결혼한 지 23된 남편의 말입니다. “정말 낙심이 됩니다. 우리는 의견이 일치될 때가 한 번도 없어요. 둘 다 황소고집이라서 감정적으로 대립할 때가 많아요.” 아내의 말입니다. “우리는 수년 동안 분노를 안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동안 내가 더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남편은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내 감정을 무시하죠. 또 너무 비판적이에요.” 이렇듯이 겨울에 접어든 부부는 서로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삽니다. 상대방이 가해자이고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겨울인 부부의 태도는 서로를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예쁜 것은 보이지 않고 미운 것만 보입니다. 잘하는 것은 그냥 넘어가고 잘못한 것은 트집 잡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기회는 이때다 싶어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결혼한 지 19년 된 아내의 말입니다. “처음부터 잘 해보려고 마음먹었어요. 하지만 남편은 내가 무슨 제안을 하든지 바가지를 긁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어요.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결국 입을 다물기 시작했죠. 남편은 내 생각이나 욕구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고집만 내세울 때가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나도 남편에게 무관심해지고 말았지요.” 남편의 말입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네 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어요.(알바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아내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거나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고 미래를 위한 계획도 신경 쓰지 못했어요. (내가 피곤해서 듣기 싫어 하니까) 아내는 입을 다물어 버렸어요. 아내의 애정이 바닥이 난 듯해요. 아무리 노력해도 아내의 마음을 되돌릴 수가 없었죠.” 이렇듯이 겨울에 접어든 부부는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상대방이 잘못해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배우자를 탓합니다.

겨울은 날이 춥다보니 몸을 움츠립니다. 겨울인 부부는 추위가 가시고 봄이 오기를 기다릴 뿐 따뜻해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겨울인 부부의 행동은 거친 말을 주고받다가 심한 경우 가정폭력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남편이 폭력을 행사했는데 요즘에는 아내가 때리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매 맞는 남편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라네요. 겨울인 부부는 아예 입을 다물고 침묵하거나 서로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 각방을 쓰고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한다고 합니다. 결혼한 지 5년 된 아내의 말입니다. “때로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늘 마음이 아프고 우울해요. 행복하지가 않아요. 처음과 같은 사랑을 느끼고 싶어요. 남편은 사고를 당해 3년 동안이나 변변한 수입도 없어요. (남편이 돈을 벌지 못하니) 우리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어요. 둘 다 부정적으로 변했고, 서로에게 끊임없이 실망만 안겨주고 있어요.” 남편의 말입니다. “아내가 다툼이 많은 집안에서 성장한 탓에 그런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것이 문제죠. 아내는 늘 자기주장만 내세웁니다.” 자기주장만 내세우다 보면 겨울이 빨리 옵니다. 겨울에 접어든 부부는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고 말을 하면 말다툼으로 발전하거나 아예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지냅니다. 서로가 하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차라리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적과의 동침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달이 초승달로 이울면 보름달로 차게 되듯이 최고의 상담가인 예수님에게서 성경적인 처방전을 받는다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옵니다. 봄과 겨울과는 이웃사촌입니다. 겨울의 찬바람을 맞아봐야 봄바람이 따스한지 알 수 있고 땅도 겨울에 쉬어야 봄에 싹틀 수 있듯이 결혼생활의 겨울을 지내봐야 봄이 소중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뀔 수 있을까요? 과거의 잘못을 극복하면 치유의 계절로 접어듭니다. 상처는 고름과 같아서 짜내지 않으면 곪아갑니다. 우리가 상처를 잊는다면 언젠가 불쑥불쑥 되살아나기 때문에 말끔하게 짜내는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예수님은 쌍방 간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을 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배우자만 탓하지 말고 자신의 잘못도 인정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 위해 상대방의 잘못을 끄집어내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게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심정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말로 하다보면 싸움이 일어나니 글로 전달하는 게 좋다고 합니다. 상대방이 상처를 주었을 때 ‘나는 ... 라고 느꼈어요.’ 라고 표현해 보십시오. ‘당신이 전화를 받지 않아 내가 너무 걱정했어요.’ ‘당신이 일을 도와주지 않으니 내가 너무 힘들었어요.’ ‘당신이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내가 너무 속상했어요.’ 과거의 상처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을 병들게 만든 원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이 고쳐져야 말도 고쳐지고 행동도 고쳐지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글을 읽어보면 나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은 상처를 받았구나!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면 예수님은 그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을 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은 배우자에게 상처를 준데 대해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잘못을 고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잘못을 인정해야지 변명하면 안 됩니다. 나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상대방이 상처를 받았다면 그것은 내가 잘못한 겁니다. 나는 재미삼아 돌을 던졌지만 개구리가 맞았다면 그것은 내 잘못입니다. 변명하지 말고 잘못을 인정해야 계절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아 당신이 걱정했다니 미안하오.’ ‘내가 일을 도와주지 않아 당신이 힘들었다니 미안하오.’ ‘내가 말을 들어주지 않아 당신이 속상했다니 미안하오.’ 사과를 할 때는 진심을 담아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진정성이 필요 합니다. 상대방이 사과를 하면 용서를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절이 바뀝니다. 누가복음 17장 3절을 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예수님은 사과하는 아량도 발휘하고 용서하는 도량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상처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야 신앙적으로 성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이 겨울의 한파를 견뎌야 봄에 새싹을 틔울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겨울을 보내고 있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름을 짜내야 새살이 돋듯이 과거의 앙금을 털어내면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우리 교인들 가정에 향긋한 봄 냄새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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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18 내가 주를 보았다.

