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동료인 올리버의) 새 직장은 버클리에 있는 '피그말리온' 이었다. 자유언론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이 만든,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진짜 서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피그말리온으로 찾아가 넓게 퍼진 '식품정치' 코너 뒤쪽 작은 카페에서 올리버와 마주 앉았다. 올리버의 굵고 긴 다리가 들어 가기엔 탁자가 너무 작아서 그는 한쪽으로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나는 라즈베리와 콩나물을 넣은 스콘을 조금씩 뜯어먹었다. (p.319)



읭? 콩나물..을 넣은 스콘? 콩나물을 넣은 스콘이라고? 스콘도 알고 콩나물도 아는데 콩나물을 넣은 스콘..은 모르겠다. 진짜 그런게 있나? 그러면 스콘을 잘라서 입에 넣을 때 콩나물 줄기가 쭈욱- 딸려나오는 건가? 이 지구상 어딘가에 콩나물을 넣은 스콘이 존재한단 말인가? 나는 구글에서 '콩나물 스콘'의 이미지를 검색해보았다. 콩나물 밥과 콩나물, 스콘이 모두 검색되었지만 콩나물이 들어있는 스콘은 검색되질 않았다. 콩나물 스콘이라니, 상상하는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것의 존재를 믿는건 좀 어렵다. 그게 스콘의 맛에 어떤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라즈베리와는 차원이 다른데.. 아, 생각해보니 미국 영화나 책을 보았을 때 콩나물이 언급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미국엔 콩나물 없는 거 아닌가? 미국에도 콩나물이 있나? 그리고 어딘가에서는 그 콩나물을 넣고 스콘을 굽나? 나는 콩나물도 잘먹고 콩나물 국도 잘 먹고 콩나물 밥도 잘 먹고 스콘도 완전 엄청 잘 먹기 때문에 콩나물 스콘이라고 못먹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스콘이라면, 다른 스콘을 선택할 것 같다. 콩나물이 들어가지 않은, 다른 게 들어간 스콘. 콩나물 스콘이라니...어쩐지 많이 당황스러워...대체 어떤 모양새일까. 스콘을 씹다가 콩나물 대가리 씹히는 게 느껴질까?



《패넘브라의 24시 서점》은 제목 그대로 '패넘브라'가 운영하는 서점이며 24시간 문을 닫지 않는다. 이 제목만으로도 얼마나 낭만적이고 근사한지, 나는 이 제목을 보자마자 『제인오스틴 북클럽』의 그리그를 떠올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선물했던 그리그. 그러나 그녀가 좀처럼 그 책을 읽지않아 실망을 거듭하곤 했었는데, 시간이 흘러 그녀는 그가 선물한 책에 푹 빠져들어 새벽까지 읽게되고, 결국 새벽에 그 작가의 다른 책을 사러 차를 몰고 나가지만 구할 수 없어 그리그의 집 앞에 오게 되는 바로 그 장면. 그리그는 창밖으로 그녀의 차가 보여 나가보게되고, 우리집엔 그 작가의 책이 많다며 그녀와 핑크빛 로맨스를 이루게 된다. 












만약 이때 24시간 문을 닫지 않는 서점이 있었다면, 그녀는 그 서점으로 달려가 그 작가, '어슐러 르 귄'의 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새벽에 그리그의 집 앞으로 차를 몰고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는 자신의 집앞에서 그녀를 발견할 수 없었을 거고, 그들이 연인이 되는것은 불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새벽에 그 차를 발견하지 않았다해도, 다른식으로 그와 그녀가 연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르 귄에게 푹 빠져버린 그녀가 그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다든가, 새벽에 서점에 다녀왔어요, 라고 말하면서 그로부터 '다음엔 우리집으로 와요' 라는 말을 듣게 될 수도 있고. 아주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수도 있다. 새벽에 서점에 가 르 귄의 책을 찾는데, 마침 그 서점에서 일하던 청년이 그녀에게 반해 그녀의 이름을 나직하게 부를 수도 있으니까.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다른 형식으로 쭉쭉 뻗어갈 수 있다. 만약 서점이 24시간 문을 열고 있었다면.


언젠가 알라딘의 어느분도 밤중에 어느 책이 무척 읽고 싶어졌는데 늦은밤이라 살 수가 없다는 식의 글을 올린적이 있었는데, 이럴때 24시 서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4시 서점은 광화문의 교보문고처럼 그렇게 큰 대형서점이진 않아도 될 것 같다. 작은대로 필요한 구색을 갖추고 있는 그런 서점이면 좋을텐데, 따뜻한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그런 서점이면 얼마나 좋을까.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슬리퍼를 신고 헐렁한 옷을 입고, 밝은 불빛이 있는 서점에 찾아드는거다. 크- 낭만적이야. 그 야밤에 서점을 지키고 있던 서점 직원과 손님들 사이에는 동지의식이 싹트지 않을까. 게다가 그 직원이 나처럼 예쁘다면(읭?) 단골 손님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 내가 만약 그런 서점에서 밤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카운터 밑에 와인 몇 병을 숨겨두고 홀짝거리며 책을 읽을 것이다. 손님이 많지 않은 새벽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겠지. 그러다가 키에누 리브스 같은 손님이 온다면, 와서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책을 읽는다면, 그렇게 몇 번 반복적으로 마주치게 된다면, 어느 봄 밤, 그에게 다가가 '와인 한 잔 드시겠어요?' 라고 물을 수도 있을것이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만드는 법을 배워 이제는 나도 만들 수 있게 된 콩나물 스콘을 안주겸 야식으로 내어놓는거다. 따뜻하게 데워서. 그리고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콩나물 밥이 더 좋다면 말만해요. 양념장은 준비해뒀어요. 



아. 우리의 따뜻한 새벽!




그러나 저 제목의 낭만성은 이 책에서 내 기대대로 펼쳐지질 않는다. 물론 24시간 오픈되어 있는 서점이고, 책을 팔고, 아주 가끔 손님이 들어와 책을 사가기도 하지만, 실상 그곳의 역할은 '뒤쪽 서가' 가 맡고 있고, 그곳엔 암호로 쓰여진 책들이 잔뜩이라 그 책들을 빌리러 오는 그 서점 회원들만 찾아드는 곳인거다. 암호와 해독, 비밀단체 등은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생각나게 하지만, 이 책은 장미의 이름보다 훨씬 더 빠르고 현대적이다. 장미의 이름은 오래된 고서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었다면 이 책은 너무 현대적인 컴퓨터 기술에 대해 얘기해서 뭔 말인지 모르겠는 부분이 더러 있었다. 이 책의 작가인 '로빈 슬로언'은 분명 아주 흥미로운 소재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쳐나가지만, 내 입장에선 아주 흥미로운 소재로 그렇게까지 재미있지는 않은 이야기를 펼쳤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이 책은 영화로 나와도 재미있을 것 같고, 그렇게된다면 나도 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24시 서점' 이란 어마어마하게 근사한 소재로 이렇게 쓰다니..실망감이 들 수밖에 없다. 


역시 내가 원하는 이야기는 내가 써야 하는걸까. 내가 한 번 써볼까. 24시 서점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로....따뜻한 새벽.....으로? 내가 쓰는 책에서 나는 전지전능한 작가일 수밖에 없으니 현빈도, 키에누 리브스도, 제이슨 스태덤도 다 등장시킬 수 있을텐데! 봄 밤의 새벽에 키에누 리브스를 찾아들게 했다면, 여름밤의 새벽엔 제이슨 스태덤을 초대하는거지. 우린 늘 끈적한 여름밤을 함께 보내는거야. 우린 늘 너무 덥고, 너무 흥분해있고, 너무 끈적할거야.





24시 서점과 키에누 리브스, 봄 밤, 와인 등등을 생각하며 미친듯이 집중해있는 내게 내 친구 정식이가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고, 그래서 확- 리듬이 깨져버렸다. 왜 하필 이럴 때 말을 걸어..돌았어?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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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4-03-20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진작부터 말씀드렸지 않았나요~~ 님이 원하시는 대로 한 번 꼭 써보세요.
현빈, 키에누 리부스, 제이슨 스태덤도 다 등장하는 걸로.
끈적끈적하고 덥고 흥분되는 걸로.
아~~ 상상만으로도 넘 좋다~~~ ^^

다락방 2014-03-20 17:54   좋아요 0 | URL
얄미운 여자 캐릭터는 넣지 않은채로 써보고 싶습니다, 단발머리님.
다시 말하자면 그러니까, 등장하는 여자는 다락방...이 전부인... -0-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루 온종일 끈적거리다 끝나겠네요. 하하. 아니, 하루가 결코 끝나지가 않겠어요! 아하하하하

단발머리 2014-03-20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죄송한대요.
전지전능한 작가시니까, 다락방님 그 아름다운 소설에 우리 '김수현'은 나오지 않는걸로 좀 해주세요.
김수현은 제 꿈에 나와야되서... 좀 바쁘.................거든요.

