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모차르트의 자유" 중에서 몇 대목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한 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꼭 언급해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모차르트적인 중심Mitte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것은 예컨대 위대한 신학자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균형과 중립, 그리하여 결국은 무차별을 의미하는―중심같은 것이 아닙니다. 모차르트적인 중심 안에서 발생하는 것은 오히려 균형과 조화의 절묘한 전복, 일종의 전환Wendung입니다. 이 전환 속에서 빛은 증가하고 그림자는, 사라지지는 않지만, 줄어듭니다. 기쁨이 슬픔을, 없애버리지는 않지만, 능가합니다. 긍정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부정보다 강렬하게 울려퍼집니다. 모차르트의 삶이 겪은 중대하고 어두운 체험들과 작고 밝은 체험들 사이의 관계가 전도Umkehrung되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술피리" 끝부분에서 '태양의 눈부신 빛이 밤을 쫓아버린다'라는 노래를 듣습니다. 이 힘겨루기Spiel는 언제나 계속될 수 있고 또 계속되어야 합니다. 혹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딘가 저 높은 혹은 깊은 곳에서 겨루는, 그리고 이미 이긴 시합입니다. 바로 이 점이 모차르트의 음악에 방향과 특성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힘의 균형, 말하자면 불확실성과 우유부단함을 결코 찾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오페라와 관현악곡들에서도 마차가지이며, 종교적인 작품들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토록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하는 '키리에'나 '미세레레'도 그 곡에서 탄원하는 자비가 오래 전에 베풀어졌다는 굳은 신뢰에 의해 지탱되고 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모차르트의 곡에서 그분은 이미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모차르트에게 그 기도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미 성취된 청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교회음악은, 흔히 내세워지는 온갖 주장과는 달리, 참으로 영적인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결코 한탄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그의 처지는 그러고도 남을 형편이었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그는 언제나 듣는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상쾌하고 멋진 전환을 이루어 냈습니다. 감히 말하거니와, 바로 이것이 모차르트의 자유의 비밀이요, 우리가 처음에 물었던 그의 특별함의 본질인 것 같습니다."

"모차르트와 괴테. 모차르트가 괴테를 읽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제비꽃'이라는 가곡을 작곡했으나 그것이 괴테의 시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괴테도 자신의 시가 작곡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괴테는―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애석하게도 상세히 알 수 없으나―모차르트 음악의 "비길 데 없음'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를 라파엘로, 셰익스피어와 동렬로 대접했으며, 자신의 '파우스트'를 음악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모차르트뿐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났더라면 어떤 엄청난 일이 이루어졌을까요! 저는 두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모차르트적인 중심은 아무튼 괴테적인 전일성Alleinheit과 혼동되어서는 안되며, 또 모차르트에게 그토록 특징적인 대립되는 두 가지 삶의 측면들의 단호한 불균형 그리고 그 빛나는 전환, 말하자면 바로 "모차르트의 자유"에 상응하는 것을, 제가 제대로 읽었다면, 괴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모차르트와 위대한 화가들. 괴테의 전철을 따라, 여러 사람이 모차르트의 음악을 라파엘로의 그림과 비교했습니다. 그러나 꼭 비교를 해야 한다면, 저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그림과 비교하는 것이 더욱 걸맞으리라 생각합니다. 보티첼리의 풍부하면서도 언제나 고요히 퍼져나가며 동시에 그토록 선명한 필치와,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는 관계와 한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눈에 나타나는 헤아리기 어려운 깨달음, 물음, 대답을 떠올려 볼 일입니다. 보티첼리의 그림 속 인물들의 눈이 보았던 것을, 모차르트는 자신의 위대한 자유 안에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위대한 자유에 터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놀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http://mozartian.cafe24.com/bbs/view.php?id=mozart&no=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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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hn Yoder의 평화주의 인식론의 탈현대적 함의

                                                                                                                                김기현

1. 서론
언제나 기독교 신학은 계시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일어나는 현상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신학은 우리 자신의 현대적 경험을 기독교의 경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해석하고 비판적인 변혁을 도모해야 한다. 지평으로서의 세상과 척도인 기독교의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관련시키는 것은 신학의 고유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지난 20세기는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으며 결국 폭력에 기초한 질서들의 충돌의 역사였다. 더군다나 우리의 역사 또한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였다는 점이다. 사회학자 김동춘의 지적처럼 아직도 우리는 한국전쟁이 개시된 날짜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그런 까닭에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이 땅에 계속 재연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의 긴급한 과제 중의 하나는 가깝게는 이 땅에 다시는 분단된 조국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멀게는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제거하고 성서가 말하는 정의가 살아 있고, 모든 피조물이 서로 화해와 평화를 누리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전쟁과 폭력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세계관을 요구하고, 역으로 그 세계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근대 철학이 폭력과 억압의 인식론이었음을 설명하고, 다음으로 평화주의는 근대 철학의 문제를 비판하는 또는 극복하는 탈현대적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를 평화주의의 인식론(pacifist epistemology)라고 명명할 수 있다. 평화는 단지 사회 정치적인 실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성찰과 신학적인 증언의 주제이다. “폭력이 힘에 관한 윤리학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진리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인식론”의 문제이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사회 정치적 윤리 이론으로만 이해될 수 없고, “특정한 사유 스타일 혹은 담론의 양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평화주의는 독특한 인식론을 함축한다.”

평화주의의 인식론은 기독교 윤리와 신학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 요더는 전쟁은 근대 기독교 윤리를 평가하는 시금석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을 조금만 확장하면,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근대와 기독교의 인식론을 평가하는 시금석이라는 명제 또한 가능하다. 전쟁에 대한 견해는 단지 윤리학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윤리학 전체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 평화주의는 윤리학을 평가하는 시금석일 뿐만 아니라 신학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평화주의는 근대와 교회가 전쟁과 폭력에 관해서 모종의 일치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자 비판이다. 다시 말해서 평화주의 인식론은 근대의 인식론이 폭력의 인식론이었음을, 교회의 인식론은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2. 근대에 대한 탈현대적 비판
탈현대 철학의 지향점에 대한 다양성과 입장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서, 그리고 미래의 전망에 관한 불일치가 있지만, 지난 서구의 근대 자체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라는 점에서는 거의 합의를 하는 듯 하다. 강영안에 따르면 탈현대적 경향은 한편으로 과학과 이성의 맹목성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객관주의 비판, 다른 한편으로 주체의 절대화에 대한 해체로서의 주관주의 비판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먼저 근대적 사유의 요체는 과학적 합리성에 있다. 확실한 지식은 주관적 느낌이나 관습을 배제하고 실증적으로 탐구를 통해서 획득된다. 이 탐구가 가능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객관화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신을 포함하는 모든 사물과 인간 자신을 계량 가능하고 양적 대상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사실’이 이론 구성의 최종적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일체의 선입견이나 편견, 세계관으로부터 따로 분리되어야 한다. 사실의 세계에 놓여 있는 것은 별 문제가 없겠지만, 소위 가치의 세계에 있는 것, 예컨대 신과 인간의 내면, 그리고 도덕의 문제는 사실의 언어로 환원되거나 아니면 헛소리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 결과 모든 존재와 그 의미는 그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필요에 따라 임의로 변경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조작 가능한 한낱 대상으로 전락된다. 기실 근대 신학은 과학적 합리성의 요구에 맞서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방어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하나님을 측정 가능한 물적 대상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것인가? 아니면 과학적 검침이 불가능한 초월적 대상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러한 객관주의의 이면에는 주체의 지배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연구한다는 것, 그것은 주체의 관심이나 의욕과 무관하게 대상은 그저 사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인간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밖에 없다. 나와 무관한 대상은 능동적인 주체의 의지에 의해 재구성된다. 이렇듯 대상을 주체와 맞서는 건너편에 두는 것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지배를 성립시킨다. 대상을 주체와 분리할 때에 대상에 대한 주체의 지배가 성립된다. 주체의 지배는 대상을 주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보듯이, 인식하는 주체의 틀과 기준에 맞추어 대상을 재단하는 것이다. 주체의 인식 틀에 담을 수 없는 것은 잘라서, 그리고 작은 것은 우격다짐으로라도 늘려서 집어넣는다. 인식이란 애초부터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있는 기호와 코드로 변경해야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를 하이데거는 ‘권력 이성의 형이상학적 표현’이라고 하였다. “사유는 곧 사물을 움켜쥐고 고문하며 사물의 본질을 ‘수학적으로’ 파악하는 인간 행위는 결국 ‘자기’, ‘자아’ 위에 기초해 있고 이런 의미에서 ‘자아’ 혹은 ‘자기’는 바로 현대적 의미에서 ‘주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데카르트 해석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근대 철학은 자기 증대에 사로잡힌 주체의 권력 요구의 역사로 일관되게 해석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강영안의 주장처럼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탈현대 철학의 주체의 죽음 선언이 말하는 주체의 의미에 대해 의문 부호를 남길 수 있다. 대상을 완전히 독점하고 지배하면서 호령하는 주체에서 타자와의 연대성 속에서 존재하는 올바른 주체 개념을 확고히 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주체의 죽음이라고 말하든 간에,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주체는 무죄를 결코 주장할 수 없는 유죄이고, 사형 선고가 지나치다 하더라도 상당한 형량이 요하는 잘못을 범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보다 분명한 것은 근대 철학은 타자의 억압과 배제의 인식론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3. 평화주의의 정의
평화주의의 기초는 기독론에 있다. “우리의 목적은 기독교 평화주의 입장이 실용적이거나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론적 고찰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에 의해 사회 질서에 부적절하다는 것이 참된 사실인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아마 존 요더의 평화주의를 가장 잘 정리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밝힌 ‘메시아적 공동체의 평화주의’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평화주의가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힌다.

