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보 콩
이시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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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 이시백의 전작, 누가 말을 죽였을까,를 읽고 실컷 웃었던 적이 있었다. 현재의 농촌 현실을 맛깔난 충청도 사투리로 슬쩍 찌르고 눙치는 솜씨가 압권이었다. 읽는 내내 킥킥거렸고 책을 덮고 나서는 마음이 착 가라앉아서 자꾸 생각을 나게 하는 소설이었다. 당연히 주변의 지인들에게 멋진 소설이라고 여러 번 권하기도 했다.  

   그런 작가가 새로운 소설집을 냈다. 야릇한 제목의 갈보 콩. 사실 소설집이 나온 지도 몰랐는데, 알라딘에서 놀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됐다. 이번 소설에서도 전작에서처럼 충청도 사투리의 맛은 농익은 감칠맛이 난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자꾸 소리내서 따라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사투리 표현력에 있어서는 권정생 선생님의 '한티재 하늘'에 나오는 경북 사투리와 함께 최고다. 경북 사투리가 인물의 생각을 단선적이고 직선적으로 표현해서 아주 효율적인 느낌이라면, 충청도 사투리는 의뭉스럽고, 능청을 떨면서도 상대방의 헛점을 찾아 정확하게 찌르는 느낌이다. 아마튼 이시백 소설에서 충청도 사투리 표현은 단연 최고의 미덕이다. (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은데, 충청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는 이 소설가는 정작 충청도에 산 적은 없다고 한다. 기억이 정확한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읽는 재미가 무척 뛰어나다. 책을 넘기면서 낄낄거릴 수 있는 대목도 여러 곳이고, 코끝이 시큰해지는 곳도 있으며, 나도 같이 한시름 다 잊고 소설 속 사람들과 어울려서 신나게 놀고 싶은 장면도 있다. 또 이러 장면들을 글로 옮겨 놓을 때는 마치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써 온 것 같은 농촌 생활이 반영된 탁월한 표현이나, 상황에 적절한 해학과 풍자가 곁들여 져서 읽는 내내 싱글거리게 된다. 흠, 나도 이런 표현을 기억했다가 어디 써 먹을 때가 없을까? 싶은 생각이 계속 들 정도였으니까... [갈보 콩이라는 작품을 보면, 여든이 다 된 할머니가 아들이 하는 식당의 손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맷돌을 돌리는데, 날이 너무 더워 "이젠 더 못하겠다. 기생 말년에 거시기 큰 놈 만나서 고생한다더니" 이런 표현이 나오던데, 읽다가 속된 말로 빵, 터졌다. 근데 이 분은 어디서 저런 표현을 배웠을라나?] 

   이시백의 소설에 나타나는 농촌의 현실은 도시인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아름다운' 농촌은 없다. 이곳에도 4대강 사업이다, 농촌체험마을 조성이다, 골프장 건설이다 해서 개발의 광풍이 불고, 이에 따라 시골 사람들도 이런 개발 열풍을 빌려 한 몫 잡으려는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이 떄를 틈타 어떻게든자기 몫(?)을 챙기고자 이런 저런 일들을 벌여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는 인물들이다. (단편, 두물머리가 그렇고, 물레방아 노래' 역시 그렇다.) 이들이 맞서야 하는 농촌의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은 셈이다. 

   작가는 오늘의 이런 농촌 현실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쌀 직불금 파동을 다루고 있는 '송충이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라는 작품을 보면, 그 당시 뉴스에서는 단순히 직불금 부정 수급 문제만 줄기차게 다뤘지만, 사실은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학교는 못 다녔지만 세상 이치에는 누구보다도 밝은 농민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기 있다. 그렇기 때문에 ' 직불금'로 상징되는 농정의 무능함과 정책의 허구성이 여지 없이 드러난다. 이런 농민의 목소리는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짜낸다고 해서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소설을 읽으면서 정말 놀라웠다. 

   소설의 내용과는 별로 상관 없지만, 책 뒷면의 해설에서 '민중 서사' 같은 말은 이물감이 든다. '민중 서사'라고 하면 왠지 도식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은가?(나만 그런가?) 이미 있는 말로 이 소설을 끼우려다 보니까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딘지 내용에 안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다. 또 하나, 이곳저곳에서 자꾸 이문구의 빈자리를 채운다, 라는 표현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냥 이시백은 이시백일 뿐! 이것 역시 그냥 내 생각일 뿐이지만...

