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후난, 마오로드 - 신이 된 마오쩌둥 나남신서 1795
서명수 지음 / 나남출판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 현대사의 정치 거목 마오저뚱의 고향은 후난성 샤오산(韶山)이다.후난성 성도인 창사(長沙)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마오저뚱이 태어날(1895년) 당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 오지이었다고 한다.그러한 한촌(寒村)이 마오 탄생 120주년(2015년)을 맞이하여 성대한 행사를 치를 예정인데,후난성 성도인 창사를 가로지르는 창장 쥐즈저우(橘子舟) 모래톱에 조성된 마오의 두상은 (인위적인)마오 신을 숭상하는 중국인의 집단 심리가 잘 반영된 것이라 할 수가 있다.마오의 두상은 높이 32m,길이 83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중국인에겐 신중국을 창립한 국부의 상징으로 비춰지고 있는 셈이다.후난성 창사는 인천 공항에서 직항편이 있다고 하니 마오의 고거(故居) 및 주위의 풍광 이를테면 둥팅호를 비롯하여 장자졔,봉황고성,마오가 즐겨 먹었다고 하는 후난 요리(홍샤오러우 등) 등을 즐기고 음미해 보는 것도 삶의 의미를 더해 주리라 기대한다.

 

 

 

 마오저뚱 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살아 있는 신(神)이 아닐까 한다.중국 베이징의 심장 톈안먼 광장에 걸려 있는 마오의 초상화부터 중국 인민의 각 가정 벽에 걸어 놓은 초상화 그리고 마오의 탄생 기념을 경축하고 그를 기리기 위해 주조한 특별 동전과 지폐(1위엔부터 100위엔까지)에 이르기까지 현대 중국 사회는 마오에 대한 숭배사상이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물론 중국 인민 모두가 그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산당원 및 농민,노동자 계층일수록 그를 기리는 마음은 신중국을 탄생시키면서 그가 제창한 현대 중국의 이념과 강령이 그들에게 맞아 떨어졌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그를 유일신 및 재물신으로 떠 받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오는 부패한 청말 태어나 창사 제1사범학교를 다니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심취하고 징강산,준이회의를 통해 본격적인 정치 인생이 시작된다.흔히 국공합작이라고 하는 장졔스의 국민당과 마오의 공산당은 여러 차례 합작이 결렬되지만,마오가 이끄는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대변하는 당으로서 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는다.반면 국민당은 수장과 부하간의 마찰과 잡음으로 분열하면서 중국은 공산당에 의한 신중국이 1949년 탄생하면서 마오가 사망하던 1976년까지 굴곡과 얼룩으로 가득했던 양대사건(대약진 운동과 문혁)을 치르게 된다.마오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방법에 의해 현안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만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자연 대재해와 기근,수많은 아사자 발생을 빚은 대약진 운동과 하이루이바관(海瑞罷官)이 마오의 정치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대지주,자본가,지식인 등 반동분자들을 대거 숙청,하방운동에 내몰리게 했다.대약진 운동의 정치적 실패는 당시 정치 2인자 덩샤오핑과 류사오치에게 정치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10여 년의 대동란(大動亂)를 치르고 막을 내렸던 것이다.마오의 네 번째 부인 장칭느 권력욕에 눈이 먼 나머지 문혁 당시 권력 실세였던 덩샤오핑,류사오치,영부인 양광메이를 숙청하기 위해 갖은 모략과 모욕을 주면서 감옥에 갇히게 했다.덩샤오핑은 다행히 좌천되어 훗날 영광의 재기를 했지만 류샤오치는 옥사하고 부인 양광메이는 12년 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정치는 비정하다 못해 피를 볼 때까지 싸우는 것인가 보다.그래서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마오 스스로 말했던가.

