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블루 - Perfect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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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사건은 교묘하게 꾸며진 살인사건입니다. 나는 그 사건의 탐정입니다. 그리고 증인입니다. 또한 피해자입니다. 게다가 범인입니다. 나는 네 사람 모두 입니다. 그럼, 대체 나는 누구일까요?"

프랑스의 천재 추리 소설 작가 세바스티앙 자프리조의 미스터리 소설 '신데렐라의 함정'의 홍보문구이다. '신데렐라의 함정'은 <퍼펙트 블루>와 비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작품이며 위 홍보문구야 말로 <퍼펙트 블루>의 혼란스러운 이미지를 대변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후지TV에서 시나리오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무라이 사다유키가 '신데렐라의 함정'을 보았는지는 의문이나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미스터리의 성향이 세바스티앙 자프리조가 '신데렐라의 함정'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그것과 닮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두 작품의 직접적인 스토리 라인은 다르다. 자아 혼돈을 다루고 있지만 <퍼펙트 블루>는 보다 더 사이코드라마적이다. 또한 오늘날 현대인들의 의식세계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 시스템, 연예산업의 병리를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만의 매력일 테다.

여성 3인조 댄스 그룹 '참'은 귀엽고 청순한 이미지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이돌 스타이다. 그러나 맴버들 중에서 특히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미마가 '참'에서 빠지게 된다. 다른 맴버들에 비해 나이가 제일 많았던 그녀는 아이돌로서의 생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이에 소속사는 그녀를 본격 성인 배우로 탈바꿈시켜 또다른 상업적 가치를 꿈꾼다. 미마로선 아이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지만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신인 배우로서의 길을 열심히 걷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배우로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 그녀는 강노높은 노출씬이나 강간씬 마저 감수해야 했다. 이에 언론과 각종 연예계에서는 그녀의 파격적 변신에 침을 흘리며 반기지만(상품화 가치로서), 예전의 그녀를 사랑했던 미마 마니아들은 섹스 코드에 어필하려는 그녀의 성인 신고식에 야유와 질타를 보낸다. 그러한 이중적 반응에 미마는 이미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기에 인내하고 감수해야 할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위안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나약한 자기 암시였을 뿐 그녀는 순간순간 푸르게 빛났던 아이돌로 되돌아가고픈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럴 때마다 !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과 의식마저 제어할 수 없는 무중력의 상태가 되어 또 다른 자아와 마주치게 된다. 그 즈음 인터넷에 '미마의 방'이라는 홈페이지가 개설되고 그곳은 아이돌이었던 미마의 일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이다. 성인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실의 미마는 예전의 순수했던 모습 그대로 남아 여전히 미마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초현실 속의 미마를 바라보며 악몽과도 같은 실상과 허상의 대립에 괴로워한다. 때를 같이 해서 그녀가 출연중인 범죄 드라마 '더블 바운드'의 제작진들이 한 명씩 잔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마는 현실의 자아, 초현실의 자아, 배우로서의 자아, 드라마 속 캐릭터로서의 자아, 미마 마니아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아, 등 수없이 나뉘어지는 자아분열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녀는 혼돈에 빠진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무엇이 진짜 나인가,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저주하는가, 그래서 살인을 저지르는가'

이러한 자아 혼란은 비교적 최근에 개봉되어 걸작의 반열에 오른 <아이덴티티>를 연상시킨다. 카메라가 다중 인격 소유자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버려 제 3자의 이야기인양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며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그 모호함 속에서 불안한 공포를 효과적으로 자아냈다는 점이 두 작품의 공통된 정서이다.

<퍼펙트 블루>는 추상적 공포와 현실적 공포 모두를 효과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미마가 그녀의 초자아와 대립하며 겪게되는 끔찍한 악몽들은 이 영화의 백미로 영화 <야콥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한다. 쉴 새 없이 뒤바뀌는 현실과 환상의 교차는 보는 이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는 진실마저 의심해 보게 만드는 놀라운 최면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매트릭스>의 현실 공간이 사실은 모두 허구이며 '장자의 호접몽'에서 사실 나비가 인간의 꿈을 꾸고 있다는 사상과도 일치한다. <공각기동대><오픈 유어 아이즈>등 최근 동서양을 막론하고 초미의 화두로 떠오른 '정체성 혼란'의 문제를 <퍼펙트 블루>역시 현란한 시각적 장치로 담아내며 보는 이를 전율케 한다. 또한 <퍼펙트 블루>에서 다루어지는 끔찍한 살인 장면, 강간 묘사, 누드 촬영 씬 등은 실사 영화를 능가하는 사실적인 충격을 안겨다 준다. 송곳으로 눈을 찌르고 눈알을 파내고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 등의 고어적인 묘사는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호러 영화로서도 손색이 없음을 증명해 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살해 장면 조? 宕?영화 속에서 내내 진행되는 드라마 속의 이야기와 교묘하게 맞물리며 그것이 진짜 살인인지 드라마 속의 가짜 살인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아쿠아리스>의 초반 무대 살해씬이 살짝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추상적 미학으로 승화 시켜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무엇보다 강렬한 사운드와 파격적인 영상미가 감각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영화를 시종일관 흡입력있게 이끌어 간다는 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그러한 조화로움이 가장 장엄하게 빛을 발하는 부분이 라스트의 추격씬이다. 실사, 애니를 막론하고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 시퀀스 씬으로 손색이 없을 듯!)