   아무튼 그리 많은 소설을 읽어 본 건 아니지만, 최근에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멋진 소설이다. 지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책이고, 아마도 좋은 책 권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책이다. 이제 작가의 다음 작품은 미리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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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1-2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시백 선생님 소설은 정말 재밌는데, 웃으며 읽다보면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고, 웃고있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게 됩니다. 첫 소설집인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도 엄청 좋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느티나무 2011-01-21 13:54   좋아요 0 | URL
네... 소설보니까 농촌의 현실이 정말 어렵더라구요. 근데, 웃음이 실실 나고, 책 덮어도 계속 생각나고... 씁쓸하고... 딱 맞는 말씀입니다. 일러 주신 대로 주사위 던지기, 방금 주문 넣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실, 리뷰 안 쓰려다가 이 좋은 소설에 리뷰가 한 개 밖에 안 달려서... 썼는데... 아무튼 좋은 소설이 널리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
프리모 레비 지음, 김종돈 옮김 / 노마드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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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리뷰를 쓰지 않았다.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단순히 마음이 게을러서 그렇다. 아무리 하찮은 글이라도 나에게 글쓰기는 힘들다. 힘드니까 점점 미루다가 어느 순간부터 손을 딱 놓고 말았다. 꼭 써야 하는 글이라면 마감 전날에 밤을 새워서라도 썼겠지만, 리뷰근 그야 말로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 아닌가! 

   그러다가 최근에 'B 급 좌파 : 세 번째 이야기'를 읽다가 "글을 씀으로써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19쪽)  이런 구절을 읽고는, 내가 무척 게으른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끊임 없이 일어나는 일상의 에피소드를 반추하며 내 생각의 틀을 만들어 내는 일은, 결국 글을 써야 해결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책을 읽고 리뷰를 쓰려다가 막힌 책이 바로, 서경식 선생이 쓴 '시대의 증언자 :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서경식, 창비)'였다. 책을 덮고 바로 컴퓨터를 켜고 무엇인가를 끄적거렸으나 결국 다 지우고 말았다. 내가 몇 줄이나마 쓰면 쓸수록 책에서 받은 감동이 오히려 스러지는 것 같아서, 먹먹한 내 마음과 글이 자꾸 어긋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싶은 책 목록을 만들어 두기도 했지만 아주 몇 번 예외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책은 손도 대지 못 했다. [리뷰를 쓰고 싶은 책 목록에는 프리모 레비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도 있었다.] 

   최근에 나온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책은 내가 읽은 프리모 레비와 관련이 있는 네 번째 책이다. (주기율표가 세 번째 책이고, 휴전, 이 다섯 번째 책으로 지금 책장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레비의 어떤 면이 계속 나의 마음을 끄는 것일까? 아마도 그가 끊임 없이 시대의 비인간성에 대해 경고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그는 우리 시대라는 '잠수함의 토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고장난 잠수함' 같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온 '토끼'이다. 아마도 그의 경고-지금도 파국의 잠수함이 아닌가?-가 어떤 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계속 내 마음을 붙잡아 흔든다. 그래서 이번 책도 얼른 사서 읽었다.  

   이 책은 레비가 무솔리니의 인종차별 정책을 피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 있을 때 만났던 많은 유태인 빨치산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과 해방 이후 이탈리아에 정착해서 친구로부터 들었던 인상적인 동유럽 빨치산 이야기를 엮어서 만들었다.  

   유태인 빨치산들은 두 전선에서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특히 어려움이 많았다. 명시적인 적인 나치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는 대부분의 유럽인들과도 암묵적인 전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상황을, 국적은 다르지만 나치에 항전하는 다국적군 유태인 빨치산 부대인 게달레 대장이 이끄는 부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폴란드, 독일 곳곳에서 게릴라 활동을 펼치며 이동하다가 종전과 함께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있는 유태인 구제기관의 보호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대장정을 마치게 된다.

