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지진이라면



여보세요, 떠나겠다는 나의 결정이 나는 두려워요. 당신으로부터 먼 곳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당신이 지진이라면 먼 곳에서 지진이란 무엇일까요? 호숫가의 오리들도 놀라지 않아요. 나는 낮잠을 깨지 않아요. 네 시간 다섯 시간이 흘러가요. 나의 낮잠은 비뚤어진 입을 틀어막고 한량없이 귀가 커져요. 펄럭이는 귀는 검은 밤에 젖어요. 귀가 커다래지니까 이곳이 얼마나 조용한 곳인지 알겠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내가 옛날 전화기를 들고 있다면 검은 전화선을 따라 수억 개의 지붕 위를 건너 텔레파시의 화신처럼 나타날 수 있을까요. 옛날 연인들은 전화선을 손가락에 감거나 목에 감았어요. 주술 같은 것이었어요. 허공을 만지는 일도 그런 걸까요? 허공에 대해 공부했다는 한의사는 내게 생활 습관을 고치라고 말했어요.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밥을 먹고 그리고 허공을 자꾸 만지지 말라고 했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귀를 막은 채 비명을 지르지 말라고 했어요. 침을 맞으라고 했어요.



나의 아침에 당신은 저녁 8시예요. 당신의 새벽에 나는 오후 2시예요. 먼 곳, 먼 곳, 먼 곳을 향해서 당신이라고 부르는 오후 2시에 나는 또 손이 저려요. 오후 3시에 침을 맞아요. 식전 30분에 나는 한약을 먹어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는 먼 곳의 지진을 느끼지 못해요. 먼 곳에서 당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요. 당신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는데 나는 슬퍼하지도 못했을까 봐 진짜 두려워요.




지난 주말에 에피톤프로젝트 콘서트에 다녀왔다. 그가 「시차」란 노래를 불렀을 때, 나는 김행숙의 위 시가 생각났다. 김행숙이었던것 같은데, 내가 산 시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시차가 꽤 크게 느껴지는 곳의 사람을 사랑했던 시가 분명 있었는데. 시집을 꽂아둔 책장 앞으로 가서 차례대로 시집들의 제목을 읽었다. 역시 김행숙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꺼내들고 한 장 한 장 다시 넘겼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문장들로 가득한 시들 속에서 당신이 지진이라면, 이란 제목을 본 순간 앗! 이걸거야, 이걸거야! 했다. 



지금쯤 그대는 몇 시를 사는지?
오랜만에 먹는 아침이
가벼워진 나의 마음이 꽤 좋아 보여
느긋한 트램을 타고서 달리면 
옆 자리의 꼬마 아이도,
좁은 골목길의 모습도 꼭 그림 같아
아직은 멀기 만한 나의 시간이
졸린 눈을 비비게 해도
스쳐가는 많은 것들을 다 끌어안고
지금쯤 그대는 몇 시를 사는지?
오랜만에 먹는 아침이
가벼워진 나의 마음이 꽤 좋아 보여
지금쯤 그대가 몇 시를 살던지
누구와도 같지 않으니
누구라도 다른 거니까, 큰 걱정 말고          -에피톤프로젝트, 시차









내가 사는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곳의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걸까. 거기엔 어떤 낭만이 있을까.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보는 달을 그는 지금 볼 수 없다는 것. 달 봤어요? 아주 커요, 소원을 빌어도 좋겠어요, 같은 말을 내가 지금 전화기를 붙들고 말해보았자, 혹은 문자메세지로 딩동- 하고 보내봤자 그곳에서는 아직 달이 뜨기 전이거나 이미 달이 사라지고 난 뒤일텐데. 그래서 시무룩해질 즈음, 이런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그러나 만약 내가 오늘 밤하늘엔 별이 무척 많았어요, 쏟아질듯이. 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렇다면 나도 오늘 밤엔 고개를 들고 별이 얼마나 많은지 확인해볼게요, 라고 대답할 수 있을테고, 그렇게 자신의 시간에서 밤이 오기까지 내내 밤이 오면 별을 봐야지, 하고 나를 생각하고 염두에 두는 시간이 더 길 수 도 있으리란 생각. 


베가본드란 만화에서 주인공이(이름이 생각안나..) 안보이면 잊혀질 줄 알았더니 가슴에 더 선명하게 새겨진다고 했다던 말이 생각났다. 멀리 살기 때문에, 열세시간쯤을 날아가야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열세시간을 날아가기 위해서 비행기표를 할부로 긁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를 자주 볼 순 없겠지만, 한 번 보게 되면 그만큼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겠지, 볼 날만 내내 기다리며 지내겠지.



그렇지만 김행숙의 시, 당신이 지진이라면, 저 시의 마지막 연 때문에 다시 슬퍼진다. 나는 먼 곳의 지진을 느끼지 못해요. 먼 곳에서 당신이 죽을까 봐 두려워요. 당신이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는데 나는 슬퍼하지도 못했을까 봐 진짜 두려워요. 먼 곳에 그가 있는데, 먼 곳에 있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그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그와의 연락 뿐이라면, 그런데 그와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그가 아프다면, 그가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췄다면, 나는 이 곳에서 발만 동동 굴러야 하지 않을까. 그게 슬프다. 아무도 내게 그의 소식을 대신 전할 수 없으니 그의 안부를 내 머릿속에서 썼다지웠다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 슬퍼해야 할 때, 제 때 슬퍼하지 못할거란 사실이 더 슬프다.





















남자는 파리를 사랑하고 파리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남자의 약혼녀는 남자가 헐리우드에서 일하면서 말리부에서 살기를 원한다. 여자는 남자가 돈벌이도 안되는 소설을 쓴다는 게 못마땅하고, 친구의 애인처럼 모든것에 전문가가 되지 못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남자는 파리 거리를 산책하기 원하고 여자는 온갖 관광명소를 다니며 설명을 듣길 원한다. 그런 남자에게 1920년대에 만난 매력적인 여자가 묻는다.


그녀를 사랑하죠?


남자는 대답한다.


사랑해요.

사랑하는 것 같아요.

결혼하면 사랑해야겠죠.



남자는 자신의 사랑에, 자신의 결혼 상대에 대해 확신이 없다. 대답의 강도는 점점 약해진다. 여자는 다시 묻는다. 그래도 그녀와 중요한 것에 있어서는 공통된 의견을 보이지 않나요? 남자는 대답한다. 


사소한 것에서는 잘 맞죠. 인도음식을 둘다 좋아해요.

아니 사실 인도음식을 둘다 다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 난 이라는 빵, 그건 둘 다 좋아해요.


생각해보니 둘에게는 사소한 것조차 공통된 게 거의 없다.



남자가 바라보는 세계, 남자가 꿈꾸는 세계가 여자가 바라보는 방향과는 완전 틀어져있다. 남자는 길을 가다가 콜 포터의 음악이 들려오면 멈춰야하지만 여자의 귀에는 콜 포터의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남자는 헤밍웨이와 피카소를 만났다는 사실에 흥분을 해서 그 기쁨을 전하고 싶지만 여자는 내일 관광을 위해 오늘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이런 둘이, 과연 사랑을, 결혼 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을까? 


