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갈나무 투쟁기 - 새로운 숲의 주인공을 통해 본 식물이야기
차윤정.전승훈 지음 / 지성사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두 번째 읽은 신갈나무 투쟁기! 나는 책을 정독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어떤 책을 한 번 읽고 난 후 책장에 꽂아두고 돌아서면 책의 내용이 캄캄해질 때가 잦다. 거기다가 읽은 지 좀 오래되기라도 했다면 정말 아! 저 책, 읽었지, 하는 것만 남아있지 구체적인 내용은 다 날아가 버리고 없다. (그러면서도 대충 읽은 걸 가지고 아는 티를 팍팍 내고 다닌다.)

   “이 책은 철저하게 나무의 관점에서 씌어졌다.” 라는 말이 그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나 보다. 아니 눈으로는 읽었으되, 내 마음에까지 가닿지는 않았나 보다. 이번에 새로 읽으면서 나무의 관점으로 씌어졌다는 걸 충분히 이해했다. (마음으로 느꼈다, 고 쓰고 싶었지만 왠지 너무 나간 거 같아서 이해했다,로 고쳤다.)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려는 과학책에 이처럼 독특한 형식의 글을 쓰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신선한 느낌이 들어서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또 글 잘 쓰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더구나 신갈나무의 일생을 소개하는 동안 그때그때, 숲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함께 보여주고 있어서 식물의 생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본 신갈나무는 일생동안 투쟁을 하며 살아간다. 어미로부터 떨어져 나온 열매가 낙엽더미 속에서 겨우내 잠을 자다가 새봄을 맞아 싹을 틔우고 뿌리를 뻗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서 발버둥 친다. 열매 속에다 떡잎을 만들고 나면 생존을 위해 다시 새잎을 만들고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미 잘 자라서 햇빛을 가리고 있는 주변의 나무보다 높이 줄기를 뽑아 올린다. 이후에도 신갈나무는 쉼 없이 제 몸집을 키우고, 추위와 맞서 싸우며 열매를 만들어 퍼트린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을 넘어서야 신갈나무는 서서히 우리 숲의 주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은 온 생명체와의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 숲에는 처음부터 좋은 이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죽 했으면 신갈나무의 동지(同志)는 여분의 공간이라고까지 했을까? 이것은 신갈나무뿐만이 아니다. 뭇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숙명이다. 자연의 생명체가 투쟁의 삶을 불평해도 소용없다. 자연의 삶은 그 불평마저도 안고 도도한 강물처럼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호기심 가득한 자연과학도도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다양한 영역의 교양을 쌓기 위해 이 책을 골라든 평범한 국어 교사일 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신갈나무의 성장기를 통해 우리의 삶을 견주어 보고 배울 게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철저하게 나무의 관점으로 씌어졌다는 이 책이 내 생활을 되짚을 수 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을 통해 배운 신갈나무의 치열한 삶은 물론 읽는 사람의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편안하고 평탄하게만 보였던 나무의 일생에도 처음부터 어린 열매에게 주어진 것이란 없고, 나무로 일생을 살면서 공짜로 얻은 것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지금껏 나무처럼 치열하게 내 삶을 붙들고 살아 왔나, 하는 반성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나무의 삶과는 또 다른 삶이다. 나무의 치열한 생존 경쟁과 인간의 삶은 그 근본에서부터 다르다. 나무는 치열한 생존 경쟁을 통해야만 결국 ‘더불어숲’을 이룰 수 있다. 신갈나무는 뭇 생명들과 치열하게 투쟁하며 성장하지만, 이는 더 많은 생명체와의 연대와 번영을 위한 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는 나 혼자만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마음과 절제되지 않은 경쟁은 모두를 파국으로 몰아갈 뿐이다. 인간의 삶은 치열한 경쟁만으로는 ‘더불어숲’을 이룰 수 없다. 오히려 독립된 개체들이 서로 다른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고 연대할 때라야 자연이 투쟁을 통해 이룩한 ‘더불어숲'이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모두가 신갈나무의 후덕함과 의연함은 본받되, 그 치열한 생존경쟁의 의미는 가려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신갈나무 투쟁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해 줄 수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기억은 약한 자의 마지막 무기라는 구절을 어디서 읽었더라?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 육신이야 ‘영원’이란 말과는 애초에 끈이 닿지 않는 말일 테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이 책의 제목인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말하듯,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바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삶이 살아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이들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어떤 식으로든 이들의 행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기에 그들의 삶은 그들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사라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경식 씨가 소개하고 있는 책 속의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무서운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의 흐름은 많은 사람들의 희망, 싸움, 고뇌, 환희를, 다시 말해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을 빠르게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나 그것만큼 인간에게 위험한 것은 없다.(한국어판을 내면서, 6쪽), 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책의 앞머리를 볼 때, 저자는 이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 현재의 우리 삶을 성찰하지 못하는, 그래서 한갓 그들의 삶을 과거의 일로 치부해 버리는 우리들의 태도가 못내 안타깝고 그 결과로 빚어질 현실이 무서운 모양이다.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야 할 사람들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결국,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 때문이고, 불행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그들의 불행한 과거가 우리의 미래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이들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미 이들 중 다수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지금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의 인물들은 처음에는 일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음에도 지금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나는 스페인이나 독일에서 일어난 전체주의에 대항한 사람들의 이름 몇은 그래도 다른 책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일본의 군국주의에 저항한 사람들은 정말 낯설었다. 특히나 일본인들의 이름은 이상하게도 기억하기가 더욱 어렵다. 하기야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다른 책에서 이 인물들과 마주친다고 해도 그 이름마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서 아쉽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이 책에서 소개된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가 만들어낸 그림자이자 영웅들이다. 시대에 맞서 온몸으로 살아야 했던 이 사람들이 살았던 20세기는 어떤 시대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파시즘, 나치즘, 군국주의, 군부독재, 외세강점, 전체주의 등으로 집단의 광기가 개인(인간)의 이성을 억압하던 시대였다. 책을 읽으며 앞에 떠오른 낱말을 묶을 수 있는 단어로 나는 ‘억압’이라는 말을 고르겠다. 사람이 살았던 시대치고, 어느 시대인들 억압이 없던 적은 없었겠지만, 에릭 홉스봄의 평가를 살짝 빌려 나타낸다면, 20세기는 ‘극단적인 억압의 시대’라고 불러 마땅하다.(영국의 역사가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평했다.)