“이것이 메시아적 공동체의 평화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에 의존한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안에서 오실 분, 곧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분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망을 완성하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과 수난 안에서 이 평화주의는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그의 부활 안에서 그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평화주의는 요더의 평화주의는 “만약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 아니라면 이 메시아적-공동체 입장은 와해되고 만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단지 교회 내부만이 아니라 사회 역사의 현장에서도 적용하고 실천 가능한 윤리적 담론이다.

요더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기독론 중에서도 십자가를 강조한다. 십자가와 그분의 대속적 죽음은 하나님께서 악을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평화주의의 단 하나의 정당한 출발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선으로 악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과 양립하는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주(Lord)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전쟁과 폭력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의 가르침과 행위를 본받는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실증주의의 거부
기독교 평화주의는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 기초를 둔다. 이는 평화의 실천은 효율성과 실용성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 신학적 기초를 두고 있는 기독교 평화주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는 효율성이나 확실성이 아니라 부활을 통하여 온다. 실용성을 거부하고 신앙 고백만을 붙잡는 평화주의의 사회 전략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고리타분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가 바로 라인홀드 니버이다. 니버가 보기에 평화주의의 약점은 비효율적인 아가페적 사랑에 기초해서 비현실적인 참여를 한다. 그러나 요더의 대답은 십자가의 수용은 완전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려는 길이다.

이러한 효율성과 실용성의 거부는 더 작은 악의 논리의 거부로 나타난다. 예컨대 더 작은 악이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에게 구타를 하는 것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보다는 더 작은 악이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서 더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본다. 하지만 더 작은 악의 논리적 허점은 그 전제를 검토하면 자명해 진다. 더 작은 악의 가정은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과 악을 측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더 작은 악을 통해서 벌어지는 결과가 더 선한 결과를 낳고, 또한 그 선한 결과는 악보다 계량적으로 더 크다고 믿는다. 하지만 양자 모두 폭력이라는 점, 그리고 양자의 생명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을 수치화하는 것은 실증주의적 사고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더 작은 악은 전쟁을 방지하기 보다는 전쟁을 옹호하는 군사주의로 함몰된 가능성이 많다.

이 논문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더 작은 악의 논리가 결국 근대의 객관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신원하는 더 작은 악은 낙관론적이고 실증주의적 인식에 기초한다.(67) 더 작은 악의 개념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므로 충분히 의도된 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라는 인간 중심의 결과론적인 가정과 인간사의 문제를 원인과 결과에 대한 계산에 의해 판단하여 처리해 나갈 수 있다는 낙관론적이고 실증주의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인식의 태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산술적인 계산에 의해 인간 사회를 공학적으로 조성해 나갈 수 있다는 다소 안이한 생각과 연결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점에서 실용성에 따른 실천을 거부하는 요더의 평화주의는 탈현대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5. 평화주의의 다양성
요더에 따르면, 지금까지 도덕적 추론에 관한 학문적 토론은 제1원리를 추구한다. 논의하는 주제의 이면이나 배후에 놓여진 가장 근본적인 첫 번째 원리를 발견하여 문제가 되는 모든 현상을 일거에 설명하려는 것이다. 특히 데카르트 이후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질은 그 이면에 - 그곳이 개별적 사물 안이거나 밖일 수도 있다, - 존재한다는 생각이 근대인의 사유 구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생각하는 자아를 통해서 인간의 인식의 의심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토대를 찾으려는 데카르트적 사유에서 기독교 신학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예컨대, 기독교 윤리학의 경우, 공리주의, 상황 윤리,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정과 행동의 규범을 ‘수’나 ‘상황’ 혹은 ‘중간 공리’에서 찾았다. 그리고 성서 신학에서는 역사적 비평적 방법은 성서 안에서가 아니라, 성서 이면에서 성서의 진실성과 정당성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요더는 단 하나의 동일한 질서 내에 다양한 것을 환원하려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 까닭은 첫째, 인간은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가족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속성은 일점으로 축소하기에 다양한 내면세계를 품고 있다. 그리고 한 개인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 또한 다양하다. 이 다양성을 하나의 개념과 질서로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은 독선이다. 오히려 그 다름을 상호 존중과 대화를 통해서 건강하게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차이를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차이를 갈등 속에서 힘을 요구하는 것으로 증진되는 것이 아니라 화해케 하는 대화로 건전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과 함께 자기 자신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인내를 요하는 것이다. 인내는 낮은 목소리, 소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며, 폭력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는 다양한 대답이 필요한데 특정한 한 입장이나 체계적인 대답은 오히려 왜곡의 소지가 많다. 차이를 부정하고 단일한 기초의 추구는 대화의 거부이며 타자의 거부이다.

둘째,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보다 높거나 보다 깊은 차원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것은 우리 안의 서로 다를 세계를 간과한 것이다. 또한 타인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획일성을 강요하게 된다. 따라서 “결코 동질적인 도덕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 하나의 방법이나 토대에 대한 향수를 포기해야 하며, 더 나아가 타인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평화주의는 타자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을 거부한다.

교회가 상대방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을 거부하는 것은 한편으로 원수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내로 경청하고자 하는 타자의 목소리는 원수도 당연히 포함된다. 요더가 말하는 타자는 단지 친구만을 뜻하지 않는다. 원수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체이므로 우리가 평화로 대우해야 한다. “심지어 억압자도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는 자가 된 것은 공로가 아니며, 성취도 아니며,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만약 내가 내 이웃, 심지어 내 원수일지라도 동일한 관점으로 바라보는데 실패한다면, 나 스스로 그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리는 폭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비폭력적이다. Yoder는 Gandhi의 주장, 곧 비폭력은 사회적 갈등을 중지하는 실천 전략이면서도 보다 중요한 것은 대적자도 내가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적대자가 내게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하여 비폭력적으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나 또한 적대자게 말하기 위해서 비폭력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진리를 소유한 자가 아니라 진리를 고백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화주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 땅에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집단만의 일은 아니다. 평화를 이루는 방법상의 차이로 인해 소모적인 논쟁과 비판은 자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요더는 기독교 평화주의가 단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만을 전일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가 생각하는 평화주의는 “다양하며 심지어는 서로 모순되는 관점들의 총체이다.” 그의 분류에 의하면, 평화주의는 28가지나 된다. 여기에 실용적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론 마저도 평화주의의 한 부분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평화주의가 더 상위의 관점이나 범주이기 때문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경구를 빌리자면, “생각하지 말고 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경구를 빌리자면, 있는 그대로의 정당한 전쟁론도 평화를 만드는 한 방법론임에 틀림없다. 어느 한 입장만이 평화주의를 대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른 평화주의를 무시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삼겹줄로 서로 함께 엮여지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고, 더 효과적이며, 더 실행 가능하다.”

6. 주체의 절대화와 평화주의
위에서 보았듯이 근대는 주체의 절대화를 지향하였다. 근대는 끊임없는 자기 증식의 역사이었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주체의 인식론적 폭력이다. 주체의 절대화에 대한 반동이 해체주의의 반인간주의이다. 근대가 생각한 것처럼, 인간은 순수한 자아가 아니다. 사회 계급적 눈금으로 세계를 인식하며(마르크스), 그리고 세계를 장악하려는 권력 의지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니체), 성적인 욕구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욕망의 포로(프로이드)에 불과하다. 인간은 세계를 조종하는 신적인 위치에 서 있지 않으며 도리어 언어, 관계 등의 그물망 안의 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탈현대적 요구는 기독교의 신 중심주의와 그리 멀지 않다. 기독교는 언제나 세계와 역사를 인간 자신이 스스로 조종하려는 것을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니라고 늘 비판하였다. 인간은 역사와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단지 소명을 위임받는 청지기이다. 평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화는 인간과 인간적인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는 선물이며, 하나님 자신이 평화의 보증자이시다.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평화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증언하려는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달리 국가의 권력에 의해 보증되거나 사회의 힘에 의해 최종적으로 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평화를 위한 실용적 도구로서 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당한 전쟁론은 전쟁의 규범과 판단 기준을 성서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국가에게서 찾는다. 정당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합법적인 국가 권력에 의한 최후의 수단으로 벌어지는 전쟁을 정당하다고 교회가 승인하는 것은 전쟁의 문제에 있어서 주권을 하나님이 아니라 국가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이는 평화주의의 정의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왜곡이자 제한이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역사를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새로운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예수는 분명 힘에 의한 승리를 거부하셨다. 군사적 무력이 아니라 죽기까지 고난 받고자 하는 사랑의 힘만이 세상을 변혁하는 교회의 유일한 힘이다.