영화는 라스트에 이르러서 의외의 반전을 내세우지만 아주 예측할 수 없었던 반전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애거스 크리스티식의 정교한 퍼즐 플레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마가 겪게 되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가공할 악몽과 혼돈이야 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인 것이다. 때문에 이 추상적 퍼즐 맞추기의 진면목은 결국 누가 범인인가 하는 단순 추리기법인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마저 미마의 자아 속으로 녹여버리는 경이로운 충격, 그 자체에 있다.

한가지 필자가 흥미로웠던 것은 수년 년 전에 만들어진 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제와 스토리 라인이 지금의 국내 연예계 현주소와 너무 닮아 있는 듯했다는 것이다. 청순한 이미지의 아이돌로 출발해서 청순미가 바래질 때쯤 파격적 성인 코드를 내세우며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더 나이가 차서 가수로서의 상업적 가치를 잃게 되면 누드 집, 에로 배우, 혹은 다른 연예분야로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새로운 상품가치를 얻어내려는 몸부림들이 영화속 미마와 너무나도 닮아 있는 듯하다! 상품화를 위한 착취에 희생되는 스타들의 뒷모습에 이토록 정면으로 메스를 들이 댔다는 것에서 <퍼펙트 블루>의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문득 '하늘색 꿈'의 가사들이 미마의 외침으로 다가온다! 청초한 하늘빛 고운 눈망울! 잃고 싶지 않았던 완전무결한 청색자아! 세상사에 시달려가듯 자꾸 흐려지는 내눈이 싫어! 너무 쉽게 낡아가는 세상에 또 시간 속에 난 지금 어디에 서 있지, 어디에서 날 찾을 수 있을지! 어린 나를 자라게 하던 푸른 꿈 속으로 그 푸른 시간 속으로 가고 싶어!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냐! 날 죽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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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 - Sig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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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은 작은 시골 마을의 한가로운 풍경과 옥수수밭을 경작하는 그래함 일가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샤말란의 영화는 범상치 않은 오프닝이 기다리고 있지요~

곧이어 창문에 뭔가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그래함의 단잠을 깨웁니다. 하루 아침에 그래함의 농장 한 가운데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스테리 써클 흔적이 발견된 것입니다. 넋을 잃은 듯한 그래함 가족은(그래함, 그의 동생 메릴, 그의 아들 모건, 그의 딸 보) 이 기막힌 광경의 미스테리 써클이 과연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의문에 휩싸입니다.

그래함은 몇 개월 전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그동안 해 왔던 신부직을 그만둔 상태로 믿음에 대한 회의와 혼돈에 빠져있는 상태죠. 미스테리 써클 이 후 그래함 가족에게는 기괴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아들 메릴은 외계인의 존재를 강하게 믿기 시작하며 딸 보는 물맛이 이상하다면 집안 이 곳 저 곳에 물컵을 어질러 놓습니다. 또한 집 주위를 맴도는 정체불명의 괴인, 밤마다 짖어대는 개의 울부짖음, 깊은 밤 농장에서 목격한 수수께끼의 그림자, 불길한 인기척. 세계 곳 곳에서 또 다른 미스테리 써클과 외계인 목격사례들이 속보되고 그래함 가족은 자신들을 위협해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에 불안해 합니다.

<식스센스>와는 달리 <싸인>은 상당히 흥미진진한 미스테리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연이어 터지는 의문의 사건들과 꼬리를 무는 모호한 현상들이 관객들을 계속해서 스크린 속에 몰입시킵니다. 조용하게 일관하다 폭발하듯 터지는 라스트의 기막힌 반전으로 영화 전체를 재 해석하게 만들었던 <식스센스>에 비한다면 이 영화는 <언브레이커블>식에 더 가까운 영화라 할 수 있겠네요. 또한 <식스센스>때에는 없었던 유머러스 한 요소들이 상당부분 배치되어 있어 긴장감 속에서도 느닷없이 폭소를 자아내게금 합니다.

