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랑, 산유화로 지다 - 향랑 사건으로 본 17세기 서민층 가족사
정창권 지음 / 풀빛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사람살이 어느 때고 그 살아가는 모습이 혼란스럽고 과도기적이지 않았을 때가 있었을까? 2004년 지금도 우리 사회는 '호주제'를 둘러싸고 시민-여성 단체들과 유림들의 갈등이 첨예하고, 우리 나라의 이혼율을 두고 세계 최고 수준이라느니 그래서 가정이 해체되고 있다느니, 출산율이 너무 낮다느니, 너무 쉽게 이혼하는 경우가 잦아 이혼 조정 제도를 만들기로 했다느니……. 이래저래 말들이 많다. 아마도 정도의 문제겠지만, 어느 사회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이런 갈등과 혼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아마 17세기 조선사회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그랬던가 보다. 이 책을 볼 때 어쩌면 그 사회적 갈등의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듯, 17세기말에도 새로운 사회 문화적 흐름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삶은 변하고 있었으니. 아마 그 사회 문화적인 변화의 속도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 방식의 변화의 그것보다 빨랐는가 보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의 생각은 사회 문화적 흐름을 더 잘 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전 시대에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던 '이혼'이라는 상황과 '개가(改嫁)'의 문제로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났으니.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성격적인 결함이 아니라면 시대와의 불화가 원인일 테니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당시 사람들도 변화하는 사회와 일종의 불화를 겪은 것이리라.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우리에게 조선 후기의 서민 열녀로 알려진 '향랑'을 통해 17세기 후반의 조선 사회, 특히 그 중에서도 조선 사회 가족 제도의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창문'(窓門)을 내어준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에는 '향랑' 개인의 비극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향랑'의 비극적인 생애가 안고 있는 조선 후기의 가족 제도와 가족 문화의 문제점을 이해하려는 것이 더 필요한 듯하다.
   필자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향랑'의 비극적인 생애는 계모의 악행, 아버지의 무능력, 가정 폭력, 이혼, 개가의 문제와 함께 이렇게 변화하는 시대 상황을 당시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문제도 오롯하게 담겨져 있다. 그래서 '향랑'의 죽음에는 '향랑'의 가족들-특히, 남편-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책임이 더욱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가 결국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양반층의 몰이해는 엉뚱하게도 '향랑'을 열녀로 만들어버렸다. 서민층에서는 너무 빨리 사회적 변화를 수용-여성의 개가(改嫁) 금지를 내면화하는 것을 보면-해서 자살에까지 이르렀는데, 양반들은 여전히 '향랑'의 자살을 열녀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사회적 몽매를 드러내었다. 

  天何高遠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    地何廣邈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가

  天地雖大     천지가 비록 크다하나               一身靡託     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구나

  寧投江水     차라리 이 강물에 빠져              葬於魚腹     물고기 배에 장사 지내리

   그러나 머리로 이런 사회적 의미를 분석하는 것보다 먼저 마음으로 와 닿는 것은 향랑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연민이다. '향랑'이 죽기 전에 읊조렸다는 백제 시대의 이 노래에 잘 담겨있듯이 그의 짧은 삶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아릿해진다. 가난한 환경이야 당시의 서민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환경이었을 것이겠지만, 악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찌되었든 '향랑'과는 성격이 맞지 않았던 계모의 존재와 계모의 눈치를 살피는 무능한 아버지, 그리고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파국으로 몰아넣은 그녀의 남편 '임칠봉', 또 향랑의 딱한 처지를 수수방관(袖手傍觀)하거나 개가(改嫁)를 종용하는 시부모와 숙부. 결정적으로 이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의식을 규정하는 사회적 시선과 관습은 여자의 이혼에 냉혹하기만 했다. 그러니 이혼한 여자인 향랑의 탄식처럼 '하늘과 땅이 얼마나 넓고도 아득했'을 것인가?

