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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어지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가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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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3-12-0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전 요즘 <천로역정>을 읽고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 덮어버렸지요. 번역에 문제가 있는 건지, 저의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건지...게다가 그땐 세로줄 책이었습니다. (어, 사춘기 시절 세로줄로 된 책을 읽었다고 하면, 나이가 탄로날 것 같은데...조심해야지.)

지금 다시 읽으니 넘 좋습니다. 존 번연의 영성은 그의 상상력에서 빛나고, 뛰어나고도 생생한 왜 이 책을 영문학사에 길이남을 작품으로 치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하늘가는 마부> 기회 있는대로 꼭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청교도 (Puritans)

엘리자베스 여왕은 헨리 8세에 의해 생겨난 성공회의 최고 수장직을 계속 이어가면서 구교와 신교사이의 공통 분모를 찾으려하였다. 하지만 정통 로마 카톨릭측과 정통 개혁파측은 여전히 그들만의 교리와 교회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 때 생겨난 것이 청교도 운동이었다. 프랑스의 개혁파를 위그노파라 불린 것과 같이 영국의 개혁파의 주류는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더욱 급진적으로 교회를 개혁하길 바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배격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앙 노선을 불신하였고 로마 카톨릭 교황 Pius 5세도 여왕을 1570년 파문시켰다. 청교도들은 스코틀랜드의 장로 교회를 그들의 모범적 교회관으로 삼았다. 청교도들은 성공회로부터 분리를 원했고 그래서 기성교회와 정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1588년 스페인의 필립 2세가 이끄는 130척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협으로 출현하였다. 필립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복누이 Mary Tudor의 남편으로써 영국의 개혁주의 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으로 해군을 보낸 것이다. 1588년 7월19일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네델란드 해안을 경유해 영국으로 나아가려다 갑작스런 돌풍에 휘말려 대부분 바다에 침몰되었다. 필립 2세는 다시 2차 공격을 준비하다가 병들어 죽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Darnley경의 의해 스코틀랜드 Mary여왕이 낳은 제임스 1세가 영국의 왕이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어려서 장로에 의해 교육을 받았으나 왕이 되자 성공회를 선호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 제임스 1세는 교회를 개혁하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1604년 런던 Hampton 궁중에서 성공회교도와 청교도들이 함께 모이는 의회를 소집하였다. 의회 모임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의회에서 영국 성경 번역이 제안되어 성경을 영어로 공식적으로 번역하게 되어 나온 것이 King James Version (Authorized Version)성경이다 (1611년). 그 전에는 Mary Tudor 여왕 시대에 Geneva Version이 있었으나 Geneva Version이 군주제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KJV를 만든 것이다. Hampton 궁중 의회의 결과에 실망한 많은 청교도들은 그 후 네델란드와 나중에는 북미로 이민가게 되었고 이것이 미국의 청교도들이 발생한 원인이었다.

17세기 전반부에 영국의 청교도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특히 캠브리지 대학 도시에서 청교도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캠브리지에 엠마누엘 대학을 세운 Walter Mildway도 있었다. 또한 캠브리지에서 영국의 캘빈이라 불린 William Perkins(1558-1602)은 많은 학자들에게 캘비니즘에 입각한 설교로 그들을 개혁시켰다. 그리고 Richard Sibbes(1577-1635)는 49세에 캠브리지 성 캐서린 홀의 주임이 되어 개혁주의 설교로 청중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Thomas Goodwin(1600-1679)은 옥스퍼드 Magdalen 대학의 학장이 되어 많은 저술활동으로 청교도 정신을 유럽에까지 알렸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영국 왕이 된 찰스 1세는 로마 카톨릭 성도인 Henrietta Maria와 결혼하게 되자 청교도 주류의 의회와 마찰하게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 교회들을 박해하고 나아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까지 구교를 강요하다가 2년 간(1639-1640) 전쟁을 치른 끝에 스코틀랜드를 복종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1642년부터 1648년까지 영국 내에서 구교를 지향하는 왕당파 군과 청도교를 대변하는 의회 군(New Model Army)간의 시민 전쟁이 반발해 신교를 대표하는 의회 군이 이기자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당했다. 7년 간의 시민 전쟁에 스코틀랜드 군도 의회 군 편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의회 측과 스코틀랜드 장로회 측은 개혁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리와 예배와 제자 훈련과 교회 감독에 관한 전반적인 계약서를 만들자고 결의하였다. 성공회와 같이 교회의 수장이 국왕이 되는 제도를 철폐시키고 개혁 교회들의 통일된 교리문답서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Abby에서 만들었는데 이 것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소요리 문답서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서 작성에는 Thomas Goodwin, Samuel Rutherford, Richard Baxter 등 청교도와 장로교의 지도자들이 주도하였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은 장로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1658년 회중교회(Congregationalists)와 독립교회(Independent), 1689년 침례교회에서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었다. 후에 미국 교회들의 대부분의 보수주의 교단에서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서를 인정하고 그들의 교리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그 후 의회와 의회군이 분열되고 스코틀랜드도 장로교 방식의 왕정 정치를 주창하다가 최종적으로 의회군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어 영국 연방은 올리버 크롬웰 호민관(Lord Protector)이 이끄는 청도교파에 의해 올리버의 아들 리차드 크롬웰까지 군사독재로 통치되었다. 구교파의 입지가 약화되고 청교도를 비롯한 장로교, 침례교, 독립교회 지도자들이 재판관으로 올랐다. 올리버 크롬웰은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다루려 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유대인들이 영국에 들어와 유대교를 세우는 것도 400년 만에 허용하였다. 올리버에 의해 청교도인 존 오웬이 옥스퍼드 대학의 부총장으로 발탁되었으며 존 오웬은 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정신을 체계화시켰다. 올리버가 죽고 그의 아들 리차드가 새로운 호민관이 되었으나 얼마 못가 1660년 찰스 2세를 국왕으로 하는 군주제가 부활되자 청교도의 입지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 시기에 조지 폭스에 의해 퀘이커 교도들이 만들어졌다. 초기에 그들은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신앙 교리를 가지려하지 않은 이유로 얼마 못 가 비기독교적 단체로 전락하게 되었다. 나중에 북미로 건너 간 퀘이커교도들은 1681년부터 펜실베니아를 중심으로 그들의 본거지를 구축하였다.

