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581 | 582 | 58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오늘 알라딘에 올라온 글들 중 좋았던 글이 L 님의 글이었는데, 삼십대의 연애가 이십대의 그것과는 좀 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어릴 적에 감정이 폭죽처럼 터지는 것 같았다면 삼십대에는 밀려오는 감정들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고. 


요즘의 나는 여러가지 면으로 노화를 실감한다. 작년부터 보이기 시작한 새치도 그렇고 푸석해진 머릿결이 그렇다. 짧아진 생리주기와 적어진 생리양에서도 노화를 느낀다. 예전엔 샤워를 해도 피부가 언제나 촉촉했는데, 이제는 건조해져서 가끔 바디로션을 바르고 싶어진다(라고 해서 바르진 않는다). 핸드크림을 필수로 겨울에 가지고 다니게 된 것도 노화를 느껴서이다. 손을 씻고나서 손이 건조하다는 걸 이렇게 실감할 수 있다는 것, 이게 노화가 내게 가져다 준 것이다. 이런 신체적인 변화들이 많이 두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이 먹는 것 자체가 싫지는 않다. 


나는 내가 여러가지 면에서 더 성숙해졌다는 걸 안다. 여전히 어린 시절처럼 고집 센 나이지만, 내가 나를 좀 더 잘 알게 된 것은 그동안의 삶이 내게 가져다준 것이다. 나이들면서 내게 좀 더 잘 맞는 사람들을 찾아 곁에 둘 수 있게 된 것 같다. 연애는 말해 무엇하랴, 내게 최상의 상대를 맞춤하게 찾아 함께할 수 있는 것도 나이 들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확실히 나이들수록 나는 점점 더 좋은 상대와 친구가 되고 아주 좋은 상대와 연애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지나간 삶에 대한 반성도 나이들면서 가능해졌고, 내가 가진 단점이 무엇인지 또 장점은 무엇인지도 나이들면서 알게 되었다. 여러모로 나는 과거의 나보다, 어린 시절의 나보다 좀 더 나은 어른이 되어 있었고, 그리고 지금의 나, 나이들고나서 내가 하는 연애가 좋다. 나는 삼십대 이후부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삼십대이후부터가 정말 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서 다행이고, 이런 나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수시로 든다. 사랑과 이별에 대해서도 처음 겪는 것이 아니므로 익숙해진 것도 사실이다. 익숙해졌다해서 이별 후에 아프지 않은 건 결코 아니지만 뭐 그렇다는 거다. 그렇지만,



삼십대를 살면서도 나의 사랑의 감정은 폭죽처럼 터진 적이 있다. 물론 늘상 그런것도 아니고 연애의 상대마다 그랬던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삼십대 후반까지도 내 감정이 정말로 말 그대로 지랄요동을 쳤던 때가 있다. 돌이켜보면 그게 싫어서 언제나 안정적인 상대와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자 했던건데, 그 격렬한 감정을 피하고 싶어서 조용한 연애를 선택했었던 것인데, 실상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었던 때는 그 격렬한 감정을 맞닥뜨렸을 때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그것이 괴로워 몸부림치지만, 그러나 나는 그런 극한의 고통을 행복으로 느꼈던 것 같다. 아아, 가장 최근에 그 격렬한 감정을 느꼈던 때가 떠오른다. 몇 해전이었는데, 아아아아아, 진짜 하루종일 그 남자 생각이 나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거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서, 아아, 차라리 이 남자를 모르는 채로 지낼까 생각할만큼 내 감정은 지독하게 격렬했다. 너무나 혼란스럽고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던 나는, 아니야 안정적인 내가 되어야 해,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가자, 마음을 다스리자, 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하기 위한 액션을 취하기로 한다. 나는 언제나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는 사람이다.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 그럼 어쩐다? 그래서!!!!!!!!!!!!!!!!!!!!



백팔배를 했었다.



백팔배 어플을 실행시켜두고 방안에 스탠드만 하나 켜두고 그렇게 차분한 마음으로 백팔배를 했다. 아니지, 차분한 마음이 되기 위해 한거지. 이거 하면 어차피 운동도 되고 마음이 가라앉을 거야. 나는 차분해질 거야. 평안이 찾아오겠지. 어느순간 몸이 힘들어지면, 나는 그남자 생각을 잊고 내 몸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땀을 흘리고 샤워를 하면, 나는 안정적인 잠으로 빠져들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백팔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일어났다 다시 절을 하는 매 순간순간마다 그 남자 생각만 나더라. 다 끝낸 후에도 나는 계속 혼란스러웠고 감정의 폭풍에 휩쓸렸다. 



으음 이게 아니군, 이건 안되겠어, 다른 방법을 찾자. 뭐가 좋을까?


그리고 찾아낸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색칠공부!!!!!!!!!!!!! 그래, 이거야, 이걸 하자! 나는 이 책이 나오자마자 사두었고 이걸 하자고 36색 색연필까지 사두지 않았는가. 그러나 사두고 색칠을 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혹여 이걸로 스트레스를 받을까봐 였다. 힐링북이라는데 힐링 되기 보다는 뭔가 칸을 메꾸고 색을 칠하는 것이 어떤 의무감으로 느껴져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 시작하지 않고 있었더랬다. 그런 색칠공부에 나는 의존해보기로 한다. 그래서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자, 여길 연두색으로 칠했으니 여기는 초록색으로 칠할까, 아 이 색깔 썼으니 그렇다면 금색으로 칠해볼까, 아, 여기는 어떤 색으로 칠하지? 주황색이 좋을까? .... 하고 열심히 색을 칠하는 동안, 나는 온전히 색을 칠하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남자 생각이 1도 안났다. 내 머릿속엔 어떤 색으로 칠할까, 이것 밖에 없더라. 이것은 원래 멀티가 안되고 하나에만 집중하는 나의 성향 탓일 거다. 어쨌든 그런 영향으로 이것의 색을 칠하는 동안에는 내가 몹시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던 거다. 팔이 아프게 칠을 하는 동안, 나는 오로지 색연필과 그림에만 집중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 책이 달고 있는 타이틀대로 '힐링북'이 되어주진 못했지만, 내게는 다른 생각을 잊게 해주는데 도움이 되어줬다. 어떤 생각을 잠시라도 '잊고' 싶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24시간 365일 내내 이 책에 색을 칠하며 지낼 수는 없다. 팔이 아파서 그만두는 시간이 찾아오고, 하다보면 또 지겨워져서 그만 두게 된다. 실상 내가 칠한 것도 이 책에서 두 장쯤 되나.... 두 장도 마저 다 칠하지도 않았어....그래서 색연필을 정리하고 책장을 덮으면 그때부터 또다시, 아, 팔아프다, 하고 주무름과 동시에 또다시!!!!!!!!




남자 생각이 난다. -0-




답이 없다. 생각나면 생각할 밖에. 이런 싯구가 있었는데...이런 비슷한 뉘앙스의 시 구절이 떠오를듯 말듯 안떠오르네? 뭐지? 찾았다!!! 아 나는 천재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말할 수 없는 애인

 

 

물이 없어도 표류하고 싶어서

외롭거나 괴롭지 않아도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돌아오거나 영 돌아오지 않겠지

가까운 곳에서 찾았어

우리는 모였지 인도 아프리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들과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 학생들

지난해 여름부터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었어

불한당 청년들의 표류처럼 불규칙적이었지만

무서운 속도로 어휘와 문법을 습득하는 그들이 참 신기하더라

말이 무색해서 팔다리를 브이 자로 벌렸지

매알매일 뱃멀미가 났어

멀리서 돈 벌러 온 한 이방인에게 나는 미약했지만

그의 까만 손가락이 내 얼굴을 두드렸지

장난스럽게 단지 두드리는 시늉만 했는지 몰라

전혀 두드리지 않았는지 몰라

적절한 문장을 못 찾겠어 도무지 사랑할 수밖에

그는 자신의 긴 이야기를 음악 소리로 듣는 마을에 가서

내 갈색 귀에 다 털려버렸지 코 고는 소리도 뭔가 이상했어

외국인 남자는 어떨까 상상하지 않았다면

말 못할 관계로 가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어

생면부지의 것들을 만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귀지 않는다면

위험하지 않다면 살아 있는 게 아닌 건 아니지만

끝없이 문제를 만들어야 했어

시험 문항을 만들고

혼혈의 아이들을 낳아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의 모국어를 섞어 말할지도 몰라

콩밥을 나누고 에이즈 환자 모임에 가야 한다 해도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너와 헤어진 다음 날 그를 사랑했어




그래서 생각한건데, 나는 어쩐지 나이가 육십이 되고 팔십이 되어도 언제든 폭죽처럼 감정이 터지기도 할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노화가 진행되면서 아주 많은 것들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지만, 폭죽처럼 터지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계속계속 내 안에 있으면서 나를 구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내가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내가 손 쓸 수가 없는, 내가 도무지 해결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인 것 같다. 터진다면 터질 수밖에. 아하하하하.


