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 Blood: The Last Va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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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내 스타일의 영화였다.

장검을 든 소녀 뱀파이어 해결사가 나온다. 앳된 여고생의 얼굴을 한 그녀의 이름은 사야. 그녀는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오리지널(순종 뱀파이어)이다. 그녀는 세상의 변종 괴물들을 찾아 죽인다. 영화 MIB와 흡사한 시스템인데- 그녀가 괴물들을 죽이면 기관에서 사후처리를 말끔하게 해준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변종 괴물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고 사야는 세일러복을 입고 고등학교에 잠입한다. 마침 학교에서는 할로윈 파티가 열리고 흥청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무시무시한 피의 살육이 벌어진다.

사야는 이제껏 본 여전사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강렬한 타입의 여전사였다. 잔혹하면서도 열정적이다. 다리나 팔의 근육이 장난이 아니지만- 또 언뜻언뜻 무척 가냘픈 여고생의 느낌도 주는- 아주 묘한 매력의 캐릭터로 카리스마가 엄청나다. 특이할 만한 것은 그녀 앞에서 섣불리 '신'을 거론하면 맞아죽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은 사실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일까... 괴물들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

만약 이 역할을 실사 영화로 만든다면 일본 여배우 '쿠리야마 치아키'나 '우에토 아야'가 적역일 듯 싶다. 헐리웃 여배우 중에서 찾는다면 단연 '밀라 요요비치'겠지만, 그녀는 나이가 너무 많으니, 좀더 어린 여배우를 찾는다면 스칼렛 요한슨 정도가 좋을 듯 싶다.

영화는 피가 튀는 하드고어 스타일이다. 사야가 장검을 휘두르며 변종 괴물들을 휙휙, 베어버리는 장면들은 압권이다. 칼날이 근육을 파고드는 그 베는 느낌이 실제로 손끝에 짜릿짜릿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 영화의 최대 단점은 아마도 러닝타임이 너무 짧다는 것일 테다. 50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100분짜리 영화들보다 훨씬 낫다. 짧은 만큼 임팩트가 강렬하다. 음악과 영상의 조화가 무척 수준급이었다. 역시 일본은 애니메이션을 잘 만드는 나라다. 이 작품은 '킬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영화에 반해서 '킬빌' 중 애니메이션 에피소드의 연출을 이 영화 감독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사야는 극중 등장인물 모두에게 무조건 반말을 하는데- 당연한 일일 테다. 그녀는 1800년대부터 살아온 생명체이니.


 
p.s.

 
사야- 정말 이제껏 본 가장 이상적인 여전사였다.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과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더 잔혹하고 더 시니컬하다. 그리고 좀더 열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사야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시종일관 피 튀기는 액션을 보인다. 그리고 사야의 카리스마는 이제껏 본 모든 여전사 캐릭터들을 완전히 압도해버린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죽어가는 변종 괴물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사야- 오리지널과 변종의 차이지만 결국 그들은 동족인 것이다. 사야는 인간을 위해 동족을 살상하지만- 과연 인간은 누구를 위해서 동족을 살상하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 이 영화는 강렬한 시각적 재미만큼이나 깊은 철학적 여운을 던진다.
 
