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 이랜드 노동자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6
권성현 외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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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책!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를 얼마 전에 읽었다. 책을 읽고 짤막한 느낌을 적어두는 이곳에 ‘감동적이다’, ‘무심했던 나를 반성한다’, ‘몰라서 미안하다’ 는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이 책에는 그런 말조차 사치스러워서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늘 책 읽고 나서 써 두는 그런 말을 흘리고, 또 어제처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책을 읽고 나서 몇 마디 적어두는 건 혹시나, 혹시나 나의 이 몇 마디 때문에라도 이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 


   다만, 이 책에 대한 찬사로 가장 어울릴 만한 구절을 요즘에 읽고 있는 책에서 찾았기에 내 짧은 표현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대신해서 덧붙여둔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누가 권 선생한테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인가?”하고 물었을 때 그분 말씀이 이랬다.

   “읽고 나서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

   그렇다. 이 책에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많을 것이다. 특히 당신이 평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허영철,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보리, 2006, 추천사(윤구병) 중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이 필요할까?  

 

    벌써 400일을 넘겼다. 아직도 파업 중인 그들 스스로도 이렇게 오래 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처음엔 이랜드 그룹의 비인간적인 노조 관리 실태와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구조조정을 시도하는 기업에 맞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시작된 이 파업은 조합원들이 대다수가 중년여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파업에 참여했고, 사람들의 일상 공간인 대형마트를 점거하는 파업 방식의 과격성(?) 때문에 여론의 관심을 뜨겁게 받았다. 최근의 사회의 보수화 흐름 속에서는 드물게 이랜드 그룹의 몰상식한 노무 관리에 대한 비판 여론은 드높았고, 노조원들의 파업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분위기가 어느 때보다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상황이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노조원들의 매장 점거가 길어지자 이제는 새로운 이슈가 아닌 이랜드노조의 파업이 언론의 관심권에서 밀려났고, 이 때다 싶었던지 경찰은 강제 진압에 들어왔고, 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은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고, 파업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두 차례나 더 매장 점거에 나섰지만 그리 길게 가지는 못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온 시간이 벌써 400일이다. 아직도 더 해야할 일이 남아 있을까? 아직도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하기야 1000일도 넘긴 파업장에서 단식으로 사람이 죽어나가려고 하는데도 꿈쩍도 않는 대한민국이니 아직도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 바로 여기가 야만국이다.)

 

   그네들의 거창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정규직/비정규직으로 차별해서 대우하지 말라는 것, 일정 기간 동안 계약직으로 일을 하면 그 이후엔 고용불안 없이 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파업 과정에서 일어났던 고소 고발 사건을 취하해달라는 것.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로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소박한 꿈을 위해 시작한 파업이 길어지면서 그네들이 눈물을 흘리는 날도 늘어났다. 

   제대로 된 수입이 없어서 아이들이 지내는 집에 전기와 가스가 끊겼을 때는 마음이 찢어지고, 가족이나 친구들의 몰이해에 상처도 받고, 죽을힘을 다해서 싸우고 있는데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세상을 볼 때면 억울한 생각도 들고, 함께 파업에 동참했던 동료들이 하나 둘 파업현장을 떠나면서 기운도 빠지고, 여전히 제대로 된 협상에 미온적인 회사의 태도에는 분노하고. 그럴 때마다 그네들은 자신들의 소박한 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울었다. 돈이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울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 모두[지금의 길어진 파업에 회의적인 사람일지라도]가 이랜드 파업이 해결될 것이라는 것에는 대체로 생각이 같았다. 다만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건 느긋한 자세나 긍정적인 태도와는 다른 목소리다. 굳이 생각해 보자면 이랜드 파업의 해결은 ‘역사적 당위’의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을 해결해 줄 열쇠인 시간이 너무 늦게 찾아온다면 기다리는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모쪼록 그네들의 삶과 영혼을 다치지 않도록 해결의 시간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그네들의 눈물은 지금까지 흘린 것만으로도 족하다.


나는 당신들의 소박한 꿈을 응원합니다.


   내가 그네들의 소박한 꿈을 응원하는 이유가 단지 그들이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네들이 이 말을 들으면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운다고 하겠지만, 그들이 지금 당장 겪고 있는 현실이 나와 내 가족, 내 친구, 내가 가르친 학생들의 곧 닥쳐올 미래이기 때문이다. 허술하고 허울뿐인 비정규직 보호법(?)을 능구렁이처럼 교묘하게 피해가는 기업의 횡포 앞에 더 이상 노동자들의 안전지대는 대한민국에 없다. 그러니까 이건 내 문제이기 때문에 당연히 응원이라도 해야 한다.