아침부터 타 블로그에서도 좋은 글을 읽고 알라딘에서도 좋은 글을 읽어서 생각이 많아졌다. 이렇게 과거 회상도 하고... 나는 이런 글들이 좋다. 공감의 글, 생각하게 하는 글. 아 난 역시 글이 좋아 ㅠㅠ 글이 좋고 책이 좋다 ㅠㅠ 여러분 글을 많이 많이 써주세요!!!




아침에는 여자저차해서, 소고기뭇국에 밥을 말아먹고 출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에 와서 빵을 먹었다. 과정을 쓰자면 길어서 생략하고 결론은 내가 먹었다는 건데, 내가 먹은 빵은 이것이었다.



스타벅스의 크랜베리 아몬드 롤! 그리고 사무실에서 내린 아메리카노. 아아, 진짜 넘나 좋은 맛. 눈물 나게 맛있었다. 크렌베리 아몬드 롤과 아메리카노는 진짜 환상의 궁합이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맛이랄까. 먹으면서 맛있다고 계속 감탄하면서 울고싶었다. 좋아 ㅠㅠ 이 맛있는 빵과 커피.. 아메리카노는 맛있는 빵을 먹을 때 진짜 베프이며 절친이야. ㅠㅠㅠㅠㅠㅠㅠ 아 빵과 커피가 너무나 좋구나. 나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역시 다이어트 하지 않는 삶이 이만배쯤 더 행복해.




동료와 나는 내 말에 빵터져서 웃으며 행복하게 먹는 일을 계속했다. 

정말 그렇다. 다이어트 하지 않는 삶이 다이어트 하는 삶보다 이만배쯤 더 행복하다. 이것 역시 어쩔 수 없다. 살찐다면 살찔 수밖에. 술과 고기를 사랑하고 버터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아아,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오늘은 퇴근후에 강원도로 가는 기차를 탄다. 강원도에 도착해서 뭘 먹을까, 먹을 거 생각하면서 나는 또다시 행복에 잠긴다..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언제나 이렇듯 손 닿는 데 가까이 있지. 가까운 식당에, 레스토랑에, 까페에 .. 행복은 널려있다.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16-03-11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아침마다 빵을 먹는데 확실히 빵은 뭔가 살찌는 급행열차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행복감이 드는 건 짱짱맨입니다 ㅋㅋㅋ

다락방 2016-03-11 10:32   좋아요 0 | URL
저는 빵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데(응?) 아메리카노랑 먹을 때 진짜 행복감이 파도를 쳐요 ㅜㅜ ㅋㅋㅋㅋㅋ

웽스북스 2016-03-11 10: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달달한 빵일 수록 아메리카노 필수! ㅋㅋ

다락방 2016-03-11 10:36   좋아요 1 | URL
왜 행복한데 살이 쪄야하죠? 왜죠? ㅜㅜ ㅋㅋㅋㅋㅋ

젤리곰 2016-03-11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저 이 글 즐찾해두고 싶어요 ㅠㅠ

다락방 2016-03-11 10:36   좋아요 0 | URL
제목 옆에 별을 찜하세요! ㅎㅎㅎㅎㅎ

젤리곰 2016-03-11 11:36   좋아요 0 | URL
찜!

다락방 2016-03-11 11:42   좋아요 0 | URL
굳! (쓰담쓰담)

레와 2016-03-1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원도 먹방 사진 기대합니돠!!! 다락방~ ㅎㅎ

다락방 2016-03-11 11:42   좋아요 0 | URL
지금 목표는 소고기랑 감자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은빛 2016-03-1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몇 십분씩 전화통 붙들고 씨름하고 나서,
진이 다 빠진 상태로 오랜만에 알라딘을 들어왔는데,
다락방님의 이 글을 읽으니 일 생각은 다 날아가고,
웃음이 나네요. ^^

또 일에 시달려야겠지만, 잠시 웃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6-03-11 13:40   좋아요 0 | URL
아하하핫. 감은빛님께 웃음을 드릴 수 있었다니, 정말 좋은데요! 쉬엄쉬엄 하세요, 감은빛님.
조만간 소주 한 잔 합시다!

시이소오 2016-03-11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벚꽃 떨어질때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는 김훈의 문장이 떠오르네요. 재밌게 읽었어요. 웃다 가요^^

다락방 2016-03-11 14:05   좋아요 0 | URL
아, 김훈이 그런 문장을 썼습니까? ㅎㅎ
저는 실상 남자 생각이라기 보다는 `그 남자` 생각에 쩔쩔맸었죠. 어떤 이에 대한 애정은 가끔 통제불능이에요. 휴..

시이소오 2016-03-11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남자`님 이었군요. 행복한 남자님이네요 ^^

다락방 2016-03-11 14:27   좋아요 1 | URL
그랬어야할텐데요. 그무렵 저는 행복했는데 그는 어땠을지 잘 모르겠어요. ㅎㅎ

사소한 분노 2016-03-1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난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책도 여럿 소개 받았네요:)

다락방 2016-03-14 09:27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

2016-03-14 0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4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는 남동생과 함께 치킨을 먹었다. 돈 내는 사람이 먹고 싶은 치킨 고르기로 하자고 해서 내가 굽네치킨 내가 살게, 라고 하자 남동생이 나 굽네 싫어 페리카나 먹자 내가 살게, 하길래 그래 그럼, 했다. 사실 나는 페리카나는 너무 기름기름해서 별로지만..얻어먹는 것이니 그러는 걸로... 함께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을 홀짝이다가 남동생은 통화를 한다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 나는 텔레비젼 채널을 돌리는데, [나는 자연인이다]가 나오고 있더라.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아서 그래 이거나 혼자 보면서 술마시자, 하고는 냉장고에서 깍두기를 꺼내가지고 와서 안주 삼아 먹으며 와인을 마셨다.


어제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은 꽤 인상깊었다. 그동안 이 프로에서 자연에 들어가 혼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사에 지치고 건강이 악화된 사람들이었다. 너무 아파서 자신의 몸을 회복시키고자 산에 들어와 좋은 공기, 좋은 약초들로 자신의 몸을 돌봐 주었던 것. 그러나 어제 나온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가족 때문에 들어왔다. 동생을 백혈병으로 잃고나서 그 상실감에 크게 방황하던 삼십대 초반 무조건 산에 들어와 숨어 살다가 다시 도시로 나갔는데 자신의 몸이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더라는 것. 그래서 다시 산으로 들어갔는데,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건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가족의 건강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책임지자, 했던 것. 그렇게 16년간 산에서 혼자 집을 짓고 살면서 약초를 공부하고 눈을 뜨면 약초 찾고 손질하는 일에 열심이다. 산에 올라 이 약초 저 약초 다 구해 가방에 넣으면서, 이건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계신 아버지 드릴 것, 이건 관절이 안좋은 누나에게 줄 것, 이건 곧 결혼을 앞둔 딸에게 보낼 것... 하면서 챙기는 거다. 그리고는 챙겨둔 약초를 집에 와서 다 손질한다. 깨끗하게 물로 씻고 정성스레 덖는다. 약초의 기운이 빠져나갈까 주걱이나 젓가락을 쓰지 않고 손에 장갑을 끼고 손으로 직접 덖는다. 그렇게 손질한 약초를 가족들에게 보냈을 때 가족들이 아 맛있다 향이 좋다 는 등의 반응을 보이면, 그 재미에 자기가 계속 할 수 있다는 거다.



그에게 동생을 잃은 상실감은 아직까지 가슴 깊이 묻혀져있는 아픔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죽은 동생 얘기를 하는 것은 목소리를 떨리게 하는 일이다. 그런 사람이니 남은 가족들의 건강을 반드시 챙기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더라. 식구들도 저 사람은 산에 살 사람, 하고 다들 인정하고 있다는데, 가족들이 바란 건 '더 깊은 산속으로는 들어가지 않는 것' 이라고 했다. 가끔이라도 자기들이 찾아와 만날 수 있도록.



