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은 환한 대낮에 벌어졌다. 대지뢰장갑차를 타고서 흑인 거주 지역을 순찰하던 군인들과 경찰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았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경찰과 군인들이 아무 집이나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어떻게 우리 아이가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총알이 날아와 우리집 창문 하나가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직장에 가 있는 동안 외손자를 돌보던 엄마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엄마는 아이를 안고 옆집으로 달려갔다. 옆집에 들어섰을 때에야 비로소 엄마는 가슴속 아이를 감싼 담요가 축축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자신도 모르게 피로 얼룩진 손을 내려다보던 엄마는 자신의 품에서 움직이지 않는 꾸러미에 시선이 갔다. 그 순간 외손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 ('은자불로 은데벨레', 「아들의 죽음」中 p.287)

















'나딘 고디머'는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들에게 편지를 써보낸다. 가수들이 모여 자선공연을 하듯, 우리도 작품으로 자선 활동을 하자고. 그 편지들에 작가들이 모두 응답해주었고, 그렇게 작가들이 자신의 대표작들을 모아 이 책,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라는 책을 만들어냈다. 이 책의 수익금은,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전액 다 에이즈예방협회에 기부된다고 책 날개에 밝혀져 있다. 


이 단편들중, 위에 인용한 작품의 작가 '은자불로 은데벨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이다. 그가 보낸 작품 「아들의 죽음」은, 인용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갑작스레, 어처구니없이 아들의 죽음을 맞은 부부의 이야기이다. 군인과 경찰은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는채로, 심지어 자신 앞에 죽음이 와 있는지도 모르는채로 죽음을 맞는다. 이런 일이 대체 왜 일어나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일이 여기, 이곳에서도 일어난다는 건 알고있다.




진우는 스무살 평범한 대학생이다. 그는 친구들과 책을 서로 빌려 읽어가며 '좋은책 읽기' 라는 독서모임을 하고 있고, 밤에는 야학에서 여공들에게 공부를 가르친다. 그런 그와 친구들에게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와 가족들에겐 말 한마디도 없이 그들을 끌고간다. 그들은 각종 고문을 당한다. 고문을 당하면서, 결국은 그 괴로움에 못이겨,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자술서에 기록하며 지장을 찍는다. 그들의 몸엔 멍투성이고, 그들의 머리와 마음도 마찬가지 멍투성이라, 그들은 겁에 질려 경찰이 하라는대로 하고야만다.


한편 아들이 어디로 간건지, 갑자기 왜 사라져버린건지 알지 못하는 부모들은 속을 끓이며 찾아다닌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까지도 찾아다녀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빨갱이가 아님을 알지만, 나라는 그들을 빨갱이라 부른다. 가족들은 자식의 몸에 들어있는 멍을 보며 대체 그들이 왜 맞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왜 그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아무런 이유도 알 수 없는채로 만신창이가 되는 자식을 보는 부모들의 마음이 어떠할까. 



은자불로 은데벨레의 소설 「아들의 죽음」에서 부모는 심지어 나라에 돈을 내고 아들의 시신을 찾아와야 한다. 게다가 자신들이 한 짓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함구하기를 명령한다.



얼마 후, 계속해서 총을 쏘아 대던 경찰은 우리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집 안으로 밀고 들어온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목격했다. 처음에는 엄마를 데리고 나가 이 일을 함구한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끌고 가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오더니 아이의 시신을 빼앗아 갔다. 이렇게 하면 자신들의 학살 행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이처럼 괴상한 논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은자불로 은데벨레', 「아들의 죽음」中 p.287)



영화 <변호인> 에서 증인석에 오른 경찰은 고문한 사실이 있는냐는 검사의 물음에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위증'을 했으되, 그 '위증'은 '증거'가 된다. 죄 없는 학생들을 데려다가 때리고 물먹이고 잠을 안재우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았던 그는, '아니'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에 쐐기를 박는다. 그 일들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앞에 피멍이 들고 망가진 대학생들 여러명이 앉아 있는데, 그런데, '아니'라고 말한다. 피멍이 들고 만신창이가 된 대학생들을 보면서 판사는 '아니'라는 위증을 증거로 채택한다.



그런데 대지뢰장갑차가 또 나타났다. 시신을 돌려받기 며칠 전 트럭이 굉음을 내며 나타났을 때 나는 엄마와 함께 집에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 소리와 고함으로 거리가 매우 소란스러웠다. 취재할 때 항상 보았던 대지뢰장갑차였다. 그 차들은 다섯 번이나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가 사는 거리를 달려가면서 닥치는 대로 최루탄을 쏘았다. 네 번째로 지나갈 때 우리 집에 명중했다. 산탄통이 창문을 박살 냈고 그동안 익숙해진 그 끔찍하게 자극적인 냄새가 집 안에 가득 차 질식할 것만 같았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우리는 헐떡거리며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우리 아들도 이런 식으로 죽었단 말인가? 저들이 우리 아들을 죽게 만든 바로 그 군인들인가? 이제는 아주 냉담하게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는가? 아니면 저들은 확실한 임무 수행을 위해 새로 뽑힌 군인들인가? 저들은 큰 소리로 웃어 가며 장갑차를 몰고 갔는가? 가족들이 지나가도록 길을 터놓는 것인가? 어떤 길을?

이 집이 우리의 보금자리였던가? 그럴 리 없다. 이곳은 단지 약탈을 일삼는 커다란 새를 기다리는 작은 새의 보금자리에 불과했다. ('은자불로 은데벨레', 「아들의 죽음」中 p.292)



<변호인>에서의 경찰은, 아들을 죽인 첫번째 대지뢰장갑차이고, 판사는 다시 또 나타나 집을 파괴한 대지뢰장갑차이다. 경찰과 군인의 원리 원칙은 국가를 구한다는 명분 아래 국민을 파괴한다. 그런데 여전히, 지금도, 그들은, '원리원칙대로' 하겠다고 한다. 역시나, 그들만의 원리 원칙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호사는 불법시위란 죄목으로 판사 앞에 서게 된다. 검사는 그에게 죄가 있다 말하고, 피고인이 된 변호사의 변호인들은, 자신들의 수가 많으니 전원 참석을 했는지 이름을 불러달라고 판사에게 요구한다. 판사는 그렇게, 99명의 변호인의 이름을 차례대로 부른다. 99명의 변호인은 모두, 재판을 받기 위해 판사 앞에 서 있는 변호사를 변호하기 위해 참석했다. 그들은, 변호사의 편이 되어준다. 변호사의 편이 되는 것이 옳은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옳은 길을 가기 위해 행동으로 옮긴것이다. 나는 그 시간들을, 그 사건들을, 그래서 그 변호사를 잘 몰랐다. 잘 몰랐기 때문에 편을 들어준 적도 없다. 편을 들어준 적이 없는데, 이제는 편을 들어주고 싶어도 편을 들어줄 수가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점이 너무 속상해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앓고싶다, 고, 아프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이 미안함이 조금 덜어질 것만 같아서. 흠씬 앓고 싶어졌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나는 '한창훈'의 소설 『꽃의 나라』를 떠올렸다. 그 소설의,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마지막 문장을.


