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전 -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성철.법정 지음 / 책읽는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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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을 대표하는 각 종교계의 지도자들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각 종교의 본래 가르침을 따르고 삶에 크게 대입시켜 뭇사람들의 본보기가 되는 종교인 및 종교 지도자들을 보면 마음 한 켠에선 '독실한 신앙심의 참모습과 종교의 위력'이 스며들곤 한다.그런데도 나는 아직까지는 어떠한 종교를 갖지는 못했다.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의 이정표를 굳건히 지켜내기 위해 종교 하나쯤은 갖어야겠다는 생각은 늘 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절을 가곤 했다.할머니께서는 사월 초파일과 가족의 안녕을 비는 의미에서 불공(佛供)을 지극 정성 드리셨는데,어디 갈 때마다 나를 꼭 데리고 가곤 했다.할머니를 따라 가면 늘 먹을 것이 생기곤 했다.그것이 어린 내겐 참을 수 없는 유혹이고 기대감을 부풀어 오르게 했던 모양이다.절에서 나오는 각종 음식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촐하고 정갈하여 뒷맛이 개운했다.사찰 본당에서 불어오는 향불 내음과 함께 먹는 절 음식은 입에 인이 박힌 듯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할머니,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 맛과 같이 내 뇌리에 깊게 아로새겨져 있다.지금도 어린 시절 졸졸 따라 갔던 절의 풍경과 음식은 마음의 본향과 같이 아련하기만 하다.

 

 한국 현대 불교계의 지도자로 잘 알려진 성철(性撤)스님과 법정(法頂)스님 대담집을 접하게 되었다.뜻깊은 시간이 되었다.도서의 제목에서 시사하듯 설전(雪戰)은 차가운 하얀 눈 위에 두 불교 지도자의 말씀을 덧대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제자격인 법정 스님이 스승격인 성철 스님께 불교계에 입문하게 된 동기부터 신앙인으로서의 본분과 행각(行脚),(삶의) 철학 등을 들려 주고 있다.성철 스님은 고이 고이 보자기에 싸여진 삶의 진리와 말씀,나아가야 할 길 등을 담담하게 설파하신다.두 분의 인연은 해인사 백련암(白蓮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내가 본 두 분의 공통점은 물질적 소유욕과는 거리가 먼 (보기 드문) 무소유의 상징 인물이다.

 

 이 글은 성철 스님이 "누구든 자신을 찾아오려거든 3천 배(拜)를 해야 한다"는 불문율부터 시작한다.3천 배를 하라는 의미는 남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그것을 수행하면 심중에 변화가 찾아오고 이타적인 생각과 감정이 생긴다는 법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여 성철 스님을 찾아 온 본인에게 이롭게 하고 싶었다는 속뜻을 알게 되었다.불교는 깨친 사람(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같이 스스로 깨우쳐서 우주 만법의 근본을 바로 알게 되면,부처 자신과 같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무릇 중생은 집착이 강하다 보니 사물의 본디 모습을 분간하지 못해 부처님과 같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깨우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물질적 가치관에 심히 경도되어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인간 본래의 이성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은 사라지는 대신 돈과 물질의 힘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으로 둔갑하여 정글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야만 하게 되었다.정신의 힘이 부재하고 물질의 힘이 드세게 되면 개인적.사회적으로 선행보다는 악행의 우려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즉 인간의 근본 가치는 인격이 우선이고 물질은 다음이다.이러한 화두가 오래 전부터 있었음에도 여전히 물질적 가치관이 우선시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인간의 존재 이유,인간의 존엄성의 회복은 우리 모두가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다.성철 스님의 공양은 매우 간소하고 의복은 더욱 검소하다.성철 스님은 '영원한 진리를 위하여 일체를 희생한다.'는 신념으로 일관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성철 스님의 생사관은 따로 없다는 것이다.삶 자체가 열반이고 해탈이다는 점과 눈을 감았을 때는 윤회고 눈을 떴을 때엔 대자유!라는 점이 인상 깊다.인간이 마음의 눈을 떠야 지상이 비로소 극락으로 다가온다는 가르침이 마음 속 깊게 다가온다.

