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이 있는 현대시 교실
김상욱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 이 책의 내용이 좋아서 책을 바탕으로 제가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써 준 편지글입니다.

느티나무가 보내는 편지 4

  희망, 사막을 건너는 법


   먼저 시 한 편 같이 읽어요.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 눈으로 찬찬히, 입으로는 나직히 읽어 봅시다. 

장수산1

  벌목정정 이랬거니 아름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좃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 내―

 

   음, 생각이 납니까? 방학 때 수업하면서 읽은 정지용의 詩군요. 시 속의 화자인 사내는 눈덮힌 한밤중의 산길을 걷고 있습니다. 오직 산에는 고요만 가득할 뿐이구요. 그 고요함을 배경으로 화자는 달이 훤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 길이 혼자만의 길이 아니라, 이미 ‘웃절 중’이 걸은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지요. 그 중이 번번이 희망을 가지나 그만큼 실망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웃으며 돌아간 길이 아닐까 생각이 아닐까요? 시적 화자는 자신도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조촐한 사내’가 아니기 때문에 웃을 수도 없는 것을 압니다. 오히려 그는 지금 깊은 시름에 잠겨 있습니다. 시름은 고요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인식되겠지요? 그리고, 끝내 화자는 “견디란다 차고 올연히”라고 스스로 기다림의 자세를 가다듬습니다. 현재의 고통에 대한 탄식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오직 견뎌냄으로써 “장수산 속 겨울 한밤 내”와 버텨보자고 스스로를 다짐하는 것이지요. 

   시를 읽고 밑에 곁들인 설명까지 읽어 보니 어떻습니까? 지금의 우리 모습과 한 번 견주어 봅시다. 우리는 힘든 고갯길의 마지막 된비얄을 오르고 있습니다. 함께 가는 친구들은 많지만 결국 그 고개는 혼자서 올라야 하는 길이겠지요? 가장 힘든 지금 이 순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힘들다는 탄식도 절망도 아닌, 오직 견디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이 시 속의 화자처럼 말입니다.

   시와 밑에 매달린 잔소리가 맘에 들었나요? 그럼 다른 詩도 한 번 더 읽어 보도록 합시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작품인데요. 우선, 시를 읽고 나서 다시 얘기할까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시가 시작되는 처음에 막혔던 마음이 뒷부분에서야 조금 후련해 지지 않나요? 시의 화자는 갑자기 아내도 집도 다른 가족들과 헤어져 쓸쓸한 거리를 헤매고있지요. 그러니까 화자는 삶의 의욕을 잃고 슬픔과 어리석음에 가득 차서 자신의 존재조차도 무겁게 받아들이고, 마침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아프게 느낍니다. 그러나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것”임을 깨닫고는 “외로운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 전환에 힘입어 시는 앞의 누워서 뒹굴던 수평적인 이미지를 벗고, 무릎을 꿇는 수직적인 자세로 어둠 속에 “따로 외로이 서서”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면서 시를 맺고 있습니다. 

   이 시의 “눈을 맞고 서 있을 굳고 정한 갈매나무”와 앞의 시에 나온 “오오 견듸란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 내”의 시적 화자는 서로 닮아있지 않습니까? 마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기어이 견디어 내고 말겠다는 굳은 다짐을 선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생이라면 무릇 이래야 하지 않을까요? 앞의 두 시인처럼 지금 이 시름 속에서도, 어떤 슬픔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놓아버리지 않는 존재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여러분들 모두가 힘든 상황을 견뎌내리라 믿습니다. 참고 견뎌내는 것, 바로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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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9-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시를 읽어주지 못하고...
힘겨운 일을 이겨내라고 해야하는 선생 노릇도 못할 짓입니다.^^
이렇게 설명해 주면, 아이들이 훨씬 좋아하지요. 저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느티나무 2007-09-2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무래도 투사도 아니고, 투사를 동경하지도 못하는 소시민인가 봐요^^ 입시라는 괴물에 어쩌지 못하는 교사. 고 3담임을 할 때 그냥 올해는 무척 힘들 이 아이들과 함께 견뎌자,는 생각만 했거든요. 고민을 새롭게 해봐야겠습니다.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 고종석 시평집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조금은 슬펐다,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고종석, 개마고원)를 읽는 내내. 지금은 희미한 기억이 되고 말았지만, 나도 한 때는 참 좋은 사람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왜 좋은 사람을 알게 되면, 마음이 들뜨고 기분이 좋아져서 막 자랑하고 싶어지지 않는가? 나는 꼭 그 때가 그랬다. 그를 만났을 때. 헌신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딴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의 참모습을 몰라볼 때는 속상했고, 근거 없이 험담을 늘어놓을 때는 나라도 나서서 공박해 주고 싶은 욕망을 지그시 눌러야했다. 

   세월이 꽤 흘러, 이제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고 말아, 그와는 꽤 오래 전에 마음을 정리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이미 그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고 말하는 것(심각한 표현으로는 ‘환멸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할 때 내 머리와는 별개로 내 마음이 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싫어졌지만, 다른 사람이 욕하는 것도 듣기 싫은 이 애증. 이런 애증을 불러일으키는 그가 바로, 노무현이다. 

   고종석의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에 실린 글의 배열은 원래 기고했던 매체에 발표된 시기의 역순이라고 했다. 이 칼럼들의 대부분은 현재 ‘노무현’에 대한 실망과 환멸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언행의 가벼움, 지지자들을 배반하는 일관된 정책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한 말이나 글은 시중에 이미 차고 넘침으로 내가 달리 덧보탤 말은 없겠다. 나 역시도 그러니까. 

