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 기업인 박용만의 뼈와 살이 된 이야기들
박용만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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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는 순간 끌렸다.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남의 인생, 흘끗 봐서는 제대로 보아지지 않는다. 내가 내 인생을 돌아보아도 잘 모를때가 있는데 어떻게 한 단면만 보고 그 사람의 됨됨이와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 말할 수 있으랴. 그나마 자기 얘기를 자기가 직접 써서 책 한권을 채웠다면 조금은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두산그룹 회장직을 지냈고 현재는 두산 인프라코어 회장직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겸하고 있는 박용만 기업가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최근 이분의 이름을 전혀 예상치 못한 데서 들은 적이 있는데 올해초 문재인 대통령의 바티칸 방문때로 기억한다. 대통령 수행단의 일원으로 이 분이 바티칸 까지 동행하였는데 기업인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몰타기사단'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단체의 한국 대표로서라고 했다.

궁금증은 가지되 선입견과 편견은 버리고 읽자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에게도 그늘이 없으란 법 없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최고경영자로서의 고충외에도 두산그룹과 관련되어 그동안 세간에 알려져 있는 내적 외적 사건들이 떠올리고 있었다. 


내 인생에도 '그늘'이 있다고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운 좋은 인생이었다 할지라도 양지뿐인 인생은 드문 것 같다. 

이 책 속의 글이 얼마나 솔직할까는 읽는 사람들이 판단할 몫이다. 솔직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면 듣는 나는 왜 그럴까 갸우뚱하면 그걸로 끝이다. 왜냐면 이 글들을 쓰는 동안 철저하게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글을 쓰면서 더없이 즐거웠고 후련했다. 내가 충분히 몰입해서 내 이야기를 쏟아내며 즐길 수 있을 만큼 외롭고 철저하게 혼자였기 때문이다.

어떤 잣대에 비춰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그냥 친구의 즐거운 이야기를 듣듯이 읽어주시기를 소망한다.

들어가는 글 중 한 대목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딱딱한 글 아니고 호탕한 목소리로 바로 앞에서 들려주는 얘기를 듣는 듯한 기분으로 400여 페이지의 책장이 후딱 후딱 넘어갔다.

국내에선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학교들을 나왔고 대학원은 미국 유학파에, 한 기업의 회장직까지 지낸 사람이지만 어느 날 친구가 '너는 지금까지의 삶에서 언제가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냐'는 물음에 금방 대답을 못하고 밤잠 설치며 생각하던 끝에 마침내 무릎을 치며 얻어낸 답이 이것이라고 한다. 어제 저녁 아내와 김치밥을 해놓고 식탁에 마주 않았을 때. 즉, 아무 특별한 일이 없는 저녁 식구들과 저녁상에 둘러 앉았을 때가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기본적인 것은 다 비슷한것인가.

1955년생, 66세의 나이지만 관습과 고집으로 벽만 두떱게 하기보다 프로젝트에 따라 샌드박스 제도에 매달려 일을 추진할 수도 있는 사람 (샌드박스란, 현행 규제를 받지 않으면서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고 그 결과를 보아 가며 나중에 법과 제도를 보완하도록 하는 제도), 남 시켜 일을 쉽게 하려고만 하지 않는 이유는 '수행은 위임할 수 있지만 판단을 위임할 수는 없다'는 소신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 착각하지 말고 겸손해야 하고 실력은 단단해야 하는데 정반대로 깨우치는 예가 많음을 직원들 중에서도 많이 보아 지적한다는 사람.

허영과 욕심을 목표라 착각하고 나태와 포기를 초월이라 착각한다. 

소위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저지르기 쉬운 실수로서 개인의 취향과 사업을 혼동하게 만드는 것이 있는데 기업총수가 자신의 숙원 사업이라는 것 때문에 회사가 어려워지는 무리수를 두어가며 욕심을 부리다가는 회사는 파국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아무리 내가 하고 싶거나 갖고 싶어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전력적 역량이 갖춰지지 않으면 욕심일 뿐이고 꼭 갖고 싶다면 역량을 갖추거나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역량을 빌려와야 하는데 그도 저도 아니면서 회장의 숙원이라고 성역을 만들어 포장하고 매진하면 결과는 실패일 뿐이라고. 이 대목을 읽으면서 대한민국의 어느 전직 대통령이 바로 떠올랐음은 숨기지 않겠다. 

