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EARL : 진주 - 영한대역시리즈 13
J.STEINBECK / 조은문화사 / 1986년 1월
평점 :
절판


 1947년, [분노의 포도]의 성공 후 1944년 뉴욕에서 고향 몬트레이로 돌아온 스타인벡은 옛 동료들에게 오히려 그의 작품에 대한 혹평과 냉대를 경험한다. 그는 그가 얻게된 행운에 친구들이 같이 기뻐하고 그 가치를 더 높여주리라 기대했는데 이는 어찌된 까닭인가?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설화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본성은 선과 악, 흑과 백, 좋은 것과 나쁜 것만이 있음을 본다. 인간의 안에 있는 상대의 기쁨에 대한 질투와 파괴하고픈 욕구, 서로를 적으로 만들게 하는 공통요소인 악에 대한 이해없이 인간을 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악의 결과로 생기게 되는 감정인 억울함이란 참으로 가슴 아픈 것이다. 삶의 조건으로 인해 이런 억울함의 분노와 고통을 고스란히 참아야한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그 마음을 이해할까? 최근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 사람이 약자이며 약자란 이런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이다. 사회적인 지위와 차림새, 피부색으로 인해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한다면 이는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억울함은 지식에서 시작하고 구조로 굳어져 외형으로 표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의 통로는 이미 어떤 사람들에게는 닫혀있고 외형적으로 받는 차별은 한 세대에는 즉 내가 살 동안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곳 미국에서 요즘 느끼는 것은 외국인으로서 받는 권리없음이다. 사회의 일원인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 이 모든 것을 꿰뚫는 감정은 억울하다는 것이다. 더 이상을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호받고 정당한 댓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런 억울함을 더욱 크게 한다. 이때 할 수 있는 선택은 억울함을 내려놓고 하늘에 맡기는 것, 또는 끝까지 그것을 바꾸어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부딪히면 깨지는 것은 개인이다. 억울하여도 참고 그러나 끊임없이 냉정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무방비한 편견의 주체를 설득과 사랑, 기도와 헌신으로 무너뜨리고 마는 것. 요즘은 이런 억울함과 대안을 고스란히 겪어보는 시간들이다. 혹은 이것은 오직 진주를 버릴때만 사라지는지도 모른다. "네 진주를 버려라. 인간과 같이 어울려 살려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 그 이후 매스터마인즈 3
돈 큐피트 지음, 이한우 옮김 / 해냄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돈 큐피트는 자신의 사상적 근간으로 니체를 말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는 니체가 언명 하였듯이 종교와 플라톤의 종말을 선언하고 붕괴된 실재론적 이원론 이후 인류에게 필요한 종교를 재건하고자 한다.(1997년)

그가 만들고자하는 종교의 방향은 죽은 조상이라 하더라도, 죽었다는건 알지만, 기리고 섬기듯이 신을 항상 염두에 둔 조심스런 삶, 그리고 결국 삶이란 아무것도 아니고 죽으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가벼웁게 미련없이 살아가는 것, 그리고 존재란 결국 표출하기 위해 사는 것이므로 미친 듯이 어떤 일에 열중하며 자기를 소진시켜 나가는 것. 거기에 덧붙여서 니체의 폭격 아래에서 논리적 신학의 자리는 없으므로 시와 같은 예술적 형태의 신학을 만들기, 이런 반실재론적 기반 위에 결국 모든 종교적 어휘를 아우르는 세계종교를 그는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결국 인간이 스스로의 종교성을 파헤쳐 발견한 것은 힘의 의지이며 에너지의 팽창일뿐이다. 인간은 자기밖에는 의지할 곳 없는 절대고독의 존재로 살아야 하는 존재. 그리고 스스로는 믿지 않는 신을 만들어야 하는 일을 묵묵히 해내야 하는 존재다. 언뜻 돈 큐피트가 제안하는 비실재론적 융합종교를 듣다보면 신세기 에반겔리온이나 나우시카 혹은 원령공주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여러신들과 어울려 空을 공유하며 장인의 이상을 위해 미친듯이 살며, 이웃과 조상신을 두려워하는 세계, 그러나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오타쿠의 나라. 혹 서양인들이 일본에 대해 갖는 환상들이 서양인 머리 어딘가 섞여들어 이런 결론에까지 다다른것인가. 아니면 망가 애니메이션속에서 폼 하나로 죽어가는 프랑스 아방가르드의 오타쿠적 변형이 포스트모던의 대세인 때문인가. 오타쿠(달인)가 삶의 목표가 되어가는건 사실 그 근본에 있어서 종교적 문제라는 걸 알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인 조르바 Mr. Know 세계문학 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1942년 59세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일제하의 우리 민족만큼이나 절망적 상황의 민족 현실을 산 그리스인이었다. 그에게 [신, 그 이후]의 삶에서 희망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무릇 신이란 진심으로 믿어마지 않는 그 무엇이지 않은가? 그가 신을 버린 이유는 신의 존재와 도덕의 가치를 어떤 이익 집단의 것, 인간의 자기 이익을 위한 부산물로 바라보게 하는 시대를 산 때문이다. 베르그송이 그러했고 그 뿌리에 놓인 니체가 그러했다.
 
