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 "선택은 없다! 햇빛 에너지에 열광하라"
강양구 지음 / 프레시안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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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는 청소년, 일반 독자들이 지구 에너지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만만하지 않다. 더구나 대부분의 책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생각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려고 한다면 더욱 더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그런 책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행동이 쉽게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간디의 물레’를 읽고 그랬나, 아니면 ‘녹색평론 선집1’을 읽고 그랬나, 아무튼 그 책을 읽고 나서 자동차를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래봐야 내가 조금이라도 필요하다고 느낄 땐 아버지의 낡은 자동차를 서슴지 않고 빌린 적도 많았기 때문에 내 결심은 ‘눈 가리고 아웅’했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눈 가리고 아웅’조차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그 낡은 자동차로 요즘 나는 매일 출퇴근을 한다. 요즘이라고 말하기엔 솔직하지 못하다. 벌써 1년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운동을 위해서, 환경을 위해서, 자전거를 사야지, 걸어 다녀야지, 좀 심심하다 싶으면 이런 결심이 불쑥 솟구치고 하지만 며칠 후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내 몸은 편리한 자동차에 이미 중독이 되어 버려 자동차를 내버려두지 못한다.

   작년부터는 집에 어린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에어컨도 사다 놓았고, 조금만 더워도 문을 꽁꽁 걸어놓고 이 여름을 지낸다. 무신경한데다가 귀찮다는 이유로 쓰지 않는 가전제품의 플러그를 뽑아두는 경우도 거의 없다. 전등이나 컴퓨터, 냉장고, 선풍기, 가스레인지…… 어느 것 하나 생활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풍족함을 누리며 산다.

   지난 며칠 동안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를 읽고 다시 한 번 내가 누리는 에너지의 풍족함에 대해 생각한다. 책을 덥고 되짚어 이제 3년 남았다는 강양구 기자의 경고가 머릿속을 맴돈다. 3년이라…그런데 정말 3년 후엔 세상이 확 달라져 있을까? 실감이 나지 않는다. 기자가 계속 경고했듯이 유독 에너지 위기에 천하태평인 우리나라에 사는 무신경한 독자의 한사람이라 그런가, 싶기도 하고, 그 위기가 너무 코앞인 3년 후라는 점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한다.

  ‘고유가, 앗뜨거’
  정부, 원전 비중 낮추고 신재생에너지 늘리기로 

   정부가 2030년까지의 원자력 발전설비 비중을 애초 37~42%에서 36~41%로 1%포인트 하향 조정하기로 했다. 대신 신재생에너지 보급률은 2030년까지 애초보다 2%포인트 높은 11%로 늘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추가로 필요한 원전도 9∼13기에서 7∼11기로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원전 추가 건설에 따른 안전성과 부지 확보 문제로 논란이 예상된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하 에경연)의 ‘국가에너지 기본계획안’은 2030년 원전 설비 비중을 지난해 기준 26.0%에서 2030년까지 36~41%로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에경연은 지난 6월 1차 공개토론회에서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이 지난해 말 작성한 2030년 유가전망(배럴당 100.1달러)을 토대로 원전 설비 비중을 37∼42%로 제시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초고유가로 에너지정보청이 유가 전망을 배럴당 118.7달러로 상향 조정하자 이날 토론회에서는 원전 비중을 36∼41%로 수정했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고유가가 지속되면 에너지 총수요가 줄어들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커지게 된다”며 “이에 따라 원전 비중이 낮아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에경연은 1차 토론회에서 2030년까지 신고리 3, 4호기(140만㎾급) 수준의 원전이 9∼13기가 더 필요할 것으로 추정했으나, 이번 수정안에 따르면 필요한 추가 원전은 7∼11기다. 추가 원전 건설을 위해서는 신규 부지 조성과 사용 후 연료 임시저장시설이 더 필요하다.
   이에 대해 환경단체에서는 원자력 비중 확대보다 에너지 수요관리 강화와 신재생에너지 확충 등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논란이 불가피하다.
   정부는 13일 공청회를 거쳐 이달 말께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가에너지위원회에서 최종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용인 기자, 2008.08.08, 한겨레신문」

   며칠 전에 신문을 뒤적이다 발견한 기사에 평소와는 달리 눈길이 갔고 잠시나마 생각이 머물렀다. 평소 같으면 잘 읽지도 않고 넘겼거나, 읽어도 그런가 보다 했을 기사인데, 이번에는 ‘아톰의 시대에서……’를 읽은 덕분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11%로 늘리려는 목표는 여전히 미흡(알고는 있었지만, 11%라고 읽었을 때는 ‘겨우?’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방향은 옳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이러한 ‘당위’를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데, 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이 말엔 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이 기존 에너지기업들의 외부효과까지 고려한다면 저평가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소규모 재생에너지의 생산만으로는 재생에너지의 보급과 확대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을 높여 대규모의 사회적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느냐도 중요하겠지만, 누리는 에너지 소비의 혜택은 조금도 줄일 생각은 하지 않고, 재생에너지의 중요성에 대한 당위만 강조하는, 나 같이 평범한 시민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행동할 때 에너지 위기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을 해 본다.