아내의 죽음과 미스테리 써클, 꼬리를 물고 터지는 기이한 현상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그림자. 이 모든 미스테리의 조각들은 라스트를 향해 박력있게 치닫습니다. 그리고 라스트에 이르러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하며 지금까지 그래함 가족을 위협했던 존재의 실체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최후의 반전.

이 영화는 <식스센스>식의 깜짝 트릭이 주를 이루는 영화는 분명 아닙니다. 샤말란 감독도 얘기했듯 더 이상 자신에게 반전을 기대하지 말라는 말처럼, <싸인>은 그의 영화 중 가장 약한 반전을 가진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슨 친구의 생각은 <싸인>이야 말로 가장 샤말란 감독다운 영화다라는 결론을 조심스레 지어봅니다.

<싸인>은 호러스릴러, 혹은 심리스릴러로 구분하기 보다 잘 만들어진 SF스릴러 혹은 가족용 오락영화로 보는 편이 훨씬 감상하기에도 좋을 듯싶습니다. 샤말란 감독은 흔한 소재를 가지고 기존의 장르 관습에 머무르지 않으며 자신만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갈 줄 아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감독입니다. 이를테면 <싸인>은 이미 수십번도 더 다루어진 바 있는 <엑스파일> 혹은 <맨인블랙>식의 초자연 과학영화 입니다. 하지만 <싸인> 에서는 <엑스파일>의 모습도 <맨인블랙>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싸인>은 스릴러와 유머, 그리고 긴장감이 대중들의 정서적인 관념과 기막히게 반응하며 멋진 조화를 이루는 오락영화 입니다. 바로 이것이 샤말란 식 각본의 탁월함이죠~! 흔한 소재를 가지고도 대중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꿰뚫어보며 그들 다수가 목말라하는 전개방식으로 이야기를 힘있게 이끌어 갑니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관객층이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는 장르적 매력을 정확히 읽어내어 마침내 그들의 정서를 자유 자재로 쥐고 흔들 줄 아는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이죠. 이러한 능력때문에 그를 21세기 히치콕, 혹은 스필버그라 칭송하기도 합니다.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샤말란은 이제 완전히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자연스레 대중들의 정서를 조종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젊은 천재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죠스>와 <이티>로 전 세계 대중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으며 새로운 영화 문법을 제시했듯이 이제 샤말란이 그 뒤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음이야기나 결말이 뻔히 내다보이는 이야기는 절대로 만들기 싫다,고 말하는 샤말란 감독의 말은 곧 그의 영화만들기 자세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싸인>은 영화가 어떤식으로 이어질지 쉽사리 예측하기 힘든 영화였습니다. 뜻밖의 결말(혹자는 황당하다고도 할만한)로 치닫는 라스트를 보며 이 감독의 머릿속은 정말로 예측할 수 없구나, 싶었습니다. 결국 엔딩 자막이 오르기 전까지는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설때즘 비로소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싸인>은 결코 호러물이나, 심리 미스테리 물이 아닙니다. <식스센스>처럼 뒷통수를 치는 기막힌 반전은 없지만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공포의 실체와 조우하게 되는 라스트 5분, 반전과 함께 터지는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와 놀라운 시각적 재미는 만점 오락영화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전혀 무섭지 않은 영화냐하면 그건 분명 아닙니다. 호러영화가 아니라고 해서 무섭지 않으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결국 호러도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는 오락적 요소의 하나죠~ <싸인>은 영화 곳곳에 머리끝이 쭈뼛 서는 듯한 오싹한 공포가 많이 있습니다. <싸인>을 두고 여러가지 평과 해석이 많지만 개인적인 견해로 요약해 보자면 '히치콕의 스릴러적 요소와 스필버그의 오락적인 요소가 절묘하게 조우된 21세기 샤말란 표 SF스릴러' 바로 이것이 <싸인>입니다.

참고로 <식스센스> <언브레이커블> 등의 샤말란 식 반전은 일반적인 반전과 많이 틀리죠~ 이를테면 누군가가 범인이다, 혹은 모든 사건의 주도자는 누구이다, 식의 극단적인 반전이 아니라는 겁니다. 샤말란 식 반전의 특징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부분에서 터져나오는 비밀이 결국 모든 의문의 핵심이었다, 입니다. <싸인>역시 그러한 반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물들간의 일상적인 대화와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 모두가 샤말란 식 반전에 대한 복선임을 명심해 두세요~!