대부분의 상황을 보면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란 하나다. 리더의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는 여러 개의 의사 결정 변수들로 시작해서 그 딱 하나의 의사 결정에 이를 때까지 선택지를 좁혀나가는 과정을 얼마나 빠르고 과학적으로 처리하느냐다. 그리고 결정을 내린 뒤에 '결정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다 같이 과학적으로 내린 결론을 실행할 책임을 내가 지겠다는 선언이다.

이것은 단지 기업 회장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 자신은 나 라는 기업의 총수이고 책임자이다. 합리적인 결정, 과학적으로 결론을 내려야 할 일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업적을 남겼고 어떤 과실을 저질렀나를 떠나서 다 관심이 간다. 한 사람은 곧 하나의 우주. 평가하고 판단하려는 월권을 자제하고 그냥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내 경우 그렇다는 뜻). 그래서 책에 대한 평점도 평범하게 별 세개. 그건 어쩌면 최고의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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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1-12-24 2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치밥이라면 김치 볶음밥을 해 놓고 식탁에 앉았다라는 뜻이겠죠?
정말 그 시간이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을까?의혹이 드는 건 아직 제가 그 나이가 안되어 봤기에 하게 되는 생각이겠죠?^^
저녁 시간도 지나가고 밤이 되어 가군요?
나인님 댁도 평안하시고 기분좋은 성탄절 되시길 바랍니다♡

hnine 2021-12-25 05:13   좋아요 2 | URL
김치밥이라고 해서, 밥 할때 김치 썰어서 쌀과 함께 앉혀서 하는 밥이 있더라고요. 저도 해보진 않았고 저에게도 김치 볶음밥이 더 친숙하지요.
김치밥이라고 한건 그날 메뉴가 김치밥이었기 때문일 것이고, 아마 내가 먹을 양식이 눈 앞에 있고, 함께 할 누군가 옆에 있는 그 상태가 행복한 순간. 행복한 순간은 찾아오는게 아니라 내가 발견해내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나요.
어제 저는 시어머님 제사 준비하고 모시느라고 다른 일정 없었고 오늘도 강추위라고 해서 우리 꼼짝 말고 집에 있어야할 구실만 늘었구나 하고 있답니다. 책읽는나무님, 그래도 기분 좋지 않을 이유는 없겠지요? 이렇게 인사 나눌 수 있는 알라딘 친구분들이 계시니까.
가족과 함께 행복한 성탄절 되세요~~~

2021-12-30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21-12-31 05:23   좋아요 1 | URL
저도 사실 제목때문에 읽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
내 인생에서 그늘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떠올리며 없었으면 더 좋았겠다, 더 깊이 묻어두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제목이지요.
다른데 딱히 갈곳 없기도 하고 정도 많이 들어서 저는 여기 계속 있을 것 같아요. 오래동안 모습을 안보이시는 서재지기님들 저도 가끔 생각나고 궁금하고 그래요. 좋은 일로 바쁘시거나 아니면 안좋은일로 침잠해 계시거나, 건강이 안좋으신건 아닐까 염려도 되고요. 그러다가도 언젠가 다시 밝은 모습으로 돌아오실 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환해집니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말이 자주 떠올라요. 행복을 기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겸손하시고 사려 깊으신 점 저에게는 늘 귀감이 됩니다.
오늘은 2021년 마지막날이어요.
여긴 눈이 많이 온답니다.

평안하세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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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스페인어 배우기시작한지 몇달 되었다. 나랑 상관없는 언어란 생각에 그냥 지나치던 단어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수중에 가지고 있는 책 들중 스페인어 제목의 책들에도 관심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제목이나 아직 못읽은 책 중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꺼내들었다. 원제가 como agua para chocolate. 여기서 como는 ~처럼, agua는 물, para는 위한, chocolate 초콜릿. 직역하면 '초콜릿을 위한 물 처럼', 다시 말하면 '초콜릿을 녹이기 위한 물처럼 팔팔 끓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정확한 의미를 위해 해설을 찾아보니 초콜릿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처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심리 상태나 상황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소설 속 두 남녀 주인공 티타와 페드로의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은 1950년 멕시코 태생. 애초 영화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썼는데, 주위의 만류로 영화 아닌 소설로 발표 되었고 그녀에겐 첫 장편소설이 되었다. 소설이 대중의 인기를 얻는데 성공적이었고 소설로 나온지 3년 뒤 결국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영화 역시 큰 성공을 거둔다. 