  왜 우울한 예측이냐고? 몸은 이기적이어서 쉽게 편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니까! 그날 읽던 신문에 저 아래의 만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굳어졌다.

건강해야 되는데[홍승우, 2008. 08.08, 한겨레신문]

   저 만큼 실천하기란 어렵다. 그래도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해야 하니까 굳이 희망적인 징후를 좀 짚어보자면,

1. 얼마 전에 ‘환경스페셜’(KBS1)에서 다룬 에너지 자급자족 실험을 했던 민들레마을 편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힘들겠지만 저런 실험이 있다면 재미있겠다고, 참여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들기도 했다.

2. 요즘 들어서 낮에 전등이 켜진 것에 조금 신경을 쓴다. 아울러 냉장고 문이 오래 열려 있어 ‘삐’ 소리가 나면 마음이 아주 초조해진다. 전화기 충전기라도 사용하지 않을 때는 빼놓으려고 애쓴다.

3. 자동차 문제가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당장 해결하기는 어렵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조금씩 사용을 줄여 보자는 결심은 섰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일이 제법 잦아졌다.

   그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이다. 남들은 보잘 것 없다 하겠지만 나는 그래도 지금은 이게 다에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참, 가야할 길이 멀다. 이 책이 좋은 길잡이에, 먼 길을 함께 가는 좋은 벗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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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문지 푸른 문학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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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이었고, 난 그 때 고 3이었다. 정신없이 공부에만 몰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달 앞으로 다가온 학력고사를 앞두고 선지원(先支援)할 대학교를 고르기 위해 일주일 간격으로 네 번 치는 배치고사는 한 달도 남지 않았기에 내 마음에도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해는 수험생도 역대 최다라고 떠들어대서 수험생들 모두가 다른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10월 9일로 기억하는데(아니면, 10월 3일이었을 것이다.), 휴일이었지만 학교에 나와 자습한답시고 교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 날은 여느 휴일과 분위기가 확 달랐다. 고등학교 정문 근처에 전투경찰부대가 한동안 쫙 깔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 3이던 그해는, 6월 항쟁이 있던 그 다음해였으니까 전투경찰이야 텔레비전 속에서 익숙했지만, 이런 변두리 고등학교에서 전투경찰을 보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얼마 있다 전투경찰 부대가 사라지자 술렁였던 학교도 이내 아무 일 없는 듯이 평온해져서 나는 운동장에서 농구공을 던졌다.

   다음날, 등굣길도 여느 날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우리 반 교실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모두들 모여서 웅성웅성. 내 자리에 가방을 던지고 앉기도 전에, 아이들의 어깨 너머로 들리는 소리 -- OO이가 잡혀갔다더라. 아니다, OO이는 집에 있는데 학교를 못 나온다고 하더라. 학교에서 못나오게 했단다. 교육청에서 퇴학, 아니 제적시키라고 학교에 요구했대. -- OO이는 우리 반 반장이었고, 나와는 단짝은 아니었지만, 꽤 친했던 친구였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린가? 아니, 왜? -- OO이가 부고협(부산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활동을 했는데, 어제 부산대 도서관 앞에서 ‘성명서’를 발표했대. 교육청에서는 고등학생이 (허락 없이) 집단행동을 하고 또 ‘성명서’의 내용도 문제 삼아서 징계하기로 했다더라. 어제 전경이 우리 학교에 온 건 그 ‘성명서’ 발표를 우리 학교에서 하기로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래.

   이날부터 ‘OO이 징계 반대’를 내걸고 수업 거부 돌입. 전교생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첫날 오전은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였다. 오후가 되자 1,2학년은 교실로 들어가서 수업을 받았다. (총학생회에서 들여보내기로 결정했는지, 선생님들 때문에 아이들이 들어갔는지, 당시에 평범한 학생이었던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하루를 3학년만 운동장에 남았던 거 같다. 다음 날이 되자 3학년 이과 반도 수업을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문과 반 네 반만 그렇게 하루를 더 버텼다. 사흘째가 되자 우리 반만 빼고 세 반은 수업을 했다.