   무척 놀랐다,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고종석, 개마고원)를 읽는 내내.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과 비슷하다고 느낄 것이다. 건강한 시민 의식이 갖춘 사람이라면-그러니까 이 정도 책을 읽겠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식’을 말하고 있으니까. 당연하면서도 읽을 때 놀랐던 사실! ‘타고나기를 우파’인 그의 생각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자칭 ‘우파’라는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보수’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 ‘보수’한다고 떠드는 게 말도 되지 않는 소린 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는 너무 많이 들어서 그냥 ‘보수’라고 불러줘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다가도 진짜 이런 ‘우파’를 만나고 나니 더더욱 그들이 ‘보수 우파’가 아님이 드러나고 만다. 아무래도 이념상 ‘중도 좌파’인(좌파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민주노동당은 가만히 놓아두고, ‘열린우리당’을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 부르는(그냥 싫고 짜증나서 부른다고 한다.) ‘극우주의자’들의 말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보다 제법 왼쪽으로 치우쳤다.(행동이나 이념은 극우파, 말은 자칭 ‘우파’니까 그들의 말은 그들의 생각보다 더 ‘좌편향’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그의 글에 열광하는 독자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고 놀랐다. 언젠가 한겨레신문에 한국의 글쟁이,에 나온 거 같아서 검색했더니, 역시나 만만찮은 독자를 거느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이자, 언어학자라는 소개가 나왔다. 그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문화전달자,라고 했다던가? 나도 앞으로는 고종석의 책을 구해서 읽게 될 것 같다. 늦게 만났지만, 차분하게 그의 지적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싶다. 퍽 유쾌하지는 않아도 내 생각을 다잡고 자신을 돌아보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잘 모르겠다,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고종석, 개마고원)를 읽는 내내. 그의 글에는 대체로 ‘한국어를 가장 정확하게 구사한 글’이라는 찬사가 붙는다. 나는 우리말 지킴이 축에는 전혀 들지도 않지만, 그래도 가르치는 과목이 과목인지라 특히 주의해서 읽게 된다. 그런데, 내 감각이 많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사실 정확한 한국어로 쓴 글이 어떤 글이지 아는 것도 쉽지가 않다. 다만 내 나름대로 소박하게 그의 글을 읽는 느낌을 말해 본다면, 문장을 다 읽은 후에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다시 읽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게 좋았다. 또 마음속으로  책을 읽을 때 특별히 눈에 거슬리는 표현이 없다는 점도 편안했다.

 한국어를 정확하게 쓴다는 글에 대한 찬사로는 어쩌면 이 정도로 충분한 것일까? 턱없이 소박한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제대로 된 독자를 만나지 못한 그의 책이 정당한 평가를 얻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러나 아둔한 독자를 만난 그의 책을 탓하랴? 원래 타고나기를 이렇게 생겨먹은 나 자신을 탓하랴?

* 뱀발 - 글샘님의 감식안을 늘 존중하지만, 고종석에 대해서 만큼은 선생님의 안이 틀렸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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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7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느티나무 2007-04-27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책은 좋은 책입니다.^^ 세상에 대한 혜안을 갖게 해 주지요.

waits 2007-04-28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현'이라는 대상에 대한 열광과 환멸에는 공감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고종석씨의 책은 어쩐지 골치(?) 아플 것 같아서 묵혀뒀었는데, 느티나무님 글을 보니 읽어봐야겠다 싶어지네요. 잘 읽었어요. ^^

느티나무 2007-04-2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님, '노무현'이라는 대상에 대한 열광과 환멸에는 공감하지 않는다는 말을 존중하지만, 그런거라도 없으면 세상 사는데 '재미'가 없지 않나요?(너무 가볍게 읽히지요?) 네, 신성 동맹과 함께 살기, 저는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어요.

waits 2007-04-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그렇게 되는군요, 대선후보 혹은 노무현이라는 포지션과 인물에 대해 말씀드린 거였는데... '누군가'에 대한 열광의 '재미'에 대해서는 왕공감하지요, 거의 제 숨줄인걸요...^^;;
부천은 날씨가 무지 좋아요. 부산은 어떤지... 주말 잘 보내세요!

느티나무 2007-04-29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봐도^^ 그 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할까요? 글쎄, 문제가 무엇인지...어디서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부산도 오늘 날씨가 아주 좋았습니다. 애기 데리고 산책 나갔었어요.(우리는 자가용이 없기 때문에 나가도 집앞의 놀이터(?) 정도랍니다.) 바람도 살랑 불고 그러니까 녀석이 자울자울 조는거 있지요. 옛날에 가르쳤던 녀석들과 옛날 얘기하면서 놀았어요. 저의 행복했던 휴일이 나어릴때님 덕인거 같네요. 고맙습니다.
 
들꽃학교 노교사, 교육 희망을 보다 - 이원구 선생님의 교육에세이
이원구 지음 / 우리교육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1. 안준철 선생님의 <들풀>

들풀

- 안준철

들풀을 보면 생각난다.

이름으로 불러 준 적 없는 아이들

마음으로 읽고

눈빛으로 알고

따스히 흘러

빗장을 열게 하는 사랑

나눠 준 적 없는 아이들

그런 사랑 받아 본 적 없어

더 가슴 태웠을 것을

더 다가오고 싶었을 것을

들풀을 보니 생각난다.

화사하지 못하여

키에 가리워

먼발치로만 서성이던 아이들

한 번 더 다가섰으면

꽃이 되었을 우리 아이들


안준철,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한동안 이 시가 좋았다. 그래서 좋아하는 여러 선생님들께 나눠주기도 했다. 들풀 같은 우리 아이들, 많이 사랑해 주십사는 의미였다. 어느 순간, 산에 들에 피어난 들꽃의 이름을 외우려고 애쓰는 내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들꽃의 이름을 알려는 노력을 아이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 강박관념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다시 한참이나 지난 후, 지금은 이 시가 참 좋다. 이 시를 쓴 안준철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뵌 게 이유기도 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이 그런 것처럼, 들풀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 들풀 같은 우리 아이들의 아름다움을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아닐까? 이 시를 읽을 때 마음의 울림이 오는 사람이라면 들꽃의 아름다움만 취하지 않고 우리 아이들의 참모습에도 따스한 눈길을 전하는 감성이 함께 있다고 믿는다.

   들꽃 학교 노교사, 교육희망을 보다, 라는 책은 들풀의 아름다움에 빠진 한 교사의 교단생활 이야기다. 아니, 들꽃 같은 우리 아이들의 풋풋한 아름다움에 취해 살아온 세월에 대한 이야기기라고 말해야 의미가 더 정확하게 전달될 듯 싶다. 생각은 많지만 행동은 머뭇거리는 교사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온 ‘교육운동가’답게, 아름다운 들풀을 학교 구석구석에 옮겨 심고 가꾸는 과정을 통해 다른 교사들과 아이들에게 들풀의, 교육의, 나아가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조근 조근 말해주고 있는 책이다. 새 학기가 되면 새 학교로 옮겨 온 새싹 같은 아이들과 한 평생을 살아온 이야기가 넉넉하게 담겨있으니 지금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함께 하고픈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책이리라고 믿는다.

2. 주말 농사 실패하다.

