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10초 안에 살인자가 될 수 있다 - 착한 사람을 괴물로 뒤바꾸고, 평범한 일상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인간 심리의 비밀
폴 발렌트 지음, 허수연 옮김 / 생각연구소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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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 폴 발렌트는 정신과 의사다. 또한 홀로코스트 어린이 생존자이기도 하다. 트라우마를 치료하기도, 자기 자신이 트라우마의 피해자이기도 한 대극의 면을 다 지니고 있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런 그의 입을 통해 듣는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경계선이 느껴지는 의사가 말하는 트라우마가 아니라 트라우마를 앓아 본 사람 극복한 사람 그러면서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사람이 하는 말로 받아들여지기에 다른 트라우마 저작의 저자들의 말 보다는 더 피부 깊숙히 다가오는 듯 했다.


1. 챕터 1은 과거의 트라우마가 잠재해 있다가 언제 어느 때 어떤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불러올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다. 트라우마란 것이 얼마나 인간의 생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타격인지를 알 수 있었다.


챕터 2는 집단 재해의 상황에서 인간이 보이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같은 감정 등이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일어날 수 있는 합리적인 증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나 자신이 피해를 덜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심리까지 다양한 심정들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인간의 윤리적 의지적 취약성을 보여 주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심정이 전파되는 과정 중 변이할 수 있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리고 챕터 3의 경우 인간은 사랑 받지 못할 거라는 심정과 사랑 받는다는 감정의 선상에서 얼마나 극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가를 느꼈다. 최근 [심리학자는 왜 차크라를 공부할까]를 읽었는데 활성화된 차크라의 범주에 따라 심리적 영향력이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챕터3는 그에 해당되는 이야기 같았다.


2. 챕터 4,5,6은 모두 유아기와 어린시절의 트라우마가 그러니까 가족이라는 사람들의 학대와 악대어린 행위들이 한 사람의 일생을 얼마나 압도하고 파괴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 예로 나온 사례들도 인상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은 사례들일지는 몰라도 이런 사례들만으로 인간은 총제적으로 파괴될 수 있는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챕터6의 루시의 사례처럼 유년시절에 성적 학대를 겪는 경우는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을만큼의 특수한 상황이겠으나 챕터4,5의 샤론이나 프랭크의 경우는 그 보다는 나은 사례일 것임에도 어린시절 부터 그들의 정신의 한부분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일상을 파탄내고 말았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유년시절과 어린시절 청소년기 청년시절을 돌아보았다. 단계적으로 총체적으로 내 정신을 낭자하고 몇 동강을 낼 정도로 생의 고난만을 경험했지 않았나? 나는 그 시절들을 거치며 원래 망가져 버릴 정신적 상황으로 떠밀려 온 것이란 걸 알았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안배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탓해야 할 문제겠지만 감당과 해결은 내 몫이란 걸 안다. 유년시절과 어린시절 삶의 고난과 짐 부터 감당해야 했고 학대와 방치와 굶주림 말고는 경험했다 할만 것도 없다. 기껏해야 강릉에 살 때 겨울에 포대자루를 타고 비탈길에서 놀던 몇 시간의 하루가 어린시절의 한가한 한 때이자 그 시절에 위안삼을 수 있는 유일한 기억이다. 


이런 황폐한 심정만을 갖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지 않는 사회를 구성해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강력 범죄 예방책이자 자살 예방책이란 걸 정부는 알아야만 한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모든 아이들에게 상처없는 유년시절과 어린시절을 만들어 주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것을 정부의 기능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부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국민 자신이 행복할 일은 국민 각자가 선택하겠지만 무엇이 행복한건지도 느낄 수 없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방치하며 그것은 정부 역할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나는데는 정부의 역할이 가장 크다부모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갖은 인물로 자라지 않았을 때에 한정되므로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의 정부는 갈 길이 멀었다. 트라우마 문제에 대한 이해가 있는 위정자가 절실하다.