영화의 초반, 남자가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1920년대의 파리로 돌아가 헤밍웨이를 만났을 때, 내가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었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알어, 알어, 저랬지, 저랬어!! 중간에 남자가 '파리는 날마다 축제란 말도 있잖아' 라며 영어로 Moveable Feast 라고 하는데, 아우, 이건 내가 저 책을 읽었으니까 아는거야, 하면서 막 으쓱으쓱. 움화화화핫. 



사랑에 있어서는 거리가 큰 방해물이 되진 않는다. 열세시간을 날아가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반면 함께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도 사랑이 완성되진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같지 않다면 함께 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게 바로 사랑의 가장 큰 위대함일지도 모르겠다. 거리와는 상관 없다는 것. 아울러 이 영화속처럼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 2000년대의 남자가 1920년대의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하다니, 사랑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이 시대를 뛰어넘어 가능하겠는가. 내가 이 시대를 살고, 여기에 살고, 이 나이를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거, 그래서 사랑이 다른 무엇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뜬금없는 영화속 남자에 대한 불만 한 가지. 아니, 길, 대체 왜! 핏츠제럴드가 아니라 헤밍웨이한테 더 흥분하는거죠? 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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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 이순간도 난 널 기다리고 있어.
    from 마지막 키스 2015-07-12 22:19 
    센트럴 파크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여러가지였다. 홀든과 피비를 생각하고 싶었고 할과 로라를 떠올리고 싶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에 가면, 그 위에서 첫키스를 나누고 뉴욕이 아름답게 느껴졌다던 노래를 떠올리며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센트럴 파크를 갔고, 역시나 할과 로라를 또 홀든과 피비를 생각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에 가서는 이 위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름답게 보일 수 있겠지, 이 위에서 누군가와 키스를 했다면, 하고 생각을 했다.
 
 
Forgettable. 2013-10-25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관계는 시차를 통해 더욱 로맨틱해지기보단 멀어지더라구요; 친구 관계가 오히려 더 돈독해졌던듯. 저 같은 경우엔 말이죠. 밤에 센치해져서 문자보내면 일하는 중이거나, 걔가 취해서 연락오면 나는 자고있거나 일하는 중. 뭐.. 저는 지금도 남들과는 시차있게 일하고 중인데, 연애할 때 플러스 요소는 제로....... 백수를 만나야 할듯. ㅠㅠ

다락방 2013-10-25 16:44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보니 제 친구 하나가 그러더라고요. 외국에 있을 때 여자친구가 자꾸 전화를 하는데, 그 때 자기는 일끝내고 너무 피곤해서 자고 있을 때라고. 그런데 번번이 자지 말고 자기랑 통화하자고 요구하는 바람에 정이 떨어져 버렸다고...서로 다른 시간을 살면 그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네요. 흐음.

백수 보다는, 음, 뽀님이 일하는 시간에 일하고 뽀님이 노는 시간에 노는 사람을 사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아니면 먼 데 있는 남자 사귀어요. 여자친구와 짧게짧게 연애하던 내 남자사람 친구가 지금 여자친구와는 3년째 사귀고 있는데, 그게 먼 데 살기 때문이래요. 가끔 보니까 싸울 일도 없고 가끔 보니까 서로에게 질리지도 않고 오래 간다고...아, 그러니까 외국같은 먼 데 말고 음...강원도 정도? 강원도 유지라든가....강원도 땅부자라서 농사 짓는 남자....라면 한달에 한두번쯤 뽀가 금요일에 일 끝내고 내려가서 전원을 배경삼아 편하게 술을 마시고..................아니면 제주도에서 말 이천마리 키우는 남자 만나서 금요일 밤에 제주도 내려가서 주말에 같이 말타고 제주도를 달리고.................(상상이 안끝나네 -_-)

Forgettable. 2013-10-25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빵터짐ㅋㅋㅋ 저도 장거리 연애할 때 가장 오래 만났어요. ㅋㅋ
다락방은 참 말을 좋아해......... ㅋㅋㅋㅋㅋ 여기서 또 한번 달콤쌉싸름 생각 해주고;
여튼 그런 장거리 연애라면 아주 좋네요. 하지만 난 연애는 당분간 금지라. 멘탈파괴상태 ㅋㅋ

다락방 2013-10-25 17:01   좋아요 0 | URL
그치. 말이 나오면 달콤쌉싸름 나와줘야지. ㅋㅋㅋㅋㅋ 무려 발가벗은 여자를 앞에 태우잖아!
파괴된 멘탈이 얼른 제자리를 찾길 바랍니다 뽀 ㅠㅠ

배고프네요 ( ")

자작나무 2013-10-2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면 결혼해야 하나요?

다락방 2013-10-27 23:23   좋아요 0 | URL
사랑하면 결혼해야 한다고.. 제가 썼나요? 그렇다면 잘못 썼네요. 전 방향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것은 제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J는  K의 학교 후배다. K 가 어학연수를 가기전, 한 번 밥이나 먹자며 만나길 청했고 그 자리에 J 를 데리고 나온거였다. K와 내가 살갑게 늘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었고 자주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설사 어학연수를 1~2년 가있는 게 아니라 해도, 그러니까 그동난 내내 한국에 있었다해도 우리가 만날 일은 없었을 텐데, 가기전에 얼굴 보자고 한 건 좀 웃기다. 어쨌든 나는 K 를 만나러 갔건만 K 는 J 를 불렀다고 했다. 예정에도 없는 추가된 멤버는 내 기분을 약간 상하게 했는데, 뒤늦게 도착한 J 를 보는 순간 기분이 더 망가지고 말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당당한 모습이었달까. 그래서 나 역시 그에게 친절을 베풀기 보다는 첫만남 첫대화부터 틱틱거렸다. 내가 불편한만큼 너도 불편함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것도 같다. 그런데 웬걸, 하하하하하, J  를 만난지 한 시간도 채 되기전에 나는 J 에게 완전 흠뻑 빠져들고야 말았다. J 는 학교내에서 선배들로부터 '싸가지' 라고 불린다고 했다. 그게 그의 별명이라고 했다. 나를 만났을 때에도 그런 모습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수시로 꽤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거다. 나는 언제나 이런 남자들한테 강하게 매력을 느꼈다. 늘 그랬다. 당당하고 자신감있고 강하고 싸가지 없어 보이지만 '나한테는' 말투가 부드러워지는 그런 남자. 모든 여자들한테 다정하고 매너좋고 친절하고 살갑게 구는 남자들은 뭐 그러든지 말든지 하게 됐지만, 쌀쌀맞은 말투를 가진 남자를 보면 이상하게도 '나한테 다정하게 만들고 싶다' 는 생각이 막 자라나는거다. 하하하하. 여튼, J 는 여전히 싸가지 없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내가 무엇이 부족하다 느끼는지를 잽싸게 파악하고 손을 들어 마늘을, 술을, 쌈장을 더 시켜주곤 했다. 그 날 그는 비니를 쓰고 왔었는데 열심히 삼겹살을 집어 먹다가도 내가 그거 한 번 벗어봐요, 라고 하면 눌린머리가 웃음거리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곧잘 벗었다. 나는 또 까르르 웃고 잠시후에 또 벗어봐요 하고 까르르 웃었다. 그 때는 눌린 머리가 우스워 웃는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나는 이렇게 키가 크고 몸이 좋고(응?) 당당하고 강한 남자가 내 말 한마디에 움직인다는 게 엄청 좋았던 것 같다. 2차로 옮기는 내내 J 는 내 옆에서 걸었다. 취한 나를 데리고 움직인거였는데, 2차에서는 내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따라와서는 화장실 앞에 서서 나를 기다렸다. 그 때까지 한 번도 같이 술마신 남자가 취한 나를 부축하겠다며 화장실 앞에서 기다린 적이 없었는데! 나는 취한 와중에도 녀석에게 완전 쑝 가버리고 말았다. 정말 정말 매력이 터지는 남자였다. K 가 나보다 어렸으니 J 는 나보다 더 어렸는데, 와, 이토록 강하게 '매력있는 남자' 를 만난 게 얼마만인가 싶게 너무 좋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와 어떻게 되기를 꿈꿨다거나 그를 향한 연정에 밤을 지새웠다던가 한 건 아니다. 그저 와 매력터져 매력터져 하면서 '남자'로 인식했던거지. 설사 그쪽에서 나를 여자로봤다 한들 그토록 자신감 넘치는 남자를 내가 과연 내 연애상대로 삼았을지는 의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강한 매력으로 나를 풍덩 빠지게 한 남자를 몇 번 만났지만 그들 모두와는 연애를 하지 않았다. 연애상대는 늘 다른 사람이었다. 왜 나는 강한 매력이 폭발할 듯 쏟아지는 남자와는 연애하기가 두려울까. 어쨌든 녀석은 나를 엄청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는 과정에서도, 취직을 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나에게 연락을 했으며 그 사이사이 녀석은 연애를 했고 헤어졌고 또다른 연애를 시작했다가 헤어지고를 했다. J 와 단둘이 만나면 거의 내가 얘기를 하는 편이었는데, J 는 언제나 내가 신기하다고 했다. 내가 동생들과 우애가 좋은게, 내가 책을 읽는 게, 나의 학교 생활들이. 나를 만나고 돌아가노라면 너무 웃어서 얼굴이 아프다고 했고, 나는 J 를 많이 웃게 해서 아주 기분이 좋았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J 와 사랑하고 싶다거나 연애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지만 불순한 욕망이 여러차례 끼어들었던 적은 있다. 쿨럭.