잘만들어진 오락영화를 찾는 분이나, <식스센스>식의 반전을 기대하지 않는 진정한 샤말란의 팬이라면 꼭 한번 보세요~! <싸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보는 재미가 가득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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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 Secre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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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필자는 <러브레터><철도원><4월이야기><쉘위덴스>를 통해 일본의 멜로물 혹은 드라마가 가지는 독특한 강점과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특히 <러브레터>의 경우 너무나도 잘 만들어진 멜로물이라고 밖에 더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기발한 설정과 뛰어난 각본, 세심한 연출력뿐만 아니라 나카야마 미호의 매력이 영화속에서 충분히 발휘되어 강렬한 힘을 발휘했고, 시종일관 만화같은 코믹터치와 감수성으로 일관하던 영화가 라스트에 이르러서 심금을 울리는 감동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과 함께 진정한 첫사랑의 비밀이 밝혀지는 대목은 완벽하다고 밖에 말할수 없습니다. 

필자가 가장 싫어하는 장르 중 하나가 바로 멜러물 입니다.
이를테면 '미워도 다시한번' 같은 류... 솔직히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기위해서 처절할 정도로 가혹한 운명을 끊임없이 가중시키며 혹독하게 괴롭히는 방식을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래도 안울래?'식의 억지 눈물짜기를 굉장히 싫어하죠.
하지만 국내에서 만들어진 멜로물의 대부분이 이 <미워도 다시한번>식의 틀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분위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웬지 멜로물 하면 시종일관 수도꼭지 튼 것처럼 눈물만 흘리는 어둡고 축축하고 무거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멜로물은 <8월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죽음전 마지막으로 찾아온 사랑이라는 독특한 소재가 죽음과 사랑이라는 두가지 테마 모두를 적절하게 감싸면서 밝고 유쾌한 분위기를 일관했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긴긴 <미워도 다시한번>의 그늘에서 벗어날수 있었던 작품이죠. 한국 멜로물의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온 작품이었습니다. 우선, 심각하게 갈등하며 눈물로 일관하던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서두가 길었네요.
아무튼 우리나라 멜로영화의 역사와 비추어 볼때 <러브레터>는 그 분위기부터 굉장히 틀리다,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멜로영화임에도 코미디를 방불케하는 코믹요소가 가득했고, 만화같은 감수성과 밝고 유쾌한 터치로 관객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라스트에 눈덮힌 산위에서 끝없이 '오겡끼 데스까?'를 외치는 나카야마 미호의 모습은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절묘한 스토리텔링이 멜로영화에서도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가를 보여준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히로스에 료코는 나카야마 미호, 마츠 다카코를 이을 차세대 여배우로 <비밀>을 통해 그 가능성을 인정받아 뤽베송의 영화에 출현하기까지도 한 최고의 인기 스타 입니다.(뤽베송은 <비밀>에 극찬을 보내었으며 이미 <비밀>의 리메이크 판권을 사들인 상태)
또한 <비밀>은 99년 개봉되었을때 엄청난 관객동원을 기록했으며 아시아 전역에 비밀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으며 일본에서는 료코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화제작입니다. 23회 일본 아카데미에선 최우수 여우주연상과 최우수 남우주연상, 그리고 최우수 조연 여우상을 휩쓸기도 했죠. 료코는 같은 해 개봉했던 <철도원>으로 이미 최우수 조연 여우상을 거뭐쥐기도 했었죠.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비밀>은 알다시피 빙의를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사고로 딸의 몸속으로 엄마의 영혼이 들어가게 된다는 기발한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한마디로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딸 모나미의 몸으로 들어온 아내 나오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남편 헤이스케는 모든 것을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합니다.
이 영화를 칭찬해 주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자칫 위험한 선을 넘어 무겁고 낯뜨겁게 진행될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시종일관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로 이끌었다는 점입니다.
딸의 몸속으로 들어온 아내라는 대단히 파격적인 소재임에도 금기의 선을 넘지않는 제작진의 의도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만약 선을 넘었다면 영화는 근친상간이라는 불륜이 되었겠고 그것은 곧 폐륜적이고 더티한 질낮은 성인 멜로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제작진은 그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관객들의 혼을 빼놓을 만큼 멋진 스토리텔링 능력과 뛰어난 연출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불륜이라는 어두운 분위기를 일체 배제한, 그래서 청소년들도 부담없이 볼 수있는 밝은 영화를 만든 것입니다. (사실 선을 넘기기란 쉽죠. 자극적인 영화가 되어버리고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관객들을 붙잡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선을 넘기지 않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실력이라 생각합니다)

우선 <비밀>은 대단히 코믹한 에피소드들로 가득합니다. 딸의 몸이 된 나오코가 펼치는 학창생활과 남편 헤이스케와의 미묘한 갈등이 일본 특유의 유머러스함으로 무장해서 재미를 선사합니다. 조금은 과장된 듯한 튀는 캐릭터들과 뜻밖의 사건들로 이야기는 중반을 넘길때까지 끊임없이 폭소를 자아냅니다.
하지만 대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소설이 워낙에 탄탄한 구성을 지닌 탓에 영화는 단한번의 늘어짐도 없이 오히려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전혀 예측불허의 또다른 국면을 맞게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오코는 점점 모나미 화가 되어가고 그래서 모나미로소의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게되죠. 헤이스케의 입장에서도 아내가 그립기는 하지만 무리하게 붙잡을 수만은 없는 실정인지라 모나미의 몸을 가진 나오코가 완전히 모나미로서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예측할 수 없는 반전들이 꼬리를 물다가 마침내 가슴찡한 최후의 반전까지, 모든 것을 비밀로 하겠습니다. 직접 감상해보세요~!


