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 그린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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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맞는 말이다. 이 책에 씌어진 대로 우리 교육은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를 절대화하는 교육이 아니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자본이 써먹기 좋은 인적자원을 대량생산해서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으며, 아이가 똑똑할 때 칭찬의 의미로 건네는 '영재'와 '인재'라는 말에도 학생을 '자원'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문제는 교육문제만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교육은 교육이라는 본질 자체의 목적도 있는 것이지만, 교육의 목적이 다른 사회 제도의 수단이나 방법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많은 사회 분야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면 아주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몇 년을 주기로 해마다 대학입학 제도는 개선을 거듭하지만 별다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대입제도가 개선되었다면 만족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이 늘어야할텐데 현실은 왜 그렇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건대 지금의 사회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는 어떤 대입제도를 도입하더라도 결국 실패할 것이다. 좋은 대학을 가면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고, 자신의 학벌이 좋은 직장과 자신의 출세를 보장할 수 있는데, 세상을 편하게 살기 위한 첫 관문(關門)인 좋은 대학에 누가 목을 달지 않겠는가? 바로 여기,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으로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 좋은 직장이 편안한 삶을 보장한다는 확신이 변해야 한다. 어떤 대입 제도를 만들더라도 좋은 대학을 들어가야 출세한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달라진 대학 입시가 결국 달라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입시에만 영향을 받는 학교의 현장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늘 나오는 이야기지만 공교육은 부실하다고 한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빠듯한 살림살이에 허리가 휘어져도 아이를 학원(사교육)에 보내야 한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학부모뿐만이 아니다. 심지어는 전임 정부의 교육'인적자원'부 수장조차도 학원선생님에 비해서 학교선생님들이 연구를 덜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내뱉은 적이 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교사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한마디로 냉소, 그 자체였다. 그 다음에 던져진 선생님들의 말씀은 학교와 학원은 목적이 다르지 않는가?하는 반문으로, 이름난 교육철학자 출신의 교육부장관의 발언에 답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공교육은 부실한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기 위해서 미리 밝혀두지만, 그 부실하다는 공교육의 현장에 있는 나는 '그렇다', '아니다'라고 말하지 못 하겠다.(물론, 유치한 내 식구 감싸기 차원은 아니다.) 학부모들의 입장에서는 공교육에 불만이 많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교육에 의존하게 되는 원인이 공교육의 부실 탓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이 모든 공교육의 내용과 제도를 대학입시가 좌우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공교육이 만족스러워도 남들보다는 나은 대학을 갈 수가 없기 때문에(모두가 만족한다면 모든 학생의 수준은 같을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또 다른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공교육에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의존하게 되는 원인이 공교육의 부실 탓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부터' 교육혁명의 강수돌 교수는 주로 노사관계와 노동시장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분이다. 독자들은 이런 경영학 교수가 우리 나라의 교육 문제에 관한 책을 썼다면 의아하게 여길 만하다. 그러나, 경영학과 교수답게 우리의 교육 문제를 교육만의 문제로 한정지어서 생각하지 않고, 교육의 문제를 교육과 관련된 여러 분야, 교육-노동-경제-사회 분야의 문제와 관련지어서 살펴보고 문제점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이런 점이 이 책이 다른 교육 관련 책과 가장 다른 부분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 교육의 문제가 가깝게는 대학으로 상징되는 학벌주의와 관련되어 있고, 학벌이 좋은 직장을 구하는데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왜곡된 사회구조의 문제와 닿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 교육의 문제를 교육내의 문제로만 해결하려고 한다면 다람쥐가 쳇바퀴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책에서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삶의 속살들을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목표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나부터' 교육혁명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경쟁하고, 경쟁자를 이기고-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경쟁자를 밟고- 높은 자리로 올라가면 우리의 행복은 그만큼 더 커지는 것일까 물어본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우리 학교 어느 반에 걸린 급훈이 생각났다. "태산을 넘으면 평원이 보인다." 제법 근사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이 급훈이 가지고 있는 함의(含意)는 생각할수록 아쉬움이 남는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태산을 넘어가는 과정이지 않은가? 더구나, 이런 구호가 학교에 걸려 있다면, 학생들에게 평원이 보일 것이라고 환상을 심어주기보다는 '정당하게', '최선을 다해서' 태산을 넘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일깨워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런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강수돌 교수의 방법은 '나부터' 교육에 대한 자세를 바꾸는 것이다.(그래서 제목도 '나부터' 교육혁명인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부터라도 교육 이념이 인간을 자원의 개념으로 보는 관점이 아니라, '학교가 스스로 책임성 있게 더불어 살아갈 인격체가 되도록 도와주는 공간'으로 바뀌어야 하며, 졸업 후의 우리 삶의 방식이 '돈벌이 경제'가 아니라 '삶의 경제'로 확립되도록 의식과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 궁극적으로 교육의 문제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해결책이 나온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강수돌 교수는 이런 자신의 생각을 가족들, 특히 세 아이와 함께 조치원 산골에서 실천하면서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달라져야 교육 혁명이라는 외침이 공허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느끼는 강수돌 교수의 해결책은 너무나 아득하다.(만약에 강수돌 교수가 조치원에 직장을 구할 수 있는, 그래서 조치원에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교육적 실천이 가능했을까?). 결국 이 모든 교육 문제가 교육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총체적 문제와 함께 풀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평범하게 살아가며 용기있는 실천이 부족한 나에게는 교실에서 매일 만나는 아이들에게 교육에 대해 다른 관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또 지금껏 '나부터' 달라진 사람들은 무수히 많았으나, 현실적으로 아직 그 힘은 미미하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 문제의 해결을 '나부터' 다른 관점으로 정한 것은 해결책의 전부(全部)이면서, 전무(全無)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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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이최고야 2004-10-08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기의 횟수를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의 추천 만으로는 부족하네요.

