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 꿈만 꾸어도 좋다, 당장 떠나도 좋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1
정여울 지음, 대한항공 여행사진 공모전 당선작 외 사진 / 홍익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특히 음악박물관들은 파리, 베를린, 런던 등 대도시뿐 아니라 아주 작은 도시에도 놀랍도록 잘 갖춰져 있다. 나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하우스와 빈의 음악박물관을 무척 인상 깊게 관람했다. (p.265)


올해 초에 잘츠부르크에 가보고 싶어져서 오스트리아 행 비행기를 예약해뒀었다. 달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가을에 짬이 날 것 같아 큰 맘 먹고 할부로 비행기 티켓을 질렀다. 첫 할부를 갚아해 했던 날, 같이 가기로 한 친구와 나는 '할부가 우리를 후려치는데 우리 선택이 잘한걸까' 다시 고민했고, 그래도 여전히 결정은 '가는' 쪽으로 났다. 돈 모아서 가려면 어느천년에 가나, 일단 빚내서 다녀오고 갚아나가자, 돈 생기고 시간 생긴 후에 가려면 못간다, 여태 직장생활하면서 돈 생기고 시간 생긴 적이 있던가.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다녀오고자 했다. 그런데 며칠전, 대한항공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우리가 예약한 비행편의 스케쥴이 변경됐다는거다. 바뀐 일정으로 우리는 갈 수 없었고(하루 차이었지만), 여름으로 바꿀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결국 우리는 오스트리아행을 포기하기로 했다. 항공사 스케쥴 변경이니 취소수수료는 없었고, 카드 승인은 취소되었으며, 이미 결제된 할부금액에 대해서는 이틀 뒤, 환불되었다. 가뜩이나 빈곤모드였는데 그래, 이걸 취소하길 잘했다 싶으면서도, 그럼 또 언제 기회를 노려보나, 이렇게 주저 앉아야 하나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정확히 그런 반반의 마음에서, 나는 정여울의 책을 넘겨보다 저 글귀를 만났다. 무심한 저 한 줄이, 내게는 좀 쓰라렸다. 누군가 다녀왔다, 고 말하는 걸 보노라니 살짝 우울해지기도 했다.



어쩌면 이 책의 책장을 넘겨보면서 그렇게 유럽의 여러곳을 만나보면서 다시 가고 싶어지는 나라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맙소사, 그간 아무 관심 없었던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에 가보고 싶어지고야 말았다. 바로 이 사진 한 장 때문에!



아, 저 싱싱한 굴과 화이트 와인이라니! 이것은 헤밍웨이도 극찬한 최상의 먹거리가 아니던가. 나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으며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내 입 안으로 굴을 넣고 싶어서, 굴을 씹다가 화이트 와인을 입안으로 넘겨 꿀꺽- 삼키고 싶어서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사실 그 해, 겨울에 친구는 나를 위해 생굴과 화이트와인을 준비해줬지만, 굴과 화이트와인은 역시 상상으로 더 맛있었다. 상상으로 더 근사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비행기를 타고 크로아티아로 날아가 반드시, 기필코 저 음식을 맛보고 싶어지는것이다. 그래서 지구본을 돌려봤다. '크로아티아'란 이름에서 주는 느낌은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가까워 보였으니까. 그러나 이 책은 유럽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역시나 지구본에서 유럽에 떡하니 자리한 크로아티아를 보고 포기했다. 유럽은 역시 내게 너무나 멀고도 비싼 나라로구나.



크로아티아에는 해산물요리로 유명한 음식점들이 많다. 통오징어구이나 새우요리도 유명한데, 스톤 부근에 있는 모든 해산물요리에는 이 천연소금이 듬뿍 들어간다. 스톤의 천연소금은 다른 소금보다 훨씬 맛있어서 요리할 때 다른 조미료가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생굴에 이 소금을 뿌려 먹는 요리가 가장 유명하다. 굴과 소금, 레몬만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요리지만 한 번 먹으면 잊을 수 없는 맛이다. (p.92)



아, 생굴과 화이트와인아, 크로아티아에서 얌전히 기다려라. 내가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고 여유라는 게 생기면 한 번 가주리. 가서 실컷 맛보아주리.



