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 평화기행
이시우 글.사진 / 창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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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마일'의 휴전선. 동쪽의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에서 서쪽의 강화군 서도면 말도까지. 그리고 휴전선으로부터 남쪽으로 2km, 그 이름과는 달리 '중무장'과 '군사적 긴장'을 떠올리게 하는 비무장지대. 그리고 민통선-군사분계선에 인접한 지역 중 군작전상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군사분계선 남쪽에 설정하는 선이다.

   "비무장지대는 북한을 반민주주의/거지소굴/독재/전쟁광 등의 개념으로 묶어 타자로 만드는 경계선이다. 그뿐 아니라 남한 내에서도 타자를 만들어내는 경계선이다. 반공이데올로기로, 지역적 소외로, 민주주의의 부재로 모든 일상을 전근대적으로 만들어낸다. 특히, 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인 강원, 경기 북부, 인천 일부 지역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대상화된 지역이다. 이곳의 역사/사투리/음식/문화/정치색/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외지인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다." (303-304쪽)

   이 책을 보니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민통선 안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민통선 안의 사람들은 분단체제로 고통 받고 있었다. 대인 지뢰의 피해가 그렇고, 미군의 군사훈련에서 오는 여러 문제들, 경제적 고통, 사회적 무관심... 그런데도 사람들은 '국가보안법'의 존폐에는 관심이 크지만 '민통선 폐지'문제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민통선 안 사람들의 '생존적 권리' 찾기에는 소극적이면서도 '생태 환경 보호'를 주장하는 것은 민통선 사람들의 소외감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지적이야 말로 이 책이 단순히 '기행자'의 목소리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말해 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작가의 다재다능이 부러웠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정성스럽게 잘 찍어 놓은 사진 솜씨도 그렇고(하기야 '프로'니까), 치열하게 사색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기듯 써내려간 글쏨씨도 그렇고, 인문, 역사, 군사, 사회, 문화재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도 그렇다. 그리고 책 사이에 살짝 예쁜 사진엽서-물론 출판사의 의도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를 꽂아 둔 작가의 마음씨까지도 내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 다양한 영역에 넘나들며 자유롭게, 정확하게 맥을 짚어가는 작가의 재능이 부러웠다.

   그렇지만 내가 작가의 재능보다 더욱 부러웠던 점은 그가 '평화감시운동'과 '대인지뢰금지운동'을 통해 '평화 운동'을 열성적으로 펼쳐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평화 운동'의 한 성과로서, 그가 지금껏 두 발로 조심스럽지만 온전히 밟아온, 소외받는 '우리'땅- 민통선에 대한 소중한 기록이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깊은 사색에서 나온 맑은 기운과 펄떡 살아서 꿈틀거리는 실천성이 함께 녹아 있는 것이다. 10년 동안의 '평화 운동'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이 책에 온전히 묻어난다. 나는 이런 작가의 뚝심과 실천하는 삶이 진정으로 부럽다.

   내가 실제로 민통선을 넘어본 적이 있는가? 내 기억을 더듬어 보니, 딱 한 번 민통선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나는 2002년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걸어간 적이 있는데 맨 마지막날, 통일전망대 앞에서 출입신청을 하고 버스를 타고 가다 군인들이 경계를 서는 철망문을 열고 들어간 지역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민통선이였다. 그 때도 아무 생각이야 없었으랴 마는 기억이 뚜렷하지 않은 걸 보면 가볍게 지나쳐 버린 것 같다. 이렇게 타자화된 시선을 내 문제가 아닌 것은 가볍게 대하게 만든다.

   나는 며칠 전에 라디오에서 이시우씨가 '유엔사 해체'를 촉구하며 3,000km 걷기에 나선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은 '뜬금 없는 소리'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이 작가의 삶의 이력-잘 모르지만, '민통선 평화기행'이라는 책을 낸 작가-을 볼 때 그 만이 할 수 있는 '실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쪼록 그의 이번 실천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책의 알라딘 첫 독자서평자가 되어 무척 기쁘다.

   사족이지만, 이 책에도 나오는 정동진과 강릉 사이에 있는 '통일 공원'에 대한 단상을 내 나름대로 적어 둔 것이 있어서 덧붙여 두고자 한다.