전지현 주연으로 국내에서 영화로 만든다고 한다. 원작의 아우라를 제발, 잘 살려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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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페리아 - Suspi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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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호러영화를 말할때는 호러스릴러의 원조인 <사이코>나 슬래셔무비의 시초 <할로윈><13일의 금요일> 혹은 가장 무서운 영화로 거론되곤 하는 <샤이닝><엑소시스트>를 떠올리게 된다. 아니면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스크림>이나 혹은 거슬러 올라가 같은 감독이 만든 <나이트메어>등을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호러영화를 두루 섭렵한 매니아들이라면 아마도 이러 헐리웃 식의 틀에박힌 공포영화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최근 세계적으로 그 실력을 인정받으며 급부상하고 있는 일본 호러영화에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거나 아니면 스파게티 호러의 원조인 이태리 호러의 잔혹미학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태리 호러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마 다리오 아르젠토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며 적어도 <서스페리아>라는 작품의 제목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서스페리아>가 세계적으로 미친 충격의 강도는 컸다. 국내에서도 <서스페리아>의 흥행성적은 서울에서만 무려 50만명의 관객동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당시의 배급환경과 극장수를 감안해 볼때 지금의 서울관객 150만명과 맞먹는 수치라해도 과언이 아닐테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13일의 금요일>이나 <헬나이트>등이 30만 선을 동원한 것에 비교한다면 낯설디 낯선 이태리 영화가 국내에서 세운 기록적인 흥행은 가히 사건으로 기록될 만 했다.

당시 영화를 본 관객들은 한마디로 혀를 내둘렀다. 그것은 기가 막힌 경험이자 이제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공포의 최고점이었다. 시작부터 관객의 혼을 빼놓는 극한의 잔혹함은 여성관객들의 비명소리로 극장안을 떠나가게 했으며 강렬한 사운드는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잊지 못할 끔찍한 악몽을 선사했다. 극장을 나서는 그들은 <서스페리아>의 충격에서 좀처럼 헤어날 줄 몰랐으며 그들에게 제대로 된 공포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다리오 아르젠토에 관심이 모아졌다. 비로소 호러 매니아들 사이에서 마카로니 호러의 발견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태리의 히치콕이라 불리우는 현존하는 최고의 공포영화감독 다리오 알르젠토의 1977년도 작품 '서스페리아'는 한마디로 말해서 유럽을 대표하는 호러무비다.

<서스페리아>를 논할 때에는 크게 세 가지를 손 꼽는다.

첫번째는 바로 역대 호러영화사상 단연 최고라고 회자되어지는 충격의 오프닝 씬이다. 이루 다 설명이 되지 않을 잔인함과 충격의 극한을 달리는 아트한 살인장면들은 보는이들의 혀를 내두르게 함과 동시에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금 만든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만큼 타공포영화들과는 비교도 안될 강렬한 시각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96년 만들어진 <스크림>의 오프닝씬이 잘 만들어졌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20여년 전에 만들어진 <서스페리아>의 오프닝을 패러디 한 것이며, 그 충격의 강도면에선 <서스페리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두번째로 영화 전반에 걸쳐서 풍겨져 나오는 환타스틱하면서도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들수 있다. 그 분위기라는 것은 글로서 설명하기가 힘든데, 아무튼 영화를 보는 내내 상당히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칼라플한 악몽속을 허우적거리는 듯한 느낌이다.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붉은 색깔의 조명들과 극단적인 원색의 색체들은 이태리의 유명한 락밴드 '고블린'의 기괴한 음악과 함께 어우러져서 공포의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특히 고블린의 테마음악은 강렬하면서도 극도의 공포심을 자아내는 그로테스크함이 뿜어져 나와 보는 이를 극도의 긴장상태로 몰고간다. 공포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곡임엔 틀림없다.

세번째로는 이 영화가 유명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잔혹한 살해장면들이다. 그 잔혹한 살해장면들은 다리오 아르젠토만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잔혹함의 한계를 뛰어넘어 예술적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그 어떤 호러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그만의 살해장면은 보고난 후에도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충격적이다. 과연 다리오 아르젠토가 아니면 결코 흉내낼 수도 없는 아트호러의 진수를 보여준다.

<서스페리아>의 줄거리는 수지라는 여자가 발레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미스테리한 일들을 겪게 되다가 결국 학교에 숨겨진 충격적인 비밀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그다지 독특할 게 없는 내용이다. 마녀라는 오컬트적인 분위기를 헐리웃 슬래셔무비와 교묘하게 결합시켜 놓은 듯한 시나리오다.