   나는 복잡한 이론이나 법률적인 논쟁에 대해서는 별로 잘 알지 못하지만, 8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받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고,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과 단지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60% 정도에 불과한 임금을 받아야 하고, 언제든 해고할 수 있도록 계약기간이 비어있는 계약서가 횡행한다면 이건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도 아니다. 이건 우리 모두가 문제가 아니라고 외면하는 사이에 만들어진 사회적 괴물인 것이다.

   늘 기업들은 어렵다고 말한다. 툭하면 해외로 공장을 옮긴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월급을 올려주면 회사가 다 망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몇 년째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이 임금상승률보다 훨씬 높았다는 사실이나, 수 년 사이에 제품의 원가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낮아졌다는 객관적 자료는 늘 외면한다. 어쩌면 이들이 너무 영악한 자본가들이든가, 우리가 너무나도 착하고 바보 같은 노동자들인지 모르겠다. 이런 순해 빠진 우리와 자아를 성찰할 줄 모르는, 앵무새 같은 저들에게 단 한 번의 경험이 꼭 필요하다.


   한국의 지배층은 어지간해서는 정신 차릴 줄 모르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게으른 극우파들이다. 웬만해서는 반성하거나 성찰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 상식적 우파나 건전한 보수와 아주 거리가 먼, 그저 틈틈이 거짓말이나 하고 논리가 밀린다 싶으면 ‘민족의 영광’ 혹은 ‘미국의 번영’에나 기대는 극우파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여전히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총파업이다. 이들과 상식적으로 대화하기 위해서라도 총파업이 한 번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 (중략)…… 비정규직 문제도 마찬가지다. 가능한 정책들이 있는데 정부가 전혀 하지 않고 지배층이 이것을 막아서고 있을 때, 사회가 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수단이 총파업이다. 기껏 정례적으로 연봉을 결정하기 위해 자본주의 역사가 총파업이라는 제도를 만들어낸 게 아니다.

   물론 사실상 총파업이 물리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총파업이 가능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순간, 정말로 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의 테이블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는 총파업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극우파들이 생각할 때에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불행한 일이 생긴다. 이건 간단한 게임의 법칙이다.

우석훈, 촌놈들의 제국주의, pp.272-273

 

추석 재정사업에도 변함없는 성원 부탁합니다!!

http://www.elandilban.ba.ro/


   이랜드일반노조 홈페이지다. '우소꿈'을 읽고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싶어서 들어가 보니, 추석 재정사업을 하고 있다는 공지가 올라있다. 책에도 나왔던 그 재정사업이었다. 나는 이랜드일반노조 덕분에 이번 추석에 본가와 처가에 배 한 상자씩을 선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랜드일반노조 재정사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이다. 사실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좀 빨리 써서 서재에도 걸어놓고, 직장의 동료들에게도 ‘추석 재정사업’에 대한 홍보도 해보려고 했는데, 나의 게으름 때문에 이렇게 늦어버렸다. 미안하다. 앞으로도 가끔씩 홈페이지에라도 들어가서 응원해야겠다. 음... 누군가가 던지는 응원의 한 마디가 이때처럼 절실한 경우도 없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추석 재정사업에도 변함없는 성원 부탁합니다!!

이랜드투쟁이 400일을 훌쩍 넘겼습니다.

그러나 뚝심의 아줌마들은 질기게 투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장기투쟁으로 접어든 상황에서

투쟁 승리를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게 바로 생계비와 투쟁기금입니다.

이에 이번 추석에도 지난 설날에 이어 선물세트 재정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추석 때 필요한 여러 물품들, 이왕이면 이랜드노조에서 구입해주시고

주위에도 널리 홍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번에는 단 하나를 주문하셔도 정성껏 원하시는 곳으로 무료 배송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우소꿈" 책판매는 계속됩니다. 지속적인 사랑 부탁드립니다.

 이랜드 일반노조 조합원 여러분! -투쟁해서 꼭 이기시도록 응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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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중국견문록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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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주 좋아하는 어떤 선생님께서 한비야 씨(이런 경우 뭐라고 불러야 하지, 한비야 씨?, 한비야 선생님?, 한비야?, 한비야 님?, 딱 마음에 드는 호칭이 없네.)가 자신의 ‘롤 모델’이라고 하시면서 이 책을 말씀해 주셨다.(음, 책은 내 돈 주고 샀다.) 나도 한비야 씨의 책은 그가 세계 일주를 마치고 냈던 책 덕분에 한창 유명세를 탄 이후에 펴낸 ‘… 우리 땅에 서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땐 설렁설렁 책을 넘겨서 그랬나, 굳이 한비야 씨의 다른 책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그러면서도 괜히 한비야 씨에 대해서 좀 안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곤 한다.)

