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
이라영 지음 / 동녘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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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연설문) '아버지의 여행가방'에는 또 하나의 장소가 등장한다. 바로 아버지의 서재다. 서재는 주로 '아버지의'장소다. 돌아다니고 읽는 사람은 아버지이며, 집 밖의 세계를 전달하는 사람도 대부분 아버지다. 파묵의 아버지가 파리의 호텔방에서 서구에 대한 동경을 담은 글을 쓸 때, 파묵의 어머니는 어디에 있었을까. 내가 어릴 때도 '여행가방'을 가진 사람은 '아버지'였다. 엄마에게는 대신 장바구니가 있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절대다수가 여성)에게는 기저귀 가방이 필요하다. 화가의 가방과 운동선수의 가방이 다르듯, 가방이라는 작은 공간에는 가방 주인의 이동 경로와 주요 업무가 담긴다. 여성이 고급스럽고 값비싼 가방을 갖는 것에 사회가 유난히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이유가 단지 가격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식구들을 먹이는 장바구니나 아이를 돌보기 위한 기저귀 가방이 아닌 오로지 자신을 위한 공간과 이야기를 소유하는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p.200)




내가 살고 있는 집에는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지만 '나의 서재'라는 공간이 있다. 방 하나의 벽면을 책으로 채워두었는데, 어제 우리집에 방문한 회사 동료가 내 서재를 보고서는 '우와-' 하고 감탄했다. 내 짐작으로는 500-700권 정도의 책이 그 방안에 있을 것 같은데, 책을 많이 사는 이곳 알라딘 사람들에게야 많지 않은 수이겠지만, 책을 안읽는 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확실히 나는 책을 많이 가지고 있다.


위의 200쪽, 아버지의 서재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새삼 내게 서재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내가 책을 읽는 사람이라서,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나의 조카는 어릴 적부터 '이모 방엔 책이 많다'는 것을 보며 자랐다. 게다가 내가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아홉살 여자 조카아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떤 여행은 조카랑 함께 하기도 했다. 조카에게 이런 나는 '돌아다니고 읽는 사람'이다. 조카에게 '돌아다니며 읽는 사람'은 이모이다. 아버지가 아니다.



나는 내가 이런 모습으로 조카에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에 오늘 크게 감사했다. 내가 의식적으로 '이런 사람이 되어 조카에게 보여주자'고 한 행동들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나는 조카에게 읽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바깥 세상에 대해 들려주는 것도 내가 하는 일이다. 서재를 가진 사람이 내 조카에게는 아버지가 아닌 이모다. 그동안 의식하지 않았던 이 사소한 일이, 오늘은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계속, 읽고 돌아다니고 세상에 대해 들려주는 그런 이모가 되어야지.



지금의 나는 비혼이고 아마 앞으로도 출산과 양육이 내 일이 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만약 이런 내가 '엄마'가 되었다면, 내 아이에게 '읽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엄마'일 것이다. 아이는 '엄마의 서재'를 집에서 늘상 보게될 것이다. 아아, 나는 선택하지 않았지만, 내가 엄마가 되기를 선택했었다면, 아아, 얼마나 멋진 엄마가 되었을까! (너무 멀리 나갔나?)




읽고 쓰기에 대해 생각한다. 계속해서 나는 읽고 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읽고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하기.



이 책,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는 페미니즘 감별사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따끔한 충고 같은 책이다. 그말인즉슨, 이미 꼴페미인 나에게는 굳이 읽지 않아도 좋은 책이란 뜻도 된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고 이미 내가 생각한 바가 그대로 다 쓰여진 책이라고 해도 또 한 번 읽어 나를 단단하게 무장하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내가 다 아는 얘기잖아' 라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나는 '이모의 서재'앞에 멈추게 되니까.



게다가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쓰기에 대한 권유는 무척 반가웠다.

내가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많이 쓴다는 것을, 다른 분의 리뷰 덕에 알았더랬다. 이렇게나 '나는'을 많이 쓰는 사람이라니, 그 리뷰에서는 나의 글 한 편에 실린 '나는'을 세어보기까지 했다. 그 리뷰를 읽고서야, '아, 내가 '나는'이란 말을 자주 썼어?' 하고 알게 되었는데, 이라영은 얘기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남성적 '나'들이 보편적 인간을 대표하는 세계에서 묵살당한 '나'들의 재현과 목소리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상대적으로 차단당한 존재들이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더욱 확장하길 갈망한다. 자신의 쾌/불쾌가 사회적 옳음/그름과 일치해온 사람일수록 제 기분에 의지해 사안을 판단한다. 여자들이 감정적이라고? 여자의 감정이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과 자리를 벗어나면 부정적인 의미로 감정적이라는 오명을 덧씌운다. 여자의 감정은 정치화되지 못하고 해석당한다. 여성의 연대와 목소리를 '정치 행위'로 보지 않는 게 문제다. 기존의 가부장-여성착취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진보'는 '반동'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정치와 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들은 기존에 폭력으로 규정되지 않던 문제를 폭력이라 말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하며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p.10-11)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모의 서재에 책들을 쌓아두고 읽고 보내기를 유지할 것이며,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도 역시 계속해서 쓸 것이다.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라고 밝혔을 때 자신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페미니스트 검증으로 포장한다. ‘진짜 페미니스트‘인지 검증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르르 하고 지켜본다. 한 손에는 확대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아주 작은 꼬투리라도 집어 올릴 수 있는 핀셋을 든 채 언제라도 ‘실수‘를 포착할 준비를 한다. 탈탈 털어 작은 먼지라도 잡아내면 ‘진정한‘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다. ‘진짜‘ 혹은 ‘진정한‘에 대한 집착은 진짜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다. 누구도 진짜가 아니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p.5)

적어도 ‘워마드는 진짜 페미니즘이 아니다‘라고 말해야 ‘오해‘받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되었다. 오해를 살까 걱정되어 조심하도록 만드는 그 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는 두려움을 이용해 궁극적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메갈리아를 조목조목 비판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워마드가 얼마나 문제인지 낱낱이 밝히지 않는다면, 진정한 페미니스트의 자격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해명을 하거나 특정 집단과 선을 긋는 발언을 하도록 은근히 요구하는 상황이 과연 옳은가. (p.7)