 

 그러면서 성철 스님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 목표를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즉 상대유한의 세계는 생멸의 세계이고 절대무한의 세계는 해탈의 세계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이것은 개인의 태도와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또한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점은 겸손하면서 선행을 많이 쌓으려 한다.인과사상과 업(業)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생전에 잘해 놓아야 후세에게 정신적 가르침과 음양의 덕이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세 가지 화두(자기를 바라 보라,처처에 부처이고 처처가 법당이네,네가 선 자리가 바로 부처님 계신 자리)로 성철 스님의 불교관과 삶의 이력을 전반적으로 느껴 보는 시간이 되어 무척 다행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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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만난 건 축복입니다 - 맑은 영혼의 땅, 히말라야에서 온 청전 스님의 선물
청전 지음 / 휴(休)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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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세상 인심은 칼로 무자르듯,칼로 두부 자르듯 주고 받을 것만 따지지 덜 받고 더 주고 하는 인심은 찾아보기 어렵다.또한 세상이 돈과 물질로 권력과 명예까지 사고 파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직자라는 사람들 역시 이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이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선거철만 되면 각계 종교 지도자 일부는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부와 명예를 도모(圖謨)하려는 오염된 자들이 꽤 많다.겉으로는 세계 평화,사랑,자비,인류 구원을 외치고 있지만 속은 사복(私腹) 채우기에 급급하다.종교 지도자가 이러할진대 일반인들은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나는 어떠한 종교,신앙일지라도 교리와 가르침을 잃지 않고 이어 나간다면 세상은 평화,사랑,구원,상생의 물결로 가득찰 것이다.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돈과 물질을 극숭상하고 이에 지배당하며 아귀다툼하다 보니 세파는 더욱 거칠어지고 사람 사이의 온기,나눔,배려는 희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2010년 중반을 살아가면서 크게 다가오는 것은 나라를 걱정하고 인류를 구원할 만한 종교 지도자가 부재하다는 점이다.나만의 주관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종교 지도자의 인격과 성체의 아우라를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게다가 종교를 갖고 신앙심을 키워 나가는 사람들 역시 자신이 갖고 있는 해당 종교의 가르침과 교리에 맞춰 일관성 있게 지키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종교가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와 가치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거대 중국 속의 이단지역으로 불리는 티벳은 현대 중국사에 있어 비극의 상징이다.티벳의 민족 분규를 잠재우고 티벳 불교가 말살하려 했던 중국 정부에 의해 달라이 라마는 극적으로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했다.어언 56년이 되어 가고 있지만 달라이 라마는 여전히 조국을 떠나 해외에서 전전하고 있을 뿐이다.천혜의 자연과 광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티벳은 중국 정부에겐 돌려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달라이 라마가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하던 당시,그 가족과 휘하는 갖은 고문,구타,살상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달라이 라마의 종교적 가르침을 흠모하여 티벳 라싸를 향해 전체투지(全體投地)를 하는 사람도 꽤 많다.그것은 인간의 욕망과 소유욕을 내려 놓고 편하고 행복하고 마음에 가득찬 평화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인간은 수분지족(守分之足)을 알고 실천해야 한다.이것을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머리 속에 욕망 덩어리가 가득차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욕망을 성취한 그대여 불행하여라.왜인가,그대 앞에 또 다른 더 큰 욕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P81

 