7. 결론
이상에서 Yoder의 평화주의는 사회 윤리적 실천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이며, 탈현대적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요더의 평화주의 인식론은 근대 철학이 내포한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 그리고 교회가 추구해야 할 당연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물론 여기서 탈현대가 늘 안고 있는 상대주의의 위험에 대한 요더의 비판을 검토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 배경이 될 탈콘스탄틴주의에 대한 설명이 없었던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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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 포스트모던 그리고 복음

윌리암 에드가2) 김종철 박진숙 역      from http://www.labri.or.kr/doc/modernity.pdf

"모더니티의 기획(보편성의 실현)은 포기되었거나 잊혀진 것이 아니라 붕괴되었고 파산되었다 이러한 모더니티의 붕괴를 보여주는 여러가지 양식 상징과 이름들이 있지만 아우슈비츠야말로 모더니티의 비극적인 종말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름이다.”3)

이것은 『포스트모던적 조건』4) 이라는 책으로 우리가 포스트모던5)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인식시켜 주었던 한 프랑스 철학자의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시대를 포스트모던이라는 말로 특징지우려는 사람은 장 프랑스아 리오타르 뿐만이 아니다. 저마다 조금씩 그 의미를 달리 하고는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를 포스트모던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 포스트모던이라는 말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모순 어법이다. 왜냐하면 포스트 라는 말은 뒤 를 가리키고 모던 이라는 말은 지금 을 뜻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적인 용어 사용은 의도적인 것으로 한 시대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단어 하나로 규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스트모던 사상을 둘러싼 여러 논의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이러한 논의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하는가 소위 포스트모던적 조건 이라고 불리우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것인가?

어떤 면에서 많은 철학자들이 모더니티의 거짓된 주장을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으므로 우리 기독교에게는 환영받을 만한 것일 수도 있다 모더니티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모더니티야말로 고도로 세속화된 문화를 생산하고 20세기의 비극과 격변을 안겨준 장본인이 아닌가 ? 많은 신학자들이 모더니티의 환상에서 벗어난 현 시점을긍정적으로 보고 지금이야 말로 복음을 전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6)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포스트모던을 주장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아군이라면 어떠한 종류의 아군인가? 모더니티를 극단적으로 거부하고 포스트모던적 조건 을 주장하는 자들은 모더니티와는 다른 새롭고 납득할 만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가? 모던적 기획 7)을 믿는 사람들의 희망과 열정을 앗아가버리려는 그들은 “왜 사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더 나은 대답을 가지고 있는가?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어야하는가  ? 포스트모던적 상황은 복음전도를 위한 새로운 기회인가? 아니면 복음에 적대적인 또 하나의 암울한 시기인가 ?

1.모더니티란 무엇인가  ?
모더니티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이라는 유사 개념과의 구별이 선행되어야 한다 모더니티가 역사적으로 비교적 최근인 한 시대를 총칭하는 개념인 반면 모더니즘은 신학과 예술에서 나타났던 특정한 운동과 모던의 이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언하자면 첫째로 우리는 로이지Alfred Loisy, 티렐 George Tyrrell, 그리고 부오내우티Ernesto Buonaiuti 와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민주주의나 합리적 비평 방법  rational criticism등이 수용된 현대 카톨릭 신학을 그리고 근본주의가 전면전을 선포했던 개신교 내의 자유주의를 모더니즘 라고 부를 수 있다 예술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파리학파 인터내셔날 스타일 12음 기법8) ’ 과 같은 20세기의 다양한 시도들을 지칭한다 두번째로 모더니즘은 단순히 모던 시의 이념이나 확신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볼 경우 모더니즘은 하나의 철학내지는 교의 라고 까지 말할 수 있으며 분명히 모더니티와 모더니즘 사이에는 그 개념doctrine에 있어상당 부분 중첩되는 것이 사실이다.

모더니티는 모더니즘보다는 더 넓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 단어의 역사를 살펴 보는 일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라틴어 형용사인 모데르누스 ‘ modernus’의 기원은 최소한 AD5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단어는 당시 공인된 기독교 시대를 과거 로마의 이교적 시대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 되곤 하였다.9) 영어 명사인 모더니티 modernity 는 16세기에 처음 사용되었으나 현재의 의미를 띠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인데 특히 드 고티에 와 보들레르De Gauthier Baudelaire 의 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모더니티의 핵심은 엄격히 역사적 사회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17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시작되어 19,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전세계를 휩쓴 거대한 혁신의 바람을 말하는 문화 양식이다 모더니티는 하나의 이상 ideal  인 동시에 현실이었고 과학 예술 경제 사상 가정 생활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영향을 끼쳤다 단순화시켜서 표현하자면 모더니티는 전통적인 양식에서 새로운 양식으로의 거대한 전환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티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이념 즉 모더니즘이다.10)

모더니티의 도래에 대한 가장 명쾌한 설명 중에 하나는 프랑스 역사가인 뽈 아자르Paul Hazard 에 의한 것이다 유럽의식의 위기 『The Crisis of the European Consciousness 』라는 책에서 그는 1680년 부터 1715년 사이에 유럽에서 일어난 중대한 변화들을 연구하였다.11) 아자르는 그 변화들의 공통된 특징을 안정에서 동요로 고전에서를 모던으로 정통에서 이단으로 라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그 시기에 합리주의 기적의 부정 경험주의 같은 생각들이 보편화되었을 뿐 아니라 근본적인 신앙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자르가 연구한 사람들은 그 당시 유명한 철학자들이나 과학자였다 그러나 그 연구를 이어 받은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일상적인 사회 생활의 영역까지 그 연구 범위를 넓혀나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를 통해서 생활의 사회적 측면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18세기에살롱에만 묶여있었던 것들이 19세기에 와서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렇다면 아자르가 주목한 모더니티의 정신성 즉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모더니즘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분석이 행해져왔다 그 중에서 클리버Lonnie Kliever 는 모더니티의 정신성을 주관성 보편성 편재성 이라는 세 범주를 가지고 설명한다.12) 나는 클리버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 하면서도 모더니즘이 가진 이원적(二元的)  인 특징을 강조하고 싶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상을 이원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우상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그 둘은 어떤 경우에는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개별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리차드 카이즈Richard B. Keyes  는 이러한 두 종류의 우상을 근신 과 원신 (近神 , nearby god) (遠神 ,faraway god)으로 표현하였다 사람들이 근신으로 섬기는 우상은 이사야 44장 10-20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금이나 돌로 만든 상(象 )이고 원신으로 섬기는 우상은 이사야 65장  11 절에서 나타난 행운 운명 과 같은 초월적인 개념들이다.13) 이러한 두 종류의 우상이 함께 등장하는 부분은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된 아테네에서의 바울의 설교이다 바울은 금이나 은이나 돌로 새긴 형상으로서의 우상 (근신) 뿐아니라 알지 못하는 신 (원신) 에게 바치는 제단도 있음을 지적한다.14) 개혁주의 기독교 철학 역시 이원론적이고 변증법적인 사고가 인본주의적세계관의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15) 코넬리우스 반틸도 무신론적 사고의 중요한요소 중에 하나로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의 긴장을 들었다.16)이처럼 모던적 사고를 떠바치는 하나의 기둥은 합리주의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것만이 지식으로 인정받는다 세상에 대한 지식은 모두 인간의 이성에 속하였고 이성만이 지식의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 또한 대부분의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지식을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여겨 진보progress  를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즉 이성이 세계를 더 자유롭게 파악하면 할수록 인간이 직면한 문제들은 하나 둘씩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뜻하지 않게 역사주의 17)를 낳고 만다.