   이 책의 글쓰기 방식은 아주 독특하다. 필자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체 내용을 이야기로 전개하되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이 필요한 부분은 설명체로 전달하는,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적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호(好)·불호(不好)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괜찮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대중적인 글쓰기를 시도한 필자의 노력이 우선 반갑다. 아무래도 필자의 전공 분야가 아닌(?) 픽션 부분에서는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부족함을 설명체의 논픽션이 깔끔하게 만회하고 있는 것 같다.

   용기있는, 새로운 글쓰기 시도를 깔끔한 형태로 담아내었고, 향랑의 비극적인 생애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이 돋보이는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시대는 달라졌으나, 여전히 우리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창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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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5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느티나무 2004-10-0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을 때 님께서 추천하셔서 읽었답니다. 우선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보내시는 과분한 칭찬도 염치 없이 고맙게 받겠습니다. 님도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님의 리뷰도 제가 즐겨 읽고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

비로그인 2004-10-05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보고 갑니다. 한문을 강독했던 날이 언제 적인지요. 아마 고 2땐가 봅니다. 이 글을 읽다 마치 진공 속을 날아 그 시간의 한때를 부유하는 듯 합니다. 잊고 있던 그 시간을 만났습니다. 한 표 보탭니다. 처음 인사 드리지요. 꾸벅.

느티나무 2004-10-0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신가 싶어서 님의 서재에 가 보았더랬죠. 근데, 제가 흔적은 남지기 않았지만 가 본 서재더군요. 페이퍼 중에 '작은이의 날적이'를 보고 알았답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또 염치 없지만 칭찬(?)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kleinsusun 2004-12-1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의 여성들,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을 읽고, 조선시대의 여자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책을 찾다가 님의 서재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아주 훌륭한 리뷰입니다. 남자분인 것 같은데(맞나요?ㅋㅋ) 이런 책을 만나시고, 또 향랑에게 연민을 느끼고, 아직도 호주제 폐지로 말이 많은, IT만 발달하고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꽁꽁 얼어있는 세상에서 님은 깨어있는 분인 것 같아요. 아름다운 리뷰입니다.

느티나무 2004-12-1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leinsusun님 반갑습니다. 보잘 것 없는 리뷰에 과분한 칭찬이시지만, 고맙습니다. 깨어있는 건 좋은 일인데, 별로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냥, 평범한 '청년'입니다. 좋은 도서관을 운영하고 계신가 보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얼어붙은 눈물
슬라보미르 라비치 지음, 박민규 옮김 / 지호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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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도 우리 나라 땅을 내 두 발로 조금은 걸어다닌 적이 있었던지라 '걸어 다니는 것'에 대해서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걸어다닐 때는 이름을 얻지 못한 길가의 꽃들이 더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시골마을의 한적한 모습에서 평화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징하게 끝없이 이어진 오르막길, 숨이 턱턱 막히는 아스팔트 그 길을 걸으면서 가야할 길만 생각하며 걸어다녔던 그 기억. 서너 번의 그 도보여행에 대한 기억은 앞으로도 내 몸 어느 구석에 박혀 있다가 누군가의 '걸어 다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되새김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걷는 길에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다면? 그 길이 인간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최악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라면? 그 길을 걷는 동안 같이 걷는 동료들이 죽기도 한다면? 늘 먹을 것이 부족하고 때로는 굶어 죽기도 할 수 있다면? 그 길을 걷는 기한이 단 며칠이 아니라 그 끝을 알 수 없다면? 이런 절망적인 여러 가지 질문에도 모두 '좋다'라며 길을 떠난 일곱 사람이 있었다. 길을 '떠났다'라기보다는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라는 게 더 상황에 맞는 설명일 것이다.