산에서 살면서 몸에 좋은 약초를 챙겨 가족들에게 보내주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산 사나이도, 그리고 그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가족들의 마음도 다 이해가 됐다. 그렇지만 약간 아쉽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서 나랑 함께 밥을 먹고 웃고 이야기하고 잠드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게 못내 아쉽긴 했지만, 세상엔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저마다 사랑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내 기준에서의 아쉬움이 그들에게는 아쉬움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멀리 떨어진 채로 서로의 안부를 챙기고 가끔 들여다보는 게 더 잘 맞는,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반드시 찰떡처럼 붙어있어야만 사랑인 건 아니니까. 어떤 사랑은 그 먼 곳에 당신이 있다는 존재의 확인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도 있으니까. 



오늘 아침까지도 자꾸 생각났다. 혼자 산 속에 살면서 가족들에게 보낼 약초를 챙기는 산(山)사람이.





아침에 우연히 EBS 교재..어쩌고 하는 워딩을 보게 됐다. 나도 고등학생 시절 EBS 교재를 샀던 기억이 났다. 텔레비젼으로 몇차례 교육방송을 보던 것도. 그러자 생각이 갑자기 엄마에게 이르더라. 그 교재, 엄마가 사준건데. 문제집 참고서 다 엄마가 사줬는데. 내가 입을 옷도 그리고 학교 등록금 까지도. 그렇게 삼남매 대학 졸업까지 시키는 동안, 그 돈을 다 벌어대느라 엄마가 얼마나 허리가 휘었을까. 아빠의 경우엔 딸들은 대학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내가 수능을 망쳤다고 울었을 때, 아빠는 대학에 안가도 된다, 돈 벌자, 라며 나를 설득하셨더랬다. 당시 아빠가 부러워했던 사람은, 딸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취업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부모님께 드리는 집의 '아버지' 였던 거다. 엄마가 계속해서 강하게 대학에 보내야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그저 아빠의 말에 알겠다고 답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랬다면 지금의 내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나아졌을 수도 있고 더 나빠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미안하다. 내가 대학에서 배운 게 없어서. 대학에서 배운 게 없고 고등학교때 공부도 못했고, 문제집은 사달라고만 했지 죄다 안 풀고 밀리기만 해서, 뭔가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시킨 것 같은 생각도 들고. 어차피 풀지도 않을 문제집이었는데, 공부 잘하는 동생들이나 사주게 할걸... 나는 문제집 사줬다고 공부를 더 잘하지도 않았는데... 그러면서 왜이렇게 사달라고는 징징거렸을까. 이 문제집 사줘, 저 학습지 구독해줘... 돈도 없는데 자식이 공부하겠다고 하니 그걸 사주긴 사줘야겠고, 그런데 돈은 없고, 그런데 사줘야 되고, 그러니까 쉴 새 없이 돈을 벌어야 하고...


오늘 아침엔 갑자기 이런 게 너무 고마워지면서 이걸 꼭 엄마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나중에 말해야지' 했다가 말하지 않는다면 엄마는 내가 고마워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막 문자를 보냈다. 학창시절에 우리 삼남매 문제집이며 참고서 사주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대학까지 다 졸업시키느라 진짜 고생이 많으셨어요, 감사드려요, 라고 문자메세지 넣었다. 한참 손주들 유치원이며 어린이집 보낼 준비하시느라 바쁘실 우리 엄마, 아직 메세지 확인은 안하고 계신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사랑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게 찾아오고 또 어떤 관계냐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는 것 같다. 이모네집에 간다면 좋아서 미리부터 가방싸고 준비했던 어린 조카는, 이제 일곱살이 된 후에는 이모집보다 제 집을 더 좋아한다. 내 책상, 내 친구들, 내 방이 그립다고 울기도 하더라. 그 어린 아이에게 '나의 것'이 생기는 순간이 확 큰 순간이 아닌가 싶다. 그 아이에게 자신만의 생활이 생겼고, 그래서 이제 그걸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 같은 게 생긴 것 같다. 이모와 삼촌을 보고 함께 노는 건 좋지만 몇 밤을 자면서 있기는 싫은, 이제 그런 나이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봐야만 했던 시간들이 분명히 있었는데, 각자의 생활이란 게 생기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다음에 보는 걸 기약하는 시간이 멀어진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중학생이 되고 또 고등학생이 되면, 그리고 대학생이 되면, 이모를 만나는 시간은 아마 연중행사가 되지 않을까. 차츰차츰 빈도가 줄어들다가 희미해지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서 부모로부터 독립해 따로 살지만 나는 아직도 부모님과 함께 산다. 그러나 어느틈에 우리는 한 집에 살지만 각자 생활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다. 주말에 만나기는 하지만 주중 내내 엄마와 떨어져있고 격일로 아빠랑 떨어져있고 퇴근후 회식이다 야근이다 하는 이유로 남동생과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것도 드물게 되어버렸다. 누구나 각자의 생활이 생기는 순간 함께 오래 붙어 있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가는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더 좋은 걸 수도 있고.



인간은 결국 사랑하면서 사는 고독한 동물인 것 같다. 음...




저 수많은 인간의 정의 중 하나를 굳이 고르라면 나는 `호모 에로티쿠스`를 택하련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처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를 미소짓게 만들지 않는가. 어떤 존재든 일단 사랑하기만 하면 간도 쓸개도 내줄 줄 아는 아름다운 광기가 있어,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아직 지구에 살아남은 것이 아닐까. 사랑의 그 끔찍한 계산 불가능성이야말로 결코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의 소중한 공통분모가 아닐까. (정여울, 마음의 서재, p.116)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16-03-10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에 개그맨 허경환이 했던 말이 저는 요즘 너무 와닿더라고요. 이제 어머니를 만나면 이렇게 몇 년이나 만날 수 있을까 싶어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요. 이제 부모님이 늙어서 우리와 작별할 시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나이가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 저도 몇 주 전에 뜬금없이 아버지에게 애정을 고백하는 --;; 문자를 보냈어요. 그래서 다락방님 말이 어떤 건지 공감해요. 가족 간에 이렇게 영원히 지낼 수 없는 거잖아요. 어렸을 때에는 이렇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동생들도 엄마도 아버지도...이제 좀 뜬금없지만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고생하셨다고, 이런 문자들 자주 보내려 합니다.

다락방 2016-03-10 09:57   좋아요 1 | URL
이런 말을 진작부터 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랑한다는 말을 고맙다는 말을 진작부터 했으면 좋았을텐데요. 그런데 항상 이런 생각은 너무 늦게 찾아오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여러모로 늦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블랑카님 말씀처럼 저도 이제 좀더 자주 마음을 표현해야겠어요. 고맙고 감사하다고요. 그리고 정말 고생 많으셨다고요. 우린 누구나 다 그렇잖아요. 내가 고생한 거, 누가 고생했다고 알아주기만 해도 참 행복해지잖아요. 그거 안다고, 알고 있다고 계속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겠어요, 블랑카님.
얼마전에 블랑카님 서재에서 머리카락으로 노화를 알겠다고 얘기했지만, 요즘 저는 이래저래 노화를 많이 실감해요. 삶이 유한하다는 게 훅훅 다가오는 것 같아요. 좋은 감정은 죄다 말하고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우리 그러도록 해요, 블랑카님.

기억의집 2016-03-10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인과 깍두기의 조화~ 음.... 맛있나요?

저도 엄마랑 같이 있으면 자연인 보는데, 팔자 참 기구하다란 생각이 들때가 있었어요. 저는 혼자인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왠지 산에 가서 너 혼자 약초 캐고 살어, 이러면 못 살 것 같다는.. 사람이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카가 일곱살이면 이제 자기집이 좋을 나이이긴 해요. 저도 조카들하고 친하게 지냈는데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다들 멀어지긴 하더라구요.

저는 엄마아빠가 다 대학을 가길 원해서... 나중에 나이 들어 철 들었을 때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저의 세대만 해도 여자가 대학진학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그 전세대보다 많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는 취업을 하길 원하던 부모님이 더 많았던 세대라. 저의 집도 삼남매인데, 저의 삼남매 다 대학 보내주시고 ... 엄마 막 주중에는 파출부 다니고 주말에는 예식장에서 정리하고 치우고 그런 일 하시면서 저의 대학 보내주셨는데, 그 땐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엄마가 예식장에서 일하고 오면 먹을 거 가져오셨는데 그것만 찾고 엄마 힘든 건 몰랐어요. ㅠㅠ

전 엄마한테 엄마 고맙다고 해요. 대학 보내줘서....

다락방 2016-03-10 10:55   좋아요 0 | URL
저도 산에 혼자 가서 살라고 하면 살지 못할 것 같았는데요, 산이 아니라면 또 생각이 달라질 것 같아요. 직장생활이라던가 인간들한테 치어서 스트레스 받는 일들이 혼자 조용히 살면 없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러려면 자연을 벗삼아야 되지 않을까, 그래야 먹고 사는 게 가능할테니까, 싶더라고요. 생각만 그렇지, 저는 겁이 많아서 아마 시도도 못할 거에요.

