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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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을 읽게 될지는 몰랐다. 나 역시 어린이 소설로만 여긴 까닭이었다. 마크 트웨인은 이 책을 어린이를 위해 쓰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이 내용은 거의 어린아이에겐 부담스런 쌍소리와 사기기술, 아동학대,어른에 대한 조롱들,극악무도한 장난과 기만들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곳곳에 숨겨진 넌센스들과 어린이적 상상력의 극단까지 몰고간 비참한 결론들.  혼자 낄낄거리며 읽어간 책이다. 

저작초기의 장난스런 글에 대한 혹평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결국 중요한 저작이 된 이유를 알 만하다. 1884년 당시 미국에서의 외면적 사회의 번지르함에도 불구하고 속 깊은 곳에 어두운 모습, 노예제를 유지하던 기만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요구하고 있다. 흔히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의심해 보라는 목소리다. 우리는  한 시대 안에 살며 모든 걸 너무 당연히 받아들인다. 당시 노예제도를 지속하던 그들이 특별이 더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우리의 고정관념이란 것이 삐딱하게 한번 생각지 않고 계속 살면 자칫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을 사회전체가 용인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경험이다. 우리들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믿을 때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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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표현.이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4
빌헬름 딜타이 지음, 이한우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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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최근 많은 사이트나 포털의 카페들이 출판사나 사이트와 연관되어 책에 대한 홍보도 할겸 인터넷에서의 무플도 방지할겸 독자들의 리뷰를 유도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원래 나 스스로의 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현재 살고 있는 나의 삶을 책의 저자와 마주 앉아 의논하는 맘으로 시작한 리뷰가 이런 남들의 필요라는 포맷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리뷰란 딜타이의 견해로 보면 체험의 표현이다. 이 체험은 엄격히는 추체험이다. 남의 삶을 따라가며 그의 해석과 정신연관을 나의 정신연관에 비추어 연결하여 내는 것. 그 안에서 나는 나의 삶의 유의의성을 발견할 연관을 찾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것은 계속 기억이라는 창고에 고스라니 보관되었다 어느 순간 내가 나의 삶을 엮어내려하고 해석하며 의의를 끌어낼때, 연결쇠 역할을 하려 기다리고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나에게 인생에 대한 자연과학적 해석에 매몰된 나 자신을 깨닫게 했다. 개념이라는 것, 틀이라는 것을 들이대지 않고도 삶의 연관과 집합적 전체를 바라보도록 하는 눈. 그것은 욥기가 나에게 삶을 바라보게 해준 방향이기도 하다. 우리가 역사에 대해 나의 인생에 대해,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듯 자기와 남을 바라보는 것을 중단하는 것. 지금의 의미를 과거의 체계로 해석하지 않고 또 다른 신적 의지의 자유와 나의 자유 안에 남겨두며 연결들을 내 안에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내가 리뷰를 쓰는 이유였다. 남들이 하는 사고와 똑같은 사고의 패턴과 따라쟁이스러운 글쓰기가 아닌 나의 내 안의 고유한  나 자신이 되는 정신연관 안에서 타인의 체험의 표현을 이해해 나아가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나만의 체험이 되며 표현되어질 수 있다. 하지만 요즘 나의 책 체험에 대한 표현은 내가 아닌 개념과 틀과 패턴과 외부적 대상이 가리고 있는 쓰레기에 불과했었다.
 
나는 나를 살고 그런 나를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이루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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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03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리뷰입니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 희랍어 원전 번역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단국대학교출판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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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말 그리스는 페리클레스의 통치하에 군사력과 경제력,외교에서 전성기를 누렸다. 문화적으로도 458년경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과 431년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와 같은 비극의 정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429년 페리클레스의 죽음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거치며 차차 민주정의 그리스는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에 그늘에 가려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에 점령당하기까지 기를 펴지 못하는 나라가 되고 만다.

448년에서380년까지의 그리스를 살았던 아리스토파네스는 기울어만 가는 그리스의 영광을 바라보며 이 책에 실린 [구름](423 B.C), [새](414 B.C), [뤼시스트라테](411 B.C), [개구리](405 B.C)를 썼다. 과연 소크라테스의 궤변 때문인가? 잘못된 종교관의 문제인가? 혹은 쓸데없이 호전적인 정책 때문인가? 개콘 시대에 이런 희곡이 과연 코메디라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인물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본 비난의 대상들이다. 과연 페리클레스 정치의 한 영광의 산물인 아이스퀼로스가 돌아온다해도 이런 어려움을 스스로 짓고 있는 아테네인들을 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시대의 궤변과 잘못된 정책과 무지개 공약과 똑똑치 못해 보이는 협정들, 진보와 보수라는 틈바구니에 끼어 바라보며 읽는 이 책은 결코 희극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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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치샐러드 지음 / 학고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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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치 샐러드 윤명진씨의 손가락은 나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살표이다. 어느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을 콕 찝어 자세히 설명해 주는 역할과 함께, 이 손가락은 온라인에 존재하는 손가락이다. 16세기 극장 연극이라는 당시로는 천박한 전달방법으로 다가간 셰익스피어의 인간이해, 20세기초 아무런 머리회전을 요구하지 않는 영화라는 친절한 설명방법이 가졌던 대중에 대한 영향력, 이제 21세기 초입에 인터넷 만화라는 돈도 노력도 필요없는 방법이 대다수에게 와닿게 전달되는 의사소통을 가능케 한다. 짤방(짤림방지)의 최대방법은 이미지를 늘리고 텍스트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만치 않은 흡입력있는 친절하고 감칠 맛나는 대사들(짧은 문장에 깊이를 담기는 대사가 최고다). 이 손가락은 독자로 부담없이 그 앞에 다가와 아귀와 같이 앉아있게 하는 힘을 갖는다.