3. 챕터7은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추행과 강간을 당한 여자변호사의 사례다. 여기서 영어 원제가 왜 [In Two Minds] 인지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두가지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이 삶에서 지니게 되었던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그렇게 유년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삶을 연기하듯이 그렇게 살았었다. 하지만 내 마음의 다른 영역은 무너지고 부서지고 파괴되고 붕괴되고 훼손되어 황폐한 그대로 아니 나날이 더 황폐해져만 갔다. 세월을 오래 겪으면서도 와해되는 과정은 더해져만 갔지 완화되지 않았다. 전쟁 시의 난리를 겪거나 전쟁에 강제 동원되었더라도 유년시절부터 줄곧 이어져온 고통들을 감당했을 때 보다 폐해가 더 크지는 않을 것만 같았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난 이 조용한 나라 안에서 나만의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챕터8은 홀로코스트 어린이 생존자 모임에 저자가 의사 자격이 아닌 피해자로서 참가하며 다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상을 인정하고 어떤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세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두가 자신의 이상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각한다는 것 인정한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유년시절의 고통에 대해 어른이 되어서 어른다운 대응을 하려고 할 수있다. 다들 문제는 하나씩 안고 살아가는 거라며 자신의 이상은 남의 일 보다 못하게 무시하고 넘기려 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은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아니 간과하는 그것이 잠재해 있다가 챕터1의 파파도풀로스의 경우처럼 심각하면 살인과 같은 범죄를 불러와 타인과 자신 모두를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챕터9는 이제까지 환자들을 치료하고 상담하던 닥터 폴 발렌트가 자신의 홀로코스트 시절을 이야기하며 그 속에 담긴 아픔과 성찰을 깨닫는 내용이다. 누군가가 인식해 준다는 것이 누군가의 연민과 눈길이 주어진다는 것이 자각할 수도 없이 뿌리 깊은 아픔을 어떻게 인식하고 치유케 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어른들은 또 그외의 어른들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이제는 안전하다" 고 어른이 된 자신의 자녀나 친지, 청자인 누구나에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두개의 마음이 되어 하나의 마음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윤택하게 살아가고 있는 양 보일 수는 있지만 다른 마음은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죽어가고 있는 마음은 적절한 처방이 없다면 자신의 다른 한 마음도 죽일 수 있고 그러한 죽음은 다른 이 또는 다른 이들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게 아픔은 숨기지 않는 것이 좋다. 누군가에게는 털어놓아야 한다. 자신이든 누구에게든 인식되어야 한다. 그것이 상처가 흉터가 되는 길이다. 마음에 흉터는 분명 남겠지만 상처가 지속되며 아픔을 이어가지 않게 하려면 자각하고 마주 볼수 있어야 한다. 초판 1쇄 본으로 읽다보니 탈자도 있고 따옴표를 잘못 이어간 부분도 있었지만 내용만은 이제까지 읽은 어느 트라우마서에도 뒤지지 않았다. 트라우마에 대한 정신생리학적인 원인이나 다양한 치료법이 제시되거나 하지는 않지만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또 나를 조금 더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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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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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내 유년기부터 어린이 시절을 온통 지배했던 심정들이 나치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느꼈던 심정과 일치한다는 것을... 그 시절들에 겪었던 고통과 괴로움들은 트라우마가 되어 청소년기의 정신적 고통을 더욱 배가했고, 청년기에는 그런 트라우마가 나에겐 없는 듯 일상을 연기했지만 미쳐버리기까지 나를 압도했다. 


돌아보면 일생에 있어서야 기한을 정할 수 있는 나날이었을 테지만 (강제 수용소에서의 삶을 '일시적인 삶'이라 정의한 사람들에게 빅터 프랭클이 그건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이라고 했듯) 나에게는 언제 끝날지도 모를 나날들이었다. 하루하루가 천년 같은 나날이었다. 언제 이 고통이 끝날지 짐작도 기대도 할 수 없는 나날... 그러다 1년에 하루 이틀 잠시 그 고통스러운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날에는 (사이가 있는 지옥 속에서 나에 잠시 온 이 사이가...) 이것이 꿈인지 실제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인증을 겪었다. 나는 그 시절들에서 벗어난 시기 이후 모든 걸 떠올리지 않으려 했고 기억을 억압하려 했지만 아버지 역할을 하던 그를 볼 때마다 한없는 허기와 분노가 일었다. 