   이 책은 시대의 억압에 저항한 인물들의 짧은 기록물이다. 부제처럼, 온몸으로 살아간 사람들에게 대여섯 페이지는 너무한 것 아닌가 싶다가도 원래 20세기 천 명의 인물, 이라는 책의 일부분을 분담해서 집필하게 된 저자가 일관된 주제 아래 고른 대상자를 소개한 글이라 길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도 남는 아쉬움은 여전하다. 한 권의 평전으로 엮어도 모자랄 인물의 생애가 턱없이 짧게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이름도 처음 듣는 인물도 여럿이고, 이름만 들어 본 인물은 더욱 많은데, 이 사람들을 이렇게 그냥 스치듯 지나치고, 내 기억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이런 책읽기도 괜찮을 지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이런 제한적인 지면(紙面) 때문에 각 인물편의 구성은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간략하게나마 인물의 생애가 정리된 형식을 띄고 있다. 그 뒤에다 저자가 생각하는 인물의 행적이 주는 시대적 의미와 역사적 의의를 짤막하게 서술하였다.(쓰고 보니 전통적인 평전 형식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각 인물마다 뒷장에는 출판사의 수고로 인물의 생애와 가장 관련이 깊은 참고자료도 실려 있다. 

   아무래도 각 인물에 대한 내용 소개가 짧아서 인물들의 생애를 파악하는데 약간 헐거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면 참고 도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책을 읽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군데군데 깊은 생각을 퍼 올려서 고운 채로 거른 듯한 서경식 특유의 문장이 좋다. 서경식의 글은 한 문장을 읽고 호흡을 멈춰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의미를 더듬어 본 다음, 다음 문장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평범한 듯 보이는 문장 속에 붙어 있는 예리한 인식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번 을 읽으면 의미가 더욱 풍성해지는 글이라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난다. 

   저자나 편집진의 의도였겠지만, 이 책은 편의상 3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제1부는  스페인의 시인으로 프랑코 정권에 암살된 페레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에서 미국의 게이 운동가인 하비 밀크를 다룬 부분까지이고. 제 2부는 일본적인 것에 도전한 화가 사에키 유조부터 실존 인물이 아니라 야마구치 히토미의 소설 속의 인물로 양심적인 소시민의 전형인 에브라 만 부분까지이며, 제 3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에서부터 한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독재정권에 체포된 두 형(서승, 서준식)의 감옥생활을 뒷바라지했던 저자의 어머니인 오기순까지이다.

   제 1부에는 주로 1930-1940년에 준동했던 독일의 나치즘, 스페인의 파시즘에 저항했던 인물,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혁명을 주도하거나 보수 반동의 군사 쿠데타에 저항한 인물, 아메리카의 억압적 상황에 맞선 인물,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고난(苦難)한 삶을 문학으로 표현한 인물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들은 억압자들에 맞서 들었던 무기는 문학과 예술, 총, 그리고 자신의 온몸이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20세기를 피와 땀으로 얼룩지게 했던 그 이름들은, 페레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파블로 네루다, 잭 시라이, 파블로 카잘스, 사코와 반제티, 에른스트 톨러, 카임 수틴, 바실리 칸딘스키, 에리히 케스트너, 숄 남매, 안네 프랑크, 살바도르 아옌데, 빅토르 하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폴 니장, 프란츠 파농, 프리모 레비, 갓산 카나파니, 하비 밀크 등이다.

   제 1부에서 내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는 구절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숨어살면서 나치체제의 야만성과 나치하의 유태인이 겪은 고통을 일기로 쓴 안네 프랑크의 말이다. 

   “나는 전쟁의 책임이 위대한 사람들과 정치가, 자본가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책임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정말 전쟁이 싫었다면 너도나도 들고 일어나 혁명을 일으켰어야지요.”(84쪽) 어린 소녀의 눈으로 억압의 시대에 침묵했던 우리 모두의 비겁함을 질타하는 절규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마음을 울린다. 만약, 지금 안네가 살아있다면, 왜 우리를 기억하지 않느냐고 되묻지 않을까?

   제 2부에는 주로 일본의 군국주의, 천황제에 저항했던 인물들이 소개된다. 당연히 일본인들이 대다수지만, 일부는 일본인들과 관련이 있는 외국인들도 함께 다루고 있다. 이들은 주로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를 견디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화가로, 시인으로, 소설가로, 저널리스트로서 불길한 억압의 시대에 진입한 일본 사회를 증언했다. 그러나, 문제는 저자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의 일본인들조차도 이들을 기억하고 못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일본이 이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에 나와 있는 “참화의 기억과 파국의 예감에마저 편안하게 익숙해져버려 이를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병들어 있는 것이다. ‘유일한 피폭국 일본’이라는 상투적인 문구가 있다. 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사사키에는 적지 않은 수의 조선인, 중국인들도 희생되었다. 게다가 핵물질에 오렴된 남태평양의 섬들이 있으며, 체르노빌에서도 방사능 유출로 인한 엄청난 재해가 있었다. 그 후로 반세기……. 사람들은 하라 다미키를 기억하고 있을까? 상투어만이 저 홀로 활보하고 있지만, 미일안보체제의 공고화, 비핵3원칙의 형해화, 그리고 평화주의 헌법을 내던져버리려는 최근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전후 일본의 현실은 하라 다미키가 고통스럽게 예감했던 대로 수많은 희생자들의 기원을 계속 배반하고 있다.”(180쪽) 에서 보듯이 지금의 일본인들에겐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 ‘참화의 기억과 파국의 예감에마저 편안하게 익숙해진’ 일본의 현실에서는 군국주의와 천황제에 반대하고 저항한 이들을 잊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일본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인물들은, 사에키 유조, 아이미쓰, 가모이 레이 ,마키무라 고우, 오구마 히데오, 하라 다미키, 가네코 후미코, 하세가와 데루, 리하르트 조르게, 오자키 호쓰미, 아그네스 스메들리, 가와카미 하지메, 에브리 만 등이다.