끝으로 영화의 하일라이트는 헤이스케가 모나미의 몸이 된 나오코를 자신들의 첫 데이트장소인 등대로 데려가는 장면입니다.
등대 아래에서 헤이스케는 나오코를 놔주고 모나미로서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하는데 이때 감미로운 테마곡과 함께 눈물맺힌 히로스예 료코의 연기는 감동 그자체였습니다.
겉은 딸이지만 속은 아내인 미묘한 감정처리를 놀라우리 만치 완벽하게 연기해내며 '사요나라~'라고 말하는 장면이 가장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가슴찡한 명장면이었습니다.

이제껏 영화를 보며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동을 받은 적은 <러브레터>에서 한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한번, 그리고 <비밀>이 세번째였습니다. (워낙 무딘 감정을 지닌 탓에 아마도 더 이상 저를 감동시킬 영화는 없을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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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오리 들오리의 코인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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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소리에 마음이 움직인 네 청춘...
 
 

밥 딜런의 노래를 부르며 이삿짐을 옮기는 시나. 그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한다.
딜런?
돌아보니, 키가 크고 묘한 눈빛을 한 남자가 서 있다.
딜런은 신의 목소리야.
그렇게 말하는 그는 가와사키.
가와사키는 시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서점에 침입해 대사전을 훔쳐오자는 것!

 그렇게 시작하는 영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는 25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한 이사카 고타로의 동명원작소설이다. 원작이 워낙에 탁월한 작품이라 그것이 영상으로 옮겨지며 탄탄한 작품성과 완성도를 이끌어냈다.
그래도 놀라운 것은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지만 그 특유의 복잡한 구성 때문에 영화화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
하지만 영화는 원작을 꽤 근사하게 스크린에 옮기는데 성공한다. 원작에서는 라스트에 가서야 밝혀지는 기막힌 구성의 반전이 영화에서는 중반에 밝혀진다. 영화는 그렇게 전체적으로 두 단락으로 나뉘어진다.
전반은 시나와 가와사키의 이야기로, 후반은 가와사키와 도르지, 고토미의 이야기로.
아마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영화를 감상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또한 원작에서 느낄 수 있었던 특유의 감수성도 영화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때문에 영화만 본 사람이라고 해도 '이사카 고타로' 그 특유의 세계관이 뿜어내는 묘한 매력에 충분히 사로잡힐 수 있을 듯 싶다.
아마도 아주 특별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 서점을 털기 위해 나서는 두 남자!
비극은 항상 뒷문에서 일어난다!

 


딜런?
딜런은 신의 목소리야.
이 영화는 딜런의 노래로 인해 자연스레 감정의 교류를 하게 되는 네 청춘의 이야기다.
음악은, 타인과 타인의 벽도, 국경과 국경의 벽도 초월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다른 이가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이 아무리 낯선이라 해도
어쩐지 동질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꼭 알고 지내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음악이란 그런 정도로 신비한 힘을 가졌다.
과연 신이라 부를 만도 하다.

 




함께 서점을 털지 않을래?
모델건을 보이며 그런 제안을 하는 가와사키.
옆집의 옆집에 외국인이 살고 있어. 부탄 사람이지. 그는 사귀던 여자와 헤어져서 침울해하고 있지.
그런 그에게 대사전을 훔쳐서 선물하면 좋아할 거야!
하지만, 하고 시나는 생각한다.
어째서 꼭 훔쳐야하는 거지? 돈이라면 내가 빌려줄 수도 있는데.
훔친 사전이 아니면 소용없어.
왜?
너 샤론과 마론의 고양이 이야기를 모르는구나!
...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이방인을 돕는 것이 '사전을 훔치는 것'만큼이나 번거롭고 위험할수도 있는 일이라면?
분명한 것은 '사전을 돈주고 사는 것' 정도의 일이 아니라 반드시 '사전을 훔치는 것' 정도의 일이라는 것이다.
1. 뭐하러 그런 수고를
2. 사전을 훔친다.
가와사키는 구태여 사전을 훔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팻숍을 운영하는 레이코라는 여자를 조심해! 그녀를 믿지마!
하지만 시나는 서늘한 매력을 지닌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간다.
레이코는 말한다.
가와사키, 부탄사람,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여자- 그 세 명에게는 그들만의 스토리가 있었어.
넌 그 끄트머리에 휘말려 든 거야.
누구에게나 스토리는 있다.
제각각 자신들만의 이야기. 아련히 스치고 지나간 무수한 스토리들.
그 스토리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다른 이들의 스토리에 본의 아니게 끼어드는 수가 있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그 스토리의 조연에 머무르고 만다.
인간의 삶이란 그렇게, 무수한 스토리가 뒤엉켜 돌아가는 퍼즐과도 같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퍼즐식 구성이 절묘하다. 