우리나라는 설날과 추석이라는 큰 명절이 있는데 기독교는 부활절과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이라는 큰 명절이 있습니다. 이 중 가장 큰 명절은 부활절입니다. 사람들은 성탄절이 가장 큰 명절인 줄 알지만 예수님의 탄생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를 만든 원동력이기 때문에 부활절이 가장 큰 명절입니다. 저는 부활절이 될 때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왜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여자를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은 조각을 12바구니나 거두었을 때도 성인남자만 세고 여자와 어린이는 제외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다면 다른 제자들도 믿기가 쉬웠을 텐데 여자인 마리아에게 알려준다면 다른 제자들이 의심할 게 뻔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아셨지만 수제자인 베드로가 아니라 여자인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리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살펴볼까요? 하나님은 누가복음 8장 1절에서 3절을 통해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고 말씀합니다. 일곱 귀신은 귀신 들린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귀신이 심하게 들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으나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내 주셔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마리아는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 5장 11절을 통해 예수님의 핵심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8장 3절을 통해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는 예수님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교회를 다녔지만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교회봉사를 했습니다. 요즘도 남자 교인들보다 여자 교인들이 믿음이 더 좋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여자 제자였습니다. 여자 제자들 중에서도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리더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다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23장 44절에서 56절을 통해 예수님에게는 남자 제자가 12 명이 있었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 기도하고 있다고 알려주어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가게 하였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칼을 들고 저항하다가 대제사장의 집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붙잡혀 가시자 해코지를 당할까봐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관저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도 안타깝게 지켜봤고,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가슴을 치며 탄식을 했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할 때에도 자리를 지켰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황수관 박사가 간증하는데 한국전쟁 당시 피난하는데 폭탄이 떨어지자 키가 큰 아버지는 혼자 살겠다고 도망갔지만 키가 작은 어머니는 자식들을 끓어 안았다고 하더라고요. 남자 제자들은 얼굴만 세우려고 했지만 여자 제자들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고 예수님과 함께 했다고 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 말고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24장 1절부터 12절까지를 통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금요일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됐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에는 모든 것이 멈추어집니다. 장례식도 치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일 장을 치르기 때문에 아리마대 요셉은 서둘러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시신을 세마포로 싸고 다른 사람을 장사하지 않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안장했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장례식을 급하게 치르느라 예수님의 세마포(수의) 사이에 향품을 바르지 못해서 안타까웠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새벽같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무덤 문(돌문)을 어떻게 굴릴까를 걱정하면서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산허리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습니다.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서 막았고 돌을 노끈으로 묶었고 옛날에 시루떡을 찔 때 김이 새지 않도록 밀가루로 봉하듯이 빈 공간은 점토로 봉인했습니다. 여자들이 밀어 가지고는 돌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제자들이 무덤에 도착해보니 육중한 돌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해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무덤을 도굴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무덤을 파헤치거나 시체를 가져가거나 무덤을 인봉한 돌문을 바꿔 놓거나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남자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 10절을 통해 시신을 쌌던 세마포(수의)는 흩어져 있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개어져 있었습니다. 누에가 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되어 날아가듯이 예수님은 세마포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셨습니다. 만약 도둑이 들어왔다면 시신은 그대로 두고 값비싼 세마포만 벗겨갔을 겁니다. 시신을 훼손하려고 들어왔다면 피로 범벅이 된 세마포를 벗기지 않고 통째로 옮겨갔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신을 도둑질해 갈 수도 없었습니다. 산허리에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입구가 하나였고 그 입구를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경비병들이 굳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신이 도둑맞지 않은 게 분명했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리고 돌아갔지만 요한복음 20장 11절을 통해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목 놓아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세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남자 제자들보다 나았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리아는 섬겼고,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마리아는 함께 했고, 남자 제자들은 무덤을 보고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빈 무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남자 제자들은 출세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예수님이 붙잡히시자 도망갔지만 여자 제자들은 은혜를 받고 나서 따라다녔기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어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만 다니는 교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섬기는 교인이 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면 교회를 떠나는 교인이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교인이 되고, 이방인처럼 살지 않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교인이 된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우리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실 겁니다. 우리는 베드로같이 나중에 듣는 제자가 아니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소식을 먼저 듣는 제자가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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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8 생명이냐 멸망이냐