   제 3부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에 저항하거나 해방 이후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한 우리나라의 인물, 재일(在日) 조선인으로 살면서 일본의 조선인차별에 저항했던 인물을 주로 다루고 있다. 안중근, 김구, 홍범도, 김산, 양징위, 이극로, 조문상, 김사량, 윤동주, 김지하, 박노해, 윤이상, 이진우, 양정명, 오기순 등이 그들인데,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인물들은 독립운동가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해방이후에는 문학가를 다루고 있다. 재일 조선인으로서는 제국주의 전쟁의 전범이 된 인물도 있고, 일본 내 차별이 발단이 되어 저항하다가 자신과 일본 사회 전체에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 인물도 있다.

   그 중에서도 저자가 20세기를 겪어 온 조선 민족을 상징하는 인물로 내세운 이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 오기순이다. 

   “오기순은 재일조선인 1세 여성으로서 차별과 빈곤을 겪었다. 40년이 지나 재회한 조국은 군사독재의 암흑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고통으로 가득했던 그 60년의 생애는 금세기 조선민족이 경험한 식민지배와 민족분단을 온몸으로 체현한 듯하다. 그것은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시대의 학대받고 멸시당하는 민중들, 특히 그 어머니들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 뜻하지 않는 때에 예측을 뛰어넘어 빛을 발하는 저 민중들의 강인함과 지혜는 오기순의 것이기도 하다. (327쪽)”

   이쯤되면, 말 그대로 온몸으로 살아낸 20세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억압의 시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했으며, 때로는 이 저항이 당사자에게 비참한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비참한 결과를 통해서라도 역사는 진보하여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다. 이미 역사가 우리에게 수많은 사례를 통해 알려줬듯이,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다시 우리가 지나왔다고 생각해 온 질곡에 빠질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의 삶을 기억하고 오늘에 되새겨야 하는 것은 더 나은 우리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상이최고야 2007-11-1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리뷰 잘 읽었습니다. 억압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딛쳐 싸워 온 그들의 이름을 꼭 기억해야 겠어요.

느티나무 2007-11-12 15:48   좋아요 0 | URL
읽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해요. 같이 읽어요^^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 1편. 책으로 바뀐 인생

   소설 동의보감(이윤성, 창작과비평)-그 때는 학력고사 시절이었으니까 고3겨울 방학에 들어가면서 읽었던 책.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세 권짜리 책을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가 이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작고한 것이 왜 그렇게 허전하고 아쉽던지… 

   임꺽정(홍명희, 사계절)-‘소설 동의보감’ 이후에 내 돈으로 한 권씩 사서 읽기 시작했던 열 권짜리 책. 낯선 단어들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대강의 줄거리만 더듬어가도 흥미진진해서 ‘얼른 돈을 모아서 다음 권 사러 가야지’ 하는,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든 첫사랑의 책. 돈 들고 서점에 가는 게 참 뿌듯했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에 마땅히 겪어야 할 청소년기 자아의 성장이라는 통과 의례를 대학입시 이후로 미루는 게 당연시된다. 그러니까 덩치는 커지고 나이는 먹었어도, 사고 능력이나 자아 인식은 어린애 수준 그대로 정체되어 있다. 자아의 성장에는 자아 탐색, 자아 발견, 자아 확립의 과정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이 사색과 독서와 체험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독서는 사색의 계기나 내용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체험과는 달리 무제한의 간접 경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자아 성장의 핵심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책을 읽지 않는 나를 상상할 수 없지만, 나 역시도 출발은 꽤나 늦었던 것 같다.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달리 말해서 자아 성장의 출발은 내 스스로 책을 골라 읽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랬다. 나의 책읽기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분명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진행형이라 아직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책을 통해 나만의 알에서 껍데기를 깨고 나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기도 했으나, 이내 책을 사 보는 것으로 습관이 바뀌었다. 빌렸던 책을 돌려주고 나면 내 머리 속에 들어온 내용이 책과 함께 내 머리에서 빠져나가는 느낌 때문이었다. 두 번 보지 않을 책이라도 내 방에 있어야 그런 느낌이 덜했으니까 책을 사 모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나의 책읽기는 직업에 필요한 기본활동이자 중요한 취미활동이다. 책읽기를 통해 직접 만나지 못하는 낯선 세계와 만나고 있으며,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간접적인 만남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책을 통해 성장한 내 경험을 들려줄 때, 잠깐이라도 반짝거리는 눈빛을 던지는 아이들을 보는 게 좋고, 가끔은 고단하고 힘겨운 내 일상을 책 속에서 고통 받는 인물의 삶으로 대치시켜 감정을 정화시키기도 한다.

   내가 그 때 소설 동의보감이나 임꺽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책읽기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겉으로는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 생활보다는 조금 더 단조롭고 지루했을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지금보다 더 흐릿할 것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는 배려와 여유가 부족했을 것이며, 내가 의식하며 살고 있는 세계의 범위는 턱없이 좁아졌을 것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알라딘의 ‘플래티넘’ 회원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고,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가 무엇보다도 기쁘다.

   내가 새삼스럽게 이 기억을 떠올린 것은 책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한 소녀를 만났기 때문이다. 재봉사의 딸이었던 바느질처녀. 산골마을에서는 보기 드물게 예쁜 이 처녀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재교육을 받기 위해 농촌으로 내려온 소년들과 친하게 지낸다. 소년들은 당시에 금서였던 ‘발자크의 소설’을 구해 처녀에게 들려준다. 이후에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고, ‘발자크의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처녀는 산골마을을 떠나게 된다. 발자크의 소설을 읽은(여기서는, 들은) 처녀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산골 처녀가 아니다. 책이 한 사람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렇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달라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그 시절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제 2편. 책이 없는 세상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군대라는 곳은 가기 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군인으로 길러지는 첫 과정인 훈련소 시절에도 몸은 힘들었지만 의외로 재미도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니까 오히려 속은 편했다. 오히려 나는 새로 초등학교를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군대의 훈련소는 어른이 다니는 초등학교. 비록 남녀공학이 아니라 슬펐지만. 초등학교처럼 모든 게 낯선 환경이니까 몰라도, 틀려도, 죄가 되지 않는 독특한 상황! 그러나, 단 한 가지, 머릿속을 텅 비우게 만드는 그런 상황은 괴로웠다.