오래지 않아, 사령관은 대통령이 되었다. (한창훈, 『꽃의 나라』p.272)
















나는 저 문장을 떠올리며, 꼭 이런 문장을 상상한거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변호사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걸로 끝난 게 아니었기에, 차마 저 문장을 마지막으로 쓸 수가 없다. 그 후의 비극이 그에게 찾아들기에. 저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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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3-12-26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안철수 국회의원이 이런 트윗을 남겼어요.
@cheolsoo0919 동료들과 함께 <변호인>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여운을 느끼면서 "법치란 법준수를 국민에게 강요하는것이 아니라, 공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글을 남기며 리트윗 했지요. "이제 그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쫌!"


마지막 장면의 여운을 느끼는 그 여유가 참으로 부럽지 않소?! 이것은 비꼬는 말이 아니라오. 내 말을 믿어주시오. -.-


변호인이 있었던 진우말고 변호인 조차 없었던 사람들은, 이 비슷한 사건의 희생양이 되어 유죄 판정을 받고 지금도 고문의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자신의 원통함을 말할까. 지금도 죽은듯이 엎드려 세상과 담쌓고 있지 않을까. 그 사람들에게 미안했어요.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것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은 것이라면 나는 뭘 해야 할까.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엉엉.. 댓글 방향이 점점 .. )

믿을 수 있어요? 영화보다 더 끔찍한 지금이?!


다락방 2013-12-26 18:41   좋아요 0 | URL
아침에 트윗에서 레와님의 리트윗보고 저게 누구한테 한말인가 했는데 안철수였군요. 몰랐네. 하핫;;

극중 변호사는 진우를 변호한 게 아니라 진우 外 피고인을 모두 변호한거죠. 그들 모두에 대한 변호였어요.

영화속 경찰도 국보법 원칙을 그렇게나 잘 지켜대더니, 지금도 여전히 원리원칙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네요. 남이야 죽든말든 원칙대로 하겠다는 사람들요. 그 원칙은 대체 누구의 원칙일까요..

에르고숨 2013-12-26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가슴이 너무 아프고 치 떨려서 막상 영화를 보러 가지 못하겠어요. 미안함을 정작 느껴야 할 것들은 (잠깐 실례)씨발, 안녕하겠지요. 다락방 님과 같이 앓겠습니다, 네.

다락방 2013-12-27 10:00   좋아요 0 | URL
전 정말 몰랐어요. 지나치게 무심한 사람이었어요, 전. 영화를 보는동안은 제가 무심한 사람이란 게 그렇게나 미안하더라고요..

dreamout 2013-12-26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금치 된장국을 끓여 먹고 싶어졌어요.
어제, 2014년에 읽어보고 싶은 소설 리스트를 정리해 보았는데, 정말 내가 읽고 싶은 건지...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적어 두는 건지.. 그것 조차 잘 모르겠더라구요.

내 맘대로 되는게 별로 없는 세상. 정말 오랜만에... 먹고 싶은 메뉴라도 떠올라 줘서 기분이 좋아질려구 해요.
(심지어 먹는 것조차, 지금 내가 정말로 먹고 싶긴 한건지. 정말 먹고 싶은 메뉴인지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다락방 2013-12-27 10:02   좋아요 0 | URL
드림아웃님, 시금치 된장국은 끓여 드셨어요? 근데 그런 것도 끓일 줄 아세요? 아..저는 상상도 못하겠어요. 그런 어려운 요리는...

드림아웃님 댓글을 읽고나니 저도 2014년에 읽고 싶은 소설 리스트를 한 번 써보고 싶어지네요. 그런데 읽고 팔아야 할 책이 먼저 떠올라서...뭔가 슬퍼요. 흠흠.(그건 미미여사의 솔로몬의 위증...)

드림아웃님, 오늘 금요일이에요. 잘 지내요!

dreamout 2013-12-27 12:33   좋아요 0 | URL
내일 근무해야 해서 금요일을 만끽하지 못하고 았어요. (시무룩)
시금치 된장국. 네. ^^. 제가 했는데도... 맛이 좋아서... 이제 본격적으로 요리의 신세계에 발 담궈볼까하는 생각까지. ㅎㅎㅎ

다락방 2013-12-27 12:45   좋아요 0 | URL
아...................그렇게 슬픈 소식이 ㅠㅠ 전 토요일 근무 걸리면 금요일에도 우울해서.. ㅠㅠ
아니, 시금치 된장국을 잘 만드신다니. 진짜 대박이네요! 요리의 신세계에 발 담그신 후..본격적으로 요리 블로거로 혹시 거듭나시는겁니까? 네? (기대기대 ㅎㅎ)

단발머리 2013-12-27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발이 부들부들 떨면서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아주 많은 것 같아요.
제일 슬픈 건, "빨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위력이 아직까지도, 오늘까지도 건재하다는 거지요.
여러모로, 마음 아픈 연말이네요.

다락방님, 따뜻한 거 드시고 출근하세요.
(이미 출근하셨나요?)

다락방 2013-12-27 10:07   좋아요 0 | URL
빨갱이란 단어의 위력이 어마어마한건, 아마도 전쟁 탓이겠죠. 전쟁이 무서우니 빨갱이가 먹히는거고, 빨갱이가 먹히니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붙이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거겠죠. 빨갱이라고만 하면 다...어휴..

미안해서 억울해서 화나서 부들부들 떨렸어요. 제 무식함 때문에 부들부들 떨렸어요..

단발머리님 댓글 시간 보니 저는 이미 출근해있었네요. 지금은 커피 한 잔 마시고 있어요. 오늘이 금요일이라 다행이에요.

비연 2013-12-27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이후의 비극까지 연상되어 영화보는 내내 미안하고 힘들었더랬어요...

다락방 2013-12-27 14:06   좋아요 0 | URL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공부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섬사이 2013-12-27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나 아픈 글을 쓰시다니..
아직 영화 변호인을 보지 못했어요.
여전히 볼 자신이 없어요.

다락방 2014-01-02 16:24   좋아요 0 | URL
극장에 갔는데 관객이 꽉 차서 놀랐어요. 그리고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어요, 섬사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artks01 2014-01-1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가끔 다락방님 서재에서 글을 구경하는 사람입니다...
변호인을 보고 저도 다락방님과 꼭 같은 기분이었네요. 그동안 일부러 모른척 하며 산 건 아니었나 많이 자책하게 되더군요.
정말 속상했어요. 이런 제자신이. 아직도 완전히 바뀌지 않은 현실이.

다락방 2014-01-10 15:58   좋아요 0 | URL
차라리 몰랐더라면 덜 속상했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알아야 고칠 수 있지만, 모르면 모른다는 핑계로 속이나 편할 수 있을테니 말이죠. 변호인을 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다 비슷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반갑습니다, artks01님.
 











"나는 매일 당신과 함께했었소. 그랬다는 것을 아시오?"

"네, 그러셨다는 걸 알아요." 마르티네가 말했다.

"내게 남은 나날 역시 당신과 함께할 거요. 오늘 밤처럼, 매일 저녁 나는 당신과 저녁을 먹겠소. 육신으로가 아니라 영혼으로. 어차피 육신은 의미가 없으니. 오늘 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소, 소중한 자매여." (p.68)



로벤히엘름 장군은 청년시절, 목사의 딸인 마르티네에게 반해 연정을 품었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그는 승진을 하고 결혼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31년후,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저녁식사에 가게 될 기회가 생긴다. 삼십일 년. 이제 그들은 더이상 젊지 않고 각자의 삶에 안착하고 있었던 그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곳에서 그는 마르티네의 요리사인 바베트가 만든 환상적인 식사를 먹다가 '무언가 빈 것 같았던'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그 식사의 감격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에게 말한다. 매일 당신과 저녁을 먹겠다고, 영혼으로.