 

 

 

 마오의 정치 인생은 숱한 굴곡이 있었지만 가장 하류층인 농민과 노동자를 업고 정치를 행사했기에 그나마 오랜 견뎌냈을지도 모른다.국.공합작을 이뤄내기 위해 대장정에 나섰던 마오는 다섯 차례 회의를 갖게 되면서 5대 성지로 꼽히고 있다.대장정의 주역들이 후난 출신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마오를 비롯하여 펑더화이(한국 전쟁시 북한군 지원),주더,류샤오치,화궈펑 등이 후난성 출신이다 한때는 한솥밥을 먹던 의기투합의 정객이었지만 이념,사상이 어긋나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돌아서는 것이 정치의 속성인가 보다.특히 류샤오치는 아내 양광메이와 함께 대약진 운동의 피폐를 딛고 자본주의 길을 몇 십년 앞당길 수도 있었지만 마오의 권력욕과 퍼스트 레이디였던 양광메이에 대한 장칭의 날서린 질투심이 문혁의 동란을 걷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장칭은 문혁의 4인방으로서 반동분자들을 일소하여 마오 사후의 권력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였지만 말로는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장칭은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제 후난 창사를 비롯하여 마오의 고향 샤오산 그리고 류사오치의 고향 화밍러우의 거리는 관광객들로 들썩 거리고 있다.그곳 주위는 홍색성지로 지정되면서 마오를 그리워하고 숭배하는 이들에겐 명소이다.마오가 생전 좋아했던 갖가지 음식도 군침을 돌게 한다.바로 홍샤오러우이다.돼지 삽겹살 및 비계살을 걸쭉하게 만든 요리이다.중국 출장 시절 먹어 본 적이 있는데 부드럽고 쫄깃하며 단백한 맛이 그만이다.게다가 후난성 위쪽은 쓰촨성 아래는 구이저우성이 붙어 있는데 그 지역의 요리가 매운 고추로 만든 요리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마오의 고추사랑은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 한다.대장정 시절 고추요리를 먹어야 건강과 활력을 찾았던 것 같다.

 

 

 

 그외 후난성에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크고 넓은 둥팅호와 장쟈졔라는 명산,시간이 멈춰 버린 펑황고성이 예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다.둥팅호는 마오 생전 넓은 강을 횡으로 유영을 했을 정도로 수영을 좋아했다고 하며,장쟈졔는 금강산 1만2천봉과 같이 기암괴석의 연속일 정도로 관객들의 찬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둥팅호 부근에는 위엔양러우가 있다.시인 묵객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시(詩)성지가 아닐까 한다.이태백,두보,굴원 등의 에피소드가 전해져 오는 곳이다.게다가 산,물,노래,사람이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펑황고성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기에 족한 멋진 곳이다.높게 굽이치는 창랑과 태풍이 지나간 뒤의 모습과 같이 정치적 동지이면서 숙적이었던 마오와 류는 사후 미망인 양광메이에 의해 마오가와 류가가 한자리에 모여 화해와 상생의 길을 마련했다고 한다.양광메이는 부군 류샤오치와 마오저둥 간의 파란 많았던 정치 역정을 내려 놓고 편안하게 삶을 마감하고자 했던 모양이다.중국 정치 현대사의 1세대 주역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2,3세들이 지탱해 나가고 있다.놀라운 경제 성장과 높은 소득 수준을 보이면서 중국인의 삶도 풍요로워졌다.이러한 삶을 살게 된 연유를 마오저뚱에게 돌리려 하는게 중국인의 집단 심리가 아닐까 한다.마오를 유일신이고 재물신으로 여기는 데에는 마오가 현대 중국사에 끼친 정치적,정신적 파워와 영향력이 중국인의 내면에 깊게 각인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의 문학과 생애, 홍명희 그들의 문학과 생애 15
강영주 지음 / 한길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해방과 더불어 이념상 월북해서 북에서 생을 마친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에 대해 평소 관심은 있었지만 기회가 닿질 않던 중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민중의 삶,애환,언어,복장등을 천의무봉마냥 수작으로 알려져 있어,우선 홍명희의 삶과 문학,사상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좋은 거 같아 이 도서를 선택하게 되었다.