  "(정동진에서) 강릉으로 들어오는 길에 최근에 조성된 '통일공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잠수정을 발견한 곳에다 그 잠수정을 끌어 올려놓고, 해군에서 퇴역 군함을 가져다 놓으며 전시관을 만들어 '통일공원'으로 이름지었답니다. 그곳을 국민을 위해 살아있는 '안보교육'과 '통일교육'의 장(場)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만 있을 것 같은 풍경이 새삼 눈이 들어옵니다. 동해안을 다녀보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끝도 없이 이어진 철책선입니다. 그러려니 했다가, 아니 무감각하게 받아들였다가 한 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니, 우리나라가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이 철책선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안선을 따라 둘러쳐진 철책선을 오래 보고 있으니, 마치 그 안에 갇힌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의 착각인지, 제 생각이 진짜 갇혀 있는 건지...휴! 모르겠습니다.)

   제가 불순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통일'과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줄곧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서 '통일'과 '자유', '민주주의'를 외치며, 기득권에 안주하기 위하여 '분단'상황을 조장하고, 무한권력을 누리기 위해, 시민들의 최소한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민주주의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할 권리를 존중해 주는 것 아닐까 합니다.

   통일공원 앞에 서 있으니 마음이 씁쓸합니다. 적어도 통일공원이란 이름이 붙을 려면-그 분들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남북 간의 상처를 자극하고 확인하는 이런 군사전시물이 아니라 서로 '화해''공존''상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조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자면 6,15남북정상회담 자료 같은-기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또 한번 '통일'이란 이름으로 '분단'을 조장하며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통일이 '북진 무력 통일'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통일'공원이 필요한지 의문입니다." / 2002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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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강준만 편저 / 개마고원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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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금 내 마음이 분노의 감정으로 가득차 있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야 말로 내가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라는 책의 리뷰를 쓰기에 더없이 좋은 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은 뜨겁지만, 머리 속의 생각들은 차갑게 식히고 곰삭여서 이 리뷰를 쓰고 싶다. 감히 단언하건데, 그 분의 글쓰기가 야만적인 한국 사회에 대한 분노를 이성적으로 풀어낸 결과물이 아닌가?

   얼마 전에 리영희선생님의 강연회가 부산에서 열렸다. 강연이 끝나고 마지막 질문으로 "선생님께서 만약 교직 생활을 하셨다면 어떤 교사가 되시겠습니까? 교사 여러분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리영희 교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교사는 지식인 일반인으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특수한 임무와 가치 추구가 있다. 보다 더 균형잡힌 사회(관), 세계(관), 인간관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광적인 권력추구형 인간을 양성해왔다. 이제는 이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기형적 가치에서 스스로 벗어나 깨우치려면 끊임없는 독서와 토론이 필요하다. 시간을 두고 각고하는 노력으로, 믿음으로 해나가야 한다. 후세들에게 어떤 유혹도 거부하고 진실을 추구하도록 아이들이 저항감 없이 옳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석하고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아이들에게 어떠한 유혹도 거부하고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설사 내가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누군가에게는 말이 말로 끝나겠지만, 말을 한다는 것은 곧 '행동'한다는 것을 뜻하는 분이 리영희교수이다.- 내 자신이 부끄럽지 않도록 내가 진실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가?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인가? 앞의 리영희 교수의 답변을 새겨볼 때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이들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꿈꾸며 들어온 교직생활. 그러나 학교라는 곳도 우리나라의 이 모순적인 배경에서 비껴날 수 있었을까만,-정말, 학교가 딱 그 정도만 되어도 이해한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나라의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모습들만을 노골적으로 축소해 놓은 끔찍한 곳이 바로 학교다.

   합리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집단이 공공연하게 '왕따'시키자고 제안하는 곳이 학교다. 그러면서 그 선생들은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왕따'를 어떻게 설명할지? 아무나 보고 "이 학교 선생들은 미쳤다"고 욕을 하는 선생이 없나? 합리적인 토론이나 설득은 없고, "몇 살인데?", "어린 게..." 가 입에 붙어 어떤 말도 소용없는 선생이 있지 않나?(더 웃긴 건 그런 말을 하는 선생이 겨우 34,33살이고 그 말을 듣는 선생은 29, 28, 27살이다.)

   나는 이런 황당무계한 사건들을 들을 때마다 미칠 것 같다. 처음에는 분노의 감정이 치솟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즉자적인 분노의 감정이 가라앉으면 차분히 무엇이 잘못 되었나?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어느새 그 감정들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다시 일상이 반복된다. 그리고 답답한 건 나에게 직접 이런 일이 맞딱뜨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의 감정도 이성적인 사고도 행동으로 잘 연결이 되고 있지 않는다.

   이런 답답한 환경 속에서 아무런 행동을 하고 있지 못하는 내가 리영희 교수에 관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책을 읽으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춰볼 수 밖에 없는데,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는 내가 더욱 도드라지기 때문에, 책 속의 인물과 상황이 자꾸 책 밖으로 나와 내 곁에서 말을 걸기 때문에, 나는 괴로운 것이다.