   굳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다 보니 신문이나 온라인 서점, 심지어 텔레비전의 요란한 (간접) 광고에도 끄떡 없이 한비야 씨의 책을 무심하게 넘겼는데, ‘저런 훌륭한 선생님께서 닮고 싶은 모습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역시 홍보는 구전(口傳)이 힘이 세다. 한비야 씨의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들었던 내 생각은 - 부러움!

 

    부럽다. 글쓴이가 저렇게 어디든 마음먹은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몸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게 말이다. 늘 반복적인 일에다 평온하다 못해 무덤덤하기까지 한 일상을 살고 있는 내 처지-물론 내 상황이 부러운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에서는 가끔은, 부럽다. 물론 글쓴이가 저렇게 멋진 모습으로 살게 되기까지는 남이 모를 많은 시련과 인내를 거쳐 온 것이겠지만, 그 화려함의 이면(裏面)을 잘 보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그냥 지금의 그 모습이 부러울 뿐이다. ‘뭐,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겠지’라는 일상의 매너리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아니다, 인생은 그렇지 않다’고 온몸으로 실증해 주고 있는 글쓴이의 존재가 마냥 부러울 따름이다.

   또 부럽다. 어떤 사람은 저렇게 자기 사는 이야기를 술술 잘도 풀어내고, 1년 동안 살아가는 이야기를 토막토막 글로 쓰기만 해도, 글이 묶여서 뚝딱 책이 되고, 또 그게 먹고 사는 벌이(?)가 될 수 있다는 게 또 부럽다.(이런 걸 문화자본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언젠가 술자리에서, 어느 선생님께서 글 쓰는 사람들은 목숨 걸고 쓴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던 내가 그 사이에 그 말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책을 읽는 내내 또 부럽다,는 말을 입에 줄줄 달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부럽다. 글쓴이의 열정에 가득한 삶이야말로 내가 진짜 부러운 부분이다.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수 있고, 그 기회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삶이 곧 글이 되기도 하고, 그가 쓴 글을 읽어주는 독자도 많아지는 것이다.

   견문록 곳곳에 글쓴이의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 넘친다. 이 삶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한비야 씨를 진정 한비야 씨답게 만드는 매력적인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나는 글쓴이의 삶에 대한 열정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피나는 노력의 결과일 것임을 ‘머리’로는 알면서도-따라서 누구나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으로 마냥 부러워하기만 한다. 진짜 부럽다.

 

   정작 중국에서의 유학 생활 1년을 담은 책의 내용은 평이한 편이었다. 글쓴이의 말처럼 학생 신분이니까 당연히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책의 여기저기엔 이방인으로서 중국(베이징)에 살면서 보고 듣게 되는 중국의 다양한 사회와 문화에 대한 주관적 인상, 또 유학생 신분으로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에피소드와 그 상황에서도 언제나 생기를 잃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글쓴이의 씩씩한 모습이 나타나 있어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그 선생님이 참 멋있다,고 느낀 점이 바로 한비야 씨의 저런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비야 씨의 모습과 그 선생님의 모습이 묘하게 겹친다. 그 선생님은 이미 자신의 롤 모델과 충분히 닮은 것 같다.(본인은 별로 인정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나만의 '롤 모델'을 찾아서 닮으려고 애쓰다 보면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 일단 역할 모델부터 한 번 찾아보자. 자, 누구 있을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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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8-30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롭게 생각하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사는 게 제 삶의 목표지요. 중심을 잡고 편견 없이 바라보며 ... ㅋㅋ 대문에 걸어 놓은 이 말을 읽으면서요...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자유와 성실이 함께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진지는...
중심을 잡는 것과 편견없는 것이 함께할 수 있을까? 중심을 잡는단 것이 편견 아닐까 하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 ㅎㅎㅎ 롤 모델. 있는 것도 좋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이 삶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느티나무 2008-08-31 02:41   좋아요 0 | URL
저 글의 원래 의도는 '생각'은 막힘 없이, 경계 없이, 안 된다는 선입견 없이 '자유롭게' 하고, 그 생각이 한 번 결정되고 나면 진지한 자세로 성실하게 '실천'해 나가고 싶다-그냥 한때의 치기나 만용이 아니라-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자유와 성실이 맡은 영역이 다르다고 할까요? 중심과 편견이라.. 이건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겠네요. 자기 생각이 없으면 편견도 없을 테니까요. 어떤 식으로든 중심을 잡는다는 하나의 시각을 갖는다는 의미고, 모든 시각은 편견일테니까요.^^