얼마전에, 오래전에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하느님의 보트>를 다시 구매했다. 읽었을 당시엔 뭐야, 이건 동화야? 라며 시큰둥했던 기억이 나는데, 요즘 자꾸 그 소설이 생각났다. 오래전에 읽어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소설의 줄거리가 맞다면, 나는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잊지 못하고 내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설. 그리고 여기는 엄청난 스포일러가 될텐데, 결국, 마치 소설처럼(!) 그가 문을 열고 그녀에게로 돌아오면서 끝을 맺는. 나는 이 내용을 다시 한 번, 지금 읽어보고 싶었던 거다. 


그렇다고 내가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살고 있는건 아니다. 그러나 간혹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건 누구나 그럴테지만, 아주 가끔은,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하는 가정을 해보곤 한다. 내게 연인이 있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에게 안녕을 고하고 그를 만날것인가, 지금 내 상황이 변했으니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것인가, 하고. 나는 여기에 대해서 정말이지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가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똑같은 크기만큼, 차라리 나타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도 한다. 그가 거기 있기 때문에,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리워할 수 있는거고 아름다운 거라고. 나타나는 순간 비극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바베트의 만찬을 읽으며, 그리워하는 방법에는 아주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와 식사를 하자. 나는 로벤히엘름 장군처럼 매일을 그와 식사하진 않을테다. 나는 간혹 다른 누군가와 식사를 할텐데, 그 때는 앞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하고 싶고, 혼자 식사를 하는 중에는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그러나 그 중에 한 끼쯤은, 간혹 혼자 앉아 식사를 하며 천천히 씹을 어떤 때에는, 그를 생각하며 함께 식사하고 싶다. 


커피를 마시는 어느 아침에는 혹은 오후에. 뜨거운 커피가 든 컵을 양 손으로 잡고 호호- 불면서 그를 떠올리며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 순간에는 그를 향한 나의 영혼이 아주 강해서, 그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바로 그 때, 그도 커피를 마시며 잠깐 숨을 고르고 나를 떠올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자체로 완벽한 순간이 될텐데! 우리의 영혼은 함께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실텐데. 간혹 그 순간들에 쿠키를, 케익을 함께 내어놓기도 해야지.






나는 '이자크 디네센'의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데, 책을 펼쳐 책날개에 실린 작가 설명을 보니 이렇게 써있더라.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 북부의 롱스테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카렌이며, 필명인 이자크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 이삭('웃음'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28세에 브로르 폰 블릭센 남작과 결혼하여 남작부인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커피 농장을 경영했고, 영국인 사냥꾼 데니스 핀치 해튼과 사랑에 빠졌으나, 운명의 장난으로 연인과 농장을 모두 잃은 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리프가 열연한 바로 그 주인공이다. (책날개 中)



악. 이 여자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그러다 몇해전 한 알라디너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단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락방님이 아직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니 반칙이에요' 라고. 그 댓글을 보자마자 반드시 이 영화를 보고야말리라, 고 결심했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흐르는동안 나는 대체 이 영화를 안 보고 뭘한걸까? 혹시나 책이 있진 않을까 검색해보니, 오, 역시 원작이 있었다!



















으악, 책부터 읽어야겠다. 게다가 무려 30프로 할인된 가격에 이 책이 판매되고 있다. 맙소사!! 내가 산다!!








<바베트의 만찬> 속에서 바베트가 차려내는 음식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할수없이 영화를 봐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는 장면을 보고싶다. 그 음식의 색깔과 빛깔을, 흔들리는 와인잔속의 와인이 로벤히엘름 장군의 입 속에 들어가는 장면을, 그가 그 와인을 마시면서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복잡한 생각들이 드러나는 장면들을 확인하고 싶다. 청년시절, 사랑고백조차 하지 못했던 로벤히엘름 장군과 삼십일 년이 흐른 지금의 로벤히엘름 장군을 보고싶고, 그런 그가 영혼으로 매일 저녁 당신과 식사하겠다고 말하는 그 눈빛을 보고 싶다.





그후에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손님들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수많은 작은 후광들이 하나로 합쳐져 거룩한 광채를 내기라도 한 듯 천상의 빛이 집 안을 가득 메웠다는 것 외에는. 말수가 적은 노인들은 말문이 틔었고, 수년간 거의 듣지 못했던 귀가 열렸다. 시간은 영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 창문이 황금처럼 빛났고 아름다운 노래가 바깥의 겨울 공기 속으로 흘러나갔다. (pp.66-67)




오늘은, 당신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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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3-12-2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락방님 오늘 저녁 만찬을 여시겠군요. 메리크리스마스예요.
ps) 아웃오브아프리카는 영화관에서 보지않으면 큰 의미가 없답니다.

다락방 2013-12-24 13:55   좋아요 0 | URL
네, 오늘 저녁엔 만찬을 열 예정입니다. 와인을 마실거에요. 안주는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엄마가 사둔 파프리카로 하기로 했습니다. 치즈도 준비 되어 있고요. 고기를 사갈까 말까..계속 고민중이에요. 어제 회식에서 배터지게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지 않아도 저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것 같아요.

Mephistopheles 2013-12-24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보단 영화가 더 낫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댓글 하나가 이런 페이퍼가 양성되는군요..ㅎㅎㅎ)

다락방 2013-12-24 13:56   좋아요 0 | URL
네, 책이 막 확- 좋지는 않더라고요. ㅎㅎ
덕분에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지 뭡니까, 메피스토님!! 굿 다운로더로 다운 받으려고 했더니 없어서..할 수없이.......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겠어요. ( ")

Mephistopheles 2013-12-24 14:28   좋아요 0 | URL
므하하하하하하(이 웃음의 의미는...)

http://blog.aladin.co.kr/mephisto/1596239

다락방 2013-12-24 14:34   좋아요 0 | URL
헐. 메추리 요리는..진짜 메추리 원형 그대로..이네요. 어쩐지 멘붕... 하하하하하

Mephistopheles 2013-12-24 15:03   좋아요 0 | URL
양꼬치집에 가면 메추리구이 파는 곳이 있어요. 원형 그대로 쫙 펴서 구워주는데...
뼈채 오도독 씹어 먹음 제법 고소합니다.

다락방 2013-12-24 16:00   좋아요 0 | URL
아차산 입구에 가도 메추리 원형 그대로 구워서 파는 사람들 많아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개 2013-12-2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다락방님은 역시 가족과 함께 하는 성탄전야인가요?
저는 오랫만에 옛 부서 동료들과 만나기로 했어요.
제가 잠시 마음을 줬던 친구도 온답니다.
오랫만에 취해 볼까나~~ ^0^

2.아웃 오브 아프리카 영화 봤는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요. 헐!

3.제가 만약 오늘 저녁에 족발을 먹으면서
다락방님을 간절하게 떠올린다면 함께 먹는거니까
족발 안주는 피해주세요 ㅇㅎㅎㅎㅎㅎ

4.사랑하는 다락방님....
올 한해도 성실히 글 읽고, 글 쓰고 또 사랑하느라 고생했어요.
덕분에 많이 즐겁고 따뜻해진거 같아요....
우리 모두 내년에는 조금만 더 행복해져 봅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앤드 해피 뉴이어~ ^^


다락방 2013-12-24 14:37   좋아요 0 | URL
1. 오오오오 술 취하면 꼬장문자 보내요, 아무개님. 내가 다 받아줄게 ㅋㅋㅋㅋㅋ 저는 엄마랑 와인 마실까 생각중이에요. 엄마의 스케쥴은 묻지 않았지만 제가 와인마시자고 하면 냉큼 오케이 하실듯요 ㅋㅋ

2. 전 아웃오브아프리카도 일단 책으로 먼저 볼랍니다!