여러 지역의 사진들중 유독 예쁘다고 생각되는 사진은 언제나 이탈리아 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이 색색깔의 마을도 바로 이탈리아. 해변마을 친퀘테레 라고. 나는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평소 로망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간혹 이탈리아가 배경인 영화를 보면 오, 정말 예쁘다, 하는 감탄이 쏟아져나오곤 한다. 책에 실린 사진으로도 그 감탄은 어김없이 터져나온다. 크-



아주아주 방탕하고 문란하게 이 마을에서 얼마쯤 살아보면 좋겠다. 하는 일이라곤 그저 눈뜨고 먹고 웃고 얘기하고 술마시고 술주정하고 사랑하는 게 전부인채로, 속옷을 벗어던진 채 하늘거리는 원피스만 입고 신발도 벗어버린 채 맨발로 마을을 마음껏 뛰어다니고 싶다. 그랬다가 미친여자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추방당할지도 모르지만..



정여울의 글은 훌륭하다. 여행기로 만나는 정여울은 참으로 근사해서, 앞으로 정여울이 여행기를 낸다면 계속해서 보고 싶어질 지경이다. 가뜩이나 글도 잘 쓰는데 곳곳에 삽입한 인용문마저도 보석같다. 나는 그녀가 언급한 책들을 메모하기에 바쁘다.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이성복, <금기> (p.41)





자동차가 확실히 해낸 것이 있다면, 자동차를 위한 도로가 만들어진 까닭에 은밀하고 겸손한 몇몇 사람들에게는 걷기가 신비롭고 즐거운 것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샛길, 오솔길, 그리고 초원은 신성하고 달콤한 장소가 될 것이다. ‥‥우리는 낡은 바지를 입고, 편안한 신발을 신고, 담배 파이프와 지팡이를 지닌 채 점심과 저녁 사이에 15마일을 걸을 수 있으며 인간을 향한 신의 길을 찬미할 수도 있다. -크리스토퍼 몰리, 《예술로서의 걷기》 (p.188)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라고 설파하는 서적들의 잘못된 점은, 행복의 진부한 상투어를 독자들 눈앞에 들이밀면서 이루지 못할 기대를 일깨워 불행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원래 어떤 삶이든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행복해지려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지하고 이루지 못할 꿈을 뒤쫓지 말아야 한다. 삶의 기복, 존재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사람은 영원한 건강, 갈등 없는 배우자 관계, 물질적인 소원의 성취를 뒤쫓는 사람보다 어쨌든 행복한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더 많다. 게다가 경이롭게도 행복은 외적인 상황과 무관하다. 부유하고 건강하고 가족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극도로 불행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찢어지게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데도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영원한 행복의 이상향을 추구하는 사람은 확실하게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생 물질적인 부만을 쫓아다니는 사람은 결단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중에서 (p.203)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서야 비로소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역시 크로아티아였다. '자다르 바다 오르간' 이 바로 그곳에 있다는데 설명은 사진에 실린 글귀로-거기에 내가 초록색으로 밑줄을 그었지- 대신한다.




이 책이 어떠한 계기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대한항공과 함께 '기획한 상품'이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정여울의 글은 분명 대단히 매혹적이지만, 간혹가다 주제에 맞춰서 쓸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책의 배경은 알 수 없지만, 대한항공이 정여울을 선택한거라면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그러나 정여울의 여행기로는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정여울의 글이 더 살기 위해서는, 정여울의 글이 더 내게 팍- 다가오기 위해서는 정여울의 여행기가 백프로 정여울의 이야기와 사진으로 채워져야만 한다. 나는 대한항공이 제공한 사진이 아닌, 그녀가 돌아본 시선에 꽂힌 바로 그 곳, 그 장면의 사진을 보고 싶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처럼, 그녀가 가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그리고 카메라를 들이댔던 바로 그 곳과 그 순간의 이야기들이 그녀의 이야기속에 가득 담겨졌으면 좋겠다. 그 점이 몹시 애석하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와 2014-02-12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로아티아..................!!!!!!!!!!!!!!!!
내가 이번에 비행기 스케줄을 알아보고 결제 직전까지 갔던 바로 그곳!!!!!!!!!!!!!!
'꽃보다 누다' 덕분에 이제 그곳은 한국사람들이 바글바글 하겠죠.
뭐.. 그전부터 여행족들 사이에선 유명하다고 했지만.

무튼. 크로아티아. 언제가 꼭 갈꺼에요!! 으악. 크로아티아!!!!!!!!!!!!!!!