느티나무 2004-10-0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이십니다. 이건 염치 없이 덥석 받기가 좀 그렇네요. ^^

요하니 2004-10-13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을 알아 보시는 분 만나면 무조건 반갑습니다. 제가 만나기 어렵도다 뽑는다면
작은 것이 아름답다
생태적 경제기적
나부터 교육혁명
요렇게 세권일겁니다.

글샘 2004-12-1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교육이 부실한가? 부실하죠. 엄청 부실하죠. 학교에서 경쟁력있고 미래성 있는 무얼 가르치나요? 그런데 공교육이 부실한 이유는... 교사가 능력부족이라거든요. 근데, 그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사범대학에서 좋은 교사에 대해서 무얼 가르치나요? 그저 디립다 임용고시 준비해서 붙으면 선생이고 떨어지면 학원 강사고...

공교육이 질이 떨어지고, 학교가 해체되어 가는 건, 교사의 양성, 연수, 재교육 등 국가의 관리가 총체적으로 부실하기 때문에 빚어진 구조적 결과라고 생각해요.

느티나무 2004-12-2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께 여쭙습니다.



1. 공교육이 부실하다고 할 때 부실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2. 교사의 능력부족도 쉽게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임용고시 문제가 크기는 하지만요, 아직 10년차 정도의 교사들에만 해당되거든요. 근데 이 사람들의 '교육력'이 어떻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계속!!>

책읽어주는홍퀸 2005-02-0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키워드: 나부터 다른..^^ 존 글 잘 읽고갑니다..아,저 얼마전 가입한 사람이어요..첫인사드립니다요~서재 제목이 좋네요..사진두 멋지구요~그럼 또 놀러올께요~^^
 