3. 저는 저녁에 아마도 족발은 안 먹을거에요. 고기는 어제 배터지게 먹기도 했고 엄마는 족발을 잘 안드셔서...그래서 어쩌지..뭐먹지..뭘로 안주를 하지.. 남동생이 회사에서 케익 받았다고 가져온다는데 케익을 안주로 할까...뭐, 고민중입니다.

4. 아무개님, 내년에도 따뜻하게 해줄게요!
:)

아무개 2013-12-24 14:51   좋아요 0 | URL
1.폰....수신거부 설정 해놓으십쇼!!! 캬하하하

2.삽겹살 먹고 돼지갈비 먹고 치킨 먹고 피자까지 먹고
집에가서 햄계란볶음 해 먹는 ***님이!
파프리카와 케익만으로 안주를 한다굽쇼!!!!????


다락방 2013-12-24 15:59   좋아요 0 | URL
그렇게 쉬지 않고 먹는 *** 님이 대체 누굽니까? 그 사람이 인간이 정녕 맞단 말입니까? 네? 누구냐고요, 누구!!

레와 2013-12-24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나의 메뉴는 볶음쌀국수+홍합탕=와인 ^^v


파프리카랑 버섯이랑 양파랑 같이 볶아먹는건 어때요?
와인과 함께라면 모든 음식이 축복!

메리크리스마스~*

다락방 2013-12-24 15:58   좋아요 0 | URL
아 귀찮아서 오늘은 못볶겠어요. 어제 회식이라 열나 먹고 늦게 잤더니 피곤.. 일단 집에 가서 컨디션 보고 볶든지 말든지 해야할듯. 나 이러다가 집 가자마자 잘지도 몰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난주 금욜에도 집에가자마자 밥도 안먹고 바로 잤다능. 그리고 물론 일어나서 밥 먹고 와인마시고 혼자 쑈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

메리크리스마스, 레와님~ :)

blanca 2013-12-24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바베트의 만찬은 영화가 더 더 정말 너무 좋아요! 그리고 세상에나, <아웃오브아프리카>를 안 보셨다니요. 저는 세 번 정도 봤는데 볼 때마다 눈물이 줄줄 나더라고요. 추천 또 추천합니다. 그래서 원작도 읽어보려고 했었는데 글씨가 너무 작더라고요. 그래서 변명같지만 아직 시도하지 않았어요. 크리스마스 이브. 저는 지금 몹시 배가 고픈데 마트에 식료품을 주문했는데 주문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일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에쿠니 가오리의 저 소설은 장바구니에 담아갑니다. 너무너무 기대되네요. 마지막 스포일러를 읽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은 조금 남지만요^^;; 메리 크리스마스!

다락방 2013-12-26 11:38   좋아요 0 | URL
<영혼의집> 사려고 검색하다가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봤어요. 그래서 지금 이걸 어쩌나, 망설이고 있답니다. 저도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을 아무것도 읽어보지 못한 상태로 에세이를 먼저 접하게 된거거든요. 제 경우에 마르케스의 마술적리얼리즘은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이사벨 아옌데의 에세이에서 가끔 점을 치고 맹신하는 게 음, 좀 지나쳐 보였던 것도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영혼의 집>을 읽고 싶었는데 확- 도전을 못하겠네요. 흐음.
그래도 이 책은 참 좋았어요.

아니, 식료품은 왔나요? 도착 한거에요? 크리스마스에 맛있는 것 좀 드신겁니까?!!

프레이야 2013-12-25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베트의만찬,은 올 시월 부산국제영화제 행사의 하나로 박찬일 쉐프가 한 음식과영화에 대한 강연에서 알게 됐어요. 아웃오브아프리카,도 언급했었죠. 찜만 해두곤 잊었는데 디비디가 있군요. 담아야지. 다락방님에게도 메리 크리스마스^^

다락방 2013-12-26 11:39   좋아요 0 | URL
저도 바베트의 만찬을 꼭 챙겨봐야겠어요. 블랑카님도 극찬하시고 밑에 댓글 달아주신 라일라님도 극찬하시니 꼭 보고야 말겠어요. 만찬 장면 너무 궁금해요!
아웃오브아프리카도 잊지 말고 다음에 지를 때 꼭 포함할겁니다. 불끈!

크리스마스 잘 지내셨어요, 프레이야님?
:)

LAYLA 2013-12-2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다시 생각해도 명작인거 같아요. ^^

다락방 2013-12-26 11:39   좋아요 0 | URL
오케오케 접수합니다!!
 

아침 출근길.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려면 아직 좀 더 가야하는데, 정류장에 서있던 마을버스가 막 출발하려고 한다. 나는 냅다 뛰었다. 사실 저 버스를 타지 않아도 괜찮다. 그 다음버스, 그 다음버스를 타도 나는 지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눈 앞에서 버스를 놓칠순 없지. 어느틈에 나는 입밖으로 소리내어 외치고 있었다. 가지마, 가지마!!


내 앞에서 뛰던 아저씨 때문에, 그 앞에서 뛰던 여고생 때문에 버스는 출발이 자꾸 늦춰졌고, 결국 나도 간신히 헉헉대며 그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으학.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며 버스에 타고 숨을 고른다. 크- 아침마다 빡 세...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갈치구이, 계란말이와 함께 밥을 먹고 왔는데 소화가 다 됐네? 버스에서 내린 뒤 까페에 들러 샌드위치를 산다. 그리고 사무실에 와서 커피를 내렸다. 



파트리크는 짙은 레드 와인으로 가득 채운 와인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에리카는 와인 향이 풍기도록 잔을 살짝 돌리고, 코를 잔 안으로 깊숙이 넣은 다음, 입을 다문 채 향을 들이마셨다. 강한 오크향이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가 발끝까지 쫙 퍼지는 듯했다. 기분 좋았다. 에리카는 와인을 조심스럽게 맛보았다. 입안에서 와인을 굴리며 공기를 약간 빨아들였다. 향만큼이나 맛도 좋았고, 파트리크가 와인에 꽤 돈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트리크는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환상적이야!"

"그래, 지난번에 네가 와인 맛을 안다는 걸 깨달았어. 유감스럽게도 난 한 상자에 50크로나 하는 와인이랑 한 병에 수천 크로나나 하는 와인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지만."

"너도 알 수 있어. 이건 습관의 문제이기도 해. 와인을 제대로 맛보려면 벌컥벌컥 마시지 말고 시간을 들여야 하거든."