느티나무 2008-08-31 02:40   좋아요 0 | URL
역할 모델,에 대한 이야기. 일종의 목표 같은 거 아닐까요? 누구를 닮고 싶다는 욕망이 어쩌면 저를 지금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미안하고 미안한 말씀이지만, 학교에서 제 역할 모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 "선택은 없다! 햇빛 에너지에 열광하라"
강양구 지음 / 프레시안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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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는 청소년, 일반 독자들이 지구 에너지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만만하지 않다. 더구나 대부분의 책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생각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려고 한다면 더욱 더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그런 책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행동이 쉽게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간디의 물레’를 읽고 그랬나, 아니면 ‘녹색평론 선집1’을 읽고 그랬나, 아무튼 그 책을 읽고 나서 자동차를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래봐야 내가 조금이라도 필요하다고 느낄 땐 아버지의 낡은 자동차를 서슴지 않고 빌린 적도 많았기 때문에 내 결심은 ‘눈 가리고 아웅’했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눈 가리고 아웅’조차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그 낡은 자동차로 요즘 나는 매일 출퇴근을 한다. 요즘이라고 말하기엔 솔직하지 못하다. 벌써 1년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운동을 위해서, 환경을 위해서, 자전거를 사야지, 걸어 다녀야지, 좀 심심하다 싶으면 이런 결심이 불쑥 솟구치고 하지만 며칠 후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내 몸은 편리한 자동차에 이미 중독이 되어 버려 자동차를 내버려두지 못한다.

   작년부터는 집에 어린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에어컨도 사다 놓았고, 조금만 더워도 문을 꽁꽁 걸어놓고 이 여름을 지낸다. 무신경한데다가 귀찮다는 이유로 쓰지 않는 가전제품의 플러그를 뽑아두는 경우도 거의 없다. 전등이나 컴퓨터, 냉장고, 선풍기, 가스레인지…… 어느 것 하나 생활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풍족함을 누리며 산다.

   지난 며칠 동안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를 읽고 다시 한 번 내가 누리는 에너지의 풍족함에 대해 생각한다. 책을 덥고 되짚어 이제 3년 남았다는 강양구 기자의 경고가 머릿속을 맴돈다. 3년이라…그런데 정말 3년 후엔 세상이 확 달라져 있을까? 실감이 나지 않는다. 기자가 계속 경고했듯이 유독 에너지 위기에 천하태평인 우리나라에 사는 무신경한 독자의 한사람이라 그런가, 싶기도 하고, 그 위기가 너무 코앞인 3년 후라는 점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한다.

  ‘고유가, 앗뜨거’
  정부, 원전 비중 낮추고 신재생에너지 늘리기로 

   정부가 2030년까지의 원자력 발전설비 비중을 애초 37~42%에서 36~41%로 1%포인트 하향 조정하기로 했다. 대신 신재생에너지 보급률은 2030년까지 애초보다 2%포인트 높은 11%로 늘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추가로 필요한 원전도 9∼13기에서 7∼11기로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원전 추가 건설에 따른 안전성과 부지 확보 문제로 논란이 예상된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하 에경연)의 ‘국가에너지 기본계획안’은 2030년 원전 설비 비중을 지난해 기준 26.0%에서 2030년까지 36~41%로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에경연은 지난 6월 1차 공개토론회에서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이 지난해 말 작성한 2030년 유가전망(배럴당 100.1달러)을 토대로 원전 설비 비중을 37∼42%로 제시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초고유가로 에너지정보청이 유가 전망을 배럴당 118.7달러로 상향 조정하자 이날 토론회에서는 원전 비중을 36∼41%로 수정했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고유가가 지속되면 에너지 총수요가 줄어들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커지게 된다”며 “이에 따라 원전 비중이 낮아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에경연은 1차 토론회에서 2030년까지 신고리 3, 4호기(140만㎾급) 수준의 원전이 9∼13기가 더 필요할 것으로 추정했으나, 이번 수정안에 따르면 필요한 추가 원전은 7∼11기다. 추가 원전 건설을 위해서는 신규 부지 조성과 사용 후 연료 임시저장시설이 더 필요하다.
   이에 대해 환경단체에서는 원자력 비중 확대보다 에너지 수요관리 강화와 신재생에너지 확충 등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논란이 불가피하다.
   정부는 13일 공청회를 거쳐 이달 말께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가에너지위원회에서 최종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용인 기자, 2008.08.08, 한겨레신문」