신이 떠난 자리에 인간이 채워넣을 수 있는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첫째는 이성이다. 이성의 신격화된 존재인 진리 혹은 우주정신. 이것이 파생시키는 삶은 금욕과 무욕, 공허를 붙잡고 나락을 응시하며 마음 속에서 나락을 모두 품고 뛰어내리는 삶이다. 힌두적 정신이며 헬레니즘이며 스토아이고 다시 부처이며 무신론적 실존이기도 하다.
 
둘째는 인간자신이다. 인간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가치를 알고 있다. 다수의 행복, 혹은 적극적 소극적 쾌락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일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인간의 목적적 추구.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며 가치의 창조자가 되며 땅의 영원한 주인으로 선다. 이것은 다시 니체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니체와 베르그송의 영향 아래 있는 자유의 갈망과 탈윤리의 몸부림. 부처의 세계에 대한 부정, 절망에 의한 에피쿠로스적 쾌락으로의 회귀이다. 먹고 마시고 지치게 하고 마음껏 뿜어내는 것, 이성을 버리고 떠나는 세계. 카잔차키스는 이런 에피쿠로스와 베르그송의 머리 속에 든 것을 개념인 아닌 한 인간으로 표출하여 낸다. 상점 주인 같은 이성은 사람에게 기쁨과 벅참보다는 정죄와 억눌림, 잔임함과 궤변만을 만들고 인간이 인간되지 못하게 했기에, 이제 다른 선택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인간에게 득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선이 되는 촛불 한 개를 밝힌 어두움인 삶.
 
그리고 지난 60년, 이 이미지는 한 흐름으로 실체가 되어 이제 내 속에 한 모습으로 살아있다. Imagine there is no heaven. 이 매혹적 세계관의 실험은 히피라는 마약과 난혼의 극단적 형태의 문화를 거쳐 성적 해방과 결혼이라는 약속의 약화, 가정의 해체,  유럽과 남북미, 그리고 일본의 문화적 코드로 우리에게까지 삼투되어 들어왔다. 실험은 진행중이고 유혹은 점점더 강렬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각 사람은 여전히 쾌락과 스토아, 또는 그리스도 앞에 서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신감 - 랄프 왈도 에머슨의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이창기 옮김 / 하늘아래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에머슨의 1,2 수필집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한 책이다. 번역이 매끄럽고 잘 이해되도록 써진 편이다.