시간이 흘렀고 J 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우리의 연락은 끊긴지 오래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를 잊고 살았다. 그와의 추억이란 게 별로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오늘 꿈에 그가 나온거다. 맙소사!! 이게 뭔일이람.



꿈에서 나는 어찌된일인지 지금 현재를 살고 있었는데 대학생이었다. 늙은 대학생인거지. 아주 약한 비가 내렸고 또 나는 어찌된일인지 집까지 걸어가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키가 작고 늙고 소심해 보이는 남자가 몇 살이냐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처음에 뭔가 도를 아십니까를 물으려고 하나 싶어서 무시하는데 그는 계속 내 옆에 걸으면서 작업을 거는거다. 현실의 나라면 완전 매몰차게 저리 꺼지라고 했을텐데 꿈속의 나는 왜 가만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 짜증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몇 개의 질문에는 대답해주면서 걷고 있는데, 정말이지 마법처럼!! J 가 나타났다. 여전히 키가 크고 여전히 당당하고 여전히 강한 모습이었다. 꿈에서 나는 너무나 반가워서, 와, 너 몇년만이야!! 라고 소리를 질렀고 녀석도 오랜만이라며 웃으며 다가왔다. 누가먼저랄것 없이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서로를 끌어안았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J 는 나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옆의 저 늙은 남자는 누구냐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자꾸 따라온다고 좀 싫은티를 냈다. 그랬더니 J 는 갑자기 멈춰서서 그 남자에게 저리 가라고 말했다. 싫어하니까 저리 가라고. 그러자 그 남자는 사라졌다. 나는 J 가 반갑고 또 좋아서 기분이 너무 좋았는데, J 가 이끄는대로 J 의 모교로 가서 그 안에 자리한 이상한 골방같은 데로 함께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심하게 다정했다. 그 방에 K 가 뜬금없이 들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좀 안좋았지만...대체적으로는 좋았다. 그리고 꿈이 깨서는 와- 엄청 반갑네, 진짜 매력 터지는 녀석이었는데, 하면서 기분이 막 좋았다. 현실에서도 한 번 안아보고 싶다고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오만년만에, 뜬금없이, 그가 꿈에 나온거지?






















어제 퇴근하며 읽은 책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이었다. 나는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아, 이 책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초반에 이런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한에 잠겨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랐던 그들 사랑의 초기 시절을 생각했다. 그녀를 정복할 필요도 없었다. 첫 번째 순간, 그녀는 정복되었다. 그녀를 돌아본다고? 무엇 때문에? 처음부터 그녀는 그의 곁에, 코앞에,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다. 그들 사랑의 기반에는 이런 불평등이 깔려 있었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 부당한 불평등. 그녀는 연상의 여자였기 때문에 약했던 것이다. (p.46)



아침에, 출근준비하느라 그 바쁜 와중에 다시 책을 펼쳐 보았다. 아, 이것 때문이었나봐. 이것 때문에 그런 꿈을 꾼건가봐. 이래서 꿈에 J 가 나온건가봐. 나는 순간, J 도 오늘 똑같은 꿈을 꾸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J 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았을테고, 설사 이 책을 읽었다고 해도 저 부분을 읽고 꿈을 꾸게 되는 상대가 내가 아닐 수도 있을테지.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불멸』에서도 '연상의 여인은 자수정'이란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이 책, 『정체성』에서는 단순히 연상의 여자 뿐만이 아니라 상대보다 조금 더 나이든 육체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연상의 여자는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만 연하의 남자에게 불안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 혹은 초조하거나 신경쓰이거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될 수도 있으니까. 아, 물론 이건 연상이기 때문에만 생기는 건 아니지만, 어떤 젊은 육체 앞에서는 속절없이 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그는 문 옆에 서서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그녀로부터 여섯 발자국 떨어져 있었는데 이 짧은 거리가 무한히 먼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빨갰고, 불타고 있었으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녀 앞의 남자는 거만하게 젊었고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거만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불쌍한 육체를! 젊은 남자의 시선을 받으니 자신의 육체가 그 시선 아래 환한 세상에서 빠른 속도로 늙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p.114)



사실 내가 가장 이 책 속에서 놀라웠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신뢰를 느낀 그는 말했다. "혹시 호텔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나요? 샹탈이 와 있는지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싶습니다."

를르와는 아무 말도 없다가 물었다. "샹탈이 가르쳐 주지 않던가요?"

"아니오."

"그렇다면 죄송하군요." 그는 정중하다 못해 거의 아쉽기까지 하다는 투로 말했다.