   며칠 전에 신문을 뒤적이다 발견한 기사에 평소와는 달리 눈길이 갔고 잠시나마 생각이 머물렀다. 평소 같으면 잘 읽지도 않고 넘겼거나, 읽어도 그런가 보다 했을 기사인데, 이번에는 ‘아톰의 시대에서……’를 읽은 덕분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11%로 늘리려는 목표는 여전히 미흡(알고는 있었지만, 11%라고 읽었을 때는 ‘겨우?’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방향은 옳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이러한 ‘당위’를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데, 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이 말엔 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이 기존 에너지기업들의 외부효과까지 고려한다면 저평가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소규모 재생에너지의 생산만으로는 재생에너지의 보급과 확대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을 높여 대규모의 사회적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느냐도 중요하겠지만, 누리는 에너지 소비의 혜택은 조금도 줄일 생각은 하지 않고, 재생에너지의 중요성에 대한 당위만 강조하는, 나 같이 평범한 시민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행동할 때 에너지 위기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을 해 본다.

  왜 우울한 예측이냐고? 몸은 이기적이어서 쉽게 편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니까! 그날 읽던 신문에 저 아래의 만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굳어졌다.

건강해야 되는데[홍승우, 2008. 08.08, 한겨레신문]

   저 만큼 실천하기란 어렵다. 그래도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해야 하니까 굳이 희망적인 징후를 좀 짚어보자면,

1. 얼마 전에 ‘환경스페셜’(KBS1)에서 다룬 에너지 자급자족 실험을 했던 민들레마을 편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힘들겠지만 저런 실험이 있다면 재미있겠다고, 참여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들기도 했다.

2. 요즘 들어서 낮에 전등이 켜진 것에 조금 신경을 쓴다. 아울러 냉장고 문이 오래 열려 있어 ‘삐’ 소리가 나면 마음이 아주 초조해진다. 전화기 충전기라도 사용하지 않을 때는 빼놓으려고 애쓴다.

3. 자동차 문제가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당장 해결하기는 어렵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조금씩 사용을 줄여 보자는 결심은 섰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일이 제법 잦아졌다.

   그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이다. 남들은 보잘 것 없다 하겠지만 나는 그래도 지금은 이게 다에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참, 가야할 길이 멀다. 이 책이 좋은 길잡이에, 먼 길을 함께 가는 좋은 벗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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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문지 푸른 문학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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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90년이었고, 난 그 때 고 3이었다. 정신없이 공부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달 앞으로 다가온 학력고사를 앞두고 선지원(先支援)할 대학교를 고르기 위해 일주일 간격으로 네 번 치는 배치고사는 한 달도 남지 않았기에 내 마음에도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해는 수험생도 역대 최다라고 떠들어대서 수험생들 모두가 다른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10월 9일로 기억하는데(아니면, 10월 3일이었을 것이다.), 휴일이었지만 학교에 나와 자습한답시고 교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 날은 여느 휴일과 분위기가 확 달랐다. 고등학교 정문 근처에 전투경찰부대가 한동안 쫙 깔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 3이던 그해는, 6월 항쟁이 있던 그 다음해였으니까 전투경찰이야 텔레비전 속에서 익숙했지만, 이런 변두리 고등학교에서 전투경찰을 보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얼마 있다 전투경찰 부대가 사라지자 술렁였던 학교도 이내 아무 일 없는 듯이 평온해져서 나는 운동장에서 농구공을 던졌다.

   다음날, 등굣길도 여느 날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우리 반 교실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모두들 모여서 웅성웅성. 내 자리에 가방을 던지고 앉기도 전에, 아이들의 어깨 너머로 들리는 소리 -- OO이가 잡혀갔다더라. 아니다, OO이는 집에 있는데 학교를 못 나온다고 하더라. 학교에서 못나오게 했단다. 교육청에서 퇴학, 아니 제적시키라고 학교에 요구했대. -- OO이는 우리 반 반장이었고, 나와는 단짝은 아니었지만, 꽤 친했던 친구였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린가? 아니, 왜? -- OO이가 부고협(부산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활동을 했는데, 어제 부산대 도서관 앞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대. 교육청에서는 고등학생이 (허락 없이) 집단행동을 하고 또 ‘성명서’의 내용도 문제 삼아서 징계하기로 했다더라. 어제 전경이 우리 학교에 온 건 그 ‘성명서’ 발표를 우리 학교에서 하기로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래.