 1888년 충북괴산에서 구한말 명문 양반가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집안이 사대부였던 것같다.영조때 영의정이었던 홍봉한등을 위시해 부친은 구한말 전북금산군수로 재직하기도 했다.구한말 어수선한 나라의 분위기하에서 그는 총명하여 [서경]등의 내용을 암송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거같다.또한 11세부터는 중국의 고전소설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는데 삼국지,수호지,서유기,금병매등을 일찍이 읽은 것이 후일 ’임꺽정’을 저작하는데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또한 당시 조혼의 풍습이 있었던 터라 그는 13세 되던해 명성왕후 민씨의 일족인 참판 민영만의 딸 민순영과 혼인을 하게 되고,후일 일본 유학을 하는 등 신학문과 신사상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부사이는 금슬이 좋았던 거 같다.


 그는 독서와 학구열이 대단하여 최남선과 함께 <소년>지에 서양문학 작품을 번역하기도 하고 <학창산화>에서 문학~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이색적인 지식들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폭넓은 독서가 힘을 받은 것같다.사상적으로는 러일전쟁등이 한창이던 때라 "침통하고 사색적인" 러시아문학이 그에겐 어울린 거같으며 사회현실,인생 탐구,허무주의적 인간상에 끌려 하나의 그의 사상을 이루는 근간이 되기도 했으며,최남선,이광수,정인보등과 깊은 교류를 갖으며 당시의 문학세계를 모색하고 협의하면서 그의 지식과 사상을 넓혀 나갔던 것이다.하지만 근본적으로 삶의 방향전환이 되었던 것은 부친 홍범식이 조선이 일본에 병탄하려는 소식을 접하고 자살을 하게 되며,장남 홍명희에게 남긴 유언(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기어이 나라를 찾아야 한다)에 따라 그는 부친의 유언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하며,3.1운동의 주모자로 괴산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하는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한다.

  홍명희는 출옥 이후 주로 교육계와 언론계에 몸을 담으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는데,1920년데에는 교사생활,대학출강,조선에스페란토협회에 가입.활동을 하기도 한다.동아일보,시대일보를 전전하면서 언론인으로서 고위간부직에 있으면서 사회적,국가적으로 책임을 다한다.그가 1928~1940년에 걸쳐 생애 수작으로 불리는 <임꺽정>은 탁월한 리얼리즘 역사소설로서 [학창산화]에 우리 민족 문화에 대한 주체적인 의식과 동서고금의 문문레 대한 폭넓은 식견,특히 언어.문학.풍속사에 대한 깊은 조예,사물의 디테일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하며 등장인물을 각 계층의 전형으로서 형상화하고,서술적 설명보다는 장면 중심의 객관적 묘사에 치중하며 극도의 치밀한 세부 묘사가 백미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독특한 구성방식은 러시아 작가 알렉산더 쿠프린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 한다.

 일제에서 해방과 더불어 그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지만,미군정하 이승만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정치지도자들이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됨에 따라 그도 평양길에 오르게 되며,민족문제를 주체적이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회동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사에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겠으며 그가 연석회의에 참가하면서 북에 남게 된 경위와 내막은 분단상황이 지속되고 있어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거 같다.홍명희에 대한 김일성의 환대와 존경,신뢰등이 그가 일제강점기등을 통해 보여준 양심적인 지식인,해방후 미국의 회유를 물리치고 애국적인 활동을 한 점을 높이 샀던 거같다.1968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북한의 고위직을 두루 맡으면서 역량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이념과 체제문제만큼은 남한과는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홍명희라는 인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이 도서를 통해 그의 가정환경,유년시절의 학구적인 자세와 독립운동,언론인으로서 보여준 존재,작가로서의 명성,그의 사상과 행보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그의 삶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역사 인식까지 깊이를 더해 주어 다행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장렬한 삶
김삼웅 지음 / 현암사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구한말 일제강점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해방전까지 독립운동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려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명멸해 갔다.갖은 자이든 없는 자이든 국권의 회복을 위해 일제에 맞서 소규모이든 대규모이든 조직적으로 때론 게릴라와 같이 적(敵)의 헛점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혁혁한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참으로 신산하기만 했다.조선측에서는 영웅이지만 일본측에선 눈에 가시와 같았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게다가 신분은 조선인이지만 일본측에 매수되어 첩자로 활동하던 자들로 인해 동포들끼리 사분오열하기도 했다.어느 시대에서든 첩자가 있게 마련인데 일제강점기시에는 그러한 현상이 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극단적인 예가 조선인중 만주군관학교 출신자의 해방후 정치행각 그리고 일본의 앞잡이 일진회 등이 꼴불견이었고 산포수라는 의병들에 의해 가차없이 척결되었다.