"가르쳐 드릴 수 없어요." (p.161)



장마르크는 샹탈의 애인이며 현재 같이 살고 있다. 그리고 를르와가 샹탈의 회사 동료임을 알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으니 그가 자신에 대해 아는것도 당연할 터. 그러나 를르와는 장마르크에게 샹탈이 묵는 호텔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장마르크가 아무리 샹탈의 애인이라 한들, 샹탈이 장마르크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샹탈이 자신의 애인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을 자신이 말해주는 것은 선을 넘어가는 일일테니까. 이런 태도가 필요하지 않은가 싶었다. 뉴스나 드라마속에서 두드려맞는 여자에게 사람들이 쉽게 손 내밀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 남자가 '내가 이 여자 남편이야' 라고 말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대체 남편이라면 아내를 함부로 다루어도 좋단 말인가. 그게 합당한 이유가 된단 말인가. 다른 부부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되는 일이야, 란 말로 그들을 방치하기 보다는, 아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제삼자도 말하지 않아주는 게 합당한 게 아닐까. 뭐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이제 J 의 연락처도 모르는 데, 어쩌면 좋담. 뭐 연락처를 안다한들 오만년만에 네가 꿈에 나왔단다 하고 연락하기도 좀 뭣한 일이지만. 오늘은 하루종일 J 를 떠올리며 히죽히죽 웃게될 것 같다. 나에게 건넸던 맥스봉 소세지와-그러고보니 내가 강하게 이끌렸던 두 남자 모두 나에게 소세지를 줬네!!!!!!!!소름돋아!!!!!!!!!!!!!!!!!!- 술취한 나를 바래다 주겠다며 내 핸드백을 대신 들고 내 손을 꼭 잡고 걸었던 일 같은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오른다. 다 밀란 쿤데라 덕이다. 체코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정착한 한 남자가 대한민국의 여자를 추억에 잠기게 했고 꿈 꾸게 했다.



밀란 쿤데라는 정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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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3-10-24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히.... 혼자 막 웃어요. 옆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저번에 다락방님이 그랬죠?
어떤 사람이 꿈에 나왔다면, 꿈에 나온 그 사람이 날 생각하고 있는 거라구요. 다락방님 친구가 그랬던가요? 암튼.
다락방님 오늘, 너~~~무 좋으시겠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고 강하고 싸가지 없어보이지만 다락방님께 친절했던 J씨가 오늘은 다락방님을, 아니
어제부터 계속 다락방님을 생각하네요. 얼레리~~

저는 저 책 50페이지 정도까지 읽었는데, 다락방님이 말했던 구절은 기억이 안 나요.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겠어요.

다락방 2013-10-25 16:30   좋아요 0 | URL
추억할 수 있고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에요, 단발머리님. 잠깐동안이나마 그 시절 생각하며 두근두근했어요. 아, 그런 남자가 내게 있었지, 하면서요. 하핫.
아무래도 그렇잖아요. 모두에게 친절한 게 아니라 나에게만 친절한 남자라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헤헷. 녀석이 일상에 치어 지쳐있는 와중에 잠깐동안 뜬금없이 제 생각을 한걸까요? 그래서 제 꿈에 나온걸까요? 이렇든저렇든 꿈에서라도 보니 참 반갑더라고요. 헤헷

자작나무 2013-10-24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밀란 쿤데라보다 다락방의 꿈 이야기가 더 좋아요 :)

2013-10-25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7 2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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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8 09: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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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9 08: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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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9 1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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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9 1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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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10-29 14:03   좋아요 0 | URL
노!!!!!!!!!!!!!!!!!

자작나무 2013-10-30 08:47   좋아요 0 | URL
아니 왜요? 왜 나만 빼놓고 놀아요?

아무개 2013-10-24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심하게 다정하려면 어떻게 하는겁니까? 쿨럭~

2.다락방님을 유혹하려면 우선 맥스봉 부터 준비를 해야겠군요. (남자사람님들 참고하세요!)

3.지금 '시적정의'읽기 시작했어요. 이거 다음은 '참을수 없는~'입니다. 오랫만에 기대되는 작가를 만나서 흥분됩니다^^


다락방 2013-10-25 16:35   좋아요 0 | URL
1. 아무개님. 심하게 다정하면 되는겁니다.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심하게 다정한 게 어떤건지 직접 보여드릴 수 없는점이 좀 안타깝네요.

2. 아뇨, 이젠 맥스봉에 넘어가지 않아요. 제가 좀 늙은 관계로다가....이젠..음.....어....그러니까......스테이크 정도는 되야...쿨럭.

3. 시적정의도 아닌, 밀란 쿤데라도 아닌, 쇼펜하우어 페이퍼를 쓰셨던데요!!

무해한모리군 2013-10-24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꿈을 꿀 수 있다니 밀란 쿤데라는 정말 대단하군요!
다락방님 꿈 이야기는 늘 좋아요 ㅋㄷㅋㄷ

저도 강하게 끌린 사람들과는 연애하지 못했어요.
연애대장에다 먼저 고백하는데 주저함이 없는데도 내게 너무 멋진사람에게는 그러지 못한듯해요.
가장가까운 기억은 감성이 충만하다 못해 똘끼가 있는데다 아마추어 연극인이고, 등산이 취미인(나랑 같은!!!) 남자를 만난거예요. 산을 같이타면서 하루종일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너무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애인도 없는거 같았는데 왜왜 꼬셔볼 엄두도 내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꼭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저런 사람이 날 좋아할리 없지 마음이 늘 앞서는거 같아요...

다락방 2013-10-25 16:38   좋아요 0 | URL
강하게 끌린 사람과는 왜 연애하지 못했을까요? 그들중에 어떤이는 제게 연애하자고 덤벼든 적도 있었는데 거부했어요. 엄청 매력을 느꼈으면서도. 왜그랬을까 곰곰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마도 제가 불안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일단 상대의 초매력에 기가 죽은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남자는 어디가서도 초매력일텐데 나랑 사귀는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유혹을 받을것이고 그 모든것들에 있어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고.....뭐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연애상대는 초매력보다는 안정에 좀 더 중점을 두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초매력남과 연애하면 만날때마다 번번이 가슴이 뛰어서...뭐랄까. 초매력남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할 것 같아요. 초매력남으로 그저 남아줬으면 좋겠어요. 어디 다른데 정착해서 변질되지 말고....연애를 안해도 좋으니 초매력남들을 많이 알고 지내고 싶습니다 ㅠㅠ

아, 휘모리님. 저 [톰크루즈에게 전화오게 하는 방법] 책 샀어요. 다 읽으면 페이퍼 쓸게요. 물론 당분간 읽을 생각 없지만;; 헤헷
 















이 책의 프롤로그가 끝나고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이런 그림이(책에는 흑백으로) 실려있다.



이 그림 밑에는 이런 설명이 첨부되어 있다.


Dan Jones|Cable Street Anniversary. 1936년 영국 파시스트들이 유대인 지역을 관통하여 행진하려는 것을 50만 민중이 막아 낸 일을 기념하는 축제.



나는 이 축제가 뭔지 궁금한 마음에 검색창을 열고 검색해 보았지만 결과를 찾아낼 수 없었다. 유래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데. 내가 검색 병신이라서 못찾는 것 같긴 한데...어쨌든 저 짧은 설명 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50만 민중이 막아냈다는 것이. 그들이 연대하여 막아냈다는 사실이.