   명령대로 행동하는 인간으로 만들려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걸 최소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시간과 거리를 주지 않는다. 하루 일과는 아침 여섯시 기상부터 저녁 열 시 점호할 때까지 아주 빡빡한 일정대로 움직여야 하며, 이후에도 책이나 잡지 등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재료는 차단한다.

   이미 어느 정도 책을 읽는 것에 길들여진 나는 훈련소에서는 읽을거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게 아주 괴로웠다. 책은커녕 신문 한 장도 구경을 못 했으니까. 그 때 내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글은 편지였다. 그래도 입소하고 보름이 지나서야 쓸 수 있는 내 편지에 다시 답장이 오려면 너무 기간이 오래 걸려서 마음이 급했다. 그 때 친구에게 쓴 편지에 좋은 시를 좀 베껴서 답장으로 보내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허겁지겁 답장을 챙겨서 읽었던 그 순간이 짜릿함이란. 편지지 몇 장에 빼곡하게 담겨 있는 시를 밤마다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새삼 새롭다. 그 중에 한 편,

꽃들 3
-십오척 담장 밑을 거닐다 우연히 발견한 꽃. 나팔꽃보다 가는 줄기에 촘촘히 핀 붉은 꽃송이들. 누군가 일러준 그 꽃의 이름은 별꽃.......

구태여 물어보지 않아도 / 난 네 이름을 금방 / 알 수 있었다

별꽃

아름다운 것만 보면 / 불안한 시절에

더 이상 /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다는 듯 / 가는 줄기에 촘촘히 / 박힌 붉은 / 꽃

당신의 핏줄 한 올 뽑아 널면 / 이토록 붉고 선명한 꽃 / 피울 수 있나요

아직 / 가슴에 달린 붉은 수번 하나조차 / 힘겨운 내게 / 묻는가

붉은 것만 보면 / 가슴이 뛰던 시절에

별꽃

자세히 보면 / 그러나 아주 친숙한 얼굴로 너는 / 날마다

(꽃들, 문부식, 푸른숲, 1993)

   군대에 있던 나에게 이 시가 주었던 감동은, 지금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고 할까? 그랬다. 시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아도, 시 한 편이 사람 마음에 꽉 들어차면 그날부터 그의 삶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알았다. 편지가 온 날부터 문부식의 ‘꽃들3’을 외면서 아침을 먹고, 제식훈련을 하고, 행군을 하고, 휴식을 하고, 뺑뺑이를 돌고, 점호를 하고… 그 때 훈련소 안에 핀 들꽃을 보면서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군대니까 처음부터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에 어떻게든 견뎌 나갔겠지만, 친구가 보내준 시가 아니었다면 훈련 기간이 무척 더디게 느껴졌을 것이다.

   내가 새삼스럽게 이 기억을 떠올린 것은 책을 읽는 것이 금지된 시대를 살아가는 두 소년을 책에서 오늘 만났기 때문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 부르주아 계급의 아들인지라 농민에게 재교육을 받기 위해 시골에서 지내는 두 소년은 언제 도시로 갈지 기약도 없는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다가 이들은 우연히 당시에 금서였던 ‘발자크의 소설’을 구하여 읽게 되고, 이를 계기로 점차 새로운 사건이 펼쳐지게 된다. 이들에게 ‘발자크의 소설’은 하방 운동 당시의 불안한 현실을 더욱 위협하는 요인(금서를 읽다가 들키면 중국 공안부에 고발당한다.)인데다가, 현실의 절망적인 삶을 뒤바꿀 수단도 아니었지만, 새로운 의욕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게 하고, 삶의 의미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군대시절의 시(詩)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제 3편. 책의 효용에 대한 헌사

   우리나라 작가들이 ‘전쟁’이나 ‘독재’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중국의 작가들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아주 뿌리 깊이 박힌 듯하다. 중국 소설의 문외한이지만 몇 권 읽어 본 중국의 현대소설들은 대체로 문화대혁명 기간에 겪었던 부조리한 상황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기야 ‘문화대혁명’으로 불리는 그 잔혹한 코미디의 최대 피해자가 바로 부르주아 지식인들이었으니, 작가들의 그 공포감이 전혀 근거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 소설도 문화대혁명 기간에 부르주아 계급(의사)의 아들로, 젊은 지식인인 나와 ‘뤄’는 농민들에게 재교육을 받기 위해 ‘하늘긴꼬리닭’이라는 산 아래 마을로 오게 되었다. 이곳에 사는 농민들은 내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뤄’가 가진 자명종을 처음 보고 신기해할 만큼 문명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도시에서 재교육을 받기 위해 내려와 마을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은 나와 ‘뤄’의 순간적인 기지로 헤쳐 나가지만, 나와 ‘뤄’는 산골마을에서의 재교육이 끝나고 도시로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3/1000)라서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다.

   이들이 이런 산골 생활의 절망감을 벗어나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발자크’가 쓴 소설들을 구하고 나서부터다. 온 세상의 책이 금서로 지정되어 읽을 책이 없던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이들은, 옆 마을에서 이들처럼 재교육을 받고 있던 ‘안경잡이’가 금서였던 ‘발자크의 소설’을 가지고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고, 이들은 ‘안경잡이’가 재교육이 끝나 도시로 떠나기 전날 밤, 그 책을 훔쳐 그들의 손에 넣게 된다.

   내 친구 ‘뤄’는 이 책을 자기가 좋아하고 있던, 마을 재봉사의 딸인 바느질하는 처녀에게 읽어주기로 결심하면서 “이 책들로 나는 바느질 처녀를 딴사람으로 만들어놓겠다. 그 애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산골처녀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한다. ‘뤄’는 남들의 눈을 피해 밤마다 처녀의 집으로 가는데, 처녀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빨간부리까마귀’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낭떠러지를 지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매일 밤 힘겹게 낭떠러지를 건너 가 책을 읽어주던 ‘뤄’는 바느질 처녀와 깊은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뤄’가 촌장의 치아를 치료해준 덕에 휴가를 얻어 도시로 잠시 떠났을 때 바느질 처녀는 나에게 ‘뤄’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렸고, 나는 ‘용징’이라는 소읍의 병원을 찾아가 만난 산부인과 의사에게 ‘발자크’의 책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바느질 처녀의 낙태수술을 도와주었다. ‘뤄’는 다시 마을로 돌아왔지만, 석 달 후 바느질 처녀는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도시로 떠나버렸다. 바느질 처녀는 뒤늦게 알고 쫓아간 나와 ‘뤄’에게 발자크를 통해서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 걸 깨달았다면서 가던 길을 가버렸다.