균형 잡힌 객관적 시각으로 여겨지는 어떤 중립적인 태도는 이러한 권력의 불균형을 쉽게 간과한다. 균형 잡힌 사람들의 균형 감각은 희한하게도 여성의 말과 행동 앞에서만 빛나게 활발하다. 너무 균형이 잘 잡혀서, 광활한 페미니즘의 역사와 투쟁을 미처 알기도 전에 페미니즘의 문제점부터 먼저 배운다. 이미 형식상의 성평등 제도가 완비되고 오랜 투쟁의 역사가 쌓인 일부 나라들에서 불거진 ‘부작용‘을 과하게 부풀려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훈계하는 일이 잦다. (p.9)

남성적 ‘나‘들이 보편적 인간을 대표하는 세계에서 묵살당한 ‘나‘들의 재현과 목소리는 정치적 행위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상대적으로 차단당한 존재들이 ‘나는‘으로 시작하는 말하기를 더욱 확장하길 갈망한다. 자신의 쾌/불쾌가 사회적 옳음/그름과 일치해온 사람일수록 제 기분에 의지해 사안을 판단한다. 여자들이 감정적이라고? 여자의 감정이 사회가 정해놓은 규범과 자리를 벗어나면 부정적인 의미로 감정적이라는 오명을 덧씌운다. 여자의 감정은 정치화되지 못하고 해석당한다. 여성의 연대와 목소리를 ‘정치 행위‘로 보지 않는 게 문제다. 기존의 가부장-여성착취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진보‘는 ‘반동‘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정치와 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들은 기존에 폭력으로 규정되지 않던 문제를 폭력이라 말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하며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p.10-11)

성차별을 걸러내고 유지되는 관계는 거의 없다. 심지어 ‘페미니스트‘와 마주 앉아 있을 때도 그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을 실감할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은 나쁘지 않은데"라는 식으로 차별을 ‘이해‘하려 애쓰며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한다. 마땅히 분개해야 할 일에 분개하지 못한 가슴이 우울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많은 이들이 권력의 진정성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항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증명하려 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 또는 선량한 시민임을 증명하도록 강요받지만, 증명한다고 이해받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해는 불공정하게 돌아간다. (p.28)

차별받는 사람이 친절하길 원하는 마음은 여성을 ‘펴오하적인 언어‘속에 가두려 한다. 저항의 ‘올바름‘을 강조하며 은근슬쩍 ‘저향‘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이다. 여성의 역사를 지우듯이 여성의 말에는 ‘맥락‘이 사라진다. 앉아서 소변을 보기만 해도 페미니스트가 되는 남성이 있는 반면, 평생에 걸쳐 제 몸으로 젠더 이슈를 직접 다뤄온 사람들이 한번 ‘실수‘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 물어뜯는 태도가 과연 옳을까. 페미니스트의 과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여성의 성공은 개인의 능력이지만, 한 여성의 실수는 모든 여성의 실패로 만들려는 남성연대 사회의 비겁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p.36-37)

페미니스트를 혐오하는 이들은 진짜의 조건과 자격을 계속 발명한다 "저들은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목청 높이는 이들은 자신의 여성혐오를 메갈리아/워마드 비판이라 우긴다. 한편 페미니스트도 ‘착한 여자 콮플렉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이러한 재판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진짜‘가 되어 남성 연대의 혐오를 받지 않으려는 페미니스트도 있다. 자신은 메갈리아처럼 상스럽지 않은데 같은 페미니스트로 묶일까봐 초조하고 두려운 ‘페미니스트‘는 앞장서서 메갈리아 진압에 나선다. 나는 메갈리아와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경멸의 의미로 ‘트페미‘라 부르며 트위터를 비롯한 온라인의 여성 목소리를 비하한다. (p.38-39)

페미니스타가 ‘내 안의 여성혐오‘까지 찾느라 자기검열에 시달리는 동안 어떤 이들은 페미니스트를 구별하고 평가하려 한다. ‘잘하는지 못하는지‘, ‘어디 네가 하는 말이 맞나 들어보자‘따위의 태도로 임하는 경우가 있다. 스스로를 ‘객관적 관찰자‘에 놓는 습관에 길들여진 이들은 자기반성이 결여된 태도로 판관의 위치에서 발화한다. 자꾸만 교훈을 주려 한다. 이를 이성적이거나 객관적인 태도라고 착각한다. ‘단지 페미니즘을 떠나‘, ‘젠더 이슈를 넘어‘와 같은 수사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자리의 문제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뭘 떠나고 뭘 넘는단 말인가? (p.47)

누군가 인간으로서 기본적 권리를 주장할 때 그 권리가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동안 ‘특권‘을 누려웠다는 뜻이다. 조심과 불편은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았으며, 안전은 특권화되었다. "어디 여자가" 라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말은 여성살해까지 그 고리가 이어져 있다. 언어 하나하나를 붙들고 집요하게 싸워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익명으로 사라진 수많은 ‘oo녀‘들의 ‘원통한 혼‘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다. (p.67)

나름 공정성을 기한다는 이유로 여성의 행동에 대해 ‘만약 남자가 그렇게 했어도‘의 식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항상 공정한 답변을 끌어올릴까. ‘그렇다‘라는 답을 얻을 수 있다면 훨씬 편할 것이다. 모든 문제를 반대로 뒤집어서 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약자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동하지 않던 역지사지가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잘 작동한다. 차별의 얼굴은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적이지 않다. 그보다 훨씬 복잡한 정체를 숨기고 있다. (p.93-94)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이 남자들 중에서 제우는 소영의 몸을 구매하지 않으며(과거에 매매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그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남성이지만, 결정적 순간에 비겁해진다. 그는 어떤 면에서 이 영화 속 인물들 중 가장 ‘온화한 폭력‘을 행사한다. 제우가 소영과 근사한 식사를 하고 비싼 호텔에서 데이트를 청할 때 그는 소영에게 가족이 없음을 상기시킨다. 기다리는 가족이 없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여자였다. 남편과 자식이 없는 여자는 주인이 없는 집으로 취급받는다. 제우는 이 약점을 활용하고 반강제로 수면제를 먹게 만들어 소영이 살인 누명을 쓰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다. (p.127-128)

‘강간문화‘는 1970년대 미국의 여성운동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정상적인 행위로 간주되고 심지어 기대되기까지 하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태도와 여성 자신 및 다른 여성에 대한 여성의 태도 등이 위의 문화적 가정에 의해 착색되는 문화적 분위기를 의미한다." (p.156)

(미주:헤스터 아이젠슈타인, 《현대여성해방사상》, 한정자 옮김,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9, 91쪽)