파트리크는 부끄러워하며 손에 든 와인 잔을 바라보았다. 벌써 3분의 1이나 비어 있었다. 그는 에리카가 스토브에서 요리를 확인하려고 등을 돌렸을 때 그녀의 와인 시음법을 흉내 내려고 애쎴다. 정말 전혀 새로운 와인을 맛보는 것 같았다. 그는 에리카가 했던 대로 와인 한 모금을 입안에서 굴렸다. 그랬더니 갑자기 완전히 다른 맛이 났다. 심지어 아주 약간의 초콜릿 맛, 다크 초콜릿 맛, 다소 강한 레드베리 맛, 약간의 딸기 맛이 섞여 있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굉장했다. (pp.258-259)


















12월에는 약속이 가득차버렸다. 더이상 약속을 잡기 곤란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약속이 없던 어제. 퇴근한 후 바로 들어가 드디어 와인을 입안에서 굴려보기로 했다. 아 설레인다. 집에 돌아가 옷을 후딱 갈아입고 손을 씻고 식탁을 앞에 두고 앉았다. 와인과 잔을 꺼내두고 흐흣 따랐다. 안주는 밥과 볶은김치였던터라(응?), 와인을 먼저 마셔보기로 했다. 김치를 먹은 후에 와인을 마시면 어쩐지 제대로 맛을 음미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급하게 마시는 사람인지라, 의식적으로 입안에서 굴려야 한다. 와인을 한 모금 입안에 물고, 안에서 굴려보았다. 어떻게 굴리는지 몰라서, 그러니까 굴린다는게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하는건지 몰라서 그저 와인을 입에 물고 혀를 왔다리갔다리 해보았다. 혀 전체가 찌릿찌릿했다. 뭔가 살짝- 오는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거기에서 다크 초콜릿 맛이라든가 뭔 베리..어쩌고 하는 맛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 갈 길이 멀구나. 조금 더 연습해야겠어. 와인의 맛을 느껴보기 위해 집에 와인을 떨어지게 하지 말자. 언제나 쟁여두자. 지금도 책장에는 두 병의 와인이 날 기다리고 있다. 솔직히, 모든 약속을 모조리 다, 취소하고, 매일 집에 가서 와인을 입에 머금고 맛을 느끼고 싶다. 그렇지만...그렇게 되서 결국 와인 맛을 알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다. 그러면 더이상 싸구려 와인을 사마시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싸구려 와인으로 충분히 만족하는데, 앞으로 점점 더, 더더더더 비싼 와인을 마시고 싶어지면 어쩌지? 난....그럴 돈은 없어...그냥 지금처럼 벌컥벌컥 삼켜버리기를 고집해야할까? 그게 사는 방법일까?




에리카는 한숨을 쉬며, 허리가 고무줄로 처리되어 있는 헐렁한 조깅바지와 간밤에 입고 잔 티셔츠를 그대로 입었다. 그녀는 월요일부터 다시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시작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오늘밤에 이미 세 코스짜리 저녁식사를 준비하려고 계획했던 데다, 요리로 남자를 매혹하려면 크림과 버터를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월요일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다. 그녀는 월요일부터 운동을 시작하고 웨이트 와처스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따르겠다고 만 번째로 엄숙하게 다짐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p.241)



아, 에리카, 사랑합니다. 나 역시 어제부터 108배를 매일 하고 잠들자고 새롭게(!!또 새로워!!) 다짐했던 터다. 그런데 어제는 안됐다. 어제는 와인을 음미해야 했기 때문에. 와인을 마시기 전에는 속히 와인을 느끼고 싶은 마음에 백팔배를 하지 못했고, 와인을 마시고 나서는 와인을 마셨으니까 하지 않았다. 그렇게 월요일이 지나버렸으니 이를 어쩐다. 에리카도 이미 밝힌 터다. 월요일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라고. 그러니 다음 월요일부터 시작하자. 그러나 오, 다음 월요일엔 회사에서 전체 회식이 있다. 그렇다면 그 월요일도 그냥 넘겨버릴테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다시 그다음 월요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 새해다. 새해에 시작하자. 월요일보다는 새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더 맞춤하지 않은가! 지금은 일단, 새해가 오기 전까지, 허리가 고무줄로 처리되어 있는 바지와 간밤에 입고 잔 티셔츠를 그대로 입고 지내자. 새로운 삶을, 2주후엔 시작할 테니까.


아니, 근데, 나 이 책 읽고 처음 알았는데,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크림과 버터를 준비해야 하는거냐? 그건 나를 유혹하려고 하는 게 아니란 말이냐, 정녕? 오호라. 



그녀는 잘 때 입는 티셔츠를 벗었다. 티셔츠를 입고 재면 항상 몇 그램 정도가 더 나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심지어 팬티도 무게가 나가는지 궁금했다. 아니겠지.에리카는 오른발을 먼저 올려놓았지만 아직 바닥을 딛고 있는 왼발에 체중을 어느 정도 싣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 오른발에 체중을 실었고, 체중계 바늘이 60킬로그램에 도달했을 때 그대로 멈춰 있길 바랐다. 그러나 아니었다. 마침내 모든 체중을 싣자, 체중계 바늘은 무자비하게도 73킬로를 가리켰다. 그렇군. 그녀가 걱정한 대로, 예상 몸무게보다 1킬로그램이 더 나갔다. 1킬로그램 정도는 더 나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지난번, 그러니까 알렉스를 발견한 날 아침에 몸무게를 쟀을 때보다 무려 2킬로그램이나 더 찐 셈이었다. (pp.240-241)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항상 몸무게를 재고, 오늘도 그랬다. 저울 위에 올라가서 바늘의 눈금을 보는 순간 정확히, 늘어날 줄 알았지만 또 늘어났군, 했기 때문에, 엉엉엉엉, 에리카가 저울과 사투하는 저 장면을 도무지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다. 무게가 또 늘었다고 생각되는 날이면, 나 역시 옷을 벗고 다시 재야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옷을 벗고 재기도 했고. 그렇게 해서 몇그램 정도 빠졌다한들, 어마어마한 숫자가 바뀌지는 않는다. 아, 에리카. 우리 같이 질리안 마이클스 언니를 만날까요, 진득하게? ㅜㅜ
















난 이제 이 언니의 dvd 가 어디에 가 처박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여튼, 새 삶은 새해에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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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7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7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3-12-17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아 왜 태그에 아직도 얼음.공.주.가????

2.저는 평상복도 허리에 고물줄......쿨럭~ ㅠ..ㅠ

3.종로에도 와인빠가 있을까요?

4.전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새해 계획을 아예 세우지 않고 살고 있네요....

5.혹시<오래오래>라는 책 읽고 페이퍼 쓰실 생각 없으신가요?
강신주 책에 <오래오래>라는 책이 나오는데 보자마자 다락방님이 떠올랐고
검색해보니 역시 다락방님도 관심이 있으신거 같던데.....
근데 난 왜?? 내가 이책을 읽고 싶은게 아니고
다락방님이 읽고 쓴 글이 읽고 싶은걸까요....하.하.하.

다락방 2013-12-17 11:32   좋아요 0 | URL
1. 저 책의 제목이 얼음공주 니까요. 하하하하

2. 저는 고무줄 조차 없는 항아리 치마를 입기도 합니다. 펑퍼짐한 원피스..( ")

3. 와인바가 있다한들 가격이 너무 비싸서 차마 갈 수 없어요. ㅠㅠ

4. 전 늘 세워요. 다이어트..

5. 그 책은 오래전부터 보관함에 넣어두었고, 아무개님의 댓글을 보자마자 <중고알림등록>신청해 두었습니다. 중고로 나온다면 제가 읽고 페이퍼를 쓸 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시간을 정할 순 없습니다. 전 7년전에 산 책도 읽지 않고 있으니까요...orz

2013-12-17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8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9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태백 2013-12-2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혹시 다락방 님이 "이 유경" 작가 님이신가요?