   폴란드 기병 중위였던 슬라보미르 라비치는 1941년 러시아 군에 의해 붙잡혀, 러시아 법원에 의해 '간첩죄'와 '적대행위' 혐의로 시베리아 강제노역 25년형을 선고받고, 북극권 근처의 303수용소로 이송된다. 라비치가 재판을 받기 전까지의 상황은 서준식의 '옥중서한'에서 읽은 장면과 비슷하기도 하고, 김동원 감독의 '송환'이라는 영화의 장면과 자꾸 겹쳐져서 읽는 내내 괴로웠다.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쿠까지 이송되는 기간의 그 고통스러운 장면은 또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연해주에 살았던 고려인들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르쿠츠크가 끝이 아니었다. 이르쿠츠크에서 1600킬로미터를 걸어서 레나 강의 북쪽에 있는 303수용소에 도착하는 길은 그야말로 짐승처럼 쇠사슬에 묶여 추위와 맞서 싸우며 걸어야 했던 고통의 길이었다. 그렇게 걸어간 기간이 무려 두 달이었다. 재판 전 고문을 당하면서 오직 살아 있는 것, 살아서 자유를 찾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이유였던 라비치는 험난한 이송 과정에서 자유에 대한 열망을 더욱 키워가게 되었고, 수용소로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오스탸크인(일종의 에스키모인들)을 통해서 '수용소 탈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수용소에서 '체력'을 회복한 라비치는 탈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함께 탈출한 여섯 명의 동지들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라비치가 탈출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라디오 고치는 것 때문에 알게 된 '수용소의 소장 부인'이었다. 수용소 소장 부인의 도움으로 눈보라가 치는 어느 날 겨울밤, 라비치를 포함한 일곱 명은 303 수용소를 손쉽게 탈출했다. 그리고는 끝없이 이어지는 질주. 일곱 명은 추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용소에서 가급적 멀리 달아나야만 했고, 쫓는 자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은밀히 숨어다녀야 했다. 

   수용소 부근을 벗어나자 이번에는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일곱 명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나, 극한의 생존 상황에서도 남의 물건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가며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추격이 미치지 않는 '인도'까지 걸어가기로 했는데, 몽골의 국경을 넘어 내려가서 맞닥뜨린 내몽골의 고비사막과 티베트를 지나 인도로 넘어가기 전에 만나 히말라야 산맥은 자유를 찾으려는 그들에게는 최대의 '고비'였다.

   고비사막은 사막에 들어가는 줄로 모르고 들어선 탓에 더위와 굶주림으로 함께 탈출한 동료들을 잃으며 절망하기도 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쓰러지기 직전에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뱀'까지 잡아먹으며 먹을 것을 해결하기도 했는데, 마지막까지 포기하기 않고 걸었기 때문에 결국 고비사막을 벗어날 수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과정도 감동적이었다. 이번에는 다시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몹시 고통을 겪게 되었고, 산맥을 넘어 내려오다가는 지금까지 함께 했던 동료, '팔루호비치'를 잃게 되었다. 라비치는 그 부분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랫동안 주위를 서성거렸다. 참변은 너무나 급작스러웠고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제까지 우리와 함께 했던 팔루호비치는 이제 없는 것이다. 그가 죽을 거라고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다. 강인하고 헌신적이었던 팔루호비치 상사는 그렇게 우리를 떠났다.
  '결국 이렇게,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죽기 위해서 그 먼 길을 왔단 말인가' 스미스 씨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의 죽음에 상심했다. 일행 중에서 나이가 많던 둘의 우정은 남달랐다."

   팔일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로 그들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처음 탈출할 때부터 가고 싶어했던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에서 만난 영국군을 통해 이들의 기나긴 탈출 행적이 알려지고, 드디어 살아남은 네 명은 '자유'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탈출 과정에서 겪은 심각한 정신적 상처로 한 달 동안이나 혼수 상태를 겪기도 한다.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누구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라비치가 탈출하자고 제안했을 때 라비치와 친했던 그레히넨은 '눈과 추위 때문에 어디든 가기 전에 얼어죽을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했고, 라비치가 청년들에게 농담처럼 탈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부들부들 떨며 달아나 버렸던' 이 무모한 계획은 무엇을 위해 시작되었을까? 나는 라비치에게 , 어리석겠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라비치 당신은, 고비 사막과 히말라야 산맥의 경험을 다시 하게 된다고 해도 '자유'를 찾아 탈출하겠느냐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아직 직접적인 신체의 자유를 제한 당한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이 자유에 대한 가치가 극한적 상황을 뚫고, 목숨을 걸만한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자유의 가치를 논하기에 앞서 내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만 하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누리는 자유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 온 누군가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라비치와 그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