사실 끝까지 다 읽고나면 이 책의 저자인 류은숙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대단한 인권운동가인지 알 수 있지만(덧붙여진 유해정의 글로 알 수있다), 정작 류은숙 본인은 자신이 인권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었고 서툴렀는지를 고백한다. 좀 더 나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그녀가 고민해왔던 순간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드러나있는데, 그건 우리 모두가 의심을 품고 생각을 해보았던 고민이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를테면, 프롤로그의 공포영화에 관한 부분은 공포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의심을 가져보지 않았을까.



나는 겁이 많아서 공포영화를 못 본다. 아찔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붙잡고 고개를 처박을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을 때만 간혹 곁눈질로 몇 편을 봤을 뿐이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 안 가는 공통적인 장면이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정말 무서운 상황인데 등장인물들이 꼭 "난 이리 가 볼 테니 너는 저쪽으로 가 봐." 라고 하고는 흩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무서울 때는 서로 꼭 붙어 있는 게 정상이지, 왜 째지는 거야? 당장 괴물이나 괴한이 나타날 상황인데 저건 말도 안 돼!' 이러는 것은 내 생각을 뿐이다. 그렇게 흩어놔야 피 흘리는 희생양이 생기는 것이 잔혹공포영화의 여전한 규칙이다. 이와 반대로, 사소하지만 무섭기 때문에 살고 싶어서 꼭 붙어 있는 것이 연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pp.14-15)



세상이 공포영화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 안의 등장인물들이고. 우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난폭하고 잔인한지 잘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와 너를 분리하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이 부분에 이르러서야 들었다. 연대의 중요성을 가장 잘 설명한 글이 바로 이 글이 아닐까. 


이 글을 읽으며 여러 군데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바로 내 생각이 그러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저 막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부분들이다.



상상의 요구만으로도 지레 겁먹은 친구들이나 나 자신도 방어 본능에 따르고 쿨한 그런 관계보다는 당연히 더 깊고 따뜻한 관계를 원한다. 사실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고 살면서는 늘 허전하다. 적당한 거리라는 것은 상상의 위치이지 현실의 위치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이런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상사가 좀 많은가. (pp.21-22)




1996년, 나는 런던 앰네스티에서 연수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날 펴 본 신문 1면에 활짝 웃는 여성 네 명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평화의 여성들, 무죄 선고 받다."라는 제목에, 관심을 확 잡아끄는 내용이었다. 그녀들은 그해 1월 영국의 방위 산업체인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의 호크 전투기에 침입해 주요 조종 장치를 망치로 때려 부쉈다. 그 전투기가 인도네시아에 수출돼 당시 인도네시아의 식민지였던 동티모르의 민간인 살해에 이용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002년에 비로소 독립국이 된 동티모르의 당시 인권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나는 눈물 속에서 태어났고 눈물 속에서 자랐고 눈물 속에서 죽을 것입니다."가 당시 동티모르 인권 보고서의 제목이었다. 30년 가까운 식민 치하 속에서 제목 그대로 대량 학살 등 갖은 만행이 자행되고 있었다. 호크 전투기의 조종 장치를 부순 여성들은 조종석에 동티모르의 학살 희생자 사진을 붙이고 자신들이 한 일을 언론에 전화로 알렸다. 이들은 재판에서 동티모르의 민간인 대량 학살에 사용될 호크전투기를 무장 해제시킨 자신들의 행동은 유엔의 '집단살해방지협약'에 비추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영국 정부가 그런 학살 행위를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온갖 평화적 노력을 다 기울였고, 그 뒤에야 전투기를 무장 해제하는 직접행동에 나서게 됐음을 증언했다. 그 결과 법원은 "더 큰 악을 방지했다."는 이유를 들어 다수결로 무죄를 선고했다. (pp.43-44)




 몇 해 전 한국의 나이지리아 대사관 앞에서는 당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환경운동가 켄 사로-위와 Ken Saro-Wiwa의 구명을 위한 집회가 있었다. 초국적 기업 셀과 그 기업과 결탁한 군부의 석유 채취와 인권 탄압을 고발한 것이 켄의 죄명이었고, 전 세계적인 구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켄의 사형은 집행됐다. (p.128)




자기 사유를 실천하는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런 만남의 끈 가운데는 쌍용자동차 해고자, 가족과의 집단 상담으로 연대란 무엇인가를 보여 준 정신과 의사 정혜신 씨도 있다. 정혜신 씨와 고문의 경험을 나눴던 강용주 씨와 고문 피해자들은 쌍용자동차의 상처와 자기들의 상처가 서로 통하는 것이라며 고문 피해에 대한 국가배상금을 지원금으로 썬뜻 내놓았다. 그런 연대를 통해 싸용자동차 노동자들과 만나 세상에 자기 상처를 내보이고 함게 어루만지는 일이 생긴 것이다. 또, 그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평택에서부터 물집이 터져 가며 걸어서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서울에 차려진 쌍용자동차 관련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지키러 올라왔다. (p.157)





나는 주인이니 주체니 하는 단어보다 '자기'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스럽게 부르는 말로 느껴져서이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없는 연대는 있을수 없다. 기껏해야 머릿수를 채우고 세를 과시하려는 동원일 것이다. 내가 고유한 자기를 느끼지 못하고, 자기를 초라하고 보잘것없다고 학대할 때 그렇지 않다고 야단 떠는 이들이 있기에 다시 웃게 된다. 나에 대한 모욕에 같이 싸워 주는 다른 자기들이 없으면 나를 지킬 자신이 없다. 그런 자기들이 만나서 서로의 낯을 세워 주는 것이 연대하는 개인주의일 것이다. 어쩌면 시인 정희승의 <숲>이라는 시가 그 어떤 기나긴 설명보다 이를 잘 드러내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pp.160-161)




사실 나는, 이 책의 저자처럼 그리고 이 책의 저자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처럼 인권을 위해 운동을 할 자신은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은 분명 들지만, 내가 그 운동에 뛰어들 자신은 없다. 나는 아직은 그런 사람인가보다. 사람답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고 그들이 살만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이기보다는, 내 자신 하나를 위해 더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사람. 척 보기에도 힘들어보이는 길을 갈 생각이 좀처럼 없는걸 보면,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가진 게 많은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서투른 연민을 가진 자일지도 모르고, 동정은 하되 공감은 하지 못하는 자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눈물 몇 번 흘린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닌데. 입맛이 쓰고 마음이 편치 못하지만 다시 슬쩍, 고개를 돌리게 된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내 주변과 이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과 태도가 조금쯤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아씨..머릿속이 좀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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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0-2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진정 '철'이 드는 순간은 내가 아닌 남을 자신을 봤던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볼 때 라고 생각해요.

다락방 2013-10-24 16:55   좋아요 0 | URL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가도 계속해서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되곤 해요. 사람은 죽을때까지 배워야 할 게 엄청 많은 것 같아요. 완벽하게 철이 들 순 없을것 같아요.

감은빛 2013-10-2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able Street Anniversary'로 검색하면 영어 페이지가 몇 개 나오네요.

http://www.mirror.co.uk/news/uk-news/75th-anniversary-of-battle-of-cable-street-83081
http://www.demotix.com/news/855376/battle-cable-street-75th-anniversary#media-855343
http://www.qmul.ac.uk/media/news/items/56775.html

짧은 영어실력으로 살펴본 바를 간단히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독일 나치의 영향으로 영국에서도 오스왈드 모슬리와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 반 유대주의를 바탕으로 힘을 모으고 있었다.