   우리 반은 책상을 뒤로 돌려놓고 앞문을 잠그고 교실에 앉아서 자습을 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미리 알고 우리 교실로 올라오시지 않았다. 어쩌다 오신 분들은 ‘이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이미 상처받은 우리 마음엔 그 말씀이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책상을 돌리고 일주일을 더 버텼다.(그러니까 우리는 열흘 동안 ‘파업’ 했다.)

   그 사이에 형사가 자주 학교를 다녀간다는 무서운 소문도 들리고,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이 교무회의에서 ‘OO이 징계’가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시면서 학교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고, 그사이 ‘OO이의 제적’이라는 징계가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란 우울한 소문도 바람을 타고 교실 문턱을 넘어왔다. 조금 더 자세하게, 학교는 교육청에서 결정한 일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교육청은 학생의 징계는 학교장의 권한이라는 뻔한 소리로 ‘나 몰라라’한다는 소문도 이내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치를 떨고 분개했던지!

   아니, 우리는 누가 만들어내는지 알 수 없는 그 소문이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그 때마다 아이들이 난상토론을 벌였고, 열흘 째 되는 날 오후에 학생들의 투표로 다음날부터 수업 복귀를 결정했다. 수업에 찬성한 학생이나 반대한 학생이나 아무도 수업 복귀 결정에 대해서 좋아하는 학생은 없었다. 그냥, 부당한 힘에 졌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했다. 나도 학교와 선생님이 싫어졌다. 그때는 세상 모든 게 그냥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싸움을 통해 학교 밖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옳고 그름이 너무나 분명한 싸움에서도 이렇게 지는구나, 하는 그 쓰라린 경험은 어린 나에게 적개심을 넘어 공포감, 그 자체였다. 단 한 번의 싸움에서 진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기운을 잃어버렸다. 변명 같지만, 그 이후로 대학을 다닐 때 자주 일어난 시위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가 분명 옳은데도, 싸움에서는 질 수 밖에 없다는 그 절망감을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고백하자면, 지금도 나는 사소한 싸움이라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다음 날부터 수업은 시작되었으나 그 어느 선생님도 그 열흘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일로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을 그만두셨고, 우리 반 아이들은 진학 상담을 낯선 선생님과 해야만 했다.(사실, 선지원시험제도라 입시 상담이 아주 중요했는데 다들 혼란스러워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담임선생님으로선 그게 최선의 길이었다고 믿는다.) 그래도 우리는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고, 입학하기 전에 딱 한 번 담임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 댁을 찾아간 기억은 또렷하나 다른 내용은 흐릿한 것으로 보아, 그 자리에서 'OO이‘ 이야기는 거의 안 나왔지 싶다. 그만큼 우리에겐 상처가 깊었다.

   졸업을 하게 된 우리는 더 이상 그 얘기를 하지 않았고, 그렇게 모든 게 잊혀진 것처럼 보였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그냥 잊고 살았을 것이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다 사범대에 진학했던 내가 몇 년 전에 모교에 발령을 받았다. 모교에 발령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이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0년 10월의 어느 가을날의 그 사건이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그 때 싫었던 그 학교의, 싫어했던 그 선생 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 때 친구들에게 미안했던 기억이 계속 남았던 것일까? 난 해마다 아이들에게 최시한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읽기를 권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우리 반 아이들! 어디 가서 무엇을 하더라도,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과 관련해서 남은 이야기 둘!

하나) 이 책, 아름다운 아이들을 처음 만난 게 벌써 10년 전이지 싶다. 대학 동기였던 OO이랑 도서관 서가를 훑다가, 녀석이 ‘우리의 교육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책’이라며 권해준 책이다. 며칠 후에 그 책을 사서 읽고, 난 앞에 쓴 글처럼 고등학교 때 우리 반 아이들을 떠올렸고, 한동안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왜냐 선생’처럼 멋있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꿈도 꾸었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꿈’같은 이야기이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해마다 나는 마음을 나누고 싶은 동료교사를 만나면 늘 이 책을 선물로 건넸고, 이제는 같이 책읽기 모임을 하는 아이들에게 여름방학 캠프에 가서 읽고 토론하는 책으로 정해 두었다. 이번 여름도 예외는 아니어서, 얼마 전에 캠프에서 이 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네 안의 구름그림자는 어떤 것인가? 허생과 왜냐 선생, 선재와 윤수의 관계는 어떠한가? 반성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들!