남자들은 여자가 필요하다. 여자의 노동력과 여자를 통한 쾌락은 남성 중심 사회의 중요한 삶의 동력이다. 여성이 필요하지만 존중해주면 지배자가 될까봐 두렵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무시한다.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이지만 여성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수동적이다.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는 ‘욱해서, 홧김에‘라고 하지만 여성과이ㅡ 관계를 위한 감정노동에 대해서는 ‘표현을 못한다‘는 말로 넘어간다. ‘표현을 못한다‘는 그 ‘표현‘은 언제나 전적으로 고마움, 애정,부탁, 미안한, 부끄러움 등이다. 이러한 감정표현은 여성화되어 있다. (p.171)

‘정절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성폭행 피해 여성의 자살은 사회적으로 권장되었다. 이들의 자살은 사회적으로 부추겨진 타살이다. 여성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살한다지만, 실은 여성의 명예가 아니라 남성이나 집안을 위해 타살당한다. 이는 단지 사적 관계를 지배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국가를 통치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은장도로 제 몸을 찔러 죽은 그 수많은 여자들의 목소리는 없다. 그들은 죽었고, 말할 수 없으며, 남은 남성들이 죽은 여성의 정절을 숭배한다. ‘열녀‘는 여성 학대의 산물이다. (p.173-175)

멜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루는 장르다. 사람에게 반하고, 끌리고, 만남을 시도하고, 조금씩 자신을 보이며 다가가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감정, 내게로 다가왔다가 다시 떨어져나가는 타인, 그 사람을 만나기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나. (p.204)

(그림)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21)



‘자신의 성폭행 피해를 고소하고 긴 재판 끝에 승리를 얻어낸 화가 젠틸레스키는 피해자로 남지 않는 여성의 강렬한 모습을 그렸다.‘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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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8-12-1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모의 서재..ㅎㅎㅎ

다락방 2018-12-13 08:51   좋아요 0 | URL
고모의 서재, 화이팅입니다!!
 
롤러 걸 - 2016 뉴베리 명예상 수상작 비룡소 그래픽노블
빅토리아 제이미슨 지음, 노은정 옮김 / 비룡소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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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can't be what you can't see. -Marian Wright Edelman



다큐 <미스 리프리젠테이션>에서는 수많은 여자들의 인터뷰가 보여지는데, 그 중에 한 명이 그런 얘기를 한다. 어릴 때부터 남자정치인만 보고 자라면 자연스레 정치인은 남자가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그 인터뷰 전에 저런 문구가 화면에 보인다. 보지 않으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참이다. 영화 고스터 버스터즈의 주인공들이 다 여성이었을때, 작은 여자아이들이 자신도 유령잡는 사람이 되겠다고 답한것은 그래서 의미있다. 더 많은 여자들이 더 다양한 모습으로 계속 보여져야 한다. 정치인에도, 법조계에도, 언론인에도. 개그하는 데도 영화를 찰영하는데도 모두 마찬가지. 평범한 직장인들 에게라면 여자 상사가 보여지는 것도 분명 의미있다. 물론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고, 많은 여자들이 곳곳에 자리잡아 일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일들을 부조건 남자보다 다 잘한다고 확신할 순 없다. 어떤 일들에 있어서는 실수도 할 것이고, 잘못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잘못들과 실수들을 겪어가며 한단계 한단계 일을 진행해나가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된다. 감독을 보고 판사를 보고 대통령을 본다면, 나도 커서 판사가 되어야지, 감독이 되어야지, 대통령이 되어야지, 라는 생각을 아무래도 더 많이 하게 될테니까.



《롤러 걸》에서 주인공 '애스트리드'는 12살에 롤러 스테이크 타는 언니들을 보게 된다. 언니들은 팀을 이루어 롤러 스케이트 경주를 하면서 몸을 부딪혀 상대를 견제하고 또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언니들은, 세고, 강하고, 빠르고, 거칠었다! 그 뒤로 애스트리드는 자신 역시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 되어 그렇게 세고 강하고 빠른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엄마를 졸라 캠프에 참여하고 매일매일 열심히 연습한다. 넘어지면서도 타고 또 타고, 처음에는 잘 안되는 것 같아 속이 상했지만, 자꾸 타고 타고 또 탄다.



애스트리드에게는 단짝 친구가 있었다. 애스트리드가 단짝 친구와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것은 애스트리드에게는 당연했으나, 친구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친구는 롤러 스케이트보다 발레를 더 좋아했고 발레와 소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친구는 발레를 하는 다른 친구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고 애스트리드는 서운해하며 자연스레 친구와 멀어지는 듯 보인다. 그 과정에서 애스트리드는, 자신이 단짝이란 이름으로 친구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강요했음을, 친구가 자신과 똑같은 것만 선택하기를 강요 했었음을 알게 된다. 애스트리드는 이렇게 또 자란다. 단짝 친구와 멀어지고 화해하면서.



롤러 스케이트를 배울 때는 혼자였지만, 애스트리드는 그 곳에서 이제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 둘은 같은 포지션을 원하기 때문에 결국 경쟁자가 되고 그렇게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친구를 응원하는 사이가 된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연습해서 애스트리드는 팀의 일원으로 당당히 선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우상이었던 선배에게 팬레터를 쓰고 자신이 아직 잘 타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고민들을 의논하는데, 와, 선배는 그런 후배 애스트리드에게 고마운 조언들을 해주면서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정신적 도움이 되어준다. 무사히 경기를 마치고 신이 잔뜩 난 애스트리드에게, 더 어린 소녀가 찾아들어 '언니 같은 사람이 되고싶어'라고 한다. 우리는 이렇게 누군가를 보고나서 그렇게 되고 싶어하기도 하고, 또 내가 보여짐으로써 누군가에게 '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발레를 하는 단짝 친구와 화해했지만, 경기를 마친 애스트리드는 자신이 지금 당장 있어야 할 곳은, 이 경기를 마친 팀원들이 있는 곳이라는 걸 생각한다. 그렇게 한 소속의 일원으로서 그 순간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도 애스트리드의 몫. 애스트리드는 처음 롤러 스케이트를 배우기 전보다, 아주 많이 자랐다. 스케이트의 실력만 는 게 아니라, 인생의 경험치도 그만큼 쌓였다. 훌쩍, 성장한 애스트리드를 마지막엔 볼 수 있다.



십대의 소녀들에게 찾아드는 욕망과 그 실현에 따른 의지, 친구와 다른 걸 깨닫고 늘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인지하는 과정. 이 모두가 좋았지만, 무엇보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소녀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짜릿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보아야 하고 보여져야 한다.