1936년 10월 4일 모슬리는 7천명의 파시스트들과 런던의 이스트 엔드 거리를 가로질러 행진을 할 예정이었고, 4천명의 기마경관과 1만명의 경찰관이 이를 호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30만명 이상의 민중이 길을 막았고, 경찰은 길을 뚫으려고 애썼으나 쉽게 뚫지 못했다. 이때 경찰청장 필립 게임 경이 모슬리에게 돌아가던가 살육을 감수하던가 해야겠다고 말했다. 결국 파시스트들은 치욕적으로 돌아섰다.


저도 이 책을 읽고 모자라는 글 하나 썼던 기억이 나네요.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법이지만,
그게 다락방님이어서 더욱 반갑습니다.

감은빛 2013-10-2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은 포석(보도블럭)과 낡은 침대(매트리스)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의자 다리와 썩은 야채로 무장했다."
라는 기사 부제가 무척 인상적이네요.
다락방님 덕분에 흥미로운 사건을 하나 알게 되어 좋습니다.
(왜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이 사건 혹은 이 그림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요?)

다락방 2013-10-24 16:58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고 감은빛님이 쓰신 글을 안그래도 읽었던 참입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고 어떻게 같은 것을 기억하겠습니까. 서로 관심사가 다른데요. 저도 다른분들의 독서 후기를 읽을 때마다 오, 이 책에 이런 부분이 있었던가..하고 생소한걸요. 하하핫.

찾아서 옮겨주신 부분은 무척 흥미로운데 제가 영어가 안되는게 안타깝네요. 안그래도 검색하니 죄다 영어라 어머? 이러고 휭- 돌아서 나왔거든요. ㅠㅠ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삭줍기」의 첫머리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허공을 바라본 채 그녀는 유려하게 그 구절을 낭송했다.

"'나는 가능하다면 빨리 나이를 먹고 싶다. 허리가 조금 구부정해진들 별수 있나. 어쩌면 그때쯤에는 병아리르르 키워 입에 풀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늙은이란 존재가 반드시 세상을 원망하라는 법은 없다.'"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분명히 시다가 그 노부인에게 했던 말과 일치했다. 뜬금없이 병아리 운운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하지만 내가 놀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읽은 소설을 모두 외우고 있습니까?"

그렇게 묻자 시노카와 씨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 그럴 리가요. 아니에요. 전부라니, 그 책에서 좋았던 부분을 몇 페이지쯤 외우는 정도인데‥‥‥."

"네? 그게 대단하다는 거죠. 그런 사람 처음 봤습니다."(p.123)
















시노카와는 고서점의 주인이다. 고서점의 주인이란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책을 좋아한다. 아주, 매우 많이 좋아한다. 책만 살펴보면 이 책이 몇 년도에 초판이 나왔는지 그 출판사는 어떤 출판사인지 몇 부가 인쇄됐는지도 술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심지어 책을 읽다 좋아하는 부분을 '몇 페이지쯤' 이나 외운단다. 대박. 그..그..그게 가능한건가?


이 부분을 읽다가 뭔가 열듬감에 휩싸여 나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그 책들 중 어떤 부분도 외우지 못하고 있었다. 한 페이지는 고사하고 몇 줄도 외우지 못한다. 지금 딱 외운다고 생각나는 부분은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이 문장이다.



뭐 입고 자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게 내가 외우는 전부다. 그런데 몇 페이지씩이나 외우다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정말 페이지를 몽땅 외우기도 할까? 그러고보니 누군가가 블로그에 책 본문을 외웠었다고 썼던걸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외울만큼 책을 좋아하지 않는걸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게 아니라 이건 아이큐의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난 안돼. 못외워. 외우는 시도 한 편도 없어. 하물며 소설의 몇 페이지를 어떻게 외워. 안돼. 그러고보니 나는 악보도 못외우는 사람인데. 뭘 이렇게 외우는 걸 못해. 아니, 근데 내가 정상인 거 아니야? 책의 몇 페이지를 외운다니, 그게 천재인 거 아니냐고. 아놔.. 난 역시 서점 주인이 되면 안되겠구나. 걍 독자로 머물러야겠어.. 쩝..







극한의 사랑이 극한의 절망을 가져온다는 건 명백한 진리다. 이 영화에서 리와 스콧은 서로에게 친구이며 애인이 되어주고 가족이 되어준다. 서로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 이 되어주지만, 그 관계가 늘 그 감정 그대로 영원히 지속될 순 없다. 조금씩 마찰이 생기게 되고 서로에게 지치게 된다. 어느 순간, 다정한 리의 모습에 '이렇게 다정한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며 스콧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한 때는 서로에게 서로뿐이었는데. 


리는 이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스콧은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든다. 리는 자신의 집에서 스콧을 쫓아내려하고, 스콧은 집 안의 모든 물건을 부수고 던지고 소리지르고 몸부림친다. 그가 리를 그토록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특별하거나 유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의 분노와 절망은 오지 않았을 터. 저 극한의 절망은 극한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 


서로의 밑바닥까지 보았다는 건, 위에서 말했듯이 서로의 모든 순간을 공유했단 뜻이다. 그러니 지저분하게 등을 돌렸다한들, 죽음의 순간에 생각나는 건 그 사람일 수밖에 없다. 리가, 죽음의 순간에 스콧에게 자기를 보러 와달라고 말했을 때, 그의 앞에서 '너랑 함께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했을 때, 나는 어쩌면 사랑에 대한 내 태도를 좀 달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늘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는 나이지만, 그렇게 물러서만 있다가는 죽음의 순간에 어느 얼굴도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아무리 인생 혼자 가는 거라 해도, 마지막 순간에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상대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토요일부터 조카가 와있다. 세상에 태어나 해를 보고 달을 보고 구름을 보고 꽃을 본 지 고작 39개월밖에 안 된 아이가, 어제는 하늘을 보더니 나한테 이런다.


이모, 구름이 예뻐서 나가도 좋겠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뭐 이런 애가 다있어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ㅓ얘 왜이렇게 감정이 풍부해. 어쩌면 이렇게 감정 표현을 잘해. 넌 대체 어떤 모습으로 자라게 될까?




갈비..먹고 싶은 날이다.

집에 가서 조카 데리고 갈비나 먹으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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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1 2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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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2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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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3-10-22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우기는 커녕 읽었던 내용이 전혀 생각도 안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저 같은 사람도 있는걸요.
ㅠ..ㅠ 이럴땐 진짜 책 뭐하러 읽나 싶고 뭐.....흠...흠...