 지은이 청전 스님 지구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맥을 무대로 티벳과 인도 사이를 오가며 그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종교인의 관점에서 술회하고 있다.인간은 어떠한 환경에서 어떻게 태어났든 죽을 때엔 동일하게 죽고 한 줌의 흙과 재로 변한다.인간의 삶의 길이가 의학과 과학 기술로 말미암아 연장되었을지언정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길이는 과연 몇 살이나 될까.영겁(永怯)과 같은 길이에 비하면 일순(一瞬)과 같고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사회는 사람을 갑과 을로 규정하고,신분의 고하를 정해 놓고,부자와 빈자의 간극을 넓혀 놓으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정책은 아무 것도 없다.오로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면서 자신의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가도록 방치해 놓고 있는 사회 체제,규범이 냉정하기만 하다.나는 불교라는 종교를 떠올리면 그래도 자비심만은 남아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곤 한다.산 속의 사찰을 찾아 목탁 소리와 함께 퍼지는 스님의 염불소리,'찰랑'거리는 명상곡과 같은 청아한 소리는 마음을 정화시키고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웃 간에 정담을 나누고 나눠 먹으며 상부상조하던 공동체 생활은 이젠 눈을 씻고 봐도 없다.가끔은 기성세대의 영악하기 그지없는 꼼수가 밉상스럽기만 하다.이웃과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보니 가끔은 혼자가 되어 고독을 즐기는 연습을 하기도 한다.가족 특히 부모자식,부부간,형제간의 금이 가고 어긋나는 이유는 대개가 금전,상속 문제가 주 요인으로 보인다.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간직한 티벳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보고(寶庫)이다.티벳의 면적은 광활하다.이에 비해 인구는 적어 소수 민족으로 분류한다.그들은 망명정부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그들에게도 진정한 인권과 자유가 도래하기를 바란다.일반적인 얘기이지만 내가 좀 손해보는 듯 살아간다면 세상의 각박함,아귀다툼,살생과 같은 분쟁,사건은 완화되지 않을까 한다.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샘이 더욱 깊어져 가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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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창수필
운서주굉 지음, 연관 옮김 / 불광출판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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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자체가 근심과 걱정,상처와 트라우마의 연속은 아닐까 한다.물론 이러한 현상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반면 기쁘고 즐거우며 희망찬 삶 역시 영속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그래서 인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에는 부모의 결합에 의해 태어난 존재이고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삶 자체를 긍정과 낙관에 힘을 실어 살아가는 것이 후회없는 삶이 될 것이다.삶은 항상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지만 늘 초월하는 듯한 자세,늘 이익을 보려는 자세보다는 좀 손해를 보는 듯한 자세로 더불어 살아가노라면 삶이 삶다워질 것이다.

 

 대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여 요양 중인 내게 종교의 가르침은 무언의 위로와 평안을 안겨 주고 있다.종파를 불문하고 말이다.운전중일 때에는 기독교 방송을 자주 듣고 집에 와서는 불교와 관련한 도서를 자주 읽는 편이다.각 종교에 대한 메시지는 그때 그때 다르지만 공통점은 단 한순간이라도 팍팍하고 재미없는 현실의 삶에 지혜와 위로,평안을 안겨 준다.그릇된 욕망을 내려 놓고 우매함은 냉철한 지성으로 되돌려 주기도 한다.이것은 각 종파의 촌철살인과 같은 메시지를 접하면서 순간 순간 순수로 돌아가고 마음을 정화하려는 본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 명나라 가정(嘉靖) 13년(1535)에 태어나 만력 43년(1615)에 돌아가신 운서주굉(株宏)스님은 생전 인생의 참뜻과 지혜를 정리한 수필집이 1991년 한국에 소개되면서 꾸준히 읽히고 있다고 한다.스님의 저술은 경소(經疎) 외 잡록으로 《죽창삼필》 등 세속인을 일깨워 주는 말씀이 대부분이다.오욕과 물질에 찌든 세속인의 삶은 이미 검붉게 오염되었다.인체 내부의 질병으로 따지면 혈관이 좁아졌다든지 꽉 막힌 형국일 수도 있다.게다가 대사성 질환으로 자칫 치사에 이를 수도 있을 정도로 마음의 병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사람도 많다.이렇게 몸과 마음이 지치고 찌든 상황에서는 욕망보다는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연습과 타인에게 베풀고 나누려는 항상심의 지속성은 질높은 삶을 유지시켜 줄 것이다.원만한 관계,자아실현이라는 높고 이상적인 삶의 욕구까지 실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운서주굉 스님의 인생의 참뜻과 지혜는 《죽창수필》로 편집되어 불교인 및 불교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청정심과 반향심을 안겨 주고 있다.국내에는 성철스님,법정스님 그리고 근자 법륜스님의 말씀에 이르기까지 스님들이 전하는 말씀은 세상을 도통한 스승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다만 미혹하고 우매한 존재이다 보니 늘 뭔가 부족하고 쫓기고 목적없는 부평초와 같은 삶이 지속되는 것은 아닌가 자성하고 또 자성한다. 죽창일필,죽창이필로 나눠 쓰여진 이 글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 어디서든 통용되는 극히 상식적이며 처세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들이 참 많다.죽창수필을 쓴 시대가 16세기이다 보니 호불호와 관련한 것들은 현대인의 의식과 비교하여 차이가 나는 것도 있다.가장 공명이 가는 것은 지나치면 아니 한 것만도 못하다(과유불급)는 점이다.적당하게 하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최상이 아닐까 싶다.

