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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편을 마치고 천국편을 읽고 있다.

연옥부터는 지옥과 분위기도 많이 다르다.

벌의 종류와 벌 받고 있는 고통스런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져있던 지옥편에 비해 연옥과 천국은 훨씬 부드럽고 설명적이라고 해야할까.

지옥에서는 죄인들이 주로 등장한 반면 연옥에서는 시인, 음악가, 조각가 등의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한다. 

지옥을 둘러보는데 만 하루를 보낸 단테가 연옥에서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사흘 낮 사흘 밤을 보내는 것도 다른 점이다.

역옥 입구에서 단테는 이마에 일곱개의 P자를 새기고 출발하여 일곱 둘레로 이루어진 연옥을 차례로 둘러보며 P자를 하나씩 지워나간다. 여기서 P는 '죄'를 뜻하는 'peccatto'의 첫 자이다.

연옥의 일곱 둘레는 맨 아래부터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색욕의 둘레이고 맨 윗층은 지상낙원으로 되어 있다. 즉 죄를 다 씻은 영혼이 도달하는 곳이다. 지상낙원에서 단테는 그리폰을 만나고 (그리폰은 그리스도를 상징), 하늘에서 수레를 타고 내려온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된다. 이제부터 천국으로의 길잡이는 베르길리우스가 아닌 베아트리체가 된다. 


뒤의 천국편에서도 단테가 머무른 시간은 만 하루. 연옥에서만 사흘을 머물렀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죄를 깨닫고 반성하여 구원의 기회를 부여하는 곳이 연옥인 것을 생각해보면, 영혼이 영구히 속할 곳이 이미 정해진 지옥이나 천국과는 다른 것이 이해가 된다. 


연옥의 모습을 요약해서 설명해주는 곳이 연옥편 제4곡중에 나온다.



그러자 그분은 말하셨다. "이 산은,

아래의 시작 부분은 아주 험하지만

위로 오를수록 덜 험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위로 오르기가 한결 가벼워져

마치 배를 타고 물결을 따라가듯이

이 산이 아주 기분 좋게 느껴질때면,


너는 이 길의 끝에 도달할 것이고

그곳에 고달픔의 휴식이 기다리니,

더 말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연옥편에는 단테의 환상이나 꿈이 자주 등장하는데, 분노의 셋째 둘레에 올라서서는 분노와 반대로 온화함과 자비에 관한 환상을 본다.



"오, 페이시스트라토스여, 우리 딸을

껴안은 저 대담한 팔을 처벌하시오."

그러자 왕은 너그럽고도 온화하게


평온한 얼굴로 대답하는 듯하였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처벌한다면,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제18곡에는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에게 자유의지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밀랍이 아무리 좋아도

모든 봉인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나는 단지 이성이 

보는 것만 너에게 말해 줄 수 있고, 그 너머는

신앙의 작용이니 베아트리체를 기다려라.



'이성'으로 설명이 안되는 것은 '신앙'의 몫이라는 뜻일 것이고, 신앙의 몫은 베르길리우스가 아닌 베아트리체가 해줄 것임을 예시한다.



너희들 안에서 붙타는 모든

사랑이 비록 필연으로 발생하더라도

너희에게는 그것을 억제할 능력이 있다.


그런 고귀함을 가리켜 베아트리체는

자유 의지라 부르니, 만약 그것에 대해

너에게 말하거든 마음 속에 잘 간직하라.



꿈에 그리던 베아트리체가 나타나는 장면이 연옥편의 끝부분 30곡에 나온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고 단테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다시 떨어지는 꽃들의 구름 속에서


하얀 베일에 올리브 가지를 두르고

초록색 웃옷 아래에 생생한 불꽃색의

옷을 입은 여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미처 눈으로 알아보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나오는 신비로운 힘으로

오래된 사랑의 거대한 능력을 느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벗어나기도 전에

이미 나를 꿰뚫었던 그 강렬한 힘이

나의 눈을 뒤흔들자마자, 곧바로 나는


마치 어린애가 무섭거나 슬플 때면

자기 엄마에게 달려가는 것처럼

믿음직한 왼쪽으로 내 몸을 돌렸고,



신곡을 처음 읽던 날, 지옥편 제1곡 첫 페이지와 지옥의 문에 써있던 글귀 다음으로 심쿵하는 대목을 오늘 '천국편'을 읽으면서 만났다. 과녁을 향하는 화살의 비유 부분인데, 이것은 천국편을 마저 다 읽고 쓰기로 하자.


천국편의 도입부부터 단테는 경고한다.