구름이 이뻐서 나가도 좋겠다고 말하는 39개월짜리 조카라...
얼마나 예쁠지 상상도 안되요^^

다락방 2013-10-22 08:57   좋아요 0 | URL
읽었던 내용이 전혀 생각 안나는 경우가 대부분인건 저도 그래요. 심지어 과거 페이퍼를 보다가 어, 내가 이런 책도 읽었나? 할 때도 있어요. 책 표지 자체가 생소한 것들...하하하하하하. ㅠㅠ

무해한모리군 2013-10-23 15:30   좋아요 0 | URL
저는 읽고 있는 책 제목도 잘못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 =.=
나는 안나 카네리나 ㅠ.ㅠ

레와 2013-10-22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아아아앙 타미야.........................♡


다락방 2013-10-22 10:13   좋아요 0 | URL
내 조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Mephistopheles 2013-10-22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더글러스는 참 대단한 배우 같아요. 젋어서는 아버지(커크 더글러스)의 후광의 스트레스에. 중년엔 섹스중독증을 극복하고 노년엔 구강암 말기를 이겨내고...미녀 아내(캐서린 제타 존스)맞이하고...(하지만 이혼한다네요..)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라고나 할까요.

다락방 2013-10-22 10:18   좋아요 0 | URL
마이클 더글라스라는 걸 알지 못했다면 마이클 더글라스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 같아요. 모습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아마도 변장을 엄청 잘한듯. 제가 본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영화중에 가장 인상적인 영화였어요. 가장 마이클 더글라스가 빛난 영화였고요.

에르고숨 2013-10-22 10:50   좋아요 0 | URL
변장ㅋㅋㅋ! 이럴 땐 '분장'이라는 말이 있지 싶은데효.

다락방 2013-10-22 10:5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에르고숨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는 '변장'이라고 써놓고 아..이 단어가 아닌것 같은데 뭐지, 뭐지, 이러면서 분장이란 단어는 절대 안떠오르고 '변신?' 이러면서 아 변신은 더 아닌데.......이러고 있었네요.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연 2013-10-22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블리아 고서당ㅎㅎㅎ 저도 이거 보고 싶어서 계속 장바구니에 짱박아놓았는데 우선순위가 자꾸 밀리네요. 조금 훑어본 정도입니다만.. 자꾸 이 책은 언젠가 봐야지, 하는 그런 책이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 이 책이 저한테 좀 그런 느낌이랄까

다락방 2013-10-22 13:14   좋아요 0 | URL
저도 여러분들의 감상을 보고서 흐음, 그렇다면 읽어볼까 하고 1권만 주문해서 읽었거든요. 아주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나름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서 2,3권도 읽어야겠어요. ㅎㅎ
우선순위는 항상 '이번에 주문'하는게 우선순위인데, 그 책들을 다 읽기도 전에 또 주문을 하게 되니까 또 이번에 주문이 우선순위가 되고 또 주문하니까....이런 일의 순환이라 책 주문을 멈춰야 사 둔 책 다 읽을 수 있을것 같아요. ㅠㅠ
 

알리데는 자기 농장에 있는 마리아 크릴을 만나러 갔다. 크릴 할머니의 사악한 눈과 지혈하는 능력은 알리데가 태어났을 때부터 유명했기 때문에 알리데는 할머니의 능력에 대해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크릴 할머니에게 자기 처지를 봐 달라고 하려니 찾아가기가 어색했다. 알리데는 누구에게도 자기의 괴로움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기댈 데가 없었다.

마리아 크릴은 마당 긴 의자에 고양이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알리데가 올 줄 알았다고 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도 아시나요, 크릴 아주머니?"

"머리 색깔이 밝은 청년 때문이지. 젊고 잘생긴." (p.133)

















한스를 먼저 발견한 건 알리데였다. 첫눈에 반해 그가 자신을 봐주기를, 자신과 눈을 마주치기를 속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런데 그가 눈을 들어 마주친 건 알리데의 눈이 아니라 알리데의 언니인 잉겔의 눈이었다. 그저 마주치기만 한거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그 마주침에는 강렬함이 있었고 끌림이 있었다. 한스와 잉겔은 눈이 마주치고 사랑하게 됐다. 한스를 먼저 발견한 알리데의 의지와는 다르게, 알리데의 생각과는 다르게, 알리데의 기대와는 다르게.


한사람이 다른 한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누가 먼저 만났'는지가 대체 뭐가 중요할까.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알리데는 자기가 먼저 보았고 먼저 사랑을 시작했는데 이런 결과가 난 것이 몹시 원통하다. 한스가 언니인 잉겔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들을 볼 때마다 알리데는 저건 무슨 뜻일까, 저들은 무슨 의미를 담고 저 말을 하는걸까 몹시 궁금하다. 한스와 잉겔은 결혼하고 알리데는 그 집에 함께 살면서 그들이 서로의 시선을 좇고 들끓는 애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자꾸만자꾸만 보게 된다. 한스는 언니와 결혼했지만, 언니의 남편이지만 알리데는 한스를 포기할 수가 없다, 갖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노파를 찾아간다. 마법의 주문을 걸어줄 수 있는 노파를. 그녀는 노파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바라보지 못하게 할 수 있나요?" (p.136)



이미 언니의 남편인 한스를 두고 저런 바람을 가진 알리데가 너무 가여워서 너를 위해서라도 그걸 멈추라고 말하고 싶다. 한스를 바라보는 마음을 한스를 원하는 마음을 멈추라고. 그러나 이미 싹터버린 사랑은 멈추라는 말로 멈출 수 없는법. 한스에 대한 사랑과 욕망에 눈이 먼 알리데는 평생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들을 해버리고야 만다. 





나는 언제나 사랑에, 단 한사람에 대한 사랑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위험하게 느껴진다. 그들의 그 사랑이 결국은 자신에게 비극을 가져올 것이 뻔한 선택을, 그들은 그 사랑에 빠져있는 동안 하고야 마니까. 왜 사랑에 자신을 던질까. 왜 사랑에 그토록 매달릴까. 왜 그들은 그토록 그 사랑을 간절해할까. 나는 영화나 소설속에서 하나의 사랑에 자신을 송두리째 던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체 저런 삶은 어떤 삶일까' 를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나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실감한다. 나로 말하자면 사랑에 나 자신을 몽땅 던지지는 않으니까. 나로 말하자면 언제나 한 발을 빼고 있으니까. 나는 극으로 치닫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극으로 치닫는 사랑은 극으로 치닫는 결말을 불러오니까. 그들과 나의 차이는 어느것을 더 중요하게 두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나는 내 자존심을 가장 위에 두고 그들은 사랑을 가장 위에 둔다. 그들은 그 사랑을 '어떻게든' 이루고 싶고, 나는 그 과정에 내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다면 사랑을 접거나 포기하는 쪽을 택한다.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가슴 아파도 나는 내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 이미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나를 전혀 봐주지도 않는데, 그런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려 보겠다고 묘약을 받으러 가는 그 마음이 참으로 안타깝다. '내 사랑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든 한다'는 마음가짐은 대체 어디로부터 나온것일까. 왜 그것이 어떤 사람에겐 있고 어떤 사람에겐 없는걸까. 나에게는 모험심이 부족한걸지도 모르겠다. 위험한 길, 힘든 길인듯 하면 별로 가고 싶어지지 않는 그런 사람. 격렬한 연애를 할 수도 있고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만, 상대가 나를 봐주지 않는 경우에 뭔가를 그다지 해내려고 할 것 같진 않다. 묵묵히 가슴아파하거나 포기하거나 할 뿐. 이 사랑을 이루게 해달라고 부적을 쓴다거나,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없애버린다거나 하는 일을 하지는 못할 것 같다. 나는 사랑에 빠졌어도 내 온 몸을 던지지는 않을것 같다. 여태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나는 이 세상에서 단단히 발 붙이고 살아가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한 몸 바쳐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사랑 받는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는 내 온 신경을, 모든 에너지를, 더 나아가서는 내 목숨을 사랑에 걸지는 않을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상대 역시 그러했으면 좋겠다. 온 우주의 중심에 나를 두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상대도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자존심을 지키고, 자신을 이 땅에 설 수 있게 하는 여러가지 것들중 내가 하나였으면 좋겠다. '너여야만 해, 너 아니면 살 수 없어' 가 아니라 '너가 아니어도 살 수 있지만 가급적 너였으면 좋겠어' 라면 좋겠다. 나는 모험심만 부족한 게 아니라 세상에 내 책임이 하나라도 더 생기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걸수도 있겠다. 뭐, 어쨌든.