초등학교때 멀어질거고 중학교때는 더 멀어지겠죠. 그렇게 나이 먹어갈수록 저랑은 더 멀어질 것 같아요. 저만해도 저의 이모와 명절때나 보는 사이니까요. 서운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것이 자연스러운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네, 저도 대학 보내줘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던 건 엄마의 어마어마한 노력과 고생 덕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이런 걸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거란 생각을 참 많이 해요. 그러나 지금이라도 알아서 엄마에게 감사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요. 저희 아빠도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 취업이지 라는 마인드를 갖고 계셨는데, 거기에 심하게 반박해준 엄마가 고맙고요. 그때 제가 어려서 엄마가 바깥에서 힘들게 일하고 집에 들어와서 설거지며 방치우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돈도 벌고 아이들 뒷바라지도 해야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는 엄마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요. 그걸 너무 늦게 알게 됐네요...

저도 계속 고맙다고 할게요.


아! 깍두기는 어떤 술에도 어울려요. 사실 저는 모든 음식이 모든 술의 좋은 안주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clavis 2016-03-10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존경합니다

모든 음식이 모든 술의 좋은 안주!
어떤 존재든 사랑하기만 하면 간이든 쓸개든 다 내어주는 아름다운 광기!

두 문장이 수려합니다
미문이셔요

다락방 2016-03-10 12:06   좋아요 1 | URL
아아, 그렇지만 `어떤 존재든 사랑하기만 하면 간이든 쓸개든 다 내어주는 아름다운 광기!`는 제 문장이 아닙니다. 저기에 링크한 `정여울`의 책, [마음의 서재]의 인용문입니다. 정여울의 문장인 것이지요. 크- 그것도 제 문장이었다면 클레비스님께 미문 쓰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텐데...안타깝네요. ㅎㅎ

clavis 2016-03-10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이미 그러하시잖아요
늘 다락방님 글 보며 기뻐하고 놀라워하고 있습니다^^감사드려요

다락방 2016-03-11 10:18   좋아요 1 | URL
히힛, 말씀 고맙습니다, 클레비스님. 글 쓰는 데 보람을 느끼게 만들어주시네요. 헤헷 :)

단발머리 2016-03-1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더 미안하다. 내가 대학에서 배운 게 없어서.

에 눈물나도록 공감해요. 대학가서 아무것도 안 배운거 아니고, 나도 나 나름대로 새로운 것 배운다고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대학에 들어갈때 원래 목표로 했던대로 공부하지 않았던 것. 그것에 대해서는 정말 후회합니다. 엄마아빠가 비싼 등록금 내주시고 비싼 책 사주셨는데, 나는 폼으로 들고만 다녔어요..

흐흑..... 불효녀는 웁니다.

다락방 2016-03-11 08:46   좋아요 0 | URL
그렇게 비싼 등록금 내주셨는데 저는 대학에서 배운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건 제가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학교를 잘 다니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대학이 제게 해준 게 1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미안해요. 엄마가 등록금을 내준 건 대학을 졸업했다는 타이틀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사실 그 타이틀이 본래 목적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취업하는 데 더 유리한 점들이 있었으니까요.

공부의 중요성을 몰랐던 것 같아요. 그게 너무 속상해요. 알았으면 그때 열심히 수업도 듣고 책도 찾아보고 더 많은 것들을 알고 느끼고자 했을텐데.. 제가 너무 늦된 것 같고, 깨닫지도 못한 자식한테 돈을 들이게 한 것 같아 그게 너무 죄송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단발머리 2016-03-1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엉엉엉엉엉엉엉엉엉엉.........


나의 눈물은 그치지 않고
불효녀는 웁니다.


흐흐흑....................

다락방 2016-03-11 08:48   좋아요 0 | URL
그렇지만 단발머리님과 대화를 나누고 글을 읽다보면, 단발머리님은 이미 충분히 많은 지식들을 갖고 계시고 그걸 학창시절에 이뤄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성실한 학생이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들고, 등록금이 아깝지 않았을 것 같안 생각이 저는 들어요. 너무 많이 울진 말아요, 단발머리님. 그렇지만 일단 지금은 같이 좀 울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책읽는나무 2016-03-1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여울이라 하니 예전에 읽다가 만 여행서책이 생각나네요.마저 읽어야 하는데..^^

`인간은 결국 사랑하면서 사는 고독한 동물`
맞는 말 같아요.
지독히 사랑은 하는데 말이지요.가족끼리는 그것을 잘 표현하진 않잖아요.
표현을 미루거나 가슴속에 담아두기만 했더니 결국 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 가족이 생겨 늘 그립게 되고 말이죠.
저도 요며칠 줄곧 나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있었어요.
어젯밤 꿈에도 엄마가 나왔더라구요.
저는 늘 엄마가 고맙고 감사해요.^^
예전엔 그저 내가 잘나서 또는 내가 못나서 이렇게 살고 있다라고 자만과 자책을 많이 했었는데...어느날 문득 내가 속해 있는 상황속에서 마음이 갑자기 흡족하고 기뻤던 순간들이 있었어요.너무 좋아서 행복하다라고 느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더군요.엄마와 아빠는 이런 기쁨과 행복을 누려보셨을까? 엄마는 조금이라도 이런 생활을 누려보고 돌아가신걸까?뭐 그런 생각이 들어 곁에 있는 남편한테 그리 얘길 했더니 좀 애매하여? 지금은 기억이 잘 안나는 대답이 돌아오긴 하였지만 그후론 `좋다`,`기쁘다`,`행복하다`란 감정들이 들적엔 그런 나를 있게 한 부모님...무엇보다도 엄마가 먼저 떠오르네요.
그저 내가 잘나서가 아닌 뒤에서 묵묵히 나를 키워주신 엄마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단 것을 뒤늦게 깨달아요.
이제 좀 철이 들어가는 나이인가?싶기도 하구요.
이젠 그사랑이 무척 고독합니다만...^^
다락방님의 문장이 제겐 참 와닿네요.!

다락방 2016-03-11 08:51   좋아요 1 | URL
그 여행서는 좀 별로였어요. 아무래도 대한항공하고 조인해서 만들어서 그런지 제가 읽으면서는 `억지로 쓴 것 같다`는 느낌이 좀 들더라고요.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글도 있거든요. 정여울의 글 자체가 주는 매력은 분명 있었지만 기획 자체가 좀 엔지이지 않았나... 싶었어요. 차라리 그냥 정여울만의 여행기였으면 훨씬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늘 엄마가 고맙고 감사해요. 그리고 만약 제가 엄마가 된다면 우리 엄마의 반도 따라하지 못할 거란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고, 또 이렇게 새록새록 깨닫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러면서도 왜 같이 있을 때는 틱틱 거리고 못되게 말하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다정하게 대해줘도 모자란데 말이지요. 유행가 가사중에 그런 게 있잖아요. `사랑만 하기에도 하루가 모자라` 라는...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 새록새록 할때마다 엄마께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해요. 엄마가 저랑 함께하는 동안에는 충분히 `아 얘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를 느끼시게 해드리고 싶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
 















이 책을 읽다보면 인용된 책들을 꼭 한 번씩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책을 안읽고 나는 대체 뭐했단 말인가, 하고.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도 세 권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는 이 책 속의 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으면서도 내심, 소설을 더 많이 다뤄주었다면 더 재미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크게 느낀 건, 유시민의 대학생활은 나의 대학생활과 어마어마어마어마어마하게 달랐구나, 하는 것.


그리고 가장 크게 놀랐던 책, 아니, 이런 책이 있단 말이야? 했던 책은 '맬서스'의 [인구론]이다. 쉽게 말하면 인구가 늘어나면서 식량은 부족해 기근으로 죽게 될것이니 질병에 걸려도 예방하지 말자, 같은 내용을 주장한다는데, 게다가 인구를 늘리지 않기 위해서 '여성의 순결'까지 주장하는 게 아닌가. 헐. 


예로부터 참으로 모순된 주장 중 하나가 '여성의 순결'이 아니었나 싶다. 여성이 순결하지 않다면, 여성이 누군가와 성관계를 맺었다면, 그것은 대체 누구와 한 것이란 말인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성관계를 갖는데 여성이 순결해야 한다고 하면 자연스레 남성도 순결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어떻게 남자는 괜찮은데 여자는 순결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건 논리가 부족한 사람도 알 수 있는 모순 아닌가? 