하늘나라에서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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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1-23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옥도 연옥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가득한 곳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hnine 2024-11-23 18:42   좋아요 1 | URL
아직 완독하기 전에 쓰는 이런 글은 조심스럽기도 하고 자신없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오늘은 지옥도 천국도 아닌 연옥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승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도 했지만 너무 넘겨짚는 것 같아서 좀 더 읽어보기로 했답니다.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 영원히 머물 곳이 정해지기 전 오래 머물게 되는 곳이라는 생각에서요.

stella.K 2024-11-23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h님 글씨 멋지네요.
사진도 지성미가 흐릅니다. 그런데 쓰레기통은 뭔가 심오한 느낌도. ㅋㅋ

그런데 프사의 강아지 예전에 봤던 그 강아지 맞나요?
느낌이 좀 다른 거 같기도하고.
요즘엔 쓸쓸해서 그런지 가끔 다롱이도 생각이나고
업동이 반려견 한마리 키우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일부러는 못 기울 것 같고...
암튼 귀엽네요.^^

hnine 2024-11-23 22:57   좋아요 0 | URL
쓰레기통까지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편집하기 귀찮아서 그냥 올렸어요.
프사의 강아지, 예전에 봤던 그 강아지 맞아요. 제 눈에는 여전히 예쁘지만 예전에 올렸던 사진 찍었을때보다 나이가 많이 들었지요. 주인과 함께 나이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stella님, 다시 강아지 키워보세요. 웃을 일이 더 많아집니다 ^^
 

 






























단테 이전에도 연옥의 개념은 존재했지만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이미지로 발전된 것은 단테 이후의 일이다.


1. 고대와 초기 기독교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정화 과정을 거친다는 개념이 있었다. 예를 들어 플라톤 철학에서는 영혼의 정화를 언급한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일부 교부들은 연옥과 유사한 사상을 제시했지만 이는 명확히 정리된 개념이 아니었다.


2. 교부 신학과 연옥 개념의 발전

4세기 이후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오리게네스 같은 신학자들이 죄의 정화 과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연옥을 특정 장소로 보지 않았고 주로 죽음 이후 영혼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여겼다.


3. 중세 신학

12세기경 교황 그레고리오 1세 (그레고리오 대제)는 연옥 개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연옥을 죽은 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 정화되는 상태로 설명했다. 이는 중세 카톨릭 교회의 교리로 자리 잡게 된다.


4. 단테의 역할

단테 이전의 연옥은 비교적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었으나 신곡에서 단테는 연옥을 구체적인 산의 형상으로 묘사하여 죄의 종류와 정화 과정을 체계적으로 나눴다. 이는 이후 연옥에 대한 대중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결론적으로 연옥의 개념은 단테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단테가 이를 상징적으로 구체화하며 이후 연옥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 이상은 ChatGPT를 통해 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것 -




이제 반을 넘어섰다.

연옥은 말 그대로 하면 '죄를 태워 없애는 곳'이라는 뜻.

반성하면 씻겨질 죄를 지은 영혼이 가는 곳이고, 구원의 기회를 바라는 사람들이 만든 새로운 사후세계라고 할 수 있다. 


지옥과 다른 연옥의 특징은,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구조를 하고 있고, 지옥이 암흑의 공간이었던 것에 반해 빛이 존재하는 공간이며, 또한 환희의 노래가 들려오는 곳이다.


리스트가 작곡한 단테 소나타를 들으며 읽으면 어떨까 해서 들어보니 매우 격정적이고 드라마틱하여 독서용 배경음악으로는 넘치는 느낌. 오히려 모짜르트의 아마데우스 OST를 들으며 읽으니 친숙한 음악이기도 하고 단테 신곡의 느낌과 맞아들어가는 곡들이 많아 좋았다 (내 개인적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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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적성과 무관하게 부러워하는 직업이 둘 있는데, 작가와 건축가이다.

모든 창작 활동을 추앙하지만 건축은 정말 인간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집대성되어 나오는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건축 관련 책
















Edge of Order (Hardcover)


Daniel Libeskind 라는 건축가에 대한 책이다.

방학이 되어 집어 온 아들이 짐가방 속에 들고 온 책 중 하나인데 음악을 좋아했던 건축가라며 엄마도 한번 읽어보라고 흘리듯 말했다. 


https://libeskind.com/



1946년 폴란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1959년 이스라엘을 거쳐 미국으로 이민.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원하는 피아노를 사주기가 곤란했던 그의 부모는 대신 아코디언을 마련해주었고 그는 탁월한 연주 실력을 보이며 음악에 빠졌다.