  산골처녀에게 ‘책’은 자신을 변화시킨 원동력이었고, 자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책이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건강한 믿음을 가진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요즘처럼 책이나 문학이 무가치하게 취급받는 시대에도 이런 책이 꾸준히 읽힌다는 것은 묘한 역설이다. 만약 이것이 역설적 상황이 아니라면,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는 달리,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는 책에서 지친 삶을 위로받거나, 책의 힘으로 자기 내면의 변화를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었을 아름다운 책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샘 2007-10-29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자서전을 쓰셨군요. ^^
3학년 담임 하시면서 글쓰기가 고프셨던 모양입니다. ㅎㅎㅎ
이제 한 2주만 더 고생하시면 두어 달 쉬시겠네요. 독서적 자서전, 잘 읽었습니다.

느티나무 2007-10-29 16:21   좋아요 0 | URL
자서전은요, 제가 그럴 깜냥이 있나요?^^ 안 쓰니까 더 안 써지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이 지경인 줄은 몰랐습니다. 수능은 17일 남았는데, 끝나도 여전히 바쁠 것 같은데, 진짜 쉴 수 있나 보네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심상이최고야 2007-11-0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어떤 이에게는 군대 생활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는 군요. 시 읽는 군인 아저씨라.... 낭만적이다.ㅋㅋ리뷰를 보니 소설이 궁금해 집니다.

느티나무 2007-11-01 11:18   좋아요 0 | URL
낭만이랑 아무 상관 없어요... 단지 고통스러운 현실[바보가 된 느낌]을 견디기 위한 마취제였을 뿐! 이제는 그 때 정말 힘들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집니다. 소설은, 전에도 말했지만, 추천합니다.
 
브라보 내 인생 - 손문상 화첩산문집
손문상 지음 / 산지니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구포시장’의 추억

   초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는 가끔 텃밭에서 키운 부추며, 호박을 구포시장에 내다 팔고는 하셨다. 할머니 옆에 딱 붙어서 싸움 같은 흥정과 고도의 심리전 끝에 가격을 정하는 그 방식이 조금은 낯설기도 하고, 할머니께서 받은 그 돈이 아이스크림으로 변해 곧 내 입으로 들어오리란 생각에 마냥 신나기도 했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시장 근처에 산다고 하면 개를 도살해서 도소매로 팔아넘기는 것으로 유명한 동네 시장 탓에 아이들에게 가벼운 놀림의 대상이 되고는 했다.   
   구포시장. 대부분의 재래시장이 백화점, 대형마트에 밀려나는데도, 아직 구포시장은 사람들로 복작거려서 아직 시장다운 맛이 있다. 비록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라, 후줄근한 모습 그대로지만서도. 물론 더 활기찼던 예전만 못하겠지만, 지금도 구포시장은 늘 앞에 가는 사람을 살피며 걸어야 할 만큼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으로 복잡한 곳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장 근처에 살아서 어디나 이런 시장이 있는 줄 알았는데, 구포시장처럼 큰 시장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진짜 사람 냄새 폴폴 풍기는 시장의 매력까지 알게 된 것은 더 오래된 이후였지만. 
   오늘 나는 책 속에서 비릿하면서도 세련되지 못해 들큼한 사람냄새 가득한 시장 냄새를 맡았다. 손문상 화백의 ‘브라보 내 인생’의 표지 그림이 바로 낯익은 우리 동네 시장, 구포시장 풍경이다.

결코 '브라보'일 수 없는, 인물-청소 아줌마.

   제일 앞부분의 영도 해녀 편은 읽고 나면 웃음이 슬며시 떠오른다. 물론 고통스러운 현실을 웃음으로 눙쳐온 저 이면에는 얼마나 눈물바람이 잦았을까, 생각을 하니 웃음 뒤끝에 마음이 애잔해진다. 그래도 이제는 일흔 하나. 강해춘 할머니는 앞으로는 더 웃을 일이 많으실 것 같아서, 그림을 보는 마음이 따습다.

   그러나 결코 브라보일 수 없는 인물로 고심 끝에 청소 아줌마 편(43쪽)을 골랐다. 물론 청소 아줌마의 인생이 ‘브라보’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냥 그림 속의 아줌마의 삶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에서는 ‘브라보 내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줌마가 얼마나 될까? 아니, 그런 사람이 있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브라보일 수 없다’는 내 표현은 청소 아줌마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대우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야 살만한 세상이 가능하다는 내 소박한 연대감의 표현이다.

   청소 아줌마 편. 한 아주머니의 웅크린 모습이 그림의 가운데. 밑에는 연필로, ‘닦고 닦자 한 세상’이라고 적혀 있다. 형광등이 환히 켜진 복보 바닥은 이미 깨끗하게 닦여져 있고 아줌마는 그림 속의 복도 끝으로 계속 청소를 해 나가느라 몸을 웅크린 채로 뒤돌아서 앉아 있다. 아마 그림 속 아줌마의 등 뒤에, 보이지는 않지만 ‘비정규직’, ‘파견’, ‘저임금’, ‘차별’, ‘가난’ 이런 단어들이 주홍글씨처럼 박혀 있을 것이다. 그림 속 아주머니의 바람? 월급 좀 올라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랑 단풍놀이 다녀오는 것이란다. (지금이 바로 10월말. 단풍놀이 철이다.)