   자유를 찾아 극한의 자연환경을 극복한, 진정한 인간 의지의 무한함을 보여준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진 이야기'라는 역설적인 부제가 달린 이 고통스러운 실제 이야기는 자유를 찾아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이 책도 그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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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사중주
김재준 외 지음 / 박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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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시대한민국'답게 서점가에는 대입성공수기나 '공부 방법'에 관한 책은 굳이 입시철이 아니어도 넘쳐난다. 그러나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런 책은 늘 공부로 고민하는 대한민국의 '보통 학생들'에게 소박한 꿈을 주는 미덕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성공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심어주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책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쓰여진 것도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개인의 편견일수도 있겠지만 '공부 방법'에 관한 책은,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소개하거나 합리적인 근거나 과학적인 검증 없이 '성공의 신화'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뭔가 특별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이 특별한 경험이 보편적인 방법으로 소개되는 것이 현실이다.
 
   얼마 전에 우연히 대학교수들이 언어와 창의성을 주제로 고등학생을 위한 책을 냈다는 광고를 보고 망설이다가 책을 사서 보았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입시 관련 책과는 무엇인가 다르겠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는데, 대학교수들이 고등학생을 위한 책을 썼다는 점과, 수학을 논리적 언어라며 언어의 영역으로 포함시킨 것이 참신한 발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내 느낌을 미리 말한다면, 이 책은 지금까지의 책들과는 분명히 다른 참신한 점을 보여주고 있으나 실제로 교육현장에, 학생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겠다.

   이 책은 읽기와 토론(주경철), 영어(김종면), 수학=생각하기(김재준), 글짓기(신광현)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일단 나는 창의성과 언어 능력을 높이려는 시도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책들과는 다른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공부하는 방법으로써 제시하는 이 책의 일관된 전제는 '스스로 생각하기'이다. 실제로 학교에서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는데, 이 책을 통해서 고등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교수와 교사간의 인식의 차이는 이렇게도 큰 것일까? 교사인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이 주요 독자로 삼고 있는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얼마나 이해하며 읽어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구나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학습 방법은 현재 우리 나라의 고등학교 학생이 그대로 따라하기에는 더욱 힘들 것이다. 교수님들이 생각하고 있는 고등학생은 어떤 수준의 학생들인지 잘 모르겠으나 내가 만나고 있는 대다수의 고등학생은 어려움을 느낄 것 같다.

   예를 한 번 들어보면, 대다수의 고등학교 수준의 학생들은 생활 영어 단어 익히기(익히기), 기본 문장 읽기, 일상적인 대화 상황 듣기와 표현하기-사실, 교실에서 '표현하기'가 얼마나 활발하게 이뤄지는지 알 수 없지만- 정도도 힘들어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영어로 사고하기, 입으로 말하기, 다양한 영어 표현 익히기, 개성 있고 세련된 표현 만들기, 영어의 강약 리듬 느끼기의 순서로 영어 학습법을 설명하고 있다. 현실은 기본 문장을 읽고 이해하는 정도의 수준인데, 자기만의 개성 있는 문장 만들기를 주문하고 있으니 그 간극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이것이 같은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고 문제를 내더라도 대학 교수들은 다른 방향에서 생각을 하는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집필진의 선의(善意)와는 상관없이 이 책은 '다수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읽힐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그 원인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이 책을 보면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이런 시도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입시 공화국', '교육 열풍'의 허울좋은 구호 속에 대한민국의 교육 분야 콘텐츠는 얼마나 살풍경한가? 이 책을 발판으로 제대로 된 학습 방법 안내책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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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 역사 인물 찾기 13
알리스 셰르키 지음, 이세욱 옮김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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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 말처럼, 지금은 혁명에는 냉소적이면서도 혁명가에게는 열광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체 게바라'에서부터 시작된 이 혁명가들에 대한 열광은 그들의 실천적인 삶과는 거리를 둔 관심이라는 점에서 이미 한계점이 분명하다. 또한 독자의 현실 세계 속에서의 안온한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순진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탈출구가 없는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대리만족으로 혁명가를 '영웅'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시대의  '혁명가 읽기'는 가늠할 수 없는 유행처럼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또 그 유행이 일회적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상품'인 것 같다.
    책 속의 혁명가들은 그들의 꿈을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아주 멋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책 속에서 꿈을 이룬 혁명가는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혁명에 실패한 혁명가도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다가 현실의 벽에 막혀 멋지게 좌절하는 인물이 된다. 책 속의 상황은 '가상'의 공간이며 멋진 인물에다가 읽는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투사해서 그와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하다 보면 책을 읽을 때마다 책 속의 혁명가는 게임의 내가 설정해 둔 하나의 캐릭터가 되는 것 같다.

