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금이 아니면 언제?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
프리모 레비 지음, 김종돈 옮김 / 노마드북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턴가 리뷰를 쓰지 않았다.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단순히 마음이 게을러서 그렇다. 아무리 하찮은 글이라도 나에게 글쓰기는 힘들다. 힘드니까 점점 미루다가 어느 순간부터 손을 딱 놓고 말았다. 꼭 써야 하는 글이라면 마감 전날에 밤을 새워서라도 썼겠지만, 리뷰근 그야 말로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 아닌가!
그러다가 최근에 'B 급 좌파 : 세 번째 이야기'를 읽다가 "글을 씀으로써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19쪽) 이런 구절을 읽고는, 내가 무척 게으른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끊임 없이 일어나는 일상의 에피소드를 반추하며 내 생각의 틀을 만들어 내는 일은, 결국 글을 써야 해결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책을 읽고 리뷰를 쓰려다가 막힌 책이 바로, 서경식 선생이 쓴 '시대의 증언자 :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서경식, 창비)'였다. 책을 덮고 바로 컴퓨터를 켜고 무엇인가를 끄적거렸으나 결국 다 지우고 말았다. 내가 몇 줄이나마 쓰면 쓸수록 책에서 받은 감동이 오히려 스러지는 것 같아서, 먹먹한 내 마음과 글이 자꾸 어긋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싶은 책 목록을 만들어 두기도 했지만 아주 몇 번 예외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책은 손도 대지 못 했다. [리뷰를 쓰고 싶은 책 목록에는 프리모 레비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도 있었다.]
최근에 나온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는 책은 내가 읽은 프리모 레비와 관련이 있는 네 번째 책이다. (주기율표가 세 번째 책이고, 휴전, 이 다섯 번째 책으로 지금 책장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레비의 어떤 면이 계속 나의 마음을 끄는 것일까? 아마도 그가 끊임 없이 시대의 비인간성에 대해 경고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그는 우리 시대라는 '잠수함의 토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고장난 잠수함' 같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온 '토끼'이다. 아마도 그의 경고-지금도 파국의 잠수함이 아닌가?-가 어떤 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계속 내 마음을 붙잡아 흔든다. 그래서 이번 책도 얼른 사서 읽었다.
이 책은 레비가 무솔리니의 인종차별 정책을 피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 있을 때 만났던 많은 유태인 빨치산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과 해방 이후 이탈리아에 정착해서 친구로부터 들었던 인상적인 동유럽 빨치산 이야기를 엮어서 만들었다.
유태인 빨치산들은 두 전선에서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특히 어려움이 많았다. 명시적인 적인 나치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는 대부분의 유럽인들과도 암묵적인 전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상황을, 국적은 다르지만 나치에 항전하는 다국적군 유태인 빨치산 부대인 게달레 대장이 이끄는 부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폴란드, 독일 곳곳에서 게릴라 활동을 펼치며 이동하다가 종전과 함께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있는 유태인 구제기관의 보호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대장정을 마치게 된다.
작가의 분신이자 끊임 없이 전쟁과 실존의 의미를 묻는 멘델, 전쟁터에서 만나 인연을 맺게 되는 시슬과 라인, 총과 바이올린을 함께 메고 다니는 대장 게달레와 그의 연인, 벨라. 그리고 언제나 유쾌한 말솜씨로 부대원의 시름을 덜어주던 파벨, 칼솜씨가 놀라웠던 모텔. 그리고 소년에서 용맹한 전사로 자란 피오트르, 숲에서 우연히 만난 멘델과 함께 유태인 부대를 찾아가는 레오니드 등.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의 삶의 궤적과 나치와의 전쟁, 연합군의 전후 처리 과정이 교묘하게 결합하면서 결국, 이들 유태인들은 디아스포라가 될 수 밖에 없는 속사정을 아프게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연히 '태백산맥'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태백산맥'과 비슷하다는 느낌보다는 아, 참 다르구나, 라는 느낌이 더 많이 들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이야 책의 분량이 있으니 차이나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쳐도, 이 책은 역사적 현실에서 '승리'한 투쟁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유럽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특수성이 빨치산 투쟁에도 반영된 것인지는 몰라도 이들의 투쟁이 '태백산맥'에서처럼 처절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전쟁의 참혹함이야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의 상상 너머에 있을 테지만, 태백산맥 같은 책에 단련된 우리들은 '저 동네 사람들은 좀 점잖게 싸우는군' 이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말해 두고 싶은 것 한 가지. 오늘의 이스라엘의 후안무치한 행태를 보고 있자면 저들의 지난한 투쟁이 결국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를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이 1982년, 이 해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해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다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책장에 꽂힌 '시대의 증언자 :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뒤적이니, 레비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철수를 요구하는 요구서에 서명했다가 지인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하고, 반이스라엘측으로부터는 친이스라엘적이라고 비난받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상처 입은 레비는 이후 공식적인 발언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시대의 증언자 : 프리모 레비 256-261쪽)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구절을 소개하며 짧은 리뷰를 마감하려고 한다. 게달레 대장이 부대원들 앞에서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며 부른 노래 가사인데, 나치친위대에 붙잡힌 유태인 사형수가 죽기 직전 30분간의 말미를 얻어서 지었다는 시로, 소개되어 있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유태인의 진혼곡으로 불린 이 노래 가사가 책 내용의 전후 맥락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책을 덮은 후에도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다만 이 아름다운 노랫말이 내 마음 속에서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자, 다른 사람의 삶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대하자, 그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지금 당장 시작하자..." 는 밋밋한 말로 바뀌었지만, 앞으로 내 행동의 중요한 규범으로 남을 것 같다는 예감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마나한 이야기겠지만, 프리모 레비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읽어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