다락방 2014-03-20 17:54   좋아요 0 | URL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김수현을 등장시킬 생각이 전혀, 저어어어어언혀 없습니다. 단발머리님껜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러니까 제게 김수현은 아직 '애' 에요.. ( ")

=3=3=3=3=3=3=3=3=3=3=3=3=3=3

버벌 2014-03-20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콘도 콩나물도 잘 먹질않아요 두가지의조합이라니... 보라색과형광색 둘중의 하나만 없어도 가지를 먹을수있다는 유희열이 쓴 문장이 갑자기 왜 떠오르는지 모르겠네요 ㅡ ㅡ 결론은 콩나물 스콘은...음 음 24시간 서점이라니 완전 멋져요. 실제로 존재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락방 2014-03-20 17:56   좋아요 0 | URL
저는 스콘 완전 사랑하는데요, 버벌님. 콩나물도 캡사랑해요. 엄마가 콩나물 반찬 해주면 고추장 넣어서 슥슥 밥 비벼 가지고 흡입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콩나물 스콘 먹을 수 있을것 같아요. 뭐, 맛도 그리 나쁠것 같진 않고..다만, 이왕이면 다른 스콘을 먹고 싶긴 하네요. ㅎㅎ

24시 서점이 생기면 아우. 버벌님이나 저같은 사람의 아지트가 되지 않을까요?
음..아니다. 난 밤에 자니까...손님이 되긴 힘들듯해요. 역시 주인을 해야...쿨럭.

moonnight 2014-03-20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콩나물밥이 더 좋아요. 콩나물밥에 와인으로 권해주세요. +_+;;; (죄송합니다. ;;)
콩나물이 들어간 스콘이라니 뭔가 번역상의 문제가 아닐까요. 라즈베리와 콩나물은, 왠지 슬프다는. ㅠ_ㅠ;;;
새벽에도 환하게 불을 밝힌 서점. 상상만으로도 너무 좋아요. ^^

다락방 2014-03-20 17:57   좋아요 0 | URL
비도 오고..
콩나물 밥에 양념장 넣어서 슥슥 비벼 먹고 싶네요. 김치도 같이 먹고. 히잉. ㅠㅠ 먹고싶다.

새벽에도 환하게 불을 밝힌 상점이 다른 어떤 상점이 아니라 서점이라면, 아우, 진짜 낭만적인 것 같아요, 문나잇님. 그런 서점이 생겼으면 좋겠지만....아마 가게 유지하기는 힘들겠죠? ㅠㅠ 언제나 낭만은 현실앞에 무너져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자작나무 2014-03-21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4시서점의 한켠에는 작은 계단이 있었는데 그 계단의 끝에는 다락방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가끔 서점의 여주인은 손님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갈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으레 끈적한 신음 소리가 아래 층으로 흘러나와 서점 손님들은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사실 그 서점의 단골들은 책을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여주인을 훔쳐보기 위해 서점을 찾는 편이었다. 언젠가 여주인이 자신을 다락방으로 불러주리라는 일말의 기대를 품은 채.

다락방 2014-03-21 13:45   좋아요 0 | URL
ㅎㅎ 자작나무님 소설 쓰는 분이십니까? ㅎㅎ

점심 뭐 드셨습니까. 전 뼈다귀해장국 먹고 왔더니 졸리네요..

자작나무 2014-03-22 08:41   좋아요 0 | URL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여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여주인의 독서량은 엄청났으며 책을 한권 읽을때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평을 발표하곤 했는데 그와 함께 자신의 음식과 남자 취향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첨부했다. 떠도는 한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일군의 용병들과 불같은 사랑을 나눈 적이 있다고 한다. 가끔씩 그녀는 와인을 홀짝이며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처연하게 바라보기도 했는데 그때 그녀는 자신을 스쳐지나간 용병들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실제로 어떤 남자를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려하지 않았다. 우연히 여주인과 함께 밤을 보낸적이 있는 어느 마을 남자의 회고에 따르면 여주인이 그의 몸을 쥐어뜯으며 "제이슨!"이라고 소리쳤다고 하는 걸로 봐서 용병 가운데 한 남자의 이름이 제이슨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제이슨이 실제 인물인지 여주인 마음 속의 무언가가 빚어낸 가공의 인물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저 실은 작가예요.

다락방 2014-03-24 10:03   좋아요 0 | URL
요리사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겸업하시는겁니까?

자작나무 2014-03-25 09:00   좋아요 0 | URL
저 글 쓰는 요리사 입니다. 박찬일씨 처럼요.

다락방 2014-03-25 09:10   좋아요 0 | URL
음...일단 요리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작나무님. 가끔 점심시간에 댓글 다시잖아요. 점심때 가장 바쁠텐데 어떻게 댓글을 다시겠어요? 그러니까 '요리사'는 거짓말..이죠?!

자작나무 2014-03-25 13:02   좋아요 0 | URL
가장 바쁜 점심시간에 댓글을 남길 정도로 다락방을 응원하는 요리사 랍니다.

다락방 2014-03-25 14:48   좋아요 0 | URL
구라쟁이..ㅎㅎ

sweetrain 2014-03-23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콩나물 스콘보다는 콩나물 밥이 더 나을 것 같아요. 콩나물도 좋아하고 스콘도 좋아하지만 그 둘의 조합은 상상이 가지 않는걸요.

다락방 2014-03-24 10:03   좋아요 0 | URL
저는 상상이 가긴 합니다만, 그래도 스콘인데, 아마도 다른 스콘을 선택할 것 같아요. 플레인 스콘, 치즈 스콘, 블루베리 스콘 등등이요. ㅎㅎ

네꼬 2014-03-24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다락님, 나 자꾸 웃긴 생각만 했어요. 1. 스콘을 한 입 베었는데 콩나물 줄기가 쭉 따라 나온다면 어쩐지... 어쩐지.... 지.. 지저분해! 2. 24시간 운영하는 서점 좋아요. 거기서 미녀 다락님이 밤을 지키는 여인인 것도 좋아요. 다만, 와인을 홀짝인다... 홀짝인다고요? 다락님이? 와인을? 나도 모르게 불콰한 얼굴로 손님들에게 "여기 와서 다들 한잔씩들 해요!" 하는 다락님을 떠올려 버렸어요. ㅎㅎㅎ 즐거워라!

다락방 2014-03-25 09:12   좋아요 0 | URL
ㅎㅎ 나도 콩나물 스콘이라고 하니까 스콘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콩나물 줄기 따라오는 생각만 나요. 콩나물은..그런 식으로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 같아요. 그쵸?ㅋㅋㅋㅋㅋ 24시간 서점을 제대로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제가 말이지요, 불콰한 얼굴이 되어서는 안되잖아요? 그러니 천천히 홀짝여야 되지 않겠어요? 네? 그래야 책을 팔지!! ㅎㅎ

24시 서점은 생각만으로도 정말 낭만적이에요! >.<
 
고민하고 지르기


이제 관심 신간이나 관심 구간이 생기면 <관심있어요> 폴더에 올려야지, 라고 생각하고 어제 룰루랄라~ 페이퍼를 썼다. 《불안의 책》을 살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고민에, d 님의 댓글을 읽고 '그래, 사지 말고 완역본 기다리자' 라고 결심하며 감사의 댓글을 쓰려고 했지만 어제 그 댓글을 확인했을 때는 바깥이었고 스맛트폰이라 댓댓글을 쓸 수 없는 상황. 다음날 피씨로 쓰자, 라며 집에 도착했다. 가방을 던져놓고, 지금 읽던 책을 거의 다 읽어간다는 남동생의 말에, 다음엔 무슨 책을 읽으라고 줄까 고민하며 책장 앞에 섰다. 내가 이미 읽은 책들은 남동생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책들이고, 그렇다면 아직 읽지 않은 책들중에서 남동생이 좋아할만한 추리 소설을 하나 뽑아줄까 싶어 두 권을 빼어들고 남동생 방으로 가려는 찰나, 어어, 저 오른쪽 저거, 뭐..뭐...뭐지? 설마...그 불안의 책..인거야?





그..그...그럴 리가 없단 생각에 나는 얼른 저 책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헐. 그 책이 정말 불안의 책임을 확인했다.




헐..이게 뭐야...반값이라고 살까말까 고민했는데, 완역본 나오기를 기다릴까말까 고민했는데, 발췌본을 읽을까말까 고민했는데, 그러다 결국 그래 완역본 나오기를 기다리자 결심했는데, 그랬는데, 이미



가.지.고.있.었.다.




언제샀지? 이게 저기에 왜있지? 하아- 팔아버릴까..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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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4-03-18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경험을 부지기수로 한 일인입니다.
그나저나...손톱이 섹시한데요?