조카에게 읽어보라고 주었더니, 어제 저녁에 전화가 왔다.


"이모 롤러걸 다 읽었어! 너무너무너무너무 재밌었어!"


라고 하더라. 응 이모도 너무 좋았어, 그래서 타미 읽으라고 준거야. 그리고 그런 책 또 있는지 찾아보고 또 사줄게! 조카가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게 너무 좋아서 신이 나 그렇게 답했는데, 조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응, 이모 이런 책 또 사줘. 이런 만화책!!"


아...만화...로 되어 있어서 좋아한거야?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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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검시관의 하루 - 차가운 시신 따뜻한 시선
주디 멜리네크.T.J. 미첼 지음, 정윤희 옮김 / 골든타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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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디 멜리네크'는 외과 레지던트로 일하다 그만두고 법의병리학 을 새 직업으로 갖게 된다. 쉽게 풀이하면 부검의, 검시관이다. 시체를 보며 죽은 원인을 찾아내고 사망확인서를 발급해주는 일. 시체가 도착하면 일단 외부에 상처가 난 건 없는지를 살피고 그 후에는 몸을 갈라 그 안에 모든 장기와 뼈, 뇌까지 샅샅이 살펴본다. 몸에서 혹시 마약이나 약물이 나오진 않는지, 죽음에 이르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공들여 찾아내서는 그것이 사고사인지 자살인지 혹은 살인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제시하곤 한다. 게다가 유족들에게 슬픔을 전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숨을 멈추기 전까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을 거란 걸 뻔히 알면서도 유족에게는 '아니요 바로 사망해서 고통은 없었을 거예요'라고 거짓말해주는 일까지.



그녀는 이 일에 애정을 갖고 있다. 자신이 그간 의대에서 또 외과 레지던트로 일한 경험으로 알게된 지식을 다 쏟아 붓는다. 물론 같이 일하는 동료와 선배로부터도 가르침과 도움을 받고, 그래서 거기에 또 지식과 경험을 차곡차곡 쌓는다. 똑똑한 여자가 자기의 지식을 바탕으로 일을 하는 것, 그 일에 애정을 갖는 것, 동료들과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을 보는 것은 몹시 흥분되는 일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게다가 그녀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을 가진 게 보여서 즐거웠다. 매일 시체를 보고 시체에서 나는 냄새를 맡는 사람들에게 즐거웠다는 말을 하는 건 어쩌면 부적절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지만, 자신의 일을 즐기고 그 일을 일로써 잘해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실례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에이미 박사는 내 손에 들려 있던 두개골을 받아 자세히 살펴보더니 다시 돌려주었다. "뼈 하나하나마다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난 내 일을 정말 사랑해요." ( p.125)



그러나 역시 한 사람의 삶이 끝났다는 것을 보는 것, 아는 것, 전달하는 것은 즐거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사연을 접하노라면, 세상엔 이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구나 싶고, 그만큼 다양한 죽음-내가 결코 알기를 원하지 않았던 종류의 것들까지-이 있구나 싶다. 사고사로 결론 날 수 있는 것인데 가족이 찾아와 그럴 리 없다고 사연을 들려준다거나, 자살한 아들을 인정하지 못해 계속해 사고사일거라고 평생을 주장하는 어머니라든가 하는 사연이, 과연 그냥 남의 일이기만 할까. 그녀의 상사는 그들이 해야할 일은 죽음에 대한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내는 거다, 이것이 살인사건인지에 까지 관여하는 건 아니다, 라고 하지만, 그녀는 혹여라도 누군가 억울한 죽음에 이른 건 아닌지 돕고 싶어한다. 



그녀가 처음 검시관 일을 하면서부터 맡게 되는 혹은 알게 되는 수많은 사연들에 대해 읽어가다가, 맙소사, 마지막 10장을 읽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울어야 했다. 10장의 제목은 <충격과 공포>인데, 2001년 9월 11일의 일을 다루고 있다. 



의대에 다닐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맨해튼 어퍼 사이드에 위치한 메모리얼 슬로언 케터링 암센터에서 종양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스를 보자마자 곧바로 아파트에서 제일 가까운 응급실로 달려갔다. 친구의 집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있었고, 응급실은 그로부터 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병원에는 심장병 전문의, 피부과 전문의, 노인병 전문의까지 온갖 동료 전문의들이 접수처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서, 테러 현장에서 실려 올 환자들을 도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먼저 바퀴 달린 들것을 모아 두었고, 부상 정도에 따라 구역을 나눴으며, 부목과 붕대를 준비했다. (p.252)



큰 사고가 일어난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무엇이든 도와야 한다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사고 현장으로 바로 달려간 친구 얘기가 10장의 처음인데, 이 때부터 계속 눈물이 났다. 당연히 검시관인 주디도 그 때부터 속속 도착하는 시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 일을 맡게 된다. 온전한 형태의 시신이 도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왼쪽 골반 하나만 도착하기도 하고 또 바스러진 뼈들이 도착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마음이 아파서, 도대체 주디는 어떻게 이 일을 견디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해야할 일이니 그것을 업무적으로 잘 처리하던 주디도, 나중에 소방관 두명의 시신이 도착했을 때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9월 11일 이후 나는 최대한 감정의 문을 닫고 전문가답게 처신하려고 애를 썼지만 두 구의 소방관 시신을 보자 더는 참을 수가 업었다. 첫 번째 남성은 어깨 윗부분에 아기 천사 모양의 문신이 있었다. 한쪽에는 티파니, 다른 쪽에는 헨리 주니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1975년과 1978년이라는 출생연도가 적혀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는 소방서 이름이 적힌 서류가 있었다. 서류의 이름과 문신에 새긴 아이의 이름으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서류는 다름 아닌 퇴직 신청서였다. 헨리는 50대 중반으로 20년이 넘게 소방관으로 일했다. 신원을 확인했지만, 소방 장비에 적힌 이름과 서류에 적힌 이름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나중에 동료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쌍둥이 빌딩 테러가 발생할 당시, 헨리는 비번이었고 뉴스를 보자마자 가까운 소방서에 가서 다른 소방관의 장비를 급히 걸쳐 입고 현장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시신은 왼손에 아일랜드의 전통 결혼반지 클라다 링(두 개의 손이 하트를 마주 잡고 있고 그 위에 왕관이 씌워진 반지)을 끼고 있었다. 내 남편도 똑같은 반지를 끼고 다녔다. 지갑 속에는 9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소방관의 뒤틀린 손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잡는 순간, 그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이 터졌다. 수술용 마스크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어떻게든 현장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마스크와 장갑을 벗어 던지고 무작정 뛰어나갔다. 그리고 작업용 텐트 밖에 바리케이드가 쳐진 구석으로 나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p.285-286)