   괜히 그런 상품과 캐릭터의 이미지가 싫어서 혁명가에 관한 책을 멀리했지만, 이번에는 우연히 프란츠 파농을 읽게 되었다. 사실, 프란츠 파농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도 파농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조심스럽다. 파농이라는 사람이 누구냐를 말하려고 한다면 그의 다양한 모습 중에서도 '흑인', 프랑스의 '마르티니크 출생', '작가', '정신과 의사', '혁명가'일 것이다. 
   파농은 2차 대전에 자유 프랑스를 위해 2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블리다의 정신 병원에서는 당시로서는 아주 혁명적인 정신과 치료방법이었던 '사회요법'을 실시한 정신과 의사였고,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책에서 "한 언어를 말하는 것은 한 세계와 그 문화를 수용하는 것이다.…… 백인이 되고 싶어하는 앤틸리스 사람은 언어라는 문화적 도구를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더욱 쉽게 스스로를 백인으로 생각하게 된다." 라며 지배자의 담론이 개인에게 영향을 미쳐 주체의 무의식 형성에까지 관여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에 흑인의 문제를 흑인이 설명하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저작이었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을 통해서는 알제리 해방의 의미와 해방 이후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해방의 조건에서는 식민지배의 상처를 씻기 위해서 식민통치의 폭력을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선언해서 프랑스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탁월한 작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프랑스령 알제리의 해방을 위해서는 줄곧 프랑스와의 협상이 아니라 줄곧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으며, 실제로 튀니스에서 무장투쟁의 대오에 합류하기도 했던 전사이자 혁명가였다.
    한편으로는 알제리의 독립투쟁의 과정을 자신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일부 군인들의 태도에 실망감을 나타내며, 해방 이후의 알제리 사회의 모습을 끊임없이 모색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아프리카 순회대사 시절에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단결을 통해서 '아프리카합중국'을 꿈꾸었던 '이상주이자'이기도 하다.
    이런 파농의 비타협적이고 이상적인 태도를 여러 사람들에게 비난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그의 놀라운 열정과 사심 없는 태도, 그리고 탁월한 예지력 등은 알제리 해방 운동의 정파를 초월해서 신망을 받게 된다. 그는 결국 알제리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백혈병을 치료하기 위해 떠났던 미국에서 삶을 마치게 되었지만-그는 유럽의 식민주의를 아주 싫어했고, 미국은 그런 유럽보다 더 심한 식민주의 정책을 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의 주검은 '해방된' 알제리-당시 무장투쟁군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에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아쉬운 점도 좀 남는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약점은 파농의 모습이 읽은 이에게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파농의 삶에 집중해서 읽을 수 없게 하는 몇 가지 요인이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서술자와 인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서술자의 주관적인 개입이 잦은 것 아쉽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그는 과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 후 파농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런 그렇지 않다고 나에게 말했다'는 식의 문장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또 '파농'의 행동 반경이 일생 동안 여러 곳에서 펼쳐지고 있는데-우리에게는 아주 낯선- 프랑스와 알제리 등의 지도가 책의 앞뒤에 소개되어 있지 않아 파농이 어디에서 어디로 갔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점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지적한다면, 각주의 설명이 너무 길거나 복잡해서 본문을 읽을 때의 흐름이 자주 끊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덜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한 인물을 역사 속에서 만났고, 책표지에 있는 그의 서늘한 눈매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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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2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콩 2004-09-03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시대의 '혁명가 읽기'는 가늠할 수 없는 유행처럼 언제든 바뀔 수 있고, 또 그 유행이 일회적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상품'인 것 같다." 공감되는 말이예요. (개콘이라는 프로에서 운동권 학생을 희화화하는 것을 보며 서글퍼했던 기억!) 그치만 '유행'조차 되지 않고 역사 속에 묻혀버리는 것보다는 '상품'이라도 되는 것이 의미있지 않을런지.. '상품화'하는 사람들의 이속과는 별개로.. 그런 의미에서 '일회적 상품'은 아닌 것 같아요. 한 번 써먹고 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는 사람도 많을 테니...
혁명가들의 치열한 삶이 너무 가벼워지나요? 역시 서글프죠?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 생명의 온기 가득한 우리 숲 풀과 나무 이야기
이유미 지음 / 지오북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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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 잘 받았습니다.

