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3:14 그리스도를 향해

지금 울진 왕피천에서는 연어들이 한참 회귀하고 있다고 합니다. 연어는 치어(새끼 물고기)일 때 방류하는데 3년 만에 짝짓기를 위해 북태평양에서 고향인 울진 왕피천으로 거슬러 올라옵니다. 보통 방류량의 5% 정도가 돌아온다고 하네요.(2011년 11월 17일 KBS 9시 뉴스) 연어도 고향이 있듯이 우리도 고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포항이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1장 16절을 통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곳은 천국입니다. 우리는 천국시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만 여기는 타향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언젠가는 돌아가고 싶어 하듯이 우리도 천국을 사모하며 언젠가는 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돌아가려면 나그네가 고향을 그리워 하듯이 천국을 그리워하고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신약성경에는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전치사가 8개 있는데 오늘은 여섯 번째 전치사로 ‘Unto[ʌ́ntu] Christ’ 그리스도에게로, 그리스도를 향해 를 다루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하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돈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빌립보서 3장 12절을 통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는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라톤 선수가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듯이, 사냥개가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듯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까지 달려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가장 고상한 지식이고 세상 지식은 배설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빌3:8) 바울은 예수님을 푯대(목표)로 삼고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갈 때 마라톤 선수는 우승해야 월계관을 받지만 우리는 완주하면 면류관을 받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승하지 않아도 완주하면 되니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달려가야 하는데 성경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확신을 갖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롬10:17) 나이 어린 예성이도 찬양을 자꾸 들으니까 따라 부르듯이 우리도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믿게 됩니다.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그리스도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그리스도를 향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하려면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델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전에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대통령이라고 대답했는데 요즘은 연예인이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연예인이 되기 위해 좋아하는 연예인의 말투와 몸짓을 흉내 냅니다. 우리의 모델은 연예인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빌립보서 3장 17절을 통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받는 것’은 닮는 것과 따르는 것을 포함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닮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바울을 닮으면 그리스도를 닮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절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 말씀했습니다. 바울 당시의 어떤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원수로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거짓 교사들은 멸망당한다고 다시 말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빌3:19) 우리도 이단 교주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이단은 교주를 구세주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결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이단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더라도, 자꾸 전단지를 붙이더라도 상종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단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한 바울을 닮음으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면 그리스도를 향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하려면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손님은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십니다.(행1:11)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손님은 새 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빌립보서 3장 21절을 통해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시민권은 요즘 미국 시민권보다 대단했습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 테러를 당할 수 있지만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 법으로 보호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보다 천국 시민권이 대단하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로마 시민권도, 미국 시민권도 없지만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엄마들은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원정 출산을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천국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미국 시민권은 돈을 들여야 얻지만 천국 시민권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우리를 천국 시민으로 만들어 주신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세상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그리스도로 향하기 됩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밀라노 대성당에는 세 개의 아치형 문이 있습니다. 