음악에 대한 몰입은 drawing을 알게 되면서 방향 전환. 눈에 보이는 것은 뭐든 다 그리고 싶어했고 실제로 그랬다.

뉴욕의 브롱크스 과학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다른 학생들이 화학 공식을 익히고 광선의 방정식을 공부할 때 그는 완벽한 원자 외각을 디자인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다른 학생들이 그를 희한하게 본 것은 당연하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 건축을 할 수 없어도 건축을 하는 사람은 예술을 할 수 있다며, 보다 실질적인 (practical) 공부를 하기 원한 어머니의 권유가 작용,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를 거쳐 뉴욕 명문 쿠퍼 유니언 대학 건축학부에 들어간다. 이 대학은 비싼 등록금 대신 기부금으로 다닐 수 있는 학교여서 넉넉치 않던 가정 형편의 그가 아트 관련 공부를 하기에 적격이었다. 여기서 그는 리차드 마이어 (Richard Meier), 피터 아이젠만 (Peter Eisenman) 같은 거장으로 부터 사사한다. 그가 보기에 이들 거장은 건축에서 건물에 대한 반란을 나타내는 방식을 이용하고 있었다. 


"건축은 멋진 연설"






책에사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을 둘러본 나의 느낌은, 

"보고만 있어도 찌를 것 같아."

하는 것이었다. 곡선보다는 직선, 직선이 만들어내는 각, 경사진 모서리, 위로 솟은 뿔 형태가 도드라졌다.


그가 건물을 디자인할때 영감을 얻는 원천을 보면 다방면에 걸쳐 다양하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생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 모자 속에 코끼리가 들어가 있는 그림 --> 겉으로 보기엔 말이 안되는 모양이지만 서로 상관없는 두 가지 형태가 서로 뭉쳐 연결되어 있음. 독일 뒤셀도르프의 Ko-Bogen project (아래 사진)










미켈란젤로의 조각, Rondanini Pieta --> 이탈리아, 밀라노, City Life project






에밀리 디킨슨의 시,


To fill a gap

Insert the thing that caused it-

Block it up

With other - and 'twill yawn the more-

You cannot solder an Abyss

With air


틈을 채우려면 

그 틈을 만들어낸 것으로 끼워 넣어 막아라.

다른 것으로는 그 틈새를 막을 수 없으리. 

오히려 틈을 더 크게 만들어 놓을 것이니. 

그것은 공기 ( emptiness) 


의역하자면 뭐 이런 뜻.

이 싯구는 그가 미국 World Trade Center가 테러 폭격으로 무너지고 난 자리를 재건하는 프로젝트에서 인용하였다. 

It's a beautiful thought: use the emptiness, because nothing can eliminate it. That is exactly what I intended to do, while also giving New Yorkers a new public space. - Daniel Liebeskind



이 사람이 설계한 건축물, 또는 설계안이 우리 나라에도 있다.

-서울 현대 산업 개발 사옥 "탄젠트",

-부산 해운대 아이파크 초고층 주상 복합, 

-서울 용산 국제 도시 마스터 플랜 "아키펠라고 21"

검색해보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여 더욱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아이디어가 들어가 있으니 해석도 다양하고 논란 거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If a building doesn't come from an idea, if it's just a structure with some required functions, it's merely a building-and probably not a very good one. The architect's role is to bring something to the table that goes beyond addressing basic programmatic needs.

 -Daniel Liebesknd- 

그러면서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 (Vermeer)의 그림 "The Consert"를 예로 들어 회화와 건축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건축은 테이블 위에 실제로 내어 보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단순한 악보가 아니라 실제로 연주되어 소리를 내는 교향곡에 건축을 비교하기도 하였다.


문득 든 생각은, 건축 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지 자기의 생각 (idea)과 철학 (Philosophy)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해도 다르게 하는 방법이고, 다 비슷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다른 삶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아, 또 혼자서 멀리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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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1-10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곳은 제가 사는 곳이 아니니 잘 모르겠는데 부산은 가까운 곳이라 해운대 아이파크는 좀 알겠어요^^
처음엔 말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보고만 있어도 찌를 것 같다는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아요. 어린 왕자에서 영감을 얻는다니 그것도 뭔지 알 것 같네요?
아이파크 주상 복합도 찌를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쪽 랜드마크가 된 것 같아요.

hnine 2023-01-10 14:56   좋아요 1 | URL
저도 부산 아이파크만 직접 본적 있고 서울의 현대 사옥은 아직 못봤어요. 용산 국제 도시 마스터 플랜은 말 그대로 아직 마스터 플랜이고요.
유명한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도 실제로는 하자 보수가 끊이지 않는 건축물이라고 비평의 소리가 많고 프라하에 있는 프랑크 게리의 춤추는 빌딩도, 서울에 있는 자하 하디드의 DDP도 그렇고 모두 구설수가 끊이지 않는 건축물들이지요.
기존의 건물의 구조와 양식을 뒤엎으면서 새로운 건축물이 탄생하고 그러면서 랜드마크가 되니 논란의 과정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일까요?
 