다락방 2014-02-14 10:31   좋아요 0 | URL
일전에 마카오 갔을 때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싫었었거든요. 아, 난 여기 싫어..하는 느낌. 아마 지금 크로아티아 가면 그런 느낌을 받겠죠? 크로아티아는 나중으로, 아주 나중으로 미뤄야겠어요.

dreamout 2014-02-12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항공 이라는 글자가 있길래.. 안 샀어요.
책이라기 보다는 매거진에 가까운 느낌일것 같아서.. ^^;

다락방 2014-02-14 10:33   좋아요 0 | URL
정여울의 글이 좋아서 매거진에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건 아닌데, 그래도 간혹 '자 이 주제에 대해 써봐' 하고 툭 던져진 걸 받아친 느낌이 들기도 해서 좀... 정여울의 백프로 여행기였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확실히.

BRINY 2014-02-12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1개월후에 유럽여행 가려고요. 늘 시간과 돈에 쫓겼는데, 다음 겨울에는 시간이 될 거 같아 지르려고 작정했어요.

다락방 2014-02-14 10:33   좋아요 0 | URL
시간과 돈에 쫓기다보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아요. 일단 저질러놓고 수습하는 게 뭐가 되도 되는 것 같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BRINY 님. 아무쪼록 여행을 맘껏 즐기실 수 있기를요!!

달걀부인 2014-02-13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로아티아 다녀온 일인입니다.^^ 그 때 동양인이라곤 저 하나였었는데...깃발 아래 여러사람들이 줄서서 가니는 풍경들 생각하니 저 역시 슬프네요.거긴 혼자서 위로받기 위해 다녀오는 그런 비현실적인 공간이었어요. 꿈같은...

다락방 2014-02-14 10:34   좋아요 0 | URL
혼자서 위로받기 위해 다녀오는 그런 비현실적인 공간, 이라는 말씀에 크로아티아에 더 가보고 싶어지네요. 그렇지만 지금은 줄서서 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겠죠? 한참 나중으로 미루렵니다. 제가 앞으로 가보고 싶은 곳을 달걀부인님은 이미 다녀오셨다니, 부럽네요.
:)

자작나무 2014-02-13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굴이랑 화이트와인은 크로아티아 안가도 서울에 많이 있어요
굴 철이라 굴요리 많이 해먹는데 굴이 그렇게 정력에 좋다지요
그리고 난 정여울보다 다락방책이 더 좋아요...아시아나항공은 다락방을 선택하길...

다락방 2014-02-14 10:35   좋아요 0 | URL
굴이랑 화이트와인을 먹으려면 서울 어디로 가야 하나요, 자작나무님? 이게 제가 다니는 레스토랑에선 눈에 띄질 않아요. 굴을 팔면 소주를 팔고 와인을 팔면 생굴을 안팔고...Orz

하하, 전 여행기는 자신없습니다. 아시아나항공은 정여울에 맞서기 위해 더 강한 작가를 찾아봐야겠죠. 전 그저 한 명의 블로거에 불과할 뿐...

하양물감 2014-02-13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작나무님 댓글에 한표!!

다락방 2014-02-14 10:36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하양물감님도 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개 2014-02-1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여울의 다른 책도 시간 되길때 함 보세요.
꼭 보시라는건 아니구^^::::
락방님이 이 책 읽을줄 몰랐음 ㅋㅋㅋ
여행기라서 궁금했었나봐요?

여행이라...아직 제주도도 못가본 저로써는 해외는 뭐.. 꿈도 못꾸고 있음둥~
굴 먹으러 통영이나 갈까요? ㅎㅎㅎ

다락방 2014-02-14 10:36   좋아요 0 | URL
한창 잘츠부르크 갈 생각에 들떠있어서 유럽여행기 보자, 했던거에요. 역시 여행기는 제 취향이 좀 아닌 것 같긴해요. ㅋㅋㅋㅋㅋ

아무개님,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여행이나 가볼까요? 가서 진탕 마시고 취해볼까요?
 
나의 프랑스식 서재 - 김남주 번역 에세이
김남주 지음 / 이봄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녀의 때 이른 죽음(1932~63)에 대한 세인의 피상적 관심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어릴 때 겪은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정신적 상처(실제로 그녀는 세번째 시도 끝에 자살에 성공한다)와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경도, 그녀의 <일기>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유한한 삶의 한계와 신화에의 매혹, 그런 논리적인 근거들보다, 남편의 외도가 자살의 원인으로 손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인 김혜순이 어느 글에서 지적하듯, "자살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살한 예술가가 남긴 깨끗하고 넓은 백지 위에다 자꾸만 무언가를 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의 "생의 시간들은 신화라는 덧칠로 괴팍해지고, 주인공도 없는데 나날이 길어지"는지도 모른다. (pp.191-192)