첫째 문은 장미꽃이 새겨져 있는데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 하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둘째 문은 십자가가 새겨졌는데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생은 고통도 잠깐이고 즐거움도 잠깐이기 때문에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됩니다. 짐승도 죽을 때는 고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고 합니다. 짐승도 고향을 그리워하는데 우리도 본향을 사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타향에 살지만 고향지역 프로야구팀을 응원하잖습니까? 우리의 본향은 천국입니다. 천국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천국을 사모하며 우리의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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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3:17-18 감사 또 감사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자 우리교회 이전1주년 감사주일입니다. 우리교회는 지난 16년간 남의 상가에서 지냈는데 하나님께서 드디어 땅과 건물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을 통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 다시 말해 감옥에 갇히더라도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것을 비틀어 “항상 낙심하라. 쉬지 말고 원망하라. 범사에 불평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사탄의 뜻이니라.” 고 말합니다. 마귀는 범사에 불평하라. 다시 말해 32평 아파트에 살고 YF 소나타를 타더라도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라고 말합니다. 불평은 마귀가 주는 속삭임입니다. 우리가 불평을 일삼으면 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혈압과 심장박동수가 높아져 뇌혈관 질환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감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면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소화효소가 분비되고 에너지가 생성됩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당연히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를 하더라도 수준 있는 감사를 해야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If 의 감사입니다. 만약 ~ 한다면 감사하겠다. 만약 로또 복권에 당첨된다면 건축 헌금을 하겠다. 이런 감사는 가정적인 감사입니다. 기적이 생기지 않으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가정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1장 1절을 통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겁니다. 미래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확신하는 겁니다. 우리가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가정하지 마시고 믿으십시오./ 두 번째 단계는 Because 의 감사입니다. ~ 때문에 감사하겠다. 내가 장로기 때문에 교인들 이목도 있으니 봉사하겠다. 이런 감사는 조건적인 감사입니다. 이유가 있어야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건적인 감사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장자를 살려주셨기 때문에 감사했고, 애굽(이집트)에서 해방시켜주셨기 때문에 감사했고, 홍해를 건너게 해주셨기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조건적인 감사는 감사할 조건이 없어지면 불평으로 바뀝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사막)를 지나면서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질렸다고 불평했고,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불평을 일삼은 사람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조건적으로 감사하지만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5장 8절을 통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인데도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할 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무조건 감사해야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In spite of 의 감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겠다. 비록 병이 낫지 않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니 감사하겠다. 이런 감사는 신앙적인 감사입니다. 상황을 초월하는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가 하박국서에 나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고 말씀했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는 무화과가 열립니다. 지구온난화로 중부지방에서도 한라봉이 재배된다는데 전라남도 해남에 가보니 무화과가 많더라고요. 포도나무에서는 포도가 열려 이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감람나무에서는 올리브기름이 생산되어 빵을 구울 때 사용하였습니다. 밭에서는 보리와 밀을 생산해 가루로 만들어 빵을 만들어 먹었고, 양과 소는 사람이 먹는 식용으로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물로도, 사람이 입는 의복과 이동식 집인 천막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의식주가 없더라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겠다는 고백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우리 시대에 맞게 바꾸어 보았습니다. “비록 월급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고, 요금을 미납해 휴대폰이 사용정지 되었고, 아파트 관리비를 못내 관리사무소를 피해서 다니고, 카드사에서 신용불량자로 만들겠다고 협박전화를 하고, 날은 쌀쌀해졌지만 변변한 아웃도어도 없고, 저녁 지을 쌀이 떨어졌을 지라도 교회 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믿은 것을 기뻐하겠다.” 는 고백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있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겁니다. 다니엘도 신앙적인 감사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서 3장 18절을 통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벨론의 대신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제거하려고 느부갓네살 왕에게 금 신상을 만들어 악기 소리가 나거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습니다. 절하지 않으면 포스코의 용광로처럼 뜨거운 풀무 불속에 던져 넣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이 풀무 불속에서도 건져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 풀무 불속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다니엘의 세 친구를 구해주셨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들어주지 않아도 들어주실 줄을 믿고 감사하는 겁니다.