책의 구성은 일년 열두달 이름으로 장이 나뉘어져 있고 각 장은 그달의 요리 레시피로 시작한다. 1월의 요리는 양파와 초리소, 정어리 통조림, 고추가 들어가는 크리스마스 파이. "양파는 아주 곱게 다진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티타가 요리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요리를 하고 있는 티타는 딸 셋 집안의 막내딸로서 막내딸은 독신으로 남아 엄마가 살아있는 동안 엄마를 돌봐야한다는 전통을 따르느라 사랑하는 페드로와 사귀는 것 조차 엄마로부터 허락을 못받고 집안의 요리사 역할이나 잘 하도록 강요받는 꽃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티타의 상대 페드로는 티타와 결혼 못할 바에 가까이서 평생 티타를 보며 살고 싶다는 마음에 차선책으로 티타의 둘째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을 하게 되고 결혼한 상태에서 티타와의 몰래 사랑을 아슬아슬하게 이어나간다. 

자기의 꿈과 욕망을 오로지 부엌이라는 공간에만 제한받은 티타에게 부엌과 요리는 그녀에게 허락된 이 세상 전부이다. 

티타는 삶의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을 혼동했다. 부엌을 통해 알게 된 사람에게 바깥세상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14)

정성들여 요리를 하고 그 요리를 먹어주는 부엌 밖 가족들의 인정에 의해서만이 그 가치가 평가될 뿐이다. 그녀가 만든 음식이, 또한 그녀의 인생이.

티타의 고뇌와 고민, 진심, 사랑 등 그녀가 그 음식을 만드는 동안의 기분 상태는 그녀가 완성한 음식의 제2의 맛으로 반영되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음식과 요리는 그녀가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출구였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부엌은 문학으로, 성은 음식으로 연결된다. 여성에게 허용된 제한된 공간 부엌은 여성의 온갖 욕구가 표현되는 공간이며, 여성의 욕망과 사랑이 구체적인 음식으로 탄생한다. 이 음식은 만든 본인을 위해서라기 보다 나 아닌 타인에게 제공되는 것. 당시로서는 참신한 주제로 새로운 페미니즘 문학을 구축했다는 평가와 동시에 지나치게 여성적이라는 평도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티타와 페드로의 사랑은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이 소설의 화자는 티타와 어떤 관계인지는 소설의 마지막에 밝혀진다.

페미니즘문학인지 까지는 모르겠고 읽는 재미는 충분했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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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5 0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이치 나이님 이 작품 혹쉬 영화로 보셨나요?

영화에서 원제목에 맞게 como agua para chocolate 상태로 두 남녀의 사랑이 쇼콜라 녹아 내리는 온도 처럼 끓어 오릅니다!

멕시코 문학의 최고봉은 아니지만

스페인어 중급으로 올라 가시면 이책 원서로 꼭(오더블)로 공부 하시면 정말 다양한 동사와 형용사를 배울 수 있습니다 ^^

hnine 2021-12-15 08:27   좋아요 1 | URL
영화는 안봤지만 scott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어떤 분위기일지 짐작은 가요. 원제 제목처럼 초컬릿이 끓어오르는 열정의 사랑. 우리 말 제목에서는 그런 분위기까지 느껴지지는 않지요.
저 혼자 하는 스페인어 공부라서 과연 중급 까지 지속할 것인지 저도 의문이랍니다. 이 책 원어로 읽어볼 수준이 되려면 아직 멀었고 지금은 그림책 작가 Anthony Browne 의 <나의 엄마> (Mi mama)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는 수준이어요 ^^
youtube 찾아보면 정말 공부할 자료가 엄청나더군요. 어느 것 하나라도 잘 붙잡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자료의 늪에 빠지고 말 것 같은.
도움 말씀 감사드립니다~

stella.K 2021-12-15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이래요? 저도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하긴 여자의 관점에서 쓰고 잇으니까 그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재밌게 읽긴했지만 딱히 끌리는 작품은 아니었어요.

hnine 2021-12-16 08:07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보는 견해도 가능하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러기에 좀 약해보인다, 너무 소극적인 대응에 그쳤다, 이런 저의 또 하나의 의견일 뿐이지요. 리뷰 제목을 너무 삐딱하게 붙였나요? ^^
저는 요리에도 관심이 있어서 레시피를 눈여겨 봤는데 재료부터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더군요. 크리스마스 파이에 정어리 통조림이 들어가는 것이라든지. 한편으론 소꼬리는 우리 나라 사람들만 먹는줄 알았는데 멕시코에서도 소꼬리 수프라고 해서 먹더라고요. 아무튼 재미있는 책이긴 했어요.