   이날부터 ‘OO이 징계 반대’를 내걸고 수업 거부 돌입. 전교생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첫날 오전은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였다. 오후가 되자 1,2학년은 교실로 들어가서 수업을 받았다. (총학생회에서 들여보내기로 결정했는지, 선생님들 때문에 아이들이 들어갔는지, 당시에 평범한 학생이었던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하루를 3학년만 운동장에 남았던 거 같다. 다음 날이 되자 3학년 이과 반도 수업을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문과 반 네 반만 그렇게 하루를 더 버텼다. 사흘째가 되자 우리 반만 빼고 세 반은 수업을 했다.

   우리 반은 책상을 뒤로 돌려놓고 앞문을 잠그고 교실에 앉아서 자습을 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미리 알고 우리 교실로 올라오시지 않았다. 어쩌다 오신 분들은 ‘이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이미 상처받은 우리 마음엔 그 말씀이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책상을 돌리고 일주일을 더 버텼다.(그러니까 우리는 열흘 동안 ‘파업’ 했다.)

   그 사이에 형사가 자주 학교를 다녀간다는 무서운 소문도 들리고,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이 교무회의에서 ‘OO이 징계’가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시면서 학교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고, 그사이 ‘OO이의 제적’이라는 징계가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란 우울한 소문도 바람을 타고 교실 문턱을 넘어왔다. 조금 더 자세하게, 학교는 교육청에서 결정한 일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교육청은 학생의 징계는 학교장의 권한이라는 뻔한 소리로 ‘나 몰라라’한다는 소문도 이내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치를 떨고 분개했던지!

   아니, 우리는 누가 만들어내는지 알 수 없는 그 소문이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그 때마다 아이들이 난상토론을 벌였고, 열흘 째 되는 날 오후에 학생들의 투표로 다음날부터 수업 복귀를 결정했다. 수업에 찬성한 학생이나 반대한 학생이나 아무도 수업 복귀 결정에 대해서 좋아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냥, 부당한 힘에 졌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했다. 나도 학교와 선생님이 싫어졌다. 그때는 세상 모든 게 그냥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싸움을 통해 학교 밖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옳고 그름이 너무나 분명한 싸움에서도 이렇게 지는구나, 하는 그 쓰라린 경험은 어린 나에게 적개심을 넘어 공포감, 그 자체였다. 단 한 번의 싸움에서 진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기운을 잃어버렸다. 변명 같지만, 그 이후로 대학을 다닐 때 자주 일어난 시위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가 분명 옳은데도, 싸움에서는 질 수 밖에 없다는 그 절망감을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고백하자면, 지금도 나는 사소한 싸움이라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다음 날부터 수업은 시작되었으나 그 어느 선생님도 그 열흘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일로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을 그만두셨고, 우리 반 아이들은 진학 상담을 낯선 선생님과 해야만 했다.(사실, 선지원시험제도라 입시 상담이 아주 중요했는데 다들 혼란스러워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담임선생님으로선 그게 최선의 길이었다고 믿는다.) 그래도 우리는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고, 입학하기 전에 딱 한 번 담임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 댁을 찾아간 기억은 또렷하나 다른 내용은 흐릿한 것으로 보아, 그 자리에서 'OO이‘ 이야기는 거의 안 나왔지 싶다. 그만큼 우리에겐 상처가 깊었다.

   졸업을 하게 된 우리는 더 이상 그 얘기를 하지 않았고, 그렇게 모든 게 잊혀진 것처럼 보였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그냥 잊고 살았을 것이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다 사범대에 진학했던 내가 몇 년 전에 모교에 발령을 받았다. 모교에 발령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이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0년 10월의 어느 가을날의 그 사건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그 때 싫었던 그 학교의, 싫어했던 그 선생 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 때 친구들에게 미안했던 기억이 계속 남았던 것일까? 난 해마다 아이들에게 최시한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읽기를 권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우리 반 아이들! 어디 가서 무엇을 하더라도,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과 관련해서 남은 이야기 둘!