이해의 깊이를 더 하기 위해선 영향을 받아 미국적 철학과 시를 꿈꾸었던 소로우나 휘트먼을 같이 보면 좋을듯하고, 역사적 배경으론 에머슨에 영향을 주었던 유니테리언파의 종교적 가르침과 촤닝을 중심으로한 당시 하버드 신학의 흐름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당시 영국의 칼라일,디킨스나 독일의 관념철학적 흐름과 연결되어 산업자본주의와 대중주의와 맞서 있었음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이런 맥락의 콘텍스트이외에 텍스트 자체에의 접근은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의 힌두사상과  담마파다의 불교사상이 이해에 직접적 도움을 준다

 

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기나긴 대답의 역사에서 이 책은 명확히 우주정신적 일신론의 한 부류에 속하다. 인간안의 공통적 요소에 의해 발견되어지는 공통분모로서의 신이다. 인간 심성 안에 있으며 그곳을 파내려갈 때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질 수 있는 인간정신의 근본을 이루는 영적 존재인 것이다. 이와 다른 대답은 계시되어진 상태로 이해되어지기 시작하는 신이다. 인간은 이그러지고 자신의 능력으로 신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어그러지는 일이 시작되기 이전의 인식을 위해 우선 신의 계시에 의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이해는 여전히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종교간의 경계선을 이루며, 종교생활을 넘어 문화양식, 생활의 습관, 죽음과 삶에 대한 사회적 합의, 전쟁의 필요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만들며 우리 삶 한가운데의 세계 정치, 경제, 적대와 동맹을 결정짓는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인류가 당면한 최우선의 쟁점이면서 가장 오래되면서 가장 적절해보이는 대안들의 충돌이기도 하다.

 

길지 않은 삶을 살며 느낀 것은 나 스스로를 계시의 빛 아래 두었을 때는 에머슨의 인간 안의 신의 모습을 잘 볼 수 있고 기쁨이 있었던 반면, 인간만을 들여다보고 있던 때에는 도저히 인간 안에서 신의 형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느낄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점점더 미워하게만 되었다는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바지 오세곤 희곡번역 시리즈 3
장 아누이 지음, 오세곤 옮김 / 예니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스스로를 우익적 무정부주의자로 여긴 아누이의 1978년,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조롱투의 희극 극본이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파네스 희극과 유사성은 보수적 관점 뿐 아니라 이야기의 비현실성과 그 안에서의 나름 흐름을 엮어내는 솜씨이다. 반바지는 남성중심적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을 상징한다. 아누이가 대변하는 것은 이런 억압계급이라고 불리워지는 남성, 자본가, 보수언론이다. 그는 여성이 정권을 장악한 미래를 보여주며 여성의 해방이란 것이 인간의 본성과 자유, 남녀간의 사랑, 아버지와 아들, 부부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약자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인생은 나름 각 사람의 살 의미가 있다는 안정지향적 관점을 담은 우스갯소리에 가까운 작품이다. 연극이라는 것이 관객들의 마음 속에 공감을 주는 억압된 의견의 한 통로라면 분명 여성운동이 거세게 일던 당시의 한 배출되지 못한 남성의 심리적 위축을 표현하고 있다.
 
30년전의 프랑스 연극이 놀랍게도 오늘 우리 보수와 진보라는 싸움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인간해방과 약자의 보호는 분명 억압자의 제어와 이익의 분배를 요구한다는 면에서 명분을 갖는다. 하지만 그 명분이 드러나 현실이 된 순간, 인간의 관계를 위협하고 이론 속에서 실속은 없어지고 천박하고 서로를 인간이하로 취급하는 진흙탕으로 들어가고 만다. 이건 아니었는데 왜 진보의 이론과 이상주의의 꿈은 항상 우리를 배반하고, 보수의 목소리는 정당하고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가?
 
[오늘의 무능한 지도자는 어제의 불평 많은 반항자였음]을 이제 우리는 이 책이 아닌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  불만 속에서 사회를 질타하던 우리들이 도리어 정권으로 근사한 일은 제대로 못하고, 또 다른 불만을 생산해 내고만 있다. 이제 다시 서로를 비난하며, 지리한 진보-보수 이야기로 엮기보다 [내일의 유능한 지도자는 오늘 말없이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리 아깝지 않은 수업료를 낸 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