다락방 2014-03-18 08:50   좋아요 0 | URL
저 책은 팔아버려야겠어요. 안읽을 것 같아.. -_-
매니큐어 칠한 보람이 있었네요. 하핫. 벗겨지고 있지만 ㅠㅠ

건조기후 2014-03-1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아 웃기다
분명 내 손으로 내 돈 주고 내가 산 책인데도 이런 식으로 갑툭튀하는 책들 진짜 꼴보기 싫어요 ㅜㅜ

다락방 2014-03-18 12:19   좋아요 0 | URL
정신 똒바로 차리고 살아야 겠어요. 책장에 저 책이 꽂혀있는 놀라움이라니. ㅠㅠ 팔아버릴거에요 엉엉 ㅠㅠ

무스탕 2014-03-18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 뭘 그정도 가지고 그러세요.
전 산 책 또 산게 몇 권인데... (" )( ")
점심 맛있게 드셨구요? ^^

다락방 2014-03-18 13:47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순대국 배부르게 먹고 왔어요. 어휴 배가 터져버릴 것 같네요. 이제 실실 졸음이 찾아오네요. 하하하하하

버벌 2014-03-1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알라딘 장바구니에 책을 담고 결제하려는데 예전에 구입한 책이라며 알람이 뜰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ㅡㅡ
그럼에도 그책은 아직도 안 읽..... ㅠㅠ

다락방 2014-03-18 17:26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그런 알람 떠서 안 산적 많아요. 만약 저 <불안의 책>도 사려고 장바구니에 넣었다면 그렇게 알람이 떴겠죠. 그렇지만 저는 안사기로 결정했다는 거. 그런데 이미 집에 있었다는 거. ㅋㅋㅋㅋㅋㅋㅋㅋ

moonnight 2014-03-18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웃으면서 불안의 책을 보관함으로. ^^
저도 책장 살펴보다가 이 책을 내가 언제 샀단 말인가 하면서 깜놀할 때가 많아요. 놀라기만 하고 여전히 읽지는 않는다는 -_-;;

moonnight 2014-03-18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완역본이 나오길 기다려야하는 건가요? +_+;;;;;

다락방 2014-03-19 08:38   좋아요 0 | URL
ㅎㅎ 네, 문나잇님. 완역본이 나오길 기다리시는 편이 더 나을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가진 책은 .. 어째야할지 원.
저도 책장 살펴보다가 어엇, 이런 책이 내게 있었어? 하고 깜짝 놀랄 때가 있긴해요. ㅋㅋㅋㅋㅋ 그러면서 으음, 내가 살 만했구나 하기도 하고. ㅋㅋ 그러면서 읽지는 않고 또 새로 사고.. ( ")

dreamout 2014-03-18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아주 깨끗하네요. 책이. ^^;

다락방 2014-03-19 08:3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정말 깨끗하네요. 하하하하핫;;
 















이 책을 읽고 이별후에 위로를 받았다는, 이 책의 표현을 빌자면 '애도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 들었는데, 나로 말하자면 내게 이 책은 딱히 '필요'하진 않았다. 내 경우엔 대체적으로 심리 치료 혹은 치유의 타이틀을 단 책들이 크게 와닿지 않곤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대체 왜그럴까를 곰곰 생각해보다가, 그건 내가 아마도 자존감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인가보다, 하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해야만 한다는 방법,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라는 것들을 나는 이미 너무나 잘해오고 있는게 아닌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게는 이 책이 내 이별로 인한 슬픔에 도움이 되었다기 보다는, 누군가가 나에게 내 슬픔을 달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 책을 선물로 주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와닿았다. 그게 더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읽기도 전에 마음이 따뜻해져버렸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쓸모없다던가 한 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으니까. 나보다는 그들에게 더 도움이 되겠다, 싶은 마음이랄까. 이별후에 자신을 다독이고 있는 친구 생각이 나, 그 친구에게 이 책을 보내줄까, 읽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몇몇 부분들에서는 내 지난 이별들의 경험, 이별후의 고통과 극복에 대한 경험들과 맞닿는 부분들이 있어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전에,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쉽게 말해 좀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겠다. 이건 아마도 내가 심리 치료라든가 정신 분석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불신인 것 같은데, 흐음,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에 관한 부분이었다.



미국 정신분석가 호르게 드 그레고리오는 《나의 이성, 나의 감성》이라는 책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관계를 애도 관점에서 분석하다.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간 다음 해인 1994년 1월 6일 그의 사랑과 열정의 원천이었던 어머니 버지니아 캐시디 클린턴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예전에 간호사였고 빌이 네 살 때까지 함께 산 할머니 역시 간호사였다. 어머니 사망 후 애도 과정을 거치면서 클린턴 대통령의 감성 안에 상당한 변화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니카 르윈스키의 아버지는 항암 치료사였다. 그는 젊은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딸을 떠났다. 아버지가 가정을 떠날 즈음 르윈스키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당시 학교 연극 무대 설치 기술자였던 앤디 블레일러와 첫사랑에 빠졌다. 앤디는 결혼 2년차 유부남이었지만 르윈스키는 앤디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아내의 친구가 되었고, 때로 그들의 아이를 돌봐 주기도 했다. 그 이상한 관계에서 르윈스키는 아버지의 욕망 대상인 간호사 역할을 맡으며 다시 아버지와 연결되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를 "첫눈에 알아보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본 배경에는 '간호사'가 있었다. 빌 클린턴은 자신의 상실감을 돌봐 줄 간호사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았고, 르윈스키는 아버지의 내연녀인 간호사가 되어 돌봐 줄 만한 아버지 대체물을 찾아냈다. 저자는 그 만남이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만남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그녀의 아버지의 만남이라고 분석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무의식 속에서 추구하고 있던 원초적 사랑의 대상을 만난 것이다. 잃은 대상을 추구하는 행위가 무의식 차원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pp.104-105)



내겐 이 부분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클린턴과 르윈스키가 만나 입과 성기로 쾌락을 주고 받았던 그 순간이 그들 본연의 의지나 욕망이 아니라 무의식에 있던 그들 부모의 만남이다..라니. 이건 '간호사'라는 교집합을 찾아내어 너무 억지스럽게 그들의 심리나 무의식을 분석한 건 아닐까? 그들도 모른채 서로에게 내재되어 있던 상처나 분노 욕망을 첫눈에 알아봤다니, 이게 말이 되나? 어? 네 눈엔 슬픔이 있고 그걸 거슬러 올라가면 '간호사'가 있네? 어? 너 역시 분노가 있는데 그걸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끝에 '간호사'가 있네? 우리 '간호사'로 만나네? 이게 말없이 알아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정신 분석을 하다보면 정말 그런가? 나와 비슷한 사람, 나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그것이 르윈스키와 클린턴의 교집합, 간호사에게까지 통하는건가? 정말 그런가? 어릴적의 상처가 꼭꼭 숨겨져 있다가 어른이 되어 폭발할 수 있다는 것에는 물론 동의한다. 그렇지만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만남이 그런것들의 발현이라는건...어쩐지 수긍이 잘 되질 않는다. 그래서 다음의 부분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중년기에 부적절한 삼각관계에 빠지는 것 역시 애도 작업의 일환이다. 생애 초기의 삼각관계를 현재에 구현하여 그때 잃어버린 대상을 되찾고자 한다. 클린턴과 르윈스키처럼, 그 관계의 무의식적 진짜 목적은 잃은 대상을 되찾은 다음 다시 한번 잘 떠나보내고자 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적인 내적 대상을 떠나보내는 일은 우리가 상징계로 들어서며 진정한 성인이 되는 지표이기도 하다. (p.106)



애인이나 아내(혹은 남편)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욕망하고 사랑하게 되는건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고, 그 상대가 지금의 애인(혹은 배우자)과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진짜 목적'이 있다는 건가? 지금은 내 옆의 이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한테 욕망을 느껴, 저 사람을 갖고 싶어, 하는 단순한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숨은 다른 '진짜 목적' 이 있다는 건가? 정말 그런가? 이 사람이 있으면서도 저 사람에 대해 욕망을 갖고 관계를 형성하는 게, 정신 분석을 통해, 분석에 분석을 거듭하다보면, 결국은 저런 '진짜 목적'을 숨기고 있다는건가? 이 세상의 모든 숨쉬는 종들은 하나의 대상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그로 인한 것이든 혹은 그것과는 별개이든 성적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늘 다른 상대를 꿈꾸게 하지 않나? 그게 나의 무의식에서 나온건가? 어떠한 진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도 깊고깊고깊고깊고깊은것인가??