하나) 이 책, 아름다운 아이들을 처음 만난 게 벌써 10년 전이지 싶다. 대학 동기였던 OO이랑 도서관 서가를 훑다가, 녀석이 ‘우리의 교육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책’이라며 권해준 책이다. 며칠 후에 그 책을 사서 읽고, 난 앞에 쓴 글처럼 고등학교 때 우리 반 아이들을 떠올렸고, 한동안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왜냐 선생’처럼 멋있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꿈도 꾸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꿈’같은 이야기이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해마다 나는 마음을 나누고 싶은 동료교사를 만나면 늘 이 책을 선물로 건넸고, 이제는 같이 책읽기 모임을 하는 아이들에게 여름방학 캠프에 가서 읽고 토론하는 책으로 정해 두었다. 이번 여름도 예외는 아니어서, 얼마 전에 캠프에서 이 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네 안의 구름그림자는 어떤 것인가? 허생과 왜냐 선생, 선재와 윤수의 관계는 어떠한가? 반성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들!

둘) 이번 동아리 캠프를 가기 위해 교장샘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내가 평소에 ‘어떤 책’을 통해서 학생들을 ‘의식화’시키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는 투로 얘기하셨다. 이번 캠프에 가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시길래 이 책,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을 읽고 토론할 거라고 했더니, 책 내용이 어떤 거냐고 묻고, 이 책을 쓴 작가의 다른 작품도 물으셨다. 이럴 땐 정말 황당해서 말도 잘 안 나온다. 자신 있게 책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했다. 교장실을 나오면서  학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은 교육민주화 운동이 활발하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우리 교육 현실의 문제점을 담아내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건 소설이 그리고 있는 현실과는 10년 정도 지난 1997년 즈음이었다. 그 때는 10년 정도 지났으면 좀 나아졌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오늘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있노라면 학교의 현실은 그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고, 20년 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니, 오히려 입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풍경한 모습이나 아이들을 옥좨는 풍경은 그때보다 더욱 잔혹하다.

   내가 아직도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다. 내가 좋아하는 동료 교사들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는 이유다. 빨리 이 책에서 벗어나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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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7-28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는 정말 극우의 인간들이 버글거리는 곳이죠. 건전한 보수조차도 별로 없는... 조중동 스러운 인간들이 교장이 되는... 정말 희망이 있는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ㅠㅜ 우리 학교엔 촛불 드는 애들도 없는 거 같긴 한데... 아이들이랑 독서팀 꾸리는 일도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두려울 때도 많습니다. 90년이면, 학교는 완전히 우경화되어 전교조 이야기도 못 꺼내던 때죠. ㅠㅜ

느티나무 2008-07-29 08:50   좋아요 0 | URL
학교 뿐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생각해 보니 교장이 더 심한 말도 했던 거 같네요. -선생님 말씀이 애들 인생을 좌우한다, 애들이 평생 후회할 수도 있다. 90년의 우리 학교는 달랐어요. 전교조샘들이 참 많았어요. 학교 분위기도 자유롭고 좋았던 거 같은데...

심상이최고야 2008-07-28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년 전 고등학생은 지금 대학생보다 의식 수준이 높네요. 수능 한 달 전 수업 거부라!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때 선언문을 발표한 그 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살고 있을까요? 아이고... 신산했을 삶을 떠올리니 마음이 짠해지네요.

느티나무 2008-07-29 08:52   좋아요 1 | URL
그 학생, 검정고시를 거쳐 지금 OO여고에서 기간제 국어교사로 있어요. 그 전에 있던 학교에서 실컷 부려먹고 정식으로 발령내기 직전에 다른 사람을 뽑았다더군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해야할까요?ㅋ

AHN♥ 2008-08-06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나서 선생님께서 왜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하셨는지 알것같아요.
선생님께서 이런 경험을 하셨다니,,, 내가 만약 그당시 선생님 반의 학생이었다면 선듯 수능한달전에 열흘동안 수업거부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교장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도 많이 어이없네요.

느티나무 2008-08-06 13:20   좋아요 0 | URL
이참에 아예 가입을 했군요.^^ 시간이 안 나겠지만, 가끔이라도 여기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 교장샘 얘기는 여기서 그만~!ㅋ 그 땐 할 수 없었어요. 그럴 수 밖에. 아마 모레쯤 그 친구를 만날 거에요.ㅎ
 