주디를 비롯한 뉴욕 검시관 사람들이 모두 잠을 줄여가며 시신 신원파악에 나서고 경찰과 소방관들이 사건 현장에서 일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돕기 위해 스스로 오고, 구세군은 검시관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고, 계속해서 시신을 다루어야 하는 검시관들을 위해 정신과 상담센터도 마련되어 있다. 나는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되는 것들이 감사하고 고마웠다. 어디에서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에서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누구도 다치지 말라고, 다쳤다면 치료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구나 싶으니,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거다. 누군가는 이 모든 것들을 파괴하려 했지만 또 누군가는 이 모든 것들을 다시 되살리고자 한다. 


사건 현장에 가서 부상을 입고 이마에 멍이 들었다가 그 멍이 점점 눈으로 내려온 주디의 동료가 있다.



신원 확인 작업을 하면서 에이미 젤슨 박사도 많이 치유된 것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부상이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마에 있던 시커먼 멍이 점차 눈 쪽으로 내려오면서 일명 너구리 눈이라고 불리는 양쪽안와주위혈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해 줄게요." 어느 날 아침 작업을 위해 가운을 갈아입으면서 에이미가 말했다. "어제 한 경관이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갔더니 너구리처럼 시커멓게 변한 내 눈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신 눈을 이렇게 만든 놈이 누군지 이름만 얘기하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라고요. 그래서 깔깔 웃고 이렇게 대답했어요. '오사마 빈 라덴이에요. 잘 부탁해요.' 상대는 별로 재미있어 하지 않더라고요." (p.281)



나에게도 이건 별로 재미없는 농담이다. 그러나 나는 경관이 그녀의 상처에 관심을 갖고 혹시 모를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을 걱정해 그녀를 도우려 했다는 게 또 눈물나게 고마웠다. 그것은 응당 다른 사람들이 또 경관이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는 정말이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으니까. 폭력을 당한 사람을 다시 폭력의 현장으로 돌려보내는 게 그동안 이 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렇게 여자의 상처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조용히 말하는 경관이라니. 




많은 죽음 앞에서 부정적 감정을 가진 많은 사연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주디가 이 일을 해내는 동안 그녀 주변에는 그녀를 돕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의 남편은 전업주부로 그녀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 게다가 그녀가 직장을 옮기면 그녀를 따라 옮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일하는 사람들 역시 그녀에게 다정하며 그녀가 앞으로 가야할 길에 축복을 바라준다. 테러가 있고나서 사람들이 모두가 내가 도울일이 없는지 현장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나는 10장을 읽는 내내 울어야 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다정하게 지내던 딸이었는데, 그런 아버지가 자살을 했고 그것이 그녀에게는 오랫동안 상처이다. 그런 그녀가 만나는 시신들 중에는 당연히 자살사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자살 때문에 가졌던 걱정과 상처들을 알고 있기에, 자살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 어떤 말을 전해야 할 지를 안다.



다음 날 피터 클라크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어제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13살밖에 안 된 딸이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완전히 무너져버렸다는 거였다. 우연히 가게에 걸린 웨딩드레스를 보았는데 그제야 결혼식장에 자신의 손을 잡고 들어가 줄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 결혼식에도 아버지가 참석하시지 못했어요. 13살 때 아버지가 자살하셨거든요. 그쪽 따님이랑 똑같은 나이였어요." 나는 미망인에게 말했다. "따님에게 자살은 유전병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해 주셔야 해요. 저 역시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충격이 조금 가셨을 때, 자실이 유전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제일 두려웠어요. 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운명이 아닌가 싶었죠. 정말로 그랬어요. 어머니께서 따님에게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반드시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자살은 질병이 아니니까요. 똑같은 경험을 했던 의시가 하는 말이라고 전해주세요." 그 말을 끝나자마자 오랜 경력을 지닌 전문가로서의 자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우리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나누었다. (p.211-212)



나는 그녀가 유족들에게 들려줬던 그녀의 모든 말들이, 그녀의 모든 생각들이 언제나 잘했던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기도 했을 거고 때로는 어떤 식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하는 것들일 것이다. 또한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스스로 더 성장하기도 할테고. 



그녀는 이 '죽은 사람'을 다루는 일을 결국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시선이 나는 무척 좋았다. 



2년간 뉴욕 검시관 사무소에서 검시관으로 일하면서, 총 262구의 시신을 부검했고 그로부터 12년 후에는 총 2,000여구의 시신을 부검했다. 지금까지도 하루하루 인체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배워가고 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하고 과학과 의학을 사랑한다. 그리고 내 직업의 비과학적인 부분, 유족과 상담을 하고 경찰과 협업하고, 때로는 증언대에 서야 하는 상황까지도 사랑한다. 부검을 담당하는 의사로서 가장 힘든 역할은 바로 세상을 떠난 사람을 대신하여 말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의사는 연민의 감정을 잊어서는 안 되고, 이를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 매일 죽은 자들을 마주하고 시신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p.320-321)




이 책의 책장을 덮고 나는 아, 정말 책은 좋구나, 하는 걸 또한번 느꼈다. 내가 책을 읽지 않았다면 검시관이란 직업에 대해 한 순간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죽음의 모습에 대해서도 몰랐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돕기 위한 생각만으로 달려나갈 수 있다는 것도 읽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 자기 일을 사랑하는 똑똑한 여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되어 기운이 났다. 책이야말로 세상에 다양한 사연과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수단이 아닌가. 책 너무 좋아 ㅜㅜ







파티의 해피엔딩은 역시 결혼 발표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바로 연구실 동료였던 카렌 투리 박사의 결혼 소식이었다. 카렌 박사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참사 당시에 한 경사를 만나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하고 고생했다. 인류학자 에이미 박사가 중간에서 다리를 놓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로맨스는 주선자의 큰 도움 없이도 자연스럽게 불타올랐다. 우리는 모두 그런 끔찍한 경험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끈끈한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카렌과 경사의 관계는 점점 사랑으로 발전했다. (p.320)