도르지와 고토미.
부탄인과 그가 사랑했던 여인.
시나와 가와사키의 스토리 도중에 회상씬으로 삽입되는 이 에피소드들은 모두 흑백으로 처리되었다.
이 흑백 영상들은 영화 후반부 칼라 영상들과 절묘한 대치를 이루며 반전을 이끌어낸다.
원작의 감수성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이 돋보인다.


 




시나는 그저 모델 건을 들고 뒷문을 지키고 있기만 하면 돼. 간단한 일이야.
가와사키의 부탁을 거절 못하고 실제로 서점을 습격하러 온 시나.
가와사키가 대사전을 훔치는 동안 시나는 뒷문에서 망을 본다.
밥 딜런의 노래를 부르며...
하지만 생각한다.
어째서 이 밤중에 나는 모델 건을 들고 서점 뒷문을 지키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가?
묘하게 얽혀 있는 이 스토리는 지금 어디쯤을 어떻게 달리고 있는 것일까?


 




책은 훔쳤어?
완벽해!
어디 있어?
뒷좌석에.
맙소사, 저건 대사전이 아니라 대법전이잖아!
그래?
뭐 별로 대수로운 건 아니니까...
그 날 이후...
가와사키는 밤마다 어딘가로 외출한다.
시나는 수상함을 느끼고 가와사키를 미행하게 된다.
 





시나와 가와사키.
부탄인은 옆집의 옆집 사람이라고 했잖아?
맞아. 옆집의, 옆집!
...
하마다 가쿠와 에이타가 열연을 했다.
정말로 원작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두 배우의 완벽한 연기력에 새삼 놀랐다.
어딘지 맹하고 우유부단한 시나와 유쾌하지만 슬픈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가와사키!
특히 가와사키 역의 에이타는 영화 속에서 놀라운 연기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에이타의 나이 답지 않은 연기력과 감수성에 늘 감탄하는 바다.
그 외에도 모든 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다.
위의 두 배우는 또래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에이타가 여섯 살 더 많다. 

 



마츠다 류헤이.
어김없이 이 작품에서도 그만의 특유의 카리스마가 넘친다.
등장 분량이 적은 게 아쉬을 따름.
하지만 역시 류헤이는 류헤이다. 그에게 소화하지 못하는 역이란 없다.
데뷔작 '고하토'에서의 중성적 매력의 미소년부터...
'이조'에서 신비의 남자...
'악몽탐정'에서 내면의 갈등과 싸우는 불안한 영혼의 탐정역...
역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천부적 연기자!


 




고토미 역의 세키 메구미.
조금 낯선 여배우다.
하지만 원작의 캐릭터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진 듯 했다.
연쇄 애완동물 살해범에 맞서 싸우는 강한 의지의 여자.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열정의 소유자다.
좀 더 뜨겁게 살 수 없어?
개가 차에 치이려 하면 목숨을 걸고 달려가서 구해준다거나...
여자친구가 떠나려 하면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붙잡는다거나...
갖고 싶은 책이 있으면 서점을 습격해서라도 손에 넣는다거나...
 

 




레이코 역의 오오츠카 네네.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 꽤 많이 등장하는 여배우. 키무라 타쿠야 주연의 '히어로'에서 특히 좋았다.
원작 소설에서도 느껴졌던 차가운 카리스마의 소유자.
그와 그들의 스토리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점이라고나 할까...
결국은 그녀에 의해서 퍼즐은 완성되고 스토리는 끝을 찾아간다.