   한 4년 전인가 보다. 그 때는 나도 여러 선생님들 틈에 끼여서 노조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선생님 중에 한 분이 부산에서 가까운 김해에 노는 땅을 얻으셨고, 그 때 노조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끼리 주말 농사를 지어보자며 희망하는 분들에게 그 밭을 두 고랑씩 분양해 주신다기에 앞 뒤 재보지도 않고 덜컥 분양을 받았다. 아마도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사람이 느끼는, 도시 생활에 대한 어떤 결핍감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밭은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라 자가용이 없는 나는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동안은 들뜨고 기쁜 마음이 계속되었다. 밭에는 종묘상에서 산 상추와 쑥갓의 씨를 심었고, 고추와 방울토마토는 어린 모종을 옮겨다 심었다. 씨와 어린 모종에다가 거름도 주고, 물을 흠뻑 뿌려 주면서 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서너 달 후에 제대로 수확을 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내가 키운 고추라며 한 봉지를 슬쩍 내놓을 수 있으리라는!

   그러나, 해도 해도 끝이 없던 학교 업무와 노조의 일에 밀려서 겨우 주말에나 가서 얼굴만 내밀던 일도 점점 뜸해지고 말았다. 나중에는 내 고랑의 어린 새싹들이 어떤 상태로 있을 지 뻔히 눈앞에 보이는 듯 해서 밭을 찾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당연히 그해 주말농사는 완전 망했다. 무참하게도 다른 건 한 번도 수확하지 못 했고, 물만 주면 자란다는 상추만 겨우 두어 번 뜯어서 집에 가져왔을 뿐이다.

   다음해엔 텃밭을 분양받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미련이 남아서 조금 넓었던 아파트 베란다에 고추와 상추를 다시 심었으나, 그것도 제대로 수확 한 번 못했다. 아내에게 큰소리를 쳤던 나는 다시 무안했다.

   텃밭을 일구려고 했던 나는 안다, 들꽃 학교의 텃밭에서 채소를 심고 그것을 가꾸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그리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는 안다, 아이들이 잘 자라려면 교사의 온 정성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패를 해 보니 더욱 잘 알겠다. 농사나 교육은 농부나 교사의 꾸준한 관심을 거름 삼아 그 대상이 본바탕을 꽃피운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자명한 진리를 이 책에서 다시 배운다.

3. 나도 아름답게 늙을 수 있을까?

   2007년 3월, 올해로 학교에 들어온 지 9년차이다. 아직도 많은 것이 서툴기만 한데 벌써 꽤 시간이 지나버렸다. 처음 발령을 받고 학교에 출근하던 날의 기억도 또렷한데, 내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의 세월이 흐르는 것이다. 이럴 때 ‘시간, 참 빠르다’라고 하는가 보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갈수록 경험이 쌓여 안정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늘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함이 든다.

   교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는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지만, 나는 요즘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중요하고도 특별한 한 시기(‘질풍노도기’라는 말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든다.)에 있는 인간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전문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이 불안함의 원인은 바로 이 소통의 문제 때문에 온다. 교사의 나이가 적을 때는 전문성에 대한 훈련만으로도 특별한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학생들과 소통이 가능하지만, 물리적인 나이가 들고, 경험을 통한 자신의 생각이 굳어지기 시작하면서 아이들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많이 보았다. 심지어는 아이들과 수업하기 힘들어서 승진 준비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도는 것이 학교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직 과문한 탓이겠지만, 후배 교사가 보기엔 참 아름답게 늙어가는 선배 교사를 그리 많이 보지 못 했다. 승진 욕심에 물불을 가리지 않으니까 머릿속에서 ‘교육’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린 사람들도 많고, 무욕(無慾)한 듯 보이는 분들도 따분한 일상에 무기력하게 반응하거나, 모든 일들에 오직 자신의 ‘나이 먹었음’만이 논리의 모든 근거가 되어 학생들은 고사하고 후배 교사와의 소통마저 힘든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나는 불안하다. 나도 저렇게 늙어갈까 봐 말이다. 지금 내가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분들도 내 나이 때는 선배 교사를 보면서 나처럼 생각했을 테니까.

   누구나 초임 교사 시절에는 아이들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워질 때 교단에서 내려오기를 꿈꾼다. 그러나 세월은 살 같이 흐르고, 또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꿈을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신 정년 때까지 평교사로, 교실을 지키는 이름 없는 노병(老兵)으로 사는 꿈을 꾸었다.(늙으면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아직도 많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지만, 오늘 나는 거기에 다른 꿈을 새로 꾼다. 내가 학교에서 늙은 교사가 되었을 때 후배 교사가 스스럼없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 말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볼 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다만, 꿈조차 꿀 수 없는 것은 아니니까 마음속에 오롯이 큰 꿈을 품어 본다.

  그런데, 나는 요즘 내 큰 꿈에 등불을 밝혀 준 이를 책에서 만났다. 그 분이 바로 들꽃 학교 노교사, 이원구 선생님이시다.

  정녕 아름답게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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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7-03-1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제목과 본문의 내용은 별로 관계가 없어요. 글만 써 넣고 올리려니까 제목을 넣으라는 안내 메시지가 나왔고, 요즘 개인적인 고민 때문에 일주일이 넘게 학교를 안 나오고 있는 OO이가 생각 났어요. 빨리 힘내고 기운 차려서 학교에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제목을 붙였습니다.

2007-03-11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걷는다 1 - 아나톨리아 횡단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임수현 옮김 / 효형출판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저는 2001년부터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의 지은이처럼 오로지 걷기만 하는 도보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2001년에는 부산에서 해남의 땅끝마을까지, 2002년에는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2003년에는 제주도 해안도로 일주, 2005년에는 목포에서 태안까지 다녔지요. 걸어서 여행한 거리를 정확하게 재보지는 않았지만, 어림잡아 1,500km는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때마다 여행일기를 꼬박꼬박 쓰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메일로 보내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이 나서 컴퓨터를 뒤적여 보니, 다 있을 줄 알았던 2005년 여행기는 아예 남아 있지도 않고, 2003년 일기도 한 편 밖에 안 남아 있습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알라딘에 다 옮겨 두는 건데, 어디 가서 잃어버린 내 글을 찾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여기 부끄럽지만 제가 걸어 다니면서 썼던 여행기를 맛보기로 옮깁니다. 혹, 이 글을 읽고 도보 여행에 약간의 흥미가 생기는 분께 이 책을 권합니다. 혹시 제 글을 읽고 오히려 흥미가 떨어진 분들도 이 책은 제 글보다 100배나 생각이 깊고 잘 쓴 글이기에 읽어 볼 가치가 충분합니다. (사실, 저도 알라딘 대표님의 마이리스트 보고 고른 책이거든요. 좋았어요.) 