법의학 병리학자, 즉 부검의라는 나의 직업은 지난 10년 동안 TV 드라마에 단골손님을 등장했다. 내가 업으로 삼는 일이 가상의 드라마로 소개될 때마다 나 역시 덩달아 짜릿함을 느꼈다. 강렬한 눈빛의 여자 검시관이 높은 스틸레토힐을 신고 가슴골이 드러나 보이는 의상을 걸친 채로 흐릿한 조명 아래 피투성이가 된 사건 현장에 등장한다. 드라마 속의 부검의는 즉각적이고 완벽한 진단을 내리며, 여기서 나아가 성적인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도는 가운데 동료와 위트 넘치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터질 때도 있다. 실제 부검의들은 4주간의 수습 기간 동안, 단 일주일만 뉴욕의 살인 현장에 나갈 수 있으며 그것도 경찰서의 사건 조사 전담반이 동행할 때만 가능하다. 또한, 주로 발이 편한 신발을 신고 두툼한 바람막이를 걸치고 다닌다.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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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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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고 싫어하고에 관계없이 세상에는 나와야 할 작품들이 있다. 나온 것으로 의미 있는 작품.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말하여질 필요가 있는 이야기를 했던것처럼, 이 책, '박민정'의 《미스 플라이트》도 내가 흥분하며 너무 좋다고 생각하는 책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책은 나와야 했다. 작가는 이 말을 이 즈음에 해야했고 그건 충분히 의미 있었다.


항공사 승무원인 유나 의 자살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유나의 아버지는 권위주의적인 군인이었고, 유나는 그런 아버지를 미워했다. 유나에게는 10년간 연애한 남자친구가 있고, 또 그런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친구들도 여럿 있다. 어릴 적 자신을 태워다니던 운전병 아저씨 역시 이야기속 주인공인데, 권력과 방산비리와 승무원에 대한 성적대상화가 이 이야기속에 들어 있고 그 과정에서 유나가 자살한 원인을 파고들면서 유나의 성장과정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어릴 적부터 철이 들어 자신의 아버지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고, 군대란 곳이 어떻게 잘못된 건지도 알았으며, 그래서 유나는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 자기가 미안해하며 살고 있다. 여러 부분에서 코끝이 찡해지는데, 10년간 사귀어온 애인이 자살했다면, 남아있는 연인은 그 일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자식을 잃은 부모는?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 일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동료는? 복잡하고도 현실적인 이야기들이다.



책을 읽다 여러가지 생각을 했는데, 그중 하나는 애인의 죽음이었다. 주한은 유나와 연인관계였고, 그러므로 유나의 죽음을 안다. 주한이 연인을 잃었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도 안다. 그 큰 상실감을 앞으로 어떻게 견뎌내나, 싶은 마음과 함께, 그것을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는 나은 것일까, 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나라면, 지금은 옆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누구도, 그러니까 서로의 소식을 전해줄 누군가도 없어서, 그 사람의 신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도 알 수가 없어. 그 점이 너무 아프다. 내가 그나마 안다고 생각하는 건, 그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하는 것. 이건 안다는 것 보다는 짐작에 가깝다. 중요하고 굵직한 일들에 대해서만이라도 소식을 전해듣고 싶어, 신변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듣고 싶어, 아주 오랜 후에는 그의 빛이 사그라들었다는 소식을 내가 모르고 싶지 않아, 중요한 것들에 대한 것만이라도 내게 들려줘요, 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유나의 아버지와 유나의 관계 때문에, 나는 순전히, 개인적으로 이 책을 지금은 내 옆에 없는 사람에게 읽으라 권해주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같은 게 생겨버렸는데, 그러나 나는 그가 아니므로 이 생각이 틀린 생각일 수도 있다. 나는 방향을 잘못 잡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정확히 어느 부분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아니, 이거 별 감정 없는데'라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조금쯤은 그에게 가 닿아 어떤 부분을 건드릴수도 있을 거라고, 그게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사두기로 했다. 당신이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만나게 될테고, 그 때 이 책을 주기 위해 준비해두고 싶다.




책 속의 애인도 그리고 철없는 남자사람 친구도, 제자리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을 잘 해내는 이야기이다.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으므로 의미가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해야 할 말을 해내야한다.







혜진은 낮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영훈은 혜진이 그르렁대며 코 고는 소리를 들어야만 안심하고 잠에 들 수 있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수없는 밤을 맞았지만 단 한 번도 편히 잠든 적 없었다. 영훈에게 잠은 오직 혜진 곁에서, 혜진의 코 고는 소리를 들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처음 자신의 곁에서 잠이 깬 스무 살의 혜진은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며, 어떻게든 코골이를 고치겠다며 부끄러워했었다. 정작 영훈은 혜진의 코골이를 시끄럽다고 여겨 본 적이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P.60)

짝사랑하는 여자가 의식불명에 빠지자, 그녀를 직접 간병하려고 간호사로 취업한 남자. 하늘색 간호사복을 입은 남자는 매일같이 여자의 몸을 닦아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혜진은 영훈의 어깨에 기대 옥수수 알갱이를 집어 먹으며 에이, 저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연신 중얼거렸다. 저 여자 불쌍하다. 정말. 어느 날, 코마 상태의 여자는 돌연 임신을 한다. 그녀는 임신에 빠진다. 의식불명에 빠지듯. 남자가 병실에서 여자를 강간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중간에 삽입된 기묘한 색채의 그래픽이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언뜻 암시할 뿐.
-그런데 여보. 그게 사랑일까.
혜진은 그날 밤 뒤척이며 말했다. 목소리에 졸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영훈은 그 말에 대답하기 위해 한참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한 후 곁에 누운 혜진을 돌아보자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영훈은 잠든 혜진에게 대답했다.
-그건 강간이지. 착란이거나. (P.59-60)

아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요. 멀리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줄 수조차 없죠. (P.123)