 



첫 연애가 끝났을 때, 이별한 바로 그 날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생각보다 안슬픈데? 라고 이별이란 걸 비웃기도 했던것 같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날, 나는 직장을 관두고 집에서 놀고 있었고, 그래서 걸레를 들고 방바닥을 닦고 청소를 하고 있었고, 그럴거면 라디오를 들으며 청소를 하자 싶어 라디오를 틀어두고 있었고, 하필 그때, 라디오에서는 '차은주'의 <알수없어요>란 노래가 나왔고, 이미 알고있던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그 노래의 가사들이 귓구멍으로 들어와 가슴을 후려갈기기 시작했고, 걸레질을 하던 나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그자리에 주저앉아 소리내어 통곡을 했다. 내 이별은 사흘째 되던날 비로소, 이별로 다가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때 그 노래는 내 이별을 대신 소리내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거기에 내 감정을 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떠난 사람이 즐겨 부르던 노래, 떠난 사람과 함께 듣던 노래를 듣는다. 음악을 들으면서 슬프다고 느끼거나 눈물이 흐른다면 치유되는 중임을 알아차리고 한동안 슬픔 속에 머문다. 노래하기는 음악 듣기보다 한 단계 진전된 표현 방식이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다만 무슨 소리든 바깥으로 내뱉는다는 사실, 소리와 함께 내면의 감정을 발산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p.247)




연애를 하면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상대가 나에게 너무 깊은 사랑 혹은 너무 깊은 애착을 갖게 되는것이다. 연애를 시작할때부터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혹여라도 내게 깊은 애착을 보일경우 가차없이 내칠 준비를 한다. 깊은 애착은 처음엔 저 혼자만의 것으로 시작할지언정, 상대로부터 같은 깊이의 애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건 이내 서운함이 되어 쌓이고 쌓일것이다. 내가 상대의 삶의 이유가 되는 것은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고, 나는 상대의 '삶이 행복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는게 딱 좋다. 나를 가장 좋아하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나만' 좋아하는 건 무서운 일이다. 내가 아니어도 상대에겐 만날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하고,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하고, 즐길 수 있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이별을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이별후에 상대를 괴롭히며 집착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하나의 대상에만 매달리는 일은, 그 끈이 끊어졌을 때 자신을 무너뜨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일인 것이다.



이별이든 사별이든 한 사람을 잃는 일이 자신의 존재 전체를 잃는 일은 아니다. 특정 대상과 맺고 있던 관계를 잃는 일이며, 그 관계에 투자하던 내면의 일부분을 잃는 일이다. 상실감 이외에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자신의 존엄성, 용기, 지혜, 공감 능력 등은 여전히 그곳에 있으며, 그것이 우리를 건강하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 갈 것임을 믿는다. (p.96)




그렇게 생각하는 나역시 후회되는 연애가 있다. 물론 어떤 연애에도 후회되는 해프닝 쯤은 섞일 수 있지만, 유독 후회만 남는 연애. 당시 좋아하던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허우적대다 거기로부터 빠져나오고자 아무나하고 사귀어버린 일이 그렇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사랑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관계는 내게 의무감만 지웠고, 헤어진후에는 죄책감만 남겼다. 그때의 나는 쓰레기 같았다.



사물이 아니라 사람도 일시적인 대체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우리는 간혹 주변에 있는 사람 아무하고나 관계를 맺게 되기 쉽다. '랜덤 하트'를 추구하는 까닭은 허전함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이 여전히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p.147)



그깟 연애, 그게 뭐라고. '연애를 위해' 사귀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딱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그러면 마음을 정리하기 쉬울 텐데.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애도의 모든 과정을 끝낼 때까지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는 일은 피한다. 그것은 애도 작업을 원점으로 돌리는 일과 같다. 만나서 섹스만 하고 다시 헤어지는 일은 최악의 선택이다. (p.108)



후아- 이 부분을 읽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도 사는게 다 비슷비슷하구나..다 그렇게 가끔 지저분하게 질퍽거리면서 살아...감정이란 게 쉽게 정리되지 않기 때문에 우린 몇 번이나 진흙에 빠졌다가 더러워진 신발이며 옷을 빨고 또 후회를 하고, 그렇게 사는거구나.. 그래도 막상 진흙을 또 만나면 '씨양, 집에가서 또 빨면 되지' 하고 또 빠지고 또 빠지고...

어쩐지 모든 인간들이 다 불쌍한 것 같아, 내 넓은 품으로 세상 사람 모두를 안아주고 싶다. 안아서 다독다독해주고 싶어.. 그래, 진창에 빠지기도 하지, 그렇지만 우리 건강하게 이겨내자, 하면서 안아주고 싶다. 




사실 이 책, 『좋은 이별』은 나보다는 '야마모토 후미오'의 『연애 중독』에 나오는 주인공 '미나즈키'에게 더 필요해 보인다.












(왼쪽이 구판 오른쪽은 개정판)






내가 읽은 건 왼쪽의 구판인데, 처음엔 정말 재미있고 유쾌하게 읽기 시작했다. 서른두살의 이혼녀 '미나즈키'는 도시락집에서 알바를 하고 간간이 번역일을 하며 혼자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도시락을 사기 위헤 유명한 연예인인 오십대의 '이츠지 고시로'가 도시락집에 방문하고, 어릴때부터 그의 팬이었던 그녀는 그와 자연스레 연인관계가 된다. 그럴거라고 생각하지 못한채로 호텔에 가고 밤을 보내고, 그렇게 뜻밖의 사건이라 정신이 멍해진 상태의 그녀까지를 보는건 꽤 즐거웠는데, 그에게는 그녀가 아닌 애인이 셋이나 더 있고, 그들 모두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며 지내고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뭔가 병맛 캐릭터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들은 이츠지 고시로의 연애 스타일을 아는바, 자신들도 다른 애인을 하나씩 더 두고 그 관계를 유지하지만, '미나즈키'에게는 이츠지 고시로가 전부이다. 그래서 다른 여자들을 밀어내고 싶고, 그가 도무지 성숙하지 못한 자기멋대로의 남자인걸 알면서도 그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어쩔줄을 모른다. 결국 그녀는 파괴적인 성향을 보이게 되는데, 한 대상에 대한 집착,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이 어떤 파멸을 불러오는 지 모르는 바가 아니니 그 여자의 심정이야 이해가 되면서도, 그러면서 자꾸 세뇌시키고 싶어지는거다. 이여자야, 그 남자만 보면 어떡해, 하고. 그녀는 이혼한 전남편으로부터 '나 좀 보지마' 라는 말을 들었던 터다. 그러나 그녀는 전 사랑의 실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아픔을 겪으면서 나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무언가 거기서부터 배우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 과정을 겪으면서 도무지 배우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잘못된 걸 모르는채로, 혹은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채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들. 그래서 또 같은 처벌을 받게 되는 사람들. 인간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건 당연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큰 아픔을 가져다줬다면 그 경험으로부터 배워야한다. 그 경험이 나를 한 번 파괴했다면, 다시는 나를 파괴할 수 없도록 해야한다. 지난 연애를 거쳐 그 다음 연애까지, 그리고 또 그 연애를 거쳐 그 다음 연애에 이르기까지, 나라는 인간 자체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면, 한 걸음도 앞으로 가지 못했다면, 나는 계속 나 자신을 파괴하는 수밖에 없다. 같은 실수는 더 큰 고통을 준다. 내가 나아가야 상대도 함께 나아간다. 연애를 거치면서 더 좋은 상대를 만날 수 있는건, 내가 그만큼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상대를 만나고 싶다면, 아픔을 주는 상대가 아니라 사랑과 행복과 기쁨을 주는 상대를 만나고 싶다면, 나라는 인간 자체가 이미 혼자서도 당당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일상의 작은 기쁨을 스스로 캐치할 수 있고, 내가 행복한 이유쯤은 아무때고 수시로 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있어서 너무 좋아, 는 괜찮지만 '너가 없으면 난 죽어'는 자신과 상대 모두에게 치명적인 것이다. 



이츠지 고시로는 과거에 '만약' 이라는 말을 끼워 넣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식으로 사람을 사랑해야 제대로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항상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이런 너저분한 술집에서 혼자 싸구려 위스키나 마시고 있어야 하는 걸까.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쳐다보며. 들어올 리 없는 사람을 기다리며. (p.321)



그녀는 번번이 자신의 실패한 사랑을 곱씹는다. 그 과거에 허구헌날 '만약'을 넣는다. 그러나 그녀는 곱씹기만을 반복할 뿐, 그로부터 '그러니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과거를 곱씹는건 그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곱씹기만 할 뿐이라면, 거기엔 대체 자책과 후회말고 무엇이 남을까. '다른 결론'을 '다른 방식'을 뽑아내야 하는게 아닌가.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일테다. '알 수가 없다'고 하니까. '나 좀 보지마' 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게 대체 왜그런건지 알지 못하니까. 그녀야말로 김형경의 『좋은 이별』을 읽어야 할텐데. 암튼 내 연애의 상대로는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류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상대에 대한 집착', '상대에 대한 사랑'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심해 자기 파괴의 결과를 불러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걸 상대에게 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쳤기 때문에 어쩌면 그 사랑을 자꾸만 곱씹는지도 모른다. 어쩌면..그게 더 나을 수도 있는걸까? 한 사람을 사랑하고 연애하는 과정에서 나를 모조리, 깡그리 다 바쳐서 망가져보는 게 나았을까? 