페크pek0501 2021-12-24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 이름보다 제목이 더 알려진 작품 같습니다.(저에게만 그런가요?)ㅋㅋ

나인 님, 즐겁게 성탄절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

hnine 2021-12-25 05:17   좋아요 1 | URL
그렇죠? 영화로 만들어져서 더욱더 그렇기도 하고 제목 부터가 들으면 기억에 남을 제목이라할만해서 저도 읽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중에 ˝초콜렛˝이라는 영화가 있기도 하고요 (줄리엣 비노쉬 나오는).
남미 문학은 제가 아직 많이 못읽어봐서 그런지 낯설면서 새롭고 흥미롭고, 더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성탄절인데 성탄절 느낌이 잘 안나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인사 나누다 보면 느낌이 살아나겠지요?
페크님, 메리 크리스마스~~~
 
불타는 평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4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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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 책이라곤 두권이 전부이지만, 권수와 무관하게 후에 그 몇배 되는 가치로 평가받고 영향력을 남기고 간 작가 후안 룰포. 

그가 태어난 1917년 멕시코는 멕시코 혁명 이후 여파로 빈곤과 불안정 속 어두운 시기였고, 가정적으로도 룰포는 사회적 불행 못지 않게 결핍된 유년기를 보내야했다. 안팎의 이런 우울한 환경은 오히려 그에게 환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데 한 역할 한 것일까. 그의 문학 작품속 독특한 구조와 구성 기법은 라틴아메리카문학 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릴 그 환상적인 분위기를 세우는데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런 환상성의 임팩트는 장편과 단편에서 그 느껴지는 바가 달랐는데, 장편 소설 <뻬드로 빠라모>를 먼저 읽어 작가에 대한 느낌을 어느 정도라도 알고난 후라서 인지, 단편 모음집인 이 책을 읽으면서는 훨씬 더 작가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수월하였다. 

총 열일곱편의 짤막한 단편들이 실려있는데 죽임 또는 죽음은 빈번히 출현하는 사건의 소재이며 가난한 농민, 민중들의 구차한 삶의 단편들이 사실적, 구체적으로 드러나있다. 희극적 요소보다는 비극이고, 이상으로 환하게 불밝히며 현실의 고난을 잊게 해주던 혁명이었는데 그 결과와 잔재는 꺼진 불과 재처럼 농민의 삶에 이전에 없던 비극적 요소를 더해준다. 

혁명, 가난, 복수, 도망, 살인, 운명, 소외, 아버지와 아들, 형의 아내, 누명, 저주, 허구, 위선. 읽으면서 키워드로 메모해놓은 단어들이 목차 페이지의 각 단편 제목 옆에 촘촘한 끄적거림으로 남아있다. 이것이 모든 인생들의 키워드는 아니기를.


죽고 죽이는 사건은 단도직입적인 문장으로 짧게, 갑자기 던져지기도 하고, 

나는 레미히오 또리꼬를 죽였다. (23쪽, '꼬마드레스 언덕')

다음에서 처럼 간접적, 암시적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 두 사람은 지금 센손뜰라에 있다. 우리는 그가 없이 돌아왔다. 나딸리아의 어머니는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따닐로 형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나딸리아는 자기 어머니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울음을 터뜨렸고, 울면서 그간에 일어났던 자초지종을 말했다. (68쪽, '딸빠')

그리고, 한번 읽고 또한번 읽도록 나를 붙잡은 문장들 속에는 멕시코 출신 작가이기에 가능할 것 같은 정서가 있었다.


한동안 벼랑 밑에서 부는 바람이 마치 불어난 물살에 자갈 구르는 소리 같은 떠들썩한 소리를 우리 쪽으로 실어 오고 있었다. 

돌담 밑에 벌렁 드러누운 우리 모습이 흡사 햇볕에 축축한 몸을 데우는 이구아나 같았다. 

마치 멀리서 달구지들이 비좁은 자갈길을 지나갈 때 나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78, 79쪽, '불타는평원')

이런 표현을 그 어느 누가 할 수 있을까.

아래 대목에서는 인간의 슬픔이 열차의 슬픔으로 표현되고,

열차가 슬픔에 겨워 목이 잠긴 소리로 길게 경적을 올렸지만 다들 그저 눈을 뜨고 지켜볼 뿐 아무도 도와주지 못했다. (96쪽, '불타는 평원')

수록된 한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 '나를 죽이지 말라고 해!'는 죽어가는 아버지가 아들을 붙잡고 호소하는 말로서 제목부터 처절하다. 죽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난까지도 노력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숙명이 되고마는 현실에서 우리가 마지막에 할 수 있는 저 말 '나를 죽이지 말라고 해'는 내적 독백이자 의식의 흐름이 되어 소설 여기 저기서 대사처럼 그리고 울음처럼 스며나오고 있다. '우리는 너무 가난하답니다' 이것 역시 주인공의 독백이자 한 단편의 제목이다.