결국 '브라보'일 수 밖에 없는, 인물-김진숙 씨

   사실, 얼마 전에 소금꽃나무(김진숙, 휴머니스트)를 읽었다. 집회 현장에선 언제나 스스로는 아주 순박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연대사나 투쟁사를 읽었지만, 그 연대사를 듣던 나는, 아니, 우리는, 집회참가자의 본분을 잃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느라 민망하게 만들었던  그 목소리가 검정색 글씨로 변해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손문상 화백의 그림 속에서 그이는 연대와 희망의 이야기꾼답게 강의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늘 짧은 커트머리는 변함이 없고, 한 손에는 마이크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매직펜을 들고 있다. 그는 아마 오늘 강연에서도 나 같은 사람을 여럿 울렸을 것이다. 나는 그림 속의 김진숙 씨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그이 특유의 말투가 금방 머릿속에 되살아나서 책 속의 글자들을 빨아들인다.  

   민주노총부산본부 지도위원. 20년도 더 전에 한진중공업에서 해고 되어서 아직 현장에 돌아가지 못한 노동자. 김진숙 씨는 이제 현장보다 집회장에 더 많이 다녔을 텐데도 여전히 복직을 이야기한다. 그는, 늘 연대와 희망을 이야기한다. 노동자들끼리의 단결과 연대를 말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인 연대를 말한다. 그런 다음에야 노동운동에 새로운 희망이 있음을 말한다. 노동자들에게 언제나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 사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어떻든, 누가 뭐라고 하든, 이 사람의 인생은 ‘브라보’ 일 수 밖에 없는 거 아닐까?

뚝심으로 만든 귀한 책!

   손문상 화백이 부산일보에 연재했던 ‘화첩인터뷰’를 묶어낸 이 책은 신문으로 나왔을 때나 책으로 만들어졌을 때나 한 사람의 뚝심으로 만들어낸 신문이나 출판시장에서 아주 희귀한 사례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론적으로 신문은 새로운 정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알리는 매체이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가 없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 아무리 흔해도 신문에 날 일은 없다. 신문쟁이가 딱히 그 사람을 만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소설가 김곰치와의 대담을 읽으니 ‘계기’가 없다, 라는 표현이 나오더라.) 그러나 ‘사람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손문상 화백은 이런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고, 그들의 모습을, 아니 그들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삶을 그림으로 그려 신문에 실었고 이번엔 책으로 펴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잘난 사람들의 특별한 삶 말고, 너무 평범해서 이름을 얻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하루하루가 모여 세상살이의 근본을 이루는 것 아닌가? 이 당연하고도 자명한 이치에 왜 관심을 가진 사람은 적은 것인지, 귀해서 더욱 손문상 화백의 이 책이 반갑다. 더구나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동네(부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어쩌면 이 사람들과 길에서 가볍게 스치기도 했을 뿐, 단 한 번도 주목하지 못했던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애정을 보내준 책이 있어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기분이 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상이최고야 2007-11-1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문장이 매끄러워서 잘 읽혀요.

느티나무 2007-11-12 15:49   좋아요 0 | URL
글 못 쓰는데...^^;;
 
한국사회 교육신화 비판
이철호 외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조금은 엉뚱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책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먼저 책에서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 있다는 측면을 떠올리면, 현재 내 생각과 비슷한 주장을 담은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내가 너무 내 생각과 다른 주장을 하는 책에 인색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나와 다른 주장을 펴는 그런 책은 읽으면서도 심리적으로 불편하니까 더욱 멀리 하게 된다. 그 밑바탕에는 내 생각이 옳다는 ‘독선적’인 사고방식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틀린(혹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계속 읽는 것은 취미활동도 아니고, 아예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다음으로 책을 통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측면을 떠올리면, 굳이 내 생각과 다른 책들을 읽어가면서 마음이 불편해 지고, 답답해 할 필요가 있나 싶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마음에 맞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듯이 책도 그러면 되는 게 아닐까? 읽으면서 즐겁고, 책을 통해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다른 어떤 취미 활동보다도 건전하고 의미 있는 놀이다. 그래서 대부분 내 생각의 결론과 비슷한 주장을 담은 책으로 마음의 즐거움을 즐기고, 이를 통해 내 생각이 사회적 다수의 생각과 비슷함(비록 현실에서는 소수일지라도!)을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나 교육 현실의 문제점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과 대안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현직교수와 교사, 교육운동가 등이 글쓴이로 참여하고 있어 교육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으면서 막막한 현실이 답답할 때, 우리 교육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큰 방향과 함께 교육 현안에 대한 쟁점을 주로 ‘진보’ 진영의 입장에서 담론을 정리한 글을 읽으면 기운도 나고, 새로운 의욕도 생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너무 개괄적으로 전개되어 있는 것이다. 짧은 분량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고 이해하면서도 열 쪽 이내로 정리된 각각의 주제들은 어쩌면 책 한권 정도로도 정리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민감하고, 갈등의 연원이 깊고, 다수의 이해관계가 걸려있고,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교육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거나 우리 교육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안이 궁금한 사람들은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의외로 이 정도로 정리된 글도 읽어보지 않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파괴하려는 사이비 언론의 새장에 갇혀 사는 앵무새가 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 현실이다.

   밑에 덧붙이는 글은, 이 책을 읽던 중에 나와 신문 읽고 논평하는 글쓰기를 하는 학생이 마침 신문에 난 교원평가제에 대한 내 생각을 물어왔기에 적었던 글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 이 책의 ‘리뷰’로 옮겨두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고 본다.  

교원평가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네 물음에 답하며

   네가 쓴 공책을 받고나서도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신문기사를 스크랩하고 거기에다가 네 생각을 차곡차곡 써내려간 하늘색 공책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좀 묵직했다. 앞으로 교사가 되고 싶다는 네 삶과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내 삶에 직접 맞닿아 있는 주제인 교원평가제를 문제를 앞두고 내 마음속의 결정은 이미 내려졌는데, 이 마음을 어떻게 진실 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진실 되게’, 라는 표현을 썼다. 항상 타당한 논지를 위해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논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내가 ‘논리적으로’, 라고 말하지 않고, ‘진실 되게’, 라는 말을 쓴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사안만큼은 내 생각을 오롯이 잘 표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주면 좋겠다.