   이 책은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걸은 한 남자의 여행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4년 동안 이어진 이 여행을 세 권의 책으로 정리했고, 그 중 제 1권은 아나톨리아 횡단을 하면서 겪은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곧 떠나는 것이라는 것"이라는 말에 공감하시는 분이나, "걷는다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지는 일이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라는 말이 읽으시는 분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켜 도보 여행은 어떨까?하고 한 번쯤 떠올리는 분들이 읽으시면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2001년 8월 6일 : 부산에서 해남까지 남도횡단 5일째


  오늘은 평소대로 일어나 바로 문산가는 버스를 탔습니다.[이 때는 문산까지 걷고 숙소를 구하기 위해 진주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서 진주에서 잤거든요. 그래서 아침에 다시 문산으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탄 것이지요.] 문산 터미널 근처의 슈퍼에서 빵과 우유를 하나씩 사 먹고, 진주 시내를 향하여 걸었습니다. 문산읍에서 진주로 넘어오는 국도는 위험해도 무척 예쁜 길이었습니다. 시내 변두리에는 금방 도착했으나 중심지까지 가는 길도 무척 멀어서 둘이서 많이 지쳤습니다. 은행에 앉아서 한 번 쉬고는 계속 걸었구요. 가다가 사람들이 많이 쳐다보기에 아예 깃발을 마련하자고 의기투합해서 진짜로 현수막 공장에 들어가서 "부산에서 해남까지" 플랜카드를 만들어 달라고도 했답니다. 아쉽게도 그 집은 실제로 제작은 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발로 끝났지만… 진주 남강을 끼고 돌아서 망경동으로 빠져 나와 경전선(慶全線)을 나란히 하며 하동 방면으로 걸었습니다. 중간에 식당에 들러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사람당 500원씩 깎아 주셨습니다.

  12시 반부터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저는 계속 잤습니다. (동행자는 뭘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림도 그리고, 책도 보고, 엽서도 쓰고 하는 것 같았는데….) 3시쯤에 일어나 다시 강행군을 했습니다. 3시 좀 넘어서 걷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며, 비가 엄청나게 올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 마음 졸아서 계속 걸었습니다.

  근데 아무리아무리 걸어도 마을이 안 나오는 겁니다. 한 3시간을 걸어도 마을다운 마을이 안 나오고, 찻길은 넓어져서 차들은 쌩쌩 달리는데, 마을이 있어도 구멍가게 하나 없는 마을도 많더라구요. 3시간을 넘게 걸어서 도착한 마을이 완사(浣紗). 그곳에서 자고 가기로 마음먹고, 보건소, 복지회관, 초등학교…. 부탁할 만한 곳을 다 돌아다녀도 허탕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더 가기로 마음을 먹고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근데 마을을 둘러보니 좀 이상하더군요. 여느 시골 마을과는 다르게 건물들이 모두 양옥집이고, 지어진 시기도 비슷하게 보이고, 문패도 모두 똑같습니다. 그래서 식당에 들어가서 아주머니께 여쭤보니 이 마을이 진양호가 만들어지면서 생긴 수몰주민들의 집단 이주지역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이 마을은 "꿈꾸는 마을"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저녁도 공짜로 먹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그냥 주시더군요. 우리는 작은 돈이라도 드리려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받지 않으셔서 그냥 주소만 적어왔습니다. 부산가면 엽서 한 장 써야지요.

  아,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렀다가 뜻하지 않게 그 동네 아이들의 환영을 무지 받았습니다. 어찌나 OOO샘을 좋아하던지요. 덕분에 OOO샘의 발차기 시범, 마술쇼, 달리기 등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 먹고, 교회 담을 타고 널린 포도를 따먹으며 걸었습니다. 한 '1시간 정도 가겠지'하며 나섰는데, 실제로 한 시간쯤 지나니까 마음이 좀 급해집디다. 날은 완전히 어둡고, 잠자리는 아직 마련하지 못했고. 겨우, 사천시 곤양면이라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파출소부터 들어가서 단도직입적으로 "하룻밤 재워 주세요."라는 말씀드리니 돌아오는 건 어이없어 하는 웃음. 숙박은 곤란하다는 말에 난감해하는 우리들에게 가장 가까운 숙소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하시자, 냉큼 나와서 차를 얻어 타고 가까운 읍으로 나왔습니다. (여기는 아마도 곤양읍쯤) 별루인 여관이었지만 차들이 많아서 비싸지 않을까 순간, 졸았는데, 아주머니가 25000원 부르시기에 20000원에 하자고 말씀드리니 선선히 승낙하시네요. (에이, 15000원이라고 하는 건데...^*.*^)

  씻고, 빨래하고, 뭘 할까 하다가 3일 전부터 먹고 싶었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동네 한 바퀴 둘러보자고 나왔다가 피시방으로 들어왔습니다. 한 30분 정도 되었는데, 전 글을 다 썼으니 먼저 가서 자야지요.


  내일은 일단 하동까지 갈 예정입니다. 하동까지는 한 30킬로미터 정도거든요. 부지런히 걸으면 도착하겠죠. 그리고 여기 '도솔사'가 근처에 있어서 잠깐 들를 겁니다. 아침에 잠깐. 다음날은 벌교까지 가구요. 다음날은 보성으로 갈 생각입니다.


  오늘 길가에 가장 흔하게 널린 게 잡초였습니다. ‘잡초는 왜 이름이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길가에 숱하게 널려 우리에게 이름을 얻지 못한 잡초와 우리가 흔히 알고 있고 예뻐하는 꽃들이 차이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온전한 한 생명으로서 잡초와 꽃에게 제 몫의 삶을 주셨겠지요? 잡초의 생명도 예쁜 꽃의 삶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 아시고 계신 생각을 저는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의 삶도(특히, 우리학교 학생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잡초처럼 쓸모 없을 지라도 다 그 나름대로 소중한 가치가 있고, 충분히 제 몫을 해나가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누구나 자기 몫의 삶이 있는 것이고, 자기 몫은 다른 사람과는 경중(輕重)을 가리는 게 아니라 자기 몫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아이들에게 일깨워주는 것과 스스로가 자기 몫의 삶의 살도록 충분히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랑 그렇게 많이 싸웠던(?) OO이가 새벽에 술 먹다가 문자로 "샘,뭐 하는데요?"라고 묻고, 제가 "걸어서 여행 다니는데, 힘들어 죽겠다"고 하자, "샘, 화이팅"이라는 메세지를 보내오는 걸 보면서 나름대로는 힘들었던 지난 시간이 그래도 의미 없이 흘러가 버린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술 마시다가도 누군가가 생각나서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이면 적어도 사람에 대해서 실망한 사람은 아니니 크게 나쁜 사람으로 크지는 않겠지요. 제 자랑이 과했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걷고 힘내서 가겠습니다. 이번 여행은 제가 얼마나 열심히 가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것 같습니다. 저만 힘들어하고 OOO샘은 무척 잘 걸어가네요. 저는 아무데서나 퍼질러 자고, 일어나지도 않고, 게으름도 많이 부리고….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까 계속 꾀만 부리려고 하네요. 내일부터는 아프더라도 좀 열심히 가 보렵니다.