 




어째서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그랬어?
폭력을 사용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먼저 잘못한 거잖아. 그들은 애완동물 살해범이라고.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고.
어쨌거나 폭력은 나쁜 거니까. 부탄 사람들은 폭력을 싫어해. 모기도 죽이지 않아.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서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믿거든.
괜찮아. 잠시 신을 가두어두면 되니까.
신을?
신을 잠시만 가두어두면 돼. 그럼 신도 눈감아 줄 거야.
그러니까 그런 나쁜 녀석들은 조장시켜버려!
(조장 : 부탄의 장례풍습. 죽은이의 시신을 들판에 내버려둬 까마귀들의 밥이 되게 하는것. 정화의 의미가 있다고 함)

 




정의란 과연 뭘까?
정의는 법률일까?
만약 그 나라의 정치인들이 정치를 엉망으로 하고 있다면, 그래도 그 나라의 법률은 정의일까?
도처에 애완동물을 죽이는 이들이 있고-
외국인들에 대해 선을 긋고 경계하는 이들이 있고-
폭력을 일삼는 이들이 있고-
약자를 괴롭히는 이들이 있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이 있고-
결국은-
전쟁과 테러와 고통과 눈물과 차별과 폭력과 무시와 저주와 모순과 혼란이
들끓는 이 도시에서-
정의는 어떻게 하면 지켜질 수 있는 것일까?
열심히 법률만 지키면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일까?
모두 다 어릴 적에는 '선'을 동경했는데...
어째서 세상은 이토록이나 '살벌해'지는 것일까?
어째서 세상은 온통 슬픈 스토리로 치닫고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이어야 한다.
한 사람은 정면을- 또 한 사람은 뒤를...
반드시 뒤를 지켜주는 동료가 필요하다.
비극은 언제나 뒷문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그렇게-
밥 딜런의 노래를 들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자.
밥 딜런의 노랫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찾아온다.
즐겁고, 행복하고, 가슴 미어지도록 슬프고... 그 찬란했던 나날의 기억들이... 
 

 





이 영화의 라스트에는 각별한 울림이 있다.
에이타가 차 속에서 절규하는 장면에서부터 마지막 코인로커 씬까지-
감동이라기보다는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느낌의 감수성...! 영혼의 아우성...!
밥 딜런의 음악이 흐르고, 서점을 털기 위해 질주하는 두 남자~
그리고 그 날 밤, 그 진실이 밝혀질 때-
우리는 제각각 가슴 속 깊이 담아두었던 자신만의 스토리를 꺼내보게 될 것이다~!

 
 




에이타의 연기는 이제껏 중에서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에이타라는 청년 그 자체가 바로 슬픈 기억을 간직한 가와사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는 곧 키무라 타쿠야, 다케노우치 유타카, 오다기리 조 등의 뒤를 이어 일본의 차세대 배우로 우뚝 설 것이다.
 

 





동물을 사랑하자.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가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런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이사카 고타로는 늘 그렇다.
저 떠돌이 개보다 위대한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하는 작가다.
개들은 착하다.
인간과 삶을 공유하면서도 절대로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 없다.
인간을 따르면서도 자연을 배반하지도 않는다.
개들은 세상의 이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비둘기도 마찬가지다.
사자도 마찬가지다.
개미 한 마리 조차도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인간만이 모른다.
무심코 혹은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그들의 악행들이 세상의 종말을 광속으로 앞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 속 고토미는 어쩌면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마리의 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행동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 순간, 애완동물 살해범들에게서 무사히 도망치는 한 마리의 개를 보며-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다!

 
 






폭력은 법률적으로 범죄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면 어떨까?
어느 평화로운 부족국가. 그 마을에 악당들이 침입한다. 악당들은 재물을 뺏고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무능한 국왕은 악당들의 폭력에 억눌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이에 마을은 더욱 더 고통으로 물든다.
악당들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한 청년이 마침내 분연히 일어선다. 그는 정의를 위해 열심히 수련을 한다. 무술을 익히고 강해진다.
그래서 악당들을 하나씩 처단한다. 악당들은 모두 죽거나 도망친다.
하지만 폭력은 법률적으로 범죄다.
그 조그만 부족국가에도 그러한 법률은 있다.
청년은 소신껏 싸웠다.
악당이라고 여긴 이들에 맞서서.
그러나 법률적으로 살인은 범죄고 사형이다.
청년은 악당을 처단함에 있어 법률적 절차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그러니 법률에 의해 처벌받아야 한다.
이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법률과 인간의 심판이 아닌-
자연과 우주와 신의 심판이라면?
영화 속 결론은- 신을 잠시 가두는 것이다!
하느님, 이 이야기만큼은 눈감아 주세요.