둘) 이번 동아리 캠프를 가기 위해 교장샘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내가 평소에 ‘어떤 책’을 통해서 학생들을 ‘의식화’시키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는 투로 얘기하셨다. 이번 캠프에 가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시길래 이 책,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을 읽고 토론할 거라고 했더니, 책 내용이 어떤 거냐고 묻고, 이 책을 쓴 작가의 다른 작품도 물으셨다. 이럴 땐 정말 황당해서 말도 잘 안 나온다. 자신 있게 책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했다. 교장실을 나오면서  학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은 교육민주화 운동이 활발하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우리 교육 현실의 문제점을 담아내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건 소설이 그리고 있는 현실과는 10년 정도 지난 1997년 즈음이었다. 그 때는 10년 정도 지났으면 좀 나아졌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오늘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있노라면 학교의 현실은 그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고, 20년 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니, 오히려 입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풍경한 모습이나 아이들을 옥좨는 풍경은 그때보다 더욱 잔혹하다.

   내가 아직도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다. 내가 좋아하는 동료 교사들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는 이유다. 빨리 이 책에서 벗어나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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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7-28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는 정말 극우의 인간들이 버글거리는 곳이죠. 건전한 보수조차도 별로 없는... 조중동 스러운 인간들이 교장이 되는... 정말 희망이 있는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ㅠㅜ 우리 학교엔 촛불 드는 애들도 없는 거 같긴 한데... 아이들이랑 독서팀 꾸리는 일도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두려울 때도 많습니다. 90년이면, 학교는 완전히 우경화되어 전교조 이야기도 못 꺼내던 때죠. ㅠㅜ

느티나무 2008-07-29 08:50   좋아요 0 | URL
학교 뿐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생각해 보니 교장이 더 심한 말도 했던 거 같네요. -선생님 말씀이 애들 인생을 좌우한다, 애들이 평생 후회할 수도 있다. 90년의 우리 학교는 달랐어요. 전교조샘들이 참 많았어요. 학교 분위기도 자유롭고 좋았던 거 같은데...

심상이최고야 2008-07-28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년 전 고등학생은 지금 대학생보다 의식 수준이 높네요. 수능 한 달 전 수업 거부라!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때 선언문을 발표한 그 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살고 있을까요? 아이고... 신산했을 삶을 떠올리니 마음이 짠해지네요.

느티나무 2008-07-29 08:52   좋아요 1 | URL
그 학생, 검정고시를 거쳐 지금 OO여고에서 기간제 국어교사로 있어요. 그 전에 있던 학교에서 실컷 부려먹고 정식으로 발령내기 직전에 다른 사람을 뽑았다더군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해야할까요?ㅋ

AHN♥ 2008-08-06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나서 선생님께서 왜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하셨는지 알것같아요.
선생님께서 이런 경험을 하셨다니,,, 내가 만약 그당시 선생님 반의 학생이었다면 선듯 수능한달전에 열흘동안 수업거부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교장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도 많이 어이없네요.

느티나무 2008-08-06 13:20   좋아요 0 | URL
이참에 아예 가입을 했군요.^^ 시간이 안 나겠지만, 가끔이라도 여기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 교장샘 얘기는 여기서 그만~!ㅋ 그 땐 할 수 없었어요. 그럴 수 밖에. 아마 모레쯤 그 친구를 만날 거에요.ㅎ
 
글쓰기 생각쓰기
윌리엄 진서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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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휴! 도저히 못 쓰겠어요.”
   “선생님, 이거 안 하면 안 돼요?”
   교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불평 소리. 기껏 네 다섯줄이나 될까 하는 짧은 문장을 적어 보라는데 금세 터져 나오는 아우성이다. 그래도 이런 불평이나 터트리면 좀 나은 편이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몰라 멍하게 앉아 있는 학생들이 더 많다. 시간이 좀 지나도 멍한 표정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처럼 손도 못 대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는 사실에 끙끙대던 녀석들도 손을 놓아버리고 만다.
   요즘 내 수업시간에 자주 벌어지는 풍경이다. 2학년 문학 수업 시간에 문학작품의 수용 과정이라는 단원을 배우고 있는데, 이 단원의 맨 마지막 수업 내용이 작품의 창조적 재구성과 내면화를 연습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교과서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 내용을 재구성해 보거나 시를 읽고 자신의 느낌을 곁들여 비평하는 짧은 글짓기 시간이 주어지면 아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가 이내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숫제 하소연이다. 자기 생각을 글로 써 볼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고, 슬쩍 수능 공부에 실제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말도 보탠다. 이걸로도 통하지 않으면, 기말고사에 오늘 쓴 글쓰기도 시험 문제로 나올 수 있다는 점을 흘린다. 이 말이 끝나도 교실의 반 정도 학생은 멍한 상태, 그대로이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경력 10년차. 신임 국어교사 티를 벗어나고 있는 나는 아직도 아이들의 글쓰기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시간이 한참 더 지나도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나부터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을뿐더러-익숙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글쓰기 과제는 꼭 피하고 싶은 청소구역 당번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다.-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이런 생각을 하니 도대체 대학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글쓰기 수업을 할 때 글의 시작은 어때야 하는지, 마무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실제 글을 가지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학생들이 실제로 연습해 보도록 가르치기가 아주 어렵다. 아울러 자신들이 쓰려는 모든 글에 일관되게 담겨야 할 글쓰기의 자세나 태도를 가르치거나, 여러 가지 형식의 글을 쓸 때 꼭 필요한 각각의 특징을 이해하게 하고, 기능을 연마하게 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꼭 이런 문제의식으로 이 책을 고른 건 아니었다. 제법 오래 전에 내 서재이웃인 ‘순대선생’님께서 이 책을 극찬했던 리뷰를 읽고 나서 당장 이 책을 샀었다. 그렇지만 내 머리의 말을 잘 듣는 내 손이 그때 같이 샀던 읽기 편한 책들을 항상 먼저 골라 들어서, 이 책은 내 책장 한 곳에 꽂혀있기를 벌써 몇 달!(그런 책이 꽤 많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올해는 책장에 묵혀둔 책을 좀 읽자는 결심으로 펼친 책이다.