평론가들에 의해 특히 수작으로 꼽히기도 했고 나 개인적으로도 따로 표시를 해두고 다시 읽어보고 싶어질 작품으로 '불타는 평원'과 '나를 죽이지 말라고 해!', '너는 개 짖는 소리를 못 들은 거야'를 꼽겠다. 아니, 그러기에는 천국인지 연옥인지 시종일관 유령세계를 떠돌며 절묘하게 호소하는 '루비나'를 빼놓을 수 없겠고, 아들을 저주하는 아버지와 반란군 편에 서서 아버지 시신을 거두어들이는 아들이 등장하는 '마띨데 아르깡헬의 유산'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겠다.

작가 자신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일까.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불편한 관계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룰포의 다른 책 <뻬드로 빠라모>에서도 그랬다. 


혁명을 통해 정치, 권력, 정복, 발전이 아니라, 남겨진 인간들의 가난을 통해 존재의 고립과 죽음을 보았던 작가 후안 룰포. 그에게서 영향을 받아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 나왔고, 보르헤스와 더불어 라틴 아메리카 현대 소설 문학의 토대이자 양대 기둥으로 불리게 된다. 단 두권의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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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1-21 0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단편집 좋아합니다
마르케스는 후안 룰포의 작품들 입으로 줄줄 외웠다고 ..
라틴 아메리카 작품 세계를 활짝 열어준 작가 인것 같습니다. ^ㅅ^

hnine 2021-11-21 08:03   좋아요 1 | URL
먼저 읽은 <뻬드로 빠라모> 읽는 동안은 적잖이 헤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달아 이 책 읽기 얼마나 잘 했는지 몰라요. 후안 룰포 이 작가를 이해하는데 훨씨 더 도움이 되었고요.
이 사람, 단편에서도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을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독자의 마음에 징~하고 울림이 천천히, 그리고 깊게 오게 하는 마력있잖아요, 그게 단편의 매력이기도 하고, 그런 매력을 충분히 발휘한 작품들이었다고 봐요.
scott님께서도 이 단편집 좋으셨다니, 역시 역시~~

2021-11-22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2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2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3 0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12-09 16: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이치 나인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서울은 미세먼지 가득 ㅜ.ㅜ

건강 잘 챙기세요^^

그레이스 2021-12-09 16:37   좋아요 2 | URL
저도 축하드려요

hnine 2021-12-10 12:30   좋아요 0 | URL
대전은 새벽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려요.
요즘 책 많이 읽지 못하는데 그나마 읽은 책 리뷰가 당선되니 좀 부끄럽네요.
오늘 같은 날 미세먼지까지 가득이니 마스크는 이제 필수품. 신체의 일부가 되려고 하고 있어요 ㅠㅠ
scott님, 그레이스님.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쎄인트saint 2021-12-09 17: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hnine 2021-12-10 14:42   좋아요 1 | URL
세인트님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틴 작가들의 소설은 영 잘 와닿지를 않았었는데 이제 그 벽이 조금씩 얇아져가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아주 편식을 하고 있답니다. 지금 읽고 있는 것도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이라는 멕시코 작가 소설인데, 도대체 원제가 뭐길래 우리말 제목이 저렇게 붙었을까 궁금해서 들춰보다가 발목 잡혔네요 ^^
세인트님 리뷰 당선도 축하드려요~~

thkang1001 2021-12-09 18: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이달의 리뷰에 선정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hnine 2021-12-10 12:35   좋아요 1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금 받는 것도 기쁘지만 이렇게 축하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더 좋아요.

서니데이 2021-12-09 2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hnine 2021-12-10 12:3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제대로 잘 읽고 썼는지 자신은 없지만 저는 아무튼 재미있게 읽은 책이랍니다.
 