   나의 괴로움과는 무관하게 그런 점에서 리영희 교수를 생각해 본다면 진실로 '대단한 사람'-'위대한'이라는 표현에는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우상'의 냄새가 풍기고 있지 않은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증할 수 있는 자료를 근거로 사실을 찾고, 사실에 근거해서 진실을 발견하고, 진실에 다가가려고 행동하는 일을 지식인의 의무로 알고 평생 그 의무를 감당해 온 사람이라 그렇다.

   나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니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아마도 '우상과 이성'이었던 것 같은데, 그 책을 읽고 나서는 안개 뒤에 가려진 실체가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아 더 고민이 많아지기도 했다. (정말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듯, 그의 책을 읽으면 고민이 많아지는 것은 분명하다.) 이후로도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역정',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스핑크스의 코', '반세기의 신화', '동굴 속의 독백' 등이 지금도 우리집 책장에 꽂혀 있는 리영희 교수의 책이다.

   결국 그의 글은 행동이기 때문에 진실하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해서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을 때,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 진실을 외면할 때, 그는 그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진실에 다가갔다. 그러므로 그 진실을 알리고자 글로 쓴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의 생각을 표현한다는 차원의 글쓰기가 아니라,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곧 실천하는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행동과 분리될 수 없는 글쓰기가 되는 것이다.

   이제 리영희 교수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걸어간 눈 덮힌 발자국을 따라 뒷사람들이 따라야 할 시점이다. 이 책을 나침반 삼아, 벗 삼아, 리영희 교수가 걸어온, 진실을 찾아 걸어온 그 길에 나도 함께 오르고 싶다.

   그리고 강준만 교수의 글쓰기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본다면, 리영희라는 투명한 창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려던 이 책의 의도는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침묵하지 않고 용기를 낸 '외로운 호랑이의 포효' 덕분이기도 하지만, 강준만 교수의 충분한 자료 준비와 쉬운 글쓰기의 미덕을 바탕으로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흐름들을 잘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서는 주관적인 감정의 개입이 너무 확연히 드러나서 조금 어리둥정한 부분도 있는데, 전라도 지역의 지역감정에 대해 발언한 대목이 특히 그렇다. 이런 주장이야 계속 제기되어온 문제였는데, '리영희를 통해 본 한국현대사'라는 이런 공간에서도 흐름을 끊어가며 길게 설명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그 부분을 읽는 동안 들었다.

   아직 리영희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거기에서 그치지 말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 유효한 리영희 교수의 勞作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나로서는 별 다섯 개가 전혀 아깝지 않다.

- 학교가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배움터였으면 하는 생각도 아울러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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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오 2004-08-1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느낀 절망. 두려움. 무기력함. 학생일 때나 교사일 때나 마찬가지더군요. 내가 교사들에 대해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 아이들도 (아무리 난 아니야!라고 소리치려해도) 나에게 여전히 느끼구요. 초면에 불쑥, 죄송합니다. 묻어둔 기억이 떠올라서요..

느티나무 2004-08-1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묻어둔 기억이라면 좋은 기억은 아니겠지요? clio님은 선생님이신가 봅니다. 사실, 학교가 참 답답한 구석이 많지요? 전 요즘 '이상한' 선생들 때문에 무지 답답합니다. 초면이라도 반갑기만 한데요, 죄송하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새빨간 거짓말, 통계
대럴 허프 지음, 박영훈 옮김 / 더불어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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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5월 14일 금요일에 MBC텔레비전의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스위스에 있는 국제경영대학원 IMD"라는 흥미 있는 코너를 방영한 사실이 있다. 프로그램은 스위스에 있는 한`` 국제경영대학원에서 세계 60개국을 조사해서 내놓은 국가경쟁력 순위인데 우리 나라의 대학수준은 59위, 노사관계는 꼴찌인 60위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반면 기업의 개혁 마인드는 3위, 경영진의 국제 경험은 5위에 오른 것으로 발표했고, 언론은 이를 근거로 우리 나라 국가경쟁력에 깊은 우려를 표시했는데, 사실은 이 통계 조사에 문제점이 아주 많다는 점을 집중 보도하였다.