 *


    3월 중순부터 거의 두 달 동안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를 띄엄띄엄 읽었다. 내가 쓰고 나서보니 이 첫 문장은, 혹시나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들에게 전혀 놀라움을 줄 수 없는 죽은 문장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은 탓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앞 문장에서 어떤 단어를 골랐든, 앞으로 내가 어떤 글을 쓸 때마다 이 책의 내용이 가물거려서 내 둔한 머리 수준을 탓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윌리엄 진서의 이 책을 통해 나는 좋은 글쓰기의 핵심 요소가 명료함, 간소함, 간결함, 인간미(154쪽)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글쓰기에 있어서 명료함이란 자기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이 이 글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간소함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글쓰기 자료를 자기가 쓰는 글에 쏟아 부어 만들어나가지 않는 것이다. 또한 어떤 영역의 글이든 작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글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간결함은 모든  문장에서 가장 분명한 요소만 남기고 군더더기를 걷어내어서 표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미. 인간미는 아무리 딱딱한 글이라도 결국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인간일 수밖에 없는 작가의 목소리가 글의 문체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 책은 또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을 전해준다. 앞에서 말했던 글쓰기의 이런 기능을 익히는 것보다 진짜 글쓰기를 좋아하고, 자기가 쓰는 글의 내용에 대해 관심과 흥미, 애정을 갖는 것이 더 좋은 글을 쓰는 데 더욱 필요한 자세라는 것을 말이다.

   중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쓴 책은 아니지만, 교사들이 이 책을 곁에 두고 글쓰기 지도에 활용한다면 학생들이 어떻게 글을 시작하고 내용을 채워 넣고, 마무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히 학생들이 쓴 글에 대해서도 제대로 평가를 내리고, 평가 결과에 대해 일관되고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도 가능하다.

「뱀발」

   교사 자신이 글쓰기를 좋아하고, 평소에 자주 글을 써보는 것보다 좋은 글쓰기 수업 준비는 없다는데, 나는 리뷰 한 편 쓰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니, 참……! (선생 노릇 제대로 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그러니 수 백 편의 리뷰를 쓴 사람들이 부럽다고 해야 하나, 두렵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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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이최고야 2008-05-24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을 읽고 써서 그런지 리뷰가 재미있으면서 지루하지 않네요.ㅋㅋ 좋은 글의 요건이라는 명료함, 간소함, 간결함, 인간미가 두루두루 갖춰졌네요!
 
신갈나무 투쟁기 - 새로운 숲의 주인공을 통해 본 식물이야기
차윤정.전승훈 지음 / 지성사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두 번째 읽은 신갈나무 투쟁기! 나는 책을 정독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어떤 책을 한 번 읽고 난 후 책장에 꽂아두고 돌아서면 책의 내용이 캄캄해질 때가 잦다. 거기다가 읽은 지 좀 오래되기라도 했다면 정말 아! 저 책, 읽었지, 하는 것만 남아있지 구체적인 내용은 다 날아가 버리고 없다. (그러면서도 대충 읽은 걸 가지고 아는 티를 팍팍 내고 다닌다.)