하지만 <서스페리아>의 미덕은 결코 스토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매니아라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영화는 작년 칸영화제에 디지털복원판으로 재상영되었고 객석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그와 동시에 헐리웃에서 리메이크를 결정했다고 한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마침내 헐리웃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다리오 아르젠토의 진정한 최고걸작은 <서스페리아>가 아니라 그보다 2년전에 만든 <프로폰도 로쏘>임이 틀림없다고 본다. 이 영화도 재개봉 혹은 실력있는 감독이 멋지게 리메이크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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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 센스 - The Sixth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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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센스>는 한 마디로 1999년 최고의 충격이 아니었을까?

미국에서 처음으로 이 영화가 개봉 되었을 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제작자 측에서 철저히 비밀 유지를 했다고 함) 무방비로 영화를 감상하게 된 사람들은 태어나서 최고로 황당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말 그대로 두 눈 뻔히 뜨고 완전히 속은 느낌이었다. 영화는 분명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되고 이제 끝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영화는 차분히 정리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관객들의 기대를 처참하게 무너뜨리며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고 플래쉬 백과 함께 터지는 충격적인 반전은 관객 전원을 바보로 만들었다. 관객들은 그 믿을 수 없는 결말에 '과연 저것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을 제기 하게 되었고 신들린 듯 또다시 표를 구입해 극장으로, 극장으로를 외쳤다. 관객들로 하여금 꼭 두 번 이상 보게금 만드는 마력이 있는 영화. 덕분에 영화는 개봉 5주 연속 박스 오피스 1위라는 대 신기록을 세우며 북미지역에서만 2억 7천만불이라는 경이적인 흥행기록을 수립한다. <식스센스> 그 마지막 5분의 충격은 마치 95년 개봉되어 전 세계 영화인들을 K.O시켰던 가공할 스릴러 <유주얼 서스펙트>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유주얼 서스펙트>때도 분명 그랬다. 관객들은 모든 것을 결론 짓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고 그 순간 마지막 5분의 충격은 안심하고 있던 관객들의 뒷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케빈 스페이시의 발걸음이 선사했던 그 기막힌 반전의 황홀경. 더 이상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위대한 반전이 <식스센스>에서 다시한번 부활했던 것이다.

그 대단한 반전때문인지 흔히들 <식스센스>를 반전 빼면 시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제이슨 친구는 <식스센스>에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뒤집어 버리는 엄청난 반전의 충격 뒤에 가려져서 쉽사리 인식하지 못했던 영화의 진짜 매력을 이제부터 얘기해 보고자 한다. 이제부터 영화의 반전에 관해서 직접적인 언급은 없겠지만 간접적인 언급은 있을 수 있으니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과연 있을까?)이라면 이쯤에서 리뷰 읽기를 그만두시길...

이 영화는 사실 유령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영화를 전체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이는 브루스 윌리스가 맡은 말콤 박사이지만 영화의 중심에 있는 이는 꼬마 아이 콜 이다. 이제 잠깐 콜의 이야기를 해 보자. 콜의 눈에는 유령이들이 수시로 보인다. 그것은 육감이 아주 발달된 특별한 능력이다. 그 능력 덕분에 콜은 반 아이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더구나 콜에겐 아버지가 없다. 또 어머니도 바쁜 일과때문에 아이에게 세심한 신경을 쓸 수 없다. 아이는 자연스레 자신만의 비밀을 홀로 간직하게 되고 쉽사리 어머니께 말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는 곧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미국의 파괴되어가는 가정사를 대변하는 전형이다. 그리고 감독은 그러한 환경속에서 오직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버린 소년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소년은 스스로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해 홀로 고민하게 되고 공포와 고립이 반복된다. 그러다가 콜은 자신의 명성이 과장되어진 빈껍데기였음을 깨닫고 번뇌하는 심리치료사 말콤 박사와 조우하게 된다. 이들의 만남으로 인해 내러티브는 사실상 안정된 궤도에 들어서게 된다. 상처받은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배려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치유해 간다는 보편적인 플롯으로 접어든 것이다.