이렇게 감사한 사람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랍비 아키바가 먼 길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아키바는 책을 읽기 위한 등잔과 시간을 알리는 수탉과 먼 길을 가기 위한 나귀와 유대교 경전인 토라를 챙겨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키바가 어느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아키바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아키바는 ‘모든 것을 좋게 하시는 하나님이 더 유익하게 하실 거야.’ 라고 감사했습니다. 아키바는 마을 모퉁이에 천막을 치고 잠을 청했는데 잠이 오지 않아 토라를 읽으려고 불을 켰습니다. 그때 바람이 불어와 등불을 껐습니다. 아키바는 ‘하나님이 더 유익하게 하실 거야.’ 라고 감사했습니다. 아키바는 다시 잠을 청했는데 사나운 짐승 소리가 나더니 나귀와 수탉이 놀라서 달아났습니다. 이 정도 되면 누구나 불평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키바는 토라밖에 남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더 유익하게 하실 거야.’ 라고 감사했습니다. 다음 날 아키바가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전날 밤에 도적떼가 마을을 습격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만약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면, 나귀와 수탉이 울부짖었다면 아키바도 도적떼에 발견돼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감사하는 랍비 아키바를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나병 환자들을 만났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의사가 아니라 제사장이 나병에 걸렸다고 진단하고 나병이 나았다고 선언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다가 나병이 나았습니다. 그 중 유대인 아홉 명은 제사장에게 달려갔지만 사마리아인 한 명은 예수님에게 돌아와 발아래 엎드리고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아홉 명은 나병만 고쳤지만 감사한 한 명은 나병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구원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감사하면 하나님은 또 감사할 일을 주십니다. 감사는 수지맞는 장사입니다. 우리는 If 의 감사를 넘어 Because 의 감사로 Because 의 감사를 넘어 In spite of 의 감사까지 나가야 합니다. 우리 감사하고 또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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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3:1-4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나라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기는 하기 싫어도 다른 사람이 하자고 하니 덩달아서 하게 된다는 속담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천 집사님은 박 권사님을 따라 교회를 다니고 있고, 서 집사님은 김 집사님을 따라 교회를 다니고 있고, 권 집사님은 이 집사님을 따라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세 분은 친구를 잘 따라왔습니다. 우리 속담에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했는데 성경에는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전치사가 8개 있는데 오늘은 다섯 번째 전치사로 ‘With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를 다루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2장 20절을 통해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에 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초등학문 다시 말해 세상적인 가치관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으면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은 무엇일까요? 골로새서 3장 5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여기서 나오는 5가지 죄목은 성과 관련된 죄목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은 성적인 죄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은 골로새서 3장 8절에도 나옵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여기서 나오는 5가지 죄목은 분노와 관련된 죄목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은 성과 관련된 죄 뿐만 아니라 분노와 관련된 죄입니다. 내적치유 전문가인 김종주 장로님에 따르면 성 에너지와 분노 에너지가 가장 강력한 에너지라고 말합니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일으킵니다. 성경을 2만 번이나 읽었다는 어떤 분은 수련회 때 부인이 손수건을 달라고 하자 화가 나서 아내의 뺨을 때렸다고 합니다. 상처를 해결하지 않으면 별일이 아닌데도 갑작스럽게 화를 냅니다. 뿐만 아니라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성에 탐닉한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여자를 보면 성욕이 너무 생겨 40일 금식기도를 했는데 금식을 할 동안에는 성욕이 사라졌는데 금식을 끝내고 섭식을 하자 다시 성욕이 생겼다고 합니다. 상처는 풍선을 불어 물속에 넣는 것과 같아서 힘으로 세게 누르면 물속으로 들어가지만 힘을 빼면 튀어나오듯이 억압하면 잠복해 있다가 방심하면 두더지처럼 튀어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면 상처는 치유됩니다. 초대교회는 강에 가서 침례식을 거행했는데 세례자가 물에 잠기면 죽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적인 가치관을 죽여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인 가치관을 죽이면 신앙적인 가치관이 살아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3장 1절을 통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은 땅의 것을 찾지 말고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신앙적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적인 가치관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여기에 나오는 5가지 덕목은 관계와 관련된 덕목입니다. 상처를 치료받고 나면 관계가 원만해 집니다. 국제정신분석가인 이무석 박사님에 따르면 정신치료를 받고 나면 나를 의식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몸이 가벼워진다고 합니다. 마음이 치료되면 몸도 치료됩니다. 너그러워진다고 합니다.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일을 즐기게 된다고 합니다. 일에 집착하지 않고 즐겁게 일합니다. 인간관계가 편해진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고 편안하게 대합니다. 그리고 휴식도 취한다고 합니다. 가속기만 밟지 않고 브레이크도 밟을 줄 압니다. 하나님은 육일 동안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우리도 거북이처럼 쉬지 않고 달리지만 말고 토끼처럼 낮잠을 잘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례자가 물 밖으로 나오면 살듯이 하나님은 우리는 신앙적인 가치관은 살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적인 가치관을 가지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시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3장 1절 하반 절을 통해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우편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앉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우리도 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2장 6절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신앙적인 가치관을 가지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3장 4절을 통해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씨를 심으면 얼마 후에 싹이 트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셨다가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는 마구간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셨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구름을 타고 영광에 휩싸여 화려하게 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을 죽이고 신앙적인 가치관을 살리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을 만나 영광스럽게 변한다고 말씀합니다.