  좀 늦은 편지지만 -2002년 4월 1일부터 2004년 2월 22일까지의 편지였으니 늦은 셈이지요- 고마운 편지 잘 받았습니다. 저는 유난히 더운 이 한 여름에 편지를 읽게 되어, 편지에서 나오는 청신(淸新)한 기운이 제가 이 무더위를 견디는데 아주 큰 힘이 되었습니다. 또 이 편지에서는 나무의 맑은 기운뿐만 아니라, 편지의 끄트머리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시는 나무처럼 넉넉한 말씀도 함께 담아 주셔서 더욱 좋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보내주신 이 편지로 아주 유식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근무하는 직장에서는 커다란 석조에다 부레옥잠 키우기 시작했거든요. 저도 부레옥잠이 수질정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도 모를 정도의 청맹과니는 아니지만, 부레옥잠의 고향이 열대 아메리카라는 것, 꽃잎이 봉의 눈동자를 닮아 '봉안련(鳳眼蓮)'이라는 별칭이 있다는 것, 고향에서는 여러해살이 풀이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한 해 밖에 살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겨울 부레옥잠이 죽으면 축적된 오염물질이 다시 그대로 물로 흘러 들어가 물의 오염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답니다.
  이 더운 여름에 보충수업을 지겨워하는 아이들에게 슬쩍 '부레옥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얘들아, 며칠 전에 현관 앞에 못 보던 꽃(원래는 풀이라고 해야하지만)이 있던데, 봤나?' 그러면 아이들도 '부레옥잠' 정도는 압니다. ''부레옥잠'이 어떤 역할을 하는 줄은 다 알지요?'아이들이 모두 '수질정화요'. 여기까지 오면 이제 이 편지에서 읽은 내용을 쭈욱 풀어서 설명하면 제가 어느새 '유식쟁이' 생물 선생님이 돼 있답니다.

  게다가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에서 들려 준 다양한 식물들의 생존 전략, 환경 적응 방식 등을 대할 때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놀라운 식물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아 나태하고 게으른 제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제 주변의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가 그냥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경쟁과 환경에 발빠르게 적응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임을 마주할 때 느끼는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고 늘 부족한 환경을 탓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짜증이고, 추워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가운 날씨를 탓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연 속의 식물들은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자기의 환경 속에서 생존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가는 것, 번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 그래서 식물의 '생식 기관'인 꽃은 더욱 아름다운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꽃잎 한 장 한 장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요즘입니다. 국화꽃은 아닐지라도 저 꽃 한 송이, 나뭇잎 한 장이 피기 위해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우는' 정도로는 아무래도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일하고 계신 곳의 나무들은 이 무더위를 좋아하겠지요? 이 여름을 묵묵히 견디면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고 있을 테지요? 저도 언젠가 꼭 한 번은 그 곳 숲의 나무들을 만나러 갈 계획입니다. 만나면 이번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마도 나무들이 나직하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도 같습니다.

  제가 숲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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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4-08-17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저번 리뷰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조금 상심했었다. 그래서 리뷰 쓰는 게 심드렁했었는데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