그럼 늦은 밤! 편안히 주무십시오.


경남 사천시 곤양에서. 느티나무 드립니다.



2002년 8월 11일 :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길 위에서 보내는 편지9


 잡초의 힘


  안동시내 한 복판의 여관에서 잠이 깨자 창밖부터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아니, 아직은- 비가 오지 않습니다. 서둘러서 짐을 꾸려 아직 잠이 덜 깬 안동 시내를 걸어 나옵니다. 여전히 아침은 빵과 우유입니다.

  오늘 걷기로 한 길은 안동에서 북쪽으로 난 35번 국도를 따라 도산서원까지입니다. 오늘은 아마도 거대한 안동호가 우리와 함께 걸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안동호는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로 숨을 고르고 있겠지요. 징그러울 수도 있고, 안쓰러울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게걸스러움에 돌을 던질까요? 그 넉넉함에 푸근히 잠길까요?

안동 시내를 벗어나 서원으로 가는 길 입구는 참 예쁘게 나 있습니다. 안동 북쪽은 전형적인 시골길입니다. 예쁜 길 주변으로는 엄청난 비에도 꿋꿋하게 자라고 있는 벼와 포도, 호박, 고추, 수박들이 보입니다. 다들 이제는 비가 그만 와도 괜찮다는 표정들입니다.

  단조롭고, 긴장감이 별로 들지 않는 길을 걸으니 무엇이든 자세하게 보려는 버릇이 생기는 가 봅니다. 주의할 게 적은 길에서는 마음도 풀어져서 한눈도 팔게 되고, 콧노래도 부르고, 도로 주변을 왔다 갔다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문득 오늘은 아스팔트 가장자리에 시선이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점점 눈은 아스팔트 주변으로 고정되고, 절로 감탄사가 나옵니다.  이야~! 정말 대단하다!  그곳에는 잡초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습니다. 조금의 틈도 용납하지 않는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와서 말입니다. 땅을 숨 막히게 덮고 있는 아스팔트 위로 올라와서는 참았던 숨을 내쉬듯 싱싱하게 잡초들이 자랍니다.

  아스팔트를 뚫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잡초뿐인가 봅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다른 것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아스팔트를 뚫은 잡초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요? 정말 그 힘이 대단함과 신기함을 넘어 두려운 생각까지도 들게 합니다. 사실, 잡초는 제가 보는 풍경의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보는 식물의 대부분이 이름을 얻지 못한 잡초들입니다. 우리는 포도, 사과, 고추, 호박, 수박을 보고는 감탄하지만, 흔하디흔한 잡초에게 눈길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잡초를 보며 '우리 모두'의 삶이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냥 이름을 얻지 못한 채 열심히 제 몫을 하며 사는 것! 누군가가 알아주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자존감으로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서는 것! 잘난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세상의 허한 구석을 채워야 할 운명 같은 것!(도무지 잡초를 빼고 생각하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제가 좀 억지를 많이 부리나요? 히!)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 중간 중간에 일하시는 분들께 이것저것 여쭙습니다. 일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도 들지만 이 분들의 말씀마다 수줍은 듯이 ‘했니껴’로 끝나는 이 지역 말투가 너무도 순박하고, 정겹게 느껴집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으며 가야할 길을 잊은 것처럼 마냥 퍼질러 앉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늘 점심은 아주 특별합니다. 옛날에 살던 마을이 안동호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어 집단으로 이사 온 마을에 들릅니다. 우연히 들른 식당이  나그네식당 이랍니다. 이 식당에 들고 보니 하나하나가 다 신기합니다. 허름한 간판하며, 가격표하며, 해 주시는 음식하며…. 이렇게도 장사를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지역에서는 메밀묵을 '메물묵'이라고 하신 답니다. 그리고 노란색 조가 많이 섞인 밥을 내 주시면서 묵밥을 만들어 주십니다. 덤으로 할머니의 구수한 말씀이 곁들여져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점심을 먹습니다.

  도산서원은 그냥 지나칩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한참을 더 북쪽으로 가니 토계면에 숙소를 정하기로 하고, 면사무소에 들러 쉬면서 잠 잘 곳을 여쭈니 이 마을엔 없다고 합니다. 좀 전에 일하시는 아주머니께 여쭈었을 땐 분명히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말입니다. 다시 안동까지 돌아가서 자야할 것 같아서 난감합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마을로 내려가다 보니, 바로 앞에 숙소가 보입니다. 황당해서 헛웃음만 나옵니다.

  바로 숙소에서 짐을 풀고, 다시 길을 걷습니다. 왜냐면 내일 걸어야 할 거리가 만만찮은 까닭에 오늘 조금이라도 더 걸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6km를 더 걸어서 갔다가 옵니다.

  이곳은 떠나와서 처음으로 pc방이 없는 조용한 시골 마을입니다. 오는 길 내내 그 흔한 '여관' 하나 없는 그런 곳입니다. (요즘 국도를 가시다가 큰집을 짓고 있으면 십중팔구는 '러브호텔'이더군요.)

  저번 편지에 안동의 힘! 말씀을 드렸지요? 안동의 힘은 곳곳에 자리 잡은 고택이나 문화재가 아니라 아직은 저질 소비문화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선 논과 밭에서-아직은 러브호텔로 변하지 않은 논과 밭에서, 그리고 그 밭에서 정직하게 땀 흘리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인가 봅니다.

  바로 그것이 잡초의 힘이겠지요. 안동의 힘이기도 하구요.


  밤하늘에 별이 총총한 그 날이 왔으면 참 좋겠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늘 함께 해 주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2002년 8월 11일 경북 안동시 토계면에서 느티나무 올림.



2003년 8월 14일 : 제주도 해안도로 일주


  어제 밤에는 무척 운 좋게, 깔끔하고 편한 숙소를 구했습니다. 어줍지 않은 글이나마 써 놓고 숙소를 잡았으니 무척 여유도 있었습니다. 느긋하게 내일 일정을 정하고 일출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잠도 일찍 잤습니다. 