 

 스님은 신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그것은 과보로 얻은 것,수행으로 얻은 것, 깨달음으로 얻은 것이다.이 중에 수행과 깨달음이 가장 보편적이면서 궁극이 아닐까 한다.만물의 영장이면서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은 소원성취를 위해 기복(祈福)행위 한다.그런데 인간사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는 방법 중에,가장 옳지 않은 것은 짐승을 잡아 희생으로 바치면서 기원하는 행위라고 스님은 지적한다.살아있는 목숨을 희생시켜 인간의 욕망을 채우려 하는 행위는 설령 소원을 이룰지언정 좋은 소원은 아닌 것 같다.그렇게 얻은 소원은 잠시 기쁨을 안겨 줄 뿐 고보(苦報)가 뒤따른다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특히 스님은 살생보다 더 나쁜 것은 음행이라고 했다.

 

 운서주굉 스님에 대해서는 난생 처음 접하게 된 셈인데 말씀 하나 하나가 울림이 크기만 하다.스님의 말씀 가운데 내게 꼭 필요하고 실천으로 옮긴 메시지는 수행과 깨달음의 차원에서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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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록 -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주인공들에게 남긴 100년을 내다본 지혜 모음
탄허 지음 / 휴(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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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란 커다란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나아가 자신을 성찰하고 선을 쌓으며 수신하는 자세로 생사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사회와 세상의 버팀목이 되어준 탄허스님의 일생과 어록 등을 통해 그가 세상에 설파하고저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중생의 한사람으로서 다행이다.온갖 번뇌와 세파에 찌든 묵은 때를 씻기고 명경지수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면 우선 탐욕과 욕망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현실의 삶은 안타깝게도 무한경쟁과 생계유지라는 족쇄가 늘 몸과 마음에 따라 다니기에 마음은 이상향을 쫓으리라도 현실은 늘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만 하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힘껏 갈구해 나가야만 하는게 실제상황이다.

 

 평소 불교에 대해서는 친근감과 더불어 윤회사상이라는 관념이 머리 속에 있기에 내가 태어나 언제가 육신이 소멸되어 세상과 하직을 하더라도  내세에서도 이 세상에서 영위했던 삶의 방식과 행실이 그대로 반영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정작 중요한 것은 현실에 충실하고 가족과 인간과의 관계,사회 구성원으로서 모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도 생각하며 지금보다는 더 베풀고 관대하며 배려하고 존중해 가는 정신을 잊지 않고 몸과 마음에 충만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진실이다.

 

 탄허스님에 대해서는 아는게 많지 않다.이 도서를 통해 그의 종교적 삶과 미래에 대한 예측 등이 <천리안>과 같은 예지력이 놀랍기만 하다.한국전쟁에 대한 예측,남.북극 빙산의 해빙 즉 지구 온난화,한반도의 미래 등인데 그 매력적인 예지력은 주역풀이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기에 심오한 동양철학의 묘미를 느낄 수가 있다.그의 가르침 속에는 "도가 깊어지면 예지도 깨어난다"인데 다언(多言)과 번문(煩文)을 최소화해야겠다는 마음의 각오가 일게 된다.내 마음 속에 쓸데없는 잡념과 사념이 병을 만들고 삶을 구기기에 평상심으로 돌아가고 중용을 키워나가는 정신만이 삶의 여유와 풍요를 오래도록 지속해 나갈 수가 있으리라.