 

 봉오동,청산리전투는 주로 김좌진,이범석장군이 상징적으로 후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특히 가관인 것은 해방후 이승만정권하에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이범석은 청산리,봉오동전투에서 홍범도장군이 일본군을 신출귀몰하면서 특유의 활쏘기와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을 대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교과서는 이범석과 김좌진을 찬미하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홍범도장군이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에서 거둔 대승은 일본군인들 사이에서도 날아다니는 장군으로 각인되었을 정도이다.지금이라도 홍범도장군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시각과 역사서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그의 고향이 북한 평양이어서일까.아니면 그의 신분이 천민의 신분이고 태어남(평양)과 죽음(카자흐스탄) 그리고 레닌과의 접견 등으로 사상적인 면에서 불온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에서 그의 독립운동 전과(戰果)가 두드러지게 부각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김삼웅저자의 한국현대사 인물평전은 일반인들이 모르고 지내왔던 역사적 인물들을 보다 광범위하게 해부하고 잘못된 역사학습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한 인물이 역사의 소용돌이의 무대에서 간난신고와 같은 삶의 이력을 펼쳐 나갔던 사실을 사료와 구술,답사,통찰력 있는 반증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놓아서 역사학습의 편향성을 지양(止揚)할 수가 있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학습의 장이 되기에 매우 유익하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어찌되었든 이번 홍범도장군에 대해 일대기 및 독립운동의 면면을 세세하게 이해하면서 국력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 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도 남는다.

 

 홍범도장군은 1868년 평양 근교에서 태어나 머슴살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한때 대한제국군 진위대 나팔수로 근무를 했지만 이것은 생계의 일환이었다.나팔수 근무를 그만두고 제지공으로 일을 하게 되지만 일종의 새경을 주지 않아 주인을 살해하고 사찰로 피신하게 된다.그곳에서 반려자 이옥구 여사를 만나 환속을 하게 되면서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된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한독립운동의 단초가 3.1운동으로 알고 있는데 이보다 1년 앞선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오독립선언서를 채택하게 되는데 이것이 3.1운동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는 북한 최북단을 넘어 연해주로 몸을 옮기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고 독립자금을 받기도 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간다.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되면서 이동휘와 함께 군무부의 책임과 중책을 맡게 된다.1920년 6월 봉오동 대첩을 달성하고 동년 10월에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승첩을 거둔다.나아가 1921년 700여 명을 이끌고 러시아 이만(아무루주)으로 이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는데 불행하게도 일.러군의 공작으로 대한독립군이 분열하는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게 되고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적군에 편입하여 이르쿠츠크로 이동하는 상황이 벌어진다.아내 이옥수 및 큰아들은 일본군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고 둘째아들은 병사를 하게 되는 불행을 맞는다.1922년에는 레닌을 접견하고 회담하면서 조선독립자금을 지원 받는데 그는 개인적으로 레닌에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과 돈을 선물받기도 한다.

 

 1926년에는 러시아에서 이인복과 재혼한다.그리고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 이주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하면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추위와 기아,질병으로 객사를 하게 된다.먹고 살기 위해 조선을 탈출하여 연해주에서 삶을 꾸려 가던 조선인들에겐 삶의 앞길이 막막하기만 할 뿐이다.그것도 토양과 기후 등이 척박하고 을씨년스러운 고비사막 근처로 내동댕이 당하는 수모를 겪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카자흐스탄에서의 조선인들은 억척스러운 삶을 살아간다.시간이 흐르면서 홍범도장군은 세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일개 민초로 남게 되는데 그를 잘아는 연극 연출가 태장춘의 제의로 <홍범도 일지>를 쓰고 그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이 상연되기도 한다.그는 광복 2년을 앞두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쓸쓸하게 사망을 하게 된다.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를 받게 된다.