한국교회사를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청년 시절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평양 시민들은 시장에 갈 때마다 ‘오늘은 제발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빌 정도였습니다. 그런 김익두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 김익두는 ‘김익두가 죽었다.’ 고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사람들은 좋아했습니다. 얼마 후 김익두가 검은 책을 옆에 끼고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되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장난기가 발동해 물통의 물을 김익두 목사님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옷을 툭툭 털며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았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김익두가 깡패였다면 그 사람은 맞아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김익두가 목사님이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온갖 죄를 저질렀습니다. 혈기도 부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하나님으로 향해야 합니다. 혈기를 다스려야 합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악 된 본성은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의로운 본성이 살아났습니다. 비록 화가 나더라도 ‘내가 예수님 때문에 참는다.’ 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 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은 죽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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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5:5 그리스도 안에

저는 울진에서 목회하면서 자녀들이 태어날 때마다 과실수를 심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단감나무를, 에스라는 포도나무를, 디모데는 앵두나무를 심었습니다. 봄에는 새빨간 앵두가 촘촘히 달렸습니다. 앵두를 생각하니 입에서 신맛이 도네요. 여름에는 진보랏빛 포도가 탐스럽게 열렸습니다. 탱글탱글한 포도는 머루 맛처럼 진했습니다. 가을에는 황금색 단감이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단감은 아삭아삭 씹을 때마다 단맛이 일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뉴스에서 어떤 사람이 과수원 주인과 다투고 나서 전기톱으로 포도나무를 잘랐다고 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포도나무 줄기를 잘랐으니 그 포도가 달릴까요? 달리지 않겠죠. 줄기가 잘렸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을 통해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안에 달려 있으면 포도나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포도열매를 맺지만 가지가 포도나무 밖에 잘려져 있으면 죽게 됩니다. 포도나무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전치사가 8개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전치사로 ‘In[ín]’ ‘… 안에’ 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 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In’ 을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와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 있느냐 ‘In Christ’ 밖에 있느냐 ‘Out Christ’ 에 따라 사느냐 죽느냐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다시 말해 예수님과 연결돼 있으면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1장 4-5절을 통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밖에 있으면 마귀의 종이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까? ‘In Christ’ 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긴 자녀인데 하나님의 양자입니다.(롬8:15) 하나님의 친자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입니다. 우리나라는 혈통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친자와 양자를 차별하지만 성경시대에는 친자와 양자를 똑같이 취급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으니 마귀의 종일 때 가졌던 나쁜 습관들은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에 걸 맞는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다시 말해 예수님과 연결돼 있으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6장 11절을 통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세례식을 강에 가서 침례식으로 거행했습니다. 세례자가 침례를 받기 위해 물속으로 잠길 때 물에 빠지면 사람이 죽듯이 그 사람의 죄는 사라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물 밖으로 나오면 사람이 살듯이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결돼 있으면 죄는 사라지고 의롭다고 인정됩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생명이냐 죽음이냐를 가르는 분기점입니다. 대구에서 포항으로 오다보면 도동분기점이 있습니다. 도동분기점에서 우회전하면 포항으로 오고 직진하면 부산으로 갑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까? ‘In Christ’ 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영생을 얻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죽이려고 왔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습니다.(요10:10)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밖으로 나가면 죽어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다시 말해 예수님과 연결돼 있으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통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결돼 있으면 인종도, 신분도, 성별도 문제되지 않고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나이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고향도 다르지만 예수님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창대교회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피를 물려받아 한 형제와 한 자매가 되었듯이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피로 한 형제와 한 자매가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까? ‘In Christ’ 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창대교회 교인이 되었습니다. 