피카소의 작품론을 번역하기 위해 나는 2년에 걸쳐 여러 권의 참고문헌을 읽고 인쇄물로, 화면으로, 실제로 수많은 도판과 작품을 노려보아야 했다. (p.196)



'실비아 플라스'의 책 <침대 이야기>를 얘기하며 김남주는 '김혜순'의 글을 인용한다. 이 글에서뿐만 아니라 이 책에 실린 '역자후기'에는 꼭 다른이의 의견이나 표현이 인용되어 있다. 자신이 번역하는 책에 자신의 느낌만을 적는 게 아니라, 번역하게 될 저자와 책에 대해 쏟아지는 다른이의 관심까지도 다 챙겨본다는 뜻일테다. 기억에 의존해서 그것들을 인용하든 혹은 메모를 해놓고 인용하든, 나는 바로 이 부분에서 김남주의 번역이 단순히 일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문학을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욕까지 들어간 막중한 책임감과 성의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피카소의 작품론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또 어떠했나. 2년에 걸쳐 참고문헌을 읽고 작품을 챙겨보았다지 않는가. 그녀의 번역물에 대한 신뢰가 자라나는 지점이다. 게다가 그녀는 번역만 하는게 아니라 많은 책들을 읽고 문학을 사랑하기 때문인지 역자후기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문학 작품으로 완성된다.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말을 이 역자후기들을 읽어가며 떠올린다. 그러나,


이 역자후기가 에세이란 타이틀을 달고 책 한 권이 되어 나온것은 좀 지나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나같은 생각을 가지게될 사람들 때문에 에세이 앞에 '번역' 이란 말을 붙여 '번역 에세이'란 타이틀로 약간 수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번역 에세이라면, 번역한 후에 본인이 가졌던 생각과 느낌을 말 그대로 '새로' 적어나가는 것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렇게 기존의 역자 후기를 가져오는 게 내게는 지나치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역자후기라면, 김선우의 소설에 정여울의 해설처럼,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조현천이 해설을 썼던것처럼, 작품 자체의 이해를 돕는 데 크게 한 몫을 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책들에 대한 역자 후기는 그 책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책을 읽고 나서 읽는게 훨씬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토록 문장을 우아하게 쓰는 번역가라면, 문학을 사랑하고 미술을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며 거기에 대해 이토록 방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게다가 번역가 모임에서 그토록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교류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역자 후기'에 기대지 않아도 근사한 에세이 한 권쯤은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나는 도무지 이 책의 간지, 총 다섯장에 이르는 간지의 역할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다. 이런 식이다.




저 주홍빛의 간지는..대체 왜 있는걸까? 분위기가 묘하니 예쁘긴 한데, 예쁘라고 있는걸까, 정녕? 그렇다면 나는 필요없다. 정말 필요없다. 이건 아마 사람의 성향탓이겠지만, 내가 가진 성향이란 실속 없는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지도 않으며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쪽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단순히 장식을 위한 아름다움에 가치를 둔다는 것은 알고있지만, 나는 그렇질 않다. 내 방에는 쓸모 없는 장식품이란 하나도 없다. 혹여라도 인형이나 또 뭐가 있을까, 여튼 예쁜 장식품들이 선물로 들어오면 나는 그걸 받는 족족 다른 사람들에게 줘버린다. 내 책장엔 책만 꽂혀있고, 간혹 와인이 세워져 있다. 너무 옆길로 샜는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같은 성향을 가진 독자가 읽기에 이 책의 저 주홍빛 간지는, 정말이지 돈이 아깝다는거다.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대체 저게 저기 있는 이유가 뭘까?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걸까? 잠시 쉬어가라는걸까? 만약 그렇다면, 쉬어가는 것쯤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



책의 끝에는 몇 장의 일상 사진이 실려있다. 그 사진들 중 하나에 특히 더 눈길이 갔다. '우아하다'는 단어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바로 이 사진을 보아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던 그런 사진.



앞에 놓인 LP 뒤로 보이는 책장, 그 책장속의 수많은 LP 들과 원서들. 어쩐지 나와는 다른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마찬가지로 다른 시간을 가질듯한, 내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우아함의 경지에 존재하는 듯한 사진이다. 


그 사진들 어느 밑에, 김남주는 이런 글을 써놨다. 