   네가 스크랩한 기사를 보니, 전 국민의 80%가 교원평가제에 찬성한다고 되어 있더구나. 이 결과를 보면서 처음에 바로 들었던 생각. ‘교원평가제’를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 국민이 모두 바보가 아닌 이상, 교원평가제에 대한 여러 경로의 정보를 받아들여서 이해하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모든 제도나 일은 완전히 옳거나 전부 그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장단점이 있기 마련인데, 과연 저 여론조사에 나타난 국민들은 교원평가제의 단점을 하나라도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언론에서 무수히 말하는 좋은 점 말고 단점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교원평가제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가 우리 국민들에게 제공되는지 의심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정보에 접근하는 구조가 편향되어 있는데, 찬성 비율이 99%가 안 나오게 오히려 이상한 게 아닐까 싶다.

   교육인적자원부나 언론은 교원평가제의 장점으로 교원평가를 통해 수업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과 무능력하거나 부적격 교원을 걸러낼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아울러, 교원평가제를 시행함으로써 교직 사회에 긴장감을 불러와서 교단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점도 꼽는다. (물론 교육부는 공식적으로 교원평가제를 통해 교원의 전문성을 신장시키고 자기 계발을 도모한다는 공자님 말씀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있으나,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흐름이나, 비공개적인 생각은 아마도 앞에서 내가 말한 대로 교원평가제의 장점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그 두 가지를 정리해 보면 교원평가를 통해서 수업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것 같다. 교사의 1년간의 수업활동에 대한 관리자, 동료교사, 학부모와 학생들의 평가를 통해서 교사에게 보다 질 높은 수업을 기대하는 것은 수요자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로 아주 소박한 바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교원평가를 위해 참관 수업을 1년 동안 매일 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고, 특정한 날이나 기간에 공개 수업의 형태로 하게 될 텐데, 이게 실제 학교현장에서는 정말 문제가 많다.

   지금도 교과별로 1년에 한두 번 정도 있는 연구수업을 한 번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 연구수업은 말 그대로 교사의 자율적인 (교과) 연구에 의한 수업이다. 그런데도 어떤 교사는 일주일 전부터 아이들에게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연습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 연구수업은 특별히 승진이나 인사고과와도 관련이 없다.) 이런 수업을 참관하고 있으면 마치 잘 짜놓은 연극을 보는 것과 같아서 ‘수업이 맞아?’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도 어쨌든 교사가 짜놓은 수업대로 흘러가기 때문에 수업의 내용구조와 형식을 대체로 갖추고 있기 때문에 잘 했다는 격려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런 수업을 한 교사가 일 년에 서너 차례 해서 교원평가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정상 수업은 온 데 간 데 없고 보이기 위한 평가수업을 연습만 반복될 것이다. 거기다가 학부모까지 와서 참관한다는 것은 더욱 부작용이 심할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않을까?) 만약 1년 동안 수업평가자가 내 수업을 전부 참관하면서 교사와 학생의 관계 형성 정도, 학생의 학습 능력과 수업 태도, 교사의 수업 준비, 수업 상황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할 수 있다면, 나는 그 때는 교원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다. 교원평가제로 수업의 질 개선이 이뤄질 가능성이 현재 교단의 분위기로 봐서는 어렵다고 본다.(만약 평가시스템이 구조조정으로 이어진다면 연극 형태의 수업이 극에 달할 것이고 수업이 파행으로 치달을 것이며, 구조조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교사들은 잡무가 늘었다고 불평하면서 어떻게든 문서만 그럴듯하게 꾸밀 가능성이 아주 높다.)

   두 번째로 교원평가를 통해서 부적격 교원을 걸러낼 수 있지 않다는 점이 교원평가제의 장점으로 거론된다. 학부모나 일반 국민들은 교원평가제를 통해서 성적을 조작하는 교사, 폭력을 휘두르는 교사, 금품을 수수하는 교사, 성범죄를 일으키는 교사를 교단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교원평가제 도입을 바라는 세력이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 내기 위해 이치에 맞지 않는 정보를 흘리는 나쁜 방법이다.

   앞에서 말한 파렴치한 행위를 하는 교사는 명백히 범죄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원평가제와는 상관없이 일반 범죄 행위로 형사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 교원평가제가 시행되지 않는 지금도 저런 범죄를 일삼는 교사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고 사안의 경중에 따라서 징계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교원평가는 현재로서는 수업 평가에 한정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국민들이나 학부모들이 바라는 소박한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교원평가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현상이다.

   물론, 이런 기대감을 이해할 수는 있다. 내 아이를 맡아서 가르치는 교사가 실력이 형편없거나 심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에 교원평가를 통해서 교단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사실, 그 기대감으로 교원평가제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본다. 부모님들의 애타는 심정을 온전하게야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러나 교원평가제를 통해 그런 교사가 걸러진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일 년에 두어 번 수업에 참관하는 것으로, 교사의 무능력을 판단할 수 있을까? 학부모들은 평소 아이의 말만 듣고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는 전문적인 교육활동을 비전문가인 학생과 학부모가 판단하는 것이 정확하고 옳은 일일까? 설령 무능력한 교사로 지목되어도 실질적으로 교사의 인사권을 휘두르는 관리자에게 미운털이 박힌 교사가 아닌 이상 신분에 변동이 있기는 어렵다. (학부모의 판단과 관리자의 판단은 완전히 다를 수 있고, 아무래도 학부모가 평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관리자나 동료교사의 영향력보다는 적을 것이다.) 따라서 교원평가제를 도입할 때 기대하는 학부모나 학생의 바람이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의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교원평가제를 도입하려고 애쓰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공교육이 부실하다는 신화(근거 없는 믿음이거나 거짓된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의 책임을 교사 개인의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라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장기적으로는 교원의 구조조정(학령인구 감소로 앞으로 교원의 구조조정을 필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틀림이 없다. (따라서 교원평가제도의 도입이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교육계가 지금과 같은 인사구조 하에서 구조조정을 시도한다면 엄청난 저항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교원평가제를 통한 구조조정에는 모든 책임이 ‘무능력한’ 교사 개인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훨씬 쉽게 교원 축소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교원평가제는 ‘단위 학교의 자율성 신장’이라는 명분으로 교육관료, 혹은 학교장의 교사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수단으로 변용될 가능성이 크다. 교원평가제로 상시적인 구조조정에 시달리게 될 교사가(그것도 학교장의 입장이 가장 많이 반영될 교원평가제가 시행되고 있다면) 학교장으로부터 최소한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바탕으로 한 교육활동을 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아울러 아직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도 없는 관리자들이 수두룩한 2007년 대한민국의 학교는 교원평가제를 무기로 관리자의 전횡이 더욱 심해질 것이고, 이를 적절히 견제하고 감시해야 할 학교 내 조직의 부재로 학교는 더욱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장소로 퇴행할 가능성이 크다.(학교는 지난 20년간의 사회적 합의에 따라 도달한 민주주의적 성과를 전혀 못 따라가고 있다. 아직도 5/18 광주항쟁에 대한 수업을 하려면 ‘수업자료’를 뺏는 곳이 학교다.)