찰스 2세로 군주제가 세력을 회복하자 청교도들은 다시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구교 세력은 각종 종교적 제약으로 청교도의 입지를 줄여갔다. 찰스 2세 시대에 베드포드 지역에서 태어난 땜장이 존 번연은 갖은 투옥과 핍박 속에서도 수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기본 정신을 알리려 하였다. 존 번연의 책으로 천로역정, 거룩한 전쟁, 죄인들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등이 있는 데 특히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에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 셀러였다. 존 번연 외에도 17세기에는 청교도들에 의해 지어진 많은 책들이 알려졌다. 윌리암 거넬이 지은 '전신무장의 그리스도인', 리차드 백스터가 지은 '성도의 영원한 쉼', 요셉 캐럴이 지은 욥기 강해, 존 오웬의 히브리서 강해, 매튜 헨리가 저작한 전성경 주석이 1687년~1712년 사이에 쓰여졌다.

1684년~1685년 사이에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전 교회들을 Episcopal(주교주의) 제도화하려는 찰스 2세의 시도에 대항하는 스코틀랜드의 저항으로 스코틀랜드에서는 많은 핍박과 순교가 잇달았다. 1685년 찰스 2세에 이어 왕이 된 제임스 2세는 영국 연방을 모두 로마 카톨릭화 하려고 갖은 시도를 다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위그노파를 멸종시키려는 루이 14세와 같은 방식으로 청교도파와 성공회파를 모두 멸종시키려 하였으나 결국에 실패로 돌아갔다.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고 난 후, 1689년부터 모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말부터 성공회는 세계 선교의 눈을 뜨고 북미 매리랜드에 성공회 교회를 세우는 등 전 세계에 성공회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되었다.

17세기 초반 영국의 청교도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캠브리지에서 영국의 캘빈이라 불린 William Perkins, 그리고 캠브리지 성 캐서린 홀의 주임 Richard Sibbes, 옥스퍼드 Magdalen 대학의 학장 Thomas Goodwin은 많은 저술활동과 설교로 청교도 정신을 유럽에까지 알렸다. 당시 의회 측과 스코틀랜드 장로회 측은 개혁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리와 예배와 제자 훈련과 교회 감독에 관한 전반적인 계약서를 만들자고 결의하였다. 개혁 교회들의 통일된 교리문답서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Abby에서 만들었는데 이 것이 [웨스트민스터 요리 문답서]이다. Thomas Goodwin, Samuel Rutherford, Richard Baxter 등 청교도와 장로교의 지도자들이 이를 주도하였다.

당시 군주제 부활을 시도한 찰스 2세 시대에 베드포드 지역에서 태어난 땜장이 존 번연은 갖은 투옥과 핍박 속에서도 수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기본 정신을 알리려 하였다. 존 번연의 책으로 [천로역정], [거룩한 전쟁], [죄인들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등이 있다. 존 번연 외에도 17세기에는 청교도들에 의해 지어진 많은 책들이 알려졌다. 윌리암 거넬이 지은 [전신무장의 그리스도인], 요셉 캐럴이 지은 [욥기 강해], 존 오웬의 [히브리서 강해], 매튜 헨리가 저작한 전성경 주석, 그리고 이 책 [성도의 영원한 안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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