 




집오리와 들오리의 차이는 뭘까?
그런 것이 사전에 나와 있을까?
영화 속에서는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외국에서 들여온 것과 원래부터 있던 것!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외국에서 들여왔건 원래부터 있었건, 다 같은 오리다.
오리의 종을 논하는 것도 아니고-
집오리와 들오리라는 모호한 기준은 대체 뭘까?
들오리도 집에서 기르면 집오리가 되는 것이고, 집오리도 들로 내놓으면 들오리가 되는 것인데.
어째서 다 같은 오리에게 그런 분류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어째서 그렇게 선을 그으려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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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날들 - Happy Tim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장예모 감독의 2000년도 영화. 무협 대작 '영웅'을 만들기 직전에 만든 소박한 영화. 그래서 이 소박한 영화는 전작인 '책상 서랍 속의 동화'와 '집으로 가는길'에서 이어지는 소박함 시리즈 3부작의 마지막이 아닌가 싶다. 이 소박함 시리즈를 끝으로 감독은 '영웅', '연인' 같은 거대한 대작 액션 영화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어쨌거나 필자는 장예모 감독의 소박한 영화들에서 의외로 '진짜 감동'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이런 작은 영화들에서 감독의 '진짜 재능'이 빛을 발했던 게 사실이다. 이를테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홍등', '귀주 이야기' 같은 영화들도 소박하지만 날카로운 걸작들이었다.  

감독은 '책상 서랍 속의 동화'에서부터 새로운 변주를 시도한 듯했는데 그것은 중국의 피폐하고 남루한 현실에 카메라를 더욱 밀착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고뇌, 한숨, 소박한 히로애락의 숨결을 포착하고자 했다. 또한 신인배우들을 통한 꾸미지 않은 리얼함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영화적 분위기는 언뜻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체리 향기' 등과 닮아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한 감독의 노력과 재능이 녹아들어 의외로 '진짜 걸작'들을 탄생시켰는데 '책상 서랍 속의 동화'가 그러했고, 이 작품 '행복한 날들'은 그 정점에 올라 있는 듯했다.

'행복한 날들'은 눈먼 소녀의 순수함을 지켜주기 위한 아름다운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와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가난한 50대 남자 자오는 우연히 눈먼 소녀 우를 알게 되고 그 소녀를 위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우에게 취직을 시켜주겠다며 가짜 안마시술소를 차린 후 그녀에게 가짜 돈을 건네준다. 이러한 일련의 에피소드들이 너무나 휴머니즘 적이라, 감미로움 마저 느껴진다. 소녀는 자신을 위해 이웃들이 '따뜻한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만 속았다는 기분보다 '진정한 사랑'을 느끼며 행복해한다. 그렇게 가난하지만 그들만의 '행복한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채플린과 베니니가 결국, 라스트에 가서 진실된 거짓말이 현실 속에서 기적같은 사랑의 승리로 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면 장예모는 그러한 판타지를 절제하고 있다. 그렇다고 마냥 현실의 비극을 우울하게 그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장예모가 선택한 이 영화의 '라스트'에 특별한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소녀를 위해 마지막 거짓말의 '편지'를 남긴 자오는 트럭에 치어 생사불명에 놓인다. 때를 같이 해서 소녀 역시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자오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생사가 불투명한 자오와, 미래가 불투명한 소녀의 모습이 교차로 보여지며 나레이션처럼 읽혀지는 두 메시지의 반복과 혼합은 '감독이 가진 영화적 미학의 진정한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명장면이었다.   

자오의 생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함 만큼이나 소녀의 앞날이 이제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함이 극에 달했다. 소녀 앞에 어떤 역경이 기다리고 있든, 소녀는 다만, 걸어나갈 것이다. 그것이 산다는 것이니...!

p.s. 이 작품의 여자 주연을 맡은 배우는 동결이라는 80년생 배우로(촬영당시는 19세였다) 장예모가 '책상서랍 속의 동화'의 여주인공(이름을 잘 모르겠음), '집으로 가는 길'의 장쯔이에 이어 발견한 보석같은 신인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데뷔작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놀라운 내면연기와 완벽한 장님 연기를 선보이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순수한 듯하면서도 인생을 어느정도 달관한 듯한 섬세한 표정연기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미모도 워낙출중해서 앞으로 중국은 물론 홍콩 영화를 이끌 여배우로 대성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후의 프로필을 보니 시시한 영화들에만 출연을 한 듯해 안타까웠다. 아마도 그녀의 영화인생에 있어 '행복한 날들'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나기란 힘들 듯 싶다.(최근에는 견자단 주연의 액션극 '용호문'에 출연을 했음)

최근 주윤발, 공리를 주연으로 '황후'라는 초대작을 준비중인 장예모 감독이지만, 개인적 바람이 있다면 '행복한 날들'과 같은 소박한 영화를 다시 한번 더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것처럼 감독의 피속에 살아 숨쉬는 진정한 영화적 재능은 이러한 소박한 영화들에서 발휘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튼-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와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의 감동을 잊지 못하는 팬들이라면 이 작품 '행복한 날들'도 절대 놓쳐선 안될 것이다. 진정으로 오랜만에 별 다섯을 주고 싶은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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