주한은 유나가 골라 준 자신의 자취방, 유나가 골라 준 가구들, 유나가 골라 준 옷들을 둘러봤다. 주한을 둘러싼 것들 중에 유나 손을 타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으므로, 유나의 흔적에 새삼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전부 다 유나의 흔적이었다.
어쩐 일인지 하늘색 티셔츠는 뉴질랜드에 갈 때도 딸려 갔었고, 돌아와서 한동안 유나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날 때도 없어지지 않았다. 대학에 복학한 1년 동안 주한은 유나가 아닌 신입생 후배와 연애를 했다. 그녀는 주한에게서 보이는 유나의 흔적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했다. 주한의 존재 자체가 곧 유나의 흔적이었다. 주한의 옷이며 신발이며 가방이며 시게며 전부 유나가 골라 주고 간섭한 물건들이었다. 후배가 요구하는 대로 미니홈피에 남아 있던 유나의 사진과 글을 전부 지웠지만 유나의 흔적은 잊을 만하면 튀어나왔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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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래시 - 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 Philos Feminism 1
수전 팔루디 지음, 황성원 옮김, 손희정 해제 / arte(아르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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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와 종교, 직장과 나라에서까지 1980년대 미국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모두 하나가 되었다. 단순히 여성들을 얌전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넘어서, 그들은 여자가 자기들이 원하는 바로 그대로이길 원했다. 순결할 것, 집에 있을 것, 자신들이 하는 말만 듣고 따를 것. 여자들로 하여금 몸을 꽉 조이는 옷을 입게 하고, 남자들을 돋보이는 보조역할을 하는 데에만 만족하게 하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기를 바라는 것 모두가 가슴 답답한 일이지만, 낙태에 있어서 얼마나 여성들이 학대 당했는지를 읽노라면 분노와 절망만 쌓인다.


그러나 그런 반격들 속에 여자들은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고,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냈다. 싸우고자 했고, 결국 이기지 못했다해도 그녀들은 어쨌든 '이것은 옳지 못하다'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이 절망속에서 웅크리다 나온 목소리들은 그대로 희망이었고, 그에 대해서 '수전 팔루디'는 <에필로그>를 통해 보여주고 다시 한 번 정리해준다. 이 긴 책의 읽기를 마치며 에필로글 읽을 때, 그래서 울컥해진다.



연방 정부가 고용 평등의 이행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법원이 25년간 지켜 온 반차별을 침해했을지 몰라도, 매년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직업 세계에 진출했다. 뉴스 매체와 텔레비전 들이 노처녀 풍년과 출산 부족, 위험한 어린이집에 대한 끔찍한 오보를 아무리 쏟아 내도 여성들은 꾸준히 결혼 날짜를 늦췄고, 가족 규모를 제한했고, 직장 생활과 육아를 병행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 아무리 둥지를 틀고 사는 현모양처들이 넘쳐 나도 여성 시청자들은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 공연물을 가장 많이 시청했다. 반격의 드레스 제작자들은 여성의 패션에서 가장 사소한 부분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소매점에 아무리 가터벨트와 테디가 가득해도 여성들은 꾸준히 면으로 된 조키 속옷을 찾았다. (에필로그,p.657)



반격의 벽에 부딪히다가 온몸에 멍이 들고 실의에 빠지더라도 여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집스럽게 벽과 맞섰다. (에필로그, p.657)



반격은 이런 사적인 채널을 통해 수치심과 비난의 음파를 만천하에 퍼뜨려 여성들의 사고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반격은 공장노동자 잔 킹이 말한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작은 목소리", 거의 다 무너져 내려 버린 그 많은 여성들에게 박차를 가한 자기 결정의 속삭임을 한 번도 침묵시키지 못했다. 도로 관리인 다이앤 조이스가 오랫동안 주위 남성들의 조롱과 위협, 배척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시달리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던 건 바로 이 목소리,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억눌려 있었고, 그렇게 절박하게 듣기를 갈구했던 바로 그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목소리를 결국 비벌라 라헤이가 집에서 입는 실내복과 극도의 소심함을 떨쳐 버리고 많은 책을 쓰고 많은 연설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내 심장 깊은 속에서 일어서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에필로그, p.658)



아무리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하고 있으라도 말해도 여성들은 어떻게든 애를 쓰며 일어섰다. 얌전히 뒷전에 물러나 있는 게 더 행복할거라고 아무리 말해도 여성들은 꾸준히 환한 공적 무대를, 형식과 내용을 불문하고 일단 공연을 하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심지어 박수 갈채까지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에필로그, p.658)




내용이 긴 만큼 이 책의 미주 또한 대단한데, 수전 팔루디는 아주 많은 자료들을 검토했고 또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나(그들이 설사 반격의 대표주자였다 해도) 인터뷰를 했다. 그 길고도 긴 미주를 보며 새삼 감탄했다. 이 똑똑하고 노력하는 수전 팔루디 덕에, 나는 그 길고도 긴 이야기를 책 한 권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고마운 시간이었다.




낙태 반대 운동에 참여한 남성들은 그저 이 나라에서 폭주하는 낙태의 속도를 멈추려 하는 것뿐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낙태율은 늘어나지 않았다. 최소한 지난 100년간 미국 여성들은 세 건 중 한 건꼴로 임신중절을 했다. 낙태 합법화 이후 차이가 있다면 그건 이제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중단할 수 있다는 점뿐이었다. (p.593)

여성들이 아무리 가장 온건한 수준에서 자신의 생식력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해도 반대의 불길이 활활 일어나는 건 어쩌면 불가피한 일인지 모른다. 교육이든, 일이든, 그 어떤 형태의 자기 결정권에 대해서든 여성의 모든 포부는 궁극적으로 아이를 가질지의 여부와 가진다면 언제 가질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에 좌우된다. 이 때문에 출산의 자유는 언제나 모든 일련의 페미니즘 의제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주제였고, 반격이 일어날 때마다 가장 거센 공격의 대상이었다. (p.606)

분명 건강한 아이들을 이 세상에 내보내는 건 사회가 당연히 관심을 가질 일이고 여성들이 임신 중에 스스로를 잘 돌볼 수 있게 돕는 것은 도덕적인 의무이자 실리적인 의무다. 하지만 아이 엄마들이 1980년대에 입법가, 경찰, 검사, 판사로부터 앙심이 느껴지는 가혹한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는 점은 아이들의 복지에 대한 단순한 관심 이상의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p.621)

릭스의 경험에 따르면 남자들은 항상 ‘여자가 있을 곳‘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아내와 엄마 들은 항상 일을 했다. 그녀가 어릴 때 가족 내 여성들은 여덟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차렸다. 그리고 식료품을 사올 여력이 없을 때는 사냥을 했다. "야생동물 고기를 먹지 못하면 굶었다"고 릭스는 회상한다. 그녀는 열한 살이 되던 해에 일자리를 얻었다. 열다섯 살에 임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불행한 결혼 이후 주로 생계를 책임진 건 그녀였다. 남편은 일은 간헐적으로 하면서 술은 꾸준히 마셨다. 릭스는 줄곧 ‘여성‘의 일자리에서 받는 빈곤 수준의 임금을 가지고 아들과 남편, 그리고 양가 부모를 부양했다. (p.641)