그 시절은 지났다는 걸 깨닫고 대중을 위해 살아가고 대중의 인정을 받는 미래를 그리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려던 즈음 17살에 나는 알지 않았더라면 더 좋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는 난 인생은 끝났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누군가를 구해내고자 했으나 그럴 수 없었고 그 현실과 함께 내 미래는 끝짱난 거라, 난 모든 것을 잃은 거라 패배감에 절어버렸다. 그 이후의 생은 그저 흘러가는 데로 내면의 고통이 날 불사르는 것을 막으려 만취한 채 보내버렸다. 체념한 것이다. 인생을 포기한 것이다. 그 당시 나를 짓누르던 압박감과 절망감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17살에 모든 것을 잃은 채 살아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심정 속으로 던져졌고, 그때 나의 유년시절부터 어린 시절의 고통과 괴로움의 시절들의 기억들이 나의 붕괴를 더욱 사납게 몰아쳤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 가지 방식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두 번째는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세 번째는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두 번째의 경우를 두고 빅터 프랭클은 사랑의 경험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식이라고 했다. 로고테라피라고 하는 정의대로 라면 사랑으로 치유된다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경험으로 안다. 진정 사랑하는 대상이 나타나 주었을 때도 그런 고통스러운 트라우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자신의 고통의 늪 속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것을... 


그런 때는 사랑으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 방식을 권한다. 삶을 그냥 아직 끝나지 않은 시련의 과정으로 인정하고 그 시련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낫다. 나의 경우는 그랬던 것 같다. 그 오랜 나날을 거치고 이제서야 트라우마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은데 이런 상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삶에 대한 나의 태도의 변화에 있었다. 사랑을 하더라도 이렇게 트라우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야 정상적인 태도로 사랑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 고통은 사랑 속에서도 또 다른 고통을 잉태한다. 


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애쓰지도 않았다. 그런 날들도 과거에는 있었지만 그러한 무리한 노력이라고 트라우마를 감소케 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는 그저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하려 했던 것이, 그렇게 규칙적인 매일이 흘러가며 "이제는 무던한 일상이지 더이상은 나는 고통 속에 있지 않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 트라우마를 벗어나도록 해준 것 같다. 아니 애초에 나는 천애고아였고 고통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트라우마를 치유해가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과거 어느 시점에 내가 나를 망쳐버린 현실도 더는 수치와 괴로움 속으로만 나를 몰아넣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정서를 놓치고 싶지 않다.


특별한 조우나 계기가 있지 않더라도 일상이 더이상 나를 고통 속으로 괴로움 속으로 밀어 넣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트라우마 치료에는 이상적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과정과 함께(에서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삶 속에서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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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 조현병을 이겨낸 심리학자가 전하는 삶의 찬가
아른힐 레우벵 지음, 손희주 옮김 / 생각정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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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페이지는 비어 있지 않다. 네모는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아무 것도 망가뜨리지 않는다 . 이것은 전체의 일부며, 내 인생의 일부다. 긴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해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색깔을 전부 사용했다. / p260 


아른힐 레우뱅, 평범한 소녀 아니 조금 많이 섬세한 소녀에서 조현병 환자로 긴 시간을 보낸 그녀는 끝내 조현병 와중에도 중단했던 학업을 이어 대학입시를 보고 심리학을 전공하고 임상심리학자이자 연구가가 되었다. 이 모든 이야기의 끝에 그녀가 한 말은 바로 위에 담긴 말이다.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이 길지 않은 이야기 속에 그녀는 많은 의미와 정서를 담고 있다. 시작은 공허함과 고독이었을 것이나 이후 그녀는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리고 자신을 압도하는 광기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이야기가 어지러움 속에서도 서정적이기도 분투의 흔적 같기도 성숙을 그린 성장소설 같기도 한 것일 거다.


현실적인 계획에는 희망이 필요 없다. 그것은 현실주의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까맣고, 가망이 없어 보일 때는 희망이 필요하다. / p247


그녀는 조현병 이후 고독과 혼란, 광기와 자존감, 자기연민과 자기 확신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대학에가 심리학을 전공하고 심리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도 노르웨이에서는 복지정책의 하나인지 재사회화 과정의 하나인지 조현병 환자에게도 미래를 계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고 해당 공무원의 도움으로 그녀는 혼란과 광기가 언제든 압도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 더디게라도 한걸음씩 내딛을 수 있었다. 그러게 마지막에 '긴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해냈다'라고 말했던 것이리라.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조력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항상 안 될 것에만 집중했다. / p198


그녀가 가슴 속에 숨겨둔 꿈을 다시 돌아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의 자존감을 해치지 않으면서 그녀에게 다가서준 조력자가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것은 결국 본인 자신이지만 그 곁에서 이해해주는 사람 하나 없다면 조용히 손길을 건네는 사람이 없다면 누구나 상황을 바꾸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런 도움이 있다해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니 말이다.