 

 스님께서 남긴 어록은 예지,정치,철학,생사,종교관 등 5개 분야로 나뉘어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들을 향한 중생구제가 간곡하고도 설득력있게 전해져 온다.그 중에 마음을 버려라라는 부분이 어렵지만 진실되게 다가온다.도(道)란 과연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 속에는 셀 수없는 온갖 잡념,탐욕,욕망 등이 똬리를 틀고 있기에 무념무상만이 도에 이르는 길이며 정치 지도자의 그릇은 탐심이 적고 국가의 미래를 밤새워 고민하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라는 점이다.특히 한국 사회가 이분법으로 나뉘어진 상황에서는 사회 구성원들간의 위화감과 일체감이 희박하기에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빈부 격차의 해소와 국민을 위한 철학이 제대로 된 지도자가 아쉽기만 하다.

 

 화엄경,유불선의 통달,미래를 내다보는 신통력으로 각인되는 탄허스님의 말씀은 새길 만한 부분이 많다.아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새기고 실천하는 삶에서 나와 주위가 변하고 세상이 바뀔 수가 있다고 생각되며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행.불행이 비롯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또한 스님께서 남긴 말씀 중에 미래를 여는 지혜의 말씀은 늘 새기고 실천해야겠다는 각오와 진정한 삶의 목표와 길이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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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은 사랑 - 톤즈의 돈 보스코 이태석 신부의 강론 모음집
이태석 지음, 한국천주교살레시오회 정리 / 다른우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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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종교 및 종파가 무수히 많다.하루가 멀다하고 몇 미터 간격으로 세워지는 교회와 신도들의 신도 모으기 활동이 때로는 억지로 세를 불려 간다는 생각이 들고 때로는 종교의 참뜻이 무엇일까를 회의적으로 여겨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나와 절친했던 고교동창생도 인간성,사회성면에서 뛰어나고 출중한데 가끔 걸려오는 전화는 주로 종교 얘기가 대부분이어서 내기키 않은 상태에서 선뜻 나서기가 어려워 만남 자체가 무위로 끝날 때도 많다.다만 몇 십년간 변치 않고 대해 주는 우정과 우의가 고맙고 나 또한 무종교인이지만 남을 해코지 않고 최대한 아량과 관용의 정신으로 살아가려 한다.

이태석신부는 종파를 떠나 언론매체에서 알게 되었는데 '짧고 굵게'살다간 사랑의 정신을 진정으로 널리 알린 보기 드문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흔히 남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의과대학을 나오면 돈과 물질을 충분히 누리면서 살아갈 수도 있을텐데,이신부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머나먼 아프리카 오지에 몸을 맡겼던 것이다.그가 크리스챤으로서 남수단 톤즈에서 못 먹고 병들어 가는 현지인들에게 예수의 복음과 사랑의 정신을 '강론'을 통하여 말씀으로 전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그들을 관용과 아량으로 대했던 것이다.열사(熱沙)의 나라 수단은 북수단은 이슬람교가 주가 되고 남수단은 기독교가 주가 된다고 한다.그래서인지 수단은 한 국가 안에서도 부족과 종교 등의 내전도 종종 일어났겠지만 이신부야말로 자신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을 중심삼아 톤즈의 주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리라 생각한다.

"성경은 길이요,진리요,생명입니다."라는 말이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내가 믿는 종교가 무엇이든 말씀을 통하여 인간이 인간에게 진실로 다가가고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가는 이웃을 말씀으로 치유하고 회개케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정신이야말로 종교인이 가져야 할 참다운 모습이고 실체가 아닐까 한다.다만 일부 몰지각스럽고 몰상식한 종교인들의 무분별한 신도 끌어 모으기와 헌금 등을 유용하는 작태만큼은 사라졌으면 한다.종교는 본래의 목적을 충실히 함으로써 그 종교가 갖고 있는 참다운 의미와 가치가 발현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가 없고 병이 들어도 봐줄 사람 없이 살아가는 외롭게 살아가는 독거 노인과 노숙자들,말벗이 없어 늘 먼 산과 허공만 바라보며 고독하게 사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으로 많다.이신부와 같은 아무런 조건없이 관심이 자애를 베푼다면 그들도 인간의 온정을 받아 용기를 잃지 않고 자활할 수가 있고 사회는 그만큼 안정과 평안을 되찾아가리라 믿는다.아무도 가지 않은 험한 오지를 신념과 용기,사랑의 결단력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온 이신부의 고귀한 정신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거 같다.

* 한국 간행물 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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