   “이 책은 철저하게 나무의 관점에서 씌어졌다.” 라는 말이 그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나 보다. 아니 눈으로는 읽었으되, 내 마음에까지 가닿지는 않았나 보다. 이번에 새로 읽으면서 나무의 관점으로 씌어졌다는 걸 충분히 이해했다. (마음으로 느꼈다, 고 쓰고 싶었지만 왠지 너무 나간 거 같아서 이해했다,로 고쳤다.)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려는 과학책에 이처럼 독특한 형식의 글을 쓰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겠구나 하는 생각에 신선한 느낌이 들어서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또 글 잘 쓰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더구나 신갈나무의 일생을 소개하는 동안 그때그때, 숲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함께 보여주고 있어서 식물의 생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본 신갈나무는 일생동안 투쟁을 하며 살아간다. 어미로부터 떨어져 나온 열매가 낙엽더미 속에서 겨우내 잠을 자다가 새봄을 맞아 싹을 틔우고 뿌리를 뻗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서 발버둥 친다. 열매 속에다 떡잎을 만들고 나면 생존을 위해 다시 새잎을 만들고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미 잘 자라서 햇빛을 가리고 있는 주변의 나무보다 높이 줄기를 뽑아 올린다. 이후에도 신갈나무는 쉼 없이 제 몸집을 키우고, 추위와 맞서 싸우며 열매를 만들어 퍼트린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을 넘어서야 신갈나무는 서서히 우리 숲의 주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은 온 생명체와의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 숲에는 처음부터 좋은 이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죽 했으면 신갈나무의 동지(同志)는 여분의 공간이라고까지 했을까? 이것은 신갈나무뿐만이 아니다. 뭇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숙명이다. 자연의 생명체가 투쟁의 삶을 불평해도 소용없다. 자연의 삶은 그 불평마저도 안고 도도한 강물처럼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호기심 가득한 자연과학도도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다양한 영역의 교양을 쌓기 위해 이 책을 골라든 평범한 국어 교사일 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신갈나무의 성장기를 통해 우리의 삶을 견주어 보고 배울 게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철저하게 나무의 관점으로 씌어졌다는 이 책이 내 생활을 되짚을 수 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을 통해 배운 신갈나무의 치열한 삶은 물론 읽는 사람의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편안하고 평탄하게만 보였던 나무의 일생에도 처음부터 어린 열매에게 주어진 것이란 없고, 나무로 일생을 살면서 공짜로 얻은 것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지금껏 나무처럼 치열하게 내 삶을 붙들고 살아 왔나, 하는 반성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나무의 삶과는 또 다른 삶이다. 나무의 치열한 생존 경쟁과 인간의 삶은 그 근본에서부터 다르다. 나무는 치열한 생존 경쟁을 통해야만 결국 ‘더불어숲’을 이룰 수 있다. 신갈나무는 뭇 생명들과 치열하게 투쟁하며 성장하지만, 이는 더 많은 생명체와의 연대와 번영을 위한 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는 나 혼자만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마음과 절제되지 않은 경쟁은 모두를 파국으로 몰아갈 뿐이다. 인간의 삶은 치열한 경쟁만으로는 ‘더불어숲’을 이룰 수 없다. 오히려 독립된 개체들이 서로 다른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고 연대할 때라야 자연이 투쟁을 통해 이룩한 ‘더불어숲'이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모두가 신갈나무의 후덕함과 의연함은 본받되, 그 치열한 생존경쟁의 의미는 가려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신갈나무 투쟁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해 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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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기억은 약한 자의 마지막 무기라는 구절을 어디서 읽었더라?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 육신이야 ‘영원’이란 말과는 애초에 끈이 닿지 않는 말일 테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이 책의 제목인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말하듯,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바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삶이 살아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이들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어떤 식으로든 이들의 행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기에 그들의 삶은 그들이 죽은 후에도 계속 사라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경식 씨가 소개하고 있는 책 속의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무서운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의 흐름은 많은 사람들의 희망, 싸움, 고뇌, 환희를, 다시 말해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을 빠르게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나 그것만큼 인간에게 위험한 것은 없다.(한국어판을 내면서, 6쪽), 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책의 앞머리를 볼 때, 저자는 이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통해 현재의 우리 삶을 성찰하지 못하는, 그래서 한갓 그들의 삶을 과거의 일로 치부해 버리는 우리들의 태도가 못내 안타깝고 그 결과로 빚어질 현실이 무서운 모양이다.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야 할 사람들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결국,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 때문이고, 불행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그들의 불행한 과거가 우리의 미래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이들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미 이들 중 다수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지금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의 인물들은 처음에는 일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음에도 지금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나는 스페인이나 독일에서 일어난 전체주의에 대항한 사람들의 이름 몇은 그래도 다른 책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일본의 군국주의에 저항한 사람들은 정말 낯설었다. 특히나 일본인들의 이름은 이상하게도 기억하기가 더욱 어렵다. 하기야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다른 책에서 이 인물들과 마주친다고 해도 그 이름마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서 아쉽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이 책에서 소개된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가 만들어낸 그림자이자 영웅들이다. 시대에 맞서 온몸으로 살아야 했던 이 사람들이 살았던 20세기는 어떤 시대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파시즘, 나치즘, 군국주의, 군부독재, 외세강점, 전체주의 등으로 집단의 광기가 개인(인간)의 이성을 억압하던 시대였다. 책을 읽으며 앞에 떠오른 낱말을 묶을 수 있는 단어로 나는 ‘억압’이라는 말을 고르겠다. 사람이 살았던 시대치고, 어느 시대인들 억압이 없던 적은 없었겠지만, 에릭 홉스봄의 평가를 살짝 빌려 나타낸다면, 20세기는 ‘극단적인 억압의 시대’라고 불러 마땅하다.(영국의 역사가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평했다.)