향랑, 산유화로 지다 - 향랑 사건으로 본 17세기 서민층 가족사
정창권 지음 / 풀빛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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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살이 어느 때고 그 살아가는 모습이 혼란스럽고 과도기적이지 않았을 때가 있었을까? 2004년 지금도 우리 사회는 '호주제'를 둘러싸고 시민-여성 단체들과 유림들의 갈등이 첨예하고, 우리 나라의 이혼율을 두고 세계 최고 수준이라느니 그래서 가정이 해체되고 있다느니, 출산율이 너무 낮다느니, 너무 쉽게 이혼하는 경우가 잦아 이혼 조정 제도를 만들기로 했다느니……. 이래저래 말들이 많다. 아마도 정도의 문제겠지만, 어느 사회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이런 갈등과 혼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아마 17세기 조선사회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그랬던가 보다. 이 책을 볼 때 어쩌면 그 사회적 갈등의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언제나(?) 그렇듯, 17세기말에도 새로운 사회 문화적 흐름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삶은 변하고 있었으니. 아마 그 사회 문화적인 변화의 속도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 방식의 변화의 그것보다 빨랐는가 보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의 생각은 사회 문화적 흐름을 더 잘 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전 시대에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던 '이혼'이라는 상황과 '개가(改嫁)'의 문제로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났으니. 비극에서는 주인공의 성격적인 결함이 아니라면 시대와의 불화가 원인일 테니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당시 사람들도 변화하는 사회와 일종의 불화를 겪은 것이리라.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우리에게 조선 후기의 서민 열녀로 알려진 '향랑'을 통해 17세기 후반의 조선 사회, 특히 그 중에서도 조선 사회 가족 제도의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창문'(窓門)을 내어준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에는 '향랑' 개인의 비극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향랑'의 비극적인 생애가 안고 있는 조선 후기의 가족 제도와 가족 문화의 문제점을 이해하려는 것이 더 필요한 듯하다.
   필자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향랑'의 비극적인 생애는 계모의 악행, 아버지의 무능력, 가정 폭력, 이혼, 개가의 문제와 함께 이렇게 변화하는 시대 상황을 당시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문제도 오롯하게 담겨져 있다. 그래서 '향랑'의 죽음에는 '향랑'의 가족들-특히, 남편-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책임이 더욱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가 결국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양반층의 몰이해는 엉뚱하게도 '향랑'을 열녀로 만들어버렸다. 서민층에서는 너무 빨리 사회적 변화를 수용-여성의 개가(改嫁) 금지를 내면화하는 것을 보면-해서 자살에까지 이르렀는데, 양반들은 여전히 '향랑'의 자살을 열녀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사회적 몽매를 드러내었다. 

  天何高遠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    地何廣邈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가

  天地雖大     천지가 비록 크다하나               一身靡託     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구나

  寧投江水     차라리 이 강물에 빠져              葬於魚腹     물고기 배에 장사 지내리

   그러나 머리로 이런 사회적 의미를 분석하는 것보다 먼저 마음으로 와 닿는 것은 향랑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연민이다. '향랑'이 죽기 전에 읊조렸다는 백제 시대의 이 노래에 잘 담겨있듯이 그의 짧은 삶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아릿해진다. 가난한 환경이야 당시의 서민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환경이었을 것이겠지만, 악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찌되었든 '향랑'과는 성격이 맞지 않았던 계모의 존재와 계모의 눈치를 살피는 무능한 아버지, 그리고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파국으로 몰아넣은 그녀의 남편 '임칠봉', 또 향랑의 딱한 처지를 수수방관(袖手傍觀)하거나 개가(改嫁)를 종용하는 시부모와 숙부. 결정적으로 이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의식을 규정하는 사회적 시선과 관습은 여자의 이혼에 냉혹하기만 했다. 그러니 이혼한 여자인 향랑의 탄식처럼 '하늘과 땅이 얼마나 넓고도 아득했'을 것인가?

   이 책의 글쓰기 방식은 아주 독특하다. 필자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체 내용을 이야기로 전개하되 보다 깊이 있는 해석이 필요한 부분은 설명체로 전달하는,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적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호(好)·불호(不好)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괜찮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대중적인 글쓰기를 시도한 필자의 노력이 우선 반갑다. 아무래도 필자의 전공 분야가 아닌(?) 픽션 부분에서는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부족함을 설명체의 논픽션이 깔끔하게 만회하고 있는 것 같다.