어쨌든 '맬서스'의 인구론은 이런 내용들이 담겨 있다고 한다. 정말이지 핵충격이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아.. 너무 충격적이었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의 인용문 중에서도 인상 깊은 게 있었다. 사실 매 인용문이 그랬는데, 어쨌든 옮겨보겠다. 샤롤 드골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베트남전에서 손을 떼라고 충고하며 한 말이란다.




나는 케네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이 지역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당신은 끝없는 미로에 빠질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한번 눈을 뜨고 궐기한 다음에는 아무리 강대한 외부적 세력도 그 의사를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부 현지 지도자들이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와 목적에서 당신을 섬실 생각이라 하더라도 민중은 그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당신을 원치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는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불러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인도차이나 민중은 당신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를 당신의 지배욕과 동일시 할 것이다. 당신이 그곳에서 반공주의를 내세워 깊이 개입하면 할수록 (……) 민중은 공산주의자를 더욱 따르고 지지하게 될 것이다. (……) 불행한 아시아와 아시아의 민족들을 위해서 우리나 딴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 민족이나 국가의 살림살이를 우리가 떠맡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나 전횡적이고 억압적인 정권을 낳게 하는 원인인 인간적 고통과 욕된 상태에서 그들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책속에서, 『전환시대의 논리』, 356쪽에서 재인용)






『공산당 선언』은 포악한 권력의 무자비한 압제와 넘어설 수 없는 절대 빈곤의 장벽에 절망한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무거운 현실에 짓눌려 숨이 넘어가는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이, 단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도모하는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하고 역사와 문명의 승리를 앞당기는 거룩한 행위가 된다는 신념은 그 얼마나 매력적인가! (p.53)



아, 국민학교 다닐 때, 해마다 반공스크랩을 해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공산당, 그 이름은 아주 무서운 것이었는데.. 아아..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이 책에서 언급된 책들을 보관함에 넣으면서 또 어떤 책들은 장바구니에 넣으면서, 장바구니에 담겨 있는 책들을 보았다. 5만원에 맞추려면 정리 좀 해야 될테니까. 장바구니에는 18권의 책이 들어있었다. 어휴, 몇 권만 살릴 수 있는데 도대체 뭘 살린담, 하고 책들을 보는데, 어어, 소설책이 다섯 권 밖에 안되더라. 이게 무슨일이지? 나는 백프로 소설만 읽었었는데..어쩌다가 장바구니에 소설이 아닌 것들이 이렇게 많이 담기게 된거지?


갑자기 소설에 미안해진 나는, 부랴부랴 당일배송으로 소설 한 권을 주문했다. 내내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책이었다. 계속 걷는 여자가 나온다고 한 책이었다. 오늘 퇴근길에는 소설을 읽어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배송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친구 한 명이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너 밀양을 살다도 읽었더라, 라고. 그래서 응, 이라고 했더니, 방통대 과제 참고도서로 이 책이 있어서 사려고 들어갔더니 이 책에도 내 페이퍼가 있었다며 도대체 언제 이렇게 다 읽은 거냐고 한다. 일전에도 과제 때문에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검색하다가 거기에 달린 내 페이퍼를 봤다고 했고, 또 무슨 책이더라, 뭐 검색하다가 내 페이퍼를 봤다면서, 검색하는 책마다 네 글이 있어, 라고 하더라. 아하하하하. 좀 그렇지?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올바른 정신건강과 뛰어난 공감능력 타인에 대한 넓은 이해는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독서로부터 왔다. 배우도록!>


ㅋㅋㅋㅋㅋㅋㅋ 그러자 친구는 알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주 많이 웃었다. 많이..아주 많이...정말 많이.......




남동생은 얼마전에 내가 추천한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읽고 재미있고 좋았다고 했다. 나는 항상 녀석이 책을 읽고나면 어땠어? 라고 물어보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반응은 [스토너]에 대한 것이었다. 어땠어? 라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졸 애잔하다..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감상이 진짜 간단하다 ㅋㅋㅋㅋㅋㅋ근데 저 책 읽고 저렇게 느낀 게 너무 좋다. 오래전에, 자기가 읽은 책이 마흔 권도 넘었다며, 이제 자기도 책 한 권 쓸 수 있다는 헛소리를 한 적이 있는데, 스토너를 읽고서는, '스토너가 나같다' 이런 되도 않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작년 여름에 칠봉이랑 함께 갔던 장어집 <금강수림>에서는 줄기차게 문자메세지가 온다. 오늘은 이런 문자메세지가 왔다.


<모든생명이 기지개를 펴는 봄이 시작되는 3월입니다. 건강과 행운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금강수림>


아하하하. 더덕장어구이 먹으러 가기 전에 예약을 했고, 그때 전화번호를 남겼었는데, 그 후에 이렇게 꼬박꼬박 문자가 온다. 웃겨. 장어를 먹으러 한 번 가야겠구나.






그리고 이런 책이 나왔더라.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 이번에 책 살 때 이 책은 꼭 넣기로 해야겠다.














아 밥 먹고 싶다. 밥 먹으러 가야겠다.

어쨌든 [청춘의 독서]는 좋은 책이었다. 읽기를 잘했다, 정말.


그리고 오늘 책 한 권 주문하고 받은 메일. 결제 내역이란다. ㅋㅋㅋ 보고 빵터짐 ㅋㅋㅋㅋㅋ








언어가 있다는 것, 문자를 쓴다는 것,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있다는 것, 솔제니친과 같은 작가가 있다는 것,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다. (p.198)

선거가 진실과 진리의 승리를 확인하는 무대가 되는 일이 가끔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선거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은 대중의 욕망을 활용하는 능력을 가진 잘 조직된 기득권의 승리다. (p.259-260)

`근본적 변화`는 아름다운 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이르지 못하는 부분적·점진적인 개선을 아름답지 않거나 의미 없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누구도 변화를 일으키려고 도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것이 토지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구각 경제 위기나 기업의 도산에 직접적 책임이 없는 노동자들을 경제 위기 극복이나 기업 회생을 명분으로 대량 해고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노동조합의 항의에 국가는 물대포와 강제해산, 손해배상과 구속, 유죄 선고로 대응할 뿐이다. 이런 부조리를 해소하는 `근본적 변화`가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에 사람들은 이런저런 부분적 점진적 개선이라도 해보려고 노력한다. 조지와 같은 성자를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해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비난하고 멸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p.266-267)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라디오 2016-03-09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락방님 덕분에 <청춘의 독서>을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ㅎ
저도 지금 <인구론> 부분을 읽고 있는데 진도가 비슷하네요ㅎㅎ

앞으로도 좋은 글 기다리겠습니다^^

<돌로레스 클레이본>과 <스토너>도 언젠가 읽어봐야겠네요~^^

다락방 2016-03-09 13:56   좋아요 1 | URL
저 청춘의 독서 다 읽었어요. 밑줄긋기는 이 페이퍼에다 수정해서 옮길거고요.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정말 좋더라고요. 고양이라디오님 말씀처럼 즐겁게 읽었어요. 인구론 부분이 정말 쇼킹하더라고요. 아 세상엔 이런 걸 주장한 사람이 있구나 하고 말예요.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그의 주장 논리가 고개 끄덕여지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사람 사는 게 그래도 그게 아니지, 라는 생각도 들고요. 진짜 재미있고 의미있는 독서였어요. 제가 이 책을 사두고 있었다는 게 좋을만큼 말이지요.

돌로레스 클레이본과 스토너도 정말 강추합니다, 고양이라디오님. 아, 세상에 이렇게 추천할 수 있는 좋은 책들이 있다는 게 진짜 재미있고 씐나요! >.<

alummii 2016-03-09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싶어지는 리뷰였습니다 감솨^^

다락방 2016-03-09 13:57   좋아요 0 | URL
우히히. 네네, 즐겁고 의미있는 독서였어요. 추천합니다. :)

blanca 2016-03-09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동생 <스토너> 리뷰 진짜 압권 ㅋㅋㅋ 나 쓰러져요. 촌철살인, 락방님 동생 자격 있습니다. 어떡해요. 자꾸 생각나서 혼자 있다가 막 웃고... 책임져요.