언젠가 나를 만든,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해 쓰고 싶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내 곁에 있어준 책 이상의 책들,

그중에는 루이 알튀세르, 에드먼드 윌슨, 마가렛 미드,

화이트 헤드, 자크 모노, 테리 이글턴, 김우창도 있다. (P.266)



이 문장들을 보며 나도 그녀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그녀가 번역을 한 작품이 아니라 그녀가 읽은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 그 편의 하나의 에세이가 되어 나오는 쪽이 내게는 더 애정이 생길 것 같다. 



몇번이나 이 책에는 오타가 등장해서 미간이 찡그려진다. 일일이 찾아내고 표기하거나 적어두진 않았지만, 당장 눈에 띄는 두 개만 언급하자면 243쪽의 '실레'는 '실례'로 고쳐야 할 것이고, 244쪽의 '차근리'는 '차근히' 로 고쳐야 할 것이다. 차근리는 대체 어느 지방에 위치한 리란 말이냐.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을 잘 실행해오고 있다가 이 책에 있어서는 어기고 말았는데, 좋다는 말만 써줄 수 없어 유감이다. 역시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지 않는 쪽이, 내 돈주고 내가 사는 쪽이 내게는 더 잘 맞는것 같다. 그게 내 마음이 더 편하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렇게혜윰 2014-02-07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이 첨 출간될 당시 트위터에 불이 나길래 호기심 쭉쭉 올라가다가 마침 도서관에 들어와 들춰보니 몇쪽 못읽고 빈수레구나...싶은 생각에 불쾌감을 느꼈어요. 내가 본 온통 호평들은 뭐였담?싶은 배신감도요ㅠㅠ

다락방 2014-02-07 11:19   좋아요 0 | URL
그동안 김남주 번역의 소설을 많이 읽어왔고, 그 때 만났던 번역이나 후기에 대해서는 오히려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만 따로 모아놓은 책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더라고요. 새로운 글을 써주지,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답니다. 흐음.

그렇게혜윰 2014-02-08 01:3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굳이 왜....이런 느낌이었어요ㅠㅠ
 
친화력 괴테전집 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김래현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잘못하면 막장 드라마가 되었을지도 모를 내용이 괴테의 문장을 만나니 확 달라진다. 꼭꼭 씹어먹고 싶은, 육즙이 진하게 배인 고품질의 소고기 같아졌달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4-02-06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띵동~~ 관리 들어왔습니다^^
육즙이 진하게 배인 고품질의 소고기라면....
아, 역시 고기는 스테이크, 문장은 괴테군요.

다락방 2014-02-07 11:19   좋아요 0 | URL
아- 스테이크 먹고싶네요, 단발머리님.
아침엔 훈제연어가 그렇게나 먹고싶더니.. 흑흑 ㅜㅜ

아무개 2014-02-06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테의 책이 투뿔 소고기가 되었군요. 크흐흣

다락방 2014-02-07 11:20   좋아요 0 | URL
아무 책이나 다 소고기가 될 순 없는겁니다. 하하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 (완전판) -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캬- 추리의 고전이란 이런것이구나! 작가와는 달리 나는 `캐롤라인`에게 애정을 가질 순 없었지만(애정이라니 천만의 말씀, 딱 싫어!) 재미있게 읽었다. 게다가 범인은 내가 짐작조차 못한 사람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2-06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0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친 퇴근길, 책장 한 장 한 장을 아쉬운 마음으로 넘기고 문장들을 꼭꼭 씹어 읽고 싶었는데, 이 책은 그런 내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했다. 개성없고 밋밋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개 2014-02-04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킁킁....도대체 어디서 이런 소설책들을 찾아내는 건가요?

전 이제야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다 읽었어요.
연휴에 오히려 책을 더 안읽었네요 술만 마셨어 술만 ㅜ..ㅜ

다락방 2014-02-04 09:56   좋아요 0 | URL
저도 연휴 내내 매일매일 술마셨네요. ㅋㅋㅋㅋㅋ

아 이 작가의 전작 <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를 괜찮게 읽었어서 이 책이 신간으로 나왔을 때 관심 있었거든요. 그런데 읽어보니 이 단편집은 별로였어요. 킁킁.

moonnight 2014-02-04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어디서 이런 소설책들을 찾아내는 건가요? 2

다락방님 리뷰랑 페이퍼만 읽어도 책 한 권 다 읽은 것 같아요. ㅎㅎ

다락방 2014-02-05 10:11   좋아요 0 | URL
으흐흐흐. 명절 잘 쇠셨습니까, 문나잇님. 일상으로 돌아오는 게 무척 힘이 드네요. 수요일인데도 적응이 안되고 있어요. 히잉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