소설 얘기를 조금 더 하자면, 이제는 나이가 많아버린 알리데의 집  앞에 어느날 '자라'라는 여성이 쓰러진 채로 발견된다. 남편으로부터 도망을 쳤다는 그 젊은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 둘의 과거와 현재가 반복되는데, 그 둘은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 살았으되 같은 삶을 살았다는 걸 보여준다. 알리데가 공산주의 국가적 체제로 인해 강한 힘에 농락당했다면, 자라는 돈의 유혹에 끌려가 여러 남자들로부터 농락당했다. 여자가 남자로부터 극도의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것, 그들이 반항하기에 상대가 너무 강했다는 것,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누군가 알아볼까 늘 두려워한다는 것이 그녀들의 공통점이었다. 가난했던 상황에서도 돈이 많아진 상황에서도, 여기에서도 그리고 거기에서도. 끊임없이 폭력은 행해지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 폭력으로 인해 평생 고통스러운 것으로 채워지고야 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여긴 거기와 다르다고? 아니, 다르지 않다.








그건그렇고,

어제는 돼지두루치기를 해보겠다며 두시간동안 부엌에 있었고, 별로 맛도 없었던 식사후 설거지를 하겠다며 또 한시간동안 부엌에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오늘부터는 씨리얼을 우유에 말아 먹으리라. 그러면 딱 그릇 하나 숟가락 하나만 쓰면 된다. 무슨 대단한 요리를 했다고 어제는 숟가락이란 숟가락 다 꺼내쓰고 그릇이란 그릇 다 꺼내써서 저녁 한 끼 먹는데 만신창이가 됐단 말인가. 그래, 이제부터는 씨리얼이 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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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3-10-16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이야기하기를.. 사랑은 '능력과 의지를 최대한 발휘하더라도 부족함이 드러날 수 있고 자존심이 상할 수 있다' 고 하더라구요. 개인적으로는 이 문장에 동감하는 편입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무너지더라도 그런 게 사랑의 과정이라고 여기고 싶네요. 물론 많이 아프기는 하겠죠.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에 모든 것을 다 던지는 그런 사람을 이해할 것 같아요. 그러나 사람들마다 사랑에 대한 생각은 다 다른 것 같아요. 다락방님의 말씀이 더 정확할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가 아니라도 상관없지만 가급적 너였으면 좋겠다, 와 같은 선택을 모든 것을 다 사랑에 거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지 못할거 같네요. 뭐, 이렇게 끄적거리는 저도 아픈 사랑은 좀 피하고 싶지만...

다락방 2013-10-17 11:18   좋아요 0 | URL
저도 온 몸을 다 던져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을 이해해요. 다만 저는 그러지 못할 것 같아요. 가끔은 그렇게 온 몸을 다 던져 사랑에 바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고요. 한 상대에게 올인한다니,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그 가치는 최상이 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저는 제 모두를 다 던지기엔 제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것같아요. 모든걸 다던져 이사랑을 쟁취해보자 라는 생각보다는 무너지지 않게 나를 잘 붙들자 라는 쪽의 생각을 한달까요.

어제 현빈이 티븨 광고에서 눈밭을 달리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남동생에게 말했어요.

난 현빈이 참 좋지만 현빈이 자기랑 눈밭을 달리자고 하면 거절할거야. 라고.

그러자 남동생은 저에게 "그런 걱정은 하지마" 라고 하더군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dreamout 2013-10-16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을 살짝 바꿔서, 오늘 제 마음을 표현하자면..
회사를 위해 이 한몸 던지는 일은 없을겁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보이지않는 압박감이 계속 느껴지는 건, 아마 벌써 상당히 길들여졌기 때문 아닌지...

다락방 2013-10-17 11:22   좋아요 0 | URL
가끔 제가 너무나 많은 시간을(오전 8시-오후 6시) 회사에서 보내고 있단 생각을 들어요. 게다가 출퇴근시간은 또 한시간씩. 신해철의 [도시인] 노래 가사대로 '직장이란 전쟁터' 까지는 아니더라도 '집이란 잠자는 곳'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씁쓸해요. 저 역시 회사를 위해 한몸 던지는 일은 결코 없을거에요. 전 회사가 제 가장 중요한 축이 되게 하고 싶진 않아요. 회사는 사실 좀 중요하긴 하지만-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가지 것들중 하나가 되어야만 하지, 그게 중심이 되는건 정말 싫어요.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렇지만 저 역시도 길들여져 있을지도..

네꼬 2013-10-16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님 요새 요리에 관심 생겼어요? 라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씨리얼 먹겠다는 결심을 보니, 역시 당신이라는 여자는 중간이 없는 여자. 돼지 두루치기 아니면 씨리얼이라니.

다락방 2013-10-17 11:24   좋아요 0 | URL
제가 요리에 관심이 생길리가 있겠습니까.
엄마가 여동생 산후조리 때문에 여동생 집에 가 계셔서 집에 밥과 반찬을 제가 하고 있어요...맨날 김치만 꺼내먹고 스팸만 부쳐먹을 순 없어서....그래봤자 반찬은 두루치기가 유일했고 국은 김치찌개랑 된장찌개 끓여봤는데 남동생이 먹어보더니 '누난 도대체 왜이러냐' 라고 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그것밖에 없어서 먹긴 먹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3-10-1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리얼은 아침에.... 돼지 두루치기는 저녁에...

다락방 2013-10-17 11:26   좋아요 0 | URL
아침부터 씨리얼이라니. 말도 안돼요! 그건 너무 초라한 아침이에요! (이러면서 무슨 저녁에 씨리얼이람 ㅋㅋ)
당연히 어제 저녁도 씨리얼은 아니었어요. -_-

Mephistopheles 2013-10-1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립하셨어요???? ( 아머님 동생 산후조리...^^)

동생분이 어머님께 많이 고마워하실 것 같습니다. ( 남동생이요! )

다락방 2013-10-17 14:20   좋아요 0 | URL
독립은 그러니까..나중에........( ")

별로 고마워하는 것 같지 않던데요. 맛을 보면.....Orz

Mephistopheles 2013-10-17 16:5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께가 아닌 어.머.님.께.요.

다락방 2013-10-17 17:09   좋아요 0 | URL
아 저 오독했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머님께 라고 써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