다락방 2016-03-09 14:25   좋아요 0 | URL
저걸 육성으로 들으면 진짜 빵터져요. 아니 이런 우아한 책에 `졸 애잔하다` 라는 감상이라니. ㅋㅋㅋㅋ 녀석이 마침 돌로레스 클레이본도 다 읽은 참이라 다음 책을 골라 추천해줘야 하는데, 뭘 해줄까 지금 혼자 고민중이에요. 정작 녀석은 어제도 그제도 술 마시고 늦게 와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지만....하아-

책읽는나무 2016-03-1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 애잔하다....ㅋㅋㅋ
전 아직 스토너를 읽지 않아서요.
도대체 어떤 느낌인거지?? 스토너 빨리 찾아읽고 싶어젠요.
나도 졸 애잔할 수 있을까요?ㅋㅋ

`청춘의 독서`는 열심히 서가를 뒤져도 대출중이었고 반납은 또 언제 될지 모를 지경에 놓인 책이더군요.
다락방님의 글을 읽을수록 청춘의 독서를 읽다가 포기한 것이 아쉽군요.
꼭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16-03-11 08:54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아직 스토너를 읽지 않으셨군요! ㅎㅎ
읽게 되신다면, 그리고 끝까지 읽으신다면, `졸 애잔하다`가 확 와닿으실 거에요. 그렇게 되실 거라 믿습니다! ㅎㅎㅎㅎㅎ

[청춘의 독서] 너무 재미있어요. 한편으로는 아아 나는 왜이렇게 사유가 깊지 못했을까, 싶기도 하고 유시민은 저와 차원이 다를 정도로 너무 똑똑한 사람이란 생각도 들고요. 고등학생 때부터 원서도 읽고 그랬더라고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ㅠㅠ 전 지금도 원서는 손도 못대는데... ㅠㅠ

읽게 되신다면 책나무님도 하실 얘기가 되게 많으실 것 같아요. 꼭 글로 남겨주세요! 저도 책나무님의 감상이 궁금해요.
:)
 
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중 일부분인데, 지금 여기 얘기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엠비를 대통령으로 두고 살았던 나라에서 '아 이럴 수도 있구나' 했는데, 지금은.........................





그래도 우리의 국민성은 타락하지 않기를.

어제 시사인에서 이런 문장을 봤다.



하지만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 '정치 무관심에 대한 최고의 형벌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 이라는 잠언이 전하듯 총선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혐오만 하기에는 정치가 너무 중요하다. <시사인 제 443호 28쪽, 정리 김은진 기자>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나 몰라라' 하던 사람. 국회가 저모양이지 뭐, 정치야 뭐, 하던 사람. 나는 학생때 운동권이었던 것도 아니고 정말 귀를 닫고 살았었다. 한 번은 대학교에서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나는 '저런다고 등록금이 인하되나' 이러고는 지나쳤더랬다. 이런 일화를 들자면 수도없이 많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친구들에게도 말했었는데, 그 시절의 나는 '없는 사람' 이었다. 아빠가 말해주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인 줄만 알았더랬다. 그러나 정치가 중요하다는 걸 요즘에야 깨닫는다.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가 테러방지법 통과되는 걸 목격하고는, 이것이 내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도 있겠구나, 한다. 그래서 대통령을 잘 뽑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아놓느냐 하는 것은, 그 대통령에게 표를 준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더 악한 사람을 권력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표를 '주는'행위가 필요하다. 사생활에 대한 것도, 노동에 대한 것도, 그것들이 법안이 되어 통과되는 순간 내 삶에 아주 깊숙하게 침투한다. 나는 악한 사람의 지배를 받고 싶지 않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다. 악하고, 고집세고, 다른 사람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권력을 주고 싶지 않다. 정말 그렇다. 



전남친 중에 한 명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너는 '비학습 좌파' 라고(정확히 이런 워딩이었나??). 학교때 공부도 못했고 운동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살아가면서 생활에서 좌파로 변하고 있다고. 요즘의 나는 전남친의 그 말이 생각난다. 그때는 그런가, 했는데, 요즘에는 그렇구나, 한다. 내가 좌파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딱히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뒤늦게야 좀 알게 되고 보이는 것 같다. 내가 '없었던' 시절을 돌려받고 그 때로 돌아가 더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지금의 나인채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면, 과거로 시간을 돌린다해도 나는 그때와 아마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똑같이 무심하고 똑같이 혐오하고 똑같은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결국 그런 시간들을 거쳐서야 비로소 나는 지금의 내가 된 것일 거다.


유시민의 이 책이 진짜 참 좋다. 지금의 내게 맞춤한 책이다. 다 읽고나면 또 글을 쓰게 되겠지만, 어쨌든 좋다.



결과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더 악한 사람에게 권력을 주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거다. 그것이 투표라면, 나는 그것을 할 것이다. 지금도 나는 많은 주변 사람들, 나의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내가 젊은 시절에 무심해서 이 나라를 이지경으로 만들었는지도 몰라. 이 꼴 되지 않게 하려고 했던 당신들에게 미안해.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죄책감을 앞으로는 갖고 싶지 않고, 이런 미안함을 앞으로도 갖고 싶지 않다. 간혹 친구들에게 '너는 그때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니? 나는 몰랐는데' 라고 말하는데, 그럴때마다 과거의 나로 인해 미안해진다. 나이들면서 아주 많은 것들이 미안해진다. 페미니즘에 관심 없었던 게 미안해지고 정치에 관심 없었던 게 미안해진다. 내가 모르는 채로 지냈던 많은 것들에 대해 미안해진다.


엊그제는 오래전부터 유시민을 좋아했던 한 친구에게, 이제서야 네가 왜 그를 좋아하는지 알게됐다, 그동안 몰라봐서 미안하다, 라고 말했다.


나는 참 늦되구나..




그나저나

진선미 의원에게 표를 주고 싶은데 진선미 의원은 강동갑... 나는 강동을.. ㅠㅠ


테러방지법 통과되고나니 글 쓰는 게 쫄려 ㅠㅠ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애 2016-03-09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서민 교수님의 경향신문 칼럼을 보며 시원하긴 한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랑방 (뒷)담화 같다는, 우린 줄곧 그런 이야길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판은 하지만 절실하지 않은. 반성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아무개 2016-03-09 09:00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 아침에 그 칼럼을 읽었어요. 아애님 말씀에 공감 백만개 드리고 갑니다...

다락방 2016-03-09 11:58   좋아요 1 | URL
음 저는 조금 생각이 달라요. 글을 쓰는 사람이 글로 하는 얘기, 그리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쓴 글은 이미 뒷담화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밖으로 퍼진 말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고요. 저는 글을 쓸 때 제게 어떤 식의 악플이 달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그걸 매체에 발표하는 사람이라면 더 크게 알고 있겠지요. 그럴 경우에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말을 혹은 어떤 욕을 듣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감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그것은 `우리끼리 하는 뒷담화`의 수준을 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아애님만 하더라도 벌써 그 글을 읽고 반성과 고민으로 넘어가셨잖아요. 그렇다면 이미 뒷담화를 넘어선 거 아닐까요?

반성하고 고민하게 된다는 말씀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건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랄까요. 저 역시 최근 몇 년간 많은 것들을 반성하고 고민하고 있어요.

아애 2016-03-0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자각이 절실해지면 행동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락방님의 생각이 점점 많은 이들의 자각이 되고 그러면 변화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꿈을 여전히 꿉니다.

다락방 2016-03-09 12:00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것처럼 자각이 절실해지면 행동으로 옮겨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자각은 그 단어가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 해야하는 것이죠. 저는 움직이지 않는 자들을 움직이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 힘이 너무나 미천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글을 씁니다. 어딘가의 누군가는 어떤식으로든 제 생각과 글로 말미암아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고 변화로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아애님, 저도 그런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 꿈을 멈추는 순간 변화 자체도 멈추는 거라고 생각해요.
계속 꿈을 꾸도록 합시다, 아애님.

단발머리 2016-03-09 1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악한 자가 나가면 더 악한 자가 들어선다, 가 지금의 우리 상황이죠.
MB를 보면서 아...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피로 얻은 민주주의가 이렇게 한번에, 단번에 후퇴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웬걸로... 박근혜는 한 수 위네요. 더 할 수 없을 거라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여기에서 방심하면 안 되는데, 이게 끝이라 생각하는 순간, 더한 사람이 대통령 될 수도 있다는 거, 그런 생각을 하면 또 머리가 띵해집니다.

오래전부터 유시민 좋아했던 친구가, 제가 아니란 말입니까. 아... 누구신가요. 그 분은.
유시민에 대해서라면 저도 나중에 따로 글을 쓰고 싶네요.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 뭐 이런 제목으로요.

<진보와 빈곤>은 대학 때 읽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저쪽 방 어딘가 있을텐데, 다가가서 먼지 한 번 털어주는 센스. 점심 맛난거 드세요, 다락방님~~ **^^*


다락방 2016-03-09 12:03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도 유시민을 좋아하셨군요. 게다가 진보와 빈곤도 읽으셨다고요? 하아-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께 무한한 질투의 감정이 생깁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았고, 지금도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 왜 저는 이렇게 갈 길이 멀기만 한걸까요. 누군가 진작 깨달은 것을 왜 저는 이제서야 깨닫고 있는 걸까요. 이미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알고 계셨던 단발머리님께 저는 질투가 납니다.