We Need Social Science, Not Just Medical Science, to Beat the Pandemic

Human behavior and social inequity are huge confounding factors


by Nicholas Dirks on March 20, 2021






미국에서 발행되는 과학잡지 Scientific American 2021년 3월호에 실린 기사이다. 

저자는 미국 UC Berkeley 역사, 인류학과 교수이자 뉴욕 과학학술원장으로서, 전세계적유행병을 퇴치하는 답은 과학이나 의학이 쥐고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하는 제가 위의 기사를 발췌 번역해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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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이 나왔어도 바이러스 제압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느냐는 인간의 대응 방식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의학적 도구만 가지고는 바이러스 제압이라는 크나큰 도전을 수행해나갈 수 없다.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이 과학과 함께 자리해줘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현대 사회는 과학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역사적인 예나 인류학적인 예를 보나 요즘 일어나고 있는 전세계유행병에 대응하는 일치하지 않는 반응을 보나 그렇지 않다. 

1918-19년에 스페인 독감때의 경험에서 우리는 배웠어야 했다. 그때 어떤 도시는 바이러스 전파 제압이 더 잘 이루어진 반면 어떤 도시는 그렇지 못하여 결국 지구상의 오천만이 사망하였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과학에 대한 불신이 합쳐진 결과 마스크착용으로 독감을 제압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큰 혼란을 겪었고, 의학적 조언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국인들은 마스크 쓰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마스크 착용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1950년대 소아마비 유행병은 또하나의 가르침을 주는 예이다. 표면적으로는 과학정책, 의학정책의 성공적 사례로 보기 쉽지만 사실은 지금 우리가 COVID에서 보고 있는 것과 매우 유사했다.

1954년 아이젠하워 정부는 모든 어린아이들이 개발 진행중인 폴리오 백신을 접종해야한다고 선포는 했지만 실제로 연방정부 차원에서 그것을 실행할 어떤 일관적 계획도 없었다. 더구나 백신 제조 과정의 질적 수준에 대한 감독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일부 어린아이들이 아프거나 사망하였다. 전 국가 규모로 접종하기에 제한된 재원도 문제였다. 1955년 아이젠하워가 소아마지 예방접종 강령에 서명하고 나서야 충분한 연방 기금이 확보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혼란은 이후 대중의 불신을 완화시키는데 수년이 걸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회학자인 Alondra Nelson이 새로이 과학기술정책국의 부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말하기를 전세계적유행병은 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아서 우리가 허용하고 있는 사회 불평등의 고착화를 반영해주고 있으며 과학은 하나의 사회 현상이라고 하였다. 이말이 의미하는 것은 과학은 그것이 상호작용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현실적 통찰력을 요구할 뿐 아니라 과학은 또한 사회적인 힘과 의미와의 관계에 따라 위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은 우리가 과학적 지식에 대한 사회적 반응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사회과학은 과학이 사회적 편견과 이해관계를 알고 있도록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지식이 늘어갈수록 함께 발전하고 진화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지식을 해석하는 각자의 방식의 지배를 받는다.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이 팽배해져가면서 새로운 지식은 종종 잘못된 정보에 의해 압도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려 음모론이나 대체사실 (alternative facts)에 쉽게 접근하도록 만든다. 과학의 발전이 새로운 의약을 만들어내는 것 뿐 아니라 더 건강하고 더 정당한 세상으로 이끌수 있도록 과학과 사회과학이 서로 상부상조할수 있게 해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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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3-24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참 인간은 안 바뀐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페인 독감의 예를 봐서라도 이번엔 세계가 공조하면
잘 넘길 수도 있을텐데 여전히 과학과 정부를 의심하고
마녀사냥이나 하고 앉았으니...
가장 모범을 보여야할 미국이 코로나 때문에 혐오범죄만 늘어가고 있으니
어떻게든 극복할 생각은 안하고.
이게 모두 트럼프 때문이어요. 흐~ㅋ