 

 그가 의병운동에 나서게 된 시점이 단발령 사건이 일어난 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본격적인 운동은 1907년부터다.당시 왜구의 앞잡이 일진회세력을 토벌하게 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접한 경술국치는 그에게 오로지 대한제국의 독립을 간절히 갈망하게 되었던 것이다.의병들의 조직과 독립운동자금,산세와 물줄기 등에 밝은 그에게는 봉오동과 청산리에 구불구불하면서도 첩첩산중인 지형을 잘 읽어내면서 신식무기를 갖고 있는 일군들을 초토화시키고 승첩을 거두었던 것이다.죽는 날까지 그는 대한의 독립을 갈망하고 앞에서 나서 지휘를 하는 것보다는 손수 몸으로 행동으로 보여 주었던 날아다니는 장군이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대한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생각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로 인해 후손들의 삶은 기구하고 처연하기만 하다.이제 독립운동가들의 진정한 면모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단절되고 왜곡된 역사의 장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아울러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에게도 국가유공자 후손답게 그에 준하는 처우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위당 장일순 - 생명 사상의 큰 스승
이용포 지음 / 작은씨앗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사회부조리에 맞서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기존세력에 저항하고 하찮은 미물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사상을 고취해 왔던 장일순의 일생과 업적등을 전반적으로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또한 그가 사회적으로 맹활약을 보여 주었던 1970,80년대의 한국 국내상황과 그가 이루고자 했던 '생명 사상'등은 대조적이었지만 뜻있는 사람들에겐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리라 생각한다.

흔히 의식적으로 깨우치고 불의에 저항하며 함께 더불어 잘 사는 길을 고민하며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과 맞물려 돈에 걸신들리고 돈을 쫓아 버겁게 살아가야만 하는 현세태를 보면서
과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해방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 세력에 맞서고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면서 갖은 자든 못 갖은 자든 함께 살아가는 길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몸소 실천으로 옮겼던 장일순선생은 처음 교육 사업부터 시작하여 1970년대
유신헌법 반대운동,산업개발로 인한 생태파괴,환경 오염등으로 인한 지구의 위협등을 실천적 지성인으로 일관된 삶을 보여 주고 있기에 계몽주의적이고 미래를 넓게 내다보는 천리안의 지혜를 갖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원주에서 한살림 운동을 벌였던 그는 모두가 함께 모든 생명을 함께 살려 내고,생명의 가치관.세계관으로 온 생명이 한집 살림을 살 듯 더불어 살자는 의미로 세계 문명이 핵무기,공해 등을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데 자연을 착취하는 생산,한정된 자원의 무분별한 사용등으로 결국 인류가 언젠가는 대재앙을 받는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설파하고 있으며 부모가 자식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하듯 사람을 사람답게 대해야 하며 상대에 대한 존경과 귀히 여기는 겸손의 정신등을 한살림에서 보여 주고 있다.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근원지 원주가 장일순,지학순,김영주,김지하등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그가 남긴 '인내천'사상을 교육사업과 민주화 운동,한살림등을 통하여 그의 뜻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현실 문제에 깊게 동참하면서도 틈틈히 붓을 들어 난을 치고 글자를 썼던 그의 서체는 치악산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석간수처럼 청정한 삶이 슴배인 그림이요 글씨였다고 한다.

386세대의 한사람으로서 학창시절 민주화 운동의 절정에 있을때 우리에게 지성과 지혜,겸손과 검약,자애등을 가르쳐 주고 세상을 밝게 보며 미물인 벌레도 함부로 다루지 않으며 가장 소중한 인간이 하늘이다라는 생명 사상을 불어 넣어 주신 장일순선생의 뜻이 물질에 쪼들려 살아가야만 하는 요즘 세대들에게 소중한 귀감이 될거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해방이후 현대사에 대한민국을 이끌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물은 과연 몇이나 될까? 베이비붐  세대,386세대로서 한국사를 바로 보는 시각과 현상은 후한 점수를  주기가 어려운 건 나만의 체감만은 아닐 것이다.

노무현 전직대통령에 대해서 자서전격인 ’운명이다’를 읽기 전에 ’정치 권력과 시민 권력’ ’이상(진보)과 현실’ ’원칙과 타협’등이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그의 삶의 역정은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피어난  불굴의 화신으로 비춰지기도 하고,특히 삼해산업에 다니면서 우연히 봤던 ’사법과 행정 예비요원’을 뽑는다는 한 줄의 기사를 보고 헌 책을 구해다 열심히 도전했던 결과 예비시험,나아가 고졸학력이었지만 하면 된다는 정신을 사법고시 합격으로 당당하게 보여주며 공부하는 목적과 삶의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는 귀감이 될만한 것이다.