글쓰기 생각쓰기
윌리엄 진서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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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휴! 도저히 못 쓰겠어요.”
   “선생님, 이거 안 하면 안 돼요?”
   교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불평 소리. 기껏 네 다섯줄이나 될까 하는 짧은 문장을 적어 보라는데 금세 터져 나오는 아우성이다. 그래도 이런 불평이나 터트리면 좀 나은 편이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몰라 멍하게 앉아 있는 학생들이 더 많다. 시간이 좀 지나도 멍한 표정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처럼 손도 못 대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는 사실에 끙끙대던 녀석들도 손을 놓아버리고 만다.
   요즘 내 수업시간에 자주 벌어지는 풍경이다. 2학년 문학 수업 시간에 문학작품의 수용 과정이라는 단원을 배우고 있는데, 이 단원의 맨 마지막 수업 내용이 작품의 창조적 재구성과 내면화를 연습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교과서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 내용을 재구성해 보거나 시를 읽고 자신의 느낌을 곁들여 비평하는 짧은 글짓기 시간이 주어지면 아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이내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숫제 하소연이다. 자기 생각을 글로 써 볼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고, 슬쩍 수능 공부에 실제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말도 보탠다. 이걸로도 통하지 않으면, 기말고사에 오늘 쓴 글쓰기도 시험 문제로 나올 수 있다는 점을 흘린다. 이 말이 끝나도 교실의 반 정도 학생은 멍한 상태, 그대로이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경력 10년차. 신임 국어교사 티를 벗어나고 있는 나는 아직도 아이들의 글쓰기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시간이 한참 더 지나도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나부터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을뿐더러-익숙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글쓰기 과제는 꼭 피하고 싶은 청소구역 당번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다.-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이런 생각을 하니 도대체 대학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글쓰기 수업을 할 때 글의 시작은 어때야 하는지, 마무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실제 글을 가지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학생들이 실제로 연습해 보도록 가르치기가 아주 어렵다. 아울러 자신들이 쓰려는 모든 글에 일관되게 담겨야 할 글쓰기의 자세나 태도를 가르치거나, 여러 가지 형식의 글을 쓸 때 꼭 필요한 각각의 특징을 이해하게 하고, 기능을 연마하게 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꼭 이런 문제의식으로 이 책을 고른 건 아니었다. 제법 오래 전에 내 서재이웃인 ‘순대선생’님께서 이 책을 극찬했던 리뷰를 읽고 나서 당장 이 책을 샀었다. 그렇지만 내 머리의 말을 잘 듣는 내 손이 그때 같이 샀던 읽기 편한 책들을 항상 먼저 골라 들어서, 이 책은 내 책장 한 곳에 꽂혀있기를 벌써 몇 달!(그런 책이 꽤 많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올해는 책장에 묵혀둔 책을 좀 읽자는 결심으로 펼친 책이다.

 *


    3월 중순부터 거의 두 달 동안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를 띄엄띄엄 읽었다. 내가 쓰고 나서보니 이 첫 문장은, 혹시나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들에게 전혀 놀라움을 줄 수 없는 죽은 문장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은 탓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앞 문장에서 어떤 단어를 골랐든, 앞으로 내가 어떤 글을 쓸 때마다 이 책의 내용이 가물거려서 내 둔한 머리 수준을 탓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윌리엄 진서의 이 책을 통해 나는 좋은 글쓰기의 핵심 요소가 명료함, 간소함, 간결함, 인간미(154쪽)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글쓰기에 있어서 명료함이란 자기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이 이 글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간소함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글쓰기 자료를 자기가 쓰는 글에 쏟아 부어 만들어나가지 않는 것이다. 또한 어떤 영역의 글이든 작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글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간결함은 모든  문장에서 가장 분명한 요소만 남기고 군더더기를 걷어내어서 표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미. 인간미는 아무리 딱딱한 글이라도 결국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인간일 수밖에 없는 작가의 목소리가 글의 문체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 책은 또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을 전해준다. 앞에서 말했던 글쓰기의 이런 기능을 익히는 것보다 진짜 글쓰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쓰는 글의 내용에 대해 관심과 흥미, 애정을 갖는 것이 더 좋은 글을 쓰는 데 더욱 필요한 자세라는 것을 말이다.

   중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쓴 책은 아니지만, 교사들이 이 책을 곁에 두고 글쓰기 지도에 활용한다면 학생들이 어떻게 글을 시작하고 내용을 채워 넣고, 마무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히 학생들이 쓴 글에 대해서도 제대로 평가를 내리고, 평가 결과에 대해 일관되고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도 가능하다.

「뱀발」

   교사 자신이 글쓰기를 좋아하고, 평소에 자주 글을 써보는 것보다 좋은 글쓰기 수업 준비는 없다는데, 나는 리뷰 한 편 쓰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니, 참……! (선생 노릇 제대로 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그러니 수 백 편의 리뷰를 쓴 사람들이 부럽다고 해야 하나, 두렵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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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이최고야 2008-05-24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을 읽고 써서 그런지 리뷰가 재미있으면서 지루하지 않네요.ㅋㅋ 좋은 글의 요건이라는 명료함, 간소함, 간결함, 인간미가 두루두루 갖춰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