첫번째 것과 정반대되는 모던적 사고의 두번째 기둥은 주관적인 자유 (비합리주의) 라고 할수 있다 인간은 과학이 적용되는 현상계phenomenal realm  이외의 또 하나의 영역 즉 종교적 도덕적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객관적인 지식을 판별하는 과학적 기준들은 이러한 본체적인noumenal 영역에 적용될 수 없으므로 인간은 비합리적인 비약을 통해서 이러한 영역에서 의미를 찾으려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로부터 개인주의에 대한 모던의 지나친 강조가 나온다 낭만주의 운동 역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합리성을 포기해야 된다는 이러한 사상에 크게 빚지고 있다 낭만주의에 있어 아름다운 것은 이성이아니라 예술 작품이며 그것은 비록 인간이 만들었지만 만든 자를 초월하여 인류를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두 기둥은 서로 융합되지 못한 채 함께 묶여져왔다 모더니티의 철학적 기원은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위에서 말한 모더니티의 변증법적 특징은 임마뉴엘 칸트에 이르러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보통 칸트를 가리켜 과학을 살린 동시에 종교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은 자라고 평가한다.18) 먼저 칸트는 자신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명명한 이론에서 흄에 의해 제기된 과학에 대한 회의를 극복한다 그는 과학을 단지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은 자료들의 합으로 보지 않고 자료들이 선험적인 감성과 오성에 의해 체계화되고 질서지워진 확실한 지식으로 과학을 국한시킨다 이러한 시도는 장차 변할 지도 모르는 개별적인 사건만을 제시하는 감각 경험에 선험적인 기초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도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칸트는 종교를19) 도덕을 위해서 반드시 존속되어야만 하는 실천적인 요청으로 봄으로써 아무런 논증도 거치지 않아도 되는 순수한 자유의 영역에 가져다 놓는다 이처럼 그는과학을 살리기 위해서 합리주의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나 종교에 대한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는 비합리적인 비약을 하는 것이다.20)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무신론적 사고에 깃든 이러한 변증법적 요소를 끄집어냄으로써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21) 따라서 칸트 이론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 세대를 향해 해줄 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칸트에 반대하거나 칸트에 동의하면서 철학을 할 수는 있어도 칸트 없이는 철학 할 수 없다는 말처럼 오늘날의 철학은 칸트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합리주의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인 요소를 모두 갖춘 변증법적인 사고는 칸트를 위시하여 가장 최근의 철학자에서까지 발견된다.

어떤 이는 합리주의적인 면에 치중하고 다른 이들은 비합리주의적인 부분을 더 강조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느 누구도 순전한 합리주의자요 완전한 비합리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다 합리주의는 항상 최초의 전제를 논의의 기초로 해야 하며 그 전제 역시 당연히 합리적인 것이어야하나 사실은 비합리적인 신뢰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찬가지로 비합리주의는 논의를 기술하는데 있어서까지도 비합리적인 방법을 따라야 하나 실제로는 자신의 논의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기술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입장에 일관되지 못함을 보여준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러한 측면에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그들은 확실하고 명료한 지식에 이르려면 철학적으로 의미 없는 명제들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두 가지 판단 기준 1) 명제를 구성하고 있는 단어의 의미를 통해서 명제의 참거짓이 드러나는 명제 (분석명제)22) 2) 감각 경험에 의해서 그 명제의 참 거짓이 드러나는 명제 (종합명제 )23)를 제시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존재하시가? 절대적인 도덕이 가능한가?와 같은 신학적 형이상학적 윤리적 명제들은 그 두 가지 기준 중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참도 거짓도 아닌 아무 의미 없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철학적으로 의미있는 명제는 분석명제이거나 감각 경험으로 증명되는 종합명제이다 라는 명제는 과연 어떤 종류의 명제인가?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이 명제 역시 분석명제도 증명 가능한 종합명제도 아니어서 아무 의미없는 주절거림일 뿐이다 이처럼 독단적이고 비합리적인 전제를 자신들의 논의의 기초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이 아닌 형용할 수 없는 체험의 상징으로 보는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의 이론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는 전문적인 철학자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문화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영화 감독 우디 앨런Woody Allen 의 예를 들어 보자 그의 필름에서는 대부분 두 가지 사실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즉 정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찾는 모습과 동시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자 순간적인 쾌락을 즐기고 삶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포기해버리는 모습이 공존한다 한나와 그 자매들 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신이 없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후 세계가 존재하는가 라는 심각한 질문을 해댄다 그는 이런 질문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훈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심각한 질문 일랑은 집어치우고 그냥 코믹영화나 보고 삶을 즐기자라는 식으로 바뀐다.

2. 모더니티의 사회적 측면
모더니티의 정신성 즉 모더니즘만큼 모더니티의 사회적 측면을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모더니티는 사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수용되었는데 여러가지 사회 제도나 현상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더니즘을 반영할 뿐 아니라 촉진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나는 그것들 중 다섯 가지를 간략히 언급한 뒤 여섯번째 것은 비교적 상세히 다룰 것이다

1) 첫번째는 자본주의 경제의 발생이다 이것은 개방 시장에서의 자유 경쟁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계층의 확대 사유 재산권의 보장등을 의미한다 2)두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기술과 산업의 발달이다 모던적 의미에서 이것은 생산량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늘릴 수 있는 도구와 기계의 사용을 의미한다  3) 빠른 통신수단의 발달도 들 수 있는데 전보 전화등의 의사 전달 수단과 사람들이 신속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 등은 과거의 통신 수단과 비교해 볼 때 질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4)이러한 현상들과 아울러 도시화 세계화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2세기 동안의 여러 통계 자료를 볼때 1800년대에 세계 인구의 5% 에 불과하던 도시 인구가 2000년 대에는  55% 까지 증가할 전망이다  5)다섯번째 모던적 현상으로 민주주의의 발달을 들을 수 있다 많은 나라에서 통치 권력은 계승되거나 소수 엘리트에 집중되지 않고 대표자들을 통해 직 간접적으로 국민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6) 여섯 번째 현상은 세속화 로 약간의 긴 설명이 필요하다 이 세속화secularization 라는 말은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번째로는 권력과 교회의 분리 혹은 국교폐지와 평신도 계층의 지위 상승이다 세속화의 이러한 측면은 때때로 정교 분리 laicisation라고 불려지곤 하였다 세속화라는 말이 가진 두 번째 의미는 삶에 질서를 부여했던 기독교 세계관의 쇠퇴 혹은 기독교 신앙의 상실을 뜻한다 이러한 개념은 세속주의secularism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며 오늘날 세속화라는 말은 주로 이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모더니티에있어 종교에 관한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세속화에관한 이야기이다 모던 시대에 세속화는 일반적으로 권력으로부터 교회가 분리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정교 분리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영국 의회의 성립과 같이 비교적 평화롭게 이루지기도 하였으나 프랑스 혁명처럼 폭력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속화의 첫번째 개념으로부터 논리상 신앙의 쇠퇴라는 결과가 당연히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치적인 연루에서 벗어난 교회는 일반인의 삶에 과거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세속화는 기독교를 모든 권위의 근원이라는 보좌에서 끄집어내려 사회의 제영역(諸領域 ) 중의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인해 종교는 점점 더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버렸고 더 이상 보편적인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속화를 이해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세속화가 언제나 신앙의 쇠퇴를 야기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 종류의 세속화는 필연적인 관련성이 없다 사람들은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모든 종류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반드시 쇠퇴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예상은 빗나가고 있다 세속화에 있어 주목할 만한 점은 여러 종류의 신앙이 부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버 Max. Weber 이후의 사회학자들은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는 종교와는 양립할 수 없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장 산업화된 나라 중에 하나인 미국의 예를 들자면 1930년대 이후, 현재까지 교회를 다니는 인구수는 미국 전체 인구의 약 42% 로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 오늘날 미국 인구 중 94% 가 신을 믿는다고 하였고  84%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사실을 인정하며  34% 이상이 자신은 거듭난 혹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25) 모던 사회에서는 이방적인 신앙 역시 번창하고 있다 또한 치료술 음식 요법 심령술 뉴에이지와 같은 유사 종교적 프로그램을 동반한 새로운 이단들이 속출하고 있다
어떻게 세속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종교가 더 부흥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할것이다 첫째 기술과 산업의 발달이라는 세속적인 흐름은 신비적인 것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영적인 진공 상태를 만들어 놓았다는 설명이다 둘째는 첫번째와는 반대로 기술의 발달이야말로 종교의 부흥에 있어 유일한 촉매제였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1970-80년대 근본주의자들이 복음 전도를 위해 TV와 같은 대중 매체를 적극 이용했다는 점을 볼 때 쉽게 이해가 된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모던 시대의 세속적인 상황에서는 본래적인 의미의 종교 뿐아니라, 사회주의 과학주의 인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도 종교처럼 신봉되었다는 점에서 종교의 부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26)