  이른 새벽 저도 모르게 잠을 깨고 창밖을 내다보니 날이 잔뜩 흐립니다. 이것으로 성산봉에서 일출을 보겠다고 어제 잡은 일정은 어그러진 셈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들었답니다. 한참 후에 깨어보니 어느덧 아침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아침에 잠을 깨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늦어지는 걸 보니 이젠 몸이 제법 피곤한 가 봅니다.

  여전히 빵과 우유로 늦은 아침을 먹습니다. 가방을 챙겨들고 느릿느릿 성산봉 아랫동네를 돌아 성산항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햇살이 따갑습니다. 오늘도 날이 푹푹 찌려나 봅니다. 성상항에서 우도로 가는 배를 타고 우도를 둘러보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로로 들어가는 배에서 보니 일출봉의 모습이 마치 코뿔소가 바닷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인 모습입니다. 먼저 소머리 오름에 올라서 제주도의 모습을 보니, 어느새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데, 한라산이 수많은 오름들을 품에서 벌려놓은 듯한 모습이 장관입니다. 소머리 오름에서 바라본 바다는 막힘이 없어 보는 이의 눈맛이 시원합니다. 오름의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사진은 찍습니다.

  이후에 그 옛날 고래가 살았다는 동안경굴을 지나 고운 산호모래로 유명한 서빈백사를 둘러봤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가장 인상적인 우도의 모습은 때가 덜 묻은 순박한 마을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제주도가 원래 모습이 이랬지 싶은 생각이 들어, 뱃길로 15분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 세월의 시간 차이를 느꼈습니다.

  성산읍으로 나오는 배에서는 그냥 드러누워 또 일정을 잡습니다. 배는 야속하게도 금방 닿고 저는 점심을 먹고 움직이려고 어슬렁거렸지만,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이리저리 머뭇거리다가 번잡한 거리를 빠져나오고 말았습니다.

  다시 해는 구름 속에서 나왔고, 곧 이어 땀이 쏟아집니다. 그나마 오른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다 바람 덕에 쓰러지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는가 봅니다. 한참을 걷다보니 조개잡이 체험장에 들렀는데, 저는 물집 잡힌 발이 걱정이 되어 사람들이 조개 잡는 모습만 구경하다 빠져나왔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동작이 굼뜨는 것 같아 걱정이 슬그머니 들어 이제부터는 발걸음을 좀 빨리 놀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빵빵! 하는 차 소리. 누가 길을 물어보나 싶어 의아해하고 있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선생님”하고 부릅니다. OOO선생님께서 여행하시다가 알아보시고 내리셨더라구요. 일행들 때문에 시원한 물 한 잔 얻어 마시고 금방 헤어졌지만, 이런 곳에서도 반가운 사람을 만난 기쁨으로 또 얼마 동안은 힘내서 갈 수 있을 듯 합니다.

  점심을 제대로 먹기 위해 찾으려니 또 제법 큰 마을이 안 나타나네요. 오후 4시쯤에야 겨우 구좌읍내에 닿았습니다. 일단 점심을 먹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학교가 개학을 했는지 하얀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로 좁은 읍내가 무척 활기찹니다. 학생들이 예뻐서 몇 마디 말도 붙여 보았는데, 답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경쾌한지…….

  점심을 먹고 내일 돌아갈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아무리 걸어도 더 큰 마을을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숙소를 구하려고 했답니다. 발에 물집이 더 심해지고 발목이 시큰거려서요. 하루만 푹 쉬면 좋겠는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 그럴 수도 없고 걸음은 더 걷기 힘들고…… 그러나 지금 숙소를 잡으면 방값이 조금 비싸거든요. 얼마 전에 만난 제주도의 OOO선생님의 추천대로 근처에 있는 ‘다랑쉬오름’에 오르기로 했습니다. 가방은 마을 끝 빵집에 맡겨두고 가볍게 몸만 움직이기로 했지요.

  저 멀리 비자림(榧子林)들 돌아서 다랑쉬오름에 오르려고 하는데 구름이 잔뜩 끼었던 날이 더욱 흐려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변했습니다. 다랑쉬오름의 입구를 못 찾아서 여러 번 헤매고 있었으나, 사람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어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앞은 점점 더 안 보이고……. 겨우 찾은 입구는 철망으로 막혀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 되지만 철망의 개구멍을 찾아서 그냥 오르기로 하고 가파른 길을 꾸역꾸역 올라갔습니다. 암팡진 막사발을 엎어 놓은 듯 한 다랑쉬오름의 오르막길을 오르며 얼마나 쉬었는지 모릅니다.

 다랑쉬오름은 이번 제주도 도보여행 중에 가장 인상적인 곳이었습니다. 다랑쉬오름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가장 극적인 한 순간이 아닐까요? 특히, 제주 사람이라면 그 슬픔을 말로 풀지 못했을 뿐이었구요. 가슴에 켜켜이 쌓여있는 한의 상징일테지요. 궂은 날씨에 저 혼자여서 더욱 마음이 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좀 으스스했어요. 저는 사람들에게 다랑쉬오름에 올라야, 제주도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관광지만 따라다녀서는 제주도의 한 쪽만 보게 되는 것이지요.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곳을 떠나도 쉽게 잊히지 않을 풍경을 담았습니다. 이제는 이곳을 떠나려고 합니다. 도착해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 말씀드리지 않아도 늘 고마워하고 있는 거, 아시겠지요?


홀로 잠드는 제주도의 푸른 밤, 느티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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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3-04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걷는 거 참 좋아하는 편인데... 요즘은 영 게을러지네요. 느티나무님도 복이 덕에 좀 쉬시다 보면 배가 나오지 않을까요? ㅎㅎㅎ

드팀전 2007-03-0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서울 시내는 무척 많이 걸어다녔지만..^^ 아들 크면 한번 해볼까요.같이가요.^^

느티나무 2007-03-06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예전엔 진짜 빼빼했는데, 결혼하면 살 찐다는 말이 맞나 봅니다. 이젠 제 몸 가누기도 쉽지 않네요. 그래도 도보여행을 꿈꾸는 건... 왜 그럴까요?
드팀전님, 아드님 크면 같이 해 봅시다, 정말이요^^

느티나무 2007-03-06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저러나 책의 평가가 좀 박한 느낌이다. 4 1/2는 없을까? ㅋ
 
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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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 길을 돌아와서 다행이다.