우연히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라는책을 사서 보게되었는데 너무 좋와서 한 5시간을 웹서핑 끝에

겨우 "이 유경" 작가님의 블로그라고 생각되는 곳에 이렇게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맞으시다면 매우많이 영광입니다.

책 너무 잼있게 읽었어요 ^^...

재 주위에 짐승같은 녀석들이 많은데 그 매마른 정서에 불꽃이 될거같아서 설레였고,

그래서 이렇게 불쑥 방명록 남깁니다.

몇권사서 이 짐승들에게 나눠 주고싶어요.

다음책도 언제일지 몰라도 기대하고 물러갑니다. ^^

자주 들러서 눈팅할게요 감사합니다.!




PS. 검색하다가 Tstori 에 "레와 _ing" 다락방님? 친구분 티스토리에 방명록도 남겨보고... (방명록은 수정.)

밤새 뜬눈으로 책읽고 잠을청할려니 다락방님의 책속에 나오던 블로그 이야기 때문에 여기저기 뒤지다

드디어 오게 되었습니다.

흑... 이제 뒹굴거리로 가야겠습니다.

다락방 2013-12-22 00:19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제대로 찾아 오셨습니다. 다섯시간이나 걸리셨다니, 참 죄송하네요. 책에 주소를 넣는걸 제가 꺼려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네요.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책으로 내면서 여러가지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책이 재미있어 친히 찾아와주시는 분도 계시고..전 오늘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다음 책을 낼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지만, 누군가 기다려준다는 생각을 하니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헤헷 :)
 

 

 


 

 

 

 

 

 

 

 

 

 

 

 

 

 

 

에리카에겐 사랑하는 여동생 안나가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르고 부모님의 집을 정리하려고 와있던 중, 에리카는 안나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부모님의 집을 팔아서 그 돈을 반 씩 나누어갖자는 거다. 부모님이 이 집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는 에리카는, 안나도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을텐데 이런 제안을 하다니, 그건 안나의 뒤에서 안나를 조정하는 루카스 탓이라고 생각을 한다. 에리카는 루카스가 싫었다. 동생이 왜 그 남자와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 두 자식들을 돌보는 것은 다 안나의 몫이었고, 안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빼빼 말라가기만 하는데, 루카스는 전혀 도와주려고 하질 않았고 늘 자기 이익만 생각했으니까. 네 삶의 주인은 네가 되어야 한다고 에리카가 안나에게 몇 번이고 말해보지만, 안나는 그런 언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잔소리로 여기며 대화를 하고 싶어하질 않는다. 에리카에겐 집을 팔지 않을 권리가 없어, 어쩔수없이 집을 경매에 내놓기로 하는데, 그 집의 가격이 어느정도나 되는지 보려고 부동산 중개업자가 찾아왔을 때, 루카스가 갑자기 방문한다. 에리카는 그런 루카스가 꼴도 보기 싫어 집의 단점들을 하나씩 중개업자에게 말하고, 이 일은 장점만 부각해서 높은 값을 받으려던 루카스의 분노를 산다. 루카스는, 에리카가 짐작했던 것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남자였다.




그녀는 너무 무서워서 꼼짝도 못한 채로 서 있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마, 알아들었어? 날 바보로 만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 조심하라고!"

루카스가 단어 하나하나를 너무 세게 발음하며 으르렁거린 나머지 그녀의 얼굴에 침이 튀었다. 에리카는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을 닦아 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그녀는 소금기둥처럼 움직이지 않고 선 채로, 그가 집에서 나가 사라져 버리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놀랍게도 루카스는 그렇게 했다. 그는 그러쥐었던 그녀의 목을 놓고 돌아서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에리카가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려던 찰나, 루카스가 한 걸음 만에 돌아와서 다시 그녀 앞에 섰다. 그는 에리카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입술을 눌렀다. 루카스는 그녀의 입술을 강제로 벌려 혀를 집어넣으면서 가슴을 꽉 쥐었다. 에리카는 브래지어의 언더와이어가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씩 웃으며 돌아서서 문으로 나간 뒤 겨울 추위 속으로 사라졌다. 에리카는 차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아서 넌더리를 내며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루카스의 키스는 목 조르기보다 더 위협적이었다.(pp.142-143)



목조르기를 당하고, 강압적인 성폭행을 당하고나서야 에리카는 안나가 루카스로부터 왜 빠져나오지 못했는지를 알게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안나가 자기 의지가 별로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폭력적인 남편과 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에리카는 운다. 이 무서운 일을 자신은 이번에 처음 당했지만 안나는 매일 당하고 살테니까. 이 무서운 남자를 어쩌다 한 번 만나는 게 아니라 안나는 함께 살고 있으니까. 그 지옥같은 생활이 짐작되어 에리카는 운다. 그동안 보냈을 지옥같은 시간과, 앞으로 보내게 될 지옥같은 순간들이 짐작되어 에리카는 운다. 그 고통속에 동생과 조카들이 있기 때문에 운다.




 에리카는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두 팔로 다리를 감싸 안고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울었다. 자신이 아닌 안나를 위해. (pp.142-143)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완전히 알 수없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 속깊은 이야기를 나눈다한들, 그것이 그 사람을 구성하는 전부일 리는 없다. 게다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엔 상대가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우리는 상대가 하는 말만 듣고 판단해야 하고, 상대의 표정을 보고 짐작하는 것, 그게 전부다. 이 사실이 지독하게 끔찍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돕고 싶어도 '알아야' 도울텐데, 알지 못하면 도울수도 없을텐데. 상대가 내게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알 수가 없을텐데.



다음번에 여동생이 집에 오면 여동생에게 이 책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리카가 안나 때문에 울던 장면에서 책장을 덮고, 어떻게 이야기할지를 떠올려 보았다. 에리카가 울었던 장면 까지를 이야기해준 다음에, 동생에게 나는 언제나 네 편이라고 말을 해야할 것이다. 물론 네가 어디에서도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이지만, 혹여라도 누군가가 너를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준다면, 네가 그것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감추지 말고 바깥으로 드러내라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테니 나에게 얘기하라고. 물론 이런 얘기를 하면 동생은 무슨 소리냐며 콧방귀를 낄지도 모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파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혼자 고통을 느끼며 몰래 흐느끼며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잔인한 지옥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 도무지 보이지 않고 해낼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낄 때, 어떻게든 누군가에게 구조를 요청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것 자체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겠지만, 손을 뻗었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지 않는 동생에게도 이렇게 얘기하고, 조카가 좀 더 자라면 조카에게도 말해야겠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너를 후려치려고 하면 반드시 나에게 말을 하라고.

 

 

자꾸만 에리카가 우는 장면이 생각난다. 안나 때문에 우는 장면이. 자신이 잠깐 동안 루카스로부터 그 공포를 맛보고, 그걸 매일매일 당하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자꾸 생각난다. 고통을 당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누군가 공포를 당할거란 걸 확실히 알고 있는 건 얼마나 더 끔찍한가.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 무서운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안나 때문에, 안나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에리카 때문에.