진보와 빈곤은 이 책에서 읽고 너무 인상깊어서 다음에 책 살 때 사야겠어요. 너무 읽어보고 싶어지지 뭡니까. 인용문들만으로 진짜 근사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2016-03-09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9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16-08-3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늦었습니다. 정치도 진보도 페미니즘도요. 그리고 유시민도요. 투표말고 사회참여도 해야되는데 `책만 읽는 바보`가 되었습니다ㅠㅋㅋ

다락방 2016-08-30 21:16   좋아요 1 | URL
일단 읽는 걸로 시작합시다, 고양이라디오님. 읽다보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다보면 또 실천하고 싶어지기도 할테니까요. 바보 아니에요, 고양이라디오님.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는 행동하고 계신다고 생각해요. 책 읽고 부지런히 글 쓰시잖아요. 그 글을 보고 누군가는 자극 받아서 책을 읽기도 할텐데, 그것만으로도 영향력 있는 일을 하고 계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고양이라디오 2016-08-31 10:06   좋아요 0 | URL
ㅠㅠ 다락방님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다락방님 덕택에 좋은 책들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다락방님의 저서부터해서 <곰스크로 가는 기차>, <청춘의 독서>, <악어 프로젝트> 등등이요.

저도 사람들의 독서율이 올라가면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아지리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손톱만큼이나마 이바지하고 싶네요^^

singri 2016-08-30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로서의 유시민이랑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이 좀 어긋나 보일때가 있어서 요즘 전 유시민 다시 보기 중입니다 ㅋㅋ

다락방 2016-08-30 21:16   좋아요 0 | URL
전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 읽고 이사람 책 차근차근 다 읽어봐야겠다!! 생각했어요. 아직 그러고있진 못하지만요 ㅋㅋㅋㅋㅋ

징가 2016-08-31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냥 유빠 입니다. 🤗

다락방 2016-08-31 06:3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제 친구중에도 유빠가 있습니다! ㅎㅎ
 

책이 잘 읽히지 않았다. 주말이니만큼 시간이 많은데, 어째 평일에 회사다닐 때보다 더 안읽게 되더라. 책장 앞에 서서 이 책 가져와서 두 장 읽다 덮고 다시 저 책 가져와서 몇 줄 읽다 덮고.. 이렇게 침대 옆 바닥으로 쌓아둔 책이 차곡차곡 다섯 권쯤 되었던가. 에라이, 말자, 읽지말자, 읽지 말라는 거네, 하고는 어제는 독서를 포기했다. 슬럼프네 슬럼프야. 인문서건 소설이건 죄다 읽기가 싫으니 원. 글자를 쳐다보기도 싫다. 잠이나 자자, 하고는 벌러덩 드러누워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다. 졸렸는데 잠은 잘 오질 않았다. 이럴 때면 다시 불을 켜고 책을 읽으면 되는데, 그러면 다시 잠이 솔솔 오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책을 펼치기가 싫었다. 안봐, 안 볼거야. 안 본다고!



너무나 싫은 월요일이 되었고, 나는 어떤 책을 출근길에 읽을까 고민하다, 유시민의 책 중에 하나를 읽기로 했다. 유시민의 책이 집에 몇 권 있는데 한 권도 읽지 않았던 거다. 얼마전에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썰전>에서 유시민이 하는 얘기를 잠깐 들었는데, 그 잠깐동안, 아, 저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터다. 그가 하는 말들 중의 많은 부분들이 필리버스터에서 국회의원들이 얘기했던 것과 겹치는 거다! 그래, 그렇다면 유시민으로 읽자, 거꾸로 가는 세계사는 지금 읽기 싫어, 청춘의 독서를 읽어보자, 하고는 들고 나왔다.


















출근하는 동안 지하철안에서 첫 꼭지만을 읽었는데, 아아, 나는 초반부터 이 책을 들고나온 게 탁월한 선택이구나, 했다. 우선 제일 먼저 그가 이야기하는 책이 [죄와 벌]인데, 그것부터가 좋다! 그가 그 책을 집어들고 덮을 수 없었던 그 일화가 좋다.


고등학생 시절, 공부가 잘되지 않으면 문고판 책이 많았던 아버지의 서가書架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뽑아 뒤적이는 버릇이 있었다. 마음이 끌리는 책이 있으면 기분 전환이 될 때까지 읽다가 덮어두곤 했다. 이렇게 띄엄띄엄 읽었던 책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제목과 내용이 대충 떠오른다. 대입예비고사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던 1977년 가을 어느 토요일, 저녁을 먹고 나서 글자가 깨알처럼 박힌 세로쓰기 문고판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런데 다른 때와 달리 이 책은 중간에 덮을 수가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오후까지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상하 두 권을 다 읽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의 소설 『죄와 벌』이었다. 나는 소설 도입무의 문장 하나에 그대로 '꽂혀버렸다'. (p.15)



아, 재밌다. 재밌어. 이게 이 책의 처음인데, 이만큼만 읽고도 내가 오늘 골라들고 온 책이 정말 잘 고른 책이라고 생각했다. 탁월한 선택이었어. 역시 나는 짱이야, 나는 대단해, 나는 캡이야!! (응?) 한편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고등학생 시절에 죄와 벌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많은 고등학생들이 죄와벌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엔 아니었던 거다. 나는 대학시절 죄와 벌을 읽기 위해 수차례 시도했다가 포기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 스물다섯에 비로소 죄와벌을 읽을 수 있었던 거다. 그 시절에 그 책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아, 이래서 다들 도스트예프스키 하는구나. 죄와벌은 이런 소설이었어! 심리 묘사가 대단하다고 읽었던 것 같은데, 사실 지금은 자세한 것들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라스꼴리니꼬프라는 주인공의 이름만 선명하고 전당포 할머니를 죽였던 것, 소냐, 여동생... 몇 가지의 사항들만 희미하게 기억날 뿐 그게 어떻게 된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이 책을 고등학교 때 읽었다던 칠봉이 생각도 났다. 칠봉이는 당시에 이 책을 마저 다 읽고 싶어서 열일곱살이던 그해, 하루는 학교를 빼먹었다고 했다. 내가 유시민의 이 책,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 칠봉이도 그랬다고 했는데, 이 책을 덮을 수가 없어서 학교도 빼먹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게 죄와 벌 이었던가 까라마조프 였던가, 잠깐 헷갈렸는데, 확인해보니 죄와 벌이 맞았다. 칠봉이도 될성부른 나무였구나.. (응?)


스물다섯에 나는 연애중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나는 직장을 그만둔 백수였고. 퇴근하는 남친을 지하철역에서 기다리면서 이 책을 읽고 있었던 게 생각난다. 책을 읽느라 남친이 오는 걸 몰랐었는데, 온 걸 알고 가방에 책을 넣으면서 남친으로부터 '책 좀 그만 읽으라'는 말을 들었었다. 장난스레 한 말이긴 했는데,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그는 나한테 말싸움으로 지는 것이 내가 책을 읽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더랬다. 니가 책을 많이 읽어서 나한테 이기는 것 같아, 라고. 그도 책을 읽기는 읽었었다. 어쩌다 한 권 읽기는 했는데, 나를 만나기 전이었나 나를 만나면서 였나, 어쨌든 그가 그 당시 최근 읽었던 책이 서갑숙의 책이었다.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그 책을 나도 읽었었다. 대학시절에.... 근데 서갑숙 그 뒤에도 책 냈었구나. 서갑숙의 추파.......