 

   지금 나는 ‘서경식’이라는 사람이 쓴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두 번 읽고 책상에 앉았다. 책 표지의「쑤띤」이 처연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한동안 쉬이 잊혀지지 않을 표정이다. 이틀 동안에 이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집의 책꽂이에 서경식의 다른 책은 없는지 찾게 된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상황이 피상적으로나마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형들의 이야기도 그랬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이야기도 읽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욱 그림을 앞에 둔 글쓴이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요컨대, 글쓴이가 말하려는 내용이 분명하게 다가왔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집의 책꽂이에서 찾은 책은 ‘청춘의 사신’과 '소년의 눈물’이다. 나는 글쓴이가 20세기 미술가들의 작품을 좇아간 ‘청춘의 사신’을 먼저 읽었고, 모국어로 말하고 쓰지 못하는 글쓴이의 안타까움이 인상적이었던 ‘소년의 눈물’을 그 뒤에 보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러니까 나는 나온 순서로 따지면 제일 먼저였던 이 책을 맨 끝에 읽게 된 것이다. 다시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니 ‘창비교양문고’ 시리즈로 나왔던 이 책을 언젠가 한 번 손에 집었다 놓았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 순간 이 책을 읽은 게 너무 늦은 것인은 아닌가 싶었다. 이 책을 보기도 전에 나는 이미 유럽여행도 다녀왔고(흔히 유럽여행 가기 전에 미술책 한 두권 쯤은 읽는 거 같던데), 그가 자주 중얼거리던 대로 앞으로 당분간은 이 책 속의 그림을 보러갈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최근에야 이 책을 읽은 나는 오히려 늦게 읽어서 더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하다.

   모든 책이 다 그렇겠지만, 그 책과 관련된 배경지식을 알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진다. 그럼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어떤 배경지식이 도움이 될까? 제목이 서양미술 순례니 미술에 대한 지식과 호기심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서경식’이라는 사람의 삶, 특히나 ‘운명이 지워놓은 부당한 무게’라고 할 수 있는 그의 가족들의 삶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이 책을 더 깊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둘째형이었던 서승이 지은 ‘옥중 19년’과 셋째 형이었던 서준식이 쓴 편지글 ‘서준식의 옥중서한’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서경식이 그림을 마주대하고 눌러 쓴 한 문장 한 문장이 깊은 성찰에서 나온 소리로, 호사가의 허투른 말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온전한 자신의 노력이었겠지만, 글쓴이가 영혼에서 진실한 표헌을 길어올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은 어쩌면 부당한 운명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가족사도 한몫을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밝음이 어둠을 만들어냈듯, 어둠과 상처가 밝음과 진실을 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책은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무서운 정념’을 가진 한 인간이었던 그가 그림을 통해 자기 삶의 상처와 가족이 겪고 있는 아픔, 더 나아가 피지배자의 후예로서 지난날의 식민지 지배국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한 인간의 영혼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이 책을 만나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멀리 돌아왔으나, 늦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늦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내가 받은 감동이 더욱 컸다고 믿는다.


2. 그림을 보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다.


   서양미술 순례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책은 물론 서양미술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그 글자보다 앞에 ‘나’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 책은 미술에 대한 객관적 설명이 아니라,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서 들었던 글쓴이(나)의 느낌이나 감정, 생각을 훨씬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조금 더 바꾸어 말한다면,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글쓴이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의 생각을 더듬어간다는 것은 내 생각을 만난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짜 맞추기’식이라는 혐의를 각오하고서라도, 그림 앞에선 글쓴이의 마음의 움직임을 몇 갈래의 가닥으로 나누어 본다면, 피지배자의 후예로서 과거의 식민지 지배국에서 소수로 살아가는 자신과 가족의 삶에 대한 정체성, 조국의 감옥 안에 있는 형들을 둔 아우로서 감당해야할 운명의 무게에 대한 성찰, 우리 민족의 감당해야 했던 고단한 삶의 흔적과 세계사에 대한 일반적 통찰, 등을 들 수 있겠다.


가. 자신과 가족의 삶에 대한 정체성

 ․ 나는 다만 운명이 누이의 어깨 위에 지워놓은 부당한 무게를 묵묵히 생각할 뿐이었다.

  (수태고지, 37쪽)

 ․ 허위에 병든 ‘미의식’이 식민지인인 나의 동포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던가를 잊었을 리도 없다.(데셔앙스, 45쪽)

 ․ 유람하러 다니는 외국여행에서 당하는 얼마간의 고생 따위는 어머니가 겪은 회한과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데셔앙스, 51쪽)

 ․ 만인이 다 아는 명화라 할망정 필요 여하에 따라서는 단속이나 말썽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암우한 감성이 그것에서는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니! 그 말은 곧 이 그림에 그려진 살육과 저항 모두가 그곳, 다시 말해서 나의 조국에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은 동시에 위대한 선전물이다. 거의 2세기 전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이 그 작가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극동의 한 나라의 관헌들로 하여금 자국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부당하고도 잔혹한 일들을 연상케 하고, 그래서 불안한 기분을 일으키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그림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모래에 묻히는 개, 98쪽)

 ․ 피지배자의 후예가 절대적 소수자로서 지난날의 지배자들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 ‘생활’의 밑바닥이 불안을 품기에 충분하다. 하물며 고국은 두 쪽으로 찢어져 있는 채요, 형들 중의 두 사람은 이미 10년 이상 그 고국의 감옥에 있다. 양친은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화가 누이의 초상, 118쪽)

 ․ ……버둥거리면 버둥거릴수록 속수무책의 불행을 엮어내고 마는, 그러한 삶이 있는 법이다. (화가 누이의 초상, 126쪽)

 ․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위엄이 있었으나 몸차림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고, 피로로 충혈된 눈이 나날의 고뇌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일찍이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와 밑바닥 노동에 시달렸던 나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모습이다.(젊은 부르델의 자화상, 152쪽)


  이처럼 여러 그림 앞에서 글쓴이는 자신과 가족의 처지를 떠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림 앞에서 만난 자신과 가족의 처지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 책의 곳곳에 나온 대로 말한다면, 속수무책의 불행에 엮인 삶이고, 마치 운명이 짐 지운 부당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삶인 것이다. 이들의 불행한 삶의 근원은,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왔다가 눌러앉게 되어 절대적 소수자로 살아가야만 하는 피지배자의 후예로서의 삶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소년의 눈물’이라는 책으로 묶어낸 자신의 글이 일본의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고 나서 ‘일제가 조선을 식민 지배한 결과 나는 일본 땅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민족 차별 정책 때문에 충분한 ’우리말‘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 같은 역사가 나의 ’빼어난 일본어 표현‘을 가능케 해주었고 끝내 이런 상까지 안겨준 것이라 할진대,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라고 자조하고 있었다. 이를 볼 때, 그는 외부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뼛속까지 자신이 재일(在日)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차별을 감수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그의 조국은 두 형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자행하고 있으며, 늘상 살육과 저항이 빈번해서, 만인이 다 아는 명화를 보고도 자국의 상황으로 오해해서 불안을 느끼는 그런 곳이다. 그런 곳을 그는 ‘조국’이라고 부른다.