 

 

 

책 속에서 에리카는 와인의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에리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파트리크는 와인을 사들고 에리카를 방문했던 날, 에리카가 하는대로 입안에서 와인을 굴려보다가 그 맛에 놀라고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미칠듯이 와인을 마시고 싶어져, 어제 부랴부랴 마트에 나가 와인을 사가지고 왔다. 집에도 그제 사다 놓은 와인이 있었는데, 반 병 밖에 남질 않아 모자랄 것 같았고, 나는 뭔가 모자란 건 정말이지 딱 질색이라, 나가서 두 병을 사가지고 온 것. 저녁에 친구들을 만날 약속이 있었는데, 다녀온 뒤 집에서 혼자 와인을 마셔야지, 생각했었다. 입 안에서 굴려봐야지. 나는 너무 꿀떡꿀떡 삼키니까, 오늘은 입 안에서 굴려봐야지. 뭔가 다른 게 있나 느껴봐야지, 라고 생각하고 신이 났었는데, 친구들을 만나 소주를 마시고 맥주를 마시고 칵테일을 마시고 집에 돌아왔는데........눈 떠보니 오늘 아침이었다. 하아- 와인을 마시지 못하고 어젯밤이 지나가 버렸........................제대로 기억도 나질 않아 ㅠㅠ 내 토요일 밤은 어디로 간거야? ㅠㅠㅠㅠㅠㅠㅠㅠ

 

 

 

아무튼. 술 마신 다음날은 역시 내가 끓인 신라면이 짱이다. 해장엔 최고!

 

 

 

 

(이십대 중반에 나도 얼음공주 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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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고숨 2013-12-16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요일 밤은 다크사이드로 사라졌지만 포도주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다행입니다. 둘 다 없어졌다면(저는 종종 그렇습니다) 정말 슬픈 일이지요. 자, 그만 아쉬워하고 월요일 밤의 건배를!

다락방 2013-12-16 18:06   좋아요 0 | URL
오늘은 또 우울 쩌는 월요일이니까 포도주를 제대로 마셔볼 수 있겠죠! 안그래도 얼른 집에 가서 포도주 마실 생각에 들떴답니다. 하하하하, 안주는 김치볶음과 두부입니다. 아하하하하. (치즈도 있긴해요.)

아무개 2013-12-16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엥? 다락방님이 얼음공주? 엥????엥???????

2.습관적으로 폭력에 계속 노출이 되다보면
절대 거기에서 벗어 날수 없다고 자포자기 하게되죠.
그러면서 나름의 방어기제로 나는 어찌저찌하여 이렇게 살수 밖에 없다.
나름 우리 남편도 괜찮은 면이 있다...이렇게 스스로 세뇌하면서....

3.토일 이틀연속 엄마가 해준 시래기 감자탕과 소주를 마셨더니
꽤 한동안은 감자탕은 못먹을듯....

4.아침에 삼양라면으로 해장하고 왔는데 왜 벌써 배가 고픈걸까요 ㅜ..ㅜ

다락방 2013-12-16 18:08   좋아요 0 | URL
1. 방점은 '얼음' 이 아니라 '공주' 에 찍어주세요. 쿨럭.

2. 참 어려운 문제죠. 본인이 거기에서 나오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말씀하신 대로 습관적으로 폭력에 계속 노출되면 의지 자체가 희미해질거고요. 그런참에 누가 계속 나와 나와 하는게 곧이곧대로 들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에요. 아 속상해요.

3. 시래기 감자탕과 소주라니....아 미치겠네요. 먹고싶어..그치만 오늘밤은 김치볶음과 와인을 먹을텝니다. 후훗

4. 아침은 원래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거 아니던가요. 뭐 점심도 저녁도 다 그렇고요. -0-

단발머리 2013-12-1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다가 새벽 3시에 일어나, 다락방님 글을 읽고는 잠이 확 깨서 무서워하다가, 겨우 다시 잠들었어요.
아침에 다시 이 페이퍼를 읽었어요. 나는 이 책은 못 읽을 거 같아요.
다락방님이 인용해주신 부분만 읽어도 너무 무서워서....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지 않는 동생에게도 이렇게 얘기하고, 조카가 좀 더 자라면 조카에게도 말해야겠다."

이 부분 너무 좋았어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을 때에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네 편이다. 너를 지지한다' 이런 메시지를 계속해서 줘야한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거든요.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가 모르는 어떤 상황속에서 힘들어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 라면 중에 신라면이 짱인데, 집에는, 라면이.... 없네요, 얼음공주님! ㅋㅎ


다락방 2013-12-16 18:11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시리즈더라고요. 2권도 있고, 2권에서는 여자주인공과 형사가 결혼해서 사건을 풀어가는가봐요. 궁금해져서 오늘 주문했어요. 사실 읽으면서는 읽고 팔아버려야지 생각했었는데, 다 읽고 나서는 계속 갖고있기로 결정했어요.
우리,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계속 주의깊게 관찰하도록 해요. 도움의 눈빛을 보내고 있을 때 알아챌 수 있도록 말이지요. 아, 정말이지 사람들이 고통없이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폭력은 가장 시급한 문제고요. ㅠㅠ

아니, 신라면이 왜 집에 없나요? 저희집엔 언제나, 늘!! ㅎㅎ

2013-12-16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6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울 2013-12-1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끓인 신라면!!

부디 이번주에는 그런일이 많이 생기지 않게...해주옵시고.. ...얼음같은 해넘이모임만...가득하게 몸을 보살펴주시옵고...^^

다락방 2013-12-16 18:13   좋아요 0 | URL
오늘은 드디어! 와인을 입에서 굴려볼랍니다. 저도 와인맛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아하하하.
그나저나 이번주에 그리고 다음주까지 계속 술약속이 있어서 큰일이네요. 하하하하.

왜이렇게 라면이 또 먹고싶을까요? ㅜㅜ

Mephistopheles 2013-12-16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기공주겠지요.

다락방 2013-12-16 18:13   좋아요 0 | URL
여기서도 물론 방점은 '고기' 가 아니라 '공주'에 찍히는거죠?

Mephistopheles 2013-12-17 17:50   좋아요 0 | URL
예.............................................(정녕 그리하길 원하신다면...훗!)

네퓨타 2013-12-22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최근에 이 다음편인 프리처를 먼저 읽고 얼음 공주 읽어야 겠구나 다짐 했는데, 요기서 이렇게 얼음공주를 만났네요. 빨리 읽어야 겠어요.

다락방 2013-12-23 13:2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프리처 구매해놨습니다. 저는 좀 뒀다가 읽으려고요. ㅎㅎ
 

생각할 게 좀 있었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출근길 버스안에서 계속 그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가 내릴 정거장이 되어 카드를 찍고 문 앞에 섰다. 버스는 멈췄는데 문이 열리질 않는다. 나는 문 좀 열어주세요, 라고 기사님께 큰 소리로 말했고, 기사님은 문을 열어주시면서 "내리기 전에 벨을 누르세요!" 하셨다. 나는 속히 내리며 당연히 내리기 전에 벨을 누르는건데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걸까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 내가 벨을 누르지는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안눌렀구나. 내가 벨을 누르질 않았어. 맙소사. 하도 열심히 생각했더니 벨을 누르는 걸 잊어버렸어. 헐. 아니 이게 무슨일이야. 벨 누르는 것도 잊을 정도로 생각을 하다니...


그렇게 지하철 역에 도착해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직 생각의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건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지하철 안에서는 책을 읽자, 생각하고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책 속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비 때문에 눈이 질퍽해지자, 에리카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제한 속도보다 약간 느리게 운전했다. 실수로 들어간 히싱엔에서 빠져나오느라 거의 30분을 허비한 그녀는 이제 우데발라로 향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그제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에리카는 우데발라 북쪽의 토르프 쇼핑센터에서 E6로 빠진 뒤 맥도날드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 채 치즈버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나서 곧 고속도로로 들어섰다.(p.54)

















아니... 이여자, 뭐야? 나는 버스에서 내릴때 벨 누르는 걸 잊긴 하지만, 맙소사, 끼니를 잊은 적은 없다. 아니 어떻게 자신이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꼬르륵 소리가 나야 그 때 비로소 알 수있는 거지? 아니, 그게 가능해? 나로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이 된다. 