말콤 박사는 화려했던 자신의 인생경력이 한 사건을 계기로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고 심리치료사라는 존재의 가치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져든다. 나는 누구인가, 심리치료사이다. 심리치료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해 주는 일을 한다. 상까지 받은 나는 이제 껏 상처받은 이들을 제대로 치료해 주었던 것인가, 하지만 나에게 치료를 받았던 이가 미치광이 연쇄살인범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제 껏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치료했던 거란 말인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가정도 뒤로하고 깊은 고뇌에 시달리고 있던 말콤 박사는 콜을 통해 자신의 지난 과오를 회복하고자 한다.

샤말란 감독은 영화를 굉장히 차분하고 안정되게 이끌어간다. 다소 지루하리만치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기법이었다. 정말로 제이슨 친구는 처음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때 도중에 깜빡 졸았던 기억이 있다. 그 때문에 희미하게 놓쳐버린 몇 몇 주요 복선장면들을 재 확인 하기 위해서라도 영화를 다시 보아야만 했으니~!

이 영화의 조상이 <엑소시스트>와 히치콕의 영화들임은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하더라도 쉽게 수긍이 갈만한 사항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소시스트>도 히치콕의 스릴러들도 결코 지루할 틈이 없는 영화이다. <엑소시스트>의 90년대 판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을 정도로 <식스센스>는 오컬트 무비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샤말란 감독은 기존의 장르적인 연출법과는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비법으로 영화에 기묘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영화는 한 편의 심리드라마 혹은 휴먼드라마처럼 기복의 변화없이 침착하고 조용하게 진행된다. 관객들로 하여금 금방이라도 뭔가 근사한 장면이 터질 것이라는 기대를 잔뜩 하게 하지만 끊질길 정도로 차분한 호흡에는 변화가 없다. 그래서 필라델피아의 거리에는 마치 말콤 박사와 콜 외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없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식 스쳐지나가는 무존재의 존재인 유령들이 더욱 강렬한 느낌으로 와 닿을 수 있었던 것일게다. 샤말란만의 이러한 독특한 호흡법은 영화의 적재 적소에서 보석같이 빛을 발하다가 최후에 이르러서는 폭발하듯 최대치의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것이 샤말란 식 충격효과인 것이다.

샤말란의 각본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흔한 소재를 가지고도 관객들의 호흡을 자유 자제로 조절하며 결국 대중들의 감정을 기가 막히게 이끌어내는 탁월한 스토리 라인은 가히 천재적이다. 반전을 제외한다면 <식스센스>의 스토리는 그저 뻔한 심리극 혹은 가족애를 불러일으키는 디즈니용 휴먼드라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비슷한 예로 <스튜어트 리틀>역시 흔하디 흔한 가족용 드라마라는 소재이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샤말란만의 재기 넘치는 각본덕에 비슷한 소재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일단 재미면에서 말이다~!

샤말란은 조용히 영화 곳 곳에 복선을 숨겨두었다. 그리고 콜의 특출한 능력이 밝혀지기 전까지 그저 소외된 소년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그 속에서 차츰 존재감이 짙은 유령들을 등장시키며 사건에 대한 모호함을 시각적인 공포감으로 흐려놓는다. 관객들로 하여금 진실에 관한 조금의 갈피도 잡을 수 없게 만들어 놓고선 마지막에 가서야 결정타를 날린다. 그리고 관객들이 유령이란 존재에 대한 놀라움, 기이함, 경외감에 빠져 있을 때 결국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말하며 감동으로 대단원을 마무리한다.