   이런 우리 나라의 국가경쟁력 보도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지상(紙上)에서 본 날은 항상 나의 경쟁력이 세계 꼴찌라도 되는 것처럼-꼴찌면 또 어떤가?- 우리 나라를 걱정하곤 했다. 그러면서 결국 나는 '우리 나라가 경쟁력을 갖추려면 호전적인 노사문화도 좀 바꾸고, 정부는 좀 더 효율성을 강화하고, 기업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더 많이 만들어야지'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은 이런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이 사실은 경영자만의 자기 평가 설문 방식으로 만들어진 보고서라는 것이고, 그 통계는 오래 전부터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아 왔으며, 우리 나라 언론사들도 그 통계의 문제점을 일찍 알고 있었지만, 그 통계를 자기들의 입맛에 따라 빼기도 하고, 확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꺼내는고 하니 제목부터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빨간 거짓말, 통계'라는 책을 읽는 동안 이 프로그램의 방송 내용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책은 '통계 자료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떻게 속는가' 또는 '통계 자료를 만드는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쓰는가' '언론들은 이러한 통계 자료의 속성을 알면서도 독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속이는가'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는 '이런 거짓말 같은 통계에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가 통계의 속임수를 피하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누가 발표했는가? 출처를 캐봐야 한다.
2) 어떤 방법으로 알게 되었는지 조사 방법에 주의해야 한다.
3) 빠진 데이터는 없는지 숨겨진 자료를 찾아보아야 한다.
4) 내용이 뒤바뀐 것은 아닐지 쟁점 바꿔치기에 주의해야 한다.
5)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살펴봐야 한다. 석연치 않은 부분은 조사해라.

   결국 통계 자료는 우리에게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좋은 보조 자료가 될 수 있지만, 통계 자료를 통찰하는 능력이 없으면 그럴 듯한-아니면, 새빨간(?)- 통계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이 책의 저자 '대럴 허프'는 통계를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도, 문제는 만들어진 통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계를 맹신하는 경향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하루면 충분히 읽을 수 있고, 자꾸 읽고 싶은 욕심도 생기는 대중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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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이, 세계오지를 가다 - 만화 오지 탐험, 이색 문화 체험 반쪽이 시리즈 2
최정현 글 그림 / 한겨레출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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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주문한 30권의 책을 정리하다 보니까 한 권이 빠져 있었다. 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바로 회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추가 배송을 해 준다고 했다. 그리고 이틀 후 내 책상 위에 놓인 "반쪽이, 세계오지를 가다". 한 권만 온 책이고 더구나 만화책이라 먼저 손길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쪽이' 최정현씨는 생활만화와 여성주의 만화를 주로 그리는 남자'주부'인데, 나는 만화를 즐겨 보지는 않지만 최정현씨의 만화책은 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순박한 얼굴과 편안한 웃음 속에서도 쉽게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는 것은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이 곳곳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세계의 오지에서 한국의 인상을 바꾸기 위해 각 나라에서 노력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취재하기 위해 다닌 여행의 기록이다. 반쪽이의 여행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흔히 오지라고 생각하는, '남아메리카'의 도미니카공화국, 페루, 파라과이',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이집트',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오세아이아의 '피지, 뉴질랜드, 파푸아뉴기니', 아시아의 '중국, 베트남, 태국' 등으로 이어진다.

   '오지'-오지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서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에 대해서 같은 곳을 다니면서 만난 그 곳의 사람, 문화, 역사에 대해 알기 쉬운 그림과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재미있고, 꼭 필요한 정보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을 보면 확실히 그림이 글자보다 이해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안의 구조라든가, 거리의 풍경, 생활 습관 같은 것들을 글로 읽을 때 느끼는 막막함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으니 너무나 쉽게 이해가 되어 좋다.

   또 이 책은 여행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머리말에서 묻고 있는데 여행을 떠나는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할-또는 생각하고 있을-질문이 아닌가 싶다.  

   "아프리카에 있는 킬로만자로에서 남쪽으로 경비행기로 2시간쯤 가면 마사이족 마을이 있다. 이 훤칠하고 멋있게 생긴 남자들은 도대체 일을 하지 않는다. 반면에 여자는 새벽부터 밤까지 등이 휘도록 일한다. 남자들은 무엇을 하느냐고? 남자들은 신성한(?) 전쟁준비를 한다. 그런데 그 동안 전쟁은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단다. 남자들은 전쟁준비라는그들의 역할을 그저 하나의 전통으로 계속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빙자해서 군부독재를 하는 나라들은 여기서 배워온 게 아닐까? 이렇게 수천년 동안 불평등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활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여행의 힘은 이렇게 일상생활을 탈피해서 다른 지역의 문화를 보고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그 차이와 같음을 확식하고 우리의 삶의 지표를 때로는 수정하고 곧추세워보는 것이리라. 어덯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쉼없이 나오는 현장에서 나는 이삭을 줍듯이 여행이 준 선물을 챙겼다. 그리고 신나는 지옥이 아니라 어떻게 신나는 천국을 만들까?라는 질문 또한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여행은 떠남에 대한 기록이다. 낯선 곳, 새로운 사람들에게 대한 기록이 여행기이다. 그러나, 여행은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행은 너무나 익숙해서 인식하지 못하는 내 자신의 일상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와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새롭게 보이는 일상은 낯설게 다가올 것이고, 낯선 일상은 자신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던질 것이다.