   이 책은 시대의 억압에 저항한 인물들의 짧은 기록물이다. 부제처럼, 온몸으로 살아간 사람들에게 대여섯 페이지는 너무한 것 아닌가 싶다가도 원래 20세기 천 명의 인물, 이라는 책의 일부분을 분담해서 집필하게 된 저자가 일관된 주제 아래 고른 대상자를 소개한 글이라 길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도 남는 아쉬움은 여전하다. 한 권의 평전으로 엮어도 모자랄 인물의 생애가 턱없이 짧게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이름도 처음 듣는 인물도 여럿이고, 이름만 들어 본 인물은 더욱 많은데, 이 사람들을 이렇게 그냥 스치듯 지나치고, 내 기억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이런 책읽기도 괜찮을 지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이런 제한적인 지면(紙面) 때문에 각 인물편의 구성은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간략하게나마 인물의 생애가 정리된 형식을 띄고 있다. 그 뒤에다 저자가 생각하는 인물의 행적이 주는 시대적 의미와 역사적 의의를 짤막하게 서술하였다.(쓰고 보니 전통적인 평전 형식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각 인물마다 뒷장에는 출판사의 수고로 인물의 생애와 가장 관련이 깊은 참고자료도 실려 있다. 

   아무래도 각 인물에 대한 내용 소개가 짧아서 인물들의 생애를 파악하는데 약간 헐거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면 참고 도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책을 읽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군데군데 깊은 생각을 퍼 올려서 고운 채로 거른 듯한 서경식 특유의 문장이 좋다. 서경식의 글은 한 문장을 읽고 호흡을 멈춰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의미를 더듬어 본 다음, 다음 문장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평범한 듯 보이는 문장 속에 붙어 있는 예리한 인식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번 을 읽으면 의미가 더욱 풍성해지는 글이라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난다. 

   저자나 편집진의 의도였겠지만, 이 책은 편의상 3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제1부는  스페인의 시인으로 프랑코 정권에 암살된 페레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에서 미국의 게이 운동가인 하비 밀크를 다룬 부분까지이고. 제 2부는 일본적인 것에 도전한 화가 사에키 유조부터 실존 인물이 아니라 야마구치 히토미의 소설 속의 인물로 양심적인 소시민의 전형인 에브라 만 부분까지이며, 제 3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에서부터 한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독재정권에 체포된 두 형(서승, 서준식)의 감옥생활을 뒷바라지했던 저자의 어머니인 오기순까지이다.

   제 1부에는 주로 1930-1940년에 준동했던 독일의 나치즘, 스페인의 파시즘에 저항했던 인물,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혁명을 주도하거나 보수 반동의 군사 쿠데타에 저항한 인물, 아메리카의 억압적 상황에 맞선 인물,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고난(苦難)한 삶을 문학으로 표현한 인물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들은 억압자들에 맞서 들었던 무기는 문학과 예술, 총, 그리고 자신의 온몸이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20세기를 피와 땀으로 얼룩지게 했던 그 이름들은, 페레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파블로 네루다, 잭 시라이, 파블로 카잘스, 사코와 반제티, 에른스트 톨러, 카임 수틴, 바실리 칸딘스키, 에리히 케스트너, 숄 남매, 안네 프랑크, 살바도르 아옌데, 빅토르 하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폴 니장, 프란츠 파농, 프리모 레비, 갓산 카나파니, 하비 밀크 등이다.

   제 1부에서 내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는 구절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숨어살면서 나치체제의 야만성과 나치하의 유태인이 겪은 고통을 일기로 쓴 안네 프랑크의 말이다. 