3남2녀중 막내로 태어나서인지 부모님의 내리사랑을 받으면서 엄한 규율과 책임의식은  몸에 배지 않았던 것 같으며,1960년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글짓기 대회에서 백지로 내고 말았다는 얘기를 듣고 뭔가 깨우친 분이구나라는 생각을 시대적 상황과 연계해 보기도 했다.또한 초등학교 6학년시절엔 수줍음이 많았는진 모르지만 담임선생님에 의한 자의반,타의반에 의해 회장에 뽑혀 훗날 대중을 이끄는 모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봤다.

그는 1981년 그 유명한 부림(釜林)사건을 맡으면서(부산에 있는 대학생들의 사회과학 독서 토론모임회가 사회를 비판하니 정부전복세력이다라고 규정함),사회에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드러내며 각광을 받게 된다.그러면서 그는 발로 뛰는 변호사,인권변호사로서 뜻을 세우며 젊고 유능하며 촉망받는 민주인사들과 교류를 하게 되며,노동사건과 시국사건의 변론으로 동분서주하던 그는 부천성고문사건,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등을 맡으면서 ’운동 전문변호사’로 탈바꿈하게 되며 젊은이들과 최루탄을 맞아가며 길거리에서 부른 <어머니>라는 노래에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를 부르며 우리 사회의 진정한 정치는 사람 사는 세상을 그의 정치적 이념으로 되새김질 시켰을 것이다.

우리가 특히 잘 알고 있는 5공의 청산작업으로서 청문회가 1988년 가을에 열리면서 그는 증인들을 앉혀 놓고 사실에 입각하여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과 열혈성을 보이며 세인들의 뇌리에 청문회 스타로서 각인시켜 준다.인상적인 부분은 고정주영 회장의 첫 질의 답변에서 ’안 주면 재미없을 거 같아서 줬다"고 5공의 정경유착의 실상을 인정하고 ’강제성’을 시인한 대목이다.질의 자료를 산더미처럼 준비해온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 보는 격’이 되었던 것이다.인상깊었던 대목이다.

그리고 6공 노태우와 김영삼,김종필이 3당합당을 특별한 목적없이 담합으로 처리하자 그는 "이견 있습니다,반대토론 합시다"하지만 묵사발되고 결국 YS와 결별하게 된다.용기있고 소신있는 행위에 마음으로 박수를 보낸다.YS와 결별한 꼬마 민주당이 DJ 와 동거에 들어가면서 그는 DJ의 대통령만들기에 헌신을 하고 당선이 되자 그는 해양수산부장관으로 발탁되어 정치인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행정 고위관리자로서도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게 된다.

그는 나아가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어 지방자치 이론이나 선거 실무교육등 필수 서비스와 선거 준비,선거 전략과 선거운동에 관한 교육을 하면서 e-지원 시스템을 구축해 2002년 국민경선 선거캠프 역할을 100% 소화해 내는 기량을 발휘했던 것이다.시대를 내다볼 줄 아는 천리안의 혜안이 있었던 것이라 믿음이 갔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동서화합의 실현과 자신의 정치 이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분인거 같다.특히 당색이 짙은 부산에서 시장과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이해타산을 떠나,자신이 속한 당의 이념과 원칙,소신을 굽히지 않으려 낙선을 각오하고서라도 그의 본모습을 보여준 그가 바보스럽기도 하고 이상주의자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그런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네티즌끼리의 모임인 ’노사모’가 2000년 6월 대전 PC방에서 60여명이 모여 결성을 한 것이 그가 대통령이 된 원동력이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것이다.겉으로는 졌을지 몰라도 민심은 그의 이념과 소신을 예쁘게 보았던 것이다.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면서 공약 실천을 지키려 했으며,그가 기치로 내세운 "상식이 통하고 원칙이 지켜지고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나라","정경유착,반칙,특혜,특권이 없는 사회",였고 국정 원칙은 원칙과 신롸,투명과 공정,분권과 자율,대화와 타협을 들었는데,회고담에서는 대화와 타협이 안 되는게 현실정치임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그가 민생 문제를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는 점에 성찰과 미안함을 나타냈다.특히 부동산 정책,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저 자신도 민감하게 주시했고 피부에 와 닿지 않은 허탈감등을 많이 느꼈던 적도 있다.