주의해야 할 두번째 사실은 서구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가 줄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각 나라마다 세속화의 과정은 매우 상이하게 진행되어 왔다는 점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마틴David Martin 은 27) A General Theology of Secularization에서 세속화 과정의 다양한 모습들을 연구해 놓았다 그는 크게 독점적 다원적 복합적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세속화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독점적 형태의 나라는 국가와 하나의 교회 일반적으로 그리이스 정교나 카톨릭 사이의 연합이 이루어진 곳이다 세속화가 닥쳤을 때 기독교에 대한 반대가 너무나 심해서 그 혁명적인 이념과 교회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문제가 해결된 경우이다 스페인이나 프랑스 러시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다원적인 형태는 어떤 하나의 종교만을 믿을 의무가 없는 나라이다.28) 이러한 곳에서 세속화란 종교 그 자체와는 그리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각 종파들과 교단들은 자유롭게 발전하게 된다 미국은 이러한 다원적 형태의 전형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것은 종교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묵시적으로 공인된 종교 (예를 들어 의회 내에서의 기도)가 있으며 이 종교가 문화를 세속화로부터 지키는데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복합적인 형태는 종교가 부분적으로 국가로 부터 국교로 인정을 받으나 부분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는 나라이다 영국이 이러한 나라이다 영국에서는 공인된 종교인 성공회가 세속화의 흐름을 저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형태의 변형으로는 마틴이 복점적 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즉 두 개의 공인된 종교가 존재하는 나라인데 화란과 아일랜드가 좋은 예이다 이 두 나라에 있어서는 작은 교회일수록 더 개혁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

3.모더니티의 기원
모더니티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우리는 폴 존슨Paul Johnson  의 견해를 따르려고 하는데, 그는 모더니티가 1815년부터 1830년까지 15년동안에 그 구체적인 모습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29) 이 기간 동안 삶의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그 시기는 뉴올린즈에서 앤드류 잭슨이 영국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으며, 웰링톤음 나폴레옹에 승리를 함으로써 시작되었고 그 세기의 나머지 기간 동안 빈체제가 유럽을 이끌어 갔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막강한 산업적 문화적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하였으며 미국에서는 서양문명이 틀을 잡아가기시작하였다 이 기간 동안 모더니티는 사회적 철학적 종교적 측면에서 주도권을 잡았던 것이다.

모더니티와 같은 불확실한 개념의 명확한 기원을 찾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는 상이한 입장에서 모더니티의 기원에 접근하려는 논의가 있다 예를 들어 여러 역사가들은 모더니티의 시작을 르네상스나 종교개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은 문화와 철학에 있어 중세의 신 중심적인 입장으로부터 탈피하여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하였기에 모더니즘 발생에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권위가 개인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자본주의 과학 민주주의와 같은 모던적 현상들이 야기되었다고 주장한다.

위와 같은 견해와 맥을 같이하는 입장으로는 종교개혁이 세속화를 가속시켰다는 이론이 있다 이 제 무덤 파는 자 이론에 따르면 종교개혁적 세계관의 세속적인 성격때문에 세상이 급속도로 세속화되었다는 것이다 십계명 중 제 2계명에 대한 엄격한 해석에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은 천상의 것에 대한 어떠한 모형도 이 지상에서는 허용하지 않았고 이러한 입장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 근대 과학의 발달 개인의 자유의 신장 등을 가져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종교의 자유는 종교로부터의 자유로 근대과학은 과학주의로 개인의 자유는 개인의 자율로 각각 극단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모더니티의 부수적인 조건은 될 수 있을망정 근본적인원인으로 까지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있어서도 인간에 대한 강조가 있었으나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이지 (특히 종교개혁에 있어서) 신본주의적 세계관을 뒤집어 놓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앞의 제 무덤 파는 자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주목해야했을 점은 18 19세기의 사상이 종교개혁과는 달리 근거 없는 이성의 자율성30)을 너무 맹신 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이 원하던 바는 질서와 권위의 파괴가 아니라 성경적 진리로의 복귀였다 이런의미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한 종교개혁은 일종의 보수적인 운동이라고까지 말할수 있다.31)

따라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모더니티의 간접적인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직접적인 원인은 17 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9 세기에 이르러 문화적 사회적 현실이 되어버린 유럽 의식의 위기 였다 모더니티의 중심되는 주제는 초월에서 내재로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제 삶을 질서 지우는 원칙에 있어 인간적인 것들이 신적인 것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모더니티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놓았는가? 모더니티의 미래는 어떠한가? 오늘날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모더니티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두 부류를 각각 살펴봄에 따라 . 구체화 될 것이다 모더니티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첫번째 부류의 입장은 오늘날 여러가지 모더니티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모더니티의 기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입장이다 두번째는 모더니티는 이제 그 힘이 다했고 모더니티의 기획에 대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난 지 오래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제 우리는 이 두 부류의 입장을 각각 살펴볼 것이다

4. 모더니티의 기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오늘날 모더니티에 대해서는 수 많은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오스 기니스는 말하기를 모더니티라는 개념은 너무나 복잡해서 한 권의 책으로 혹은 하나의 관점에서 그 개념이 가진 여러 내적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지만 이 개념의 복잡성과 그 복잡성으로 인해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모더니티에 관한 논의를 아주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아서는 안 된다 라는 점도 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32) 모더니티를 평가하고 그것이 가진 본질적인 특징과 피상적인 현상을 구별하여 모더니티의 앞날을 예측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필요한 작업이다.

많은 사상가들이 모더니티의 기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들의 대부분은 모더니티의 구조는 우리 삶에 너무나 깊숙히 뿌리박혀 있어서 쉽사리 뽑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를 들어 피터 버거Peter Berger  는 모더니티를 숙명에서 선택으로의 운동 이라는 긍정적인 정의를 내린다 즉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계층과 전통에 의해 숙명지어졌지만 모던 시대에는 자신이 직접 내린 선택에 의해 삶을 형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빠른 통신 수단 교통 수단과 같은 기술 역시 이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버거는 오늘날 인간의 삶에서 기술이 갖는 필요성과 중요성을 감안해 볼 때 이 운동은 쉽사리 반전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다니엘벨Daniel Bell 과 같은 신보수주의자들은 모더니티가 현재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 경제적 합리성 절제 인내 등의 가치를 기저로하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기본적으로 건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문제점은 여러 문화적 영역에서 비판 정신과 자유가 과도하게 남용되어서 학문이 진보하기보다는 그라마톨로지33)와 해체의 기획에 말려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34)

앨런 블룸Allen Bloom  은 미국 정신의 종말『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 에서 드 수자 Dinesh D'Souza 는 편협한 교육『 illiberal Education 』 에서 좀 완화된 어조이긴 하지만 벨과 마찬가지로 모더니티 구조는 계속해서 존속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주로 모던적 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것이다.35) 블룸은 오늘날의 대학들이 모더니티를 송두리채 부정하고 있는 현재의 기류에 편승하여 서구의 건전한 정신을 팔아먹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몽주의란 정치적이고 정신적인 삶 모두를 철학과 과학의 후견 아래에 놓으려는 가장 과감한 시도이다 라고 평가하면서 대학이 이러한 시도를 고양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대학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문화적 위기 상황이라는것이다 블룸은 우리 시대가 표현주의와 상상력으로 이성을 대신하고 관능의 힘으로 절제라는 덕을 대치하고 있다고 말한다 드 수자 는 자신의 책에서 현재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 유행하고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politically correct’ 36)이라는 운동은 합리성에 반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와 대학의 존재 목적을 파괴시킬 지도 모를 위협이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블룸과 드 수자 모두 계몽주의야말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라는 전제 하에 현재의 문화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37)에서 볼 수 있는 후쿠야마의 견해는 한층 더 놀랍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최근 들어와 조금 누그러뜨리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그 이론의 기본적인 틀에는 큰 변함이 없다 1989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획기적인 사건들이 의미하는 바는 공산주의가 완전히 몰락했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인류가 역사의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탱하고 있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최후의 정부 형태이고 온 세계가 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인류의 진화에 있어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미국적 낙관론과도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기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38)

모더니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더욱 체계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거를 가지고 펼치는 자들은 비판 이론 학자들이다 하버마스 Jürgen Habermas 아펠Karl Otto Apel 골드버거Paul Goldberger 같은 철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모더니티의 기획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좋은 것들을 캐낼 수 있는 보고(寶庫 )  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베버Max Weber의 논의를 계승하면서 사회적 영역들의 다양한 분화인 합리화 는 인간의 해방과  문화의 발달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는 역설적으로 인간소외 억압 물상화 같은 병리 와 비합리화 를 수반한다고 보았다