 다른 손가락은 윤명진만의 주제, 방향제시다. 지난 30년간 우리의 대중문화는 무엇을 담았는가? 연탄난로를 때던 만화방에서는 억압과 강자 앞에 선 약자들의 승리가 있었다. 구영탄, 설까치와 외인구단, 며느리 밥풀꽃, 또 많은 우리의 만화 속 동지들은 나의 삶의 짖눌린 부분들을 인식하게 하고, 새로운 용기로 삶을 바라보게 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잔다르크이며 워싱턴이고 링컨이며 가르발디,아더이고 샤를마뉴이며 로빈훗이었다. 저항과 적에 대한 복수, 응징과 승리를 우리는 그들을 통해 누릴 수 있었다.그리고 찾아온 멀티플렉스의 시대. 자유를 누릴때까지 누려보고파 했던 자유로운 개인의 극대화의 단계. 각종 음지를 굴러다니던 욕설과 폭력,동성애와 마약 심지어 인종주의의 자유까지를 대형화면에 쏟아내는 시절이 왔다. 우리만의 계몽혁명의 자유이고 히피이며 반항의 계절이다.

 과연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손가락]이 있다. 윤명진의 주제는 사뭇 무거운 것이다. 이제 인터넷 만화는 무엇을 전달하기 시작하는가. 루소의 이성절대, 개인폭발의 세계에서 괴테의 시대로, 볼테르의 저항에서 까뮈의 회의로 가고 있는가? 삶의 무의미에 대한 회의와 절망,예술에 대한 목마름, 의미에 대한 갈구라는 주제들이 이런 쉬운 방법으로 대중에게 호소력있게 다가간다. 이제 OTL의 희화된 삶의 무의미성, 절망감과 기존사회와 대중의 무관심 속의 고독, 자살의 시도와 비겁한 새로운 삶의 시작, 찾아지지 않는 해답과 궁극적 대답을 줄수 없는 화자에 대한 실망은 즐거운 놀이처럼 다가와 진지한 자기성찰을 대중에게 묻는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번 작업이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 좌절이 더욱 잘 표현된 것 같다."

"좌절의 순간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하라는 뜻밖의 교훈을 얻었다." (윤명진 인터뷰)

 그는 대중에게 다가가는 어두운 표정을 화장뒤에 감춘 삐에로와 같은 손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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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동양고전 슬기바다 3
주희 지음, 김미영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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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중용은 원래 한나라 초기 한무제에 의해 집대성된 예기에 포함되어 있던 글이었다. 이 글들이 독립된 책일뿐 아니라, 유학의 중심된 역할을 하는 사서(대학,논어,맹자,중용)의 일부로 자리를 잡은 것은 12세기말 남송시대, 자신의 시대를 위한 하나의 체계를 마련코자 했던 주희의 의도적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수,당시대를 거치며 거대한 세력으로 자라난 불교와 도교 그리고 당시의 여러 다른 유교의 해석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난 12세기 새로운 유교의 해석이다. 이제 유가는 주자를 거치며, 변증되는 철학체계의 확고한 틀을 갖추게 된 것이다.
 
대학의 주축은 나라를 세우는 뿌리를 위해 군주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져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중용은 이런 심적 체계의 근본을 밝혀 유학을 종교적 근거(天命=性)를 갖는데까지 이끌고 간다. 이제 유가의 담백하기 그지 없었던 삶의 지혜들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주희의 [대학장구], [중용장구]을 통해 비로소 공자의 정신은 다시 해석되어져 비로소 하나의 국가체계와 깊은 심적 수양의 종교적 측면을 지니게 된다. 거대국가를 위한 통치이념의 모양새와 종교적 외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유학은 무엇일까?  새로이 끄집어 내어야 할 보물인가? 아니면 중국의 영향 아래 있던 시절의 쓰레기인가? 책 하나의 독후감으로 주제넘는 질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시대를 위한 원리들을 끄집어내고 다듬어내는 주자를 보며, 이제 어떻게 이것을 발효시켜 우리 삶을 위해 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나라의 근간을 유학에 가졌던 세 나라. 아직도 그 문화의 영향력 아래있는 한중일의 한 연결점으로 이제 한 나라의 근간이 아닌 여러나라의 이해와 건설적 관계의 한 축으로 공자의 가르침은 다시 의미를 가질순 없을까. 꼭 그를 죽여 다시는 나타나지 못하게 해야만 우리가 잘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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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1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