그외에 남북정상회담,한미 자유무역협정,국정원장 독대,검찰 개혁의 실패,정치 권력과 언론 권력,대연정 제안,원칙 잃은 실패,퇴임 순으로 엮어져 있다.특히 정치 권력과 언론의 유착관계를 단절하고 언론이 누리는 부당한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는데,언론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책임의식의 결여와 시민의 권력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시민을 대신하여 정치 권력과 시장 권력을 감시.제어함으로써 권력이 시민의 권리와 가치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라고 언론관을 직시하고 있다.

그의 퇴임은 그가 태어나서 자랐던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여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유기농법을 이용해 질좋은 쌀을 생산하고 숲 가꾸기를 통해 생태계를 보호하며,화포천을 청정화하여 민물고기들이 마음대로 유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 전념했고,인터넷으론 네티즌과 열린 소통을 통해 정책과 민원등을 청취하기도 하면서 실패한 대통령이 아닌 성공할 수 있는  시민이 되고저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런데 그의 퇴임과 귀향에서의 그린 이상은 오래 가지 못했다.국가기록물 불법유출사건(?),그와 관련되고 그가 다녔던 식당까지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를 맘대로 실시하며,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참여 정부 비판세력내지 배신자들의 고발,검찰 수사는 그를 더욱 옥죄게 하고 정치자금법으로 그의 그의 측근들이 줄줄이 법망에 잡히고 그의 아들(건호씨)마저 검찰에 소환되는등 그는 사면초가에 몰리고 그의 이상인 원칙과 소신등이 깡그리 무너지고,그의 영혼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나날이었던 것이다.그가 이명박대통령에게 한 인간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보내려다 만 청원서(본문 P327~P328참고)는 인간의 고뇌를 넘어 국가의 비운이고 권력의 이동은 그리도 가공할 만하고 엄청난 파괴력을 갖은 지뢰와 같구나라고 생각하니 소름마저 끼침을 느꼈다.특히 그의 봉하마을 사저 주변은 온통 CCTV로 중무장을 해놓아 가택연금을 넘어서 산송장 같은 비애와 통탄을 느꼈을 것이다.마지막으로 매체 앞에 모습을 보인 2009년 4월 30일의 검찰청 앞에서의 그의 모습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하고 초인이 된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또한 그가 유죄가 확정되어 감옥의 수인으로서 그의 옥방과 구조등도 매체를 통해 접했던 거라 모든  명예와 욕심,자존감등을 깡그리 버렸을 것이다.

그는 세상과 하직하는 날 아침 일찍 자신의 유지를 컴퓨터에 저장한 것으로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그러면서 작고한 부모와 가족을 생각하면서 고향 산하의 붉은 태양을 그리며 그는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다.

전 노무현대통령을 청년의 이미지에 세련되지 않은 경상도 말투,걸음걸이가 약간 구부정한 듯한 모습에 컴퓨터를 이용한 신감각주의자,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이념과 소신의 정치가,후한 점수를 매길 수 없는 대통령의 경제 정책등으로 그려진다.이 도서는 그의 자서전격인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차마 겉으로 들어나지 않은 부분은 그의 유가족과 참모진들이 생각을 대신하여 엮어져 갔던거 같다.또한 마직막까지 헌신적으로 그를 지켜주고 보호하려고 했던 분이 과연 있었을까 안타깝지만 자탄해 본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평가의 명암이 엇갈리지만 전직대통령으로서의 예우,명예등은 그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오로지 그의 이상과 철학에 충실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소신이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커다란 충격과 귀가 먹먹해지는 아연실색함까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역사는 물이 흐르듯 흘러가고 뒤를 이어가는 우리 후세는 그를 제대로 조명하고 평가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