유시민은 죄와 벌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읽는다. 그리고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른 것들이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모든 과정이 참 좋더라. 동시에 나도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어젯밤만 해도 이 책도 싫고 저 책도 싫어, 하고는 독서에 심드렁해졌었는데, 이렇게 아 이 책이 재미있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또 다른 책도 읽고 싶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독서인가. 나는 내가 죄와 벌을 읽고 무얼 느꼈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 그래서 지금 '다시' 읽는다고 해도 아마 처음처럼 읽게 되는 것일테다. 죄와 벌,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영원한 남편까지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니 다시 읽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유시민이 느낀 것을 내가 느낄 수 있을까. 그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내게도 보일까?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면하지 못하는 게 삶의 이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다른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따지는 것은, 악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떤 연역적·논리적인 추론의 산물이 아니다.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보고 체험한 끝에 얻은 경험적·직관적인 판단이다. (p.27) 




라스꼴리니꼬프의 '초인론'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체주의 체제로 현실화되었다.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을 실행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폭력과 범죄를 저지를" "완전한 권리를" 행사한 전체주의 체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등한 인권과 참정권을 부여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의사 결정권을 제한적으로 위임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있다. 20세기 세계사는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수없이 많은 소냐와 두냐들이 좋은 세상을 만든 것이다. 만약 도스토옙스키가 20세기를 목격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다." (p.30-31)




스물다섯에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이런 책을 어떻게 청소년이 읽는단 말이야. 권장도서 라니, 너무 어렵잖아, 라고. 그런데 유시민도 그렇고 칠봉이도 그렇고 읽었구먼..고딩때... 하아- 나는 <스타킹훔쳐보기> 시리즈.. 를 고등학생 때 엄청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오늘자 조선일보 1면의 오른쪽에는 <중학교 때 책 많이 읽은 학생 과목당 수능점수 18~22점 높아>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다. 기사를 읽진 않고 제목만 봤는데, 거기에는 작게 '많이'에 부연 설명이 붙어있었다. <3년간 11권 이상> 이라고. 3년간 11권이라면 결코 많이 읽은 게 아닌데, 이 나라에서의 중학생이라면 그게 많이 읽은 것일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 못보게 하니까, 공부해야 하니까. 물론 나는 중학교때도 고등학교때도 책을 읽었다. 시험기간에도 사실 책을 읽었다. 그러나 나의 과목당 수능점수는 형편없었다. 물론 수능 점수가 내신에 비해 월등히 좋기는 했지만..그렇다면 이게 독서의 영향인걸까? 독서의 영향도 있겠지. 그런데 3년간 11권이라니 너무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최근 3년간 칠봉이가 책 한 권 읽었다는 게 생각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가 어제 그런 얘길 했었는데, 최근 3년간 읽은 책이 한 권이다 라는 얘기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어쨌든 유시민의 이 책 덕에 나는 책 읽는 재미를 다시 느꼈다. 그래봤자 슬럼프와 재미 사이의 시간이라는 게 만 하루도 안되지만 ㅋㅋ 『청춘의 독서』이 책 자체도 재미있는데, 얼른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죄와 벌』을 다시 읽고 싶다. 죄와 벌 보다 까라마조프가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까라마조프는 스물아홉에 읽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더 최근의 일이니. 그러니 확인해보려면 둘 다 다시 읽어야겠구나.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일상의 모든 것이 책을 읽는 계기로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작년에는 그렇게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고 싶더니, 필리버스터를 보고난 후로 나의 관심도서 방향이 이렇게 달라진다. 읽고 싶은 책이, 읽고자 하는 책이 필리버스터 후로 방향을 달리한 느낌이다. 노무현을, 유시민을 읽게 되다니, 나는 내가 어릴 적에는, 아니 최근까지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책만 하더래도 책장에 꽂혀있었던 게 몇 년인데..게다가 책 구입 자체도 뭔가 다른 거 준다 그래서 산 것 같다. 펭귄 책 줬던 것 같은데... 관심이 생기니 더 알고 싶고, 더 알고 싶으니 그건 당연히 독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렇게 연결되는 독서는 다른 식의 관심도서를 또 만들어낸다. 그러고보면 책에 대한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독서의 재미를 얘기해주는 책이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내 경우엔 이 책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이런 식의 댓글을 어느 알라디너분께 달았는데, 그 분이 댓글로 『독서공감, 사람을 말하다』도 그런 책이라고 하시더라. 그런데 어딘가 이상한거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뭐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거지? 어디에서 이상한거지? 하고 검색창에 '독서공감' 까지 입력해봤는데, 자동완성 되는 거 보고 그제서야 알았다.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 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제목보고 빵터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데 나조차도 뭐가 어디가 이상한지 몰랐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시민이 죄와벌을 세로읽기로 읽었다고 했는데, 나도 중학시절에 세로읽기로 읽은 책이 있다. 집에 굴러다니던 책.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였다. 표지가 야해서 꼭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엄마가 못읽게 할 것 같아서 기회를 노리다가 방학 때 읽었었다. 맨 마지막에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불겠지'라고 써있던 문장이 기억나는데, 한참 후에야 영화에서도 다른 책에서도 그 문장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로 번역되어 있다는 걸 알게됐다. 내가 당시에 야했다고 생각한 표지는, 링크한 책들중 중간의 동서문화사와 오른쪽 원서의 표지와 같다. 여자 가슴이 반쯤 보여서 되게 야하다고 생각했었다. 꼬꼬마 시절..












관심이 대상이 생기고 거기에서부터 독서로 연결되는 이런 순간들이 참 재미있다. 좋다. 역시 책읽기는 지독하게 매혹적인 취미인 것 같다. 도무지 끝날 줄을 모르니까. 어떤 계기로 어떤 책을 읽게 되면,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른 책들이 또 줄줄이 있다. 아, 정말 너무 재미있다!




회사다니는 건 왜 재미없지??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ellas 2016-03-07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는 돈을 받고 다니기 때문아닐까요. 모름지기 재미를 느끼려면 내 지갑이 열려야...;ㅂ;

다락방 2016-03-07 18:10   좋아요 0 | URL
돈 받는 일이 재미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ㅜㅜ

책읽는나무 2016-03-0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여러곳에서 락방님의 흔적을 읽으면서요~~줄곧 같은 장소에서(한 곳의 서재에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는데 그래도 빵 터지는 것을 참고 있다가 결국 락방님의 안방에서 세 번이나 터졌어요!

<청춘의 독서>이책 결국 읽어야 할 책이로군요! 몇 달전 이책 대출하려고 앞부분을 좀 읽다가 <죄와 벌> 부분에서 공감하려면 먼저 이책을 읽고보자!! 하면서 내려놓으면서 까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락방님도 책 읽는 것에 슬럼프가 오는군요? 저는 슬럼프가 자주 와서 일종의 변덕이 심해서 그렇다고 여기고 있었어요^^

<독서공감, 사람을 말하다>는 저도 깜빡 속았네요?ㅋㅋㅋ
그리고 3년간 칠봉씨의 독서통계에 저도 빵~~그런얘기에 서로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모습이 예쁩니다ㅋㅋ
칠봉씨는 또매에요(또다른 매력!)

다락방 2016-03-07 18:15   좋아요 1 | URL
아하핫. 어디에서 빵터지신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로 인해 웃으셨다면 저는 기쁩니다. ㅎㅎㅎㅎㅎ

<청춘의 독서> 읽고나면 또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늘어가겠지요.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인 것 같아요. 물론 제가 그걸 다 읽을 순 없지만요. 세상에 읽을 책이 너무너무너무너어어어어어어무 많아서 고민이 되지만 좋아요.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는 순간도 사실은 행복하지요. 청춘의 독서 재미있어요. 물론 한꼭지 밖에 안읽었지만요. 하핫.

칠봉씨는 매력 만점의 남자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매력 터지는 모습에 자기가 자기한테 반하곤 해요. 오늘 아침에도 자기가 스스로 막 반해가지고... 아하하하하. (근데 저도 그래요 ㅋㅋㅋㅋㅋ)

2016-03-07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7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7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7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6-03-07 17:56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그렇군요..^^
근데, 다락방 님과 같은 닉이 넘 많아요..ㅜㅜ

다락방 2016-03-07 18:19   좋아요 0 | URL
야무님의 댓글을 읽고 음... 낮술마시는 다락방 으로 닉네임을 바꿀까, 살짝 고민하다가, 그대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ㅎㅎ 다락방이란 닉네임이 엄청 흔하죠 ㅠㅠ

transient-guest 2016-03-08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탁월한 선택, 좋은 순간들을 만나셨네요. 제가 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저는 좀 무딘 편인지 그렇지 않았는데 `죄와 벌`을 이불을 뒤집퍼 쓰고 부들부들 떨면서 읽었다는 분도 (구체적으로 아버지 소싯적에) 있습니다.ㅎ

다락방 2016-03-08 08:37   좋아요 0 | URL
너무 기대돼요. 지금 읽으면 어떤 기분일지요.
일전에 [레미제라블]을 한 해에 한 번씩 꼭 읽는다는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 책이 그렇게 대단해? 하고 읽었다가 5권째에 이르러서는 눈물콧물 다 흘린 경험이 있던 터라, 죄와벌도 엄청 좋을 것 같아요. 스물 다섯에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지금 읽으면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재미가 막 밀려올 것 같아요. 기대기대. 청춘의 독서를 끝내고 시작해볼까 합니다. 하아. 그렇지만 사두고 안읽은 수많은 책을 놔두고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도 될까요? 아하하하하.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581 | 582 | 58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