오늘 아침엔 문득, 할 수 있는 걸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리운 사람 생각이 났다. 그때, 그 여름에, 손을 씻고 나와 핸드크림을 발라달라고 강아지처럼 두 손을 내밀었을 때, 그때 왜 나는 거절했을까. 피식 웃으며 너 혼자 바르라고, 그때 왜그랬을까. 내 두손으로 그의 손에 골고루 핸드크림을 발라주면 퍼지게 될 그 분위기를, 나는 왜 그토록 겁냈을까. 수십가지의 이유와 변명을 댈 수있지만, 결국 정확한 이유는 하나다. 나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던 것. 곧 떠날 사람이니 그만 내어주자, 했던 것. 씨발. 상처 좀 받으면 어떻다고. 그냥 발라줄 걸. 바르다가 불이라도 붙으면 그냥 화상을 입을 걸. 언제 다시 또 그런 일이 있다고...후........


















토요일, 부산의 숙소에서 친구와 침대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tv를 틀어 이 영화를 보았다. 고등학생 시절, 브래드 피트가 너무 좋아 이 영화를 비디오로 빌려봤다가 지루해서 졸았던 기억이 있는데 ,오만년만에 다시 본 이 영화는 와- 정말 좋았다. 물론 절반도 못보고 다시 잠들긴 했지만, 까페에서 아직 저승사자가 되기 전인 브래드 피트가 클레어 포라니를 만나 대화를 하는 장면, 그녀에게 커피를 사주고 대화를 하고, 그렇게 까페앞에서 헤어지는 그 장면이 와- 얼마나 좋은지. 웃으며 상대에 대해 호감이 생기고, 헤어지기 싫어 몇 번이나 자꾸 상대가 가는 모습을 뒤돌아 보게 되는 그 장면 때문에, 와, 연애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하고 싶어지는 건, 대체로 저런 감정들 때문이다. 처음의 저 풋풋함과 긴장과 설레임 때문에. 와- 이 영화 언제 한 번 다시 봐야겠네,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잠들었다.




바다에 그렇게도 가고 싶었기 때문일까. 바다를 보자마자 너무 좋아서 폴짝폴짝 뛰어댕겼다. 친구를 한 대 툭 치고 돌아서며 '나 잡아봐라~' 했지만 친구는 '뭐야' 라며 응해주지 않았다. 나 혼자 뛰어댕겼...맨발을 물에 담그고선 으악 발시려, 소리도 질렀고 수없이 꺅꺅댔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의 바다가 무척 좋아서 조만간 혼자 다시 와보리라 생각했다. 5월 초에 연휴가 있으니, 그때 와서 며칠 묵어야지, 하면서. 아침마다 이 바다를 보러 나올거야. 그렇지만..밤엔 어쩌지. 도무지 혼자 잘 자신이 없는데..아직 호텔에서 밤에 혼자 자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좀 두려워서, 그렇다고 밤마다 친구를 부를 수도 없고, 역시 혼자 부산여행은 포기해야하나...조금 더 생각해보자, 하다가. 이런 부산은 이미 모든게 예약 완료가 아닐까, 생각했다.




부산 바다에 가면 여름이든 봄이든 팬티 한장 달랑입고 비치발리볼 하는 해변의 멋진 남자들을 볼 수 있어서 무척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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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3-17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심리학책 읽을때마다 드는 생각은 저도 좀 비슷해요.
이거 너무 끼워 맞추기가 심하다~ 이렇게요. 저도 뭐 잘 몰라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우야둥 심리학책 한창 읽었었는데 이젠 끊었어요 ^^::

날씬하기까지 했으면 큰일날뻔한,
자존감 차고 넘치는
다락방님께 이런 심리학서는 별루 어울리지 않는것 같긴 하네요 ㅎㅎ

그나저나
세상에
저를 버리고 바다 혼자 다녀오신겁니까?
킁!!!!!!!!!!!!!!!!!

다락방 2014-03-17 14:41   좋아요 0 | URL
저 클린턴과 르윈스키 얘기는 지나치게 억지스럽단 생각이 들어요. 너무 정신분석학 적으로 보기 위한 접근 아닌가 싶고 말이지요. 선물 받지 않았다면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책인데, 역시나 제게는 필요치 않은 책이었어요. ㅎㅎ 그렇지만 이 책이 누군가에겐 위로를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에겐 반드시 필요한 책이 될 수도 있을것 같고요.

아무개님은 말만 바다 가자 하시지 통 여유를 주지 않으시잖습니까. 전 '진짜' 바다를 가고 싶었다고요!!

2014-03-1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7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風流男兒 2014-03-20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블랙의 사랑을 우연찮게 여러번 보게되었어요. 근데 저도 말씀하신 저 대목이 항상 인상깊어요. 둘다 번갈아 뒤돌아보지만 보게 되는 건 서로의 뒷모습인 장면. 그 장면이 항상 짠했어요.

다락방 2014-03-20 17:52   좋아요 0 | URL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저는 이 영화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기억나지가 않아요. 그래서 조만간 다시 보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보았을 때처럼 졸거나 하진 않을 것 같아요. 아마 새로운 다른 걸 느끼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연애고 뭐고 이제 다 필요없어 안해안해, 라고 했었는데,
저 둘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그 장면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지 뭡니까. 하하하하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가끔 소식 들려주세요!
:)
 

그 남학생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시험지를 걷으면서 이름을 보게 된 루시아가 혹시 성당에 다니냐고 물었을 때 그애는 루시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니, 라고 짧게 대꾸했다.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그때부터 요한은 매너도 재치도 없으면서 잘난 체만 한다는 이유로 루시아가 특히 싫어하는 남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안나는 아니었다. 아니, 라고 말하는 다음 순간 요한의 눈길이 자신을 향했고 그리고 분명 웃음을 지어 보였다고 생각했다. 짧긴 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안나의 얼굴은 그래서 빨개진 것이었다. 과외공부를 끝내고 돌아갈 때처럼 또 한번 안나와 루시아는 갈림길에서 갈라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안나에게로 오는 편지가 분명했다. (p.20)

















오래전에 '츠지 히토나리'와 '공지영'이 함께 쓴 <사랑 후에 오는것들>을 읽었을 때, 공지영 편을 읽으며 아 역시 이맛이야, 했던 기억이 났다. 여자가 연두빛의 트레이닝 복을 입고 조깅하는 장면에서였는데, '연두'란 단어가 그렇게나 좋아서였다. 연두색의 트레이닝 복이라니, 이건 한글로 쓰여졌으니 가능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츠지 히토나리라면 결코 자신의 등장인물에게 연두색 트레이닝 복을 입힐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 소설이 좋았는가 아닌가 하는것과는 별개로(기억나지 않는다) 그 연두색 트레이닝 복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국내 소설을 읽으면서 '이맛이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특히나 칙릿을 읽을 때는 그 글이 한글로 쓰여져서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오랜만에 은희경의 책을 읽으면서 또 이 맛이야, 했다. 이 맛 때문에 결국은 국내 문학을 읽을 수밖에 없다고.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맛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소설이었다. 특히나 위 인용문장 다음다음페이지에 나올 이 문장을 읽을 때는 그 맛이 더했다.



안나가 요한에 대해 알고 싶은 건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중략)키가 작고 마른 여자애를 좋아한 적이 있는지 어제 입었던 블라우스와 오늘 입은 조끼 중 어떤 게 더 어울리는지 말해줄 수 있는지 루시아의 말대로 커트머리에 핀을 꽂으면 촌스러운지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갑과 하모키나 중에 무엇을 받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크리스마스에는 뭘 할 건지.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였다. 하느님이 잘못 포장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pp.23-24)



분명히 요한의 시선이 안나를 향했다고, 안나는 이번만큼은 그 시선이 자신의 것이었다고 확신했는데, 아 이런,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였다


라니. 이 문장을 읽는데 덜컥, 철렁, 하는거다. 사실 나는 평소에 은희경을 좋아한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그의 소설중 몇 개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였다, 라는 간단하고 짧은 한 문장이 전해주는 충격이 너무나 커서, 아 이런것이 내공이구나, 했던거다. 은희경이 이걸 하고 있구나, 하고. 그리고 뒷장을 넘기고 또 넘기며 계속 읽는데도 자꾸만 저 문장이 생각나는거다.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였다.



아....싫어......