그 이유로 그들은 본래적으로 이성은 효과적인 수단의 측량과 함께 목표의 정당성도 따지는 포괄적 이성이었으나 모던의 합리화 과정에서 이성은 그 본질적 포괄성을 상실하고 단지 도구적 이성으로 변질되어 목표에 대한 자기비판과 성찰이라는 고유 임무를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도구적인 이성만의 강조가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전체주의 시대를 배태했다고 보고 이성의 본래적인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야 말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임을 강조하면서 이성의 도구적인 측면(과학 기술)과 규범적이고(윤리,그들의 계획에 의하면 정치 까지도) 해방적인 (미학) 측면사이의 결합을 시도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신보수주의자들의 오류는 자본주의의 선한 면과 자본주의 문화의 악한 면을 분리해서 생각했다는 점이다 특별히 그들은 종교로의 회귀를 통해 문화의 회복을 꾀했다는 점에서 크게 잘못되었고 한다 하버마스는 여러 학자들이 모더니티란 우리 사회의 의사 소통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39) 매우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모던적 문화에 대한 염려없이 모더니티를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여전히 모더니티에 머물면서 모더니티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자족적인 이성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해석학(의사 소통적 이성)이 해방적 이성에 의해 올바르게 이끌려 질 때 최고의 사회 비판 방법으로서 사용되어질 수 있다고 한다 참된 인간 해방을 위하여 우리는 해석학을 이용해 단순한 시장 경제와 정치적 통제를 넘어서 더욱 문화적으로 바람직한 사회를 향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40) 이처럼 하버마스는 오늘날의 병리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모더니티를 내팽겨치는 것이 아니라 모더니티의 기획을 완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술과 같은 모더니티의 중요한 요소는 사회적 합의라는 방법으로 책임있게 사용되는 한 여전히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5.모더니티의 기획은 끝장났다 .
모더니티를 앞의 경우와 다르게 평가하는 부류는 모더니티의 근본적인 명맥이 유지될 수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모더니티가 품었던 기획은 이제 미궁에 빠져 버렸고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해 주는 단어가 바로 포스트모던41)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란 광범위하게는 사상계의 새로운 조류를 총칭하는 말인데 그 중에는 그럴 듯한 주장이 있는가 하면 황당무개한 것도 있다 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의 주 활동무대가 대학이고 그중에서도 인문과학 분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이 철저하게 학문적인 것만도 아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함의 역시 학문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 모더니티와 모더니즘과의 구분을 꾀했던 것처럼 포스트모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분 역시 가능하다 그렇지만 전자의 경우와는 달리 후자는 단순히 시대와 정신성 (이념)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것 보다는 일반적인 상황 (포스트모던) 과 그런 상황들을 규정지어 놓은 것 (포스트모더니즘) 이라고 구별할 수는 있겠으나 사실 둘 간의 차이는 미미하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을 정의하는 데에는 몇 가지 아이러니컬한 점들이 뒤따른다 우선 포스트모던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 어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나중과 지금이라는 단어가 성립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박할 수 있을 만큼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문제시되는 것은 지금 contemporaneity이 아니라 . 바로 모더니티modernity 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아이러니컬한 점은 다음과 같다 어떤 면에서보면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는 실존주의 표현주의 등과 같이 논의에 앞서 그 개념을 규정해야만 하는 모호하고 광범위한 용어이므로 모더니즘의 핵심 무정형성 유동성 을 표현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그 단어의 모호성은 그것을 일관되게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라는 점이다.
 어원적인 분석이 우리에게 포스트모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어근으로부터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도출해 낼 수 있다 즉 모더니티의 기획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이 포스트모던이 가진 최소한의 의미라는 점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 역시 모더니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용어의 기원을 연구해서는 별 다른 수확을 얻기가 힘들 것이다.42)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이 관련된 여러 영역 중에 지표가 되는 두 가지 영역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이다 우리가 살필 첫번째 지표는 건축이다 건축은 여러 예술 분야 중에서 가장 쉽게 일반인의 눈에 드러나는 양식이다 서구 사람들은 모더니티의 경험을 대담하게 건축으로 표현하였는데 1919년에 독일에 설립된 바우하우스 Bauhaus43)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건축가들의 활동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시각 예술 분야에서 바우하우스가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바우하우스 학파의 모더니스트 건축가 중 세 명의 선구자는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앙리 르 꼬르뷔지에 Henri Le Corbusier,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였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건축은 사용된 재료면에서나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것 이어야만 했다 즉 건축물 자체와 내부 가구들 도색 작업 등이 전통적인 양식과는 달리 실용성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르 꼬르뷔지에가 말한 "집은 살기위한 기계이다 Une maison est une machine à habiter”44)에서 우리는 그 당시 건축의 경향 (기능성의 과도한 강조)을 읽을 수 있다 이제 건축의 미는 그 건물의 장식이나 상징적인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물 자체에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엔지니어가 진정한 예술가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러한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의 주장은 유토피아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창한 바우하우스 선언Bauhaus Manifesto 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우리 다같이 새로운 미래의 예술을 바라고 꿈꾸고 창조해 냅시다 그것은 건축과 조각 회화 모두를 하나로 아우를 것이며 훗날 수백만의 사람들의 손에 들려져서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45)

건축의 영향을 받아 여러 문화 영역에서 기능주의를 주조로 하는 국제주의 양식 International Style’46)이 그 발전 토대를 미국에 내리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거대 도시들은 대부분 모더니즘의 양식을 따른 네모반듯한 건물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가 그러한 철학을 극단화시킨 대표적인 건축가이다 이와 같은 모더니스트 건축의 눈에 띄는 획일성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그 반작용 역시 미국을 필두로 해서 일어난다 로버트 벤추리Robert Venturi 한스 홀라인Hans Hollein,찰스 무어Charles Moore 를 비롯한 많은 건축가들은 포스트모던적 입장을 취하 게 되었다 자신의 책 『포스트모더니즘 』에서 스스로를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 사용의 선구자라고 지칭47)한 찰스 젠크스의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중요한 건축물들이 모더니즘에게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인간적인 온기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기능주의적 건물에서 머물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모더니스트 적 건축은 1968년에 운명을 달리했으며 1972년에는 그 징후로 두 개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물이 자연 붕괴와 폭파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모던적 건물들의 붕괴와 더불어 우리가 당면한 사회 문제들을 테크놀로지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떠난 텅빈 자리를 과연 무엇이 채울 수 있단 말인가? 환영 과 무지목매함의 암흑 속에 갇혀 있던 모던 이전 시대로 회귀할 리는 만무했다 찰스 젠크스는 그 자리에 ‘ 이중 코딩- (double-coding)’  을 추천하고 나선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을 뒤이어 등장한 건축양식은 단순히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대체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실제 그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안락함(편리함)과 유희적(익살스러운) 요소를 동시에 주기 위해서 모더니스트적 건축의 기능성과 그 외의 다른 요소들 예를 들어 고전적인 건축 양식에서 인용해 온 요소들 의 조합을 꾀했다 모더니즘을 떠나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다원적인 양식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48)

이제 주도적으로 군림하는 건축 유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모던한 건축이 자족성(自足性 ) 을 기본 원리로 해서 일관된 양식을 추구했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은 다양한 의미와 상징들을 건축에 담아 퍼뜨리려고 한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건물들이 뉴욕에 있는 AT &T 건물과 뉴저지주 프린스톤에 있는 고든 뷔 식당 Gordon Wu Dining Hall49)이다 AT & T건물의 아래 부분은 인터네셔널 스타일인데 반해 지붕은 로코코 양식으로 되어 있고 고든 뷔 식당은 서리아나 Serliana50)양식을 도입하였다.51)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가장 탁월한 예로 손꼽히는 건물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네우 슈타츠 미술관 Neue Staatsgalerie 이다 이 건축물의 중심부는 18세기적인 석조건물인데 반해 건물의 테두리는 빨간색 철골 구조가 둘러치고 있으며 이 철골 테두리 외에도 코믹한 터치가 두 부분에서 나타나는데 건물 측면의 벽에 마치 이빨이 빠진 것처럼 구멍을 뚫어놓은 것과 건물 외부에 입방형 철골 구조로된 원시오두막 형태의 택시승강장이 그것이다.52)
 어떤 면에서 보면 건축에 있어서 위와 같은 조류는 단순한 절충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좀 더 깊게 파고 들어가 보면 위에서 살펴본 이중 코딩 양식은 단일한 의미나 단일한 질서가 가능하다는 모던적 사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적인 모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고이다 일관된 진리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모더니즘의 근거 없는 주장들을 거부한 데 대해 찬사를 보내야 한다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한 순수한 기능성에 기초한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합리주의자들의 기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모더니스트들의 부정적인 것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면서 긍정적인 것들까지 통째로 내버렸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차가운 합리주의 대신 낙관적 비합리주의를 취한 것 뿐이었다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다룰 내용을 약간만 언급해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모더니티가 가진 합리주의 비합리주의 딜레마를 극복해 내지 못했다.