   이 책은 오지 탐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입문하는 책으로 아주 좋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 나도 어느 먼 곳을 탐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읽은 후 더욱 관심이 가는 지역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한다면 더욱 알찬 오지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모든 것이 시들해질 때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 이 책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

   아무튼 읽기에 재미있고 편한 책, 그러면서도 유익한 정보가 쏠쏠하게 담긴 좋은 만화책 한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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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노신 지음, 이욱연 옮김 / 창 / 199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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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열심히 책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으나, 막상 입학한 대학은 할 게 별로 없는 곳이었다. 아마 고등학교 다닐 때 귀동냥으로 들어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찍어둔 책도 몇 권 있었는데, 예를 들면, 이방인, 제3의 물결, 수호지 등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대학도서관에서 가장 먼저 빌린 책은 루쉰의 '아Q정전'이었다. 이 책도 아마 그 귀동냥으로 들은 책 중에 한 권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루쉰은 대단한 작가라고 평한 것을 들은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그러나 실제로 읽어본 '아Q정전'은 나에게 별다른 감흥이 남는 책이 아니었다. 읽고 나서도 '근데 이 책이 왜 그렇게 유명해?' '이 작가가 왜 그렇게 대단하지?'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살면서 루쉰은 대단한 작가라는 평을 몇 번이나 들었다. 그 때마다 나는 '잘 모르겠더라'고 대답하면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 구절!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만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루쉰의 책은 세 번째이고, 이번에 만난 루쉰의 책은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이다. 이 책도 표지는 오래전부터 봤지만 어쩐 일인지 읽고 싶지는 않았는데, 학교 도서실에 꽂혀 있는 이 책에 우연히 눈길이 가게 되어 뽑아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걸 본 내 친구는 '아직도 그런 책도 안 보고 뭘 했노?' 하는 표정과 함께 '철 지난 유행가'에 흠뻑 빠진 사람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책은 서술자의 목소리를 뒤집어 쓰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똑바로 전달할 수 있는 산문의 매력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좋다. 자신의 글이 곧 자신의 삶이 일부가 되는 것이다. 루쉰의  산문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생각은 정리되지 않고,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 경우는 보통 지금, 우리의 현실과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페어 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편을 보면, 우리는 우리를 물려다가 물에 빠진 개를 보면 불쌍해서 개의 과거를 잊고 물에서 건져내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의 속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물에서 나오는 대로 다시 우리를 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물에 빠진 개를 건져내지 않으면 인정이 없다느니, 공정하지 못하다느니 하는 소리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물에 빠진 개는 반드시 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장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에 아직도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냉전 수구세력들의 생존 방식이 떠올랐다. 냉전 수구세력들은 지난 역사를 볼 때 몇 차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러 우라나라 주류 세력에서 밀려날 뻔 했으나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는다는 '온정주의'나  '지역감정',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 꿋꿋하게 살아남아 있다. 이것도 우리 사회의 개혁세력이 아직도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않고 관용을 베풀면 개의 본성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런지도 모르겠다.)

   루쉰도 말했지만, 관용을 모르는 자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관용해야 할 대상과 관용이 필요 없는 대상을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리라고 본다.

   삶과 글이 수레바퀴의 양날처럼 같은 곳으로 움직이는 사람의 글은 서늘하다. 늦게나마 이 여름,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루쉰의 글을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고 행복했다. 루쉰이 다시 우리의 현실을 살아간다면, 그가 예전에 살았던 그 때만큼 분노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지 않았을까?하는 결코 유쾌하지 못한 상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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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24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나무 2004-06-25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책을 도서실에서 읽다가 별 감흥이 일지 않아 반쯤 읽다 말았는데 그런 내용이 있었군요. 그 책을 선생님께서 가지고 가실 때 저도 속으로 ' 선생님 같으신 분이 아직도 그책을 ....' 이런 표정을 지었으니까요. ^^ 다시 한번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느티나무 2004-06-25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 읽어 볼 만한 책인 거 같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좋아할 책이지요. 여러가지로 슬픈 소식들이 많네요. 그래도 교실에서는 즐거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