인도 출신의 젊은 감독, 샤말란. 그는 애초부터 인간의 정체성과 고립에 관해 끝없이 탐구하는 감독이었다. <식스센스> 이전의 두 편의 영화 <분노의 기도><와이드 어웨이크> 역시 이러한 사상에 기초를 두고 만든 영화이며 그의 후속작이었던 <언브레이커블>이라든가 최신작 <싸인> 역시 비슷한 주제와 갈등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그는 <식스센스>를 통해 오컬트 영화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방식에서 접근해 보고자 했던 것일게다. 성장기에 막 접어든 콜이 느껴야만 했던 유령들에 대한 두려움은 곧 그 시기 소년들이 겪게 될 미지의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기댈 수 없는 홀로서기에 대한 불안감과 세상 속에서 과연 나는 누구일까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일련의 인생과정이다. 소년은 결국 두려움의 존재에 맞서 과감히 부딪히게 되고 해결방안을 찾는다. 비로소 세상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콤 박사는? 그도 역시 정체성과 소외감에 고뇌하는 인간이다. 화려한 명성들이 거품에 불과함을 깨닫고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분투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지금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탐구는 결국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숙제이다.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 여기에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또, 대답할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부분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 수많은 타인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실상 나 혼자 떠들고 있으며 커뮤니케이션은 상실 당했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가설 조차도 내가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온 오류성 결론일지 모른다. 아예 처음부터 나란 존재는 없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가 삶과 죽음의 뚜렷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과연 내 얼굴은 존재하고 있을까? 만약 그 질문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당신이 이제 껏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모든 정서적 관념들에 위배되는 지독한 반전이라면,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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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로얄 - Battle Roy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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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일본에서 개봉된 배틀로얄은 세기말적인 사회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2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4주만에 140만명의 관객동원을 하는 등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뿐만아니라, 작품적인 면에서도 인정을 받아 세계 각 공포,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크고 작은 상을 휩쓸었으며 2000년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총 9개부분을 휩쓸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10분만에 표가 매진되는 등 관객들의 열광적인 관심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본 느낌을 말해보라면 공포영화 매니아라 해도 상당한 충격으로 와닿을만큼 엽기 그 자체였다. 야쿠자물을 많이 만들었다는 노장감독 답게 영화는 오프닝부터 베르디의 웅장한 레퀴엠과 함께 관객들의 시선을 완벽하게 사로잡는다. 그리고 42명의 학생들이 어떤식으로 친구를 살해하는지의 과정을 꼼꼼하게 보여주며(자막까지 넣어주면서) 최후의 한 명이 과연 누가 될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물론 사건의 진행은 한편의 액션영화를 보는 듯, 빠른 템포를 보이며 라스트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며 폭발하는 듯한 짜릿한 스릴이 계속된다.
중요한 것은 그 많은 캐릭터 하나 하나에 각각의 사연과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엇비슷해질수도 있었던 수많은 캐릭터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들을 부여받으며 살아 숨쉬는 듯한 리얼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전적으로 탄탄한 각본과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 덕분일 것이다.(마치 큐브에서 개성이 강한 6명의 서로다른 캐릭터들이 등장해 호러판타지임에도 리얼함을 선사했던 것처럼)
웅장한 음악과 감미로운 음악의 오묘한 조화속에서 펼쳐지는 액션과 드라마의 보기좋은 만남은 때때로 보는이의 가슴을 벅차게 할 만큼 멋진 박력을 선사했다. 정말로 멋들어진 영화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마지막까지 영화속에 몰입해서 보고 나면 솔찍히 카타르시스 말고는 별로 남는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영화를 두번보기를 권하고 싶다. 배틀로얄에서 그려내고 있는 극단적인 폭력은 단순히 【BR법】이 냉혹한 약육강식이 존재하는 인간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메시지 이상의 것을 말하고자 하고 있으니.
영화를 다 보고나서 배틀로얄이 던져준 시각적인 충격을 배제한 채 다시한번 영화를 감상해보았다. 시종일관 피튀기는 영상에 교묘하게 가려져 있던 무언가가 분명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삶의 방식을 포괄하는 순수한 진리였다. 감독은 분명 그것을 말하고자 했다.
야쿠자영화만을 전문적으로 만들어온 하드보일드파 노장감독 후카사쿠 킨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세기말 버전 '파리대왕'은 그 자신의 전문분야인 남성적인 강렬한 액션씬으로만 무장할 법도 한데 그는 기묘하게도 순간순간 만화같은 발상으로 영화의 색깔을 모호하게 버무렸다.  