포스트모던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펴볼 두번째 지표는 이 글의 첫부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장 프랑스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정보 사회에서의 지식의 위상』이다 퀘백 정부 산하 대학 정책 자문 위원회의 요청으로 제출한 이 책은 제목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커다란 파급 효과를 끼쳤다 그 이유로 우리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이 책이 당시 문화의 주된 흐름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음과 동시에 그러한 흐름을 확산시키는 도화선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다른 선구자인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이 앞의 책을 영어로 옮긴 번역본 서문에서 제시한 것으로서 리오타르의 책이 여러 영역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포스트모던 논의의 교차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리오타르의 책이 미국에 일으킨 반향 역시 그 책에 담긴 논의가 과학 기술 지식의 통제 등 여러 영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점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책의 논지는 한마디로 우리가 더 이상 거대 이야기 metanarrative(le grand récit)’53)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던 이전의 사람들은 지식의 정당성을 이야기 를 통해 획득하였다.54) 그러나 지식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이야기와 정당화 사이의 관계를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예를 들어 과학적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제 이야기에 호소할 수 없고 자신의 주장을 실험을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모던 시대가 자기 정당화라는 원시적이고 권위적인 이야기 구조로부터 탈피해 객관적인 기준들에 의해 지식의 정당성을 확보하였으므로 한층 진보한 것 같았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던 시대의 지식 역시 이야기 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예를 들어 모던 시대를 탄생시킨 과학적 방법론은 온 우주를 지으신 합리적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야기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은 계몽주의의 이념인 진보 이성의 빛을 통해 모든 억압으로부터 인류의 해방55) 이라는 거대 이야기 속으로 통합되고 체계화 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리오타르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 년동안 그 진보 라는 모던적 거대 이야기는 신뢰를 상실했다고 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야기들은 힘을 잃어왔고 다른 새로운 이야기들에 의해 계속해서 교체되어 왔기 때문에 모던 사회를 정당화 시켜온 거대 이야기가 이제 그 힘을 상실하고 다른 거대 이야기에 의해 대체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거대 이야기의 전이轉移 가 아니라 거대 이야기 자체의 몰락沒落 이라는 점에서 과거와는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한다 이제 여러 상이한 이야기들을 체계화 시켜주고 통합시켜줄 거대이야기가 없어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급속도로 진전된 과학의 과도한 분화와 생태학적 문제 의식은 이러한 상황을 알리는 전조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거대 이야기라는 중심이나 총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은 채 서로 이질적인 상태로 공존하는 작은 이야기들의 장場에 서 있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한 개념을 인용해서 상이한 각각의 이야기들을 언어게임linguistic doing’56)으로 이해한다.57)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통합해 온 거대이야기의 위엄과 작별하고 분화된 작은 이야기가 자율성을 만끽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58) 거대 이야기가 사라진 지금 과학 역시 통제되기 어렵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학술적인 토론 등으로 보편적인 합의에 이르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리오타르는 오히려 현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 한다 이제 과학은 보편적인 합리성이나 진리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실용성이나 힘의 논리에 의해 조작될 위험에 처해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과학은 이제야 비로서 상상력의 자유를 획득했다고도 할 수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사고 양식이라고 알려진 배리성 (背理性 , paralogy)’ 59)을 이용하여 우리는 이성을 전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새로운 탐구의 장을 개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거대 이야기가 아닌 작은 이야기 를 통해 우리는 전체주의적 지식의 테러 에서 벗어나서 지역적이고 제한된 계약의 한계 내에서 미시적인 언어 게임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지표 즉 새로운 건축양식과 리오타르의 책은 우리에게 포스트모던의 긍정적인 면 뿐아니라 문제점까지도 제시해 준다 포스트모던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요인은 아무래도 학문적인 연구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포스트모던이 학문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포스트모던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는 그 흔적을 다양한 영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우선 포스트모던 록 음악의 등장이그 예이다.60)

또한 심슨네 가족들 The Simpsons 나 비비스와 버트헤드Beavis and Butthead’  같은 TV만화는 포스트모던 건축 양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중 코딩 요소를 보여준다 포스트모던의 학문적인 내용과 일반문화의 상호 관계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첫째 그 둘 사이에는 삼투압 현상같은 효과가 있었다 즉 포스트모던 학자들이 강의한 내용은 그 강의를 들은 학생들에 의해 널리 퍼져나가고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 둘은 특별한 인과관계 없이 나란히 발전해 나간 경우도 있었다 포스트모던의 학문적인 요소는 일반 문화로서의 포스트모던을 위한 풍향계로 작용했을지는 모르나 양자는 서로 분리된 상태로 각각 발전해 나가기도 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사이에서 일어난 학문적인 논의야말로 포스트모던적 상황을 이해하기위한 핵심 요소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중 일부는 우리 시대를 가장 암울한 시기라고 평가할만큼 극도로 회의적인 사람들이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사상을 이어받은 그들은 오늘날과 같이 파편화된 시대 속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진리 대신에 찰나적인 통찰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 역시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으로 취할수 있는 것은 실용성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독자들을 매혹시켰던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의 이론을 받아들여 순간적인 쾌락만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유일한 위안이라고 본다.61) 이와 달리 우리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있다 그들은 포스트모던을 여성이나 소수에게 행해졌던 억압 같은 과거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긴다.62)

많은 신학자들이 포스트모던 이론을 나름대로의 목적에 따라 이용해왔다 마크 테일러Mark Taylor 는 조물주 피조물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이원론 을 배격한 무신론적 신학을 주장한다 그는 신학이란 상징적 이해를 통해 드러난 상대적 진리를 기반으로 해야한다고 말한다.63) 존 밀뱅크John Milbank  는 사회비평에 포스트모던과 기독교 모두를 이용하려 든다 .그는 포스트모던 분석은 실증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전통 사회학 이론의 오류를 바로 잡는데 유용하다고 보았으며 기독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자기 모순성과 거대이야기의 부정으로 인해 차이 만이 존재하게된 포스트모던 사회의 통합과 조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64)

알렌Diogenes Allen  오든 Thomas Oden 과 같은 신학자나 월쉬 Brian Walsh같은 기독교 철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복음전도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알렌은 흄이나 칸트 같은 모던 시대의 정적 들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제사람들은 다른 종교와 세계 전반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65)

위에서 언급한 오든은 자유주의적 배경으로부터 복음적인 신앙으로 돌아선 사람이다 그는역사를 모던 이전 시대 정통주의 모던 시대 정통주의로부터 이탈 포스트모던 시대 정통주의의 회복 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은 모던 시대를 자율적인 이성 세속화 뿐아니라 이와 병행해서 일어난 신학적 오류들 즉 형식뿐인 경건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탈신화화 등으로 얼룩진 시기로 보는 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오든은 포스트모던 시대야말로 정통주의를 회복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본다.66) 월쉬는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포스트모던 상황이야말로 기독교 세계관을 재조명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한다.67)

6. 우리 시대를 위한 복음 전도
모더니티에 대한 상이한 평가들에 직면하여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우기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철학적 난제들을 모두 해결할만한 만능열쇠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현 상황의 복잡성을 인식하면서도 우리는 이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관통하는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제 앞에서 살펴본 모더니티를 바라보는 두 부류의 입장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를 각각 살핀 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보도록하자.

첫째 모더니티의 기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입장을 취하는 자들의 주장은 많은 부분 설득력이 있다 나 역시 모더니티의 몇몇 특징들은 우리 삶에 너무 깊히 뿌리 박혀있어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자본주의 기술 빠른 통신 도시화와 같은 사회적 현상들은 그것들이 비록 중립적인 것은 아니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혹독한 비난과 모더니티 내에서의 비판적 반성에도 불구하고 쉽게 뒤집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구조적인측면에서 볼 때 모던 사회에 살고 있고 이 사실은 가까운 장래에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68) 그러나 모더니티에 대한 신보수주의자들의 접근은 몇 가지 기본적인 면에 있어서 오류가 있다 우선 그들은 모더니티 내의 다양한 부분들 사이의 구조적인 관련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다니엘 벨은 특별한 이유 없이 자본주의 사회와 그 문화적 위기를 자꾸 분리해서 생각하려 한다 개인주의 쾌락주의 소비주의 자본주의 인종 차별 등은 계몽주의의 자율적인 철학과 깊숙히 연관되어 있다 그것들은 합리주의라는 우상의 어두운 측면인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 스미스에 의해 주창된 자유 시장 기능을 가진 순수한 자본주의는 늘 보아왔던 것처럼 필연적으로 작업 환경 부의 분배 인종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의 왜곡을 가져온다 하층민이나 가난한 자들은 자본주의의 적자생존원리 속에서는 성공할가치도 없는 자들로 여겨지는 것이다.

앨런 블룸과 드 수자의 대학에 대한 비판에 관해서는 첫째로 그들이 대학의 현 상황을 너무 과장하였고 둘째로 그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 역시 타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대학의 퇴조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가능한 한 대학의 현 상황을 조심스럽게 살필 필요가 있다 방송국이 마련한 그 유명한 토론회 . PBC에서 토론자들은 두 편 즉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라는 운동이 오늘날 대학가에 만연해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으로 나누어졌다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보수주의자들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더우기 신보수주의자들은 인권의 신장과 소수 보호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진 진정한 진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대학의 교과과정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들은 서구 문명의 협소한 경쟁의식을 바로잡는데 기여하고 있다.