   용기있는, 새로운 글쓰기 시도를 깔끔한 형태로 담아내었고, 향랑의 비극적인 생애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이 돋보이는 '향랑, 산유화로 지다'는 시대는 달라졌으나, 여전히 우리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창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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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5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느티나무 2004-10-0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을 때 님께서 추천하셔서 읽었답니다. 우선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보내시는 과분한 칭찬도 염치 없이 고맙게 받겠습니다. 님도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님의 리뷰도 제가 즐겨 읽고 있습니다. 건강하세요 ^^

비로그인 2004-10-05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보고 갑니다. 한문을 강독했던 날이 언제 적인지요. 아마 고 2땐가 봅니다. 이 글을 읽다 마치 진공 속을 날아 그 시간의 한때를 부유하는 듯 합니다. 잊고 있던 그 시간을 만났습니다. 한 표 보탭니다. 처음 인사 드리지요. 꾸벅.

느티나무 2004-10-0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신가 싶어서 님의 서재에 가 보았더랬죠. 근데, 제가 흔적은 남지기 않았지만 가 본 서재더군요. 페이퍼 중에 '작은이의 날적이'를 보고 알았답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또 염치 없지만 칭찬(?)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kleinsusun 2004-12-1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의 여성들,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을 읽고, 조선시대의 여자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책을 찾다가 님의 서재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아주 훌륭한 리뷰입니다. 남자분인 것 같은데(맞나요?ㅋㅋ) 이런 책을 만나시고, 또 향랑에게 연민을 느끼고, 아직도 호주제 폐지로 말이 많은, IT만 발달하고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꽁꽁 얼어있는 세상에서 님은 깨어있는 분인 것 같아요. 아름다운 리뷰입니다.

느티나무 2004-12-1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leinsusun님 반갑습니다. 보잘 것 없는 리뷰에 과분한 칭찬이시지만, 고맙습니다. 깨어있는 건 좋은 일인데, 별로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냥, 평범한 '청년'입니다. 좋은 도서관을 운영하고 계신가 보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얼어붙은 눈물
슬라보미르 라비치 지음, 박민규 옮김 / 지호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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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도 우리 나라 땅을 내 두 발로 조금은 걸어다닌 적이 있었던지라 '걸어 다니는 것'에 대해서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걸어다닐 때는 이름을 얻지 못한 길가의 꽃들이 더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시골마을의 한적한 모습에서 평화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징하게 끝없이 이어진 오르막길, 숨이 턱턱 막히는 아스팔트 그 길을 걸으면서 가야할 길만 생각하며 걸어다녔던 그 기억. 서너 번의 그 도보여행에 대한 기억은 앞으로도 내 몸 어느 구석에 박혀 있다가 누군가의 '걸어 다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되새김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걷는 길에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다면? 그 길이 인간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최악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라면? 그 길을 걷는 동안 같이 걷는 동료들이 죽기도 한다면? 늘 먹을 것이 부족하고 때로는 굶어 죽기도 할 수 있다면? 그 길을 걷는 기한이 단 며칠이 아니라 그 끝을 알 수 없다면? 이런 절망적인 여러 가지 질문에도 모두 '좋다'라며 길을 떠난 일곱 사람이 있었다. 길을 '떠났다'라기보다는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라는 게 더 상황에 맞는 설명일 것이다.