페드로 파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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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것도, 복잡한 줄거리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읽고서도 어떻게 정리해서 리뷰를 올려야할지 감이 오지 않는 책들이 있다. 이 소설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후안 룰포라는 작가 이름은 낯설지 않으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다. 평생 두권의 책만 내었다는데, 남미 문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그 이름이 생소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한 축을 이루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 두권중 하나인 뻬드로 빠라모를 다 읽고났지만 그 작품에 대해 내가 정확하게 느낌을 말할 수 있기에는 다시말해 리뷰를 작성하기에 생각은 설익었을 뿐이다. 시간이 생각을 익혀주는 것은 아닐텐데도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평소 잘 안꾸는 꿈을 꾸고 일어난 날이 있었다.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아는 의식의 세계말고 나 자신도 잘 이해못하는 무의식의 세계, 잠재된채 존재하는,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나는 두 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사물들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77쪽)


-시간이 마치 뒷걸음치고 있는 것 같았다. (77쪽) 


-무슨 일로 왔어요? 당신은 이미 죽었잖아요! (130쪽)

(이런 식의 문장이 자주 출현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엄마는 죽으면서 아들에게 그동안 존재를 보인 적 없는 아버지가 있다는 곳을 알려주며 찾아가보라고 한다. 아들인 후안 쁘레시아도는 그렇게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를 찾아가는데, 정작 아버지가 있다는 곳에 도착해보니 아버지는 죽은 사람이었고, 아버지가 있다는 그곳은 망자의 세계여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예전에 그곳에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었다. 후안이 그것을 알아갈 무렵 독자는 알게 된다. 후안도 망자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무엇인가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머리 위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짙은 안개 같은 것을, 나의 입을 씻어내던 거품 같은 것을, 나를 사라지게 만들었던 운무 같은 것을. 그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본 어떤 것이었다.

(81쪽-후안의 죽음을 암시하는 부분)


이 책은 왜 아들이 아닌 아버지를 제목으로 하고 있을까. 책의 중간쯤 되는 부분부터 이야기가 아들에서 아버지 중심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살아서 그 지역 땅부자였던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는 땅이면 땅, 여자면 여자, 종이면 종, 자기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고야 마는 욕망으로 가득찬 인물이었지만 말년에 오랫동안 연정을 품어오던 여자인 수사나의 마음만은 끝내 차지하는데 실패한다. 수사나 그녀에게는 뻬드로 빠라모가 아닌, 플로렌시오라고 하는 따로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읽다보면 이 플로렌시오의 존재도 실재하는 인물인지 모호하다. 소위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하는 이런 라틴 아메리카 문학 작품의 기법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읽기에는 쉽지 않은 구조이다. 

작가인 후안 룰포가 태어나 성장하던 시기는 멕시코 역사상 두번의 혁명을 거치고 불안정과 빈곤 속에 혼란한 시기였다. 작가 개인적으로는 일곱살에 아버지가 피살되어 수녀원의 고아원에 들어갔고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은 하지만 그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 불우하고 우울하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몇편의 단편을 쓰고 (이것은 저자의 다른 한 권 <불타는 평원>에 실려있다), 삼십대 후반에 <뻬드로 빠라모>를 발표하여 작품성, 예술성을 인정받았으나 이후로 작가는 죽을 때까지 창작과 손을 끊는다. 그렇게 이 작품 <뻬드로 빠라모>는 멕시코 문학의 레전드로 남아 지금까지 멕시코 국민문학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들인 후안의 시각으로 출발하여 기억에 없는 아버지의 삶,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을 통해 농민과 빈곤 계층으로 제시되는 이들의 핍박과 고난, 빈곤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끌고 나갔다.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은 그것이 전부가 아닌 듯. 굳이 아버지의 삶을 작품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것은, 그래서 상상력과 독특한 구조를 할 수 밖에 없도록 이 작품의 운명을 지은 것은, 아버지의 삶이 아버지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주위에까지 어떤 식으로든 남아 아버지 당신의 삶보다 더 오래 흔적을 끌고 있으며 다른 이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까지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고 무의식이 아니면 알아낼수도 없는 형태로.


이 작품 이후로 침묵을 지키다 세상을 떠난 작가이니 아쉽지만 그가 이전에 펴낸 단편을 묶은 책 <불타는 평원>이 마침 집에 있는 것을 보고 반갑기도 하고 안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다른 책에 손이 가지 않기에 바로 읽기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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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1-03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공 후안의 죽음 이후 마을의 흉포한 권력자였던 아버지 뻬드로의 이야기가 모자이크 처럼 엮어져서 이책 얇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죠.
황량한 땅에 착취로 얼룩진 멕시코의 역사가 담겨 있어서 스페인어 문학권에서는 마르케스와 함께 필독으로 꼽히는 책이죠.




hnine 2021-11-04 05:41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작가의 이름과 작품속 아들의 이름이 후안으로 동명이네요. 후안이라는 이름이 스페인어권에서는 흔한 이름이긴 하지만요.
위에 쓰진 않았지만 신부님이 등장하는 부분, 종교에서 마지막까지 허락하지 않는 것들, 아버지 이름 뻬드로가 신부라는 의미도 된다는 것등 스쳐가지만 뿌리까지 좇아가지 못해서 해석을 못하겠는 부분이 많았어요.
의식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니 제가 가진 의식의 깊이가 한정되어 있어 버거웠고, 그래서 꿈까지 꾸게 되었나봐요.