신보수주의자들의 오해의 뿌리는 고등 교육에 대한 계몽주의 프로그램을 너무 과신했다는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오늘날 모더니티의 이념 중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인 인간의 자족적 자율적인 이성 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다 비판 이론은 신보수주의자들처럼 경제 구조와 문화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 외에도 우리는 그들에게서 몇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버마스는 우리에게 이성과 의사소통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측면을 보게 해 준다 우리가 이 점을 인식할 때 모던적인 생활 양식 특히 모던적 개인주의가 지닌 문제점들을 더 자세히 발견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69)와 함께 시작된 모더니즘은 주체와 도구적이성을 너무 강조한 결과 우리의 생활 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지화70)되어버렸고 언어 행위즉 의사소통은 비특권 계층을 억압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왜곡되어져 왔다는 그의 지적은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은 세 가지 유형을 가진 이성의 회복71)을 그 식민지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의 이론적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독단적이고 비합리적인 왜곡을 막을 방도를 찾지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성이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을 기초를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초월적인 출발점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72) 즉 이성이 사회 비판에 유용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상황을 온전히 알고 계신 분의 말씀 즉 계시에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와 함께 역사는 그 마지막 단계에 다다를 것이라는 후쿠야마식의 종말론 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3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이 있다 첫째 공산주의라는 표지를 떼버린 전체주의 국가들은 자국내에서 공산화 전부터 있어 왔던 민족들 간의 국지전을 부활시켰다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는 황금시대로 이어지기는 커녕 거꾸로 빈 협약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있는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권위주의적인 가치와 결합되고 있다 누가 자유 민주주의가 그러한 통치권의 독단적인 행사와 양립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세째 이 종말론은  역사의 진정한 마지막이 그리스도의 재림 parousia으로 장식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 때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이 식어가는 이 세상에 도적같이 오실 것이다.

모더니티의 기획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여러 학자들은 모더니티가 가진 장점을 잘 지적해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더니티의 치명적인 오류 즉 주관적 자유(비합리주의)와 합리주의의  공존이라는 변증법적 긴장관계를 간과하고 있다 모더니티의 많은 혜택에도 불구하고 이 변증법적 독소는 모든 영역 곳곳에 퍼져있다 기독교적 기반 없이는 모더니티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신보수주의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계시에 기초를 둔 정통 기독교가 아닌 자연 신학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73)

둘째 우리 시대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평가 역시 수긍이 가는 점이 많다 계몽주의는 많은 위험을 내포한 기획이라는 주장은 사실이다 절대적인 가치와 높은 수준을 지향했던 과거에 대한 신보수주의자들의 향수를 이해못할 바 아니지만 우리는 옥석 을 가려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모더니티가 종교개혁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그 영양분을 공급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좋은 열매를 안겨주었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세속화  (두번째 의미의 세속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 영양 공급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합리주의 비합리주의의 변증법적 사고가 흉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아우슈비츠는 계몽주의의 교만함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문제는 모더니즘을 떠나 새로운 곳을 개척하겠다는 자신들의주장과는 반대로 여전히 모더니즘의 틀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모더니티의 특징 중 하나인 자율적인 사유 라는 근거없는 전제가 모더니티를 비판하고 배척하려는 바로 그 시도에서 조차 발견되는 것은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이다.
아무리 극단적이고 회의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라 할지라도 스스로가 배척한 바로 그 기준들에 무의식적으로 호소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크리스토퍼 노리스Christopher Norris 는 “이론이란 단지 개인적 선호를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다” 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 스탠리 휫시 Stanely Fish 같은 사람도 그 자신의 개인적 선호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74) 이성과 자유라는 변증법적 구조는 깊은 차원에서의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는 극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건데 초월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히 합리적이신 분75)이시고 인간의 지식이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변증법적 미궁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철학적 근본 오류는 리오타르의 거대 이야기는 더 이상 가능하지않다 라는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이론은 사실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의 현혹적인 합리주의로부터의 해방 제국주의적 문화의 굴레로부터의 자유 모더니즘의 끈질긴 간섭으로부터의 탈출을 보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는 순전한 차이 의 자유를 아무런 제한 없이 구가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76) 그러나 이러한 리오타르의 이론은 특히 과학적 측면에서여러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이제까지 과학이 우리 생활의 모든 방면에서 헤게모니를 잡아왔다는 문제제기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 이야기의 부정으로 각 과학 이론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언어 놀이 규칙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학술적 토론으로 보편적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검증 혹은 반증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졌다.77) 이제는 역설적인 담론이 난무하는 무정부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독단적인 과학적 보편주의와 무정부 상태 중 양자 택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리오타르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거대 이야기를 부정하려는 자신의 주장 역시 또 하나의 거대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순은 리오타르가 모던 시대에는 모든 지식이 거대 이야기를 통해 정당화 되었고 인류 를 비극으로 이끈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주의 경제이론도 거대 이야기이다 라고 싸잡아 말한 부분을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78) 그는 우리는 “전체성과 보편성에 대항해서 싸워야한다” 고 말하지 않았던가 ?  그의 자유로운 언어 게임에는 신보수주의자들의 도덕적 문화적 자유 시장 체제79)로 돌아가려는 숨은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것이다.80)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모더니티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공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은 항상 있어왔다.81) 낭만주의 운동도 어떤 의미에서는 반 모던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낭만주의는 산업화와 차가운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수행한 것이었다.82) 니체 역시 반모더니즘의 기수였다 서구의 몰락을 보기위해서 우리는 아우슈비츠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지금 포스트모던이라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라기 보다 예전부터 존재해 온 회의적인 반 모던적 혹은 초 모던적 사상을 과도하게 경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있어 또 하나의 문제는 그들이 모더니티의 획일성 전체성 을 비판하면서도 되려 자신들은 모더니티를 너무 단순화 시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더니티는 획일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또는 거부되어야할 단순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더니티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긍정적인 측면 또한무시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옥 과 석 을 조심스레 골라내야 한다 이 글의 앞 부분에서 나열한 모더니티의 여러 사회적인 측면은 혼합된 축복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 도시화 기술 등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리라 믿었던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라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모더니티가 만들어낸 민주적 자유 경제 체제 의학 을 모두 다 내버릴 진정한 용기가 있을까?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던적 가치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개인주의의 남용이 가져 온 폐혜를 올바로 인식해야하지만 동시에 주체와 이성에 대한 강조가 지닌 장점도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에 천부적인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가진 해방된 존재라는 인간관은 이전 시대의 계급적 계층적인 인간관에 비해서 확실히 발전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성에 관해서도 우리는 앨런 블룸이 오늘날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루소Rousseau 적 이성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계시에 의존된 올바른 이성의 사용은 우리의 지식의 중요한 원천이라는 점을 알아야한다.83)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는 말이 그 권위를 잃고 이미지와 감정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오늘날 사람들은 중요한 물음 들은 물으려 하지 않고 ’ 오히려 안락함만을 위해 싸구려 철학이나 기복적 종교에 안주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들을 위한 우리의 전도 방법은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문화적 뿌리를 통찰하고 있는 것이어야 하고 지금 구체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뒷받침된 것이어야 한다.

7. 결론
우리는 모더니티를 바라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들에게 새롭게 기대할 만한 것 이 있는가 모더니티의 기획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제시한 기초위에서는 비록 거기에 합리성과 자유라는 교의doctrine 가 있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진전이란 있을 수 없다 진보와 발전은 튼튼한 기초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첫째로 진보에 관한 계몽주의의 허구적 전제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 않고 둘째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자각 없이는 진정한 소망이란 없다 모더니티의 철저한 배격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우리가 새롭게 기대할 만한 것 이란 없다 아니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르면 새롭게 기대할 만한 것 이란 그 자체로 거부되어야할 모더니즘의 교의이다 그들에게 새로운 것 기대할 만한 것 이란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되는 개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새롭게 기대할 것 이 없는 상태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좋다 나쁘다라는 것은 초월적인 개념이 아니던가?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신의 틀 속에서 새롭게 기대할 것 이 없는 상태를 좋다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이그렇게도 버리기 원했던 바로 그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나는 포스트모던적인 현 상황을 모더니티보다는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데 훨씬 더 좋은 기회라고 여기는 알렌Diogenes Allen 오든Thomas Oden 월쉬Brian Walsh  같은 사람들만큼 낙관적이지 않다 논의를 위해서 모더니티의 시대는 물 건너갔고 자율적인 이성의 시대는 종식됐다고 가정할 지라도 파편화되고 상대주의적인 포스트모던 세계는 계몽주의 만큼이나 복음에 대해서 유익하지 못하다.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 모두에게 우리가 제시해야만 하는 것은 철저하게 성경적인 입장이다 즉 첫번째로 해 아래에는 새로운 것 이란 없다는 사실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모더니스트들이 건설하려는 유토피아적 사회와 문화는 그것들을 해체하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시도만큼이나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둘째로 바로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야 말로 소망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대할 만한 것이란 해 아래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만이 우리는 새롭게 기대할 만한 것 을 찾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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