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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 Oldbo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올드보이>는 필자의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거울 속의 몬스터 같은 작품이다. 그래서 복수를 테마로 한 그 어떤 작품들보다 전복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올드보이>가 일본의 동명 원작 만화를 모티브로 했다지만 애드가 앨런 포우의 단편 소설 '윌리엄 윌슨'과 더 닮아 있는 듯하다.

이쯤에서 미리 경고한다! 리뷰에서 반전에 관한 일체의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필자도 모르게 암호나 힌트가 나갈 수 있으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이 글을 읽지 않기를 당부한다. <올드보이>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적게 알고 볼 수록 충격의 파장이 커지는 영화이므로!!

우선 애드가 앨런 포우의 '윌리엄 윌슨'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소설에 대해 간략히 설명부터 하자면 윌리엄 윌슨이라는 가명(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가명을 쓴다. 이는 곧 <올드보이> 속에서 주인공 오대수가 자신을 몬스터로 지칭하는 것과 흡사하다)의 주인공이 자신과 이름이 같고 얼굴도 거의 흡사한 인물과 조우하게 되고 그로 인해 끝없는 혼란과 자아 분열을 겪게 되다가 마침내 증오와 복수로 점철된 파국을 맞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바로 자신의 대칭과도 같은 인물과의 조우이다. <올드보이>에서 주인공 오대수는 술에 취해 경찰서에서 작은 난동을 부리는 등 남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하지만 그의 친구가 잠시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거는 사이 그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하게 된다. 그것이 15년 간의 감금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는 15년 간의 길고 지루한 시간을 버텨낸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그랬듯,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조롱하고 파멸시킨 자에 대한 복수의 일념 하나로 이를 갈며 버텨낸다. 15년 후 풀려난 오대수는 자신을 가둔 청년 실업가 이우진의 정체를 추적하며 어째서 그가 자신을 15년 동안 가두었는지를 알아내고자 한다. 영화는 바로 이 '누가', '왜'에 관한 긴박한 퍼즐게임이다. 라스트에 가서야 오대수는 자신이 그토록 복수하고자 한 이우진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대칭점 상에 놓인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전 영화의 특성상 이쯤에서 '세 치 혀'를 더 이상 놀릴 수 없겠다. 그래서 '윌리엄 윌슨'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하고자 한다.

'윌리엄 윌슨'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손바닥 안에 놓고 조롱하듯 간섭하고 좌지우지 하는 대칭의 인물에게 마침내 분노어린 응징을 가한다. 그 순간 그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과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혼란스럽게 바라보며 혼돈에 빠진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 속의 몬스터를 죽이고자 했지만 사실 거울 속의 몬스터를 죽이는 일은 거울 밖의 자신을 죽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비틀린 복수의 알고리즘은 결국 자신의 목줄을 조이게 만드는 이율배반으로 전복되고 만 것이다.

<올드보이>의 라스트에서 오대수와 이우진은 거울 속의 상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누가 진짜 '윌리엄 윌슨'(혹은 몬스터) 인지를 모호하게 함과 동시에 이제까지의 알고리즘을 허물어버린다. 또 오대수는 유리창이나 과거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자아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 때마다 오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인생을 통째로 복습할 시간이다'라고 말한 이우진의 말처럼 그는 거울의 표면을 구석구석 면밀히 닦으며 자신의 상을 분명하게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깨뜨려 버리고자 고뇌한다. 결국 <올드보이>는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돌아보고 면밀히 살피며 대칭점에 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자신의 얼굴 조차 잊고 사는 오늘날 현대인들 모두에게 감독은 작은 티끌 하나도 상세히 보이는 커다란 거울을 들이대는 것이다. '바윗돌이건 모래알이건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는 이우진의 말은 감독이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날카로운 비수이다. 이 영화의 엄청난 반전은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입김을 불어서라도 거울을 흐리멍덩하게 만들고자 하게 한다.

사실 '윌리엄 윌슨'은 포우의 워낙 유명한 단편 소설 중 하나라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읽어 봤으리라 짐작한다.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윌리엄 윌슨'이 <올드보이>와 표면적으로 비슷한 스토리를 가졌거나 결말이 유사하다라는 것은 결코, 전혀 아니다. 이야기 속에 담긴 내적인 이미지가 닮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적인 닮음은 포우의 또다른 단편 소설 '아몬틸라도 술통'과도 연관이 있다. 이 소설에서 복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길, '복수는 벌로 다스린 이에게 보복이 온다면 진정한 복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벌을 저지른 자가 자신이 처벌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역시 진정한 복수라고 말 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복수자는 자신이 복수한 것에 대해 어떤 응징도 받지 않아야 하며, 처벌을 받는 이는 그 자신이 지금 벌을 내리는 자로부터 복수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자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진정한 복수의 완성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속 최후의 복수자의 심리를 절묘하게 대변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전체적으로 <올드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 걸작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대중성과 작가주의를 절묘하게 오가며 색다른 스타일과 박력으로 관객들의 혼을 뒤흔든다. 특히 영화의 중반부 최민식이 장도리를 들고 싸우는 복도 액션씬의 박력과 리얼함은 한국 영화사상 유례가 없을 명 액션 씬으로 꼽힐 것이다.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 반전은 충격적이다 못해 장도리로 심장을 후벼파는 것만큼 전율적이다. (정말 세다 못해 지독하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혀를 내두르게 한다) 최민식의 연기는 <파이란>에서 그가 보여준 신의 경지에 오른 연기력을 다시 한번 입증함에 손색이 없다. 유지태와 강혜정의 연기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감독의 완벽한 연출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다만 아주 개인적인 견해 하나를 말하자면 극단을 달리는 이런 식의 설정, 이런 식의 분위기는 필자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듯한 우울하고 찝찝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올드보이>는 올해 <살인의 추억>과 함께 가장 잘 만들어진 한국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살인의 추억>이 그러했듯, <올드보이>도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근래 보기 드문 한국 영화 수작이다.

끝으로 계속해서 이 영화와 비교한 포우의 소설 '윌리엄 윌슨'의 도입부 문장을 올리며 리뷰를 마칠까 한다. <올드보이>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극중 오대수의 심정을 이해함에 있어 더 없이 좋은 문장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우선 내 이름을 윌리엄 윌슨이라고 해 두자. 내 앞에 놓인 이 흰 종이를 나의 본명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다. 이 이름은 이미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 경멸과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분노의 폭풍이 불어 그 유례 없는 오명이 지구 끝까지 닿았다. 아, 모든 사람들이 저버린 추방자! 대지조차 너를 영원히 저버렸느냐? 대지의 명예와 대지에서 피어오르는 꽃들과 눈부신 대기도 너를 저버렸느냐? 짙게 드리워진 끝없는 구름이 너의 희망과 천국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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