Falstaff 2021-11-03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휴... 이거 귀싸대기 한 대 맞아야 할 이야기지만....
<빼드로 빠라모>, 귀신 씨나락 까먹는 거 아닙니까? ㅠㅠ

hnine 2021-11-04 05:44   좋아요 0 | URL
귀신 씨나락 까먹는 ... ^^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가 저는 세상에서 제일 이해하기 힘들어요 흑흑.
그렇게 내가 이해하지 못할 세상의 범위를 인정하며 생각의 넓이를 확장시켜갈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다독이며 읽었습니다. 그랬으면서 후안 룰포의 다른 한권을 바로 읽기 시작했네요. 짤막한 단편 모음이라서 그런지, 뻬드로 빠라모보다 이전에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런지, 그나마 쉽게 읽히고 있어 다행이네요.

coolcat329 2021-11-10 08:55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 귀싸대기 남아나지 않으시겠어요 ㅋㅋㅋ

coolcat329 2021-11-10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 두 권의 책으로 이렇게 유명해졌다니 대단하네요.
그렇다고 책이 두꺼운 것도 아닌데요.

hnine 2021-11-10 19:20   좋아요 0 | URL
저의 연구대상 작가로 남았습니다.
지금 다른 한권의 책 <불타는 평원> 읽고 있는데 단편집이라서 짤막한 글들이지만 이해하기는 덜 어려운 것 같아요. 다 읽어보고서 말해야겠지만요. 책은 200쬭도 안되니 분량이 많은 것은 아니지요.
 
언니 오는 날
임수진 지음 / 상상마당 / 2021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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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알게 되어 이 책을 보관함에 담아놓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일도 아닌데. 아마도 수필가가 쓴 소설이라는 것이 내 호기심에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수필가로 등단한 저자 임수진은 그동안 수필가로 활동하며 두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는데 올해는 처음으로 소설집을 발표하였다. 열개의 단편이 한권으로 가지런히 묶인 회색 표지의 아담한 책을 처음 펼칠 때의 마음은 재미있기를 기대한다기 보다 과연 어떻게 썼을까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소설이라는 한 장르에서도 단편과 장편 쓸때 마인드가 다르다고 하는데, 수필가로 활동해오다가 소설을 썼다면 어렵지 않았을까? 소설에서도 수필의 느낌이 날까? 서사를 어떻게 진행시켜나갔을까? 소설의 흐름이 어색하지나 않을까? 

한장 한장 넘겨가는 동안 처음에 가졌던 기대라는 이름에 섞인 약간의 불안감은 이내 사라졌다. 처음부터 소설을 쓴 작가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잘 읽혔고 소재가 다양했으며 주제도 분명했다. 


<삼각김밥을 먹는 동안> 

거의 모든 식사를 편의점 음식으로 해결해오고 있는 방송작가 인'나'는 습관적으로 삼각김밥이 주식이 되어오고 있다. 보디 빌더가 꿈이어서 운동에 집착적이던 아버지가 어느 날 부상으로 사지 마비가 와서 하나부터 열까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는 생활을 시작하고 그 아버지 뒷바라지에 지치다 못해 나는 어느 날부터 아버지 끼니도 편의점 삼각김밥을 사다주는 것으로 해결하는데 삼각김밥에 익숙해질 무렵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방송 취재차 알게 된 같은 동 802호 남자. 전해듣기로 그의 한때 직업은 보디빌더였으나 지금은 몸이 망가져 계속 할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증세를 보인다는 말을 체육관 관장으로부터 전해들은 나는 그에게서 과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복잡한 심정에 우연히 만난 그에게 마침 사가지고 온 삼각김밥을 건넨다.

<언니오는 날>

엄마와 바람난 남자와의 관계를 위해 어릴 때부터 엄마로부터 학대를 받아온 언니의 얘기이다. 동생인 나 '이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사는 언니에게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끼는데 언니가 오랜만에 이수를 방문하기로 한날 언니로부터 뜻밖의 결단과 고백을 듣는다.

<중독>

초기 치매 증세를 갖고 있는 아내가 집을 나가 소식이 없자 책임을 물으며 사위를 채근하는 장모. 그리고 아내가 고독사했을 경우를 생각하며 스스로 특수청소업체 일을 시작하는 남자가 있다. 그러나 남자는 그 상황에서도 불륜의 상대 여자를 목말라 한다.