   폴란드 기병 중위였던 슬라보미르 라비치는 1941년 러시아 군에 의해 붙잡혀, 러시아 법원에 의해 '간첩죄'와 '적대행위' 혐의로 시베리아 강제노역 25년형을 선고받고, 북극권 근처의 303수용소로 이송된다. 라비치가 재판을 받기 전까지의 상황은 서준식의 '옥중서한'에서 읽은 장면과 비슷하기도 하고, 김동원 감독의 '송환'이라는 영화의 장면과 자꾸 겹쳐져서 읽는 내내 괴로웠다.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쿠까지 이송되는 기간의 그 고통스러운 장면은 또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연해주에 살았던 고려인들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르쿠츠크가 끝이 아니었다. 이르쿠츠크에서 1600킬로미터를 걸어서 레나 강의 북쪽에 있는 303수용소에 도착하는 길은 그야말로 짐승처럼 쇠사슬에 묶여 추위와 맞서 싸우며 걸어야 했던 고통의 길이었다. 그렇게 걸어간 기간이 무려 두 달이었다. 재판 전 고문을 당하면서 오직 살아 있는 것, 살아서 자유를 찾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이유였던 라비치는 험난한 이송 과정에서 자유에 대한 열망을 더욱 키워가게 되었고, 수용소로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오스탸크인(일종의 에스키모인들)을 통해서 '수용소 탈출'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수용소에서 '체력'을 회복한 라비치는 탈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함께 탈출한 여섯 명의 동지들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라비치가 탈출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은 라디오 고치는 것 때문에 알게 된 '수용소의 소장 부인'이었다. 수용소 소장 부인의 도움으로 눈보라가 치는 어느 날 겨울밤, 라비치를 포함한 일곱 명은 303 수용소를 손쉽게 탈출했다. 그리고는 끝없이 이어지는 질주. 일곱 명은 추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용소에서 가급적 멀리 달아나야만 했고, 쫓는 자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은밀히 숨어다녀야 했다. 

   수용소 부근을 벗어나자 이번에는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일곱 명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나, 극한의 생존 상황에서도 남의 물건에는 손대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가며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들은 러시아의 추격이 미치지 않는 '인도'까지 걸어가기로 했는데, 몽골의 국경을 넘어 내려가서 맞닥뜨린 내몽골의 고비사막과 티베트를 지나 인도로 넘어가기 전에 만나 히말라야 산맥은 자유를 찾으려는 그들에게는 최대의 '고비'였다.

   고비사막은 사막에 들어가는 줄로 모르고 들어선 탓에 더위와 굶주림으로 함께 탈출한 동료들을 잃으며 절망하기도 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쓰러지기 직전에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뱀'까지 잡아먹으며 먹을 것을 해결하기도 했는데, 마지막까지 포기하기 않고 걸었기 때문에 결국 고비사막을 벗어날 수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과정도 감동적이었다. 이번에는 다시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몹시 고통을 겪게 되었고, 산맥을 넘어 내려오다가는 지금까지 함께 했던 동료, '팔루호비치'를 잃게 되었다. 라비치는 그 부분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랫동안 주위를 서성거렸다. 참변은 너무나 급작스러웠고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제까지 우리와 함께 했던 팔루호비치는 이제 없는 것이다. 그가 죽을 거라고 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다. 강인하고 헌신적이었던 팔루호비치 상사는 그렇게 우리를 떠났다.
  '결국 이렇게,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죽기 위해서 그 먼 길을 왔단 말인가' 스미스 씨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의 죽음에 상심했다. 일행 중에서 나이가 많던 둘의 우정은 남달랐다."

   팔일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로 그들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처음 탈출할 때부터 가고 싶어했던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에서 만난 영국군을 통해 이들의 기나긴 탈출 행적이 알려지고, 드디어 살아남은 네 명은 '자유'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탈출 과정에서 겪은 심각한 정신적 상처로 한 달 동안이나 혼수 상태를 겪기도 한다.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누구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라비치가 탈출하자고 제안했을 때 라비치와 친했던 그레히넨은 '눈과 추위 때문에 어디든 가기 전에 얼어죽을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했고, 라비치가 청년들에게 농담처럼 탈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부들부들 떨며 달아나 버렸던' 이 무모한 계획은 무엇을 위해 시작되었을까? 나는 라비치에게 , 어리석겠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다. 라비치 당신은, 고비 사막과 히말라야 산맥의 경험을 다시 하게 된다고 해도 '자유'를 찾아 탈출하겠느냐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아직 직접적인 신체의 자유를 제한 당한 경험이 적어서 그런지, 이 자유에 대한 가치가 극한적 상황을 뚫고, 목숨을 걸만한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자유의 가치를 논하기에 앞서 내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만 하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누리는 자유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 온 누군가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라비치와 그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

   자유를 찾아 극한의 자연환경을 극복한, 진정한 인간 의지의 무한함을 보여준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진 이야기'라는 역설적인 부제가 달린 이 고통스러운 실제 이야기는 자유를 찾아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이 책도 그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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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 생명의 온기 가득한 우리 숲 풀과 나무 이야기
이유미 지음 / 지오북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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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 잘 받았습니다.