   작가의 분신이자 끊임 없이 전쟁과 실존의 의미를 묻는 멘델, 전쟁터에서 만나 인연을 맺게 되는 시슬과 라인, 총과 바이올린을 함께 메고 다니는 대장 게달레와 그의 연인, 벨라. 그리고 언제나 유쾌한 말솜씨로 부대원의 시름을 덜어주던 파벨, 칼솜씨가 놀라웠던 모텔. 그리고 소년에서 용맹한 전사로 자란 피오트르, 숲에서 우연히 만난 멘델과 함께 유태인 부대를 찾아가는 레오니드 등.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의 삶의 궤적과 나치와의 전쟁, 연합군의 전후 처리 과정이 교묘하게 결합하면서 결국, 이들 유태인들은 디아스포라가 될 수 밖에 없는 속사정을 아프게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연히 '태백산맥'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태백산맥'과 비슷하다는 느낌보다는 아, 참 다르구나, 라는 느낌이 더 많이 들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이야 책의 분량이 있으니 차이나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쳐도, 이 책은 역사적 현실에서 '승리'한 투쟁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유럽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특수성이 빨치산 투쟁에도 반영된 것인지는 몰라도 이들의 투쟁이 '태백산맥'에서처럼 처절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전쟁의 참혹함이야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의 상상 너머에 있을 테지만, 태백산맥 같은 책에 단련된 우리들은 '저 동네 사람들은 좀 점잖게 싸우는군' 이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말해 두고 싶은 것 한 가지. 오늘의 이스라엘의 후안무치한 행태를 보고 있자면 저들의 지난한 투쟁이 결국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를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이 1982년, 이 해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해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다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책장에 꽂힌 '시대의 증언자 :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뒤적이니, 레비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철수를 요구하는 요구서에 서명했다가 지인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하고, 반이스라엘측으로부터는 친이스라엘적이라고 비난받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상처 입은 레비는 이후 공식적인 발언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시대의 증언자 : 프리모 레비 256-261쪽)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구절을 소개하며 짧은 리뷰를 마감하려고 한다. 게달레 대장이 부대원들 앞에서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며 부른 노래 가사인데, 나치친위대에 붙잡힌 유태인 사형수가  죽기 직전 30분간의 말미를 얻어서 지었다는 시로, 소개되어 있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유태인의 진혼곡으로 불린 이 노래 가사가 책 내용의 전후 맥락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책을 덮은 후에도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다만 이 아름다운 노랫말이 내 마음 속에서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자, 다른 사람의 삶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자, 그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지금 당장 시작하자..." 는 밋밋한 말로 바뀌었지만, 앞으로 내 행동의 중요한 규범으로 남을 것 같다는 예감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마나한 이야기겠지만, 프리모 레비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읽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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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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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8,280,000명   

나. 123만원   

다. 4110원    

라. 2010년 6월 29일   

마. 1000원 VS 9원

가. 2010년 3월 현재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의 수. 비정규직 비중은 전체 임금 노동자의 49.8% 수준으로 경기침체 등의 요인으로 점차 하락하는 추세이다.

나. 2010년 3월 현재 비정규직이 받고 있는 평균 임금. 이 돈은 정규직 임금의 46.2% 수준이다. 임금 격차는 확대되고 있다.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된 후에도 비정규직 차별은 개선되지 않고, 갈수록 고용의 질이 악화되고 있다.

다. 2010년 최저임금액. 이 금액을 적용하면 8시간 기준 일급은 3만2880원, 44시간의 월급은 92만8860원이다. 참고로, 4900원인 맥도널드 빅맥 세트 먹으려면, 1시간 12분을 일해야 한다.

라. 노, 사, 공익위원 각각 9명으로 구성된 최저임금 심의위원회가 2011년 최저임금을 심의 의결해야 하는 날. 지난 6월 4일, 노동계 심의위원들은 경영계 심의위원들이 최저임금 동결 주장을 굽히지 않는데 항의해서 농성에 들어가는 등 현재 진통을 겪고 있다.

마. 1000원은 노동계의 2011년 최저임금 인상 요구액. 그래서 원하는 최저임금액이 시급 5180원이다. 반면 계속 동결 주장을 고집하던 경영계가 내놓은 인상액은 딱 9원. 그래서 시급 4120원이다.