그때부터였다. 요한은 루시아의 남자친구였다, 를 읽을 때부터 나는 내가 이 단편을 어딘가에서 읽었음을 알게됐다. 나 이거 읽었는데, 대체 어디에서 읽었을까, 뭘까, 하고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검색해봤는데 나오질 않았다. 아 정말 읽었단 말이다, 싶어 은희경의 이름을 넣고 그의 작품이 실린 책들을 훑어보다 발견했다. 바로 이거다! <2009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오, 이거였구나. 아..찾아냈더니 속이 다 시원해. 어쨌든 계속.



이 책은 은희경의 단편집인데, 실린 단편들중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를 읽을 때는 주인공인 '이원'에게 너무 짜증이나고 답답해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원은 태현이 말한대로 '이상한 게 아니라 그냥 뭔가 남들 하는 방식하고는 핀트가 안 맞는'(p.161) 캐릭터이고, 물론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그런데도 그 민폐를 끼치는 성격이 너무 짜증이 나는거다. 




이원은 실을 빨간색으로 골랐던 것과 같은 이유로 무늬가 안 들어간 목도리를 원했다. 원장이 지시했다. 그럼 한 줄은 겉뜨기로 뜨고 다음 줄은 안뜨기로 뜨세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이원은 그다음부터는 듣지 않았다. 원장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설명을 마친 원장이 아시겠죠? 라고 물었을 때 이원은 엉뚱하게 대답했다. 원장님, 저는 무늬를 안 넣으려고요. 그냥 겉뜨기로만 할게요. 원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설명을 잘 들으셔야지 혼자 멋대로 생각하면 어떡해요. 겉뜨기로 뜬 걸 뒤집으면 안뜨기가 되잖아요. 뜨개질은 뒤집어가면서 왕복하는 거예요. 뒤집었을 때는 반대로 떠야죠. 네. 이원이 곧바로 대답하자 원장이 조금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성격이 급하세요. 급하신 분들이 설명은 잘 안 듣고 나중에 딴소리를 하시더라구요. 하지만 이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뒤집어 뜬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을 뿐이지 급했던 건 아니었다. 또 첫 단계에서 납득을 못했는데 다음 단계의 설명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들으나 마나 모를 것이라서 안 들은 거였다. 이원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은 대개 그런 경우였다. (pp.168-169)



아...진짜 빡친다. 어차피 모를거라 안듣고 나중에 딴소리 하는 캐릭터라니. 이원의 이런 성격은 수시로 묘사되는데, 정말 싫다. 물론 어떤 면은 나와 같기도 해서 더 싫은건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해된다고 해서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해는 이해고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다. 아, 작가가 너무 잔인해. 이런 캐릭터를 이토록 잘 그려놓다니. 아, 이 단편을 읽는게 이 책을 읽는 시간을 통틀어 가장 괴로운 시간이었다. ㅠㅠ



마지막 단편 <금성녀>에 이르러서는 마치 요리의 하이라이트 라고 할 수도 있을만큼 그 맛이 극에 달했다. 처음 단편과 그 다음 단편, 그 다음 단편을 읽으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연관성이 맨 마지막 단편에 이르러서야 어렴풋이 보였으니까. 그 어렴풋이 보이던 것이 책장을 넘길수록, 끝에 다가갈수록 점점 더 선명해진다. 아, 이 맛이야.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게다가 금성녀의 주인공 '마리'와, 그녀를 장지까지 모시고가는 '완규'와 '현' 모두가 마음에 든다. 둘 다 모두, 어른들께 잘하는 청년들인 것 같아 괜히 좋았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고 싶어졌다. 간절히.



비는 그쳤지만 숲과 땅은 완전히 젖어 있었다. 나무 사이를 뚫고 질척질척한 흙길을 올라가 장례를 치러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담배를 사겠다며 가게에 들어간 현이 묵직해 보이는 검은 비닐봉지와 접이식 의자 한 개를 들고 나왔다. 완규가 뒤따라 들어가서 간이탁자를 날라왔다. 마리 할머니는 의자에 앉고 현과 완규는 뒤에 선 채로, 세 사람은 비닐봉지 속의 캔맥주를 한 개씩 꺼내들었다. 갈증이 났었는지 미지근한 맥주가 제법 시원하게 넘어갔다. (p.222)



화장실을 자주 가는게 너무 불편해서 맥주를 잘 안마시게 되는데, 어휴, 저 장면 읽는데 어찌나 갑자기 맥주가 땡기던지. 나도 그 자리에 앉아 맥주를 한캔 마시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차 타고 가다가 나 때문에 자꾸 휴게소 들르면..난 민망하고 무안할거야. ㅠㅠ그렇지만 자꾸 쉬마려울 텐데.. ㅠㅠㅠㅠㅠ




새벽에 깨서 잠이 오질 않았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새로 읽기 시작한 책이 너무 휙휙 넘어가서 기분이 좀 좋아졌다. 결정적으로 책 속의 여자가 평소에 흠모하던 연예인과 초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호텔을 가서 잠을 자게되는..........하하하하하. 이런 일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 얘기는 다음 페이퍼로 패쓰.



게다가 커피가 가득 든 머그잔을 양 손에 잡으려니 따뜻한 게 아닌가. 이게 좋았고, 다른 부서 남자직원들이 아침부터 올라와서는 화이트데이라고 초콜렛을 주고 갔다. 풍성해진 나의 간식. 게다가 사탕이 아니라서 더 좋아. 난 사탕 안먹으니까. 초콜렛 완전 사랑♡ 초콜렛 하트뿅뿅이다. 알러뷰뿅 ♡








그나저나 생일 선물로 스탠드를 받고 싶은데 생일이 5개월이나 남았다...우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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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4-03-1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 지금 위시리스트에 몇번까지 있어요?!

다락방 2014-03-14 14:33   좋아요 0 | URL
6번까지 있다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벌 2014-03-15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스탠드가 필요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누군가 사주기를.. 그런데 제가 못참고 사버릴것 같아요. 워크램프요 ㅠㅠ

다락방 2014-03-17 13:20   좋아요 0 | URL
좋은 스탠드 검색했으면 추천 좀 해줘요. 전 도무지 고르지를 못하겠단 말입니다! ㅎㅎ

그렇게혜윰 2014-03-15 0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개월 남은 저를 보고 위안을 삼으셔요ㅋ 전 9개월동안 목록을 꾸준히 채워 남편에게 청구하려구요. 작년에 무방비로 맞았다가 빈손으로 지나갔어요ㅠㅠ

다락방 2014-03-17 13:21   좋아요 0 | URL
흐음. 9개월이라니..아이코야. 그렇게헤윰님, 너무나 까마득합니다. 5개월 남은 저는 그나마 행복해해야 하는겁니까!! 아무래도 못기다리고 제가 제 돈 주고 사지 싶어요. ㅎㅎ

건조기후 2014-03-17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가 요한에 대해 알고 싶은 건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중략)
저는 저 중략에 있는 말들이 참 좋더라고요. 진짜 궁금한 건지 그냥 뭐든 물어보고 싶어서 막 내지르는 건지 모를 말들. 결국엔 크리스마스에 뭘 할 건지로 끝맺기 위한 길고 긴 과정이요.. ㅎ
결국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으니까, 요한이 루시아 남자친구라도 좋아요.

다락방 2014-03-18 08:52   좋아요 0 | URL
저도 중략에 있는 말들이 좋았거든요. 그래서 다 옮길까 생각했었는데, 키보드 열나 두들겨야 되겠더라고요. 힘들어 힘들어 포기 ㅎㅎㅎㅎㅎ

저는 요한과 루시아가 혹은 요한과 안나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가 아니라서 좋아요. ㅎㅎ 그런거 딱 싫거든요. 어릴때 남자 한 명 만나서 결혼해서 그 남자랑 오래오래 사는거. ㅎㅎ
 



영화속의 룸메이트 관계인 두 여자 '리아'와 '한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매춘을 한다. 매춘을 하기 위해 테스트를 받으면서 그들은 기대로 부풀었다.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훨씬 더 짧은 시간에 벌 수 있다며. 누군가의 집으로, 모텔로, 엘리베이터로, 차로 불려가면서 그들은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신나게 먹고 마신다. 식당에서 쫓겨날 지경으로 신나게 깔깔대고 웃었던 그녀들이, 그러다가 돌연 울음을 터뜨린다. 돌연 울음을 터뜨리고, 이걸 관두자, 고 말한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할 수도 없는 이 일을, 관두자고.


성(sex)을 판다는 것은 내게 언제나 풀지 못할 숙제로 여겨졌다. 그것이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를 생각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그걸 내가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는 답이 돌아왔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과 아이디어를 팔고, 가진게 몸뿐인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적 노동을 판다. 가진게 자신의 성 뿐이라 그걸 판다, 라고 했을 때, 그걸 과연 '그건 안돼!' 라고 말할 수 있는걸까? 여기서 나는 늘 대답을 못하겠는거다. 그건 좀 다르지, 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대체 뭐가 다른건데, 라고 다시 되물으면 대답할 수가 없는거다. 아이디어를 파는 건 되고 성을 파는건 왜 안돼? 막연하게 '안되는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데,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댈 수가 없는거다. 