가냘픈 왕따 여학생 노리코를 보호하기 위해 연신 '널 지켜줄거야'를 반복하는 주인공이라던가 짝사랑했던 남학생의 품에 안겨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는 미소녀의 설정(그것도 정말 우연찮게 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설정이라니...), 사랑하는 여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면서도 그녀의 안전을 걱정해주는 순정파 남학생, 자신을 죽인 남자에게 고마워,라고 말하며 죽는여자,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연애소설같은 자막들. 이런 순정만화적인 장치들은 액션전문감독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바로 여기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감독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과 죽음의 순간에서도 아름다웠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리라. 그것은 붕괴되어 버린 미래세계에서 유일하게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에너지자 희망인 것이다. 배틀로얄이 만들어지기 몇 년 전부터해서 일본내에 유난히 엽기적인 살인사건들이 많았다고 한다. 예를들어 지하철 독가스사건부터해서, 갓난아기의 목을 잘라 초등학교 교문에 걸어놓는 사건이라든가 학교내 이지매의 폭력사태가 위험수위를 넘어 붕괴의 지경에 까지 이르러는 등.
배틀로얄 속의 일본처럼 이미 일본사회에서 겉잡을 수 없이 터지고 있는 엽기범죄들에 국가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심각했으며 영화속의 기타노 선생처럼 후카사쿠 감독은 위태로운 일본사회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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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림 - Sc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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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첫째주에 개봉해서 무려 27주간 박스오피스 10위권내에 머물며 1억 3백만불(전세계적으로 1억 8천만불)이라는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한 90년대 최고의 호러무비.

<스크림>의 탄생은 분명 호러영화사에 큰 사건이었다.

<스크림>은 96년 만들어진 이 후 무려 2년 반이 지난 99년 2월에 국내에 개봉이 되었다. 10대들의 이유없는 살인이라는 것과 지나치게 잔혹하다는 이유로 몇 차례나 심의에서 반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국내 호러영화 팬들사이에선 그 궁금증이 극에 달하게 되었고 굉장히 무서운 영화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필자의 경우 <스크림>의 더딘 개봉에 울화통이 터져 미국의 아는 사람을 통해 원판 비디오를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스크림>에 거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소문만큼 그렇게 무서운 영화도, 심의가 수차례나 반려될 정도로 잔혹한 영화도 아니었다. 하지만 <스크림>은 아주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임엔 틀림없었다. 적어도 역대 호러영화를 논할때 절대로 빠져선 안될 걸작임은 확실했다.

<스크림>은 공포영화에 대한 공포영화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자 뛰어난 점이다. 무수한 걸작공포영화들을 언급하면서 그 영화들이 범했던 모순과 오류들을 교묘하게 역이용한다. 천재 작가 캐빈월리엄스가 3일만에 완성했다는 각본은 완벽했으며 시종일관 독설과 유머로 눈부시다.