   대안이 아니라 현실을 보여주고자 뛰어들었던 용감한 기자들의 노동체험기를 읽고, 이렇게 딱딱한 숫자들과 무미건조한 설명으로 일관하는 서평은, 정작 써 놓은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이후로는 계속 이런 숫자와 통계들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 ‘일기’ 같은 글이라 텔레비전이 켜진 거실에서, 옆에서 아기가 놀아달라고 칭얼대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면 무난하게 읽을 수 있다. 물론 결정적인 문제는, 편하게 읽을 때와는 달리 다 읽고 나서는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마음의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용기 있는 선생님, 순진무구한 눈빛을 가진 우리 학생들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선생님들께서는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듯싶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 문제와 최저 임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이것이다. 노동자는 앞으로 1년 동안 사용자가 되어 그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잘 살펴보고, 사용자는 앞으로 1년 동안 시급 4120원으로 철야하면서 노동자들이 얼마나 편하게 사는지 느껴보면 된다. 그러면 적어도 비정규직, 최저 임금 문제는 저절로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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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 피렌체편 - 김태권의 미술지식만화
김태권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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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도 있고, 공부도 되는 책!

   6월 10일, 오후 6시 40분. 학교에서 서둘러 저녁을 챙겨 먹고 서면으로 출발. 난 평소에는 시위하러 잘 안 나갔는데, 이번에는 이날이 무척 기다려졌다. 요즘은 무엇인가가 내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어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인터넷으로 '부산 6.10대회'(문화제)가 어디서 열리는 지 계속 검색해 보기도 했으니까 이번엔 나도 몸이 좀 달았나 보다. 꼭 찝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당하고 살 수는 없다는 생각, 이걸 억울하다, 고 해도 될지? 아무튼 6월 10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서면으로 나가서 힘을 보태야겠다는 굳은 결심. 벌써 며칠 전부터 하고 마음을 먹었다.(역시, 난, 이런 걸 마음 먹고 나가야 하는 아주, 아주 소심한 사람이다.) 

   멍하게 가는 게 싫어서 지하철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을 열고 책 한 권 꺼냈다. 원래 읽고 있던 책도 있지만, 지하철에서 읽으려고 가벼운 책을 챙겨 넣었다. 김태권의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명색이 '미술지식만화'라는 이 책을 ‘가벼운 책’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래도, 지하철이 역을 지나치는 속도만큼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빠르다. 그만큼이나 빨리 내 마음도 피렌체가 가 있는 것 같다.

   시위를 하러 나서는 마음은 착잡한데, 그나마 이 책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르네상스 시대의 중세 도시, 피렌체의 풍경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책을 펼친 우리를 예술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 도시의 구석구석으로 이끄는 사람은 바사리라는 재능 있는 화가이자 꼼꼼한 미술사학자. 이 바사리라는 인물이 잡아 끄는 대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피렌체의 역사, 정치, 문화의 대강을 알게 되고, 이 작은 도시 국가의 역사와 정치, 문화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엮어 낸 피렌체 예술-미술과 조각, 건축-의 찬란한 결과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복잡하고도 어려웠을 것 같은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추천사에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작가의 ‘재구성’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좋아 ‘재구성’이지, 재구성은 ‘창조’와 다를 바 없다.(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재구성을 하려면 재구성하려는 대상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자신의 생각이나 관점으로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창조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이 책 곳곳에는 바사리가 쓴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에서 내용이 발췌되어 있어 바사리의 책을 만화로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바사리의 책의 내용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작품의 구상 상황에 적절한 내용을 골라, 읽는 사람이 이렇게 알기 쉽게 전달하기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만화가들이야 원래부터 재구성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딱 있어야 할 곳에 가장 적절한 내용을 배치하는 작가의 작품 구성 능력은 여느 만화가들보다는 훨씬 뛰어난 것 같다.(이건 십자군 이야기 1,2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으로는 만화 속에서 세계 명작들을 여러 편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만화와 함께 등장하는 회화, 조각, 건축 등의 그림이 오히려 화집으로 볼 때보다 훨씬 친숙하게 느껴진다. 당연히 만화의 내용 전개에 꼭 필요한 예술품들이기도 하고. 만화 속 작품은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배경 상황을 자세하게 풀이해 주는데도 훌륭한 역할을 한다. 물론 작품 전체를 다 볼 수 없다는 점과 어쩔 수 없이 작품의 화질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러 작품을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더구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속속들이 파헤져 주니 -그것도 알기 쉽게- 지식만화라는 분류가 허명은 아닌 듯싶다.  