그러나 영화속에서 여자들이 웃다가 울어버리는 그때부터 성을 파는 일이 다른 일과 같지 않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밝힐 수 없는 일. 사회적 인식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이 당당하지 못해지는 그런 일. 그렇다면 그 일을 왜 하게 되는가. 돈 때문이었다. 돈이 필요해서 한 일이었다. 먹고 마시기 위한, 살아가기 위한 돈. 그 돈을 위해 그녀들은 깔깔대고 웃었지만 종국엔 울게되고, 남자친구에게 정체가 탄로났을 때 절망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는데, 그 돈이 수중에 들어와도 기쁘지가 않다. 게다가 다른 일보다 더, 모멸감을 견뎌야 한다. 발가벗겨진채로 남자들 앞에 서야하고, 그들이 시키는대로 옷을 입고, 만져달라는 대로 만져주고. 그 돈이 기쁠 수 없는 이유였다. 그 돈은 성을 팔아 얻은 대가가 아니라, 모멸감을 견딘 대가였다. 모멸감과 수치심을 견딘 대가. 돈이 아니었다면 이 일을 했을 것인가? 라고 물었을 때 '아니'라는 대답이 가장 먼저 나올 직업이라면, 그것은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직업이 아닌가.  다 돈 때문이었다. 돈이 가진 힘이 너무 세서, 우리는 그 돈에 휘둘려서 이랬다가 저랬다가 웃다가 울다가 한다. 돈 따위, 무시하고 싶지만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고, 돈이 가진 힘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 힘을 갖고 싶은거였다. 돈 때문에 일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돈의 노예가 된다. 노예 따위,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서 삶이, 



어렵다. 늘 당당하고 싶지만, 늘 당당하게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끔 그렇게 의도치않게 노예가 되어버려서. 노예가 되어 굴복할 수밖에 없어서. 무릎 꿇을 수밖에 없어서.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우리는 노예가 되곤 한다. 결국 성을 팔도록 하는 사회, 그런 환경이라면, 더이상 도망갈 데가 없었다는 건 아닐까. 저 모멸감과 수치심을 선택했다는 건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게 아닌가. 우리는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아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 막다른 골목에서도 도망칠 수 있도록, 벽에 최소한 구멍을 뚫어줘야 되는건 아닐까. 막다른 골목에서, 더이상 갈 데가 없어서 선택한 거라면, 그건 선택하지 않는 쪽이 더 좋은게 아닌가.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저 포스터의 '오늘밤은 누구랑 할까?' 라니...안습이다. 쩝.












(왼쪽은 양장, 오른쪽은 반양장)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상을 버텨나간다. 그리고 저마다의 기준으로 책을, 음식을, 영화를, 음악을, 사랑을 선택한다. 사랑을 선택함에 있어서 누군가는 예쁘고 잘생기면 용서가 되기 때문에 상대의 단점을 눈감아주려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예쁘고 잘생긴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그의 성정을 봐야한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뜨겁고 열정적인 상대를 만났을 때 그 상대와 불같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몸소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 훗날에 다가올 고통이 두려워 이를 악물고 그 열정을 피해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나이 들면서 내 성향 자체가 변하기도 한다.


지금의 나는 오래전의 나와 또 달라서, 사랑을 선택할 때 많은 걸 고려하지도 않고 재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좋으면 사귀는거지, 라고 사귀다가 뭔가 불편한 게 생기면 헤어지는거지, 하고 헤어진다. 어차피 사랑이란 감정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보고, 내가 가장 편하기 위해서는 내가 혼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무모하게 덤벼들기 보다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느라,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좋아했던 사람, 가장 열정적으로 다가왔던 사람을 놓치고 말았다. 그게 내내 아쉽고 후회가 되서, 그때 내가 왜그랬을까, 아직까지도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어지지만, 한 편으로는 만약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해도, 지금에와서 거기에 따른 결과를 가지고 아쉬워할거란 생각이 든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그때의 나같았다. 그녀는 클레브 공작과 결혼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남편인 클레브 공작은 부인이 자신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아내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반해있고, 아내인 동시에 애인처럼 사랑하는데, 아내는 그저 남편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그에 대한 하소연을 들을라치면 클레브 공작부인은 그게 대체 무슨말이냐, 대꾸하곤 했지만, 느무르 공을 만난 뒤의 공작부인은 아, 이것이 남편이 말한 그것이었구나, 하는걸 깨닫는다. 그래, 클레브 공작부인의 열정적 사랑은 남편이 아닌 느무르 공을 만나서 침투하고, 폭발해버린 것이다. 아무리 그 열정을 잠재우려고 해도, 가라앉히려고 해도 도무지 되질 않는다. 그를 잊고 지우는 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힘든 일이다.



그의 뒷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클레브 공작부인은 가슴이 터질 듯했다.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불길이 다시 거세게 일어났다. 그녀는 하릴없이 느무르 공이 방금 누워 있다가 떠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무엇인가에 압도당한 채 그곳에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아, 이 남자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서 느무르 공은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웠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오래전부터 그녀만을 성실히 사랑해온 남자,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고통마저 존중하여 그녀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그녀를 보러 오는 남자, 재미를 누리던 궁을 떠나 그녀를 가두고 있는 벽들을 바라보러 오는 남자. 그녀를 만나지도 못할 곳에 와서 홀로 몽상에 젖는 남자. 이런 애정만으로도 그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설령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도 이젠 그녀가 그를 사랑하겠다고 할 만큼.(pp.202-203)



당신은 당신을 보기 전에는 제가 알지 못했던 감정을 제게 불러일으켰어요. 저는 처음에는 놀랍고 그 후에는 동요와 흥분을 일으키는 그런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덜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걸 고백할 수 있어요. (p.209)



연애에 도통했던 느무르 공은 자신의 그간 연애생활을 싹 정리할만큼 클레브 공작부인을 사랑했다. 한번이라도 더 그녀를 보기위해 갖은 애를 쓰고, 그녀의 모든 행동과 말에 신경을 쓴다. 혹여라도 자신의 어떤것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진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혹여라도 그녀의 어떤것이 자신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을까 애를 태운다. 그러니 그의 사랑을 그녀가 알고, 또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걸 알게 된이상, 이 사랑이 불발로 끝날리는 없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된다. 불태울 수있을만큼 불태우겠지, 그게 느무르 공과 내가 했던 생각이다. 게다가 어느 순간, 느무르 공에겐 장애물이라 여겨질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유부녀'란 신분이 자유로워진다. 그러니 그들을 가로막는 건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들에겐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일 달콤한 순간들만이 기다릴거라고, 느무르 공과 내가 생각한다. 그러나, 클레브 공작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겁을 먹었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아프고 싶지 않았다. 클레브 공작부인은 자신이 열정을 불태운 후에 기다리는 것이 고통일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그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궤뚫고 있던 셈이다. 지금의 나라면, 이여자야 나중에 어떻게 되든 일단 할때까지 해보라고, 가보란 말야, 안하고 후회하느니 저질러보라고! 하겠지만, 언젠가의 나도 저질러버리지 못했던 사람인지라 섣불리 그녀에게 충고할 수 없다. 지금은 자신있게 안해보고 후회하느니 저질러보고 고통받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 고통을 차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저는 제 감정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은 당신의 애정에 대한 너무 약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요. 제 감정을 자유롭게 다 드러내는 것은 제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일 거예요. 당신의 사랑을 더는 받지 못하는 일은 제게도 참 끔찍한 불행이라고 저는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는 그 힘든 의무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이런 불행에 저를 내맡기기로 결정했지만, 잘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자유롭고 저 역시 자유로우니 우리가 함께해도 사람들은 당신을 비난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남자들이 영원한 약속 안에서 그 열정을 계속 간직할 수 있을까요? 그런 기적이 제게 일어날까요? 제 모든 행복이 될 그 열정이 결국에는 사그라지는걸 분명 지켜봐야 할 거예요. (중략) 저는 우리 사이의 장애물이 당신을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걸요. 그 장애물이 당신으로 하여금 승리의 의지를 불태우게 했고, 의도적이지 않았던 제 행동으로 혹은 우연으로 당신이 알게 된 것들 때문에 물러서지 않을 희망이 생긴 거지요." (p.212)



느무르 공과 절대 결혼하지 않기로 한 이유들은 의무로 볼 때는 매우 당연한 것이었지만, 마음의 평화로 볼 때는 매우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면 반드시 질투라는 고통이 올 것이고 느무르 공의 사랑도 반드시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빠질 불행의 심연이 어떨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남자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 도덕도 예의도 어쩌지 못하는 불가능한 시도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녀는 오로지 떨어져 있으면서 시간이 지나는 것만이 자신에게 힘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것이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심뿐만 아니라, 느무르 공을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떠나 철저히 은둔하며 살기 위해 아주 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pp.218-219)