  좀 늦은 편지지만 -2002년 4월 1일부터 2004년 2월 22일까지의 편지였으니 늦은 셈이지요- 고마운 편지 잘 받았습니다. 저는 유난히 더운 이 한 여름에 편지를 읽게 되어, 편지에서 나오는 청신(淸新)한 기운이 제가 이 무더위를 견디는데 아주 큰 힘이 되었습니다. 또 이 편지에서는 나무의 맑은 기운뿐만 아니라, 편지의 끄트머리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시는 나무처럼 넉넉한 말씀도 함께 담아 주셔서 더욱 좋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보내주신 이 편지로 아주 유식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근무하는 직장에서는 커다란 석조에다 부레옥잠 키우기 시작했거든요. 저도 부레옥잠이 수질정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도 모를 정도의 청맹과니는 아니지만, 부레옥잠의 고향이 열대 아메리카라는 것, 꽃잎이 봉의 눈동자를 닮아 '봉안련(鳳眼蓮)'이라는 별칭이 있다는 것, 고향에서는 여러해살이 풀이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한 해 밖에 살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겨울 부레옥잠이 죽으면 축적된 오염물질이 다시 그대로 물로 흘러 들어가 물의 오염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답니다.
  이 더운 여름에 보충수업을 지겨워하는 아이들에게 슬쩍 '부레옥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얘들아, 며칠 전에 현관 앞에 못 보던 꽃(원래는 풀이라고 해야하지만)이 있던데, 봤나?' 그러면 아이들도 '부레옥잠' 정도는 압니다. ''부레옥잠'이 어떤 역할을 하는 줄은 다 알지요?'아이들이 모두 '수질정화요'. 여기까지 오면 이제 이 편지에서 읽은 내용을 쭈욱 풀어서 설명하면 제가 어느새 '유식쟁이' 생물 선생님이 돼 있답니다.

  게다가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에서 들려 준 다양한 식물들의 생존 전략, 환경 적응 방식 등을 대할 때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놀라운 식물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아 나태하고 게으른 제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제 주변의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가 그냥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경쟁과 환경에 발빠르게 적응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임을 마주할 때 느끼는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고 늘 부족한 환경을 탓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짜증이고, 추워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차가운 날씨를 탓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연 속의 식물들은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자기의 환경 속에서 생존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 가는 것, 번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 그래서 식물의 '생식 기관'인 꽃은 더욱 아름다운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꽃잎 한 장 한 장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요즘입니다. 국화꽃은 아닐지라도 저 꽃 한 송이, 나뭇잎 한 장이 피기 위해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우는' 정도로는 아무래도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일하고 계신 곳의 나무들은 이 무더위를 좋아하겠지요? 이 여름을 묵묵히 견디면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고 있을 테지요? 저도 언젠가 꼭 한 번은 그 곳 숲의 나무들을 만나러 갈 계획입니다. 만나면 이번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마도 나무들이 나직하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도 같습니다.

  제가 숲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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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4-08-17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저번 리뷰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조금 상심했었다. 그래서 리뷰 쓰는 게 심드렁했었는데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근무하는 직장은 흔히 말하는 '새도시' 가운데에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기는 낙동강 주변의 평범한 논밭이었으나 얼마 전부터 어느새 아파트가 한 채 두 채 들어서더니 여기 저기에 아직도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어, 이제는 아파트가 숲을 이루어버렸다. 그러니까 이 '새도시'에는 10차선의 주도로를 중심으로 교차형 도로가 만들어졌고, 이 도로변을 중심으로 하나도 예외 없이 사각형의 빌딩들이 매끈한 얼굴을 하고 줄지어 서 있다.