74년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은 당시 전세계를 혼동에 빠트렸다. <드라큐라>와 <엑소시스트>로 대표되던 호러무비사에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의 탄생은 일대 혁명이었다. 오컬트 장르가 주축이 되어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고급호러무비를 지향해왔던 그때까지의 공포영화사에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은 상당히 불쾌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5명의 젊은이들이 우연히 머무르게 된 텍사스의 낡은 저택에서 한명씩 잔혹하게 죽어간다는 단순하고 끔찍한 설정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은 개봉과 동시에 젊은이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평단으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 기존 호러영화의 귀족주의를 철저히 배제한 이 작품은 카메라를 변두리의 하층민에게로 돌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면을 쓴 엽기적인 살인마가 등장해 기계적으로 젊은이들을 죽여간다는 설정과 최후의 생존자가 여성이되어 살인마와 오랜 사투를 벌인다는 등의 기존의 공포영화에 없었던 새로운 법칙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슬래셔 무비의 탄생이자, 확립이었다. 고정관념을 깨트린 것이다. 그것은 78년 <할로윈>의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80년 <13일의 금요일>, 84년 <나이트 메어>가 개봉된 이 후 그 아류작들이 정말로 질리도록 만들어졌고 그것은 마치 팥없는 붕어빵처럼 실속없이 대량으로 찍어내졌다. 90년대 초반, 마침내 포화상태를 이기지 못하고 슬래셔 장르는 자멸해버리고 말았다.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었다. 가면을 쓴 멍청한 살인마는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주지 못했으며 관객들은 감독의 속임수에 속지 않게 되었다. 이를테면 술에 찌든 방탕커플들은 제일 먼저 표적이 되었고 살인마가 나타날 것이 뻔하지만 언제나 문을 열곤 했다. 가슴 큰 미녀들은 멍청하게도 계단위로 도망을 쳤으며 죽었다고 안심하는 순간 살인마는 두,세번 정도 더 일어났다. 호러매니아들은 슬래셔무비에 야유를 보냈으며 공포영화는 완전히 죽어버렸다. 89년까지 줄기차게 만들어졌던 국가대표 호러영화 <13일의 금요일> 시리즈 마저도 9편에서 맥이 끊어졌다. 아무도 호러영화에 눈길을 돌리지 않을 그 암흑시기에 젊은 호러영화광 캐빈윌리엄스의 머릿속엔 기가막힌 스토리가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스크림>은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이 그랬듯이 공포영화의 일대 반란이었다. 고정관념을 다시한번 무너트린 것이다. 이 영화에서 기존의 슬래셔무비의 익숙한 공식들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살인마는 문뒤가 아니라 등뒤에서 기습적으로 나타나며 언제나 관객보다 한박자정도 앞서있다.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리는 작가의 천재성은 영화의 오프닝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한밤중 전화를 받은 케이시는 낯선 이로부터 공포영화에 대한 퀴즈를 받게 된다. 그녀를 지켜주어야만 할 럭비선수인 남자친구는 일찌감치 살인마의 먹이가 되어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13일의 금요일의 살인마가 누구냐?"는 질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이슨!"이라고 소리친 케이시는(관객들) 살인마가 쳐놓은 교묘한 트릭에 속아넘어 간다. 그녀는(관객들) 그 자신이 수십번도 더 본 영화속의 아이러니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당연히 죽을 줄만 알았던 케이시는 2층으로 도망치지 않고 곧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온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녀가 드류베리모어임을 감안하고 이제 영화가 시작임을 감안할 때 주인공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 주리라고 기대를 한다. 더구나 케이시의 부모님들이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한끝발 차이로 그녀는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주인공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처절하게 무너지고 케이시의 등장은 내장이 파헤쳐져 목이 매달린 것으로 끝이 나고 카메라는 곧바로 다음 희생자를 향해 돌아간다. 이쯤에서 관객들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저 여자가 주인공인가? 아니면 저 여자도 곧바로 죽어버릴까? 그렇다면 과연 누가 주인공인가? 그리고 과연 살인마인 고스트 페이스의 정체는?

마치 위기감을 느낀 제이슨과 프레디 부기맨등 슬래셔무비의 대표 캐릭터들이 모여 긴급대책회의를 거쳐 자신들의 우매함을 반성하고 고심끝에 고스트 페이스라는 새로운 슈퍼캐릭을 만들어 낸 것만 같다.