나는 매 끼니를 중요하게,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끼니를 거르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유전적인 요인도 있을텐데, 나는 끼니때를 조금 넘기기라도 하면 신경질이 나고 화가 나고 우울하고 초조해진다. 어떻게든 빨리 늦지 않게 끼니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그 때는 모든 판단들을 똑똑하게 내릴 수가 없다. 내 실수는 대부분 배고플 때 일어난다. 이건 우리 식구들 중에서 아빠와 나 그리고 여동생이 비슷한데, 우리는 굶어본 적도 없으면서 굶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특히 나는 더한데, 몇 년전에 한의원에 가서 이런 증상을 얘기하며 '이런 저는 저혈당이나 저혈압 뭐 이런걸까요?' 라고 닥터에게 묻자, 나를 진료한 닥터가 '저혈압 같은거 없고요, 락방씨는 신경성인것 같은데요. 굶는거에 대해 신경쓰는거죠' 라고. 헐. 이런것도 있나. 뭔가 부끄럽고 챙피했는데...어쨌든 나는 매끼니가, 한 끼 한 끼가 무척 소중한거다. 사람의 수명을 백년이라고 봤을 때, 그마저도 한 살부터 스무 살까지는 주로 주는대로 먹게되지 않는가. 내가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니. 그렇다면 내가 먹고 싶은걸 선택해서 먹을 수 있는건 고작해야 팔십년 밖에 안되는거다. 그 팔십년의 끼니를, 고작해야 팔십년의 끼니를 나는 놓치고 싶지 않다. 어느 한 순간도. 내가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그 수많은 날들 속에서도 '굶기'를 선택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나는 그 팔십년의 끼니동안(그래봤자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나 많아 졌으므로 남은 세월이 또 줄었다), 거르고 싶지 않고 맛없는 걸로 먹고 싶지도 않다.


'실버스타 스탤론'과 '산드라 블록'이 주연한 영화 <데몰리션 맨>은 미래가 배경인데, 실버스타 스탤론은 과거로부터 잠들어 있다 깨어난 상황이었다. 모든 삶들이 기계로 대체가 가능한데, 섹스조차 실질적인 몸의 접촉 없이 기계로 하던터라, 이에 실버스타 스탤론이 분노하며 산드라 블록에게 실제로 입을 맞추는 장면이 있었다. 그 때 산드라 블록은 그걸 처음 경험해보고 놀라워하고 좋아하는데, 나는 만약 끼니에 충분한 한 알의 알약이 세상에 나와도, 끝까지 음식 먹기를 고수하는 1人이 될 것 같단 생각이 오늘 들었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후후 불며 먹는 걸, 노릇노릇하고 기름이 좔좔 흐르게 삼겹살을 굽는 걸, 한 손에 나이프를 쥐고 한 손에 포크를 쥐고 스테이크를 써는 걸, 가끔은 포기김치를 손가락에 고춧가루 묻혀가며 좍좍 찢어먹는 걸, 정말이지 포기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점차로 알약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한다면, 나는 인터넷으로 '음식 먹기 모임' 을 만들어 최대한 버틸 수 있는데까지 버텨가며 내 눈으로 음식을 보고, 내 코로 음식의 냄새를 맡고, 내 입 안에서 혀로 굴려가며, 내 이빨로 씹어서 음식을 삼키고 싶다. 내가 배 부르려면 내가 직접 음식을 씹어 삼켜야 하고, 내가 취하려면 직접 내 입을 통해 알콜이 들어가 혀 곳곳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 















음식은 위로다. 아니, 맛있는 음식은 위로다. 애인이 위로가 되는 순간도 분명 있지만, 그건 나를 폭 안아주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거나, 내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눈을 맞출 때, 그 때뿐이다. 음식은 애인보다 더 빈번히 나를 위로한다. 무려 하루에 세 번이나 위로하니까. 그러니 애인하고는 헤어져도 밥하고는 못헤어지는 게 아닌가.


그런 끼니를, 밥 먹는 것을 잊다니! 배가 꼬르륵할 때야 내가 오늘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먹었구나, 하는 걸 알다니. 맙소사. 이건 말도 안된다니까, 정말. 물론 나도 인간인지라 밥맛이 없었던 적은 있다. 그러나 그 때조차도 밥 먹는 걸 잊지는 않는다. 나는 밥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밥을..........




어제 퇴근 후 백화점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엄마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왔다.


<저녁 메뉴는 묵은지닭볶음탕. 어때 땡기지?>


나는 저 문자를 받은 그 시점부터 안절부절, 백화점에 갈 일은 다음으로 미루고 집으로 곧바로 갈테닷. 하고 퇴근후 고고씽, 가면서 동료에게 '나 묵은지 닭볶음탕 먹으러간다' 이러면서 신나게 나섰다. 묵은지 닭볶음탕이 기다리는 홈, 마이 해피 홈, 마이 스윗 홈, 너무 좋아. ㅠㅠ 완전 맛있어서 기절할 뻔했다. 엄마는 내게 너 백화점 들렀다 온다고 하지 않았니? 물으셨고,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답했다.



아니, 나 백화점 가게 할 거였으면 묵은지 닭볶음탕 해놨다는 문자를 보내면 안되는거지! 점심엔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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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12-12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은 아무리봐도 토리코의 세계관과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궁금하시다면 "토리코"로 검색을 해보아요.)

다락방 2013-12-12 09:53   좋아요 0 | URL
검색해 봤습니다. 무려 토리코는 '미식 헌터' 로군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다크아이즈 2013-12-12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될 수 있으면 안 먹으려고 노력해야 돼요. 부종에다 급격한 살찜 현상ㅠ
하지만 그게 어디 되간디유?

요리에 관심 없는 저, 오쿠 찜기 사서 편하게 요리 비슷한 거 하는데, 맹탕에겐 딱이네요.
특히 장아찌 종류요. 다락방님은 요리해주시는 엄마가 옆에 계시니.^^*

다락방 2013-12-12 13:22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ㅠㅠ 저야말로 이렇게 매 끼니를 미친듯이 먹어대면 안되는 그런 육체의 소유자입니다. ㅠㅠ 그런데도 역시나 끼니때마다 유혹에 굴복당하고 말아요. 흑흑.

제 여동생도 오쿠 장만하고 엄청 이것저것 해보며 좋아하던데, 오쿠는 신의 기계인가봐요. ㅎㅎ
저는 요리도 못하는데 엄마랑 같이 살아서 입이 호강입니다. 전 계속 엄마랑 함께 살고 싶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자작나무 2013-12-12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래서 다락방의 음식공감이 출간되어야 하는 겁니다.

다락방 2013-12-12 14:42   좋아요 0 | URL
그건 독서공감이 12쇄를 찍으면 그 때....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ㅎㅎ

프레이야 2013-12-12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ᆢ 묵은지닭볶음탕! 진짜진짜 먹음직스러워요.

다락방 2013-12-13 08:53   좋아요 0 | URL
아흙 행복했습니다 프레이야님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