 

   또 하나 더 들고 싶은 것은 작가의, 여전한, 촌철살인의 현실 풍자! 가령, “고-소-영 장관들하곤 질이 다른데……”(112쪽) 라든가, “지지율 역대 최저”, “거의 대운하 수준인데?(123쪽)”, “저 놈 머리는 저용량임에 틀림없어….”(128쪽) 등 이야기 곳곳에 상황에 딱 들어맞게 날려주는 코멘트는 정말 경이롭다.(십자군 이야기 1,2에서도 역시 그랬다.) 또 인터넷 용어라든지, 누리꾼들의 속어들이 내용 전개에 자연스럽게 잘 녹아들어가서 (나 같은 경우엔) 책을 읽는 내내 키득거리게 된다.

   책의 이런 장점들 때문에 조금은 가라앉은 마음으로 서둘렀던 퇴근길이 결과적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지하철이 서면역에 닿았을 땐 살짝 아쉬운 마음도 들었으니까. 그 아쉬운 마음이 도리어 힘이 되어, 전경들이 보호해 줘서 아늑하기까지 했던, 서면 8차선 대로에 씩씩하게 앉아 주먹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돌아왔다. 현실은 이렇게 갑갑하지만 그래도 가끔 책을 보며 키득거릴 수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이런 책이라도 없었다면 내 생활이 참 건조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해 봤다.

 

   百聞不如一讀이다.  

 

 

 걱정 하나와 불만 하나!  

 1. 걱정 : 설마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가 피렌체 편으로 끝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다음 권이 한 2년 있다가 나오면, 다시 피렌체부터 읽어야 하니 곤란한데... 내 걱정이 기우杞憂이기를 빈다. 

 2. 불만 : 앞의 걱정과 비슷한 내용이긴한데, 십자군 이야기 2권 이후는 더 이상 안 나오는 건가? 곧 나온다고 2권 마지막에 써 있었던 거 같은데, 그래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십자군 이야기 계속 만들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 배신감의 정체는 뭔가? 음... 미술에 빠지셨네(?). : 참, 서울대 미학과 나오셨다니까 생각 나네. 그 대학 먼저 다닌, 변 모씨 좀 말릴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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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이준구) - 이준구 교수의, 이념이 아닌 합리성의 경제를 향하여
이준구 지음 / 푸른숲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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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국 경제

   1년 반전에 우리-우리,라고 말을 하니 마음이 많이 아프다-는 죽어가는(?) 우리나라 경제를 확실히 살릴 수 있다며 출마했던 어느 대통령 후보에게 ‘묻지마’식 투표로 표를 몰아주었다. 그가 내건 공약은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었고, 그의 지난 언행에는 수많은 도덕적, 법적 결점이 있었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 값을 올려주고, 내가 내는 세금도 덜 내고, 거기다가  내 월급도 올려 줄 비상한 실력이 있다는 말에 혹해서(결코 ‘속아서’가 아니다.) 선택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지난 10년의 ‘좌파’(진짜 ‘좌파’들은 이 말 들으면 가소로워서 웃는다.) 정권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자칭 ‘보수(진짜 ’보수‘들은 이 말 들으면 서운해서 운다.)’ 언론에 세뇌당한 국민들은 지난 5년 평균 4.2%의 경제성장률과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 종합주가지수 2.3배로 성장한 경제를 두고 죽었다, 고 생각해서 그 대체자로 고른 인물이 건설업자 출신의, 경제를 살린다는 이명박 후보였다.

   온갖 폼을 잡으며 경제를 살리겠다던 그 후보의 실력이 제대로 드러나는 데는 채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인수위원회 시절의 ‘어륀지’ 사건 이후로, 온통 자기 삶의 이력을 닮은 ‘고․소․영, 강․부․자’들로 구성된 내각의 출범을 출범시켜 자신의 출신 배경을 맨얼굴로 드러내었다. 더구나 자신 있다던 경제 분야에서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일으킨 ‘올드 보이’의 컴백, ‘MB식 물가 관리’, ‘고환율 정책’ 등을 통해, 자신의 사고방식이 과거의 어느 순간(그것도 오래 전 어느 순간. 아마, 1970년대쯤?)에서 멈춰 버렸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었다.