창대교인들은 예수님의 피로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으니 서로의 허물을 보지 말고 서로의 장점을 보아야 합니다. 단점을 보면 비난하게 되고 비난하다보면 사이가 나빠집니다. 그러나 장점을 보면 칭찬하게 되고 칭찬하다보면 사이가 좋아집니다. 우리 서로의 장점을 보고 칭찬해 줍시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창대교회 교인이 됩니다. 제가 울진에서 목회할 때 수요일 저녁 예배시간에 교인들을 태우려고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나무가 태풍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군가 차 한 대가 지날 수 있도록 나무를 잘라놨더라고요. 저렇게 작은 나무도 끄떡없는데 저렇게 큰 나무는 왜 쓰러졌을까 궁금했습니다. 다음 날 찾아가 봤더니 쓰러진 나무의 뿌리가 짧더라고요. 나무가 크기가 자라면서 뿌리도 깊게 내려야 하는데 키는 컸지만 뿌리는 짧았습니다. 저는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바람이 불 때 넘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그 나무처럼 땅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다시 말해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면 시험이 찾아올 때 여지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합니다. 여러분 모두 ‘In Christ’ 예수님 안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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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20 그리스도 위에

성경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말씀하고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과 우리(교인)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전치사가 8개 있습니다. 이 전치사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 전치사로 ‘On[ɑ́n]’ ‘… 위에’ 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On Christ’ 그리스도 위에 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On’ 을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기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았으니 예수님 위에 신앙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2장 20절을 통해 예수님은 신앙의 모퉁이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터 다시 말해 기초입니다.(고전3:11) 우리는 그 위에 신앙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집을 지을 때는 기초가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경우 기초를 900mm 정도로 파야 콘크리트가 얼지 않는다고 합니다. 벽은 300mm는 돼야 단열이 된다고 합니다. 창문은 이중창으로 하고 밖과 안 창문의 간격은 100mm가 돼야 따뜻하다고 합니다. 지붕은 A자형으로 하면 비가와도 배수가 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장 속에는 100mm 스티로폼을 넣어야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고 합니다. 저는 집을 짓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신앙의 집을 지어야 할지를 말씀하려고 합니다.

먼저 집을 지을 때 기초를 900mm 정도로 파야 콘크리트가 얼지 않습니다. 기초를 깊이 파면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이고 기초가 약하면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반석위에 지은 집과 모래위에 지은 집은 평소에는 모르지만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드러납니다. 반석위에 집을 지으면 태풍이 와도 끄떡없지만 모래위에 집을 지으면 속절없이 무너집니다.(마7:24-27) 우리가 집을 튼튼하게 지으려면 기초를 900mm 정도 파야 하듯이 신앙의 집을 지으려면 예수님을 믿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교인과 구원받지 못한 교인은 평소에는 모르지만 시험이 찾아오면 가려집니다. 구원받은 교인은 시험이 찾아 올 때 잠시 흔들리지만 이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교인은 시험이 찾아 올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듯이 성수대교가 내려앉듯이 그대로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교회는 글 없는 책을 가지고 구원상담을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심어줍니다. 구원의 확신은 신앙의 기초공사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교인은 제가 구원상담하자고 요구하기 전에 저에게 구원상담을 해 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집을 지을 때 벽의 두께는 벽돌과 콘크리트와 스티로폼을 합해서 300mm가 돼야 보온이 되고 단열이 된다고 합니다. 벽 두께가 얇으면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습니다. 우리가 집을 튼튼하게 지으려면 벽 두께가 300mm가 돼야 하듯이 우리가 신앙의 집을 지으려면 일주일에 3번은 예배 드려야 합니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5번 기도하는데 우리가 일주일에 3번 예배드린다고 많이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에 참석하여 복음을 듣고 수요일에 참석하여 말씀을 배우고 금요일에 참석하여 기도를 해야 신앙이 유지됩니다. 바닷물은 소금 농도가 3%입니다. 3%의 소금이 바닷물을 짜게 합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인데 3%는 5시간입니다. 5시간을 예배드리려면 일주일 3번은 참석해야 합니다. 3번의 예배 참석이 신앙을 유지해줍니다. 예배를 적게 참석하면 신앙의 간이 들지 않아 싱거워집니다. 소금을 치려면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올해 1월에 포항에도 눈이 많이 내렸는데 같은 포항이라도 동해면 비닐하우스는 주저앉았지만 죽장면 상옥리의 비닐하우스는 끄떡없었다고 합니다. 죽장면의 비늘하우스는 굵은 파이프도 썼지만 파이프의 간격을 기존의 60cm 에서 50cm 로 촘촘하게 설치하고 파이프를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고정했다고 합니다. 파이프의 간격을 좁히니 비닐하우스가 무너지지 않았듯이 교회를 자주 드나들다보면 신앙도 튼튼해집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 달에 한 번 예배 참석했다면 두 번 이상 참석하고 두 번 이상 참석했다면 네 번 이상 참석하고 이렇게 파이프를 촘촘하게 하듯이 하나님께 얼굴 도장을 자주 찍으면 신앙이 튼튼해집니다.