영화는 공포영화의 모든 법칙들을 거스르며 장르에 익숙한 관객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예측할 수 없는 플롯들로 무장한다. 누가 진정한 주인공(최후의 생존자)인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두가 가해자이며 동시에 희생자가 되어버리는 기가막힌 상황이 연출된다. 이 신선한 충격은 갈때까지 간 슬래셔무비의 새로운 대안이며 혁신적인 발견이었다. 식어버린 호러매니아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놓기엔 충분했으며 그것은 곧바로 박스오피스를 통해 입증된 것이다.

3일만에 각본을 완성한 캐빈윌리엄스는 말그대로 공포영화광이다. 아마도 그는 세상의 모든 공포영화들을 빼놓치 않고 섭렵했을 것이며 인상적인 플롯들을 줄줄이 꿰찰 정도로 대단한 기억력을 가졌다.

<할로윈>과 <프롬나이트><나이트메어>를 보며 자란 세대인 그는 일찌기 슬래셔 무비의 모든 법칙들을 마스터 해버린다. 그리고 비대해 질대로 비대해져버린 장르의 법칙에 날카로운 일침을 가할 새로운 스토리를 구상해나간다.

젊은 천재의 결실은 <나이트메어>등 16편의 공포영화만을 만들어 온 호러거장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공포영화 매니아들 사이에서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웨스 크레이본은 <스크림>의 시나리오에 완전 매료되고 캐빈 윌리엄스와 함께 멋진 합작품을 이룩해 낸다.   

<스크림>은 재기발랄한 영화이다. 웨스와 캐빈 커플은 반복되어온 공포영화의 법칙들을 줄줄이 꿰차고 앉아서 이를 천재적으로 조율해 낸다. 장르의 법칙을 과감히 깨트리며 재창조한다. 또한 일부러 반복하기도 하며 허를 찌른다. 호러무비의 해체와 재조립이라는 기막힌 승부수는 관객들의 혼을 빼놓았다. 살인마의 정체가 밝혀지는 라스트까지 관객들은 아무도 살인마를 예상할 수 없었으며 설사 예상했다 치더라도 절대로 알아맞출 수 없는 기막힌 반전으로 그들을 경악케했다.

감독은 거장답게 섬세하고 강렬한 연출력으로 박진감 넘치면서도 곳곳에 자신만의 독특한 유머들을 배치해 둔다. 게일과 시드니의 관계를 통해 메스미디어의 횡포를 우스꽝스럽게 고발하기도 하고, 괴팍한 교장을 통해 기성세대를 조롱하기도 한다. 또한 <나이트메어>는 1편빼고 모두 꽝이라던가, 교장의 죽음직전 프레디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청소부(감독 자신)를 통해 매너리즘의 관습조차 기묘한 위트로 활용해버린다.

하지만 역시 수훈은 빼어난 각본의 힘에 있었다. 장르의 전복은 오프닝부터 그 빛을 발해서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게 만든다. 특히 주도면밀하게 위험장소들을 확인해 나가던 교장이 살인마가 파놓은 도저히 걸려들지 않을 수 없는 함정속에서 어이없이 죽어버리는 대목은 기존 호러무비(기성세대)에 대한 통렬한 반격이었다. 교장의 죽음과 함께 이어지는 대단원의 혈전은 정교한 각본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영화의 하일라이트이다. 모든 법칙들은 무의미해지고 그 때까지 <스크림>을 지탱해온 재기발랄한 규칙들마저도 또 다시 무너지며 혼동과 공포속으로 몰아간다. 이러한 재치넘치는 상황설정들은 <스크림>의 속편으로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는 장르의 법칙들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그 위에 <사이코><엑소시스트><나이트메어>등 유명한 호러영화들을 절묘하게 패러디하며 동시에 전복시킨다.

바로 이러한 장점들이 모두가 지겨워하며 외면하던 슬래셔무비의 부활을 알리는 강점으로 작용했으며 그것은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던 호러무비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단언하건대 향후 20년 이내 이 정도로 주목받는 슬래셔무비가 등장하기는 힘들것이다! 울궈먹기가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참신함에 도전하지 않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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