   굴욕적인 쇠고기 수입 협상이나 미국발 금융위기의 엉성한 대처만 보더라도 과연 그가 말한 ‘프로’의 실력은 언제쯤 발휘되는 것인지 궁금하다.(아직도 그 놈의 ‘좌파 타령’이다. 아마, 임기가 끝난 다음에도 큰소리 칠 것 같긴 하지만…… 그에 앞서서 남의 머리를 빌려 대통령직을 수행했던 김영삼을 보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뻔뻔함은 그네들의 주요 자질이다.) 기껏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서는 것이, 전 국민이 그렇게 반대하고 있는 ‘대운하’를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슬그머니 꺼내는 것이나 ‘녹색 성장’이라는 이름의 형용 모순 정책을 아무 사업에나 갖다 붙이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얼마 전에 자전거 축제에 참여하셔서 한 말씀 하셨단다. 우리나라가 곧 3대 자전거 생산국이 될 것이라고. 그런데 역시나, 그 주장이나 전망의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번에도 역시 그냥 그 자리에서 기분이 ‘업’ 되어서 아무렇게나 한 번 해 본 말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이 글의 전체 맥락과 상관없을지 모르겠다만, 아, 또 마음에 진짜 안 드는 게 하나 있다. 제발,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도 뭐 했네, 이런 얘기 좀 안 했으면 좋겠다. ‘가난한 시절’은 이제 그만~!

   내가 느끼기에 이 정부는 정책의 결정에 아무런 논리적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그냥 ‘아무렇게나 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말은 조금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몰상식한 태도’까지 보인다. 더군다나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적대적으로 대하면서도 성찰의 기미가 안 보인다.(하기야 ‘성찰’이라는 단어는 이들에게 너무 품격 높은 단어라고 느낌이다. 그러니, 혹시나 저들의 입에서 ‘성찰’이라는 말이 나온다면 앵무새의 목소리가 연상될 것이다.)

   나는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거의 무지한 편이지만, 경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부의 경제 정책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 엉성하고 허술한 것 같다. 항상 추상적인 전망만 난무하고, 어디에도 전망의 근거와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답답함을 넘어 이젠 이 정부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을 지경이다. ‘경제’라는 말만 들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나 같은 사람한테도 이 정부의 능력이 들통났으니, 경제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 보기엔 이 정부의 경제 정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습게 생각될까?

   그러나 이 정부에 대한 한 터럭의 기대도 없었던 나 같은 사람 말고, 이 정부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이 정부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소위 말하는 ‘보수 우익’의 사람들은 과연 지금 이 정부의 정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싶었다. 더군다나 자신 있다던 경제 분야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어떨까? 그들은 내가 사사건건 짜증스럽게 느끼는 이 정부의 정책을 정말 환호하고 있을까? 매번 여론조사를 하면 적어도 25-35%는 지지한다니까 그런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은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국민 중에 이 정부의 정책으로 덕 보는 부자가 그리 많단 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이번에 우리나라의 주류 경제학자로서 ‘보수 우익’ 성향이라는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를 읽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참여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몇 편 읽었던 적이 있어(물론 인터넷 포털에서다.) 이준구 교수의 이름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는 포털에 이 교수의 글이 오르는 주기가 훨씬 짧아지고, 글의 내용도 정부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이전보다 훨씬 쎄서 여러 가지 논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전에 이준구 교수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역시 ‘수구 꼴통’이로군, 이었다. 작은 허물을 트집 잡아 새로운 개혁 정책을 흔들어 보려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누구는 이걸 이념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만, 나에게 이념이 무슨 소용이랴?) 그런데, 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는 이 교수의 글이 더 자주 올라왔다. 그리고, 기사에 소개될 때는 이준구라는 이름 앞에 꼭 ‘보수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달리곤 했다. 내가 일부러 찾아 읽은 건 아니지만, 이 분이 쓴 몇 편의 글을 읽어보면서, 이 정도면 진짜 보수라고 할 만하군.(난 역시 직업 특성상 칭찬에 인색하다.)