   이제 내용을 정리할 겸 해서 내 생각을 짧게 말하면, 학부모와 학생의 간절한 바람은 이해하나 교원평가제를 통해 그 바람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교원평가제를 시행해도 좋아지는 건 없을 것이다. 오히려 교원평가제가 시행되었을 때, 교사들의 사기 저하와 교원 통제에 따른 자율성의 퇴보 등으로 학부모나 일반 국민이 기대하는 학교 발전은 더욱 더 퇴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교원평가제, 꼭 해야 할까?

   소박하게 쓰려던 게 약간 딱딱해졌다. 네 글 덕분에 내 생각이 잘못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내 생각을 다시 한 번 성찰하려고 애썼다. 그런 점에서 고맙고, 또한 기쁘다. 낼부터 시작하는 기말시험,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날이 차다. 감기 걸리지 않도록 늘 신경을 쓰자. 안녕.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엔리꼬 2007-10-1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민들이 이러한 교원평가제의 폐해를 다 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교원평가제가 이러이러한 폐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동의하는 비율이 80%에서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모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율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이후보에 대해서 도덕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그래도 이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세상일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교원평가제의 경우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안다고 해도, 교사가 현재의 공교육 붕괴에 나름 책임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이 제도나 어떤 계기를 통해서라도 현재의 시스템이 변화된다면 그것도 한번 수용해볼 만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학부모가 얼마나 교사의 사기 저하, 교원통제에 따른 자율성 퇴보 등을 생각할까요? 단지 자신의 아이를 교사라고 부르기도 싫은 이상한 교사들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은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설령 그런 솎아내기가 교원평가제의 본질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라도 일부 문제 교원의 퇴출이 있다면 찬성에 손을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범법자와 같이 법적으로 처벌이 되지 않지만 여러 이유로 절대로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은 교사들이 주 타겟이 된다고 봅니다. 저도 그 맘 충분히 이해가 되고요..

참 쉽지 않네요. 제가 그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교사와 학부모의 견해 차이가 이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 못쓰는 글 끄적여봤습니다.

느티나무 2007-10-12 20:10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학부모의 소박한 바람대로-그 바람은 저도 대체로 동의합니다- 교원평가제가 굴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 때문이지요. 결국 국민들의 바람은 바람대로 배신당할 것이고, 교원들은 구조조정의 불안과 국가와 관리자의 통제의 그늘에서 신음하게 되겠지요. 더 좋은 제도일까요? 그런 생각이 드니까, 다수가 찬성해도 제도 자체가 옳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않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너무 순진한 걸까요? 모 후보의 교육분야 공약 보셨습니까? 저는 그 공약 보면서 공포감이 먼저 들었습니다. 우리 애기가 불쌍해서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러나 어떤 공약이면 어떻습니까? 국민들은 그 공약에 관심도 없고 이미 눈멀어 있는데...

글샘 2007-10-1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기 때문에... 교원 평가를 거부하는 싸움이 어렵기만 한 거죠.
그렇다고 확 받아들이자... 하는 이들은 지는 싸움조차 하기 힘들어 하는 것이고...
교원을 퇴출시키는 목적을 달성하긴 힘들기만 하고, 교육 현장을 더 재미없고 팍팍하게만 만들 것 같은 이넘의 제도는... 본질을 비끼면서 학교를 박살내던 교육 개혁의 일종인 듯 싶네요.
그런데 또... 국민의 80%가 찬성한다는 것에는 분명한 반성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육과정의 잘못이긴 하지만, 제도적 미비도 뒤따르긴 하지만, 실제 부모가 생각하는 <교육>과 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이 따로놀고 있긴 하거든요. 초등학생들도 공부를 시켜야 합니다. 적어도 사회적으로 초,중,고등학생들은 학원을 못 다니게 하고, 실컷 놀고 봉사활동도 하고, 특별 활동도 하게 해야한다는 합의가 이뤄지기 전까지는요.
그러려면, 반드시 교육과정의 대폭 감소가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진복이 길러 보세요. ^^ 학원 안 보내고 학교 공부 따라가게 만들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중학교 수학 교과서가 얼마나 지랄나게 어려운지...
교육과정 '대폭 감소' 없는 논의는 어불성설인 거죠.
학부모들은 피부로 느끼고, 전교조는 머리로 대응하는 셈이랄까요. 정부는 이 점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거죠. 전교조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에요. 시작부터.
정말 애기들 불쌍해요. 그런데... 교육 과정을 줄이자고 하면, 밥그릇문제때문에 해결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수학 10학년 수준을 7학년 수준으로 낮추자고 하면 수학선생들 가만 있겠나요? 음미체를 내신에서 제외하려 해도 보통 난리가 아닌데요.
학부모의 바람은 결코 소박한 게 아니라 생각해요. 학부모들은 정확하게 본질을 간파합니다. 교원 평가도 하고, 그러려면 교장들의 실질적인 능력이 필요하죠. 지금으론 안되는 건데, 거기서(교장 선출 등이 전제조건이거든요) 지고 나니 전교조가 뻗대기만 한다는 욕을 먹는겁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교감은 뭐 하는 일 있나요? 교장 나가기 전에 대기발령 상태인거죠.
서림님 말씀에서도 나왔듯, 교원평가제는 사기 저하를 불러올 거란 것도 그냥 생각인거죠. 문제를 해결할 지도 모른다는 것도 막연한 추측이듯.
갈수록 연구 점수 마일리지 등으로 교원을 '점수화하기'는 어떻게든 교사의 고용을 불안하게 할 것입니다.

... 그런데, 사실 학교 교육과정을 자율적으로 운영하려면, 더 많은 교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교원의 고용 유연성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슬프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