4월 12일자 조선일보에 프랑스의 AFP 통신을 인용해 다큐멘터리 감독 ‘심차 자코보비치’가 유대교 대제사장 가야바의 무덤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사용했던 녹슨 대못 두 개를 찾았다고 보도했습니다. 가야바는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유물부는 "고고학적인 근거나 조사가 빈약해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이 못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일 때 사용됐던 대못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확실합니다. (저는 리 스트로벨 목사님의 [예수님의 수난을 체험하기(우리나라에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로 번역)]를 참고하여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신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 반역자나 사람을 죽인 살인자에게 시행하는 잔인한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사형수는 쇠와 뼛조각이 박힌 채찍으로 맞았습니다. 채찍을 맞으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습니다. 사형수는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길이가 180센티미터 무게가 14킬로그램인 십자가의 가로 기둥을 어깨에 지고 사형장까지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빌라도의 관정에서 재판을 받고 성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셨습니다. 너무 힘들어 3번 넘어지셨습니다. 사형장에 도착하면 길이가 18센티미터인 굵은 대못을 양손에 박고 몸을 지탱하기 위해 팔에 밧줄을 감았습니다. 한쪽 무릎을 조금 밀어 올리고 발을 겹쳐서 발등에 박았습니다.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면 압력이 가해져 숨쉬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사형수의 몸에서는 피와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갈증이 났습니다./ 사막의 뜨거운 햇살이 얼굴을 내리 쨌습니다.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사형수는 빨리 죽고 싶지만 쉽게 죽어지지 않았습니다. 사형수는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보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사형수는 보통 36시간이 지나서야 죽었다고 합니다. 저녁이면 피 냄새를 맡고 들짐승들이 나타나 십자가에 매달린 사형수의 살점을 뜯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려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6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금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시)이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
누가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사람 유다일까요? 예수님을 구출하지 않고 도망간 제자들일까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일까요?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른 유대 백성들일까요? 종교지도자들과 유대 백성들의 압력에 굴복해 사형선고를 내린 로마제국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일까요?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은 로마 군병들일까요? 아니면 모든 악한 일의 배후에 있는 사탄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5장 8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위의 본문들을 통해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시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음을 선택하셨을까요? 저와 여러분의 죄를 씻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씻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가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가?
예수님은 무슨 죄를 지어 사형선고를 받으셨을까요? 재판은 심문과정을 거쳐서 최종판결을 내리지만 사냥꾼이 올무를 쳐놓고 짐승을 기다리듯이 종교지도자들은 사형을 결정해놓고 재판을 진행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까요? 유대교 서기관들은 성경을 옮겨 적을 때 ‘야훼’라는 단어가 나오면 목욕을 하고 와서 적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마14:36) 거룩하신 하나님을 친밀한 하나님으로 바꿨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너무나 파격적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을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예언된 ‘인자’(단7: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야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며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예언되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자신을 인자라고 말하자 신성모독죄(하나님께 불경스런 말)를 적용하였습니다.(마26:63-66) 그러나 진짜 신성모독죄를 저지른 건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죽이려한 종교지도자들이 진짜 신성모독죄를 저질렀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었는가?
예수님이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진짜라면 예수님은 진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겁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록하였습니다. 거짓으로 기록하였다면 들통 났을 겁니다. 목격자들이 기록하였으니 신약성경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는 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했나?
예수님은 왜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3장 23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람이 죄를 저지르면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을 속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유대 백성들은 죄를 저지르고 속죄제물을 드리고를 반복하였습니다. 속죄제물의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어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부활은 무엇을 성취하였는가?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여러 번에 걸쳐서 목격하였기 때문에 사실입니다. 부활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고 우리는 나중 열매입니다.

이 이야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와 영광의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생명의 길로도 갈 수 있고 멸망의 길로도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생명과 멸망의 갈림길입니다. 분기점입니다. 분기점에서 길을 잘 들어야지 잘못 들어섰다가는 낭패를 당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멸망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거부합니다. 메시야가 어떻게 죽을 수 있느냐 며 비아냥거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옥으로 던져집니다. 지옥은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살아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계20:10) 이것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거부하면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입니다. 메시야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믿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습니다.(요21:3-4) 여러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오렌지를 먹을 때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먹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지식으로 아는 껍데기 교인이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알맹이 교인이 돼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부활하셨다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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