hnine 2021-03-24 23:14   좋아요 4 | URL
과학이 아무리 잘 드는 칼날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결국 과학이 아닌 다른 실체일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과학자는 과학자로서의 할일만 다 함으로써 끝나는게 아니라 과학이 제대로 이용될수 있도록 사회과학등 다른 분야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저자의 의도에 깊이 공감하여 기사를 옮겨보았어요. 이번 코로나에 미국이 보여준 대응방식은 너무나 상식 밖이었는데 저자의 말처럼 그것은 미국사회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니 코로나가 아니라 다른 어떤 재해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반응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과학, 종교, 사회과학, 역사, 인류학, 등등 인간이 관련된 모든 분야는 적대할것이 아니라 협력을 해야한다는 마무리가 그냥 흘려들을 말이 아닌 것 같아요.
 

 

어제 저녁 EBS 자연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선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집짓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새집 쯤이야 우습게 볼지도 모르지만 사람인 나도 직접 안지어본 집이다.

조그만 새가, 자기가 살 목적이 아니라 알을 낳아 품을 집을 짓는 것이다. 여러 번에 걸쳐 나뭇가지 재료도 직접 구해오고 부리로 잇고 거미줄로 이어붙혀 일주일 만에 튼튼하고 촘촘한 집을 완성하였다.

"저 새가 바로 아키텍트 (architect) 네!" 라고, 옆에서 같이 보던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으로 말하자면 자기 집을 아직 지어본 적 없는 건축전공자이다.

집을 완성하자 이 아키텍트 붉은머리오목눈이는 곧 집 안에 꼼짝하고 앉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알을 낳는 것이다. 푸르스름한 색이 도는 알. 그리고 그 알을 품는다. 2주 동안 그렇게 품고 있는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 바로 뻐꾸기라는 새가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그 둥지에 들어가 자기 알을 낳아놓는 것이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뻐꾸기 알도 함께 품는다. 결국 먼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붉은머리오목눈이 새끼가 아니라 뻐꾸기 새끼이다. 이것도 모자라서, 어미 붉은머리오목눈이가 먹이를 구하러 간 사이에 이 뻐꾸기 새끼는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막 알을 깨고 나온 붉은머리오목눈이 새끼도 밀어낸다. 이제 붉은머리오목눈이의 둥지는 뻐꾸기 새끼 독차지. 붉은머리오목눈이 어미새가 물어온 먹이를 먹으며 뻐꾸기 새끼가 자라난다.

둥지밖으로 떨어진 붉은머리오목눈이 알. 그리고 알에서 나오자마자 눈도 뜨지 못하고 둥지밖으로 떨어진 새끼.

태어나자마자 태어난 세상의 모습을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바로 세상을 떠나야하는 이들의 운명은 대체 뭐지?

태어나자마자 주인을 밀어내고 생존하는 방법을 뻐꾸기 새끼는 대체 언제, 어디서 배웠지?

그건 학습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해설자가 말한다.

 

운명, 본능, 생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생명은 아름다운가? 생명의 본질은 아름답다고 할지몰라도 그 생명을 지켜내기 위한 과정은 처절하고 전투적이다. 그냥 사는게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집에 있는 새도감을 찾아보았다.

아이가 어릴 때 함께 보느라 사놓은 도감이라서 먼지가 하얗게 쌓여있었다.

 

 

 

 

 

 

 

 

 

 

 

 

 

 

 

 

 

 

 

 

 

 

 

 

 

 

 

 

 

 

 

 

 

 

 

 

 

 

 

 

 

 

뻐꾸기는 어쩌다가 그런 방식으로 새끼를 낳고 번식시키게 되었을까.

뻐꾸기는 뻐꾸기대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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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3-05 12: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뻐꾸기 알 얘기 듣고 놀란 적이 있어요. 이기적인 생존법인 듯. ㅋ
동물의 세계는 잔인함이란 무기를 갖고 사는 것 같아요. 티브이에서 먹잇감을 공격하는 동물을 보면 끔찍하더라고요.
동물의 눈으로 본 인간의 세계는 어떠할지 궁금하네요.

hnine 2020-03-05 13:05   좋아요 3 | URL
다른 생명체를 이용해서 생존에 사용하는 것이라면 인간을 따를 수 있을까요?
생명계의 어쩔 수 없는 섭리라지만 인간은 때로 너무 이기적이다 싶을 때가 많아요. 뻐꾸기보고 뭐라 할 일이 아니겠지요.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으면 책을 읽을 때와는 또다른 감정이 들어요. 감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팩트로 받아들여야 할텐데도 말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