   “나는 전쟁의 책임이 위대한 사람들과 정치가, 자본가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책임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정말 전쟁이 싫었다면 너도나도 들고 일어나 혁명을 일으켰어야지요.”(84쪽) 어린 소녀의 눈으로 억압의 시대에 침묵했던 우리 모두의 비겁함을 질타하는 절규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마음을 울린다. 만약, 지금 안네가 살아있다면, 왜 우리를 기억하지 않느냐고 되묻지 않을까?

   제 2부에는 주로 일본의 군국주의, 천황제에 저항했던 인물들이 소개된다. 당연히 일본인들이 대다수지만, 일부는 일본인들과 관련이 있는 외국인들도 함께 다루고 있다. 이들은 주로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를 견디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화가로, 시인으로, 소설가로, 저널리스트로서 불길한 억압의 시대에 진입한 일본 사회를 증언했다. 그러나, 문제는 저자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의 일본인들조차도 이들을 기억하고 못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일본이 이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에 나와 있는 “참화의 기억과 파국의 예감에마저 편안하게 익숙해져버려 이를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병들어 있는 것이다. ‘유일한 피폭국 일본’이라는 상투적인 문구가 있다. 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사사키에는 적지 않은 수의 조선인, 중국인들도 희생되었다. 게다가 핵물질에 오렴된 남태평양의 섬들이 있으며, 체르노빌에서도 방사능 유출로 인한 엄청난 재해가 있었다. 그 후로 반세기……. 사람들은 하라 다미키를 기억하고 있을까? 상투어만이 저 홀로 활보하고 있지만, 미일안보체제의 공고화, 비핵3원칙의 형해화, 그리고 평화주의 헌법을 내던져버리려는 최근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전후 일본의 현실은 하라 다미키가 고통스럽게 예감했던 대로 수많은 희생자들의 기원을 계속 배반하고 있다.”(180쪽) 에서 보듯이 지금의 일본인들에겐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 ‘참화의 기억과 파국의 예감에마저 편안하게 익숙해진’ 일본의 현실에서는 군국주의와 천황제에 반대하고 저항한 이들을 잊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일본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인물들은, 사에키 유조, 아이미쓰, 가모이 레이 ,마키무라 고우, 오구마 히데오, 하라 다미키, 가네코 후미코, 하세가와 데루, 리하르트 조르게, 오자키 호쓰미, 아그네스 스메들리, 가와카미 하지메, 에브리 만 등이다.

   제 3부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에 저항하거나 해방 이후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한 우리나라의 인물, 재일(在日) 조선인으로 살면서 일본의 조선인차별에 저항했던 인물을 주로 다루고 있다. 안중근, 김구, 홍범도, 김산, 양징위, 이극로, 조문상, 김사량, 윤동주, 김지하, 박노해, 윤이상, 이진우, 양정명, 오기순 등이 그들인데,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인물들은 독립운동가를 주로 다루고 있으며 해방이후에는 문학가를 다루고 있다. 재일 조선인으로서는 제국주의 전쟁의 전범이 된 인물도 있고, 일본 내 차별이 발단이 되어 저항하다가 자신과 일본 사회 전체에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 인물도 있다.

   그 중에서도 저자가 20세기를 겪어 온 조선 민족을 상징하는 인물로 내세운 이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 오기순이다. 

   “오기순은 재일조선인 1세 여성으로서 차별과 빈곤을 겪었다. 40년이 지나 재회한 조국은 군사독재의 암흑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고통으로 가득했던 그 60년의 생애는 금세기 조선민족이 경험한 식민지배와 민족분단을 온몸으로 체현한 듯하다. 그것은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시대의 학대받고 멸시당하는 민중들, 특히 그 어머니들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 뜻하지 않는 때에 예측을 뛰어넘어 빛을 발하는 저 민중들의 강인함과 지혜는 오기순의 것이기도 하다. (327쪽)”

   이쯤되면, 말 그대로 온몸으로 살아낸 20세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억압의 시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했으며, 때로는 이 저항이 당사자에게 비참한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비참한 결과를 통해서라도 역사는 진보하여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다. 이미 역사가 우리에게 수많은 사례를 통해 알려줬듯이,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다시 우리가 지나왔다고 생각해 온 질곡에 빠질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의 삶을 기억하고 오늘에 되새겨야 하는 것은 더 나은 우리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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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이최고야 2007-11-1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리뷰 잘 읽었습니다. 억압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딛쳐 싸워 온 그들의 이름을 꼭 기억해야 겠어요.

느티나무 2007-11-12 15:48   좋아요 0 | URL
읽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해요. 같이 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