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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찾아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박영희 외 지음, 김윤섭 사진 / 우리교육 / 2006년 3월
평점 :
세상에 ‘길’이라는 말처럼, 사람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나한테 ‘길’은 마치 삶의 온갖 풍상을 다 겪어 이제는 인생의 의미를 터득하고도, 아무에게나 그 속내를 털어내지 않고 무심한 듯 묵묵히 제 할 일만 하고 있는 지혜의 은자(隱者)처럼 느껴진다. 이 무심한 은자(隱者)가 나에게 가만가만히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있는데, 그 때가 언제냐면 내가 두 발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걸을 때다. 욕심을 덜어내고, 걸을 때라야 비로소 은자는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것이다.
어디에서든 은자를 떠올리게 하는 ‘길’이라는 낱말만 나오면 한 번 더 쳐다보는 습관이 나도 모르게 생겼다. 비록 큰 자랑거리는 못 되지만, 나 역시 ‘길을 걸었다.’라는 몇 번의 경험이 내 마음을 잡아끄는 모양이다. 물론 그래봐야, 나는 팔자 편한 여행자일 뿐이지만. 그래도 온전히 두 발로 다니면서 만난 ‘사람 사는 세상’은 자동차로 달리면서 스치듯 본 것과는 분명 달랐다. 내가 읽은 이 책도 그랬다. 화려한 겉모습의 이면(裏面)을 보려면 빨리 가려는 마음, 앞서가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충고해 주는 듯하다.
‘길에서 만난 세상’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고 박영희, 오수연, 전성태 씨는 글로, 김윤섭 씨는 사진으로 우리 사회 ‘약자’들의 안타까운 현재 현실과 그들의 소박하지만 소중한 바람을 전하고 있는 책이다.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사는 이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이 책을 만든 사람들은 멀고 가깝고, 편하고 험한 길을 가리지 않고 나섰을 것이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무엇인가를 향해 급하게 달리려는 마음, 남을 앞질러야 한다는 이기적인 마음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잠시 접어두었으면 한다. 차 안에서 스치듯 바라본 풍경으로서의 세상이 아니라 지은이들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우리 사회 인권의 현주소를 되짚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어떤 느낌의 글을 멋지게 쓰더라도(능력도 안 되지만),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짧게나마 직접 소개해주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는 것이 이 책을 가장 정확하게 소개하는 글이라고 믿고 정리해 보았다.
“정규직도 좋으나 그보다 먼저 저는 퇴사 당하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는 곳에서 일했으면 합니다. 더는 쓰다 버린 소모품 정도로 다뤄지는 그런 인생이 아니었으면 좋겠고요. 인격은 고사하고 인간적인 차별까지 받고 살아야 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하잖습니까?”[24쪽, 비정규직 노동자, 이상호 씨]
“(베트남으로 돌아가) 무엇을 해 볼 수 있을 만큼 돈은 모았지요. 그러나 사람을 믿는 마음은 많이 잃었어요.”[39쪽, 이주노동자, 투안(베트남)]
“어느 누가 내가 겪은 슬픔과, 민주 덕에 얻은 기쁨을 알까 싶어요. 아이를 포기하고 비밀을 간직한 채 깨끗한 척하느니, 손가락질을 받아도 내게 찾아온 생명을 책임지기로 했죠. 뭐라도 해서 한 달에 80만 원만 벌면 민주하고 살 수 있지 않겠어요? 겁이 없어졌어요. 이제는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52쪽, 비혼모, 조순화 씨]
“집 나온 아이쯤으로 보는 건 그래도 웃어넘길 수 있었어요. 학교를 안 다닌다고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 눈이 어떻게 바뀌는지 아세요? 대번에 내가 천박한 사람으로 변하고 몸 파는 아이 취급을 당하고 말아요. 그뿐인 줄 아세요. 우리나라는 쯩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다닐 수 없어요.”[64쪽, 탈학교청소년, 효주]