집을 지을 때 창문은 이중창으로 해야 따뜻합니다. 밖 창문과 안 창문의 간격이 있어야 방안이 따뜻해진다고 합니다. 우리가 겨울에 옷을 입을 때 두꺼운 옷을 한 벌 입는 것보다 얇은 옷을 여러 겹 입는 게 따뜻하잖습니까? 공간이 있으면 열기가 보존되고 추위는 차단합니다. 우리가 집을 튼튼하게 지으려면 이중창으로 해야 따뜻하듯이 우리가 신앙의 집을 지으려면 구약과 신약이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 돼야 합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오는데 구약은 짐승의 피가 나오고 신약은 예수님의 피가 나옵니다. 교부 어거스틴은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 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짐승의 피는 신약 안에서 드러납니다. 구약과 신약은 상호보완관계입니다. 우리가 단창으로 시공하면 집이 춥듯이 우리가 구약이나 신약만 선호한다면 복음이 불완전해 집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짜인 옷감과 같습니다. 한 올이 풀리면 옷 전체가 풀립니다. 자녀를 편애하면 안 되듯이 구약과 신약을 골고루 사랑하십시오.

집을 지을 때 지붕을 A자형으로 해야 배수가 잘 됩니다. 일자형 지붕은 방수를 잘 해야지 잘못하면 누수가 됩니다. A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양은 위로 향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하늘 곧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A자는 좌우를 지탱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표현은 이웃 곧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집을 튼튼하게 지으려면 A자형 지붕으로 시공해야 하듯이 우리가 신앙의 집을 지으려면 하나님과 이웃을 골고루 사랑해야 합니다. 십계명도 하나님에 관한 계명과 사람에 관한 계명을 다루고 있고, 주기도문도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사람에 대한 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신앙은 하나님과 이웃이 절묘하게 조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수도원 생활과 이웃을 돕는 무료 급식이 합해져야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십자가 신앙이 됩니다.

집을 지을 때 천장 속에 100mm 스티로폼을 넣어야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합니다. 천장 속은 보이지 않지만 몇 미리짜리 스티로폼을 넣었느냐에 따라 더워지고 추워지고 가 결정됩니다. 100mm는 10cm입니다. 우리가 집을 튼튼하게 지으려면 지붕 속에 10cm 스티로폼을 넣어야 하듯이 우리가 신앙의 집을 지으려면 소득의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는 약속이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라기서 3장 10-12절을 통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토지에 메뚜기를 금하여 소산을 먹지 못하게 하고 밭의 포도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땅이 아름다워져서 다른 사람들이 복되다고 칭찬할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쓸데없는 곳으로 새지 않고 물질이 쌓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 900mm를 파듯이 신앙의 집을 지을 때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벽을 300mm로 하듯이 일주일에 세 번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창문을 이중창으로 하듯이 구약과 신약이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 돼야 합니다. 우리가 지붕을 A자형으로 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천장 속에 100mm 스티로폼을 넣듯이 십일조 생활을 해야 물질이 새지 않고 쌓입니다. 우리가 집을 튼튼하게 지어야 하듯이 신앙의 집도 튼튼하게 지어야 합니다. 우리 반석위에 지은 집처럼 비가 오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집을 집시다. 죽장면 비닐하우스처럼 눈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집을 집시다. 예수님을 기초로 튼튼하게 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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