아메리칸사이안아미드가 노동자들에게 제시한 ‘선택‘은 반격이 여성들에게 관대하게 제시했던 다른 많은 선택지들처럼 명료하고 진취적인 발전으로 포장되었다. (p.654)

이 여성들에게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형편 때문에, 믿을 수 없는 남자들 때문에 반드시 해야만 했고 자립과 자존감의 기본적인 원천이기도 했다. 이들은 일을 해야만 했고 또 원했다. 하지만 이들이 상대해야 하는 고용주들도, 옆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 남성 노동자들도, 혹은 같은 침대를 쓰는 남성들마저도, 그 누구도 이들이 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일을 계속하면 사무실에서 모욕을 당했고, 샤워실에서 공격을 당했고, 집에서 구타를 당했다. 하지만 사회적 신호에 복종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면 굶어 죽었을 것이다. (p.655)

아메리칸사이안아미드가 태아 보호 정책을 통해 이들에게 최후 통첩을 날렸을 때 여성들은 이미 이런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이제 이들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일자리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불임 수술을 하고서 온 사회가 여성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삶의 이유라고 주장해 온 것을 포기하든지 양자 택일을 할 수 있었다. 반격은 여성들에게 여성으로 존재하는 삶과 독립적인 삶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반격은 여성을 위해 대신 선택을 해 주었다. 만일 자기 결정권을 위한 부자연스러운 투쟁을 포기할 경우 자연스러운 여성성을 다시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p.655)

"남성은 여성보다 더 비참해요. 그러니까 남자는 여러가지 면에서 사실 지금의 여성보다 더 힘이 없단 거죠." 원런 패럴Warren Farrell은 잠시 말을 멈추고 여성 가정부가 막 건네준 커피 잔을 홀짝였다. 다른 방에서는 여성 비서가 분주하게 타이프를 치고 그의 파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p.456)

1988년에는 남녀 간의 투표 선호가 너무 달라져서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중 한때는 젠더 격차가 24퍼센트까지 벌어져 민주당 후보였던 듀카키스가 더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격차에 가장 극적으로 기여한 집단은 직장 여성, 교육 받은 여성, 전문직 여성, 젊은 여성, 흑인 여성과 결혼을 하지 않거나, 이혼을 했거나, 사별을 한 싱글 여성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엄청난 여성 표를 확보해 준 듀카키스 지지자들은 임금 평등, 사회적 평등, 그리고 출산에 대한 권리라는 페미니즘 의제를 가장 열렬히 응원하는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p.418)

대부분의 경우 이런 의사들은 성형수술이 실제로 필요한 여성들의 시술은 하지 않았다. 1980년대 말 화상 피해자와 유방암 환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재건 수술의 숫자는 실제로 줄어들었다. 많은 성형외과 의사들에게 여성의 자존감을 북돋는 것은 직업적으로 그렇게 썩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광고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만 의사들은 환자들의 통제감을 향상시키는 것보다는 환자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력을 향상시키는 데 더 눈이 멀어 있었다. 자기 아내의 몸에 아홉 번이나 시술을 한 성형외과 의사 커트 와그너Kurt Wagner는 "나에게 수술은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고 그 누구도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경기장에 들어서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마취된 여성들은 말대꾸를 못하니까. (p.35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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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8-11-2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이 해내셨다!!! (저도 뒤따라 갑네다 학학)

다락방 2018-11-28 10:06   좋아요 0 | URL
해냈습니다!! 어서 오세요!! 컴온!!!

비연 2018-11-28 12:59   좋아요 0 | URL
해냈습니다, 릴레이를 기대합니다~ 저도 다음달에 <페미사이드>로!

다락방 2018-11-28 13:00   좋아요 1 | URL
네네, 다음달에는 페미사이드 완독 릴레이 들어갑시다!!

단발머리 2018-11-28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도 멋지고 백래시 책도 근사하네요! (책이랑 북마크, 이런 사진 넘넘 좋아요)
우리는 더 많이 꿈틀거리고 또 움직일거예요. 수전 팔루디가 움직여서 우리가 이렇게 배울 수 있었던 것처럼요.
전 지금 14장이구요, 저도 얼른 에필로그 읽고 힘내고 싶어요!

백래시 완독 축하해요, 다락방님!!!

다락방 2018-11-28 14:13   좋아요 0 | URL
14장이 유독 기운 빠지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님. 어제 퇴근 길에 읽는데 너무 가슴이 답답하더라고요. 그래도 에필로그까지 읽으면 수전 팔루디가 우리 잘해왔어, 잘하고 있어, 하고 힘을 내게 해줍니다. 어서 다 읽고 완독했다고 올려주세요!!

축하도 고맙고 무엇보다 같이 읽어주고 같이 생각해주고 같이 이야기나누어주어 고마워요!!

카알벨루치 2018-11-2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기념 한턱 쏘세욧!

다락방 2018-11-28 14:28   좋아요 1 | URL
어제는 저 잘한다고 제가 저에게 훈제오리를 사줬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1-28 14:58   좋아요 0 | URL
그거 말구요 여기 독자들....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11-28 14:59   좋아요 0 | URL
네? ( ˝)

=3=3=3=3=3=3=3=3=3=3=3=3=3=3=3=3=3=3

비연 2018-11-28 15:35   좋아요 0 | URL
어멋. 카알벨루치님. 좋은 생각이신 거 같아요 ㅎ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8-11-28 15:38   좋아요 0 | URL
여러분,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1-28 16:03   좋아요 0 | URL
맛죠 비연님 혼자서 훈제 드시고 ㅜㅜ쩝

무해한모리군 2018-11-28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하신거예요!!!! 오오오오옹 전 아직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11-28 15:59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완독했습니다. 꺅 >.<

자, 모리님. 분발합시다! 컴온!!

공쟝쟝 2018-12-0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운 시간 함께하게 해주신 락방님께 하트를 ❤️ 그리고 저 벼락치기 지각생, 완독하였음을 아룁니다!

다락방 2018-12-02 15:16   좋아요 1 | URL
쟝쟝님, 정말 장해요! 그리고 같이 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마지막에 벼락치기 하던 쟝쟝님이 너무 좋았어요. 약속을 지키려는 모습이 보여서 진짜 좋았습니다. 고마워요. 우리 12월에도 함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