다른 삶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이 꼭 매달릴 수 있는 꿈, 그리고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목표가 큰 차이를 가져온다. 이때 통계와 확률은 의미를 잃는다. / p126


그녀는 조현병으로 심각한 자해와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건 조현병 환자가 보기에도 그녀의 상태가 심각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녀는 자존감과 자기통제권에 대한 인식을 깊이 갈무리하고 있다. 쉽게 자신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남들이 제어한다고 해서 체념하지도 않았다. 


실명과 시각장애를 분류하는 10% 이하를 보느냐 그 이상을 보느냐는 단순한 판별기준으로 당사자의 대응방식이 달라진다는 사례를 그녀는 이야기했다. 그 사례가 주는 교훈처럼 그녀는 자신을 판단하는 의사나 다른 이들의 결정에 좌우되지만은 않았다. 스스로 통제권을 타인에게 넘기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기대가 싹을 틔우기도 전에 죽이고는, 비현실적이고 낮은 기대감을 깨움으로써 우리 인간이 평소라면 충분히 해낼 성과조차 올리지 못하게 하는, 심지어 그들의 진단명과 병의 증상에서 기대되는 것 보다도 훨씬 적은 것을 이루게 하는 무비판적인 대응 방식이다. / p124


그녀가 증상을 보이던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녀에게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대했지만 그녀는 거기에 무너지지 않았다. 자존감과 자기통제에 대한 필요성을 그녀는 증상을 보이던 시기, 사람들의 편견을 느끼던 시기부터 이미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늑대는 나에게 속했고, 나 외에는 늑대와 싸울 사람이 없었다.......나는 내가 느끼는 것을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웠다. / p70


그녀는 증세가 시작되고 심각해지는 중에도 자신의 분열된 정신이 야기하는 현상들을 침착하게 받아들이려 했다. 결국은 증상에 압도 당하는 순간을 거치기도 했지만 자신의 내면이 만들어낸 늑대와 선장을 상대해야 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돕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겼던 소녀다.


병원에서는 내 병이 만성적이라고 통보하여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빼앗아갔다. 그렇게 나는 그 곳에 갇혔고, 단 한 가지만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공허함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공허함이었다. / p60


그녀의 발병 초기에 의료진은 그녀의 병명을 조현병이라 이야기 하면서 이 병은 만성적인 것이라 통보했다. 그래서 그녀는 꿈과 희망을 빼앗기는 것만 같았고 공허함만을 느꼈다고 한다. 이 헛헛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리고 자신의 미래가 우주 밖으로 날아가버리는 듯한 그 심정을 겪지 않고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그녀는 고작 14살 소녀였을뿐이다. 14살에 산 채로 인생이 매장 당하는 순간의 그 감정을 심정을 난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웃고 있을 때면 고독이 내 속으로 파고들어, 삶은 쉽고 즐겁고 좋은 것이 아니라 외롭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 p25


그녀는 14살의 소녀였다. 한국에서라면 중2병을 앓고 있을 그래서 더 그녀 자신도 주변에서도 그녀의 초기 증세들에 격정적일 시기라 그런 거라 단순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그녀는... 14살의 한 소녀는 다른 이들 보다 좀더 섬세하고 연약했을뿐이었다. 그 섬세하고 연약한 소녀가 폭풍 속을 걸어서 건넜다. 그리고 그녀는 상처가 남았고 걸음 걸음 흔들린 흔적을 남기며 왔지만 결국에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 폭풍에 쓰러지고 휩쓸려 체념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소녀에서 한 명의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멀고 험한 길을 결국엔 걸어낸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결코 '삶의 찬가'처럼 들리지 않는다. 승전가로도 들리지 않는다. 되려 나는 그녀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故 종현이 작사 작곡한 이하이의 노래 <한숨>을... 


#아른힐 레우뱅의 이야기를 역순으로 되짚어 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많지만 그럼에도 더 서정적이고 더 격정적이고 정서적으로 버티기 힘든 그녀의 실제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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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 - 조현병을 이겨낸 심리학자가 전하는 삶의 찬가
아른힐 레우벵 지음, 손희주 옮김 / 생각정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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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모든 색깔을 다 사용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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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은 어떻게 삶을 움직이는가 - 불확실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확신의 놀라운 힘
울리히 슈나벨 지음, 이지윤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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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떠한 목표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신이 정한 목표가 아니라 삶이 주는 질문에 주목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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