“아이들이 더 크면 상급 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교육비가 만만치 않아요. 한국 음식이라도 잘 만들면 좋겠는데 그렇지도 못하고요. 아이들이 많이 외로워하는 것 같아요. 이곳은 놀아 줄 친구도 없어요.”[82쪽, 코시안, 로리타비 와드와찬 씨]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선택할 수가 없었어요.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자리가 없었고, 우리 친정은 너무 가난해요. 아버지는 맹인이고, 어머니는 환자예요. 한국에 오기 전에 어떤 일이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내가 버티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이제 너무 지쳤어요”[94쪽, 아시아 여성, 진(가명, 필리핀여성)]
“여든이라는 나이가 우스운 나이인가? 오래 살기 싫어. 통장에 300만 원 있는데 1년에 100만 원씩 깨서 쓰면 한 3년은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겠지. 그거 다 떨어지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야. 죽으면 호국 용사에 묻히겠지.”[117쪽, 도시의 노인들, 김 씨 할아버지]
“우리 남편 좀 병원에 입원시켜 줬으면 좋겠어요. 남편을 앞에 두고 이런 말 하면 죄받을 짓인 줄 알지만 사는 일이 너무 팍팍해서 그래요. 제발 우리 남편 좀 병원에 입원시켜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내 소원이에요.”[131쪽, 진폐증을 앓는 전직 광부 김병태 씨의 아내]
“이 나이에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학문을 해 온 사람으로 심경을 고백하자면 너무 힘이 듭니다. 전화가 되지 않을 땐 도청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고, 언제 또 구속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검열하느라 병이 날 지경입니다.”[146쪽, 보안관찰대상자, 박창희 씨]
“김선일 씨의 죽음에 그토록 비통해하던 한국인들이, 왜 하루에도 200-300명씩 죽어 가는 이라크인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관심합니까?”[165쪽, 한국에 살고 있는 무슬림, 자말(파키스탄) 씨]
“감옥이 따로 없지. 남들은 구경하느라 종로통으로 나오지들 않더라고? 근데 난 이 안에 갇혀서 세상 구경 못하고 사니 갑갑해. 30년을 이 속에서 지내다 보니 아픈 몸만 남았어. 발을 제대로 못 뻗으니까 무릎이 성치 않고, 조그만 창으로 손님을 맞아야 하니까 목이 또 안 좋아. 하도 아파서 X-레이 찍어 보니까 목뼈가 좋지 않대”[(177쪽, 0.3평에 사는 사람들, 김형주 씨]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간 것 같아. 바닥난 물고기도 물고기지만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남는 게 있어야지. 한 달 경비 빼고 선주가 반을 가져가 버리는데 뭐 얼마나 남아 있겠어. 그야말로 콩고물이지.”[194쪽, 어부, 서 씨]
“그러나 같은 행위라도 자신이 선택했느냐 아니냐는 다르잖아요. 학생도 놀 권리가 있고 잠잘 권리와 쉴 권리가 있는 인간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결국 어른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게 문제 아닌가요?”[214쪽, 인문계고등학생, 찬주]
“왜냐고요? 여기는 희망이 없으니까요. 어른들도 농사짓든지 조그만 장사를 하든지, 이것저것 하다 말든지, 제대로 사는 것 같지가 않아요. 우리더러 학교만 마치면 얼른 떠나라고 해요. 여기 대학이 생긴다고 해도 가고 싶지 않아요. 이런 데서 대학 나와 봤자 뭘 해요? 젊은 사람들한테 나가라, 나가라 하는 데예요.”[230쪽, 농촌청소년, 보라, 주희, 수필]
“손가락이 없고 발가락이 없다 뿐 자식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닳아지고 없을까. 아무려나 나병이 암보다 더 무서울까. 암은 유전될 수 있지만 나병은 그렇지 않거든. 감염만 해도 그래. 아주 극소수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느 의사, 어느 간호사가 그것도 몇십 년씩 이곳에 붙어 있겠어?”[243쪽, 한센인, 익명]
“전에는 죽으면 재라도 되어 부모 계시는 고향으로 가고 싶었지. 근데 지금은 아냐.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아들들이 있는 이곳에 묻혀야지 왜 가? 한국 사람한테 시집와서 이쪽에서 육십 년 살아오니 이제 못 하는 말도 없고 심지어 욕도 할 줄 알아. 욕도 할 줄 아는데 이제 뭐가 무섭겠어. 여기가 고향이야.”[262쪽, 일본인 처, 아오키 할머니]
“작년, 재작년보다 경기가 더 안 좋아요. 지금쯤 뺑뺑 돌아가야 하는데. 일감이 떨어지면 먹는 거 줄이고, 아이들 학원비 줄이죠. 지금은 애들 둘 합기도만 보내요. 과외 공부시키는 엄마들도 있지만 한 아이 당 이십여만 원씩이나 하니. 엄마들이 돈을 만지기 때문에, 엄마가 일하는데 따라 아이들이 차이가 확확 나요.”[277쪽, 창신동 미싱사, 최혜주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