   내 하루 일과의 거의 대부분은 이 반듯한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출근할 때는 늘 이 낯선 '새도시' 아파트 숲을 지나면서, '이 아파트는 건물의 공간을 넓히고 큰 나무를 제법 많이 심어서 아침엔 새소리도 들리네? 역시, 돈이 좋기는 좋구나. 이렇게 새들까지 아파트 숲으로 불러모으고……. 이 아파트는 이런 새소리 때문에 더 비싸겠군, 건축가의-혹은 건물주-작전이 좋은 걸', '이 동네 상가 건물들은 왜 이렇게 모두 네모난 거야? 좀 다양하게 만들면 안 되나? 이러니 이 동네 지리를 낯선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힘들지. 모두 똑같이 생겼으니...', '우와, 저 건물들에 달린 간판들은 참! 알록달록하게 화장한 피에로처럼 생겨 먹었네. 그나마 멀쩡한 건물 다 망쳐놓고 있군' 나도 누구나 이 '새도시'의 아파트와 상가들을 보았으면 던질 것 같은 한 마디 불평을 빼놓지 않고 던지곤 한다. 이번에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를 읽고 나서, 나는 이런 하나마나한 불평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 책을 시작하는 말에는 "감상은 정확한 눈을 필요로 한다. 이 정확한 눈은 적극적인 관심에 의해 갖추어진다. (중략) 우리가 건물을 보고 좋다, 혹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기 위해서도 우리의 머리 속에 판단 기준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많은 건물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것을 통해 길러질 것이다. 꼼꼼히 들여다보는 작업의 단초를 제공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건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모든 속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실 그 자체이다. 그러나 건축가들이 이 현실적 도구를 통하여 만들어 내려는 '결과치'들은 벽돌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아니다. 건축가들이 진정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부분은 그 너머에 있다. 건축은 인간의 정신을 담는 그릇을 만드는 작업임을 알리기 위하여 이 책은 쓰여졌다. 건축은 벽돌과 콘크리트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책에서 이야기할 결론이다.(20쪽)"이라며 건축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건축(행위)은 글쓴이의 말처럼 정확한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는 다르다. '건축은 엄청난 양의 물리적 자원과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이해관계가 연관되어 진행되는' 현실적인 작업인 것이다. 따라서 건물에 대한 책임(찬사까지도)은 온전히 건축가의 것만이 아닌 것이다. 한 건물은 건축가와 건물주, 실제로 건물을 지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건물의 재료와 자원, 그 건물이 들어설 공간적 배경, 더 넓게는 좋은 건물을 판단하는 문화적(건축적) 잣대까지도 한 건물의 책임과 찬사를 함께 나누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직장 근처의 건물들을 보며 내 책임-동시대인으로서-도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 보려고 한다. 아니, 스스로에게 이런 못난 건물에 대한 불평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내가 건물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책을 쓰는 목적에 맞게 읽는 이가 건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게 쓰여졌다. 글은 건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따라 점>선>비례>상자(원통)>공간으로 확대되고 있고, 흔히 쓰이는 건축 재료인 벽돌, 돌, 콘크리트, 유리, 철, 나무, 유리에 따라 건물의 느낌이 달라진다는 점을 사진과 함께 보여주고 있어서 독자들이 이 책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건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볼 수 있는' 연습을 할 수 있다.

   이렇듯 감상은 정확한 눈이 필요하고, 정확한 눈은 대상(건물)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것을 통해서 길러지는 것이라는데 나는 내 주변의 건물들을 얼마나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나를 물으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속된 말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건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이렇다 저렇다' 어줍잖게 떠들었던 것은 아니었던지……. 조금 더 빨리 이 책을 만났더라면 좀 더 애정을 가지고 건물들을 살펴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늘 출퇴근하는 것은 여전히 '새도시'이다. 지금도 그곳에는 새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고, 오늘도 콘크리트 상가 건물은 올라가고 있으니 내가 이 도시의 건물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일만 남은 셈이다. 내일부터 이 도시의 건물은 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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