   그러면서 의아스러웠다, 보수를 표방한 정부가 보수주의 경제학자에게 비난받는 현실이. 이 책을 읽고 이준구 교수의 도움을 받아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정부의 경제 정책은 전혀 보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흔히들 보수주의 경제 정책의 핵심은 시장 기능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하는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이 정부는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쓰고 있는가?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엔 시장 기능에 대한 믿음과 신뢰보다는 개발주의 시대의 ‘관치’의 냄새가 더 짙다.(미분양 아파트 사태 해결에 쏟는 정책들을 보라.) 반대로 그들이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책들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시장 기능이 왜곡되어 정상적인 시장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에 한정적인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공공 부문 민영화 계획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정부는 보수를 표방하는 정부(아, 물론 자기들은 ‘실용주의’ 정부라고 말했다만, 실용은 방법이지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을 받고 국정이념을 수정했다고 들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강변해봐야 이명박 정부를 ‘보수주의’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은 없지 싶다. 아, 가스통 할배들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답지 않게 정책의 변화가 너무 급진적이다. 모름지기 보수란 지켜야 할 가치를 고수하면서 점진적인 변화, 안정된 변화를 추구하는 이념이 아니었나? 그런데, 자고 일어나면 갑자기 ‘규제 완화’라고 해서 지금껏 학교에 있었던 200여 가지 규제(규제에 대한 오해도 있다. 규제가 나쁜 것은 아니다. 사회 환경의 변화를 따라 가지 못해서 불필요한 규제도 있지만, 그 규제가 생겨나게 된 배경을 꼭 생각해 봐야 한다.)를 ‘오늘’부터 싹 다 없애버린다는 정책을 발표하는 정부가 안정 속에 변화를 추구하는 ‘보수’ 정부라고 할 수 있나? 그렇기 때문에 이준구 교수는 이 정부의 정책에 대해 몹시 근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바꾸려고 달려드는 폼이 곧 초가집을 홀라당 태워 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럼 저들의 황당무계한 계획을 밀어붙이는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귀를 막고 일방적인 정책만 펴는 이유를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외부적 요인은 너무도 싱겁게 선거가 끝날 정도로 압승을 했다는 점이고, 내부적 요인은 국민에게 선택 받은 것으로 자기의 공약을 마음대로 실행할 백지수표를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요인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아무리 국민들이 바꾸라고 비판해도 ‘소귀에 경 읽기’ 마냥으로 밀고 나간다. (이준구 교수도 이젠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라는 기사를 읽은 것도 같다.)

   이 책은 지금까지 비판해 온 글을 묶은 것이다. 대운하를 비롯한 부동산 문제, 종부세 폐지, 교육 개혁…… 이 모두를 조금씩 엮어서 아마추어 정부의 1년이라는 장에 참여 정부의 문제점과 이명박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두 정부의 정책에 대한 간접적인 비교도 가능한데, (나의 오독誤讀일지도 모르겠지만) 참여정부의 경제 정책(교육 정책)은 대체로 큰 줄기의 방향은 옳았으나 ‘과욕’이 앞선 탓에 투박한 채로 그대로 밀고 나갔다가 기득권층과 수구 언론의 저항의 빌미로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고,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교육 정책)은 오직 부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낡은 사고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실패가 불을 보듯 뻔하다고 일갈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단적인 사례는 종합부동산세 폐지를 둘러 싼 논란에서 확인할 있는데, 참여정부가 도입한 종합부동산세(종부세)는 부동산 광풍을 잠재울 수 있는 바람직한 제도였으나, 종부세 부과 기준을 지나치게 낮게 정해서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점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반면에 이명박 정부는 종부세를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과세 기준을 상향하고, 세율도 대폭 낮추어서 가진 자들이 내야할 세금을 대폭 깎아주어 다주택 소유의 길을 터준 셈이다.(다주택 소유자에게 이런 부담을 덜어주면, 주택의 공급이 줄어드는 효과가 생겨서 결국 주택 가격의 상승을 불러온다.) 여기다가 헌법재판소의 세대별 과세에 대한 위헌 판결까지.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 경제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유능한 보수주의자의 걱정스런 경고에도 귀를 닫고 있는 이명박 정부. 그러면서도 ‘경제’는 자신 있다는 큰소리는 여전한데…… 그 공허한 큰소리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말하기엔 그들의 무능이 너무 도드라진 지난 1년 4개월이었다. 아울러 이준구 교수도 독자를 생각하며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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