나. <테오>와 <서경식>의 경우

  ․  노예는 나의 형인 것이다.(거친 하늘과 밭, 60쪽)

  테오의 죽음은 나를 한층 더 애절하게 만든다.(거친 하늘과 밭, 68쪽)

  ․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인)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이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자들이 그 채찍의 아픔을 참고 견뎌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짐짝인 것이다. 그러므로 ‘슬픔과 고독’은 고흐에게뿐 아니라 테오에게도 있었다. 그것을 처절한 색채감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형의 역할이었고, 그것을 말없이 감수하는 일이 아우의 몫이었다. 테오는 진실로 그러한 방식으로 형 고흐가 행한 창조의 고투(苦鬪)에 당사자로서 참가했던 것다. (거친 하늘과 밭, 69-70쪽)


   만약 나 자신이 ‘고흐’가 그린 그림 앞에 섰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이미 그런 적도 있었으니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떠올려 봐야 할 텐데 도무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아마도 고흐의 그림을 실제로 보고 있다는 것에 마냥 들떠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고흐라는 이름이 주는 중압감에 압도당해 무엇이 그리 좋은지도 모르고 그냥 경탄하고 있었거나!

   서경식은 고흐 형제의 무덤을 둘러볼 때도, 고흐가 그린 그림 앞에서도 ‘정념’에 가득 찬 형을 둔 그 아우, 테오의 삶과 마음을 더듬고 있다. 그 동생, 테오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테니까 말이다. 그에게도 신념을 목숨보다 중요하기 여겼던 집념의 두 형들이 있었으니까. 그 동생 테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당연했다. 마찬가지로 ‘서경식’이 ‘테오’의 죽음에 더 애절함을 느꼈던 것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아마도 서경식과 그의 가족들은 감옥에 가 있는 형제를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이해자가 되어 운명이 휘두르는 채찍의 아픔을 견디지 않았을까?’라고 말하는 것은 테오의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이었던 것이다. 글쓴이는 말없이 아픔을 감수하는 것이 두 형을 감옥에 보낸 동생의 몫이라고 은근히 말하고 있는 듯하다. 테오가 말없이 감수하는 것으로 고흐의 창조에 동참하는 것처럼 그 자신도 바로 노예처럼 감옥에 묶여있지만 불굴의 의지로 창조가가 되려는, 구도자가 되려는, 아니, 혁명가가 되려는 형들의 삶에 그 자신도 묵묵히 동참했던 것이다.


다. 역사를 꿰뚫는 예리한 눈을 가진 사람

 ․ 프라 안젤리꼬가 그린 화려하고 청순한 종교화의 그늘에도, 처참하기 그지없는 정치와 인간의 드라마가 감춰져 있음에 틀림없으리라고는 확신을 갖게 된다.(수태고지,35쪽)

 ․ 이 저열하고 야비한 정신이야말로 아득히 먼 5백년의 전통이 길러낸 군국 스페인의 정화(精華)인 것이다.

 ․ 군국주의 스페인 5백년의 전통, 그 중후하면서도 저열하기 이를 데 없는 정신에 대하여 한 사람의 그림장이의 거대한 불기의 정신이 대항하고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마침내 승리하는 모습이다. (게르니까, 88쪽)

 ․ 굴욕을 당하고, 수탈을 당하고, 살육을 당해온 우리 민족은 과연 우리들 자신의 「게르니까」를 산출해냈는가. 군국 스페인 5백년의 공포와 중압이 삐까쏘를 낳았다고 할 때, 우리 민족에게 가해지고 있는 고통은 아직 가볍단 말인가.(게르니까, 89쪽)

 ․ 민중의 희생과 저항은 ‘외압’에 대한 승리를 가져왔으나 그것은 반동을 동반하고 온 것이었다. (모래에 묻히는 개, 104쪽)

 ․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가 되지만 대개는 맥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을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두꺼운 구세력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모래에 묻히는 개, 108쪽)

 ․ 평가나 명성이 정해진 것만을 감지덕지 고마워하며 만족해하는, 뒤집어놓은 공식주의 냄새를 맡는다. 그것은 결국 싸움의 승패가 판가름 난 뒤에야 승자 편에 가 붙는 꼴이 아니고 뭔가.(중략) 그것은 변화나 진보를 긍정하는 정신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변화나 진보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변혁하고 극복해야 될 대상으로서의 전통이나 보수를 시대적 조건의 문맥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화가 누이의 초상, 122-123쪽)


   이 책의 곳곳에 언급되어 있는 그의 역사에 대한 통찰력은 예리하다 못해 섬뜩하다. 청순함 뒤에 감추어진 처참함을 꿰뚫는 그의 인식으로, 다른 나라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스페인의 경우처럼 5백년의 고통으로 만들어진 진주 같은 ‘게르니까’를 아직 만들지 못한 우리 민족의 ‘비극성’에 대한 한탄은 마음을 울린다. 정말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보태야 '게르니까' 같은 전쟁과 반동을 거부하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싶다.

  ‘진보와 반동은 손잡고’ 온다는, 그래서 역사는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는 그의 인식은, 빠르게 보수화 되어가는 최근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진보의 시기를 거치고 나면 오히려 진보가 시작되던 그 지점보다 더욱 후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불안이 엄습하는 요즘의 우리 모습이다.

  하지만, 진보가 비록 반동이 함께 올지라도, 그런 희생 없이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 당위로서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진보에 대한 희망의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아 마음을 다잡게 된다.


3.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읽은 것일까?

 

   미술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내가 읽은 내용을 끼적거리는 이 글의 어느 부분도 온전히 미술과 관련된 내용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글쓴이가 그림을 앞에 두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퍼 올렸다면, 나는 그의 책을 읽고 내 마음대로 그의 마음을 읽어간 것이라고 되먹지 않은 추측을 해 본다. 만만치 않았던 역사적 무게를 감당해야 했던 한 재일 조선인이 서양미술이라는 도구를 훌륭하게 써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잘 다듬어낸 이 책이 내 마음을 울렸다.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책과 인물, 사건들이 너무 많아서 여러 번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던 기억이 새롭다. 더구나 내가 읽었던, 서경식 씨의 앞에 두 책(청춘의 사신, 소년의 눈물)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유려한 문체도 조금은 맛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그의 다음 미술 순례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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