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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특별한 기회에 움베르토 에코를 만나다
현대사회 사상가이면서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는 움베르토 에코는 24세부터 저작 활동을 시작하면서 팔십이 넘은 지금도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그에게는 다양한 수식어가 뒤따른다.글을 쓰는 소설가를 비롯하여 사상가,기호학자,철학자,역사학자,미학자가 바로 그것이다.평소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움베르토 에코는 일명 공부벌레,언어의 천재이기도 하다.내가 볼 때에는 언어의 연금술사 이상이 아닐까 한다.그의 작품은 많이 접하지는 못했다.《프라하의 묘지1,2》,《젊은 소설가의 고백》을 읽었을 정도이기에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그의 명성에 걸맞는 작품들을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향후 시간이 주어지는데로 움베르토 에코의 철학과 사상,미학과 관련한 작품도 접하려 한다.
어느 시대,어느 나라에든 '박람강기(博覽强記)'와 같은 간서치들이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다.동.서양의 역사,철학,사상,미학 등을 섭렵하고 해박한 지식을 정교하게 필터링하여 대중 및 독자들과 소통과 대화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을 접하게 되면 절로 탄식이 나온다.인간의 머리로 저렇게 해박하고 통찰력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한편 박람강기의 힘을 처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부단한 연습과 연마를 쌓아가면서 오로지 한 길을 걷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삶의 이력에 점과 선,원으로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움베르토 에코 저자는 이번 글에서 무엇을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일까.
이 글은 총 열 네 편의 글 모음집으로서 10여 년에 걸쳐 쓰여진 것이다.특정한 주제에 대해 요청 받은 담화나 칼럼이 위주가 되고 있는데,사물,사건을 일방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다양한 방식과 사고로 짜여져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저자의 말대로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이 주제가 되어야 하지만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적을 만들다>로 결정되었다고 한다.담화,칼럼,즉석 발표,강연,고찰 등은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을 애독하는 분들,인문학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들에게는 기웃거리지 않고 느긋하게 읽어 가면서 내용을 음미하고 사유를 함양해 가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적(敵)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우리의 가치 체계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그것에 맞서는 장애물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P13
나와 너,조직과 집단 간에는 생각과 감정,의식과 이데올로기와 같은 코드의 여부를 갖고 있다.이 문제는 역사적,문화적인 면에서 오랜 세월 정착하여 내면에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자연적 현상을 규명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닌 적(Enemy)으로 규정하여 악마로 여기고 있다.인간의 속성상 또는 정글의 법칙을 놓고 볼 때 이데올로기가 해체된 오늘날 적의 개념은 경제적,금전적 이해 상충관계를 놓고 규정된다고도 생각이 든다.또한 경제적 소득과 사회적 신분,소속 종교 문제를 놓고도 적이냐 아니냐를 가리고 대처해 나갈 것이다.나아가 도덕적,윤리적인 차원에서도 인습 및 의식기준에 맞춰 호의적으로 대할 것이냐,아니면 적대적으로 대할 것인가를 따질 것이다.결국 이것은 국가와 국가 간으로 비화되어 자칫 소소하게 여겨지는 문제로 크게 불거지면 외교적,군사적인 대립과 대치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 글을 읽어 가면서 크게 느끼는 것은 인류역사의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면서 통찰력과 해석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역사와 문화,신화에 대해 무지하게 되면 이 글을 읽는 데단어와 문장의 난독증으로 유익한 시간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또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이고 풍부한 어휘력이 필요하다.저자는 모국어인 이탈리어를 비롯하여 유럽각국의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면서 해당 국가의 역사,문화에 이르기까지 꿰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해박한 지식,논리적이면서 통찰력을 갖춘 그는 일종의 '걸어다니는 사전(辭典)'은 아닐런지.
철학 사전에 따르면,절대라는 말은 연결이나 경계에서 자유로운,<얽매이지 않는>모든 것을 뜻한다.즉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 이유와 근거를 가지며 설명되는 무엇이다.절대는 신와 매우 유사한 무엇이다.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 우연적이며 그 자체로 존재의 필연성,이유와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 -P42
절대와 상대라는 의미의 차이를 놓고 그는 신과 유사한 무엇이다,우연히 생긴 존재는 반드시 순환논리에 따라 죽어야 할 운명이다,(현실을 떠나) 이상주의 철학자들과 만나면 절대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난해하면서 심오하게 다가온다.나아가 진리에 대한 개념도 상반성을 띠고 있다고 한다.논술의 의미론적인 특징과 같은 것과 신성(神聖)의 특성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즉 진리는 말하는 것과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의 일치를 의미한다.예를 들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는 <내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라는 의미이고,<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것은 신성의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외 지구천체,물리학,생물학,시사문제 등의 주제와 관련하여 저자만의 담론을 밀도 높게 설파하고 있다.특히 4대 원소이면서 잊히기 쉬운 <불>에 대한 담론은 식을 줄 모를 정도로 깊이 있는 사유를 오롯이 쏟아 붓고 있다.역사,문화,예술,일상에서 불의 쓰임과 생명력,파괴력을 적나라하게 들려 주고 있다.<사순절 설교집> 가운데는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는 죽음의 광경을 지켜보게 된다.내 자신은 경악스러움과 소름이 끼치면서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감각연구.PP 124∼125)
생식력은 왕성한 정자의 힘에 있다,빅토르 위고 문학에 대한 평가(과잉의 시학!),흥미진진한 상상의 천문학,지혜와 교훈을 안겨 주는 속담 따라 살기,아일랜드 작가 조이스의 작품에 대한 저평가성 논조,역사의 장을 새롭게 펼친 위키리크스의 첩보 활동과 같은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기만 하다.이 글의 초반부보다는 중.후반부로 들어가면서 독자의 시선을 끌게 하는 이야기들이 꽤 많았다.논조 면에서 전문가는 편협적인 시각으로 흐르고 박학다식한 사람은 오류가 많을텐데 움베르토 에코 저자는 전문가인지 아니면 박람강기 그 자체인지 내가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다양한 분야를 다이제스트식이나마 새롭게 인식하고 폭을 넓힐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