<스멜헌터>

냄새에 민감한 특성을 가진 남자가 냄새 사냥을 직업으로 하게 된다. 냄새에 대한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거나 잃게 되는 배경에는 개인의 역사가 치명적으로 얽혀들어가 있고 좀처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좀처럼 힘들도록 삶에 영향을 미친다.

<푸른문>

학교 다닐 때 자기를 성추행했던 담임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지수는 결혼을 하고 아이도 키우는 나이가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로부터 육체적 욕구 충족이 원하는 전부이다. 딸의 입학식에 참석한 날 그 옛날 자신을 성추행했던 담임이 딸이 입학한 학교 교장이 되어 신입생 환영사를 하러 단상에 나온 것을 본 지수는 즉각적 방어본능이 발동한다.

<틈>

환자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어 하루 종일 시어머니와 한집에 붙어지내며 수발을, 때론 감시를 해야하는 며느리 민주는 공간적인 틈뿐 아니라 감정적인 틈을 목말라 하게 된다.

<매미의 시간>

반지하 단칸방에 세들어 살다가 드디어 지상의 방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는 나는 지상에 나와 여름 2주 동안 우렁차게 울어대고 살기 위해 땅속에서 7년을 보낸다는 매미의 생과 자기의 삶이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노란비옷>

쓰러진 남편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갓난 자기 아이는 집의 남편에게 맡겨놓고 남의 집 유모로 들어간 여자의 이야기이다. 아기 젖을 받기 위해 빗속에 아기를 데리고 찾아온 남편에게 미리 짜놓은 젖을 건네주고 들어온 여자는 노란 비옷을 입고 일기 예보를 전해주는 TV 속 기상캐스터의, 내일을 맑음이라는 멘트를 떠올린다. 

<뜻밖의 행운>

남보다 늦게 결혼하여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던 부부 사이에서 뒤늦게 태어난 아이가 건강하지 않다. 남편마저 일자리를 잃게 되고 아픈 아이 뒤치닥거리까지 해야하는 상황에서 닥치는대로 일을 찾아 하던 여자가 어느 날 버스 대합실 청소를 하다가 발견한 그것은 과연 그들 부부의 바람대로 모든 것을 해결해줄 행운이 되어줄까. 

<축제는 진행중>

딸만 넷을 둔 외할머니의 첫 기일. 넷중 막내인 엄마가 제사를 모시기로 하여 외손녀인 나는 엄마를 도와 함께 음식 준비를 하고, 오랜만에 모인 이모들, 엄마는 외할머니의 고생하던 지난 날에 대한 회상과 추억을 얘기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는 끝났냐고 묻는 남자 친구에게 전화문자가 오자 답장을 보낸다. 축제는 진행중이라고.


삼각김밥으로 연결되는 잃어버린 꿈, 희망, 좌절, 버팀의 생. 동생에게는 그날이 언니가 오랜만에 방문하는 날이었지만 언니 자신에게는 비로소 자기 생을 자기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 날이었을 것이다. 인륜과 도덕이 이기지 못하는 본성과 중독성, 경험이 감각을 바꿔놓고 운명을 바꾸어놓을수 있다는 것, 딸이 입학한 학교의 푸른문은 푸른 괴물이 사는 성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즉각적으로 깨달은 엄마의 방어 본능, 틈은 메워야 할 공간이 아니라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숨구멍이기도 하다는 것, 안타깝게 바라보는 매미의 일생이 우리와 닮아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인간, 비옷은 노랗게 화려해도 비올 때 입는다는 속성, 가난은 어떻게 치장해도 견뎌내야 하는 빗줄기 같은 것이다.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버텨내야 하는 것. 뜻밖에 찾아온 행운이 행운이 될지 불운이 될지 조차 인간이 결정해야하고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비극이 되는 삶, 제사가 축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방식에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새롭게 보여주려는 시도까지, 열편이 모두 작가의 메시지가 옹골차게 잘 들어있었다. 


수필가가 소설을 써도 이렇게 무리없이 잘 쓸수 있구나 오랜만에 느끼게 해주는 기회가 되었다. 작가는 아마도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소설을 위한 준비를 하고 벼루에 먹을 갈듯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흔적이 열편 작품 하나하나에서 느껴진다. 여기 실린 것은 열편이지만 아마 수십편의 소설을 써놓지 않았을까.

정작 그녀의 수필은 읽어본 적이 없다. 거꾸로, 이런 소설까지 써낸 작가의 수필은 어떤 색일까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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