그녀가 생각한 사랑의 본질은, 그래, 정확히 궤뚫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이 가져오는 열정, 열정이 가져온 사랑은 일시적이고 유효하다. 그 열정 그대로 오랜 기간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거라 생각한 열정뒤의 고통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지금의 나는 그녀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 장담하지만, 막상 그 사랑 앞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나조차도 모르는 거다. 그렇지만, 그 유효한, 일시적인 사랑을 하는 상대에 따라 그 사랑은 다른 성격으로 변할 수 있다. 열정으로 시작된것이 안정적이고 탄탄한 관계를 만들 수 있고,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한 질투도, 어쩌면 겪지 않게 됐을런지도 모른다. 미리부터 겁을 먹고 그 안으로 기꺼이 뛰어들지 않았기에, 그녀는 질투도, 열정이 식는 고통도 겪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랬기에 그 열정이 주는 뜨거움과 짜릿함 그리고 그 뒤에 어떤식으로 이어질지 모를, 어쩌면 밝은 미래까지 포기한 셈이다. 또한 그 사랑에 뛰어들지 못했다는 자책과 후회가 먼훗날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다가와, 아플때 아프더라도 기꺼이 한 몸 불사를 걸 그랬다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게 될것이다. 또한, 그와 그 사랑을 하지 않고 마음에 품으며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남은 평생 다른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크다. 내안의 열정을 불사르고 그걸 해내고 고통스러워하고 잊어야, 또다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건 자명한 사실이다. 누군가를 내내 가슴속에 품고 있다면, 다가올 다른 사랑도 하지 못할 확률이 매우 크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그 사랑을 해내고, 앞으로 나아갔어야 했다. 그러나 이건 옆에서 지켜보는 나의 선택인 것이지, 그 사랑에 허우적대고 있는 그녀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린다한들,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은 일단 거기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먼훗날을 생각하지 못하니까.



사랑의 노예,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한 선택이 열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든 빠져나오려는 것이든,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는 지금 사랑이란 감정에 휘둘리는 사랑의 노예라고. 우리는 가끔, 그렇게 사랑의 노예가 된다. 사랑이 시키는대로 하고, 사랑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하는, 노예.






지난 주말엔 여동생 집에 다녀왔다. 나는 그날밤을 조카와 둘이 잤는데, 여태 조카랑 둘이 자본적이 없던터라, 무척 좋았다. 새벽에 몇차례 조카가 깨길래 그 때마다 토닥토닥 이모 여기있어, 라고 해주고 다시 자는데, 새액새액- 잠든 조카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는게 그렇게나 좋더라. 집으로 돌아가기전, 조카에게 말했다. 이모는, 조카랑 잔게 가장 기억에 남아. 너무 좋아. 조카는 이모 와있어서 뭐가 제일 좋았어? 그러자 조카는 이렇게 말했다.



응. 이모랑 쉬한 거.


아니........왜 쉬한게 제일 좋아. ㅠㅠ 

1박2일 있으면서 조카랑 놀았는데, 고작 그만큼을 있으면서 온 몸의 에너지가 다 소진되더라. 결국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하고 떡실신했다. 고작 1박2일에 이지경이 되었는데,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대체 매일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걸까. 게다가 돌봐야 할 어린 아이들이 둘씩 셋씩 된다면. 하아- 세상의 모든, 육아에 힘쓰고 있는 엄마와 아빠들에게 진심을 담아 격한 응원을 보낸다. 



내 핸드폰의 비밀번호는 이 세상에 나 말고 단 한사람, 조카만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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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4-03-12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인용해 주신 대목을 읽으니 이 책을 읽었을 때의 그 느낌이 되살아 나서 참 좋네요. 아, 조카는 커서 이모의 따뜻함을 정말 아름답게 추억할 것 같아요. '이모'란 존재는 참 특별한 것 같아요. 엄마와는 다른.. 육아를 힘들다고 이야기해 주는 글이 왠지 지지가 되는 것 같아 좋네요.

다락방 2014-03-13 09:32   좋아요 0 | URL
클레브공작 부인이 이해되면서 안타깝고 그렇더라고요. 그 격렬한 감정을 한발 더 내딛지 못하는게 답답한데, 그랬기 때문에 그 감정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이해되고요.

조카가 과연 시간이 흘러도 절 기억하고 추억하고 그럴까요? 이제 학교 들어가면 흥, 이모따위! 하는거 아닐까요? 흑흑. 제가 조카랑 함께 술 마시려면 십오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저는 노년이 되어있겠더라고요. 슬퍼.. ㅠㅠ

육아는 감히 제가 시도 해볼 생각도 못해요, 블랑카님. 제겐 너무나 벅차게 느껴지는 일이라서요. 블랑카님 정말 대단하신거에요.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2014-03-12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3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4-03-13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찜합니다. 제가 요즘 [오래오래] 읽거든요. [프랑스 중위의 여자]랑 [오래오래]랑 모두 결혼 제도 밖에서 사랑을 찾는 여인네들이 계속 나와서요. 이러다가 자유부인될까 걱정스럽지만서도, 다락방님 멋진 리뷰에 이 책을 안 읽을래야, 안 읽을 수가 없네요. 특히, 이 구절이요.

저는 제 감정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은 당신의 애정에 대한 너무 약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요. 제 감정을 자유롭게 다 드러내는 것은 제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일 거예요. 당신의 사랑을 더는 받지 못하는 일은 제게도 참 끔찍한 불행이라고 저는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는 그 힘든 의무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이런 불행에 저를 내맡기기로 결정했지만, 잘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자유롭고 저 역시 자유로우니 우리가 함께해도 사람들은 당신을 비난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남자들이 영원한 약속 안에서 그 열정을 계속 간직할 수 있을까요? 그런 기적이 제게 일어날까요? 제 모든 행복이 될 그 열정이 결국에는 사그라지는걸 분명 지켜봐야 할 거예요.

키햐~~ 넘 근사한데요. 도전합니다, 도전!

아무개 2014-03-13 09:10   좋아요 0 | URL
저도 읽지 않았으면서 <오래오래>를 다락방님께 저도 권했던 기억이 나네요 ^^

다락방 2014-03-13 09:39   좋아요 0 | URL
제가 그간 읽어온 여자들은 결혼 제도 밖에서 사랑을 만나고 그 사랑을 선택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이 책, <클레브공작 부인>은 자신의 감정을 선택할지언정 그 상대와 '함께' 가는 것을 선택하지는 않아요. 이해되면서 인상적이고 답답하면서 공감도 되고 .. 독특한 캐릭터였어요. 독특한데, 충분히 그럴만하달까요.

<오래오래>는 처음 책 나왔을 때부터 찜해두고 있었는데 아무개님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여즉 구입도 안하고 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상엔 구입할 책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

단발머리 2014-03-13 16:00   좋아요 0 | URL
음... 그렇군요.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여주인공은 결혼제도 안으로 막 들어서려는 남자를 막아서서 자신을 사랑하게 해놓고, "저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하고 떠나더라구요. 처음엔 이해가 안 됐죠. 그녀는 결혼의 억압 가능성을 미리 간파했다고 할까요. 어찌보면 클레브 공작 부인과 비슷한것 같아요.

"남자들이 영원한 약속 안에서 그 열정을 계속 간직할 수 있을까요?"고 묻잖아요.
저는 아니라는 쪽에, 남자만 그런게 아니라 여자도 아니라는 쪽이거든요.
그러니, 결국엔 그 사람을 떠날 수 밖에요. 그럼, 어쩌자는 건지요.
사랑하고, 떠나고, 또 사랑하고 떠나고. 그런거예요? 다락방님~~? @@

다락방 2014-03-14 11:12   좋아요 0 | URL
저도 '아니'라는 쪽에 거는 사람입니다. ㅎㅎ
결국 인간은 누군가를 떠나고 사랑하고 떠나고 사랑하고 반복하기 때문에, 그리고 저같은 사람에겐 그게 남들보다 더 쉽게 반복되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법적으로 정착을 매듭짓는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는 각자가 찾아내야 할것 같아요. 자, 그럼 나는 어쩔것이냐, 하고요. 인간은 정말 불완전한 존재에요, 단발머리님. 그치요?

자작나무 2014-03-13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아쉬운 것은 갈수록 사라져가는 무언가에 대한 열정, 그것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다락방 님의 사랑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동의합니다

다락방 2014-03-14 11:10   좋아요 0 | URL
제 열정도 많이 사그러든것 같아요. 예전같지 않다고 종종 느껴요. 열정은 그 특성상 한 사람안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